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소개
 
 
연구소 약사
 
 
연구소 소식
 
 
민중신학 자료
 
 
독자마당
 
 
월간살림
 
 
신학사상
 
 
신간안내
 
 
도서신청
 
 
관련 사이트 링크
 
 
안병무 선생님
 
걸어오신길   저 서   성서 연구   추모 문집   사진 자료
 


  신학연구소(2004-01-09 16:15:18, Hit : 5036, Vote : 721
 분단의 담을 넘으려는 바울의 투쟁 ─갈 3:26~28

분단의 담을 넘으려는 바울의 투쟁
─ 갈 3:26~28

안병무

바울은 로마 제국이라는 그늘 밑에서 자라났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울이 벌써 고향을 쫓겨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소아시아 길르기아라는 주의 수도인 다소의 시민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로마 시민권까지 가졌다고 하니까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이었음에는 틀림 없습니다. 바울은 이방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뿌리는 이스라엘 고향에 내리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히브리 사람 중에 히브리 사람,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고, 베냐민 지파이고, 얼마나 유대교에 열성적이었느냐 하면 기독교까지 박해를 했을 정도이고, 율법을 내세운다면 하나도 흠잡힐 것이 없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나는 어려서 만주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저도 약간은 무슨 느낌이 있습니다. 이방 땅에 살면서 내 뿌리는 저기라고 강조를 하는 것은 보통 민족의식에 철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바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계속 제국들에게 삼킴을 당하고, 그러는 동안에 계속 포로로 잡혀가고 자기 고향에서 살지 못해 이방으로 떠나곤 했습니다. 소아시아 일대는 피난민 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일 많았습니다. 다 떠났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만주로 소련으로 흩어지고,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가기도 하고, 혹은 미국으로 흩어져서 살길을 찾아서 헤맨 것 같이…. 그야말로 여왕벌을 잃은 벌들처럼 막 흩어져서 여기저기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희랍제국의 세력을 물리치고 들어와서 주전 64년에 동쪽 정원군을 보냈습니다. 63년에 이미 팔레스틴을 점령하고 바울 때는 유다지방은 총독이 직접 지배하고 다른 지역은 괴뢰분자들을 등용해서 다스리게하는 그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전부 밖으로 나갔습니다. 더군다나 길기아 다소라는 것은 조그마한 소도시이기는 하지만 헬레니즘으로 굉장히 유명합니다. 무슨 종교든지 없는 종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또 항구 도시이기 때문에 상업중심지여서 오고가는 모든 문화가 다 교류됩니다. 별 민족이 다 가득 차 있습니다. 로마 제국이 굉장히 중요시하죠, 문화적으로 보나 종교적으로 보나 정치적으로보나 여러가지로 꽉 막힌 그 가운데 살아서 자라난 바울, 그에게 보면 헬레니즘 냄새가 납니다. 물론 헬라말을 자유자재로 하고 있고 그럼에도 모국어를 절대로 잊지 않고 아랍말을 분명히 잘하고 있는 흔적을 학자들은 지금도 냄새를 맞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최고급 엘리트로서 자라났고 그러나 그는 내 뿌리는 예루살렘 중심인 유다라는 것을 절대로 버리지도 않았지만 누구에게 양보하려고 하지 않은 그런 감정이었습니다.
문제는, 로마라는 큰 이름 밑에 한데 쌓아 놓은 서로 다른 종족들이 각기 동상이몽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복판에 사는 예리한 머리를 가진 바울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금까지 로마가 폭력을 가지고 세계를 정복했고 어느 길로 가든 로마로 다 간다고 하는 정도로 길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것은 모두 군사도로입니다. 그것은 식민지를 무력으로 점령한 그런 길입니다. 이런 마당에 그는 기독교를 만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놀란 것이 바울 편지 전체를 보니까, 그리고 어느 통계표를 보니까 평화라는 말이 43회 나옵니다. 참 놀랐습니다. 그리고 명사로써 화해라는 얘기가 네번 나오는데 네번 다 바울만 쓰고 있는 것입니다. 평화, 화해 이 둘이 그에게 크게 보면은 그리스도 사건을 파악한 두 단어입니다. 로마의 평화를 강조하고 있는 데서 그리스도교를 만나 파악한 것이 평화인데 그것은 무슨 평화냐? 그리스도의 평화, 결국에서는 이 평화 이것을 갖다주려고 한 것이다, 이렇게 막히고 막힌 가로막은 담들을 하나하나 헐어가는 분이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론이라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속죄론 등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바울에게서는 그런 모든 교리들이 세계를 하나되게 한다는 그 큰 방향 설정 밑에서 이해를 해야지, 그렇지 않고는 제대로 이해를 못합니다. 어떻게 인류가 하나 될까? 어떻게 알알이 흩어지고 자기 이해관계에서 날뛰고 있는 이것을 하나 되게 만들까? 