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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소(2004-01-09 16:18:34, Hit : 5839, Vote : 721
 성서와 오늘 이 땅의 그리스도인 / 살림 99.1-2

성서와 오늘 이 땅의 그리스도인 / 살림 99.1-2

안병무

오늘 제게 주어진 제목이 참 막연합니다. 성서, 오늘, 이 땅, 그리스도인 등 모두 복합적인 것들 이어서 하나하나 어려운 문제들이고 무엇보다도 오늘, 그리고 이 땅이라는 것은 분석이 요구되는 것인데, 제게는 분석할 능력도 부족하지만 시간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는 애매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서의 기본 정신 하나를 추구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오늘 이 땅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서적 측면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이 시대를 살아갈 프로그램을 제시할 능력은 없으며, 설령 있다 해도 그것은 한 의견에 불과합니다. 또 하나 분명히 할 것은 프로그램을 제시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성서의 자세가 아닙니다. 성서는 오늘과 우리를 분명히 하고, 오늘에 선 우리에게 자율적으로 결단하고 실효있는 행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을 제시해서 그 길로 그대로 가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성서를 해석하면서 행동하는 행동의 프로그램은 우리 스스로 찾아가야 합니다. 다음으로 오늘 우리가 하는 것은 벌써 집단적인 요청입니다. 제가 이번에 여러분에게 계속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집단적’이라는 말입니다. ‘집단적 눈’을 가져야만 오늘 우리의 문제를 논의할 수 있습니다. 이 ‘집단적’이라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다. 지난번에 질문하신 몇 분에게서도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을 보았는데 사실은 사람들은 ‘집단적인 눈’을 갖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양심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심이란 말을 개인의 어떤 ‘오르간(Organ)’처럼 생각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런 ‘오르간’은 없습니다.‘양심’이라는 말은 희랍말로는 ‘syneidesis’입니다. ‘syn’ 즉, ‘더불어’란 뜻을 가진 말에 ‘안다’는 의미의 ‘eidesis’를 덧붙인 것입니다. 영어로는 ‘더불어’란 뜻의 ‘con’에 ‘science’를 붙인 것이며, 독일어에서도 마찬가지로 ‘ge(더불어)’와 ‘wissen(안다)’을 결합한 말이 ‘양심’입니다. 즉, 양심은 ‘더불어 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개인 안에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계에서 성립되는 집단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홀로는 양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가령 어떤 이가 박 정권 때는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가 지금은 현 정권에 협조해서 잘 살고 있다고 합시다. 이때 전에 그와 함께 싸우던 이들이 그 사람을 찾아가 비판을 하니까 그 사람은 ‘박 정권 때는 내가 피해를 받았기 때문에 싸웠으나 이 정권에서는 피해받은 일이 없으므로 싸울 필요가 없다’라고 대답했다고 합시다. 즉, 나 개인에게 피해되는 일이 없으니까 내게는 가책되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양심입니까? ‘나 자신은 직접 피해를 받지 않았지만 네가 당하는 것이 곧 우리가 당하는 일이다’고 생각하고, 이대로는 도무지 참을 수 없다면서 저항하는 이것이 바로 양심이 하는 일입니다. 요새 ‘권양 성고문 사건’ 때문에 저항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 일은 어떤 부모의 딸 아무개가 당한 일이고 내 딸에게는 그런 일이 없었으므로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양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 딸은 아니지만 왠지 그가 당한 일에 내가 견딜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것은 벌써 집단적인 눈을 가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당한 일이 내 딸이 당한 것과 같다’는 것이 양심의 척도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개 그것을 가지고 있으므로 의분도 느끼고 결속도 하고 때로 자기 입장과는 상관없는 일에도 자기를 버리고 나서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한 이런 ‘집단적인 눈’, ‘양심’이 없으면 성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이 한 개인이라면 아니,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도 개인 개인이라면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개인인 경우에는 그의 사건들을 우리가 우리의 일로 실감할 수 없으므로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집단적인 눈을 가지고 사회를 보아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집단적인 눈으로 성서를 보아야 합니다.
