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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소(2004-01-09 16:14:10, Hit : 5561, Vote : 619
 자기 초월

자기 초월
─롬 7:14~25

안병무


이 본문은, 어떻게 보면 아직도 정설이 없는, 어려운 얘기입니다. 몇 가지를 정리하면서 넘어갑시다. 첫째는, 이것이 바울이, 아니면 일반 인간이 예수를 믿기 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예수를 믿은 후에도 이런 고뇌가 있다는 것이냐 하는 논쟁을 신학계에서 계속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양자택일을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분명히 여기서 밝힐 것은, 이것은 예수를 믿기 전이거나 후이거나간에 강제된 인간의 상태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았어도, 아니,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째로, 이것은 우리 개인의, 이른바 실존적인 개인의 고백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주로 제1인칭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괴롭다” 하는 말을 썼기 때문에, 이것은 바울 자신이 아마 예수를 믿기 전, 율법 아래 있을 때의 자기를 고백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자기 안에 있는 모순 때문에 싸우는 자기를 나타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안에는 1인칭 단수(‘나’)와 1인칭 복수(‘우리’)가 교차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바울 개인의 얘기가 아니고 인간 전체, 인간성, 인간의 조건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20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공감대를 가지는 말씀입니다. 물론 거기에 바울의 실존적인 경험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마는, 바울은 자기 실존적인 고백에 멈추지 않고 이것의 보편성을 여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해석하는 데도 두 가지 지금까지 전통적인 해석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것이 고대 희랍의 전통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희랍적 전통은, 선과 악 둘 중에서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실제로는 선을 행하려고 해도 그러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 내적 고뇌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메타몰포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욕망이, 또 한편으로는 이성이 나를 설득한다. 나는 더 좋은 것, 그것을 시인한다. 그러나 나는 더 나쁜 것을 행한다. 묘하게도 분명히 이성적으로는 좋은 것이 이것임을 아는데 내 행동은 결과적으로는 이성에 반하는 나쁜 것을 행한다. 그래서 내 안의 모순률, 이것 때문에 나는 괴롭다.” 여기에 대해서 또 하나의 전통이 있습니다. 특별히 쿰란전통이라고 합니다만, 거기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악한 인류와 죄 짓는 육신의 공동체에 속했다. 그런 고로 나는 괴롭다.” 여기에는 이원론이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악한 세계와 선한 세계가 있고, 이 두 세계가 대결하는 틈에서 내가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나는 현재는 악마가 지배하는 세계에 속해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저 해방되려고 애를 쓰는 상황이다. 여기에서 아하 나는 괴롭다, 누가 나를 해방해 줄 것이냐, 하는 우주론적인 이원론에 입각한 것입니다. 