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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소(2004-01-09 16:13:51, Hit : 5817, Vote : 605
 성서와 영성

성서와 영성

안병무

성서와 영성이라는 제목을 달았는데, 솔직히 말해서 난 영성이란 말에 낯이 선 사람입니다. 신교에는 처음에는 영성이란 말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원래 가톨릭에서 쓰던 말입니다. 얼마 후부터 교회가 어떻게 어떻게 문을 열다 보니까, 밖의 소리가 크게 들리고, 교회가 뒤숭숭하니까 우리 안의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서서, 영성이라는 말을 도입하게 된 것이죠. 가톨릭에서 쓰던 거니까 맞지 않다는 건 물론 아닙니다. 가톨릭에서 이해하는 영성과 우리가 새롭게 이해하는 것은 감정적으로 상당히 차이가 있을 겁니다. 또 전통적으로도 우리 영성의 전통이 아주 얕습니다. 가톨릭과 갈라지기 전에는 같은 영성활동이라는 것을 공통분모로 갖고 있었지만, 그후에는 정반대로 갈라져서 심지어는 영성과 사별을 하라는 소리를 할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그걸 다시 한 번 살려보자는 운동이 영성이라는 말로 지금 표현이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좀 반성할 것은, 영성은 이런 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옳은가 하는 것입니다. 우린 영성 훈련 하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일차적인 것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화해, 또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찾는다든지 하면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성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가, 또는 그 전에 하나님과 사람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이른바 그리스도론이라는 것이 서구의 기독교에서 발전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만날 길을 찾자니까 그리스도론이 자동적으로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화해를 하는 것이 영성 활동에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런 경우에 도대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크리스찬이 되지 않거나, 교회 출석을 잘하지 않거나, 죄 용서를 빌지 않은 것 등등을 말하는 것이 됩니다. 거꾸로 다시 이 문제를 묻자면 우리는 어떻게 죄를 짓게 되었습니까. 유대교 시대에는 죄를 민족과의 관계에서 물었습니다. 내가 내 민족의 한 일원으로서 내 할 일을 다했는가를 묻고 잘못한 것을 하나님께 속죄받는 것입니다. 그들은 민족적인 것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그들의 종교는 어떤 이의 개인 종교가 아니고 민족 종교입니다. 유대 사람들끼리는 이웃이지만 다른 민족과는 원수가 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 5:43∼44). 산상수훈에 나오는 이 유명한 말씀도, 엄밀히 말하면, ‘너희는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원수, 곧 이방사람을 미워하라고 들었지만 나는 너희들에게 딴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유대사람에게는 이제 결국 그 이방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 유대 안에서 어떻게 이웃과의 관계를 좀더 잘 가지느냐 거기에 대한 특별한 개념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거울이 되어 있어서 죄다, 죄가 아니다를 가리기가 쉬웠습니다. 한 마디로, 죄라는 것은 직접 하나님께 무엇을 행하거나 잘못을 했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이웃에게 대해서 한 행동이 이롭거나 해롭거나 하다는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직접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차원이 달라요. 우리의 상대는 이웃입니다.
이 이웃에 대해서 이런 건 죄다, 이런 건 의롭다 하고 규정하는 것이 구약의 율법이라면 이것을 판결하는 장이 성전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성전이 없습니다. 우리는 구약 시대의 유대 사람이나 바울이 가진 것과 같은 그런 의미의 율법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점에서 혼선을 빚게 됩니다. 어디까지가 죄란 말인가, 누가 그걸 규정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사제를 중심으로 한 대표들이 모인 최고 의회라는 것이 있어서 지금으로 말하면 사법권이라고 하는 것보다 좀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옳다 아니다를 결정했는데, 우리에겐 그런 게 없습니다. 그래서 갈팡질팡합니다. 목사에게 가서 하나요? 목사는 그 책임을 안 지려고 합니다. 내가 죄까지 사할 권리가 뭐 있나 하지요. 아무리 보수적인 교파라도 그 마지막 행사는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영성이라는, 영성훈련이라는 것은 원수된 관계를 푸는 겁니다. 영성훈련의 목적은 평화죠. 평화는 찌그러진 것, 모순이 생긴 것, 갈등구조, 평화를 저해하는 요소들이 다 풀린 상태, 너와 나 사이에 막힌 것이 다 열린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는 율법이라는 것으로 가로막혀 있고 또 사람과 사람 사이는 이방인에 대한 차별의 담으로 가로막혀 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꽉 막힌 것을 여는 것이 영성이고 그런 훈련이 영성훈련이죠. 우리에게 영성훈련의 장은 이웃 뿐입니다. 이웃의 지표에서 옳고 그른 것이 판단이 나야 합니다.
