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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소(2004-01-09 16:16:56, Hit : 4066, Vote : 658
 전에는 …… 이제는─고전3:2; 13:11-12; 갈 3:23-25

전에는 …… 이제는
─고전3:2; 13:11-12; 갈 3:23-25

안병무



제목을 “전에는……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해놨는데, 위의 세가지 본문이 모두 이전과 지금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린도전서 3장에는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젖먹을 때가 있고 밥먹을 때가 있고, 아이로 있을 때가 있고 어른일 때가 있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순서가 조금 발전돼서 어릴 때, 성인이 됐을 때, 그리고 미래를 내다봅니다. 바울은 장차 얼굴과 얼굴을 마주할 때의 삼단계의 신앙단계를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10~20년 아니면, 낳을 때부터 해왔는데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에서 이런 단계를 거쳐왔습니까? 신앙생활을 좀 잘한다는 느낌이 있습니까? 진전해온 흔적이 보입니까? “전에는 그러나 지금은” 하는 질적인 변화의 경험들을 하고 있습니까? 그런 희망을 안고 있습니까? 지금은 거울과 거울을 보는 듯 희미하지만 이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때가 온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꼭 그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대전제에서 얘기하는 것은 사실은 마태복음입니다. 제가 열심히 마태복음 분석을 하고 틈 나는 대로 공부를 했습니다. 마태복음의 한 면을 소개하겠습니다. 산상수훈(마태 5장)과 병행되어있는 누가복음 6장에는 “들의 설교”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둘을 대조해 보면은 놀라운 차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연구한 결과는 ‘누가복음에 있는 것이 원형에 가깝다. 예수가 하신 말씀에 가장 가깝다’고 하며 그것은 사실입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지금 굶주린 자는 복이있다. 그리고 슬피우는 자는 복이있다” 글자 그대로 가난한 자, 슬피우는 자, 굶주린 사람들을 안중에 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시대에 예수 자신이 그랬으니까 그들에게 먼저 주목했습니다. 이들이 일차적인 대상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 중 마가복음이 70년 경에 쓰여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죽은 다음에도 40년 동안 공백기간이 있었습니다. 성서는 아주 빨리 문서화 되었습니다. 불교는 문서화된 것이 500년이 지나서였습니다. 우리는 불과 40년 사이에 지금 모습으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하고 누가복음은 90-100년, 적어도 마가복음보다 20년 내지 30년 후에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큰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가복음은 대개 예루살렘이 함락이되고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해버린 그 때와 때를 같이 합니다. 어쩌면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썼을 거라고 보면 적어도 63년 64년 이후 70년 경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
마태 때에는 예루살렘은 모두 다 망해버리고, 사람들이 축출을 당하고, 성전이 다 부숴지고, 그 중심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민족공동체로서의 중심지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엄청난 싸움을 했기 때문에 전부 흩어져서 소아시아를 비롯한 유럽 일대로 퍼져나갔습니다. 부락공동체 혹은 씨족사회에 있어서 자기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이때에도 여전히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허허벌판 같은 삶의 보장이 없는 그런 곳에 흩어져서 삽니다. 크리스챤들이 거기에 소수로서 끼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들이 공동체를 의지하고 사는 것인데 그중에 마태라는 사람이 속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한 민족으로서 중심이 없어서 성전을 중심으로 묶여졌던 것이 깨지고, 국토도 뺏겼으며, 알알이 흩어졌는데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이 공동체의 문제였습니다.
