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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소(2004-01-09 16:17:26, Hit : 4549, Vote : 694
 숨 ─겔 37:7-10


─겔 37:7-10

안병무


오랫만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많은 분들 앞에서 설교하는 게 처음이에요. 아직은 그렇게 하면 안되는데…… 이제 홍목사께서도 얘기했지만, 의사는 하지 말라는데 “얘기하다 죽으면 천당가겠지요” 하지 않겠어요. 얘기하다가 죽으라는 거예요. 글쎄 향린교회 창립에 관여한 책임도 있으니 죽어도 괜찮겠지만, 아직 아내는 샤프하게 살아있고 아이도 아직 대학생이고 해서 벌써 죽어도 되나 하는 걱정도 하면서, 그래도 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유는 요새 하도 숨이 가빠서 숨이 막혀서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오늘 죽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안 죽을 거예요. 까닭은 제 얘기를 되로록 높게 안하고 싶고, 오늘 이것저것 순서도 많고 해서 꼭 20분으로 정해놔야겠어요. 안 그러면 제 얘기가 자꾸 길어져요. 요즘 제가 할 말이 많아졌어요. 옛날에 노인을 보면서 노역을 부린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도 그렇게 될까봐 20분으로 끝내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에는 할 말을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적어서 했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이 없어요. 속에 있는 한 마디라도 뼈 있는 얘기를 하는 게 중요하고 진실된 얘기라고 생각됩니다. 횡설수설하더라도 말이죠.

왜 ‘숨’이라는 제목을 선택했냐 하면, 계기가 있어요. 여기 홍 선생님이 앉아 계시니까 설명을 잘 못한다고 할지 몰라도, 제가 7시간 동안 심장수술을 받았죠. 강의 한 학기 하러 미국에 갔다가 수술을 받았죠. 다른 건 다 빼더라도, 호흡기를 중단시켜 버렸어요. 그래서 숨을 쉴 수 없는 시간이 상당히 길었지요. 숨을 쉬지 못하니까 목소리가 안 나오죠. 그런데 어렴풋이 의사의 말이 들리는데, 영어로 걱정말라고 말하더니 “The machine works for you” 하는 거예요. 난 그 말을 죽어도 잊지 못하겠어요. 내 숨을 내가 쉬어야 하는데 기계가 나 대신 숨을 쉰다는 거예요. 어떻게 가슴에 못이 박히도록 이상한 느낌이 나는지, 실상 숨을 못쉬니까 말은 전혀 못하죠. 적어도 이틀을 그렇게 지냈습니다. 숨을 쉴 권한을 내가 가지고 있는데, 숨을 쉬지 못하면 내가 아닌데, 심장도 정지해 있는데 숨까지 못 쉬다니 하는 생각을 했어요.
오늘 오랜만에 향린에 나왔는데─제가 여길 아주 안 나오죠. 그건 제 주의(主義)가 있어서 안 나옵니다. 후배 목사님께 이러쿵 저러쿵 노역을 부릴까봐 안나와요─그래 1년 동안 안 나오면서, 미안하지만 숨을 쉬고 있나, 이 사람들이 그동안 죽지나 않았나 하는 생각이 암암리에 있어요. 본래부터 있던 숨이 있는데 그 숨을 제대로 쉬나?숨이란 말에, 우리가 편지할 때 ‘소식’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 원뜻이 별게 아닙니다. 편지한다는 것은, ‘내가 숨을 쉬고 있습니다’ 하는 것을 전하는 겁니다.‘아직 내가 죽지 않았습니다’ 하는 거죠. 제가 여러분들 소식을 간접적으로 조금씩 들었지만 그래도 소식을 제대로 못 들으니까, 그래도 숨을 쉬고 있나 궁금한 겁니다. 이제 40년이 가까운 오랜 세월 동안 다 늙어서 숨도 고르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런 제목을 선택한 겁니다.