영성이라고 하면 여러분들이 성령을 먼저 생각할 겁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저 오순절 사건은, 예수의 민중들이 일으킨 가장 큰 사건의 하나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 사건에서 교회가 탄생하였다고 보면 될 겁니다. 그러나 그 사건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날은 억눌려 살던 민중이 승리한 날입니다. 오순절 얘기에서 성령의 활동은 화해의 성격을 띱니다. 그 목표가 화해에 있음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첫째, 예수의 민중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집권자들에 대한 공포, 그들이 배신한 하나님께 대한, 그리고 그리스도께 대한 공포였습니다. 무슨 낯으로 예수님을 만나나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공포심 때문에 갈릴리 민중들은 해가 떴어도 자책감 때문에 감은 눈을 뜰 용기를 가지지 못합니다. 새로운 천지가 열렸어도 그것을 맞이할, 뛰어나올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런 저들이 공포에 싸인 채로 다시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공포의 분위기에 짓눌려서 힘을 못 내던 그들이 어떻게 모여서 힘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에 지고 남은 일곱 패잔병들이 여기저기서 쓰러져 누워 있다가 죽지 않은 자기 옆 사람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켜서, 기도하는 동료들에게 모여든 것처럼 저들은 모여든 것입니다. 기적이라면 기적이죠.
우리 이대로 있을 순 없지 않느냐, 그대로 있기에는 우리는 너무도 엄청난 사건을 경험했다. 보고, 만졌다. 당했다. 우리는 가해자만 아니고 또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들에게서 십자가 사건은 눈을 감고 얼마 지나면 잊을 수 있는 그런 사건이 아닙니다. 2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것은 아주 리얼하게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인데, 저들에게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아무 힘도 없지만 모이자고 한 것입니다. 누가 “예루살렘으로!”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는지, 회의에서 그렇게 결론이 났는지 모릅니다마는, 하여간 “예루살렘으로!” 하는 소리로 일치되었습니다. 아, 저 예루살렘! 아직도 예수를 죽인 자들이 눈에 핏발이 선 채로, 예수를 쫓던 사람들의 후환을 겁내서, 감시의 눈을 부릅뜨고 있는 그 예루살렘, 우리가 꼼짝도 못하고 마지막 예수의 장례도 못보고 냅다 도망을 친, 그 예루살렘,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 예수가 억울하게 흘린 피가 아직도 마르지 않았을지 모르는 그 예루살렘, 그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그런 용기를 가지고 일어난 저들은 굉장한 사건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들은 수십만의 군중을 헤치고 예루살렘의 중앙의 한 곳에 자리를 만들고 그것을 무대로 예수에게서 일어난 사건들을 증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거의 틀림없는 현실이었습니다. 이 공포에서 해방되고 새로운 힘을 얻은 그 응집력이 성령이 강림했다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성령이 강림했다. 그것이 바로 저들이 저렇게 일어난 일과 동시적인 일이지 분리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들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땅과 하늘, 사람과 하늘 사이에 막혀 있던 담이 열리고 푸른 맘이 생겼습니다.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났습니까? 꽉 막혀서 숨쉬기가 힘든 세상에, 희랍어로 프뉴마(pneuma : 영)라고 하는 그 바람이 세게 불고, 하늘에서 불덩이가 내려오더니 그 불덩이 하나가 쫙쫙 갈라져서 한 사람 한 사람 머리 위에 머물렀습니다. 각 사람이 자각을 가진 순간에 저들은 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건 연설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논리를 전개하는 게 아닙니다. 희랍사람처럼 웅변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할 능력도 없거니와 흥미도 없습니다. 지금 다만 그 일을 말해야만 했습니다. 내가 이 말을 안하면, 내가 이걸 증거하지 않으면 난 이대로 죽으리라, 죽임을 당하리라, 이걸 꼭 해야만 되겠다, 그런 결심이 선 겁니다. 저들은 예수의 얘기를 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얘기를 했습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얘기를 했습니다. 당사자들만이 아는 얘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억울하게 죽었는지 얘기했습니다. 그랬는데 그 얘기가 큰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은 바로 화해의 사건입니다.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의사가 통하게 해 주지만, 동시에 말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게 없습니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은 영어만 하는 세상에 오면 바보가 됩니다. 그 말을 모른다는 것이 무서운 겁니다. 세계의 모든 단절이 말의 차이 때문에 오는 겁니다. 말이 열려서 하나의 말이 된다면 큰 사건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이 먼 지방으로, 이방으로 간 역사가 참 깁니다. 로마의 식민지 영역 어디고 안 간 데가 없습니다. 스페인에까지 갔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명절에만 찾아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일은 말이 없어도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의사소통의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모인, 갈릴리 말을 한 마디도 모르는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다 각기 자기들의 말처럼 들렸다고 합니다. 이게 무서운 화해사건입니다. 평화의 첫 걸음을 내디딘 겁니다. 이것 없이는 세상이 하나 될 가능성은 도무지 없는 겁니다. 말 때문에 막힌 이 원수관계, 유대사회에선 더군다나 그렇습니다. 이 원수관계가 깨졌다는 선언이 바로 오순절의 사건입니다.