이 둘에서 보면 바울은 후자에 속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무엇 때문에 그렇게 고통을 당합니까? 그것은 15절에 우선 나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게 되지 않고 오히려 안 해야 할 일을 하게 된다, 이게 문제입니다. 하고 싶지도 않은데 하게 되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말이 16절 전반절, 18절 마지막, 19절, 20절 전반에, 심포니의 주 멜로디처럼 바리에이션을 가지고 반복되어 나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게 되지 않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것을 하게 되는 이 고뇌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이것이 주제입니다. 한 동안 낙관주의가 지배하고 있을 때, 세계일차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인간을 무한한 가능성으로 보고 우리 자신의 지식과 우리의 기술이 점점 발전이 되어가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낙관을 해서 그야말로 바벨탑을 쌓아서 하늘에 닿을 것 같은 생각을 가졌을 때에는 이런 생각을 안 했는데, 그 인간이 쌓아올린 모든 것이 세계일차대전에 의해서 하루 아침에 모두 잿더미로 없어진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낙관주의가 팽배할 때가 아닌데 아닌데 하고 소리지르다가 소리없이 죽어버린 키에르케고르를 연상을 하고, 다시 그것을 주제로 끌어들인 30대 신학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키에르케고르, 혹은 파스칼, 토스토예프스키 등을 다시 발견하면서 내 안에 그렇게 모든 것이 가능하고 일사천리로 풀려나갈 희망적인 가능성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쩌지 못하게 누르는 조건들이 있다. 나는 아닌데 묘하게도 내 삶의 조건이 나를 소외시키고 있는 이런 것을 보고 거기서 실존적인 고뇌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싸움은 잘 아실 것입니다. 소설로도 많이 등장되고 소위 카프카의 성(Castle) 같은 것이 대표적인 것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의외로 나는 큰 성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밖에서 빙빙 돌고 있는, 그야말로 내 주제 속에도 못 들어가고 내가 주체도 못된 채 손님같이, 내쫓긴 녀석처럼, 내 일에 주체가 못되고 밖에 도는 나, 그것을 그들이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까뮈나 사르트르나 그런 인물들이 문학적으로 이 자기 안에 문제점, 외적인 일반보편적인 가치관, 혹은 체계와 내 안에 있는 욕구 사이의 상충을 그린 것이 실존주의의 기본적인 사고의 바탕입니다. 문제는 강제된 나입니다. 내가 강제됐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 자신은 억지로라도 자기 자신을 비끌어 매겠다는 노력을 상당히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방학 같은 때가 되면 한달 정도의 두문불출하는 경험 같은 것이 많았어요. 일제 때 마지막에 학병을 피해서 저 북만으로 피해가지고 혼자 있으면서 일년 동안을 거의 사람과의 접촉을 안하고 산 적도 있어요. 하루 종일 그냥 방에 앉아서 갖다주는 밥이나 먹는 생활을 하면서, 일 주일, 이 주일 동안 말 한 마디도 안해서 마침내 어떤 사람이 말을 걸면 말이 안 나오는 경험을 했습니다. 독일에 있을 때도, 혼자 밥을 끓여 먹으면서 하루 종일, 일 주일, 이 주일 땅을 안 밟고 그냥 글에 도취된 때가 많았습니다. 지루한 걸 몰랐습니다. 내가 스스로 나를 차단을 하고 내 문을 잠그고 내가 안 나가는 경험이 있고, 거기에서 느끼는 행복감, 고독, 소위 그 외로움이라는 것이 즐거움입니다. 그런 경험을 일부러 노력해서 쌓아 왔던 사람인데, 감옥에 들어가게 됐을 때는 혼자 있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어요. 