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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소(2004-01-09 16:18:10, Hit : 5509, Vote : 607
 인권과 생권 / 살림 98.12

인권과 생권 / 살림 98.12
─로마서 8:18~30

안병무


오늘 본문은 바울에 있어서 특이한 구절입니다. 이 단락은 다른 것과 비교해서 생각할 때, 상상하기 어려운, 밖에서 어떤 다른 영향을 받았나 할 정도로, 다른 내용입니다. 서구 신학에서 규정하는 소위 범신론이라고 하는 그런 영역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개한 그리스도론이 루터를 통해서 이 사도적 복음의 핵심으로 간주된 이래로,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로 사람들은 죄인이지만 죄없다고 인정함을 받는다는, 이 교리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공식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의인론이라고 우리는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은 그 범위에서 훨씬 벗어납니다. 사도적 복음이라고 루터가 이름을 지었는데 그보다 훨씬 넓게, 훨씬 깊게 구원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피조물은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바울이 피조물이 고통하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만물이 허무한 데 종속되기 때문에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면서 참 사람이 나타나기를 원한다는, 기발한, 바울에게 보기 드문 말입니다. 이런 생각은 지금까지 기독교에 주류를 이루는 기독교 안에서는 완전히 묵살이 되어 왔습니다. 대체로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실은 이것은 서구적 사고입니다만, 자연과 사람을 엄격히 구별하고, 신도 엄격히 구별합니다. 자연은 자연대로 그 순환 원리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순환을 반복할 따름이고, 인간은 이 자연을 정복함에서 역사를 만들어낸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을 최대 과제로 삼아 오늘의 현실을 이루었습니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금 진통하는 것들이이 지구가 깨지고 있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도, 깨지는 지구를 방어하는 길도, 또 다시 사람이 자연을 정복하는 방법으로, 즉 어떤 신기술에서 찾을 수 있으려니 하고 낙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동양적인 시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동양은 자연 안에 사람을 포함시킵니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의 협동의 대상입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길을 찾는 것이 삶이라고 확고히 믿고 있습니다. ‘인간이 숨을 쉬듯이 자연도 숨을 쉬고 인체에 맥이 있듯이 자연에도 맥이 있다. 인간은 자연 속에 있기 때문에 자연이 병이 들면 인간도 병이 든다.’ 이런 생각입니다. 자연은 인간보다 훨씬 깊고, 크고 넓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연에 순응해서 사는 지혜를 가질 때에만 제대로 살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동양의 자연과의 관계에서의 인식입니다. 그래서 옛부터 돌 나무 하나를 함부로 꺾거나 옮기거나 혹은 자르지 않았습니다. 대지의 형태를 함부로 바꾸려는 일을 엄두도 내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어떤 산의 허리를 자르면 거기서 피가 난다고 확실히 믿고 있었습니다. 자연의 기가 끊기면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도 재앙을 당하거나 기가 빠져 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에도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전국을 누비면서 한국의 혼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어떤 긴 정을 여기저기 다니면서 산세에 따라서 박았다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서울에도 백운대의 주변을 위시해서 여기저기 정을 박아 한국의 혼이 살아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생 동안 이 정을 뽑으려고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보도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리포터도 그렇게 믿습니다. 한국사람들은 몸과 땅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소위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입니다. 몸과 흙은 둘이 아니다, 자연과 나는 하나다라는 그런 생각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상품 광고에도 이것을 당당하게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그렇게도 과학에서 조소거리였는데 환경의 위기를 맞이하는 오늘에 와서는 다시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생태라는 시각에서 모든 개발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지형을 함부로 바꾸면 그 지형을 의지하고 살던 무수한 생물들이 그대로 죽어버립니다. 사람에게도 그 영향이 그대로 옵니다. 서구에서는 이미 어떤 산등성이가 있으면 그곳에 절대로 집을 못 짓게 합니다. 지평선 너머 있는 곳에 바람이 불어서 사람에게 피해가 간다고 해서 그곳에 못 짓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남산 같은 데 집을 짓고 아무데나 짓고 있습니다. 이른바 먹이사슬이라는 말이 생태계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야 나무 하나 자르는 것, 자연을 바꾸는 것은 인간의 생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우리 기독교도 기본적인 반성을 해야될 때입니다.