고린도 교회에서 노출되었지만, 벌써 교회 안에, 좀 더 잘 먹는 사람과 덜 먹는 사람, 지위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에서, 서로 이해관계에서 마찰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하나로 만드나, 이 사이의 담을 무엇으로 허나, 하는 것이 바울의 가슴을 속타게 하는 내용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판국에서 바울의 대선언을 보십시오.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그 몸에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입니다. 유대 사람이나 헬라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굉장한 선언입니다. 유대 사람이나 희랍사람이나 종이나 상전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하나라고 합니다. 거짓말도 분수가 있지, 지금도 절대로 하나가 아닌데, 지금도 남녀의 예를 들면 차별이 있는데, 바울시대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 말도 안됩니다. 하여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선언을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바울 자신 안에, 그리고 세계에 일대 혁명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세계평화를 이룩하고 인류가 하나되는 천지개벽이 일어났다는 얘기가 되지 않습니까? 이게 우리 목적이 아닙니까? 바울이 이것을 위해서 부름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현실상태에 대한 서술이 아니고 그리스도 사건의 의미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제 종과 상전이 없다, 남자 여자 구별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있어서는 안된다. 그럼 어떻게 하나? 이것이 동시에 우리에게 주는 명령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이것을 이루어라. 정말 예수를 믿으면 계급도 불평등도 없어진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이 사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의 사도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는 그 내용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평화의 사도, 화해의 사도인 바울이 이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세계를 한 바퀴 돌 만큼, 맨발로 세계를 돌았습니다. 그런데 이 평화운동은 현 제도를 현재 갈등을 그대로 두고 전쟁이나 싸움이 없는 곳으로 무마해 버려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평화를 가로막는 것들을 하나하나 극복해 나가는 일입니다. 이게 바울의 일입니다. 기독교에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바울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민족의 자부심, 이 엘리트 의식부터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포기를 어떻게 합니까? 그리스도 때문에 깨끗이 없애버렸다고 합니다. 반평화적인 요소는 전부 거부해 버려야겠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결단입니다. 자기 정체성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뿌리인데 그것을 잘라버리겠다니, 자살행위나 같습니다. 둘째는 이와 동시에 폭력으로 형성된 로마 제국과 그 안에 있는 많은 족속들에게 폭력에 대치되는 새로운 사상과 사실을 현실적으로 알려주면서 실천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되는 것에 방해되는 것을 제거하겠다 하여 먼저 이스라엘이 생명처럼 알고 있는 율법을 무효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면 자기 민족에게 맞아 죽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몇번을 맞아 죽을 뻔 했습니다. 보다 큰 세계, 하나 되는 세계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자기 희생이 없이는 안된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요. 이건 마치 아브라함이, 모든 희망을 건 아들 이삭을 잡아 바치라는 말을 듣고, 칼을 든 것과 같은 결단입니다.
둘째는 랍비들이 특별히 강조한 이스라엘 민족 자신의 선민사상에 대한 신념을 쳐부수는 것입니다. 선민의 특징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할례입니다. 할례를 받은 동기는 위생에 있는데 점점 그것을 특별하게 신학화해서 선민의 표식으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유대인이냐 비유대인이냐 하는 척도가 할례받은 흔적이 됐어요. 할례 문제 가지고, 너 할례 받았느냐? 안받았으면 넌 원수다, 우리하고 상관없으니 상대도 안하겠다, 그랬습니다. ‘너 유대교 들어 오겠느냐? 그럼 제일 먼저 할례 받아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랍권에서는 할례 받는 것이 제일 창피한 일이었어요. 죽는 것만 못하지. 우리 상투 자르는 것 정도가 아닙니다. 여러분 희랍 조각 보세요. 할례는 유대 사람만 받았습니다. 진짜 크리스찬이냐 아니냐를 할례 받은 것으로 정했다면 우스운 것이지요. 할례나 무할례나 하느님과는 아무 상관 없다는 바울의 주장이 갈라디아서 5장 6절에 나와 있습니다. 크리스찬이 되고서도 할례를 강조하는 자들에게, 그 따위 수작하겠으면 그 따위 껍질만 버리지 말고 고추 모두 다 잘라 버려라 했습니다. 바울이 말이 좀 거칠어요. 갈라디아서 5장 12절 입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남의 아들 고추를 잘라버리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선민사상을 주장하는 한, 다른 민족과의 담을 헐 길이 없기 때문에 바울은 이것을 허는 데 적극적이었습니다.