어떻게 해서 내가 하나님과 나 사이 그것은 곧 이웃과의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 수 있을까. 지금까지 그 담이 막힌 것은 상대방이 나를 몰라서가 아니라 먼저 나 자신이 막았기 때문에, 그가 들어오는 걸 전부 차단시켰습니다. 그걸 전제로 하지않고는 영성훈련이라는 게 무의미한 얘깁니다. 집 식구 안에서도 나를 이모 저모로 차단했다. 그들이 들어올 구멍이 없었다. 막아버렸다. 결과적으로는 너와 나 사이에, 엄마와 딸 사이에,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큰 담이 막혔다. 뛰어넘을 수 없는 담이 생겼다. 이런 걸 나이 차이라고 부르든지, 세대 차이, 또는 문화적 차이라고 부르든지간에 그것이 문젭니다.
이러한 전제를 안고 기도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영성훈련의 중요한 방법의 하나로 신교에선 아마 기도를 빼놓지 않을 겁니다. 마가복음에도 예수가 홀로 제자들을 두고 산에 올라가서 밤새도록 기도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뭘 기도했는지 몰라요. 아무도 그걸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오늘 집중해서 얘기하자는 것은, 예수의 기도가 어떤 기도였는지 우리에게 그 과정을 전해주는 유일한 기도의 장면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여러분이 잘 아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첫째로 기도의 현장인 이 겟세마네 동산 얘기만 집중해 주세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그 현장은 무신(無神)의 현장입니다. 신이 없습니다. 땀 나는 것이 새까만색이에요. 그렇게까지 비참하고 고독스럽고 외롭게 싸우지만 아무 반응도, 인간의 지평을 넘어서서 오는 것은 없었습니다. 기도의 장은 신이 부재하는 장입니다. 곁에서 신이 만약 같이 계시다면 기도할 필요는 없죠. 더군다나 이 수난사에 있어서 눈에 크게 띄는 것이, 수난사 14장부터 마지막까지 신은 부재한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나타나는 일이 없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마가복음에서 보면 죽어서 비명을 지르는 순간까지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 부재의 경험을 안한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기도를 알 수 있을까요?둘째가, 그와 맞물린 것으로서 현실은 캄캄하다는 것입니다.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개인으로 보거나, 자기가 속한 어떤 공동체로 보거나 캄캄합니다. 해결의 길이 전혀 안보입니다. 완전한 절망 상태입니다. 그게 밤이었다는 것도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지마는, 그 때를 전혀 알지 못하고 놀고만 있던 제자들의 모습도 그걸 반영합니다. 제자들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그런 형편입니다. 위기가 임박했습니다.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지금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걸 알고 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하는 기로에 지금 서 있습니다.