오늘 본문이 묘한 본문이에요. 요새는 제가 나이탓도 있지만, 그동안은 경향적인 설교를 주로 하고 성서를 읽어도 경향적인 본문을 골라서 읽곤 했는데, 이제는 내가 미처 못본 것을, 내 취미를 떠나서, 일부러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번에 한신대학에서 이런 식으로 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도 그런 것의 한 면인데, ‘숨’이라는 것을 교회가 얼마나 생각하고 있나, 동양에서는 ‘숨쉰다’라는 말같이 중요한 말이 없습니다. 건강, 정신건강도 숨을 제대로 쉬느냐 못 쉬느냐는 언어로 모두 포괄되어 있습니다. 우리말 ‘숨을 쉰다’는 말도 참 좋은 말이데, 이 향린교회는 어떤 숨을 쉬나? 아니면 숨이 막혔나?그런 전제에서 제가 에스겔서를 읽었지요. 여러분이 잘 알듯이, 에스겔은 포로생활을 하고 거기서 다 늙어가지고는 이제 돌아올 수 있는 기운이 불 때, 일단 돌아는 가는데, 포로생활 수십 년에 이제는 모두 죽어가는 모양, 체념에 빠진 모양을 보며 ‘저것들 이제 돌아가면 뭘 해. 돌아가서 새 나라를 건설해야 할 텐데…… ’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꼴이 모두 죽어가는 것으로 보였던 겁니다. 즉 마른 뼈다귀같이 보였는데, ‘저것들이 그대로 돌아가서야 어떻게 할건가?’ 그런 걱정을 했나봐요.
환상을 보게 됐지요. 끌려가서 어떤 골짜기에 가니까 시체들이 가득한데, 하느님이 명령을 했습니다. “저것을 향해서 말을 해라.” 이전 번역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생기야, 사방에서 불어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들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공동번역에는 “숨아, 사방에서 불어와서 이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라” ‘스쳐’란 번역은 역시 잘못됐습니다.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가 맞습니다.
그랬더니 그 산산히 흩어져 있는 마른 뼈다귀들이 다시 생동하기 시작해서 핏줄이 생기고 살이 생기고 가죽이 덮였습니다. 이제는 ‘생물화’됐습니다. 그러면 살았나 하면 그렇진 않고 그런 다음에 “가서 숨들에게 말을 해라. 숨아, 사방에서 불어와서 아직도 살지 않는 저것들에 숨을 불어 넣어라. 그러면 비로소 생명체가 될 것이다”는 거죠. 살아 움직이면 반드시 생명체냐 하면 그렇진 않고, 목적을 분명히 가진 그런 생명체가 되리라. 실제 이렇게 된 환상을 에스겔이 봤다고 얘기합니다. 지금 이제 오랫동안 포로생활이 끝나 돌아가는 이 상황에서 그냥 시체 같은 꼴 가지고 돌아가서는 새로운 나라를 건국할 순 없어. 그래서 숨아, 숨아 하는데 이것은 원어로 ‘루아흐’라는 겁니다. 이건 하느님 자신도 아닙니다. 우주 안에 팽창해 있는 ‘숨’을 가리키는 거죠. 이것이 살아 있는 생명체와 연결이 되어서 정말 목적을 가진, 그리고 돌아가야 할 곳에 진군하는 군대처럼 되도록 하는 거죠. 그대로 되는 것을 에스겔은 보았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소원이기도 하지만, 민족을 사랑하는 에스겔의 염원이 여기  지금 반영된 겁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 저는 오늘 한국의 사람 전체가 마른 뼈다귀같이 서로 연결이 없고, 사회를 연결시켜줄 핏줄도 없고, 그걸 덮어줄 살도, 가죽도 없는 상태로 알알이 흩어져 있는 숨 막히는 현장과 연결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창세기 2장 7절에 있는 그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이대로 둬서는 안되겠다, 창조를 해나가려면 동반자가 필요하다 해서 흙으로─본래는 ‘먼지로’입니다─사람 모습을 만들었다, 그래도 아직 산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숨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갑자기 생동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됐다, 생명이 탄생됐다, 홀로 된 것이 아니고 관계에 의해서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났다, 이 도식은 꼭 같습니다. 단어는 ‘루아흐’는 아니지만요.
