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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소(2004-01-09 16:16:04, Hit : 9897, Vote : 642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고─마 11:16~19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울지 않고
─ 마 11:16~19

안병무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이 이야기의 마당은 아이들의 놀이터입니다. 농부, 어부, 만찬장, 결혼식, 여자가 떡을 빚는 현장,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 등등 다양하게 그 마당을 바꾸어왔는데 마침내 아이들의 놀이터가 얘기의 소재가 됩니다.
팔레스틴은 대부분이 박토여서 농부들은 공간을 남기지 않고 모두 밭으로 개간해서 아이들이 뛰어놀 장소가 없었습니다. 우리 시골에도 학교라는 기관이 생겨나면서부터 시골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은 학교 마당이 거의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유대사람들의 학교라는 것은 우리의 전통에 있는 서당과 다름 없이 일반 가정 같은 데서 이루어졌고 사람들이 모이는 회당이 있었으나 놀이터가 될 만한 공간은 없었습니다. 단 하나의 광장은 주기적으로 장사꾼들이 모이는 장터였습니다. 이 장터가 보통 때에도 동리사람들이 석양에 모여서 담소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도 이 장터에 나와 여러가지 놀이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터와 놀이는 분리할 수 없는 관계를 갖게 됐습니다.
아이들이 장터에서 여러가지 놀이를 하는데 그중에서 정해진 것으로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가 있었습니다. 아마 두가지 행사가 아이들의 눈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기는 인간의 생애를 통해 이 두가지 행사가 가장 큰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신랑이 되는 편에서 보면 다른 혈통의 여자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그를 통해서 혈통의 대를 이을 자식을 낳게 하는 것이니 가장 즐거운 날 중의 하나일 수 밖에 없고, 신부의 편에서 보면 자기를 낳고 기른 부모의 품을 떠나 전혀 혈통적으로나 인습적으로 관계가 없었던 한 가정에로 살 자리를 옮기며 평생 얼굴도 못 보던 한 남자에게 몸을 맡길뿐 아니라 그를 통해서 그 씨족의 후손을 퍼뜨려야 하는 운명이 결정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결혼을 해야 한다는 숙명적인 과제가 해결되고 일생의 동반자를 만난다는 호기심과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희망에 부푼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결혼날은 그 집안들만이 아니라 그 동리 전체의 축제의 날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시골에서도 보는 대로 한 집안에서 결혼하는 날에는 온 동리가 떠들썩 합니다. 그런데 아랍민족들 전체가 그렇지만 팔레스틴의 축제는 더 성황을 이룹니다. 하루 종일 먹고 마시고 춤을 추면서 이날을 계기로 그 부락의 공동체 의식을 다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혼의 날을 기쁨의 상징으로 표시한 노래가 많은데, 예수는 바로 이러한 민중적 정서를 중시하고 결혼하는 날을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표현하는 데 곧잘 이용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대사(大事)는 어떤 사람의 죽음의 날입니다. 죽음,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이 인식할 수 없는 영원한 수수께끼입니다. 주변에서 죽음을 계속 보고 있으나 나 자신의 죽음을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우리의 사이를 영원히 갈라놓는다는 사실입니다. 죽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죽음 자체를 인식해서이기보다,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영원한 이별에 대한 슬픔에서 일 것입니다. 하여간 한 동리에 있는 어느 집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온 동리에 죽음의 그림자가 안개 덮이듯 스며듭니다. 가까운 사람들은 친하게 지내던 그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슬픔에 잠길 수 있고 노인들은 자기들의 죽음을 새삼 예감하면서 그와의 이별과 자기의 무상함이 뒤섞인 비애에 잠길 것입니다. 그 가정의 슬픔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자에 따라 그 슬픔의 차이가 클 수 있으나 그의 죽음이 오랫동안 그 집안의 우환으로 짐이 되었던 병상생활이 끝났으므로 해방감을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해방감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집안은 없습니다. 