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소개
 
 
연구소 약사
 
 
연구소 소식
 
 
민중신학 자료
 
 
독자마당
 
 
월간살림
 
 
신학사상
 
 
신간안내
 
 
도서신청
 
 
관련 사이트 링크
 
 
안병무 선생님
 
걸어오신길   저 서   성서 연구   추모 문집   사진 자료
 


  신학연구소(2004-01-09 16:13:29, Hit : 3871, Vote : 671
 구약 해석과 역사적 현실

구약 해석과 역사적 현실

안병무

머리말

나는 지금 구약성서가 나에게 거듭되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 것을 회고해 보기로 한다. 회고의 결과에서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나는 역사적 존재로서 구약성서를 해석하면서 나 자신을 해석해 왔다. 해석하는 자는 해석의 대상을 객관화 할 수 없다. 역사를 해석하면서 자기를 해석하고 자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성서를 해석한다. 그것은 신약이나 구약이나 마찬가지다. 나라는 것은 역사적 존재라고 했다. 그러므로 그 나의 경험은 내가 선 역사적 현장에서 보편적 인식과 유리되지 않는다.

1. 구약성서와 소박한 민족주의

나는 소학교 5학년 때에 전혀 다른 동기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학교로 들어가기 전 소년시대에는 일제 하 독립투사들을 여러번 보았으며 그들에 대한 전설 속에서 나도 그들처럼 됐으면 했다. 학교에 입학하여 얼마되지 않아서부터 일본교육에 세뇌되여 민족주의를 깡그리 잃어버렸다. 그런 말은 사석에서도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교회에 나가서 중요한 사실 하나에 충격을 받았다. 이미 일본화를 강요하는 현장에서 일반 조선사람들과 더불어 조선교회는 방향설정으로나 분위기가 정교분리라는 명분 아래 대일본 비판이나 민족문제를 과제로 삼는 일을 포기했다. 그런데 나에게 이채로웠던 것은 조선의 그리스도 교회의 구약성서에 대한 자세다. 크리스마스 때가 오면 예수가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연극은 주로 구약에서 끌어내는 것이다. 모세를 필두로 하여 거의 예외없이 에스더, 모르드개 등에서 주제를 찾은 각본에 의해서 민족해방 또는 민족독립에 끼친 저들의 공로를 높이 찬양한다. 일면 다윗을 설교 등의 주제로 많이 삼았다. 그 해석은 극히 간단했다. 그것은 도탄에 빠진 민족을 구원해 내어 강한 민족을 만든 영웅이라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현상은 중학교의 축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상의 경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부활한 예수와 제자와의 대담이다. 그것은 주로 새벽기도 모임에서 일어난 일인데 그 해석은 제자들의 질문을 오늘을 사는 식민지 백성인 자신의 물음으로 하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을 구할 때가 이 때입니까?”를 “조선이 독립할 때가 이 때입니까?”로 주저없이 바꿔놓음으로 예수를 개인구원의 구세주가 아니라 민족해방의 구세주로 추앙한 것이다.
소년기에 유교의 독경주의(讀經主義)와 비슷하게 성서의 통독에 경쟁이 심하고 주일날 예배전에 성서공부를 반드시 하던 그때에 ‘구약’하면 내 머리에 박힌것은 이상의 인물, 또는 사건들에서 배운 민족주의뿐이었다. 그러나 그 기억마저도 비밀리에 전승되는 독립투쟁기록들을 읽게 된 후부터는 무색해졌다.
일제 말엽에 극단의 식민지적 탄압은 마침내 종교들마저도 굴복시키고 말았다. 기독교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바 신사참배를 강요당했으며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고 한국말 대신에 일본말을 강요받는 상황 하에서 일본제국은 이중의 정책을 썼다. 하나는 협박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유도하는 일이다. 우상숭배에 대해서 예민하게 훈련을 받아온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이후로 자기비하와 자학적인 소침(消沈)상태에 빠지게 되였다. 특별히 교단의 상부를 지배하던 층이 앞장섰으므로 그들은 교인들에 대해서 할 말이 없었다. 1945년, 해방을 받을 때에도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공헌한 일은 없다. 미국의 점령과 더불어 정치적 판단은 모두 미국관료 내지 식민세력에게 맡겨버리고 교회는 종교적 이기주의에 호소했다. 목표라면 일제 하에서 받은 손실을 만회하려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양적인 신장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민족주의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까닭은 교회의 지도층이 민족문제를 과제로 할 만한 자기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판국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일제시대에 그나마 살아있던 민족주의를 단절해 버리는 사건이 됐다. 식민시대의 민족주의가 냉전이데올로기로 양분된 것이다. 민족상잔이라는 현실에 참여하면서 민족을 운운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분열은 바로 민족의 분열을 의미했으며, 한국기독교는 재빨리 반공이 그리스도 신앙고백의 하나인 양 교육하였으며 반공으로 무장했는데 그것은 정치적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증오심과 묵시문학적 종교해석을 결합시킨 특이한 반공주의였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는 그 투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점차 잊혀지는 존재가 되어갔다. 그런데 1965년 한일국교정상의 시도가 군사정권에 의해 진행될 때 한국 그리스도교계가 총동원하다시피 그 반대운동에 나섰다. 반공적 보수주의나 진보적인 사람들의 분간이 없었다. 모두가 하나되어 정면으로 정부와 맞서 싸웠다. 마치 1919년에 일어났던 3.1운동의 주역을 했던 역할을 계승하기라도 하려는듯이.
나는 이때 유대민족주의에서 탈출하여 형성된 그리스도교 전통이라는 데 회의를 가졌으며 한국 기독교는 식민지 하의 쓴 경험에 의해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해왔다. 선교사들이 정교분리를 내세워 정치문제의 관여를 엄격히 저지하려고 했으나 그것은 아무런 효과도 가져오지 못했다. 그리스도교도 이 민족주의를 극복 내지 승화시킬 힘은 없었던 것이다.