강제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10일 동안을 1분도 못 자고 의자에 앉아, 전기 요렇게 맞대놓고, 정신적 고문을 당했어요. 마침내 새벽 4시인가 처음으로 서대문 대학에 입학을 했을 때, 열쇠로 둔탁한 문을 척 열고 들어가라고 하자마자 탁 닿고 바깥에서 철썩 이 문을 채웠을 때, 그 순간은 정보부에서 해방된 기쁨에 평안히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불과 몇 분을 못 자긴 했습니다마는 깨 보니까 이불이라는 것이 전부 드니까 문적문적해요, 꼭 두부같이. 그리고 거기에 펭끼통이라고 하는 변소통을 놨는데, 그걸 열어보니까, 제가 좀 예민한데, 똥, 가래, 뭐 가뜩 섞인 게 턱 들어 있는데, 아휴, 나는 죽었구나, 그랬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 그 방을 옮겨서 다른 방에 넣었는데 역시 나오시오, 그러고 번호를 부르는데 문을 탁 열고 그 둔탁한 열쇠로 잠가버렸습니다. 그 순간 아찔한 게 뭐냐 하면, 일단 쇠로 밖에서 잠겼고 나는 쇠로 열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갇혀 있는데 이제는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하고 불이 나도, 꼼짝 못하게 그들에게 완전히 매도됐습니다. 팔렸습니다. 거기서 주먹밥이더라도 세끼 밥을 주었고, 세수도 하고, 또 얼마 지나니까 일 주일에 한번씩 목욕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 건 문제가 안됐는데 단지 강제됐다는 것, 내가 나갈래도 나갈 수 없다는 것, 바같에서 문을 걸고 나는 문을 열 길이 없어, 내 운명을 저에게 맡겼다는 것이 견디기 힘든 것이었어요. 앉아서 책을 보고 잊어버렸다가도 문득 내가 강제로 갇혀 있다고 생각하면 그냥 이게 끓어오르고 숨이 꽉 막혀버려 마지막에는 완전히 피부가 마비가 되어서 아무리 꼬집어도 아픈 걸 몰랐어요. 마지막에는 조금 이상한 현상까지 일으켜서 정신병자가 안되나 스스로 그랬는데 도무지 앉아 있으면 안되기 때문에 그 좁은 데서 짐승처럼 일어나서 그냥 자꾸 뱅뱅 돕니다. 그 다음에 다리가 아파서 쓰러져도 앉으면 너무 속에 불이 일어나서 또 일어나서 벽을 짚고 뱅뱅 돌았습니다. 먹을 게 나빠도 좋아, 입을 게 나빠도 좋아, 다 좋아 문제가 아닙니다. 그까짓 정도는 이길 수가 있었어요. 일년쯤 그까짓 거 문제가 아니에요. 고독하게 책만 볼 수 있으면 되요. 강제를 당하고 있다, 이것이 분통이 터지는 것입니다.
강제를 하기는,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반성을 많이 합니다. 한달에 한번씩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을 강제를 하고 있지 않나, 복음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얘기하지 않나 하는 반성을 자꾸 합니다. 젊은 때 얘기인데, 목사님들이 가르치기를 연애만 하면 죄라고 하네. 나 하여간 그렇게 배웠어요. 간음이라는 것이 뭔지, 밤낮 간음하는 것이 가장 무서운 죄로 되어있기 때문에, 일기를 쓰면 첫 줄부터 나오는 것이 간음 문제의 고백이에요.
그때 내가 가장 존경하는 모범적인 선배를 만났는데 아, 이 양반도 똑 같은 고민을 하고 있대요. 그게 어떻게 도움이 되던지. 한번은 그가 무슨 고백을 했는데, 속에서 여자 생각이 나면 돈을 물기로 결심을 했대요. 그때 우리 20원이면 살 때인데, 여자 생각을 한참 하면 더 물고 얼른 지나가면 덜 물고 해서 한 40원쯤이 됐대요. 이 돈을 어떻게 할까 하다가, 쓰면 안되고 버려도 안되니까 태워버렸다는 겁니다. 나도 한번 해 보겠다고 해서, 벌금 내기 시작해서 태워버린 일이 있어요. 아, 연애만 해도 안된대요. 총각이 처녀 생각만 하는데 무엇이 안 된다는 거예요? 나중에 알아 보니까 성서에 이렇게 간음하지 말라는 것이 연애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히브리어, 희랍어 원문도 독일말도 부부를 파괴하지 말라는 말이지 총각이 처녀를 연애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에요. 나는 유부녀 생각한 일도 없는데, 총각이 처녀를 좋아했는데 그것도 잘못인 줄 알고 가슴을 쳤단 말이에요. 교회가 율법으로 설교를 한 것이 밤낮 죄가 되어가지고 일생 나를 강제하고 지배했어요. 강제됐으니까 그렇게 힘들어요. 자유롭게 내버려 두었으면 자기 안에서도 자제할 수도 있고 콘트롤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제발 여러분은 해방되시오.