그것은 죽으면 슬퍼해야 한다는 관습이 용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의 풍속에서도 죽음을 당한 집에서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비난의 대상이 되므로 내심으로 슬프지 않아도 슬픔을 가장 잘 표현하는 울음소리가 발전될 정도로 슬퍼해야 하는 것을 의무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례하는 날까지 계속 곡소리를 낼수 없기 때문에 동리 사람들이 마음속의 슬픔과는 상관없이 곡소리를 내는데 참여해 주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관습이 있는데 한걸음 더 나가서 저들은 웬만한 생활 수준이 되면 곡만을 하는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노래하는 패들을 불러 애절한 음악을 곁들이게 했습니다. 아무튼 이 두 큰 행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온 동리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그 행사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어릴 때부터 이런 분위기가 몸에 배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의 유년기에서 소년기에 이르는 사이에 저희들끼리 모여서 하는 놀이 가운데 이 두가지 행사를 저들의 놀이 속에서 재생시키고 자기들이 주역이 되는 쾌감을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대로 저들의 놀이터는 물론 장터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나이까지는 자신들이 실제 주역이 된 듯이 신이나서 잘 어울릴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주역이 되어보고 싶은 욕구는 이런 놀음에만 한하지 않습니다. 저들은 곧잘 즉흥적으로 하나는 엄마, 하나는 아빠, 하나는 형, 하나는 동생 등 등의 역할을 분담하고 자기들이 경험한 엄마, 아빠의 화신이나 된 듯이 그것을 재현해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나이가 되면 그런 놀이가 시들해집니다. 그것은 아무리 그래봐야 자기는 아빠도 엄마도 아닌 힘없는 하나의 어린아이라는 것을 의식할 때부터입니다. 결혼식과 장례식의 놀이도 어느 나이가 되면 자신은 죽은자의 아들도 아내도 아니고 그 장례를 주관하는 동리의 어른도 아닌 변함없는 일개 어린이로 남아 있는 것을 인식했을 때 그 놀이가 싱거워져서 시들해집니다. 이 얘기는 바로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목격하면서 그것을 그대로 반영한 것 같습니다. 어떤 활달한 소녀가 그의 또래를 모아놓고 우리가 이제 장례놀이를 하자고 강권했으나 저들은 끝끝내 놀아주지를 않았습니다. 즉 흥이 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원망을 한 글이 유대문헌에 전달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이 얘기는 유대문헌에 나오는 얘기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을 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않았다.”
피리를 부는 것은 우리말로 ‘풍악을 울려라’하는 것과 비슷한 것인데, 결혼식의 흥을 돋구고 모두 모여 춤을 추기 위한 것이며, 결혼식을 상징합니다. 악대가 피리를 중심으로 흥겨운 풍악을 울리면 거기 모인 온 동리사람들이 함께 밤새 춤을 추므로 결혼당사자인 신랑 신부와 그 집안들을 축하하면서 스스로도 흥겨워 그 날을 즐기는 것입니다. 곡을 한다는 것은 물론 장례놀이입니다. 장례놀이를 하자고 제창한 아이가 어른들에게서 들어온 것과 같은 처량하고 애절한 멜로디로 된 곡을 하면 아이들은 그것에 따라 슬피 우는 시늉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의 권유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아이들의 놀이가 파장이 되어 각기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예수는 이같은 간단한, 그리고 유대사회에서 늘 볼수 있는 이야기를 왜 했을까? 그 이유는 예수 자신이 이 말과 직결시켜 한 말에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얘기하기 전에 이 얘기를 하는 예수에게 눈을 돌려 봅시다. 격언에 가까운 이 짧은 얘기를 하게 된 가능성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민족들이 모두 알 만한 정도로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했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그가 시골장터로 가서 이런 저런 사람들을 접촉하다가 아이들이 노는 장면을 응시한 경험에 바탕을 두었을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예수는 얘기의 소재를 대부분 서민들의 일상 속에서 찾아냅니다.