셋째로, 여기에서 기도하는 예수는, 그가 지금까지 이해했던 하나님과의 거리를 의식합니다. 하나님은 이러리라고 내가 생각 했던 그 하나님이 아니었어요. 그 전에는 세 번씩이나 내가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리라 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4장부터가 수난사인데, 14장에서 시작해서 예수가 죽는 순간까지, 가장 예수를 사랑하는, 그래서 그 시체에 기름을 바르겠다는 여자들까지도 예수가 사흘만에 살아나리라는 걸 믿은 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안 믿었습니다. 그 여자들이 안 믿었다면 알 만한 일이죠. 없어요. 안나와요. 전에는 난 사흘만에 살아나는 걸 알고 있다면 나도 예수처럼 죽을 수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걸 못해요? 눈 꼭 감고 있다가 사흘이면 살아나는데, 그까짓 걸 못해요? 그때부터 메시아 되는데 뭐. 하나님과 나 사이에 담이 이렇게 높나?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현실과 안 맞는다. 나와 하나님과의 뜻이 일치된다고 그랬지만 아닌 건 아니죠. 그걸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그것이 기도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당신과 내 뜻은 다릅니다. 왜 나를 죽이려 합니까? 죽이려는 것은 분명히 로마제국과 유대교 지도층이지요. 그런데 예수는, 아니, 나를 죽이려는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 나를 왜 죽이려고 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죠. 저 권력자들이 죽인다고 했으면 아마 무엇이라도 만들어서 돌진했을 겁니다. 그러나 끝끝내 너무도 바보같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와 하나님과의 거리를 너무도 리얼하게 나타내는 거죠. 하나님과 내 뜻이 다르다. 내가 지금까지 알았던 하나님이 아니구나. 보통 땐 몰랐는데 죽음 앞에 서 보니까, 위기에 처해서 보니깐 내가 지금 죽어야 될 이유가 없다. 쉽게 말하면, 내가 꼭 죽어야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한 것이죠. “하나님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말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 이유는 몰라도, 결국 이것이 굴복인데, 단지 동의를 한 굴복은 아닙니다. 내 뜻대로 말고 당신 뜻대로 하라는 말은, 나는 아직 승복할 수 없으나 당신의 뜻은 어길 수가 없기 때문에 따른다는 마음의 토로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나에게 엄습하는 하나님의 힘에 맞서서 싸우려는 예수. 그러나 부분적인 것에서의 승리를 포기하고 존재 전체로서의 굴복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의 기도의 결론입니다. 다 승복한 게 아닙니다. 기도는 승리가 아닙니다. 절대로! 그 불안을 그대로 안은 채로, “그러나 전체로서 난 복종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적어도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결국 내가 승복하는 일입니다. 승복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꼭 옳아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복종이 아닙니다. 내 생각과 거리가 있지만 당신의 뜻이 그렇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한 나는 복종하겠습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마태복음에도 있고 누가복음에도 있는데,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얘기가 있죠. 저 공중에 나는 새를 봐라, 들의 백합화를 봐라 하고 설교를 하는데, 제자들 입장에서 예수의 시선은 하나님을 봐라 그렇게 해야 될 장면인데 백합화를 보라고 합니다. 마치 이것은 영생을 의논하려고 했더니 이 무대에다가 가수를 불러놓고 춤을 추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는 심리주의자 같습니다. 내일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 그게 청중입니다. 그 청중에게, 먹을 걸 준다, 먹을 게 생길 거다, 내가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는 것은 얼른 이해가 안되는 얘기죠. 어떤 사람은 “이 양반 배가 부르구만” 할지도 모르죠. 그런데 예수님 머리는 가난이라는 것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 가난한 사람들, 그날 그날 먹을 게 없는 그들에게 “백합화를 봐라” 하면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립니다. 백합을 보라고 한다고 해서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먹여 살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백합화에서 하나님을 연계해서 생각하는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성은, 이 발달된 영성이란 것은 그겁니다. 