이제, 한국의 오늘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서를 해석하기 위한 서설에 불과합니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오늘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통성을 찾지 못한 것이라 봅니다. 일제시대를 제외하고 해방 후만 이야기해도 이승만이 첫 대통령이 된 것부터가 비극의 출발입니다. 그것은 분단을 전제한 정치욕에 찬 사람이 한국 첫 정부의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독립정신의 맥을 이은 임정 요인(臨政要人)들이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 권력구조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정통이 아닙니다.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승만 정권이 그래도 민족의 혼을 되살리기 위해 반민특위(反民特委)를 구성했는데, 이것을 완전히 폭력으로 무산시켜 버리고 말았다는 데 있습니다. 일제시대의 더러운 잔해를 제거하고, 씻고 출발하겠다는 시도를 강제 해산시키고 결국은 친일세력으로 그 정권이 유지되었다는 사실이 정통성을 지니지 못했다는 근거입니다. 4·19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섰으나 불과 1년 안에 다시 친일세력에 의해 폭력으로 정권이 재장악됩니다. 일본 군대의 하급장교가 그것도 국교정상화라는 미명 하에 ‘일본돈’으로 다시 정권을 잡고 유지한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일제의 기세는 그때부터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현 정권은 박정권, 특히 유신체제의 연장입니다. 누가 준 것도 아닙니다.빼앗은 것입니다. 그러니 군사 정권, 쿠데타 정권이 장장 25년 동안 국민을 제압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통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 근거로 이승만 때는 자유당을 만들었으나 그가 끝나니 자유당이 없어졌고, 박 정권 때 공화당이 있었지만 그가 죽자 공화당이 없어진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전혀 공당(公當)이란 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현재의 집권당은 공성(公性)을 가졌습니까? 정통성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비극적인 것입니다. 으레히 있어야 할 것들이 제 자리에 있지 않고 엉뚱한 것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사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 혼란의 이유입니다. 이것은 사회 전반에 큰 난맥상을 일으킨 원인입니다. 기상천외의 사건이 계속 난무하는 까닭도 여기 있습니다. 중추가 없는 역사, 중심이 없는 사회,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장이고 따라서 40년 동안 아무런 전통도 이루지 못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저는 해방 이후 민족적 대이동이 계속됨으로써 소위 이민사회(移民社會), 혼돈사회(混沌社會)가 되고 말았다는 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8·15 때 민족적 대이동이 있어 이북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남으로 이동해 왔습니다. 또 정부가 서자마자 이남에 있던 많은 좌익계열이 이북으로 갔습니다. 6·25는 민족 대이동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근대화, 산업화에 의해 민족적 대이동이 또 생겼습니다. 짧은 기간, 적어도 20년 안에 농촌 인구와 도시 인구가 정반대로 되었습니다. 20년 전에는 국민의 7할이 농민이었으나, 이제는 거꾸로 되어 7할 이상이 도시인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산업화가 잘 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역대 정부가 농촌을 피폐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곡물 등을 무제한 수입하여 농민을 거덜나게 해서, 농민들로 하여금 더 이상 고향을 지킬 수 없어 무작정 도시로 몰려들게 하였습니다. 사람이 부락을 떠난다는 것은 품을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부락은 도덕, 윤리의 요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요람을 떠난 저들에게는 양심의 근거가 깨어집니다. 그리고는 도시에서 ‘돈이면 다’라는 것을 배우며, 게다가 그들은 끝없이 외롭습니다. 이래서 야기된 사회 문제들을 해결해야 되는데, 우리는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아무런 윤리적 근거를 갖지 못했습니다. 유교적 윤리가 조금 남아 있었고, 기독교가 엄청나게 증대되었으나 기독교가 사회 윤리를 제공하지 못했고 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교회 자체 안에서도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고 있는데 이들은 거의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외로워서 어딘가 의지하려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들에게 삶의 새로운 방향이나 윤리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단지 그들을 확보해 두려는 노력밖에 없습니다.
