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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소(2004-01-09 16:14:58, Hit : 3551, Vote : 658
 죽이는 세력에 대한 예수의 민중투쟁 ─고전 11:23~26

죽이는 세력에 대한 예수의 민중투쟁
─ 고린도전서 11:23~26

안병무


저는 지난 일주일 동안 목포에 내려가서 두가지 집회의 강연을 했습니다. 그래서 잊고 있었던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가끔 외국에 가서 강연을 하는 일이 있는데, 그럴 때면 “너희 나라는 불교, 유교, 기독교 등등이 오랫동안 점유하고 있었는데, 다시 말하면 일종의 종교의 자유가 있는 다원화의 사회인데, 그 세 종교를 한마디로 얘기하면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 때가 있습니다. 강연 후에 그때 대답했던 생각이 났습니다. 엉겹결에 제가 한 대답은 이런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면, 죽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다 심각하게 생각하지만 세 종교가 초점을 집중하는 것이 전혀 다르다고 했습니다.
유교는 ‘주검’에 대해서 관심을 쏟고 있고 죽은 다음에 무덤을 어떻게 하느냐, 죽은 시체를 어떻게 하느냐, 또 제사법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데 모든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곡(哭)을 어떻게 하느냐 등등 주검에 대한 모든 것이 굉장히 발달해 있습니다. 주검에 대해서는 중국만큼 발달된 곳이 없고 우리도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불교는 주검이 아니라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집중하는 종교라 하겠습니다. 인생 존재론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철학적인 문제이기도 한데, 인생은 왜 죽느냐, 죽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런 것을 심각하게 묻습니다. 사람의 고통을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하여 최후의 단계를 죽음으로 볼 정도로 심각하게 생각해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냐는 물음을 죽음에서 찾습니다. 아무래도 철학이 되고 사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 다음의 일을 묻는데 대해서 공자는 “살아있는 일도 다 모르는데 죽은 다음의 일을 어떻게 아느냐” 하고 딱 거절해 버린 데 대해서, 불교는 죽은 다음의 세계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교리를 전개시키고 있습니다. 불교의 열반의 상태 같은 것도 죽음을 극복한, 그런 상태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는 무엇에 집중하고 있느냐, 내가 서양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대답이 명쾌하지 않아서 제가, 기독교는 ‘주검’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고 ‘죽임’에 대해서 초점을 집중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얼른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죽임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했노라고, 그래서 기독교에는 죽음에 대한 철학도 없고 주검 자체를 지키는 의식 같은 것이 발달되지 않은 대신에, 구체적으로 예수의 ‘죽임 당함’을 절대로 망각하거나 잊어버리지 않고 언제나 물고 늘어진 자들이 예수의 민중들이었다고 저는 말했습니다. 물론 그때 예수를 죽인 세력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기 때문에 우회적인 언어를 썼지만 역시 죽임 자체에 대해서는 절대로 놓치지 않았습니다.
바울마저도 거의 역사적인 얘기를 하지 않는 듯 하면서도 ‘십자가’라는 말을 끝끝내 물고 늘어지면서 “나는 십자가 외에 아무 것도 알지 않겠다”고 한 선언은, 다시 말하면, “나는 죽임의 사건 외에는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예수를 죽인 장본인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쓰지 않았지만 십자가는 로마 제국이 식민지의 소요(騷擾)분자를 잡아 죽인, 정치범을 죽인 그런 처형대니까 “이 사람을 죽인 장본인이 누구인지 우리는 고발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처음부터 크리스찬들은 확실하게 인식하고 가는 곳마다 그것을 전하고 전했는데, 교회에서 공적으로 얘기할 때는 십자가라는 정도의 언어를 썼지만 이름 없는 민중들은, 공적으로 나서서 책임을 져야 될 일이 없는 그들은 입에서 입으로 어떻게, 누가, 어디서 죽였느냐 하는 얘기를 계속 반복해서 했습니다. 그래서 마가라는 복음서 기자에게까지 전해져서 그것을 기록한 책이 마가복음이고, 그것을 통해 그 사건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누가-구체적으로 로마 제국이, 그 하수인인 빌라도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불법한 재판과정을 거쳐셔, 예수를 처참하게 죽여 버렸다. 죄명도 분명치 않았는데 그를 그렇게 죽여버렸다는 얘기를 그들은 가는 곳마다 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처음했던 설교의 내용은 전부 거기에 집중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제 두가지 면으로 얘기를 발전시켰습니다. 