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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소(2004-01-09 16:12:06, Hit : 5733, Vote : 606
 그리스도교와 생명

그리스도교와 생명

안병무


전제

필자가 그리스도교라고 할 때는 그레꼬 로마 사회에 흡수되어 변질된 서구 전통의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성서에 기반을 둔 자주적인 그리스도교를 말한다.
성서는 그 형성 기간이 천여년이나 되었고 그 형성에 외적 조건이 다양했기 때문에 어떤 문제에 있어서나 일괄적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짧은 글을 쓰는 데 있어서는 주관적 선택이 불가피하다.

성서는 ‘무엇’의 대상이 아니고 ‘어떻게’의 대상이다
성서는 대상을 본체론적(What)으로 추구하지 않고 관계적(How)으로 본다. 그러므로 생명 자체에 대한 정의는 찾을 수 없다.
서구 사상과 서구 기독교에 결정적 역할을 준 희랍 철학의 주류는 존재하는 것의 본체를 불로 보았다. 제우스의 아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갖다 준 죄로 혹독한 처형을 당하는 얘기는 인간의 역사가 불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잘 설명한다. 성서에는 이에 해당되는 정의가 없다. 까닭은 역시 본체론적인 것에 흥미가 없기 때문이다.
성서는 신이 만물을 창조했다는 기본 전제를 갖고 있다. 따라서 생명도 신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관심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나 생명을 상징하는 개념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물’과 ‘기’(氣)이다. 따라서 이 개념들을 더듬어 보면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생명과 물

성서의 첫 장인 창세기를 열면 첫 면에 생명이 무엇이라는 말 대신에 창조 설화가 나온다. 모든 것이 존재하기 이전은 혼돈 그 자체로 되어 있다. 다음에 존재 역사에 막을 여는 것은 물이다. 이 물의 작용으로 하늘과 땅이 구별되고 해와 달이 생성되며 땅의 성격이 제정된다. 창세기 1장 1절에 “하나님의 영(기)은 물 속에 움직이고 계셨다”고 했고, 6절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물 가운데서 창공에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 하니 육지가 생겼다 한다. 즉 물의 움직임으로 지구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을 빼고 존재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동시에 물은 존재하는 것의 일차적인 존재 근거다.
그 다음에는 이른바 에덴 낙원이 서술된다. 그런데 거기서 주목되는 것은 모든 생물들의 생태를 말하는 것이다.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 나왔다. 에덴의 강은 세 줄기로 갈라졌다. 비손, 기혼, 티클리스`…`강들의 원천이다.” 한 마디로 옛 동산은 물의 본원지라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모든 생물의 근원지라는 묘사이다. 강이 있는 곳에 생물이 생성할 수 있다. 그것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지구에 모든 생물이 지구 자체를 포함해서 70%이상의 물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셋째, 인간의 역사가 전개된다. 유목 민족으로 저 조상들은 전 세계에 살 만한 땅을 찾아 배회한다. 지세가 적당하면 맨 처음으로 하는 일이 우물을 파는 일이다. 이것은 곧 생존을 위한 일차적인 작업이다. 끝끝내 파는 우물에 물이 나오지 않으면 아무리 지형이 좋아도 거기서 살 수는 없다. 저들은 물이 솟아나는 땅을 향해 끝없는 유랑을 해야만 했다. 우물이 생기면 그것을 중심으로 종족간의 싸움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생존권을 위한 싸움이다. 반면에 우물을 양도하면 그 관계는 친척 이상의 친밀한 사이가 된다. 다른 목적으로 그 우물을 두고 다른 지역으로 유랑할 때는 그 우물터를 돌로 쌓아 성지로 표시하고 떠난다. 그래서 우물과 성지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히브리 종족의 역사는 출애굽 사건에서 시작한다. 