‘루아흐’는 히브리말에선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때로는 생명이란 말과 연결시키기도 하고 떼어서 쓰기도 합니다. 때에 따라서 그렇습니다. ‘루아흐’만 있으면 되는 거라는 거죠. 이걸 우리 동양의 말과 연결시키면 ‘기’(氣)라는 말과 꼭 같습니다. 신약에서는 우리가 흔히 ‘성령’, ‘영’이라고 번역하는 ‘프뉴마’라는 겁니다. ‘영’이란 것은 사실 맞지 않는 말이고 사실은 ‘기’(氣)입니다. 그 ‘기’(氣)는 프뉴마나 루아흐와 꼭 같이 ‘힘’이란 말도 되고 ‘숨쉰다’는 말도 되고 ‘기운’이란 말도 되고, 하여간 꼭 같은 무언가를 말하려는 말입니다. 뭔가 감지하고 있는 것을 이런 식의 언어로 표현해 왔습니다.
‘루아흐’, ‘프뉴마’, ‘기’(氣), 특별히 ‘기’(氣), ‘영’ 말고 ‘기’(氣)가 중요한 말입니다. 우린 ‘성’(聖)자를 좋아하는데, 난 ‘성령’이라 하지 말고 ‘聖氣’라고 하자는 주장인데 발음이 이상해서 쓸 수는 없지만, 어쨌든 뜻은 기입니다. 기, 이것은 존재하는 가장 본질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고어에도 기(氣)자는 원래 氣만 쓰고 米는 없었습니다. 그건 후에 들어갔습니다. 기운도 배때기에 쌀이 들어가야 나오더라, 이렇게 생각해서 米자를 넣은 것이지 원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 수(水)변에 氣를 쓰면 물의 힘, 쌀미(米)자를 넣으면 똥의 힘, 이렇게 변동이 됐지 원래는 氣입니다. 원래 ‘영’(프뉴마)은 기(氣)입니다. 그렇게 번역해야 옳은 겁니다.
그런데 이 기는 생명하고 연결되어 있는데 그 자체로서는 생명이 되지 않습니다. 언제 되느냐 하면, 제가 일일이 설명할 수 없지만, ‘관계’에서 성립됩니다. 기는 곧 하느님이 아닙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명체가 되는, 그런 의미에서 생명의 본질입니다. 관계에서 되는 거지 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에 모든 걸 다 먹지만 먹어서는 안된다는 나무가 몇 개가 있었습니까? 둘입니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나무와 생명나무, 둘입니다. 이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어 버리니까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먹을까봐 하느님은 거기서 인간을 쫓아냅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만, 하느님은 이렇게 해서 인간의 역사라는 것이 시작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생명이 그대로 자기 소유가 되면 아마 역사는 진행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내쫓았지요. 이 ‘생명나무’에 대한 그리움이 그대로 있습니다. 잠언에 네번이나 나오고 신약의 계시록 22장에도 한번 나옵니다. 또 요한복음도 생명나무라는 말은 안 썼지만 ‘생명’이란 말을 크게 등장시킵니다. 예수의 뿌리가 무언가, 제 말로 하면 민중의 뿌리가 무언가, 요한은 이걸 생명으로 보고 ‘내가 생명이다, 생수다’라고 한 겁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뿌리, 이것이 생명이고 ‘조에’(희랍어로 ‘생명’을 가리킴)입니다.
기(氣). 어쨌든 나는 이걸 기란 말로 고쳐서 생각하자는 겁니다. 우리는 성령이란 말을 늘 쓰는데, 뭣인가 차 있어야 되는데…… 성서에는 ‘차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원어로 ‘플레로마’라는 말인데, ‘때가 찼다. 하느님의 나라가 임했다’하는 것이 같은 말이죠. ‘때가 찼다’는 말은 성서적인 용언데, 그릇이 찼다는 말은 써도 ‘때가 찼다’는 말은 성서 이외에는 잘 쓰지 않습니다. 어쨌든 ‘플레로마’란 말을 성서는 참 좋아합니다. 어떻게 때가 차느냐? 때가 차야 곡식이 영글듯이 영글어야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지 때가 차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죠.