2. 독일신학이 제기한 문제

불트만의 신학이 서구신학의 대표적인 ‘결정체’라고 확인한 탓에 비판은 유보하고 그의 논리의 뒤를 따르기 위해 필요한 그의 책은 전부 몇 차례씩 정독해 갔다. 나는 그의 정연한 논리와 간결한 문장에 매료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사인 구약과의 관계에서 쓴 논문이 세계에도 파문을 던졌지만 아직 아마추어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던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 논문의 제목은 “Die Bedeutung des A.T. fuer christlichen Glauben” 이다. 그때 이 논문이 준 충격적 내용을 상기하면 다음과 같다.
구약은 율법, 즉 요구요, 신약은 복음, 즉 은혜로서 율법이 전제되지 않으면 복음은 이해될수 없다는 재래적인 해석을 일단 받아들인다. 그러나 구약에 율법은 반드시 신의 요구라는 성격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었다는 사실 자체가 은혜라는 사실을 인식시킨다.
그리고 신약은 복음 즉 은혜로 성격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도 엄연히 율법(요구)이 있으므로 은혜의 뜻이 이해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구약이 있어서 신약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신약 자체가 독자성을 갖는다. 구약은 일정한 역사 속에 있는 한 민족에게 준 계시이기 때문에 그것을 직접 우리 것으로 수용할수 는 없다. 그 안에는 그리스도 케리그마가 배태하지 않는다.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구약을 아전인수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신약은 구약의 제의적 요소와 이스라엘의 민족적 주의를 거부하며 그리스도 신앙을 핵심으로 삼았다. 바울의 것이나 그외의 문서에서 구약이 되살아나는 듯한 인상을 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육적인 발판으로서 이용된 것이지 구약 자체를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다. 우리(불트만)가 사는 역사는 희랍 사상과 히브리 사상이라는 두 기둥에 의해서 형성됐으며 바로 그것이 우리 정신적인 본향이다. 우리는 히브리 민족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구약적 문화요소도 희랍문화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사의 한 부분으로서 살아왔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는 없다. 구약 안에 윤리적 요구의 가치를 중요시하며 구약이 신약을 이해하는 데 선구적인 모델이 될 수 있는 주장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유일한 모델이 아니다. 구약을 카논으로 (das konkrete Alte Testament)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구약만 아니라 성서 전체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된다는 충격을 받았다. 그의 입장에서 어린 시절에 한국교회에서 보여준 구약에 대한 자세가 비판적으로 회고되었다. 어떻게 모세나 에스더 등의 얘기가 아무런 장치 없이 곧 우리의 얘기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는가. 성서를 해석하는 자는 어디까지나 역사의 존재이니만큼 자기 선 자리에서 해석해야 된다. 불트만이 자기들의 역사로서 유럽 역사를 내세운다면 우리는 우리 역사가 있다. 우리(비기독교계의 신학자)는 자기의 역사에 대해서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가. 오히려 자기의 역사에서 단절을 요구한 것이 기독교가 아니었는가.
이런 사고가 심화되어 나는 한 동안 성서연구를 놓아버리고 우리 역사에 있어서 적어도 유럽 사람들에게 희랍사상이 끼친 영향 이상을 준 유교를 본격적으로 재고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신약성서마저 놓아버린 것은 아니다. 내 충격을 가중시킨 것은 브라운(H. Braun)이다.