모세라는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그들의 삶의 영원한 정착지 팔레스틴을 향해서 떠나간다. 노예에서 해방된 저들은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알기 때문에 일치 단결하여 그 행렬에 참가했다. 그러나 지도층과 민(民) 사이에 대충돌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물 때문이다. 그들이 간 길은 사막과 같이 땅을 파도 물이 안 나오는 그런 지역이었는데, 물이 가장 중시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마침내 목마른 저들은 그의 해방자 모세에게 저항했다. 이 정당한 주장을 알고 있는 모세는 신에게 반항한다.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여기까지 끌고 왔으면 우리를 살려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물을 주소서.” 이같은 내용의 기도와 더불어 그가 들고 가던 지팡이로 바위를 때리니 생명수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고 한다. 이것이 민(民)들이 다시 결속한 중요한 사건으로 등장한다.
물은 단지 생물적 욕구의 충족만을 지켜 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 생활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이런 전통이 오늘날도 한낮 전설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지금도 저들은 자신들의 조상 야곱의 우물이 건재하다고 믿고 있다.
성서의 맨끝 책인 묵시록은 어쩌면 이 책의 결론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창세기가 전승될 때와 묵시록이 기록될 때에 시대적인 역사적인 변천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변했으며 따라서 거의 유비할 만한 것이 없는데도 단 하나 일관된 사실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물이다. 묵시록은 묵시문학파에서 받은 영향으로 그 본거지가 중동 일대에서 인도로 그리고 인도의 일부는 알렉산더 대왕 시대의 영향으로 유럽의 일단과 접하는 역사를 가졌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모르나 저들은 모든 생존의 근원을 불로 보았다. 거기에 근원을 둔 성서의 묵시록에도 불의 역할이 대단한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묵시록에 있어서의 불은 역사의 종말과 깊은 관계가 있다. 모든 낡은 것의 종말을 가져오는데 불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이런 심판의 과정을 거치면서 뜻밖의 약속이 있다. 이 마지막 책에서도 결국 물과 생명을 직결시켜 “생명나무”가 중심에 있을 것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지리라는 것인데,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목마른 사람에게는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고 하는가 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사람의 눈에 생명의 강이 보였다. 그 강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와서 도시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흘렀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내고…”(22:2)라고 한다. 그것은 마지막 장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서술하고 마침내 “다 이루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내가 생명수 샘물을 거저 마시게 하겠다”(21:6)는 장엄한 약속으로 끝을 맺는다.
성서는 생명과 물의 관계를 일찍부터 통찰했으며 그것을 축소시키면 ‘생명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전통을 가진 그리스도교의 신약성서 중 특히 요한복음에는 예수가 생명의 물을 주기 위해서 온 이로 묘사되고 있으며 한번 마시면 속에서 영원히 갈하지 않는 생수가 솟게 하는 이로 묘사되어 있으며 그 입을 통해서 모든 인간이 와서 이 생명의 샘을 마시라고 외친다.