우리집 근처에 큰 감나무가 있습니다. 한번은 그 근처에 사시는 터줏대감 같은 분이 나와서 우리보고 하는 얘기인지, 한탄하는 얘기인지 모르지만, “허허, 저 감나무가 이제는 감이 하나도 열리지 않네요” 하길래, 어째서 그러냐고 했더니, 아마 전기불 때문일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 집에 이사 와서 가로등을 하나 세웠는데 그 가로등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가로등을 세워서 밤이면 환합니다. 그 불을 켠 다음부터는 감이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최근 신문에 보도된 것을 보니까 여기저기 공장들을 세우고 도로를 만들면서 가로등을 세웠는데 그 근방의 열매 맺는 모든 나무는 전부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분명해졌습니다. 전에는 동물계에서 사람과 동물이 사는 것이 비슷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식물도 사람과 사는 양식이 같습니다. 그중에 같은 것 하나는 자고 깨야한다는 것, 잠을 자되 낮에는 깨고 밤에는 잔다는 것, 자려면 불을 꺼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을 끄지 않으니까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내 주변에 사는 모든 식물이 조그마한 잡초 하나까지도 전부 우리같이 숨을 쉬고 불이 켜져 있으면 잠을 못 잔다고 생각을 하니 그것이 우리하고 같은 생물 아닙니까? 그것만 발견했지 다른 면은 아직 몰라서 그렇지 풀이나 소나무 등 전부가 우리와 비슷한 생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불교와는 상관이 없는,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이단으로 단정한, 슈바이처도 아프리카에서 개간을 하면서 벌레를 죽이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풀을 뽑으면 그 풀을 다른 곳에 꼭 심었습니다. 생의 의지, 살려는 의지는 존중해야 합니다. 보통 성서를 근거하지 않더라도 그런 것을 믿는 인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광주에 ‘이공’이라는 영감이 있습니다. 평생 공부도 안하고 종으로 살면서 열심히 일만 한 사람인데, 그는 성서에 도취해서 밑에 제자까지 생길 정도로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그는 이도 죽일 수가 없어서 이를 잡아서 그릇에 가득 담아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선교사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서양 선교사를 싫어하는 사람이고, 선교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는 그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선교사가 찾아왔는데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었습니다. 뱀이 나옵니다. 뱀을 보고서, ‘빨리 도망쳐라, 선교사가 보면 죽는다’ 하면서 내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선교사 친구는 일부러 파리를 계속 잡아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죽이는 세계에서 온 사람이고 한 사람은 죽이지 않는 세계에서 온 사람입니다. 둘이 대립해서 아웅다웅 싸우다가 그래도 둘이 친했습니다. 어쨌든 나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우리가 서로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는 것이 같습니다. 이것을 점점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이 살아야 나도 산다. 지하수는 가슴에서 나오는 젖과 더불어 인간의 젖줄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들이 아이의 생명을 자기의 생명과도 구분을 하는 이기주의가 발달했습니다. 내가 귀찮아서 내 몸을 이렇게 하는데 무슨 상관 있으랴 그 생각만 했기 때문에 임신을 한 다음에도 해독이 되는 소위 피임약을 함부로 먹어서 기형아가 쏟아져 나오게 된 것입니다. 아이와 자기와의 관계도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살아야지,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권이라는 말이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인권이란 말을 생존권 또는 생권이란 말로 바꿔써야겠습니다. 인권이란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정말 밑바닥에서는 생존권입니다. 생권입니다. 생권이란 사람에게만 국한하지 말고 확대시켜야 합니다. 살려고 하는 것을 살려줄 때 그때만 사람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권리만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서구적 발상입니다. 현실은 더불어 모든 생존권을 보호하고 지킬 때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생존권의 싸움은 전체가 해야 합니다. 생존권을 위한 싸움을 인간이 혼자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삶의 바탕은 언제나 바닥에 있습니다. 문 목사가 감옥에 있을 때 쓴 시 중에 발바닥, 발바닥, 네가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으랴 하는 시가 있습니다. 그 밑바닥에 나를 받치고 있는 것을 못 보았죠. 물론 그 발바닥 자체는 보기 싫죠. 그러나 그것을 만지면서 중요한 것은 여기에 있었구나 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밑바닥에 있습니다. 밑바닥에 내려갈수록 우리의 삶의 원천은 거기에 있습니다.