셋째가 우상 숭배 문제하고 관련된 음식 문제입니다. 음식을 유대 사람하고 서양사람하고 나누어 먹을 수가 없어요. 왜? 시장에 나와 있는 음식 하고는 제사 음식 아닌 게 없어요. 한번은 제단에 바치고 먹는 겁니다. 잔치를 베풀어도 모든 음식을 그 신의 제단에 바친 음식으로 되어 있어요. 나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제물에 올랐던 거면 우상숭배가 되어서 안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유대 사람은 외국사람과 사귈 수가 없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귀는 것은 같이 나누어 먹는 것 이상 좋은 게 없어요. 바울은 이것을 현실문제로 들여다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8장에 이 문제를 이렇게 말합니다. 우상은 주의해야지 하고 말하고서도 따지고 보면 우상이 어디 있어요 합니다. 아니면 아닌 것이지, 세상이 이것을 자꾸 우상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음식을 먹으면 우상의 제물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우상이 없으면 제물이 어디 있나, 음식은 다 얼마든지 먹어야지.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래도 못 견디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이 더 중요하니까, 그런 사람을 위해서는 그저 참아주라는 것입니다.
한번은 베드로와 충돌이 생겼는데, 베드로가 할례받지 않은 이방 사람과 음식을 같이 나누어 먹었거든요. 그때 어떤 유대 사람들이 나타나니까, 베드로는 그 할례받은 사람들이 두려워서, 안 먹는 것 같이 입을 싹 닦았습니다. 바울이 성질이 좀 고약해서, 위선을 버리고 솔직하라고 베드로 면전에서 말합니다. 이게 바울에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베드로하고 충돌하면서라도 우리의 관계를 가로막는 것은 없애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의 세계로 묶어나갈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부터 양보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희생, 자기 포기를 하면서라도 하나의 평화의 세계를 이루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를 비우는 것만으로 이런 평화의 문제가 해결됩니까? 아직도 세계의 민족이 무기를 맞대고서 서로 노리고 있는 이 상태에서 가치관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세계 평화가 오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하느님의 구원사를 공개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이 아프도록 사랑합니다. 그러니 희생해야지, 내가 사랑하니까 우리부터 희생하라는 말을 할 수가 있지, 그게 바울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자신을 ‘이방인에게 보냄을 받은 사도’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자기 민족을 버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먼저 이방사람들을 구원해서 유대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게 만들어서 결국 그들도 믿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대 사람이나 이방 사람이나 로마 사람이나 아랍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남자나 여자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할 것 없이 통일과 평화의 세계가 와야겠다는 그런 생각으로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누가 하느냐? 나는 아주 뚱딴지 같은 힌트를 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0절 이하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은 자들이지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현명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약하지만 여러분은 강하며 우리는 영예를 누리는 몸이지만 천대를 받습니다. 이 시간까지도 우리는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없이 헤매면서 제 손으로 힘들여 일합니다. 욕을 먹으면서도 축복해 주고 박해를 받으면서도 견디어 내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좋은 말로 대해줍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이의 찌꺼기처럼 되었고 지금까지 그렇습니다.’