이 사실을 여러분은 우리 한국의 지난 얼마 동안의 역사 속에서 보았을 겁니다. 때가 ‘플레로마’되어야 민중운동도 영글지, 그게 안되면 안되요. 이상하지요. 노태우를 잠깐 동안이지만 항복시켰던 6·29를 가능케 했을 때 그 분출하는 모습도 하나의 때가 영글은 모습이었습니다. 4·19나 뭐나 다 그런 거지만, 때가 찬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무엇인가 차 있어야 되지요. 꽉 차 있지 않으면 뭔가 공허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교회가 뭘로 차 있나? 사실 기(氣)로 차 있어야지. 우리 말로 하면 성령으로 차 있어야지인데 이 말을 여러분이 하도 들어서 전 다른 말로 하는 겁니다. 기가 차야 합니다. 이 말은 거꾸로 들리지만, 기가 막힌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가 플로레마해야 한단 말입니다. 기가 소통이 되어야 활기 있는 가정, 사회, 민족공동체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기가 막혀 있습니다. 사방에서 기를 끊어내는 공작정치가 온통 뒤덮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기가 막힌거죠. 기가 막혔어요, 지금. 모든 곳에 막혔습니다. 경제계고 어디고 모두 막혔버렸습니다. 전에부터 말해온 풍수설 같은 거, 근거없는 얘기같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천년 역사 동안 바람과 비와 기후가 그런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그저 마음대로 깎고 무너뜨리고 잘라버립니다. 이것은 기를 잘라버리는 거죠. 난 이걸 미신이라고 안 봐요. 기운이 있어요. 내가 말하는 기운은 인격, 소위 페르조나(persona)라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이 우주에 찬 힘을 가리키는 겁니다. 기입니다. 이걸 가리켜 프뉴마라고 했던 거고 루아흐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있어야지. 이게 차 있어야지. 이게 없으면 냉해서 안되요. 성령파가 하도 많으니까 거기 저항하는 의미에서 일부러 냉랭하면 잘하는 줄 알지만, 아니 있어야죠. 차 있어야지. 그게 싫으면 어쨌든 무엇으로든 차 있어야지.
중요한 건 이겁니다. 현실적으로 가정 하나를 놓고 봐도 구성원 사이에 기가 통해야지 안 통하면 마치 모래자루 같은 겁니다. 자루만 툭 터지면 와르르 쏟아지지, 아무런 유기관계가 없어요. 그 유기성을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기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서로 손을 한번 대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손을 한번 대보면 반드시 기가 통하는 걸 느낍니다. 그런데 싫으면 안 통합니다. 기분이 나쁩니다. 그런데 기가 통하면 일이 일어납니다. 좋은 의미의 일 말입니다.
공동체에 모두 이기주의가 팽배해서 제가끔 제가 잘났고 제 권리만 주장하니까 기가 전부 절단이 돼 버렸습니다. 차라리 모래자루처럼. 비극적이지. 참 비극적이야. 그거 안하면 죽는 건데.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건데.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는 게 아니고 마른 뼈다귀인지 몰라. 기가 안 통해! 이어주는 힘줄이 없어. 살이 없고, 가죽이 없어. 그게 없으면 죽은 거요. 다른 동기에서 모이는 거지 참 의미에서 살아있는 건 아니구 말죠. 향린을 생각하면 목사, 장로, 권사 다 아니라도 좋아요. 누가 서 있으면 기를 느껴야 해요. 그럼으로써 비로소 의식이 되고 의미를 느껴요. 그런데 기가 안 통하면 안 되지요. 가가 막히면 망해요. 지금 우리 나라가 기가 막힌 것 같아요. 이것들이 기가 막힌 짓만 자꾸 하니까. 자꾸 기를 절단하니까.