그 어느 쪽이었든지간에 그는 하나의 구경꾼의 경험담이거나 모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속담으로 된 일정한 교훈을 되풀이하기 위해서 얘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그 세대에서 쓴 경험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갈릴리에서 많은 민중들이 따르고 그를 열렬히 맞이했으며 또 그의 말을 듣고 동의한 듯한 장면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예수의 말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여 생활의 변화를 일으켰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마르코복음에 나오는 얘기대로라면 일반대중은 고사하고 자기의 전 생애를 다 버리고 예수를 따라 나섰다는 제자들마저도 예수의 말을 듣는 듯했지만, 실상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생활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은 별로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길래 그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힐책과 한탄이 자주 나옵니다.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 어떤 목적을 예수에게서 채워 보려고 했는데 예수는 거듭 다른 방향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마지막까지 예수의 말을 사실상 듣지 않은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까지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가 점점 위기에 몰리게 될 때 하나 하나씩 다 떨어져 나가지 않았습니까?그것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민중들은 그 나름대로의 집념은 버리지는 못했어도 예수의 뜻을 따르려고 했으나 밥술이나 먹고 사회적, 직업적 위치가 확실한 사람들은 거의 예수의 말에 귀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나는 의인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습니다만 거기에는 아픔이 따랐을 것입니다. 바리사이파와 랍비들에게 심한 욕을 퍼부으면서도 저들이 자기의 말에 들을 귀를 가져 주기를 원하지 않았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한 쓴 경험을 안으로 삼키고 있는 그가 바로 그 아이들의 노는 장면에서 거부당하고 있는 자기의 심경과 연계시켰을 수 있습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 사람들이 그는 귀신이 들렸다고 말하고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보라 저 사람은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하고 말한다.”
이 말이 예수의 말임을 의심하는 학자는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포함한 예수에 대한 세평이 예수의 귀에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세례자 요한이 곡을 하고 예수는 피리를 불어도 같이 울어주거나 춤을 추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그들을 빈정대는 그 세대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뇌까림입니다.
이 세평에 거짓말이 섞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상 세례자 요한은 금욕주의자로, 은둔자로서 일반 사람들이 먹지 않는 메뚜기나 석청과 같은 것으로 연명하거나 아니면 먹는 날보다 안먹는 날이 더 많은 생활을 계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을 끄는 마력 같은 힘이 있어 무수한 사람들을 그에게 모이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비꼬는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서 보는 사람을 끄는 힘을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귀신에 접한 것이라는 악의에 찬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입니다.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예수에게도 적용한 말인데, 그가 미쳤다고 소문을 퍼뜨려 그 어머니나 형제들이 그를 잡으러 왔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귀신이 들렸다는 말은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민중에게 영향력이 있고 마침내 민중을 선동하여 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을 민중으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만들어 유포시킨 말입니다. 그런데 순진한 사람들은 이러한 유언비어를 생각없이 받아들여 자기들 판단으로 삼아버리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에 대한 세평도 내용상으로 과장된 것은 아닙니다. 