이 말을 보고 여러분 눈물이 안 납니까? 나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울을 별로 사랑하지 않았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동기는 고린도교인들을 나무라는 데 있습니다. 하도 서로 높은 데 앉으려고 싸움을 하니까 그들을 나무랍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들여다 보니까, 로마의 평화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평화의 길을 개척할 직분을 맡은 사도의 길이 무엇인지 보여서, 그 무기가 무엇인지, 그 자세가 무엇인지를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울은 개인이 아닙니다. 우리라고 썼습니다. 그때의 크리스찬들은 예수의 복음을 들고 나가 로마 사회를 평화의 세계로 만들려고 하는 주동세력들이었는데, 바울은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지만 자기도 그 모든 권력을 버리고 그들과 합류된 모습입니다.
‘우리’, 그것이 무엇이냐? 그 편이 너무도 민중적이었어요. 이제 말한 그 말이 너무도 민중을 표현하고 있어요. 사실 그리스도의 평화운동의 선구자들은 민중이었고 바울은 의식화된 민중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을 시사합니다. 그것은 새 평화의 길은 절대로 권력이나 강한 자, 승자를 노리는 영웅주의적인 데서 나오지 않는 것이고 민중에 의해서 세상에서 찌꺼기처럼 보이는 그 속에서 시작되어야만 되리라는 신념이 여기 노출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주목할 것이 바울은, 고린도 후서 5장 66절에서 굉장히 고민한 것인데, 이제부터는 ‘그리스도를 육으로 알지 않으렵니다’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역사에 대해서 나는 관심이 없다’고 한 것으로 해석해 왔고 나도 그 입장이었는데, 이제 새롭게 보이기 시작해요. ‘이제부터는 아무도 육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말은 이제부터는 전의 낡은 가치관은 포기하렵니다. 새 가치관에서 보니 전에는 잘난 놈들이, 의미가 있던 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전에는 찌꺼기 같고 볼 것이 없다고 생각된 그들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에 대해서도, ‘그게 무슨 세상을 구원할 만한 모습이냐? 보잘것 없고 연약하고 무식한 무리를 끌고 돌아다니다가 1년도 못 가서 로마에게 먹혀서 소리 한번 지르고 죽어 버린 것,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지 않아요.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봐서 완전히 시각이 달라졌어요. 그런 것 육체적 가치에 기준을 안 두리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 있습니다. 몸 가운데서 비교적 약하다고 보이는 자체가 오히려 더 긴요합니다. 공동체를 몸으로 비교한 다음에 몸 안에 제일 볼 것 없는 곳이 오히려 가장 소중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문익환 목사는 발바닥을 감옥에서 들여다 보면서 ‘발바닥’이란 시를 하나 썼지요. 이 발바닥이 하는 역할이 굉장한데 이것처럼 천대받는 게 어디 있어요. 예수님이 사람의 몸에서 중요한 것을 추천하라면 발바닥을 추천할 것입니다. 발바닥을 들여다 보면서 ‘네가 나를 업고 다니면서 70이 되도록 나를 끌어왔구나!’ 새삼 거기 앉아서 발견했습니다. 입이 중요합니까? 밑 구멍이 중요합니까? 밑바닥이 중요합니다. 누가 보나 부끄러워서 감추지. 그런데 하느님은 그것을 영광스럽게 여겼고 아름답게 한다고, 전부 거꾸로 보는 거예요. 이 공동체 몸에 아주 아무 것도 아닌 것, 이것은 하느님이 가장 긴요하게 쓰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 주제에 결부시키면 앞으로의 평화운동은 민중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민중에 의해서 새로운 평화의 세계, 민중에 의해서만 이 길이 열릴 것이라는 생각이 바울에게 분명히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서 뚫은 그 군사로를 역으로 전진해서 로마에서 세상의 마지막인 스페인까지 가고야 말겠다는 그 집념을 갖고 그는 싸웠는데 그 목적은 ‘로마의 평화’에 상반된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 세계에 만들어보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이 점에서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면 한국의 평화는 무엇입니까? 통일입니다. 성공했습니까? 못했습니다. 정부가 할 것입니까? 못합니다. 누가 합니까? 민(民)이 합니다. 민이 어디 있습니까? 분산된 민들이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크리스찬들이 바울 만큼 정신차릴 수 있습니까? 그럼 당장 내일이라도 합니다. 지금까지 통일된 것은 민이 다 했습니다. 독일도 민이 왁 밀고 넘어가서 부득이 한 거고, 월남도 민이 독자적으로 일으킨 것이고, 평화를 이룬다는 것은 이렇게 민이 하는 일 아닙니까? 폭력을 해서 봉기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적어도 로마적 방법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민이 주도하는 평화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 글은 1991년 9월 15일에 향린교회에서 한 주일예배 설교를 다듬은 것입니다.<편집자 주>
(살림 1998년 5월호에 수록)





절망을 넘어선 희망 ─ 창 21:14~21, 22:1~14
죽이는 세력에 대한 예수의 민중투쟁 ─고전 11:23~26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zero
한국신학연구소 / Korea Theological Study Institute / http://www.ktsi.or.kr
03752 서울시 서대문구 경기대로 55 선교교육원내 / Tel 02-738-3265~7 , Fax 02-738-0167 , E-mail :
Copyright 2000-2020 KTSI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