알트 말브르거(Alt Marburger)학회에서 브라운(H.Braun)이 신약신학의 주제들이란 강의를 했는데 이 강연은 불꽃 튀기는 논쟁을 일으켰다. 그의 강연의 요지는 신약의 그리스도론, 교회론, 성령론, 종말론 등을 분석하면서 결론으로 어느 테제 하나도 신약에서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마디로 신약의 성격을 요약한다면 신 앞에서(Coram Deo) 너는 할 수 있다(Du Kannst), 너는 할 권리가 있다(Du darfst) 라고 할 수 있다고 요약하였다. 대회장에서 오후 내내 격론이 이어지다가 식사 후에 휴식공간에서도 계속되였다. 나는 브라운의 결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런 결론으로도 전도설교(Missions-Predigt)가 가능합니까?” 주변 사람들이 브라운의 대답에 긴장했다. 그러나 브라운은 이 질문에 직접 대답을 하지 않고 화제를 다른 데로 옮겨갔다. 그때 곁에 있던 보른캄이 그 질문은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고 재촉했고 보른캄(G. Bornkamm), 케제만(Kaesemann), 딘크라(Dinkler) 등 중진 성서 신학자들도 가세했다. 대답을 해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는 한참 파이프를 물고 대답을 주저하더니 “전도설교?” 그리고는 곧 이어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할 수 있습니다.”그의 이 결론은 근본적으로 불트만이 “은혜”로 파악한 성서의 언어를 확대한 것으로 본질상 차이가 없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가서 나는 불트만의 사고 배경을 전제하고 브라운에게 물은 것이다. 당신의 결론은 비단 신약성서에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 나가서 동양의 유교, 노장사상 그리고 불교에서도 얼마든지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불트만도 이런 나의 결론적인 주장에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단지 그가 히브리 사상으로 결성된 역사를 자기의 현장으로 알기 때문에 다원적 종교역사 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것뿐이다.
그러면 하느님 앞에서 너는 할 수 있다. 너는 할 권리가 있다(Coram Deo Du kanst, Du darfst.)는 선언이 어떻게 전달되는가.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어디서 만나게 되는가? 브라운은 그것을 그리스도 케리그마에 한정시키지 않았다. 그러면 구약에서도 이런 결론은 가능하다. 이로써 해석자는 텍스트에서의 자유를 얻게 된다. 그런데 이런 길은 불트만이 열고 있다. 나는 그의 결론에서 불트만의 위의 논지를 재인식했다. “그리스도에게서”(케리그마)라는 전제를 가지는 그는 결국 “말”(로고스)에 귀착한다. 좀 더 구체적인 표현을 한다면 교회에 있어서 설교를 통해서만 들을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나는 말에 귀착되는 그들의 성향을 묻는다. 희랍과 히브리의 두 사상조류 속에서 형성된 역사 안에서 희랍의 유산인 로고스를 선택한 것이 아니냐! 그것은 불트만이 요한복음을 신학 전체를 여는 열쇠로 보는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불트만은 교회의 설교 자체가 하느님의 말씀이 계시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논문에서 설교자는 끝끝내 사람의 말밖에 할수 없으나 하느님이 그의 은총으로 사람의 말을 하느님의 말로 바꾸어 준다는 믿음을 내세웠다. 나는 여기에서 그때 당시의 신학의 한계를 보았다. 그리고 저들이 표현은 안해도 역사의 예수는 그들의 역사적 현실에 맞지 않고 역사의 예수의 사건이 말로 화(化)하는 케리그마를 출발점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추측을 했다. 따라서 저들의 신학은 물론이요, 이런 입장에서 해석된 성서학에 대해서 그 한계성을 보았다.
귀국했을 때 WCC에서 일으킨 운동의 하나로서 이른바 토착화 신학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나는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까닭은 토착화를 논하는 자들의 대부분이 어떻게 서구 역사에서 모양을 갖춘 기독교를 그대로 유입해서 한국의 문화나 사고에 접맥시킬 수 있느냐 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운동에서 주는 의미는 자기 역사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내게는 오랜 전통을 갖고 논리적으로 연마된 그리고 우리 자신이 그 일부가 되어 버린 서구적 전통신학에 도전할 능력이 없음을 자인했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어떤 해방받은 사건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서구신학의 매개자로서 학생들과 후진들을 가르쳤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는 말(Anrede), 우리에게 주는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몽롱한 상태에서 나는 우리 역사 현실에 강압적으로 눈을 뜨게 된 것이다.

