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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성(2004-01-09 16:03:48, Hit : 3344, Vote : 648
 해방되던 해

이야기 마당


해방되던 해
안 병 무


8.15는 우리에게 밤중에 도적 같이 온 셈이다. 반백년 목덜미를 잡고 마음대로 하던 일제가 그렇게 하루 아침에 쓰러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때를 한두 해 앞만 내다보는 눈이 있었으면 그렇게 많은 변절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제가 항복했다! 천황이 항복하는 방송을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
그때 나는 간도 용정시에서 10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농촌에 잠복해서 교회를 돕고 있었다. 학병을 피해서 북만에 가 숨었다가 기운이 심상치 않아 만주족 틈에 그대로 있다가는 보복이라도 당할까봐 위험을 무릅쓰고 전부터 인연이 있던 이 시골에 기어들어 그 곳 작은 교회의 신자들의 두터운 보호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라디오로 해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아서 시내로 달려가서 어른들, 친구들을 만나서 정말인 것을 확인하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면서 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만세! 만세! 만세! 졸속하게 그린 태극기를 들고 흰 옷을 입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연거푸 불렀다. 그런데 그런 흥분이 아직 고조되기도 전에 일본관동군이 중무장한 채 간도로 집결한다는 소문과 함께 저들이 난사할 수 있으니 모두 집으로 숨으라는 전갈이 루머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와 모두 꼼짝 못하고 집에 숨어지냈던 어처구니 없는 몇 날이 있었다.
얼마 후 소련군이 진주한다고 해서 어디서 얻어 들은 ‘우라 소비에트 졸다트’라는 현수막을 써서 신작로에 아치처럼 세우고 동리 사람들을 모두 동원해서 노변으로 나오게 했다. 모두 나들이옷으로 갈아입었는데, 특히 여인들은 시집 갈 때나 입는 예쁜 옷들을 입고 ‘우라! 우라!’ 하면서 지나가는 소련군을 해방시켜 준 연합군으로 맞았다.
그랬는데 바로 그날 밤에 이놈들이 패가 되어 우리 마을을 습격했는데 그것은 ‘여인사냥’이 목적이었다. 이로부터 주야로 불안하여, 밤이면 남자들은 모두 동원되어 철야하고 여인들은 일부 곡식 밭에 숨지 않으면 남복을 하고 남자들 틈에 끼게 하고, 또 집에서 집으로 밧줄을 연결하고 그 줄에 깡통을 있는 대로 달았다. 그것은 저들이 야습하는 경우 어느쪽에서나 연락할 수 있는 신호망이었다. 그래서 겁많은 그 놈들을 쫓은 일도 있었으나 한국의 딸이 꼼짝없이 저들의 야욕의 밥이 되는 것을 보면서도 어처구니 없는 눈을 감아버려야 하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래서 해방의 기쁨은 공포의 나날이 되었다. 이런 한스러운 팔자를 어떻게 표현할까. 차라리 일본놈을 다시 부르고 싶다는 말은 차마 하지는 못해도 속에서 굴뚝같이 일고 있은 가슴도 많았으리라.
얼마 후에는 팔로군에 속했던 조선군들이 진주해 온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졌다. 팔로군이 무엇인지 알 까닭이 있나? 그저 일본군과 싸우는 중국군인 줄만 알았고 그것에 속했던 조선군이란 독립군인 줄만 알았지! 그런데 이런 소문과 더불어 뜻밖의 지령이 내려왔다. 그것은 태극기를 게양해서는 안 되고 붉은 기를 달라는 것이 아닌가! 그뿐인가! 애국가도 부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발표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되었다. 해방의 기쁨으로, 내가 역시 해방과 더불어 교편을 잡은 어떤 중학생들이 학예회를 시공관에서 하는데 연극을 주로 하게 됐다. 그 각본을 나더러 쓰라고 해서 학병을 중심한 자주적 해방이란 가상적인 내용이었는데 곧 인민자치 위원회라든가 하는 데 불려가서 호되게 당하고 그 내용의 시정을 강요당했는데, 요는 언제 자주적 해방을 했느냐, 소비에트군이 해방시킨 게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학생의 혈기로 그 주장에 승복하지 않으려다가 모욕도 당하고 결국 ‘분노’라고 했던 제목도 ‘서광’이라고 바꾸고 내용도 잘리고 만 일이 있다. 이렇게 해방의 기쁨을 불과 몇 날 만끽했을 뿐 그후부터는 계속 달라지는 먹구름만 두터워져 울분만 터뜨리다가 결국은 체포령이 내렸다는 소식을 누가 친절히 전해 주어, 밤중에 부모들과 형제, 그외 몇 사람과 더불어 도주해서 두만강을 건너야만 했다.
이것은 간도라는 한 지역에서 겪은 일이지만 한국 전역의 분위기도 양상은 달랐으나 비슷했다. 해방의 기쁨은 두터운 먹구름 사이로 잠깐 나타난 햇빛 같은 것이었다.
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했을 때 한국 땅에 71만 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다. 저들은 우리 민족의 고혈로 살찐 빈대 같은 자들이었다. 당시 총독부 정무총감 원등이 여운형에게 치안을 부탁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일본인 보호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여운형은 건준을 만들고 보안대를 만들어 이제 해방의 기쁨과 새 나라 창조의 첫 발을 내딛으려고 언론기관의 접수에서부터 착수했다. 얼마나 신나는 순간이냐! 우리 민족은 우리를 해방시킨 미군을 환영할 준비와 대대적인 축제로 한을 풀 준비를 했다. 그러나 현실은 숨이 콱콱 막힐 정도로 어처구니없이 돌아갔다.
우선 일본인들의 3천여 착취기관에서 저들의 죄상을 적은 비밀문서들이 소각되거나 일본에 빼돌려지고 있었다. 1,141개의 이른바 신궁, 신사가 한국인의 손에서가 아니라 일본인들에 의해 승신식이라는 날조된 귀신 장난으로 이행됐다.
원등의 교섭이 있은 다음 날, 일본군이 이에 반하여 이른바 정치운동단속요령을 마련했고 ‘관내 일반민중에게 고함’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는데, 그 포고문 중에는 ‘민심을 교란하고 조금이라도 치안을 해치는 일이 있다면 군은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말이 있고, 18일 일본군은 방송으로 ‘치안을 해치려는 비적적 행위를 하는 자들이 있다. 조선군(일본군)은 엄연히 건재하다. 만약 그 비를 깨닫지 못한다면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단호히 무력을 행하지 않을 수 없음은 전 일본군 당국의 발표에 의해서 명백하다’ 이런 따위의 폭언이 패잔병들에 의해서 공공연히 내뱉어졌으니 가슴이 터질 일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다. 일본군은 완전무장한 채 경찰·신문사를 접수하고 군인들이 경찰관으로 둔갑해서 군림하고 한국인들의 모든 정치단체의 해체를 강요했다.
8월 20일 해방된 지 5일이 되던 날에는, 자칭 호선병단장이란 자가 다음과 같은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1. 종주권이 넘겨질 때까지 조선은 황토이며, 조선인민은 황민이다. 마땅히 성지를 받들고 황국신민의 서약을 낭창하고 평정한 속에서 임해야 한다.
2. 독립운동은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 국기 게양을 엄금한다.
3. 치안유지를 위한 단체결성을 인정치 않는다.