아니, 그의 생활의 특성을 가장 간소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는 세례자 요한처럼 금욕주의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유대 종교전통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금식하는 것을 경건한 생활의 실천으로 알고 있었으나 예수는 그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민중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을 사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속 그런 기회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식탁을 같이 하는 것은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데 생명줄과도 같이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것도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의 직계 제자 안에도 세리의 전력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며 세리의 집에서 이른바 죄인들과 더불어 식탁을 같이 하는 장면도 전해지고 있으며 일부러 세리의 집을 선택해서 그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얘기도 있습니다. 세리는 로마가 세금을 거두는 일에 앞잡이 노릇을 하기 때문에 종교적인 판단 이전에 민족적 원수로 간주되어 우리가 일제시대에 우리 국민을 학대하고 피를 빨던 경찰, 헌병보, 특히 사상범을 다루던 고등계 형사들에 대한 감정과 비슷하게, 저들을 죄인 중에서도 첫째 손가락에 꼽은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죄인이라고 하면 종교적인 척도에서 규정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배척하고 멸시해야 할 대상을 말할 때는 죄인과 세리라는 복합적인 말로 대신했던 것입니다. 예수는 분명 이 사람들의 친구였습니다. 그는 그들과 아무런 거리를 두지 않고 사귀었으며 그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 ‘나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 세상에 왔노라’고 까지 선언을 했습니다. 이것은 과정이 아닙니다. 그러나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며 세리나 죄인들의 친구라고 한 표현은 분명히 예수를 경계하는 지도층들이 규정한, 저들이 유포시킨, 악의에 찬 것입니다.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즐긴다는 원문의 뜻은 ‘먹고 마시는데 게걸들린 사람’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입니다. 공자도 아마 사람들과 더불어 식탁을 같이하는 것을 즐겨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제삿집에는 부지런히 드나들었던가 봅니다. 그러므로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를 일러 ‘상갓집 개’라는 악의에 찬 말을 유포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먹고 마시는 데 게걸든 사람이라는 것은 그의 본의를 외면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먹고 마시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민중과 더불어 유대를 깊게 하는 구체적인 행위가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나 그와 같은 계열에 섰다고 생각하는 예수의 운동에 대해서 지배층이 만들어 낸 세평에 비판없이 놀아나 예수에게 등을 돌리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예수의 마음은 극도로 슬펐던 것 같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함께 울지 않으니까 흥이 깨져 손을 털고 맥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예수는 그 세대의 무지와 뿌리깊은 만성병을 보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절규나 예수가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며 가고 있는 방향이 어린아이들의 놀이와 같은 것이 아니고 정말 현실로 다가오는 위기를 알리는 것인데 깊은 만성병에 빠진 이들을 깨우치지 않으면 이제 곧 올 심판의 비참한 저주를 당할 것을 탄식과 같은 어조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상하게도 이 같은 예수의 한탄과 한숨, 패배자의 하소연이 계속 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 모두가 무감각증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대학가에서, 재야에서, 깨어난 종교인 일부가 그리고 여자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파악한 불타는 이슈를 들고 나와도 매년 그 호응도는 급강하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됐습니까? 5공 청문회는 표피를 헤친 데 불과하나 모든 국민이 드러내놓고 보고 듣는 중요한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사건들 중 광주 사건의 현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는데, 아직도 주동자가 나오지 않습니다. 무슨 무슨 소리를 해도 전두환과 정호영이 주역을 했는데 전두환은 마지 못해 백담사에서 연극을 잠깐하고는 지금은 호화판 집에서 나와서 실력 행사를 합니다. 정호영은 매번 도도히 당선됩니다.
6공의 기반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5공의 연장입니다. 6·29선언은 저들이 살아남기 위한 기만이었습니다. 그때 공언했던 대통령 직속 체제 축소를 5공 때처럼 내세웠고, 안기부 등은 제재한다는 것이 다 원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400억 돈으로 청와대에 집짓고 매일 풍악을 올렸습니다. 돈은 기업가들이 마음대로 가져다 줍니다. 이미 반란한 정주영이 수십억에서 백억까지 갖다 바쳤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더 안주니, 결국 평양과의 교류를 제동해서 문제가 터진 게 아닙니까? 수서사건, 제주도 개발법 추진 강행 등도 다 정치자금 노름입니다. 경제는 큰 위기에 있습니다. 계수를 올려 국민들 속일 생각만 하고 자꾸 인플레가 되고 자금 상태가 악화되고 있습니다. 한꺼번에 200만호 집을 짓는 바람에 건축물자는 바닥이 났습니다. 외국과의 관계에서 개방경고가 10년은 됐는데 그대로 방치하다가 이제는 더 막을 길이 없게 됐습니다.