3. 묻는자의 인식이 뿌리내린 역사경험

한 민족의 집단심리는 그 민족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 한국의 심성을 점유하고 있는 보편적인 사건들을 나열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식민지 경험
오랜 역사 동안 중국대륙의 속국같은 위치에 있었으나 생활상에는 자치권을 갖고 있었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40년간의 점령과 식민정책은 너무 가혹해서 오늘에도 한국 민족의 마음은밖의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정도로, 대일관계에 예민하다.
2. 이것은 식민지 백성이 된 것과 관련된 결과이지만 포로생활에 아픈 경험을 가진 민족이 일본의 강점 하에서 만주로, 시베리아로 도피이민을 한 것말고도 강제 납치되어 의용병이라는 징병으로, 학병이라는 이름으로, 수를 알 수 없는 많은 젊은세대가 끌려갔다. 그것은 그대로 포로의 삶이었다. 지금도 그 결과는 여전히 남아 재일교포라는 특수현상이 지속되고 있고 노동자로, ‘포로’로 납치한 일제가 사할린에 끌고갔다가 패전과 더불어 그들을 현지에 내버려 지금 남은 사람들의 고통이 지금에 와서야 공개되어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종군위안부란 미해결의 사건이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까지 분노를 일으켜 냉정할 수 없게 한다. 위안부란 노예 이하의 포로생활이었던 것이다.
3. 남북분단
오랜 역사 동안 통일된 민족의 자부를 가진 이 민족이 남북이 분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북통일이 우리의 자명적인 권리이면서도 국제강대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우리의 자율권이 유린된 사실에 대해서 젊은 세대일수록 통탄해 한다.
4. 6.25전쟁으로 처참한 민족상쟁이 감행된 이후 민족의 동일성을 인식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민족주의가 흔들렸다. 민족주의가 흔들리는 반면 냉전논리에 의한 이데올로기의 분단체제로 적대감정은 계속 고조되어 왔는데 이것은 외국의 조종에 의한 것이다.
5. 군대구테타
초대대통령인 이승만도 독재자였으나 본격적인 군사독재정부는 박정희의 군사구테타 이후이다. 그는 18년 동안이나 영구독재를 꾀하며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그후 그의 후계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군대들이 뒤를 이어 거의 30년 동안을 민에 군림하는 군사정치를 펴나갔다. 그 세력들은 언제나 미국의 지지를 받았다.
이상과 같은 커다란 사건들이 이 민족을 심리적으로 생활상으로 그 ‘특유성’을 형성했다. 그 같은 고난의 역사를 겪고 있는 이 민족의 가슴에 맺친 심성을 사람들은 ‘한’(恨)이라는 한 마디로 집약했다. 그런 와중에서 생겨난 사건들도 어마어마해서 의식있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이승만 정부 타도에 참가한 학생들이 많은 피를 흘리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후 그들의 피도 보람없이 군대구테타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어떤 질문을 계속했으며 특별히 크리스찬들은 그 물음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대답을 찾았는가. 한 마디로 그리스도 교회는 이에 대해서 전혀 무능하였으며 대답은 고사하고 문제제기에 참여하려고도 안했다. 그런 상태에서 재래적으로 도피의 구실로 삼아오던 보수주의의 발판이 되는 정교분리를 내세워 민의 당면한 문제와 자신을 차단하고 자기나름대로의 게토를 쌓고 있었다. 6.25전쟁, 4.19학생봉기, 군사쿠테타 등 큰 사건이 일어났을 때 기독교는 이에 대응하는 아무 입장도 정리하지 못했다.
바로 그런 마당에 그리스도교인 으로서 하나의 노동자로 교회에서 배운 바 있는 전태일(全泰一)이라는 젊은이가 모두가 주목하지 않는 음지에서 지금 불이 붓고 있다는 화급한 심정으로 큰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관계요로에 호소를 거듭했으나 아무런 효험이 없자 마침내 대낮 큰 시장 앞거리에서 몸에 석유를 붓고 스스로 봉화가 되어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려고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조그마한 이 사건이 큰 파문을 일으켰는데 그중에 특히 교회 안의 일부 양심들을 부끄럽게 하고 저들을 깨워 일으킨 것이다. 산업사회라는 화려한 간판의 그늘 밑에 신음하고 있는 노예 이하의 계층에 대해 눈을 뜬 것이다. 그 파장은 쉬지않고 커갔다. 그가 지른 불은 노동계로 학생계로 퍼졌고 특별히 대학안에서 가장 미래가 있고 양심적인 학생들이 그의 뒤를 이어 분신자살의 행렬을 이은 것이다.
이런 상황을 몸으로 겪으면서 신학이라는 틀을 안전지대로 삼고있던 일부 신학자들과 젊은 목사들에게 큰 충격을 주고 마침내 민중이라는 실체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민중신학의 발단이다.

