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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소(2004-01-09 16:12:50, Hit : 5395, Vote : 606
 민중신학의 새 지평

민중신학의 새 지평
─동양사상과의 대화를 통하여


안병무

I. 민중

1. 민중신학의 길
먼저 나는 민중을 만난 나의 경험의 한 경우를 말하겠다. 예수를 알게 된 이후 나에게 비교적 일찍부터 극히 어렴풋하게나마 민중과 예수를 한 울타리에서 상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용도 목사 계열에서 나오는 『예수』라는 잡지에서 반영된 ‘눈물의 예수’, 성 프란시스코에 관한 글들에서 나타난 철저히 가난한 예수, 그리고 누가복음에 처음부터 등장하는, 철저히 무시당하고 인간 사회에서 소외된 상태에서의 예수의 출생과 그 현장에 대한 깊은 인상, 또한 교회에서 거의 매년 상영하는, 이집트 땅에서 착취당하고 수탈당하는 히브리인의 처지와 그들을 해방하려는 모세의 이야기 … 등을 소년기에 접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내의 분위기가, 비록 실천에 옮겨지지 않은 것일지라도, 민중적 분위기를 계속 예민한 소년에게 주입시켰다. 고향 땅을 잃어버리고 아무 목표도 없이 남부여대(男賦女戴)하고 황야와 같은 만주땅으로 밤길을 도망치다시피 넘어와 철저히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눈은 죽지 않아 또렷또렷하고, 반짝반짝하던 조선사람들, 낮이면 일본군 또는 만주관권의 분위기에 있으나, 해만 지면 온동네가 호롱불을 켜고 독립운동, 게릴라전, 공산주의, 제국주의, 식민주의 등, 소년의 귀에는 생소한 말들을 밤 깊게 나누며, 모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방금이라도 칼을 들고 나가 피를 쏟고 들어올 것 같은 기세, 이런 것들이 내게는 뭉뚱그려져 민중에 대한 적어도 감성적인 이해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저들이 누굴까? 밤중에 우리 집에 들어와 어머니의 손으로 지은 밥을 허겁지겁 먹으면서도 연방 한 손에 든 총을 매만지던 독립군이란 저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생각과 교회에서 얻은 이런 연상들이 뒤엉켜서 내 뇌리에 파묻힌 채 오래 잠들고 있었다.
이에 나는 마가복음 8장에 나오는 소경이 눈뜨는 기사를 내가 당한 일처럼 골똘히 생각하고 읽은 일이 있다. 예수가 한 소경의 눈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 물었다. ‘무엇이 보이느냐? ‘지나가는 것들이 걸어가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다시 그의 눈을 어루만진 예수가 거듭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을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참 사람이 보인다고 했다.
나는 이 기사를 읽고 민중의 대열은 전진하는데, 그리고 나는 거듭 민중의 보무당당한 발소리를 듣는데 그 민중을 볼 눈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소년 시대의 상황에서, 소경이 내 눈을 어루만진 그 첫손이 되어, 민중이 걸어가는 나무 정도로 보였던 것 같은데, 그 인식은 도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긴긴 세월을 거쳐, 1970년대의 한국 역사의 수레바퀴에 끼여 신음하는 민중의 소리가 예수의 손이 되어 내 눈을 어루만졌을 때, 나는 걸어가는 나무가 아닌 사람으로서 민중을 만났다.
언젠가부터 나는 가끔씩 생각한다. 왜 눈을 뜨게 된 그 소경이 무엇이 보이느냐는 질문에 바로 그 앞에 선 눈을 뜨게 한 그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을까? 동시에 또 하나의 질문은 그 소경에게 묻는 그이가 왜 ‘내가 보이느냐’고 묻지 않았을까? ‘나를 똑바로 보아라, 내가 누군지’ 하는 설명까지도 할 법한 현장이었는데, 그는 자신에 대해서 일체 말하지 않고 그저 집으로 돌아가라고만 한다.
그래서 지금은 눈을 뜬 소경이나 눈을 뜨게 한 그가 둘이 아니고 민중이라는 이름 아래 계속 하나로 명멸한다.