운동이란 차원에서 보면, “우리는 ‘죽임’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 예수를 죽인 자를 묻지 않으면서도 죽임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것을 십자가로 표시를 하니까 누가 죽였다는 것이 선명하게 드러났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들은 예수의 죽임 당함을 나사렛 예수라는 한 개인에게 집중시키지 않고 그것을 인류에게 연결시켰습니다. 죽이는 세력은 예수 한 개인을 죽이는 데 그친 것이 아니고 “‘우리’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우리를 죽여야 할 그 의지를 가로막고 대신 죽었다, 죽임 당함을 받았다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 논리를 펴고 이것을 신학화했고, 교리화 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로마 제국, 너는 예수를 죽였는데, 사실 그것은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니고 인류를 죽인 것이다. 너희들은 죽임의 책임자들이다.” 이것이 선교의 내용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투쟁방법은 젤롯당과는 전혀 다릅니다. 젤롯당 같은 사람들, 그 결사대들은 죽이는 자들을 죽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예수의 민중들은 죽이는 자들을 죽이는 것으로 하지 않고, 죽였다는 사실을 쉬지 않고 알리기로 했던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죽임을 당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면으로 보면, 죽인 장본인이 누구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두번째는 이런 겁니다. 역시 이를 사상화시켜서, 그들이 죽인 내용은 어떤 한 인물을 죽인 것에 그친 것이 아니고 인류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인류를 죽인 장본인이 누구냐, 어떤 세력이 사람을 죽임으로 몰아가느냐, 그것을 알린 것이 교리라는 것이 되어 “그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것으로 구성된 것입니다. 그런 대답을 제가 했습니다.
신문에 난 것을 보니까, 어떤 여자가 아홉살 때 강간을 당하고 스물세살에 시집을 갔다가 이혼당하고 또 다시 어떻게 해서 다시 재혼까지 했다가 그래도 뼈에 사무치는 과거의 일이 잊혀지지 않아서, 결국 그 남자에 의해서 일생을 망쳤다는 분개심에서 칼 두 개를 품고 그 남자에게 접근해서-아무래도 칼 하나 가지고 찌르려면 잡힐 것 같아서 두 개를 가지고 가서-그 남자를 찔러 죽인 사건으로 지금 재판에 들어가 5년형을 받았습니다. 말도 안되는 얘깁니다. 그 여자가 죽을 권리가 있습니까? 그 여자가 사실 그 남자를 죽이기는 죽인 것 같으나 사실은 그 남자가 그 여자를 아홉살 때 죽인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건이 제 생각의 발단이 됐었습니다.
그런데 세번째 단계, 크리스찬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 저로서는 새롭게 생각하게 된 것을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것은 바울을 통해서 고린도전서 1장에 전해진 것인데 사실 이것은 마가복음에 기록된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최후만찬 기록이 있지요. 그 최후만찬 기록을 전문가의 눈으로 보면 하나 같으면서 두 개의 얘기를 하나로 기운 자리가 보입니다. 17절에 보면, “예수가 제자들과 음식을 잡수실 때”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조금 내려가서 중간에 다른 말이 있다가 22절에 가서 “예수가 제자들과 음식을 잡수실 때”라는 말이 또 한번 나옵니다. 그래서 음식 먹는 얘기가 두 번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원래 초대 크리스찬들은 두 가지 행사를 했는데 하나는 오순절을 지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크리스찬들은 처음에는 안식일도 지키고 주일도 지켰습니다. 안식일은 쉬는 날로 지켰고 주일은 예수가 부활한 날로 지킨 것입니다. 이것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주일이 안식일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이 날은 해방을 기념하여 축하하는 축제입니다. 자기들도 해방의 축제를 지켰는데 이것이 서서히 바뀌었습니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는 그 생각이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니고, 남에게 전한 것만 아니라 그것이 못이 박히듯 가슴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가 죽임을 당한 그것을 확실히 기억을 해야 되겠다고 한 것이고, 그것이 마침내 최후만찬이라는 형태로 지켜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둘을 한 데로 엮은 것이 마가복음의 내용입니다. 처음에는 우리는 해방됐다 하여 기쁨의 축하를 드린 것이었는데 우리를 위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인식되면서 조금 더 나아가는 동안에는 오늘 읽은 고린도서에서 보는 대로 유월절 얘기는 없어지고 예수의 죽임당한 것을 기념하는 성만찬 얘기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그것만 지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민중운동의 세번째 단계입니다. 음식을 잡수시려고 같이 앉았을 때, 예수가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면서 “이건 내 살이다. 먹어라. 이건 내 피다. 이걸 마셔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든 아니든, 새삼스럽게 인식된 것은 “우리는 예수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 죽임에 참여하고 있는 공동체구나”, 하는 그 인식입니다. 내가 예수의 피와 살과 무관할 수 없다, 우리 공동체와 무관할 수 없다는 자각이 생긴 거죠.