4. 구약성서의 재발견

위에서 예거한 이 민족이 당한 큰 경험들을 재인식하면서 구약성서가 놀랍게도 우리 역사와 밀접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은 불트만이 제기한 구약과 신약과의 관련성 이론 따위를 고려할 여지를 주지 않고 우리의 손에 이미 쥐어진 중요한 의미를 지닌 보고(寶庫)로 인식되었다. 그 인식을 나열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구약의 역사는 노예의 역사로 시작된다. 해방의 사건으로서의 엑소더스, 이것은 인간의 계급 모순에 집단적으로 저항, 탈출한 굉장한 사건이다. 구약의 엑소더스를 가장 큰 테마로 내세우고 대대로 그것을 전승하였다.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도피의 역사가 아니고 민족이 가야 할 앞길을 제시하고 추진시키는 힘이 되었다는 점이다.
2. 구약은 포로시대에 포로의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포로의 애환이 전체에서 배어 나온다. 저들을 계속 좌절하지 않고 언제나 재기하게 한 것은 바로 자기 땅으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이었다.
3. 구약은 대부분이 분단문학이다. 남북이 분단된 후 끝까지 통일을 못 본 비애가 그 문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예언자군이란 바로 분단시대가 낳은 특수한 군상들인데 저들은 대부분 부패한 권력과 부가 통일의 큰 장벽인 듯이 칼날 같은 비판을 거듭했다. 구약에서 예언자들의 글은 권력에 대결하면서 민의 편에서 울고 웃는 대표적인 상징이다. 우리는 주저 없이 이 예언자들의 계열에 우리를 세우고 교권이나 다른 어떤 세력에 의지하지 않고 고고히 싸웠다.
4. 구약이 희랍의 유산과 달리 이야기를 중심으로 엮어졌다는 것은 상부와 단절된 우리 민중들의 애환이 이야기체로 일관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5. 다윗과 그 왕조에 대한 재평가
메시아론과 다윗왕조가 직결될 만큼 추앙된 그의 상이 유럽 그리스도교를 거쳐서 그대로 우리 땅에도 직수입되었다. 다윗은 그러므로 위대한 왕자이고 이스라엘을 통일시킨 통일민족의 완성자이고 자기 죄를 드러내놓고 뉘우칠 줄 아는, 전형적인, 신을 두려워 하는 자이고 마침내 신에게 선택된 메시아의 씨의 배태자로 추앙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다윗은 유대민족의 전통과 목표를 폭력과 불륜으로 사정없이 파괴해버린 그 민족의 적이다. 그는 폭력으로 서슴없이 윤리를 짓밟고 정의를 짓밟았으며 만대의 영화를 누리기 위해 군대를 강제동원하여 판도를 늘리고 예루살렘이라는 땅을 사유화하고 거기 엄청난 궁성을 세운 자다. 그것은 민중의 고혈을 빨아 세운 것이다. 그는 결코 통일을 이룬 자가 아니라 이미 영구분단의 비극을 배태한 자다. 그의 아들 솔로몬에 와서 그가 이룩한 영화의 극치를 누리면서 모든 국력을 탕진해 버리고 마침내 다시 합할 수 없는 남북의 영구분단을 가져온 장본인이다.
6.구약의 제의종교의 의미
분신자살이 연쇄적으로 일어날 때 우리의 응답은 거의 예수의 수난사에서 찾았다. 우리는 주저없이 저 사건들에서 현존하는 예수를 만난다고 했다. 두 사건의 교량은 단 하나 즉 ‘희생의 제물’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의 죽임당함을 희생의 제물로 쉽게 규정하도록 한 것은 구약의 제의종교가 지켜온 전통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될 것이다.
우리의 신학적 사고는, 일면 어떻게 하면 저 사건들이 우연이 아니고 필연, 더군다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설명될 수 있는 사건이 될 수 있는가, 동시에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처형된 예수의 사건이 어떻게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산 사건으로 이어질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우리의 부단한 질문은 ‘현존의 그리스도’였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를 과거 사건으로 회상하지 않고 지금 우리가 숨쉬고 살고 있는 현장에서 희생의 제물로 죽어가는 사건들에서 경험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구약의 제의종교적 신념이다.
7. 한 마디로 구약은 고난자의 얘기가 주류를 이룬다. 하늘의 노래도 신들의 유희도 아닌 민중의 고뇌로 점철되었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이런 고통들을 한(恨)으로 파악했지만 이 둘 사이의 상통성을 절감했다.
주님, 내가 깊은 구렁 속에서
주님을 불렀습니다.
주님, 내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나의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주님,주께서 죄를 지켜 보고 계시면
주님 앞에
누가 감히 버티어 설 수 있겠습니까?
용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주님만을 경외합니다.