2. 거리에서 만난 예수
내 일생의 소원은 역사상에 우리처럼 살아 있던 예수를 아는 일이었다. 학문적으로는 역사의 예수 추구라 해서 역사의 예수에 관한 모든 문헌을 내  손이 미치는 대로 탐독했다.
거의 유일한 자료라고 하는 공관서를 몇 백, 몇 천번씩 고쳐 읽고 분해하기를 거듭했고, 일찍부터 희랍어를 공부해서 원어로 읽는 데까지는 갔으나, 예수의 본래 말인 아람어로 예수의 말을 바꿀 능력이 없어서 애가 탔다. 그의 모어가 영원히 사라지고 희랍어로 쓰여졌다는 것은 내게 가장 슬픈 일 가운데 하나였다.
독일에 갔을 때는 신약학에서 역사의 예수를 묻는 것은 거의 금기시 되어 있었다. 홍수같이 쏟아지던 역사의 예수 문서가 갑자기 정지된 것은 불트만의 『예수』라는 짤막한 책이 나온 것과 관련이 있다. 그후 약 30여년간 학문을 한다는 사람들의 손으로는 예수에 관한 책이 거의 쓰여지지 않았다.
1954년에 이에 불만을 가진 그의 제자들이 반론을 펴기 시작했다. 그후 다시 역사의 예수에 대한 논의가 등장했으나, 단순히 문헌상으로 역사의 예수를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장과, 신약은 케리그마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역사의 예수를 묻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은 불신앙이라고까지 하는 단호함에 대해 단연 반론을 펴야할 내게는 묘안이 없었다.
나는 그 와중에서 일생에 이 주제만은 끝끝내 관철하려고 했으나 그들이 내세운 방법론이나 해석학의 틀에 있는 한 이 염원은 오히려 날이 갈수록 멀어져만 갔다. 10년 공부 나무아미타불로 돌아온 나는, 얼마 동안 내 자신의 어떤 신념도 없이 저들의 학설에 편승하고, 서구 신학의 영역에서 헤엄치며, 그것을 팔아 밥을 먹는, 떨떠름한 생활을 계속했다. 한 마디로 나는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신학을 해 온 것이다. 나는 서구 신학사를 ‘예수 없는 기독교’(Christianity without Jesus)라고 단정하고 공격해 왔지만 귀국 후의 학문적 작업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3. 전태일 사건을 만나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 사건은 이한열 피살 사건으로 이어져 그 사이에 죽임당한 사건이 문서상으로만 50건이나 되었다. 음독, 투신, 할복, 동맥 절단 등으로 25명이 자살했으며, 분신 자살이 15명, 박종철 같이 고문으로 죽은 사람과 의문사로 죽은 사람이 22명이나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1970년에 일어난 노동운동이 165건이고 1971년에는 1656건으로 확산되었고, 이로 인해 기독교계에서 1971년 9월에 수도권도시빈민선교회를 창설하고 이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인권위원회 등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전태일을 시작으로 일어난 이 민중 사건이 가을 숲에 타오르는 불처럼 강렬하게 확산되는 것을 보았으며, 눈은 안 가려졌으나 눈을 뜨지 못한, 근대화라는 이름 밑에 색맹이 되어 있던 사람들의 일부가 눈을 뜨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나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둘째는 이 민중의 행렬은 바로 순교자의 행렬이었다. 그리스도교에는 이미 순교자의 역사가 없어졌는데 이것이 마침내 한국의 거리에서 이어진 것이다.
세째, 바로 이 거리에서, 이 순교자의 행렬 맨 앞에서 나는 그토록 애타게 학문적으로 찾던 예수를 처음 만났다. 예수의 현존의 장은 교회도 신학도 아닌 바로 수난의 현장이었다.
네째, 그런데 나는 이 민중사에서 단속적인 맥(脈)을 보았다. 그것은 각기 일회적인 특유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사건과 사건 사이에 연대가 있었다.
끝으로 중요한 것은 민중신학은 이 시대를 정치적 탄압의 시대로 파악했기 때문에 정치적 행태와 긴장 관계에 있었고 모든 것을 그 눈으로 보고 성격화했다는 점이다.