여기서 마태복음의 공동체가 마태교회라고 하면, 그들은 소수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속해 있는 이 민족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했습니다. 마태에는 민족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이라고 생각되는데, 온 세계에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이방에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에도 가지 말고, 오직 잃어버린 이스라엘에만 가라는 말은 거기에만 있습니다. 희랍여자가 예수에게 와서 자기 아이를 고쳐달라고 할 때에도 예수는 이스라엘 사람외에는 누구를 위해서도 파견받지 않았다고 하며, 이스라엘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바로 이때에 우리가 우리 민족의식을 분명히 해서, 공동체를 결성해야겠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우리는 소수인데 무엇을 할 것인가? 거기에서 우리끼리 잘하자는 것이 아니라, 전 교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고 동시에 이스라엘 사람을 포함한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것을 혼자가 아니고 함께 생각해서, 그 공동체에 의해서 드러난 것이 마태복음 속에 산재해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누가복음의 것이 원래 모습인데,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느님 나라가 저의 것이다’는 것은 예수에게 절실한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마태복음에 수식어 붙이는 것이 오히려 현실을 모호하게 만든다고 저 자신도 마태를 거부해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영에 있어서, 영 가운데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은 그냥 가난에 찌들려서 비참한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의지적으로 영 가운데 있는, 가난한 자라는 것은 구약적인 전통으로 말하면 의인이라는 말입니다. 가난한 자라는 것은 높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영 가운데 가난하다는 것은 벌써 물질적 차원을 넘어선 의식적인 가난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지금 굶주린 자는 복이 있다.” 거기에 맞물리는 얘기는 그저 굶주린다, 먹을 것이 없어서 밥을 요구하는 그런 소극적인 상태에 있는 것에 대해서 마태는 중요한 것을 하나 붙였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그저 굶주린것이 아니라 의에 주렸다, 정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라고 해서 단순하게 목마른 사람이 아니고 정의에 주렸다고 할 때, 벌써 성격이 달라집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 “슬피우는 자는 복이 있다.” 이것이 처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원문의 글자가 다릅니다. 이 애통하는 자를 마태가 무엇으로 생각했는가 하는 것을 말해주는 단어가 9장 15절에 한번 나옵니다. ‘왜 당신은 금식을 안합니까?’하는 대답에 대해서, 예수는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애통할 필요가 있느냐, 그러나 신랑이 없으면 그때 애통한다’고 답합니다. 여기에 애통한다는 말은 슬피운다는 것과 다른 표현을 썼는데 분명히 마태는 남이 때리니까 슬퍼 운다든지, 누가 죽어서 슬피 운다든지 하는 그런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말 비상한 때에 이르렀구나, 이제는 박해가 왔다고 하는, 울분에 견딜 수 없어서 통분해 하는, 적극성을 띤 말로 바꾸었습니다. 누가하고 비교하면 차이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교회의 성원이라고 생각할 때, 전에는 단순히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우는 사람 정도라면 이것은 젖을 달라고 우는 상태입니다. 요새 교회가 다분히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밤낮 의지하고 사는 것, 남의 은혜를 받아야만 살겠다는 그런 얌체적인데 대해서 마태는 그후 20년, 아니 어쩌면 예수와의 관계에서는 50년, 그때 그리스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는 입장을 달리합니다. 아니 우리는 의도적으로 가난했습니다. ‘영에서 가난한 자’라는 의미는 상당히 확대가 됩니다. 의식화된 것입니다. 또 우리는 그냥 굶주린 것이 아니라 정의에 굶주렸다. 여기에는 투쟁의 의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의미에서 얻어 맞았으니까 반사적으로 우는 약자의 모습이 아니고, 적극성을 띤 형태로 달라집니다. 그렇게 보면은 누가에 없는 얘기들이 나옵니다. “자비한 자는 복이 있다” “마음이 깨끗한 자……” 이것도 노력이 없이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보통 얘기하면 윤리적인 가치가 보인다고 할까, 신앙적인 가치가 보인다고 할 것인데, 나아가서는 적극적인 상태로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게다가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 쉽게 말하면 피스메이커(Peace Maker)가 되는 사람, 이제는 단순히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일하러 나서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런 것이 붙어나갑니다.
한 마디로 마태복음에 있어서는 이제는 어린애가 아니고 어른이 되었습니다. 밤낮 받아만 먹는 상태가 아니고 주어야겠다는 것,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취하는 민중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노출하고 있습니다. 누가하고 비교하면 교회 공동체의 일원인 민중들의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그저 가난하고 굶주리고 억눌려서 얻어 맞고 슬피우는 자들이나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다는 자, 피해자, 소외자 그래서 남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아이의 모습인데 마태에 있어서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남에게 베푸는 시의자의 위치로 둔갑을 합니다. 그런 자의식에 선, 주체적인 의식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바꾸어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주체의식은 마태에서는 확대되어 나갑니다.
이미 90년대쯤 되었을 때에는 박해가 굉장히 심해서 기독교인들의 설 자리가 어려웠습니다. 살아날 길이 막연할 때, 그 이론들이 모두 변동이 되었을 때, 마태는 각기 주체의식을 가짐으로써 내적인 힘을 결속시키고, 의식화되는 길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을 때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은 마가복음에도 있는 것입니다. 그 고백을 하니까 마가복음에는 예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않고 “나는 이제 십자가에 죽을 거다”하고, 베드로가 다르게 나오니까 “사탄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그것을 그대로 계승해 실었는데, 여기에는 예수가 베드로를 보고, “너는 바위다. 내 교회를 네 바위 위에 세우겠다. 죽음의 권세가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네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땅에서 열면 하늘에서도 열리고 네가 땅에서 닫으면 하늘에서도 닫힌다”고 하십니다.