집에 아이 하나 있는데, 고놈 다섯살 때 일입니다. 아, 자지 않고 자꾸 놀고 있길래, 가 자라, 자라 했어요. 그래도 안되니까 할 수 없어서, 아, 명령이야! 빨리 가 자! 하고 소리를 쳤단 말이에요. 그랬더니 이 놈이 쓱 일어나더니 눈물이 핑 돌면서 옆으로 가로 보면서-그 시선을 잊을 수가 없어요-명령이면 싫어, 부탁한다고 해! 하는 거예요. 그때 참 가슴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명령이면 싫어, 부탁한다고 해. 그러니까 명령 밑에 강제받는 것은 싫다는 것은 다섯살짜리 아이한테도 본능적으로 있단 말이에요. 또 한번은 노끈에다가 쇠인지 돌 같은 것을 매서 빙빙 돌려요. 얼마나 위험해요, 그게 빠져나가서 어디 맞으면 안되니까, 그만두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그래도 그대로 해요. 그래서 아빠 말 못들었어, 그만두라는 말 못 들었어? 그랬더니, 왜 하면 안돼?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안되니까 안되지, 안된다면 안되는 거야 그랬더니, 무슨 말이 그래? 이유를 말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아니야,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설명을 했어요. 이것이 빠져 나가면 유리가 깨지고 어쩌구 저쩌구. 그랬더니 그러면 알았어요 그래요. 이해를 시켜달라는 얘깁니다. 내가 납득이 되어 가지고 내가 자율적으로 안 하는 것은 좋지만, 강제는 싫다는 겁니다. 말을 했거나 안 했거나 이미 어린 것도 속에 본능적으로 그게 있어요.
강제가 되면 고뇌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린애의 마음이나 바울의 입장이나 그 면에서는 꼭 같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충실했습니다. 그대로 했습니다.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에 흠이 없도록 했습니다. 그는 마침내는 그 강제된 금단에 반항하는 자기를 발견합니다. 반항하는 그게 나쁘다 좋다는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강제된 데 대해서 분해하고 반항하는, 분화된 자기, 이율배반의 자기를 발견한 겁니다. 왜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하면 할수록 그렇게 그게 더 매력이 있을까요. 왜 남의 집 콩밭의 콩가지를 꺽어서 구워 먹으면 그렇게 맛이 있을까요, 집에 콩이 얼마든지 있는데. 그게 사람의 모습이에요. 이것이 저항의 표출입니다. 그것이 악법인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악하니까 싸우는 겁니다. 바울은 율법은 선한 것이라고 인정을 하니까 문제인 것입니다. 단 강제성은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조건 율법을 반항을 해 버리면 됩니까? 바울은 아니다, 반항을 해 버리면 나도 죽는다, 망한다 합니다. 여기에 고민이 있습니다.
그런데 악법을 가지고 억지로 폭력으로 금하면 거기에 굴복하리라고 보는 이 오늘 집권자들, 천치들입니다. 안되요, 절대로 안되요. 강제로 하면, 힘이 없으면, 그게 속에 한으로 맺히고, 한이 조금 발동하면 화가 되서, 홧병이 생겨서 - 화는 불 화(火)입니다- 불이 붙어서 번져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면 봉기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 인간의 본성을 모르고 정치랍시고 하는 것은, 이렇게 위험한 일이 없습니다. 이 진리를 무시하고 정치는 무슨 놈의 정치입니까?옳은 것을 명령하고 금하는데, 그것이 강제성을 띠면 내게는 그것에 반발하는 또 하나의 법이 있다. 바울은 이것을 발견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선악과 얘기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 질문하는 것이지만, 왜 하느님이 하필 선악과를 만들어 가운데 딱 세워놓고, 이걸 먹으면 죽는다고 먹지 말라고 했습니까? 안 만들어 놓으면 괜찮은데 만들어 놓고 먹지 말라고 그랬습니까? 여기에서 인간성을 그대로 노출한 것입니다. 먹지 말라. 강제성이 있습니다. 먹으면 죽습니다. 먹지 말라는 것과 그 말이 옳다고 전제해도 바로 그런 강제성 때문에 금단의 열매에 대해 매력을 느낍니다. 오히려 저항심이 생깁니다. 여기서 고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뇌하는 아담의 얘기가 나옵니다. 마침내 먹습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들어갑니다. 실락원이 바로 그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역사는 고뇌의 역사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원초적인 경험 속에서 마침내 바울은 절규를 합니다(24절): 아아,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그러다 결국 나는 죽어버린다. 여기에 반항하면 나는 죽는다. 진리니까, 참이니까. 죽어가는 나를 누가 구원해 줄 것인가? 어쩌면 예수가 처형당할 때의 최후의 비명에도 비길 만한 겁니다. 예수의 고뇌도 그겁니다. 아하,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누가 나를 여기서 구해 줄 건가? 기본적으로 말하면 같습니다. 