생존권의 위협도 반면에 바닥에 있습니다. 바닥이란 어느 누군가가 피를 흘린 자리, 억눌림을 당한 자의 자리, 승자가 아니라 패자, 양지가 아니라 음지, 배부른 자가 아니라 배고픈 자입니다. 밑바닥으로 갈수록 뭔가 우리가 바로 잡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삶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살려는 몸부림이 팽창합니다. 그래서 생권의 운동도 바로 밑바닥을 집중해서  거기서부터 퍼져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시야는 바로 이것입니다. 생권운동은 사람을 뺀 피조물, 즉 자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것에 굴복되고 예속된 것을 인식하고 거기서 해방되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그것은 지금의 사람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연을 허무한데 종속시키고 자연을 자연 못되게 하는, 즉 자연을 오염시켜 죽게하는 인간들에 대항하는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해서 공동전선을 펴기를 피조물이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바울이 철이 들어서 눈이 뜨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은, 결국 새로운 사람이란 말입니다. 자연이 기다리는 새로운 사람이란 바로 자연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하느님의 아들이란 ‘너도 살아야 나도 살 수 있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러나 이 둘만 보지 않습니다. 성령도 속으로 신음하며 이 운동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제가 이 표현에서 본문을 정했습니다. ‘성령은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이 성령을 통해서, 마침내 자연과 성령이 공동으로 작업하는 이 일에 하느님도 가담해서 이 운동에 참여할 때에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 사람, 자연이 하나가 되어서 한 목적을 향할 때 구원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 넓은 사고는 로마 시대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무시당하고 기독교는 협소한 교리로 창백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인들은 동학에서 말한 “인내천”이라는 말 정도까지도 직역을 합니다. 그래서 배타주의만 길렀지. 사람의 목숨만 조르는 것입니다. 같은 숨을 쉬고 있다는 현실을 계속 거부해 왔습니다. 신학에서 자연은 제목에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피조물, 성령, 하느님 이 셋을 갈라놓았지만, 이 셋이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애를 쓰는데, 중요한 사실은 이 셋 모두가 말이 필요가 없거나 안하거나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은 말이라는 그릇 속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신이라는 말을 그리스도 속에 담으려고 하는 것이 교리이고 신학입니다. 교리나 신학은 신을 말로 표현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 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들어와서도 안됩니다. 말은 인간만의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상대방과 교류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인간이란 종은 자기만이 가진 말로 온 우주를 정복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서운 교만입니다. 신마저도 말이란 영역으로 끌어들여서 거기에 가두려고 했습니다. 사람이 바벨탑을 지음으로써 하늘을 찌르려고 했습니다. 신은 그것을 그대로 두면 위험하다고 해서 그들의 말을 혼란하게 만들었다는 얘기입니다. 신을 말로 포착하려고 나온 것이 희랍에서 나온 버릇인데 그 전통을 그대로 받아 들여온 것이 요한 문서입니다. ‘말씀이 육신을 이루었다.’ 이로써 하느님을 얼마나 협소하게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말하는 세계만 존재하는 신이라면 그는 지구 위에서 오직 사람이라는 종족에게만 제한된 그런 신이 됩니다. 자연은 말 안하는 존재입니다. 신학적으로 피조물이라는 말을 쓰나 엄밀하게 말해서 말 안하는 존재가 자연입니다.
주자학에서 ‘리(理)’와 ‘기(氣)’라는 말로 구별을 하는데 만약 그대로 적용을 시킨다면은 성령은 리가 아니라 기입니다. 말할 수 없는 성령의 신음으로 기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인간의 언어가 아닙니다. 말이 미치지 않는, 말이 무력한, 말로 그 현실을 밝혀 낼 수 없는, 그런 고통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우주는 침묵 자체입니다. 소리가 없다는 말과 다릅니다. 사람의 말이 없는 것입니다. 말이 없는 것은 무섭습니다. 이 경지를 도덕경에서는 ‘현(玄)’이라고 합니다. 확인하려고 하면 할수록 가물 가물한 것, 말 없이 존재하는 현실이 말하는 현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넓고 무한 자체입니다. 말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현실, 말이 유린되고 말이 짓밟힌 현실, 해야 할 말이 밟힌 현실, 그런 생존을 말하려고 합니다.