이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젤롯당같이 싸워서 마지막 멸종에까지 이르는 대신에, 우리 몸에 그의 고난을,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자! 그 피를 마시자! 그의 살을 먹자! 하는 자각입니다. 루터가 그것을 마시는 순간 그의 피와 살이 된다고 했던 것은, 그것이 교리적으로 맞고 틀리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루터의 절실한 심정을 얘기한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의미를 부여해 줄 만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와 운명을 같이 하자, 그래서 피와 살을 나누어 먹는 성찬에 참여한다. 바울은 여기에 액센트를 두었습니다. 내가 놀란 것은 과거에는 중요하게 보지 않고 있었는데 이번에 중요하게 보게 된 11장 23절 이하인데, 26절 마지막에 그 말 다하고 주님이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입니다.”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맛이 있구나, 술맛 좋은데”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주가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전파해라, 그것이 목적입니다. 이는 사실 무서운 얘기입니다. 이것을 먹고 마신 다음에 할 일은 주가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끝끝내 싸워서 이것을 전해야 한다. 그러니까 결국 이것은 세번째 단계, 곧 죽임의 사건을 자기의 몸으로 받아서 인카네이션(incarnation)된, 죽은 자의 화신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각오가 초대 크리스찬들, 민중들의 싸움에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하필 예수의 죽음을 전파하라고 했겠습니까? 그들은 이 문제를 끝끝내 물고 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마침내 이 무식한 예수의 민중들은 그 몸이 죽임을 당한 자이자 동시에 증언자이면서 죽임을 당한 자의 화신이 되어서, 환생한 예수의 몸으로서 “세계에 이 사실을 끝끝내 전해야 되겠다. 가는 곳마다 이것을 전한다. 이 죽임의 세계에 쓰러질 때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받아들인 바울은, 여러 곳이 무수하게 많지만, 고린도후서 4장 10절부터 13절에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의 죽음에 참여한다. 나는 매일같이 죽는다. 내 안에 예수가 살았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인카네이션된, 죽임을 당한 예수다 하는 말과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을 전하기 위해서 세상에 나왔다. 이것이 바울의 기본 목적입니다. 끝끝내 사람을 죽이는 이 세력과의 싸움, 그래서 주검,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죽임의 세력과의 투쟁, 이것이 기독교인의 투쟁의 구체적인 목표입니다. 우린 지금 그런 상황에 서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죽이려는 세력이 팽배하고 있는데, 특별히 정권이 그러합니다. 1차적으로 정권과 싸우고 있지만, 그 후에는 정권과 손을 잡은 모든 기업 등등 여기로 흘러 들어오는 모든 풍조가 죽임으로 사람을 내몰고 있고 이 지구를 죽임으로 끌고 가고 있는 이 현장에서, 크리스찬들은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제 여러분은 예배가 끝나면 행진을 하게 됩니다. 정권은 한쪽으로는 UN 동시가입 운운하면서 추파를 던지고 무역교환하며 마주 앉아 둘도 없는 친구처럼 지내면서, 한쪽으로는 통일에 관한 의논만 조금 하면 끌어다가 가두고, 홍목사님만 가둔 줄 알았더니 박순경 할머니까지도 잡아 가두었습니다. 일본 가서 무슨 얘기 조금 했다고, 이제 UN가입을 동시에 하면 적성국이라고 할 수도 없는데, 슬금슬금 이번에 내주면 되는데, 이들이 무슨 망신을 당하려고 또 홍목사님에게 실형을 내렸습니다. 이것을 놔두면 안됩니다. 그런데 단순히 2년 동안 홍목사님의 구금을 연장시켰다는 데 대한 싸움이 아니고, 여기 죽임의 세력이, 실제로 계속 죽이는 연습만 해왔던 이 집단들이 이젠 아예 버릇이 생겨서 국민도 일단 죽임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군국주의가 없어지기까지는 이 싸움은 계속 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우리 세상이 온통 이렇게 자꾸 사람의 생명을 값없는 것으로 알게 된 것은 군사 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 크리스찬들, 예수의 민중들이 싸웠던 그런 방법으로 우린 이 사실을 가능한 한 널리 알려야 되겠습니다. 이 사실에 내포된 뜻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홍근수 목사 개인의 문제가 아니에요. 누구에게나 관계된 문제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시간에 적어도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으면서,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화신이 되겠다, 그래서 이 죽임의 세력과 싸워서 삶의 문화로 세상을 바꿔놓아야겠다는 사명감, 이것을 가지고 현장으로 나갔으면 합니다.

*이 글은 1991년 8월 18일에 향린교회에서 한 주일예배 설교를 다듬은 것입니다.<편집자 주>
(살림 1998년 4월호에 수록)




분단의 담을 넘으려는 바울의 투쟁 ─갈 3: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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