향린교회라는 것은요, 이 점을 명심하십시오. 6·25가 와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향린교회의 성립은 6·25와 직결돼 있습니다. 6·25가 없었으면 향린교회는 안 생겼습니다. 그러니 민족사적으로 보면 6·25와 직결된 겁니다. 다시 말하면 분단의 비극 속에서 향린교회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누가 특별히 발상해서가 아니라 안 나오면 안 될 것이 나온 겁니다. 까닭은 6·25라는 전쟁으로 우리 민족의 기가 사정없이 잘린 상태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회상해 보십시오. 우린 피난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양에 가보십시오. 6·25는 미국과 이북, 혹은 중공군의 싸움이고 정작 주인공인 우리는 보따리를 둘러메고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거지 발싸개 같은 존재로 밀려다니고 있어요. 우린 아무 의미도 없어요. 서양 신문을 보세요. 이 땅에서 죽는 건 우린데 외국놈들이 와서 판을 치고 있어요. 결국은 별거 아니죠. 2차대전 이후에 남은 무기를 어디에든지 처분해야 될 텐데, 그게 우리 땅으로 결정됐고, 그래서 전쟁을 일으킨 겁니다. 여기 와 전쟁무기를 쏟아부어 가지고 재산을 건진 겁니다. 냉전체제에 들어가면서 곪아 칼을 댄 데가 여기죠. 우리는 남의 전쟁에 휘말려 밀려다닌 거고, 그러면서도 정신 못차리고 알알이 찢겨서 기가 통하지 않아요! 여기서 향린교회라는 것이 탄생한 겁니다.
전주에 모여서 이래선 안되겠다고 얘기했습니다. 향린교회가 처음 생겼을 때 기성교회가 되려는 것은 추호도 아니었습니다. 이래가지곤 기독교가 망하고, 아니 이 민족을 망하게 하는 촉진제밖에는 안되겠다, 비장한 각오를 하자. 1년 동안을 전주에 모여 그 나름대로 기도를 하고 성서를 보면서 토론하고 결정하여 서울로 잠입해 들어온 겁니다. 그때의 일이 이렇게 『향린 20년사』 쓰여 있습니다. “6·25동란을 계기로 여러 분야를 전공하고 있는 신앙동지들이 새로운 형태의 신앙생활을 전개할 결의를 하고 53년 5월 17일 평신도의 모임으로서 첫 예배를 드리다.”첫 예배를 드릴 때, 첫 설교를 제가 했습니다. 홍창의 장로가 이런 글을, 시 아닌 시를─의사가 시를 쓰면 얼마나 쓰겠어요─남겼어요. 잊을 수 없는 역사적인 글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이 한 순간이여, 감격의 눈물 내 앞을 가리우니 핀 저 꽃의 향기로움이여 우리의 기도소리 저 나라로 옮기소서.”그때 10여명도 모이지 않았지만, 그때는 기가 꽉 차 있었습니다. 꽉 차 있었습니다. 뭔지 모르지만, 설교에 움직인 것도 아니고, 그 무슨 기가 꽉 차 있었습니다. 이 한국의 분열된 상황 속에서, 이 조그만 것 가지고 당신이 쓰십시오, 당신이 필요하다면 우리를 써서 어떻게 하든지 마른 뼈다귀 같은 이 민족이 다시 맞붙어서 힘줄이 생기고 살이 돋아서, 가죽이 생기고 “숨아 불어라” 해서 살아나게 하는 역할을 하는 데 우리를 써주소서. 이것이 향린교회 출발의 정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민족사와 분리시켜서 향린교회를 또 하나의 교회로 생각하면 그건 언어도단입니다. 더구나 개인구원이니 사회구원이니 하는 소릴 하든지, 혹은 정치분리니 하는 소릴 해서는 그건 향린교회가 아닙니다. 출발부터가 그게 아닙니다. 그런 건 의미가 없어요. 그런 건 지금 너무 많아. 그런 걸 또 하려고 아까운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요.