세계에서 아마 가장 많은 경찰수를 가진 나라 가운데 하나가 우리 나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범죄율은 점점 높아갑니다. 강간 성적이 세계에서 3위입니다. 자동차사고 사망율이 세계 제1위입니다. 1년에 실종된 인구가 10만이 넘습니다. 그 중에 90%가 윤락가로 갑니다. 택시 안에서 강간한 사건이 84건이나 일어났습니다. 차마 보고하지 않은 것이 몇십배일 것입니다. 납치범은 계속 늘고, 1년 전에 일어났던 개구리 소년 5명이 어디 갔는지 지금도 모릅니다.
감옥에서 편지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은 감옥은 요새 마피아들의 왕국이랍니다. 권력을 등에 업은 깡패떼들이 감옥을 완전 점령해서 마음대로 휘두른다고 합니다. 깡패의 왕국이 된 교도소, 그것이 지금 한탄의 대상입니다. 외교문제는 어떻습니까? 정신대 문제는 참으로 기가막힌 일 아닙니까? 최소한 20만 이상의 처녀들을 하루에 수십 명의 남자를 상대시키는 배설의 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야말로 그 여성들, 우리 혼의 모태 같은 여성들을 그토록 더럽힌 무서운 사건을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서 들먹거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말을 처음한 것이 일본 사람입니다. 요새 와서는 통제권이 약화되니까 한마디 한마디씩 나옵니다만 그 사이는 꼼짝도 못했습니다. 박정희 때 돈을 다 받아 먹었으니까. 그 돈을 받아 먹은 장본인이 김종필인데, 김종필이 여권 안에서 중요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고, 입을 꼭 다물고 있습니다.
피리를 불면 춤을 춰야지! 곡을 해도 울어주어야지! 어떤 학생 대표들이 최근에 와서 이런 말을 합니다. 정말 피리를 불어서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반응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아무리 중요한 것을 들고 나와도 100명 이상이 모이기가 힘듭니다. 진실한 의미에서 어떻게 할지, 국민들은 만성병에 빠져서 반응이 없습니다.
감옥에는 적어도 1,400명의 양심수들이 갇혀 있는데, 그 어느 때보다도 제일 많은 양심수들이 갇혀 있는데, 박정희 때보다, 전두환 때보다 더 많은데, 심지어 문익환 목사는 지금 75세가 넘었는데, 저희들은 남북을 드나들면서 협상을 하면서 형님, 동생하는 판에 홍근수, 이해학, 김근태, 임수경 등등 자기 희생을 각오하고 들어간 사람들,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잡아가두고 있는데, 저들이 곡을 하는데 같이 울어주지를 않습니다.
예수를 매도한 자들은 예수를 술꾼이라고 하고 먹기만 한다고 욕하고, 또 예수에게 귀신들렸다고 하는 최대의 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곡에, 그의 피리 소리에 사람들이 요동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 하나는 국민의 아편을 제공합니다. 중산층의 꿈, 향락세계의 문을 활짝 열어주고 정치에 대한 염증을 일으키게 하고, 비정치적인 것이 가장 양심적인 것인 듯한 언론 플레이를 계속합니다. ‘정치는 더러운 것’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현실적으로 자기 목을 조르는 것을 알면서도, 더러운 것이라고 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위기의 상태인 줄 안다면, 지난번의 국민 투표율이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국민이 국민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않는 만큼 정부에는 유리합니다.
예수는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탄과의 투쟁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는 ‘지금 혼자 피리를 불고 혼자 곡을 해보는 한이 있더라도, 혼자 남아도 끝끝내 피리를 불리라’고 합니다. ‘나는 곡을 하리라. 언젠가 언젠가 너희들이 더불어 춤을 추고 울어줄 그날까지….’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반드시 그날은 올 것입니다.

*이 글은 1992년 4월 26일에 향린교회에서 한 주일예배 설교를 다듬은 것입니다.<편집자 주>
(살림 1998년 7월호에 수록)




해방과 제사─신명기 6:20~24
절망을 넘어선 희망 ─ 창 21:14~21,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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