지금 읽어도 가슴이 미어진다. 그뿐인가! 일본인들은 그때 (8. 18) 내지인 세화회라는 것도 만들었다. 일본인도 아니고 내지인이다. 아직도 저들이 지배 족속이란 말이다.
우리는 미국 진주를 개벽의 날처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9월 8일에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우리는 서러움과 이제 올 기쁨에 부푼 마음으로 저들을 영접할 준비에 바빴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인가! 우리를 해방시켰다고 믿은 미군이 한국 사람들의 영접을 거부하고 총독부 잔당들만 상대하지 않는가! 인천의 일본인 경찰서는 미군의 지시에 따라서 특정 직업 외의 사람의 외출금지 그리고 환영행사는 금지한다고 발표하지 않는가! 그래도 몰려든 우리 민족이 일본인의 총에 두 사람이나 죽었다.
이럴 수 있는 전조는 이미 있었다. 9월 2일에 하지 중장은 한국 진주에 앞서 공중 살포한 전단에서 ‘민중에 대한 포고 및 여러 명령을 현존하는 여러 기관을 통해 공포한다.’고 발표했다. 현존기관이란 바로 일본놈의 착취기구인 것이다.
그 다음날 일본군 이름으로 저들이 치안 행정권 행사를 계속한다는 발표를 했다. 그리고 9월 6일 미국 선발대가 조선호텔에 도착했는데, 한국인을 상대로 하지 않고 영어에 능하다는 소전이라는 자를 찾아서 그를 통역으로 삼았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런 모든 태도가 일본에서 일본인에 의해 받은 한국인에 대한 그릇된 정보와 판단에 의한 어처구니 없는 결론에서 온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50년 간 우리의 세계를 가로막고 우리 민족을 자치불능이라고 선전해 거의 야만인의 인상을 주어 왔는데 최후에 이르도록 그 같이 악랄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눈이 어두운 미국이기에 그 같은 군정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한 번 걸림 없이 크게 웃어 보지 못한 민족이다. 왜 이때 그날의 그 정상을 회상해야만 하는가! 언제 한 번 온 민족이 함께 앙천대소할 것인가? 그날이 언제 올까? 분단의 비극이 막을 내릴 때가 아닐까. 그렇다, 그때다. 그런데 그것도 우리 힘으로 이루었을 때만 가능하지 남의 손에 의해 주어지면 절대로 파안대소는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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