그런데 이런 역사가 우리는 가능하다고 봤던 거죠. 예수의 무리들이, 정말 밑바닥에 있던 그 무리들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120명이라는 무리들이 무서워서 문을 닫고서 모였던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는 여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같이 참여한 걸로 되어 있습니다. 거기 꽉 찬 게 뭘까? 거기 공기가 어땠을까?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바깥에 박해가 일어나고 있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순간, 지도자들이 감옥에 잡혀가고 야단하는 순간, 거기 모여서 무슨 기도를 했을까? 무엇이 꽉 차 있었을까? 기가 꽉 차 있었다, 기가 통했다, 혈맥이 통하듯 통해 있었다, 힘줄이 이어져 있었다, 마른 뼈 같던 그들이 이제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걸 표현하길 ‘성령을 받았다’고 한 겁니다. 그것을 누가가 구체적으로 다시 표현한 것이 소위 ‘펜테코스트’, 오순절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무참하게 참패를 당한 소수의 무리, 그 괴수였던 예수가 꼼짝 못하고 참패당한 그 한복판, 이제 그 무리라고 지명만 받으면 꼼짝없이 죽게 되어 “난 그와 상관없다”고 비겁하게 굴던, 마른 뼈다귀 같던 그것들이 얼마 되지 않아서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오순절에 소리를 치면서 그들의 죄를 규탄하고 새로운 역사의 전기를 이루려고 한 것, 그게 성령강림절입니다. 무서운 일이 일어난 겁니다. 그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게 영향을 끼쳐 각기 다른 나라에서 왔는데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딴 말로 하면 이 소수의 무리들이 힘줄이 통하고 루아흐가 통해서 확대돼 가지고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퍼져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을 때려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그들은 다만 감격을 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출발해서 예루살렘 교회라는 것을, 예수를 죽인 그 현장에다 도도하게 세울 수 있었던 거죠.
자, 저는 이제 끝내야겠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그 민족을 보면서, 마른 뼈다귀같이 꼼짝을 못하는 것을 보면서, 저것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저것들이 살아나야 되겠는데, 이 간절한 기도가, 간절한 마음이 마침내 환상을 보게 해서, 이거 살 길은 하나밖에 없다, 연결이 되어서 기가 다시 통하게 하는 방법밖에 없다. “기야, 숨아, 천하에 차 있는 모든 숨아, 몰려와라! 그래서 이 시체와 연결되어라! 그래서 산 것이 되어라! 그러나 그것만으론 산 것이 아냐! 목적의식을 뚜렷하게 가진 군대가 되어라!”그는 이렇게 되는 것을 분명히 봤습니다. 이렇게 돌아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우리는 통일을 지상 목적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이 꼴을 가지고 들어가서는 안되! 썩은 뼈다귀로 들어가서는 안되! 숨아 불어라! 그래서 마침내 썩은 뼈다귀 같은, 아니 신경줄을 자꾸 차단하는 공작정치 현실 하에 희생되는 이 현실 속에서 간악한 무리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 집단적인 의지를 가진 생명이 되어 가지고 통일로 나가야죠. 저는 이것이 꼭 된다고 믿습니다. 누가? 정권이 절대로 안합니다. 못합니다. 독일에 있는 상부층은 끝끝내 통일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러번 통일논의를 그들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의 통일의지를 끝끝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해 뭘 하려는 거냐? 그건(독일통일) 갑자기 일어난 일입니다. 민(民)이 한 겁니다. 기가, 루아흐가, 프뉴마가 한 일입니다. 성령이 한 일입니다. 거기에 그대로 움직인 것이 민중입니다. 거기에 그대로 움직인 것이 민중이에요! 독일의 담은 무너져서 이제 통일로 급진전합니다. 나는 이걸 믿지요. 한국의 기를 죽이고 압살하는 악당들에 저항해서 민(民)이 일어나서 대행군을 하는 그날이 꼭 온다!이 향린교회는 이걸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이 글은 1990년 5월 20일에 향린교회에서 한 주일예배 설교를 다듬은 것입니다. <편집자 주>
(살림 1998년 10월호에 수록)




예수의 얼굴 / 살림 98.11
전에는 …… 이제는─고전3:2; 13:11-12; 갈 3: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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