이 고뇌는 같은 고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나를 사망에서 구해 줄 것인가 하는 24절과 그 다음의 25절 사이에는 커다란 무덤이 하나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십자가의 처형과 같은 무덤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25절을 읽어야 됩니다. 누가 나를 구원해 주랴? 무덤입니다. 죽었습니다. 대답이 없습니다. 거기에 대답이 연속 발전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한계는 거기까지입니다. 누가 나를 구해주랴? 내가? 아니, 끝입니다. 그런데 25절에서 갑자기, ‘나는 우리 주님께 감사하며 그리고 그와 더불어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다른 표현으로 바울이 제일 많이 쓰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입니다. 율법이 선한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전달하지만 그 강제성에 견딜수 없어 나는 반항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다시 강제받지 않는 자율의 나를 발견했다는 감격입니다. 여기서 다시 부활한 겁니다. 어떤 상태인가? 다시 거기서 살아난 상태는 어떤 것인가?20대 말에 우리 친구들이 낸 야성이라는 잡지에 실린 내 친구의 글이 있는데, 그게 내 잊지를 못하고 생각하는 데 많이 도움이 늘 되는 겁니다. 하나의 의학도로서 그런 걸 썼는데 그때 아마 상당히 사랑의 고민을 했는가 봐요. 사랑에는 해지는 사랑이 있다고 해요. 짐승도, 벌레도, 우리도, 어머니가 자식에게 해지는 사랑이 있다는 겁니다. 그건 동물적인 사랑이죠. 그 다음 단계로 해야 할 사랑이 있다고 해요. 이것은 강제된 겁니다. 교회가 자꾸, 나도 여러분에게 해야 할 것을 얘기하는데, 나도 율법이 아닌가 하고 고민합니다. 그 다음에 세번째 진짜 단계가 무엇인가 하면 해야 할 사랑이 해지는 사랑입니다. 20대 청년으로 아주 놀라운 표현을 했습니다. 마음에서 나온 거지요, 어떤 상태인가? 강제된 것이 자율적으로 되는 상태, 이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감사하는 그 감사의 내용입니다. 타율적인 것을 자율적으로 결단하고 내가 이니시어티브를 취할 수 있는 것, 내가 주체가 되는 것, 해야 할 것이 해지는 사랑, 그것은 죽음을 극복을 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바울이 그런 표현을 많이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한다. 나와 그리스도가 분별이 안 된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보라, 나는 새로운 존재(New Being, New Creation)이다! 새로운 존재란 다른 게 아닙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즐겨서 하는 존재입니다.
사랑은 무엇이냐 하면 결국은 자기초월입니다. 자기 초월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겁니다. 우리는 역시 이기적으로 생겨 먹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기적으로 자기 욕심만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원래 이기적이고 내 욕심밖에는 모르고 그러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 안에서 나는 비로소 놀랍게도 자기를 극복하고 자기를 초월해서 너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비약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새 창조물입니다.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누가 나를 여기서 구해주랴? 그러고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고 소리를 친 것은 자기 극복을 한, 자기 초월을 한 바울입니다.
이 자기초월의 사건이 놀랍게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지 않고 지금은 계속 교회 밖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얼른 보면 향락에 도취해서 정신 없는 것 같은 그런 아이들이, 고등학교 시절에 죽도록 공부하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서 이제 미래를 설계하며 애쓰던 그것을 어느 순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뛰어듭니다. 이건 단적으로 자기 초월입니다. 자기 초월의 사건입니다. 이걸 빼고 사랑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랑의 제물로서 그들은 지금 현장에서 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자기 초월의 사건이 놀랍게도 교회 밖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교회 안에 있는 우리에게 무서운 도전이라는 것을 순간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살림 1998년 3월호에 수록)




죽이는 세력에 대한 예수의 민중투쟁 ─고전 11: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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