내가 주님을 기다린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며
내가 주의 말씀만을 바란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

이스라엘아,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주님께만 인자하심이 있고
속량하시는 큰 능력은 그에게만 있다.
오직, 주님만이 이스라엘을
모든 죄에서 속량하신다.
(시편 130)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면서 울었다.
그 강변 버드나무 가지에
우리의 수금을 걸어 두었더니
우리를 사로잡아 온 이들이
거기에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고
우리를 억압한 자들이
저희들 흥을 돋구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저희들을 위해 불러 보라고 하는구나.
우리가 어찌 남의 나라 땅에서
주의 노래를 부를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내 오른손도 수금타는 재주를 잊을 것이다.
내가 너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내가 너 예루살렘을
내가 가장 기뻐하는 그 어떤 일보다도
더 기뻐하지 않는다면,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
(시편 137:1~6)

우리는 이 같은 시편의 ‘애가’를 바로 우리의 노래로 수없이 반복하였다.

5. 사건과 맥

어떤 본문의 해석도 자신의 역사의 실존적 인식과 더불어 해석한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 객관적 관찰은 있을 수 없다. 해석하면서 나는 그 안에 포함되곤 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거칠게 서술한 구약의 재발견과 그 해석에 있어서도 이런 의미의 주관성을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이 해석의 세계적 보편성을 구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관점을 일반에게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노력이 자동적으로 생겨났다.
첫째는 이미 언급한 대로 역사를 사건의 우발적인 연속으로 파악했다. 태초에 말씀이 있은 것이 아니라 태초에 사건이 있었다. 요한복음은 희랍적인 로고스를 가정했는지 모르나 마가복음은 그것이 세례요한을 지적했거나 예수를 지적했거나간에 그 시작을 태초라고 했다.
태초에 있어서 주동적인 역활을 하는 것은 언제나 ‘프뉴마’였다. 천지창조설화에 있어서도 모든 수면 위에 하느님의 프뉴마가 떠도는 것이 시작이지 말씀이 시작이 아니다. 프뉴마는 동양적 언어로서 ‘기(氣)’다. 이 기는 반드시 합리적인 틀에 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연현상과 다른 우발적인 사건을 만들어 낸다. 서구학계의 전통을 첨예화한 불트만의 모든 논술의 결론은 언제나 로고스에 귀착한다. 그러나 구약은 기로 출발하고 신약은 기의 시대로 종말적 특징을 삼는다.
사건은 만남으로 일어난다. 음과 양이 부딪치므로 스파크가 일어나듯 하느님과 사람이, 남자와 여자가, 개체와 전체가, 집단과 집단과의 만남으로, 홀로 있을때는 상상도 못할 사건이 일어난다. 사건은 그러므로 시간적으로 보아서 고정적인 것은 아니다. 일반 역사(history)에서 볼 때 우발적인 것의 연속이다. 그러나 거기에 분명한 연대성이 있다.
사건은 만남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서구의 주객도식을 파괴한다. 때리는 자와 맞는 자, 구경하는 자와 당하는 자가 분류될 수 없다. 기는 개체가 있기 전에 존재한다. 천기(天氣), 지기(地氣), 인기(人氣)라는 표현이 그런 것이다. 이러한 것은 하늘에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기를 통하여 교류가 가능함을 말한다. 이미 말한 대로 기는 만남에 따라서 여러 가지 변화를 일으킨다. 기 자체는 변함이 없다. 구약의 루아흐와 통하는 것이다. 무소부재한 신, 전능한 신을 상정하려면 기라는 말로 바꾸어 이해하면 된다. 서구신학이 마침내는 기에까지 페르조나(Persona)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사람과 상통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했으나 실은 역효과를 거두었을 뿐이다. 기는 어떤 틀에 매이지 않는다. 하물며 페르조나 같은 마스크에 씌여서 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로써 점점 서양적 사고에 물들지 않은 프뉴마, 즉 기에 대한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신이 자기를 제한함으로 가시화하여 인간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이라는 탈을 벗고 기에 합류한다.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그런 형식으로 사람과 관련을 맺게 된다. 우리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일어난 연속적인 사건들을 구약에 있는 프뉴마라는 틀에서 해석함으로 둘 사이에 밀착된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평소에 무능해보이는 민중의 봉기를 사회과학적으로 아무리 설명해도 그 힘의 원천은 알 길이 없다. 우리는 주저없이 그것을 기가 민중에, 또는 반대로 민중이 지닌 기가 일으키는 돌풍과 같은 사건으로 본다.