간디가 힌두교의 오랜 전통 중에서 핵심적인 것을 그대로 자기 신조로 받아 들인다고 했는데 그중에 암소를 존중하라는 계명도 그대로 수용한다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82년도에 간디와 암소라는 글을 썼습니다. 후에 그의 말을 다시 생각해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까지 이 입장에서 말이나 생각을 전개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까 말한 것처럼 기독교도 무너지고 저도 무너질 것 같아서 못하고 있는데 단지 나는 민중을 얘기하면서 이 사실을 한 요소로서 밑바닥에 깔려고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민중의 특징은 말해야 할 권리를 박탈당한 것이다’라고, 이런 쪽으로 말합니다. 네가 먹을 것을 빼앗아 가서 나는 배가 고프다, 네가 나를 밖으로 내쫓아서 추워서 얼어 죽고 있다, 네가 나의 억울한 말을, 입을 틀어 막아서, 총 칼로 겁을 주어서, 못하게 했다. 죽음의 사자같이 검은 옷을 입고 앞에 쭉 앉아서 사형죄다 탕탕 내리치는 법관 앞에 끌고가서 협박을 할까봐 끝끝내 해야 될 말을 하지 못하고 죽어버린 말의 무덤들을 생각하면, 얼마나 많이도 묻혀 버렸을까? 단지 한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울어야 할 일도 웃어야 하고, 죄 없이 얻어 맞고, 여자답게라는 그 말 때문에 언제나 부드러워야만 하고, 몇 마디 말만 해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고정관념이 말하기 전에 목덜미를 조르고, 시집을 갔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이 없는 사람의 자식을 낳아야 하고 …… 요새 제가 그런 것을 제일 고민합니다. 하느님이 실수를 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관계가 된 것은 자식이 생기지 않아야 하는데 그런 경우에도 아기를 임신 합니다. 시집이라고 가서 뼈빠지게 집안 일을 일생을 해도 그렇게 혹독하게 부리는 남편이나 시댁에 대해서는 군소리 한번 못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시부모, 남편들에게 음식 만든 것 다 바치고 남으면 먹고 남지 않으면 못 먹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 약탈할 때 만나는 사람마다 코와 귀를 잘라 그것을 산같이 쌓아서 자기 나라에 보냈습니다. 그런 식으로 나와 해야 할 말들이 끝 없이 묻힌 그 무덤이 얼마나 크고 많을까? 모름지기 제 갈 곳을 찾지 못한 혼과 더불어 구천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에 우리 사는 세상이 회색빛이고, 슬프고 우리에게 흘러 내려 오는 노래는 모두가 애조가 듬뿍 담긴 것 아닙니까? 새가 운다, 시계가 죽었다, 속이 썩는다 이런 등등의 표현은 우리 나라 사람들만 합니다. 할 말을 못하고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슬픈 마음이 온 땅에 가득 찼기에 말을 못하고 죽은 그들을 달래기 위해서 무당을 생존하게 하고 한국 전체를 굿밭으로 만들기도 해야만 했습니다. 말을 만든 것도 지배층이고 말을 독점하는 것도 지배층입니다. 이른바 지식인이라는 것은 지배층의 대변인들입니다. 저들은 말이 안되는 것은 없는 것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위계질서를 신이 준 질서처럼 만들어서 밑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입도 뻥긋 못하게 제도적으로 억눌렀습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우리 인권운동은 말을 하게 하는 운동으로서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 보통 말에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오네’라고 합니다. 한탄하는 말입니다. 기가 막히면 말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해방 후 오늘까지 반공이라는 무서운 것을 가지고 우리의 기를 막히게 했습니다. 말이 못 나오게 했습니다. 반공법이 보안법으로 둔갑해서 여전히 입을 계속 틀어 막고 있습니다. 초법적인 정보부가 민의 기를 죽이고 입을 틀어 막는 데 전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부는 이 둘을 보존하기 위해서 첫 국회에서 부터 날치기를 하고 온갖 짓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권을 전제로 한 민에 의해서 권리를 얻은 소위 문민정부인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이 정부를 내것으로 보지 않아요. 거대한 정부와 여당이 있지만, 김영삼 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와 말을 할 수 없는 분위기입니다. 누가 그 안에서 ‘아닙니다’ 하고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정부는 망한거지요. 한 사람 손에 왔다 갔다 하면 어떻게 해요. 이것 문제가 있지요. 정부 안에서 “아니”라는 말을 못해요. 말이 다 죽었습니다. 정부 아래 다 죽었습니다. 여당이 다 죽었습니다. 말 안되는 말 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밖에 말을 못합니다. 그러면 하물며 민중이랴!
우루과이 라운드 문제 같은 것도 제일 만만한 것이 말의 무기를 못 가진 농민들이니까, 싸워 이길 것 같으니까 짓누르고 무역 중심 쪽으로 결론은 이미 내려놓고 국민들을 우롱을 해서 말 못하게 만들고, 판단력을 잃게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바로 전날까지 절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살짝 넘어갔습니다. 그러고서 인권운동은 그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저렇게 서 있는 한, 십자가가 내려지지 않는 한 아마 생권운동은 멈출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저 사람들의 말을 막지 말아라. 그러면 저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다.” 갈릴리의 청년 예수의 말입니다. 그도 막힌 말들을 얼마나 신랄하게 생각했을까? 폭력으로 이미 봉쇄당한 민중을 가장 잘 아는 분의 단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서와 오늘 이 땅의 그리스도인 / 살림 99.1-2
예수의 얼굴 / 살림 9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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