생명과 ‘기’(氣)

물이 없이 생명이 성립되지 않는 것처럼 또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대두된다. 맨 처음 창세기 첫 장에 물위에 하나님의 기운(영혼)이 온 우주를 배회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출발부터 기와 물은 상관관계에 있다. 이 사이에서 인간이 태어난 것이다. 신이 인간을 만들 때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빚고 거기에 신의 기, 루아흐(Ruach)를 불어넣었더니 비로소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신은 곧 기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들리나 인간은 이미 기(氣)적인 생물이기 때문에 기성(氣性)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후에 그것이 분화되어 신의 기, 사람의 기로 구분되어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점차적으로 신과 인간 또는 자연과의 관계를 잇는 신에 속한 중개물로 강조되므로 신이 인간과 자연을 지배하는 구체적인 에너지로 표현하는 경우가 큰 무게를 가지고 발전한다. 그것을 일러서 번역성서에는 성령이라고 한다. 성령이 성서의 기본사상을 저해하는 소극적인 요소를 많이 가졌지만 그 본래의 뜻과 기능은 우주가 존재하는 데 절대불가분의 것이다.
그후의 구체적인 이야기는 에스겔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나오는 재미있는 발상을 제공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모두 타락하고 외세의 침략을 받아 살아 있으나 해골과 같이 된 환상을 본 에스겔에게 신이 나타나 그의 ‘루아흐’를 그 시체 위에 불게 했더니 말랐던 그 시체들이 핏줄을 잇고 살이 붙고 힘을 얻어 일어날 뿐 아니라 무장을 하고 일군의 군대가 되어 전열을 정비하는 광경이 나타났다. 죽었던 사람들이, 아니 민족이 하나님의 ‘루아흐’에 의해서 살아날 뿐 아니라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이른바 신의 사람들이라는 사람들을 위시해서 구약성서 도처에 어떤 계기에 특유한 공헌을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신의 ‘루아흐’를 활용함으로 가능하다.
‘루아흐’는 우리말로 ‘숨’이라고도 번역되고 바람이라는 말의 근원을 가졌고 힘, 즉 에너지란 뜻도 된다. 그런데 어떤 과정에서 그 개념이 ‘영’으로 번역됐는지는 불문에 붙이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불행한 일이다. 까닭은 영이라고 하면 인간의 한 부분을 표시하는 데 그치는 데 대하여 ‘기’라고 하면 인간 자체만 아니라 직접 자연과도 연계되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루아흐’는 신약에 와서 희랍어로 ‘프뉴마’라고 번역되는데 그 의미는 똑같다.
기(성령)의 역할은 세상이 타락하고 복잡해질수록 점점 더 의미를 갖게 된다.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집단으로, 한 사건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 통체적으로 기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본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도 예수가 역사의 존재로 사라짐과 동시에 그의 역할을 대신해서 또는 그의 힘을 대리해서 성령 또는 기가 등장한다. 부활한 예수란 결국 “내가 너희들에게 기를 불어주리라”는 것으로 집약된다. 이대로 해석하면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기를 받은 사람들이어야 한다. 거기에서 믿음이 있고 사랑이 있고 희망이 생겨난다.
신약성서에서 보면, 기를 ‘보혜사’라는 다른 명칭을 주고 그가 예수 대신 세상에 충만하여 인간을 이끌어 갈 것이라는 예언을 예수가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배후를 가졌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인에게는 이른바 성령이라는 것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서 부정과 긍정의 역할을 한다. 기를 피안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기가 인간을 신의 영역에로 이동시키는 결정적인 힘의 이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는 기독교 안에 잠재해 들어온 기복사상에도 동원된다. 그러나 원래의 뜻은 생명에 대한 표시인 것이다. 흙에 하나님의 기가 합해지므로 생명이 탄생했다. 인간은 그러므로 기를 빼면 동물적 힘과 본능 영역을 전혀 넘어설 수 없다. 그러므로 기는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절대 요소다. 이것은 동양에나 우리 민속 종교에 있어서 믿는 것과 그렇게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동양적인 사고에 있어서 기는 우주 속에 충만하다. 천신(天神)·천기(天氣)·지기(地氣), 그 사이에 인기(人氣)가 있다. 이 사람의 기가 노동을 통해서 천기와 지기를 교류시켜 모든 생물을 생산하고 보존한다. 예로부터 고대 종교에는 그 수준이야 문화적인 측면에서 높든지 낮든지간에 토템과 타부의 흔적이 있는데 그것은 기를 위하는 태도에 따라서 결정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에 대한 신념이 기존적인 것들의 전반에 대한 또는 어떤 부분에 대한 혁명을 가져오는데 막대한 역할을 했다. 기는 일단 체제와 상반된다. 필요한 제도 그것이 도덕적인 데서 법에 이르기까지 비록 필요불가결하여 만든 것이나 그것이 성립된 후에는 절대권을 주장하므로 기득권자들은 그것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기존적인 것의 보존을 꾀한다. 관례가 생기고 불문(不文)의 계율들이 무수히 있어 그것이 기득권자들에게 민(民)을 통치하는 무기 역할을 할 때 이것을 저항할 힘은 오직 기(氣)에만 있다. 기는 결국 사람을 구속하고 역사를 구속하는 모든 기존적인 것에 대한 타파를 필요로 할 때 중요한 무기가 된다. 기독교 자체 안에서도 그것이 부패의 극을 달렸을 때 이에 저항하는 세력이 봉기할 때에는 기(성령)를 높이 내세웠다. 그러므로 기는 사람에게 언제나 가능성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희망과 힘을 주지만 그것이 기존 질서에 눌려버릴 때 인간은 꼼짝없이 기득권에 눌려 사는 길밖에 없다.