우리는 사건마다의 단속성을 깊이 인식한다. 누구나 예측할수 있는 필연이 곧 사건은 아니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경험으로 보아서 주기적으로 오는 사건은 아니나, 같은류의 사건이 어느 부문에서 일어나지만 그것은 언제나 전지구(우주적)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 불트만은 구약은 일정한 민족사와 직결된 것이므로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단언이다. 지구의 어떤 지역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이 크든 작든 범위가 넓든 좁든간에 주변으로 그 영향이 퍼져 나간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은 역시 구약의 역사다. 비록 한 특정한 민족에게 주어진 역사이나, 역사적 현실로도 그것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할 뿐 아니라 서구사가 형성이 된 이래로 그 영향은 오늘까지 계속된다. 그것의 절정으로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을 파악하는 것은 결코 맹목적이 아니다.
나는 이 사실을 인식하기 위해서 동양에서 이해하는 맥(脈)이라는 특유한 개념을 원용받고 있다. 생리적으로도 의사는 육체의 한 부분을 짚고 몸 전체의 상태를 파악한다. 그 진단법을 ‘맥을 집는다’고 한다. 심장에서 내뿜는 피는 똑같이 몸 전체에 퍼지기 때문에 한 부분에서 일어난 일은 곧 몸 전체에서 일어난 일과 같다. 화산맥이라는 언어가 있다. 지구는 그 내부에 띠를 두르듯 화산맥으로 통하고 있다. 어느 한 곳에서 화산이 폭발된다. 그러면 그것은 그 지역에서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 지구의 ‘생리’의 노출이다. 화산이 맨 처음 폭발된 것은 지구를 형성하는 큰 사건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지구는 계속 커다란 화산사건을 일으킨다. 사람들은 어디서 언제 그 화산이 터질지 측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그것은 어디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시대적으로도 수천년 전에 일어난 것과 똑같이 수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터질 수 있는 사건이다. 이런 발상으로 나는 구약과 예수의 사건에 연계되어  있는 맥을 본다. 엑소더스는 분명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어난 화산적 사건이다. 예수에게서 일어난 사건도 고립된 것이 아니라 가능성으로서의 화산이 실현적으로 터져나온 것이다. 우리는 예수라는 화산폭발에 기점을 두고 모든 것을 보고 있으나 유대사람들은 엑소더스에서 그것을 본다. 이 둘은 분명히 다른 화산사건이다. 그러나 같은 화산맥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 일어난 엄청난 사건들은 한국이라는 특유한 역사적 상황에서 일어난 화산의 폭발사건이다. 그런데 이것을 고립시켜서 이해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것은 엑소더스를 폭발시키고 예수의 사건을 폭발시킨 그 화산맥에 연계되어 일어난 것이다.
그로부터 혈맥에서 배운 결과로 광맥, 산맥, 수맥, 지맥 등으로 자연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그것이 인간관계에 이어져서 인맥에 대한 이해도 넓어졌고 역사를 보는 눈도 열렸다. 그러나 어찌 한국 일각에서 일어난 사건만이리요. 거리상으로 비록 멀리서 일어난 사건들도 그 자체로서 고립시켜 생각할수만은 없다. 단지 그들을 어떤 맥과 연계시키느냐에서 그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는 위에서 구약의 이해를 우리가 어떻게 해 왔는지를 우리 역사적 현장에서 생각해오다가,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를 거쳐서, 한국의 역사와 구약과의 관계가 무관하게 평행되지 않더라는 사실을 말해 왔다. 마침내는 그 확신을 확대해서 자연관찰을 원용하기에 이르렀다. 그 둘 사이에 분명한 비약이 있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렇게 하는 까닭은 내가 경험하고 생각하는 과정을 그대로 드러낼 뿐만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그런 시각도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제시하고 싶은 욕망에서다.