II. 말의 지평을 넘어서

그러나 1990년대를 넘어오면서 민중의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민중의 시대가 끝났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현정부가 문민정부로 불리면서 국민들이 이제는 정치적 탄압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소련이 붕괴되고 사회주의 세계가 몰락하면서 마르크시즘적 민중 운동도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셋째는, 그 동안의 경제 성장으로 인해 민중도 이제는 어느 정도 배가 불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넷째는, 국경없는 무한 경쟁 시대가 되면서 강자, 엘리트만이 살 권리가 있고 약자는 생존권마저 억눌리는 것이 당연한 듯이 세뇌되었다. 따라서 이제 민중에 대한 이해는 정치적 억압의 문제만이 아니라 총체적인 인식을 하지 않으면 바로 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앞으로의 시대는 문화의 시대라고 하는데 잘못하면 우리는 서양의 소비 문화에 완전히 예속당하게 된다. 서구에는 미래가 없다. 그런데도 1등, 1등 하면서 서양을 쫓아간다. 이 과정에서 민중은 철저히 소외되고 있다. 거대한 산업구조, 정보구조, 군사시설 등이 가속화하는 속도의 시대에서 몇 사람만이 살아 남고 그 나머지는 다 관심 밖으로 내몰아버리는 이 판에 누가 민중의 시대는 끝났다고 하는가.
이런 민중의 상황과 관련하여 나는 이 자리에서 민중신학의 새 지평으로 크게 두가지 방향만을 제시하겠다. 그것은 너무나 원칙적인 것이기에 현대인이 등한히 하고, 등한히 하는 동안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이다.
첫째는 ‘상’(常)의 역할이다. ‘상’이란 상식, 상습의 상으로 언제나 반복되는 것이다. 유교에는 ‘상’은 일월(日月), 성진(星辰)이라고도 한다. 해와 달은 별들처럼 항상 제 궤도를 돈다. 5상지도(五常之道)라고도 한다. 그것은 바로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이 언제나 변함없이 순환할 때 세상은 본래의 길을 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가야할 길을 예외없이, 속이지 않고, 쉬지 않고, 돌아가는 사람을 상도지인(常道之人)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상’은 모든 존재의 근거다. 그것없이 세상은 돌아갈 수 없다. 만일 ‘상’이 반란을 일으키면 순간 그것을 전제로 한 것이 다 폭삭 내려앉는다. 그러나 이 ‘상’이 놀랍게도 사람의 사고에서나 일상 생활에서 멸시 내지 망각되고 있다.
사람이 사는 데 숨은 ‘상’이다. 숨이 끊어지면 그 순간 사람은 없다. 그러나 평상시 숨을 잊고 살듯이 세상이 그것 없이는 지탱될 수 없는 ‘상’을 멸시하거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밥 먹고 똥 싸는 것이 반복되는 것은 ‘상’이다. 쌀 수 있어 먹을 수 있다. 그런데 먹는 데 도취하는 사람들은 똥구멍이 있어 먹고 숨쉬는 일이 가능한 것을 잊을 뿐 아니라 그것을 부끄러움의 대상으로 여겨 가리고 산다.
그런데 가장 ‘상’의 원 모습대로 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이다. 춘하추동 사시사철이 언제나 돌아간다. 농부란 바로 이 ‘상’의 구현체며 그는 땅에 목숨을 걸고 노동하며 산다. 따라서 동양의 가치관은 모두 이 자연관찰에서 얻은 것이다. 인간의 사는 도리의 원바탕도 자연이다. 농부의 바탕도 바로 땅인 것이다.