민중의식이라는 말로 바꾸어 생각해도 좋고, 교회원으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아까 산상수훈에 나온 그 정도의 주체의식이 얼마나 앞으로 나갔습니까? 베드로는 결코 개인이 아닙니다. 공동체입니다.
우리 나라가 제대로 되가지 않습니다. 경제 상태도 상당히 위기상태에 놓여있고 남북이 하루 아침에 열릴 듯 하더니 지금 냉각상태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미국, 일본에 끌려다니면서 정권 유지에만 정신이 없습니다. 지난번에 우리 교단이 주선해서 통일 토의를 했습니다. 정부차원의 사람하고 정당의 대표들이 다 모였습니다. 저도 기장 대표로 나가서 팬넬토의를 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정부는 절대로 안 한다. 우리 민의 손길로밖에 할 길이 없다. 우리 민이 열면 열리고, 닫히면 닫히는 것이지 더이상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이 마태교회의 속한 이들이 어떤 의식까지 올라갔느냐 하면, ‘모든 열쇠를 우리가 가졌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전권을 주었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홍 목사가 통일문제 때문에 끌려가서 감옥에 들어가 있습니다. 처음에 데모도 하고 그랬습니다. 이제는 이렇거나 저렇거나 향린교회는 통일문제로 목사도 끌려가고 데모도 했으니까 ‘이 열쇠는 우리가 가졌다’ 이런 의식의 일치가 되면은 무서운 세력입니다. 통일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라는 주체적 의식을 가지면 수가 많든 적든 간에 무서운 것입니다. 마태공동체는 그렇게 됐습니다.
마가에는 그 밑에 내려와서 제자들이 자기 욕심들만 부리고, 예수가 가는 길마다 가로막은 것이 그대로 실렸습니다. 실제로는 대조가 됩니다. 제자들도 얼마나 한심한 상태에 있었나 하는 것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는 영광의 길로 갈 것이고 자기들은 덩달아 영광의 자리에 앉을 거라고 생각했다가 안되니까 배신하는 그런 무력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가 부활한 다음에 경험한 공동체에서 그 민중들은 성인이 되어서 바위와 같은 새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식적인 결단을 한것 그것이 마태교회의 결단입니다.
마지막으로 28장에 주목할 말이 있습니다. 이 마태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는, 예수의 민중인 우리는, 하늘의 열쇠를 가졌다. 우리는 성인이다. 우리가 세상을 위해서 해야할 일이 있다. 우리는 전권을 가졌다. 아직도 이스라엘 영역에만 머물러 있던 그들에게 부활한 예수가 처음에 산상 설교를 하던 그 산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거기서 한 예수의 말인데, 이것은 동시에 마태 교회원들의 자기 의식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을 끝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거꾸로 말하면 마태공동체 일원들이 ‘우리는 이제 성령을 받았고, 세상을 뚫고, 세상을 향해 나갈 명령을 받았다. 예수가 가르친 그 말을 전하고, 그 이름으로 세례를 주며, 회개를 하고, 새 삶의 전환점을 주며, 그리고 명한 모든 얘기를 실천으로 옮기며, 혁명의 역사 전선에 나서겠다. 내 뒤에는 항상 주님이 함께 하신다. 나는 홀로가 아니다.’ 이런 자의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경험 후의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마침내 좁은 이스라엘을 털고, 예수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서 성령의 힘을 받아 세계를 변화해 갈 전선으로 나서는 선전포고입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을 하고 더 나가서는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이때가 되면 무위의 경지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할 때가 된다면 무위의 상태입니다. 그것이 불교가 노리는, 노장이 노리는 경지입니다. 무위의 상태란 품에 안긴 상태입니다. 믿는 사이는 말이 필요없습니다. 그저 함께 있음으로 품안에 있는 것으로 느끼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그때는 신앙도 정지되는 시대 마지막 골인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 무위를 위해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그 단계를 거치지 않고는 안됩니다. 바울도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 같아선 무위의 상태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말은 편안히 죽고 싶다. 그러나 아직은 할 일이 있기에 죽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글은 1992년 6월 28일에 향린교회에서 한 주일예배 설교를 다듬은 것입니다.<편집자 주>
(살림 1998년 9월호에 수록)




숨 ─겔 37:7-10
해방과 제사─신명기 6: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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