6. 십자가 사건과 구약성서

결론을 대신해서 우리의 현장에서 현존의 그리스도를 어떻게 증거해야 했는가를 비판적으로 회고해 보겠다.
우리의 초점은 공관복음서에 서술된 예수의 수난 이야기에 있었다. 수난이야기는 알려진 대로 다른 자료들보다 일찍 수집, 편집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 수난 해석에 독자성을 지녔다.
특별히 마태는 그 장면 장면을 구약에서 설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것은 구약의 배경을 빌리지 않고는 예수의 최후를 스스로 이해하고 남에게 설명하는 데 궁색함을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질문은 마가복음에 묘사된 범위에서 생겨난 이 ‘비극’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메시아로 알고 그를 통해서 새 세계가 오리라고 믿던 제자들이 마지막 순간에 모두 그를 배신해 버렸다. 그 중에 한 제자로 되어 있는 가롯유다가 몇 푼의 돈으로 선생을 팔아넘겼다는 사실도 이에 포함되어 있다. 재판과정에서 오히려 로마의 총독 빌라도가 책임을 모면하기위한 회피적 발언을 했고 그외에 그를 변호하는 단 한 마디의 목소리도 없었다. 예수 자신은 사람들에게서 이미 어떤 기대를 포기한 듯 그들에게 어떤 기대도 표시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에게만 매달린다. 그러나 관객들이 하나의 가능성으로 전제한 어떤 기적이나 신으로부터의 반응은 전혀 없었다. 그 현장도 그 밖에서와 같이 강한자와 약한자, 때리는 자와 맞는자,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 외에 어떤 다른 것도 개입하지 않았다. 신은 무(無) 자체와도 같이 침묵한다. 적어도 그 현장에서는 부재(不在)의 신이다. 예수와의 관계에서 보면 이미 그에게서 머리를 돌린 신이다. 이런 상태에서 그는 마지막 절규를 하고 다른 죄수들과 같이 숨을 거둔다. 그때에 같은 처지에 있는 주변 사람들과 꼭같이,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까? 그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메시아로 믿던 그의 이 최후를! 수난 이야기에는 부활이라는 사실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또 예수 자신이나 그에게 실망하는 사람들에게 그와 유사한 기대를 하는 데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사흘만에 살아나리라는 희망으로 그 장면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이런 암담한 서술에서 돌출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16장 34절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절규다. 그를 그대로 억울한 박해 속에서 죽게 하는데도 나의 하느님이냐, 그를 분명히 버렸는데도 나의 하느님이냐? 이것은 당신이 나를 버려도 나는 여전히 당신의 아들입니다라는 유래를 볼 수 없는 신앙고백이냐, 이로써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이 바로 인식하고 그 인식으로 남에게 인식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냐? 그 이해의 문은 구약 시대가 열어 준 것이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케리그마로 되살아났다. ‘그는 무의미하게 죽임당한 것이 아니다. 그는 신에게 바쳐진 제물이다.’ 그런데 이 같은 발상이 허공에서 상상력으로 왔나? 아니다. 불트만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유다의 민족주의와 제의종교를 극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십자가 사건 이해는 유대교의 제의종교라는 전통이 없었던들 성립 불가능한 것이다. “세상 죄를 진 어린양” “도살장에 끌려가도 소리 한번 내지 않는 속죄양” 등과 맥을 이어 놓으면 비로소 그 의미가 인식된다. 그가 단 한번으로 제의적 의미를 다했다는 것으로 제의종교의 종결을 설명하는 것도, 제의 종교의 폐기가 아니라, 그 뜻을 그리스도가 계승했다는 한 선언이다.
나는 정확한 대답을 유출해 내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 요는 이 한 구절이 삽입됨으로 단순히 공허에 빠져 실망만 할수 없도록 끌어당기는 힘을 본다. 그런데 이 절규는 바로 구약성서에 포함되어 있는 시편 한 구절이다. 이 한 구절은 수난당하는 이스라엘민족의 고통의 극치를 나타내는 구절이다. 그러나 절망하지는 않는다. 버려졌다는 현장을 인식하면서 그 신을 절대로 거부하지 않는다. 그것은 ‘희생의 제물’이라는 개념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묻게 된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이라는 유산 없이 예수의 최후를 이렇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구약에 면면히 흐르는 전통적 신앙, 혹은 사고 속에서, 예수에게서 일어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극히 조잡하게 구약이 어떻게 민중신학에게 재발견되었으며, 궁지에 몰리는 우리 민에게 동반자가 될수 있었는지 소개했다. 희랍의 존재론적인 질문을 거듭하는 신화나 또는 거기서 발생된 철학에서, 그리고 우리에게 결정적 영향을 끼친 유교에서는, 절대로 이런 상황을 이렇게 이해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 글은 일본의 구약학자인 木田獻一 교수의 정년을 기념하여 기고한 것이며, 1995년 10월 14일 경에 작성되었다.<편집자 주>
(살림 97년12월-98년 1월호에 수록)




성서와 영성
민중신학이 나아갈 길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zero
한국신학연구소 / Korea Theological Study Institute / http://www.ktsi.or.kr
03752 서울시 서대문구 경기대로 55 선교교육원내 / Tel 02-738-3265~7 , Fax 02-738-0167 , E-mail :
Copyright 2000-2020 KTSI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