자연과 공존하는 생명의 존재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곧 피조물도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령의 처음 열매를 가진 우리 자신들도 속으로 신음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삼으시고 우리의 몸을 온전히 속량해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롬 8:20 3).
2천년 전에 환경에 관련해서 이렇게 구체적이고 심각한 문제 제기와 방향을 말한 텍스트는 달리 찾을 데가 없을 것이다. 성서 자체에서도 이 말은 분출된 상아탑과 같은 것이다.
이 텍스트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몇 강조점을 찾아 낼 수 있다. 첫째, 피조물 즉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은 허무한 것(虛)에 굴복해 있다는 것이다. 자연이 밖으로부터 억누르는 것에 포로가 되어 신음하고 있다는 말이다. 자연 자체가 그대로의 자기 발휘를 못하고 억제를 받으므로 자기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인식은 근본적으로 환경학에서 예민하게 판단하는 것과 같다. 오늘의 환경의 문제는 생태적 파괴에 있다고 한다. 생태적 파괴란 결국 자연이 삶의 질서가 깨졌다는 말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알고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파괴한 원인도 있지만 낡은 도덕적 가치나 인간의 소유욕, 법률, 또는 인위적으로 형성된 가치 속에서 자연을 교란한 데 원인이 있다. 환경이라는 말 자체가 뜻하듯이 비록 자연을 존중한다고는 하나 중심은 인간이고 그것은 들러리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즉 인간 중심주의가 자연을 멸시 내지 무시함으로 온 자연 질서의 파괴이다.
이 본문은 서구에서 변질된 기독교만이 아니라 성서 안의 많은 부분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셈이다. 서구인들이 기독교를 앞세우고 세계 정복을 나섰을 때 바로 그 정복이라는 것이 생의 목적이고 보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도 정복의 도구로 이용됐다. 자연만이 정복의 대상인 것이 아니라 타민족도 정복의 대상이고 그 민족들에게 속한 땅을 위시한 자연도 그리고 그들의 문화까지도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다. 저들은 성서에서 집단적인 공존을 개인으로 환원시켜서 개인주의를 극도로 발달시킴으로 마침내 철저한 자기 중심주의에 빠져버렸다.
A는 A다. A는 B일수 없다. 따라서 B도 A일수 없다는 논리가 절대 작용을 함으로 공존의 가능성을 애초에 깨버렸다.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묵시문학을 도입하였고, 그것을 악용함으로 이원론을 극대화했다. 정복을 악마와의 싸움으로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모르는 동안 정복하는 자체를 천사의 자리에 놓은 것이다. 이 극단의 이원론은 영원히 마주칠 수 없는 평행선을 그어 대립과 투쟁과 마침내 전쟁을 연속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자연이 총동원되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더불어 사는 길을 사랑으로 파악하고 너를 살림으로 내가 살 수 있다는 극히 자연스러운 윤리적 바탕을 깔고 있는 성서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부분들이 완전히 무시당해 왔다. 저 유명한 산상수훈이나(마 5) 바울의 사랑의 찬가(고전 13) 등이 사실상 완전히 소외되어 왔다.
자연은 그 자체가 목적을 갖고 있다. 생태계란 바로 생존하는 것의 상호 생존에 필요한 것을 교환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한다. 그런데 그것이 다 깨지므로 모두가 더불어 허무한 데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자연은 방향 감각을 잃었다. 목적이 없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고 누구에 의해서인지도 모르게 계속 변질되고 위치가 바뀌고 체질이 달라졌다. 그러나 무엇에 누구에 의해서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을 옳게 파악하지 못한 폭군화된 인간들이 하는 일이다. 여기서 다음에 말의 의미가 부각된다.
둘째가 자연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진심으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를 우리는 종교적인 특수 존재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권력욕이나 물질독점을 위해 자연을 계속 유린한 것이 낡은 인간이다. 여기에 대해서 자연은 이와 대치되는 어떤 다른 힘이나 구조가 와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살 수 있다는 인식을 분명히 가진 인간의 출현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어떤 외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을 인식하고 환경의 부패로 썩어가는 지구를 구함으로써만 살 수 있다는 확고한 인식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그런 사람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새 사람들과 더불어 공존할 때만 자연이 허무한 데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만물을 인간과 공존할 때만 자기를 찾을 수 있다고 하는 분명한 생각, 만물이 정복의 대상이거나 순수 이용물이 아니라 삶의 동반자라는 것을 인식하는 새 인간, 그들만이 생명의 존재로 지구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다.
(살림 97년 7월호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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