‘상’은 말이 없다. 움직일 따름이다. 농부도 말의 족속이 아니라 땅을 파고 파종하고 그것을 햇빛과 땅의 습도로 조종하여 생명을 생산해 내는 조화자(造化者)다. 그래서 농부는 상인(常人) 중의 상인(常人)이다. 하늘, 땅, 사람, 이렇게 합쳐서 역사를 창조해 나갔다. 문화(Culture)는 농경문화(Agriculture)에서 나온 것이다. 농민은 문화의 창조자이며, 말로써가 아니라 삶으로써 조화(造化)를 일으킨다.
그런데 이 ‘상’을 높이 받든 것이 도교다. 노자는 도덕경 1장에서 상도(常道)라는 말을 쓰는데 28장에서도 또 한번 분명히 한다. ‘상’은 언제나 있는 것, 그러므로 또한 영원히 있는 것이다. ‘상’은 ‘구’(久)이다. 그러나 바로 이 ‘상’을 무시하고 1등, 빨리, 효율 등만 외치다가 성수대교를 만들었다. 만일 그 책임의 장본인들은 그렇게 두고 송사리떼만 괴롭히다가 그 다리를 실질적으로 만드는 ‘상’이 반란하면 어찌하겠는가? 자연은 ‘상’인데 그것을 정복의 대상으로 마구 파헤친 결과가 어디로 가고 있나?둘째로 ‘상’은 말이 없다. 여기서 말의 지평을 넘어선 현실과 관련이 있다. 기독교는 말의 종교이다. 그 종교는 오늘의 종말 현상에 책임이 있다. 말은 말을 낳는다. 말을 바로 잡기 위해 말을 쓰면 말만 는다. 지금 수 많은 교회에서 쏟아지는 말을 생각해 보라. 소음 외에 남는 게 무엇인가? 서구적 기독교는 말 못하는 것은 모두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다. 기독교는 신도 말의 영역에 끌어들였다. 그러기 위해서 신과 자연을 분리시켰다. 신은 말하는 실재, 자연은 말없는 현실이다. 그리하여 신은 인격으로, 자연은 무인격으로 형상화되었다. 인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Persona’인데 곧 마스크란 뜻이다. 자연의 한 부분에 마스크를 씌우면서 말의 영역에로 끌어 들였다. 그리고 유신론을 만들어 내고, 자연을 경외하는 모든 형태를 범신론이니 물활론이니 해서 저주했다. 또한 민족들의 종교 행위는 모두 미신이라는 딱지를 붙여 추방하려 했다.
그러나 말의 영역은 너무도 좁다. 조그마한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말로는 표현할수 없어”, “표현할 적당한 말이 없어” 하는 판에 그래도 하느님이라고 하면서 말의 영역에 가두어 두고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말을 하면 그만큼 현실이 줄어들고 먹물을 먹고, 먹말(글)을 쓰면 그 대상의 기를 뺀다. 신학자란 신을 가장 잘 축소하는 기술을 가진 자다.

1. 말없는 세계의 재발견
첫째, 신은 말없는 세계, 즉 말의 지평 저쪽에 있다. 그런 면에서 민중도 말의 영역에 비끌어 매여 있지 않다.
둘째, 우리가 민중을 히브리, 합비루와 연관시키고 마침내 오클로스와 연관시킨 것은 우연이 아니다. 땅과 관련된 거기가 민중의 본고향이다.
셋째, 자연은 말이 없다. 그러나 우리와 호흡을 같이 한다. 자연이 ‘상’이 되기를 거부하는 때가 종말이듯이 ‘상’인 민중의 조화 역시 우리의 종말이다.
넷째, 신이 어떻게 서구 문화와의 야합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교 교리에 매여 있으랴! 신이 어찌 교회당에만 갇혀 있으랴! 어디까지나 이기적 동기로 경직화된 그리스도교에서 참 우리의 하느님을 해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양적 사고와 동양의 틀에서 많은 지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은 1994년 11월 10일에 강남대학교에서 있은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편집자 주>
(살림 97년 9월호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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