창기에게서 성녀를 보고, 한 포기의 꽃에서 하나님이 먹여 살리는 것을 보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좁은 교회라는 틀 속에 갇혀서, 여기에만 신이 계시다고 하는 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저 백합을 보라고 하는 것은 또 거기에만 취해 있으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 백합을 보고 하늘만 쳐다보고 만 것이 아닙니다. 백합이, 그 아름다운 꽃이 너희들이 지금까지 말하고 그리워하는, 이스라엘 역사 중에서 가장 많이 가지고 호화롭게 살았다는, 솔로몬의 영광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는 솔로몬을 생각하는 거죠. 저 배고픈 사람들, 저 자연들, 이것을 먹인 하나님, 그리고 그 밑에서 다시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저들을 저렇게 가난하게 한 저 솔로몬, 저런 악당들이 하나님과 경쟁이라도 하려고 하지만, 그들에 대해서 예수는 ‘아니, 네가 저 백합화 하나만 못해. 아무 것도 아니야’ 하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설명하는 데 영성이란 말은 도무지 맞지 않아요. 무슨 소린지 몰라. 그것보다는 생기라는 말이 나아요. 프뉴마는 생기입니다. 이게 기(氣)자입니다. 전에는 이것은 바람부는 것, 바람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후에 점점 이것이 힘이란 말도 되고 숨이란 말도 되고 바람이란 말도 됩니다. 그런데 히브리말 루아흐나, 희랍말 프뉴마도 꼭 같은 말입니다. 프뉴마도 글자 그대로 숨으로 쓰며, 바람, 힘 등을 의미합니다. 하나도 차이가 없어요. 그런데 점점 발달이 되면서 그저 힘만 가지고는, 숨만 가지고는 안되더라, 뭐가 들어가야겠더라 해서 여기에 쌀미(米)자를 넣어서 기(氣)자가 된 것입니다. 쌀이 들어가야 힘이 나오더라 하는 것이죠. 이렇게해서 이걸 놓고 자꾸 변형시켰습니다만 원형은 이것(氣)뿐입니다. 이 바람, 숨, 에너지를 우리 동양에서는 기라고 부르는데 서양에는 없습니다. 여기 맞을 만한 말이 없습니다. 하늘에는 기가있고 땅에도 기가 있고 사람에게도 기가 있었서 이 기가 온 우주를 통과합니다. 아니 조그마한 골짜기에까지 통과합니다. 함부로 그걸 이렇게 저렇게 하면 안됩니다. 기가 통해야 되죠. 그래서 전에는 전부 기와의 관계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돌 하나를 옮길 때에도 절대로 주의를 했습니다. 기가 어떻게 돌아가든지 방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주는 숨을 쉬고 있다, 성령이란 하나님의 숨이다, 하나님이 우주에서 숨쉬는 것 그게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은 생기에 차야 한다고 합니다마는, 그것이 여러분의 영성을 기르는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꽉 막혀있는 것, 요런 것 저런 것으로, 기독교 교리니 뭐니 하는 것들로 꽉 막혀 있는 것들이 툭 터져버려야 합니다. 바람이 확확 불도록 해야 합니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자연, 하늘, 땅 어디에도 통하는 바람, 그걸 가로막는 것과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를 위해서….
로마서 8장은 바울의 걸작 중의 걸작인데, 여기에서 바울은 자연을 들여다 봤습니다. 그리고 자연이 신음하는 것을 느꼈어요. 자연을 망가뜨리고, 자연스럽지 못하게 하고, 숨쉬지 못하게 하는, 그래서 하나님이 숨쉼을 가로막는 가장 악독한 존재가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만물이 탄식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나도 그걸 아주 뼈져리게 느낍니다. 그 탄식을 한 까닭은 참 인간이 나타나기를 바라서입니다. 참 인간이 나타나서 허황된 관계에 사로잡혀 있는 자기들을 해방시켜달라고 탄식합니다. 요새 이른바 환경학이니 무슨 생태학에서 하는 말들이 100% 맞는 말이지요. 인간들이 자연을 욕심과 정복의 대상으로 삼아버렸기 때문에, 사람만이 아니고 자연이 자꾸 죽어가고 있고, 세상이 망해간다고 했습니다. 자연까지 포함해서 이 세상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은 것인데, 사람들이 그걸 버렸어요. 성령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애를 태우고 있습니다.
크리스찬이 제일 중요하게 해방받아야 될 것은 그렇게 막힌 생각을 터버리는 것입니다. 깨어진 자연과의 관계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앞으로 큰 과제로 나와야 될 겁니다. 신학이 이걸 못 가지고 있어요.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라고 본 신학은 식민지시대에 낳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만물이 탄식을 합니다. 그래서 하늘에까지 연계를 시킬 때, 우리의 과제는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온 우주적인 문제가 됩니다. 여기에 눈을 뜨면 그 사람이 정말 영성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그걸 안 가지면 계속 성령을 차단하고, 하나님을 차단하고, 한계를 그어버리고, 신의 전능을 막아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이 글은 1996년 8월 15일에 아우내재단 영성과 평화의 집에서 열린 살림 수련회의 주제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편집자 주>
(살림 1998년 2월호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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