셋째는, 우리 사상의 빈곤입니다.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면 일제시대부터 우리에게는 한 가지 기현상이 있습니다.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꼭같이 반대해온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공산주의입니다. 해방 후부터만이 아니라 일제 때부터 ‘반공’이란 것이 유지되어 왔습니다. 그것이 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쨌든 일제시대부터 우리는 반공정책에 억눌려 왔습니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간에 세계 인구의 반 이상이 마르크시스트 내지 그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완전히 봉쇄된 사회에서 자람으로써 세계 지성계에서 볼 때 반쪽밖에 모르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지독한 경직성을 보였느냐 하면 마르크시즘은 고사하고 ‘사회성’이라는 말 내지 사고만 나와도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경직된 사회가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던 것입니다. 사회성을 띠는 사상이나 운동을 모두 배격하는 역사가 계속되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반드시 ‘반공’ 때문만이 아니라 정권유지를 위해 국민을 가능하면 ‘모래알’로 만들어서 무력하게 만들자는 동기도 있습니다. 사회라는 말은 좋지 않습니다. 하나하나 개인으로 떼어 개인주의로 만들어야 지배하기가 좋으니까 국민을 모래알처럼 만들어버리려 했던 것입니다. 이 개인주의는 일반에게도 무섭게 퍼지지만 특히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교회에서는 아직도 개인 구원이 제일 중요시됩니다. ‘사회구원’, ‘집단’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개인 문제로만 고민하는 종교적인 이기주의자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일제시대부터 비롯된 것으로 결국은 안전논리를 내세움으로써 마지막엔 개인주의로 들어가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은 학생들의 사상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입니다. 학생계는 이른바 물질사관(物質史觀)─유물사관은 일본식 번역이고, materialism은 우리말로는 물질사관입니다─이 만연되어 있다고들 합니다. 많은 학생들이 적어도 물질사관에 근거해서 모든 것을 보아야 하며 그것이 곧 과학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마르크시즘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정부에서는 그들을 용공이라고 몰아붙이지만, 특히 학생 운동, 청년 운동에 있어서 우리 교회는 이 문제를 어떻게 취급해야 하며 어디서 출발해야 하겠습니까? 그들은 학생으로서 크리스챤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찾는 데 상당히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의 좋고 나쁨은 차지하더라도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생각할 때, 지금의 질서가 혼미상태에 빠졌으므로 어떠한 돌출구를 준다는 의미도 그들에게 큰 역할을 하겠지만, 지금까지 완전히 봉쇄상태를 만들어 다른 세계를 전혀 볼 수 없게 했으므로, 이른바 금단의 매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구는 물론 일본만 해도 이미 5~60년 전에 마르크시즘이 완전히 대학계를 장악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유럽이나 일본마저도 마르크시즘 연구가 완전히 개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면역이 되고 상대화되었습니다. 적어도 이런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5~60년이 늦은 셈입니다. 대학계, 학생가에 마르크시즘이 이렇게 영향을 준다는 것은 서구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간 현상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시즘을 모르고는 오늘의 지성세계를 운위(云謂)할 수 없습니다. 반대하건 동의하건간에 마르크시즘이 준 영향은 막대한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한쪽 눈만 뜬 채로 세상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미리부터 이것을 알려는 민족적인 노력을 하여, 우리 상황에서 이것을 소화해 낼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을 주었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은 하지 않고 전부 정권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되어 언제나 반공이라는 것을 이용해 왔기 때문에 지금 문제가 터지고 만 것입니다. 이 문제는 다루어져야 할 것인데 이 문제를 누가, 어떻게 주도해서 다뤄야 할 것인가가 심각한 문제입니다. 더구나 이런 문제는 교육이 담당해야 하는데, 실제로 현재 ‘교육’이란 없지 않습니까? 고등학교까지는 실제로 교육이라 볼 수 없고, 대학에서 비로소 교육을 해야 하지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교수와 학생 사이는 완전히 불신임으로 담을 쌓는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대학은 전혀 믿고 대화를 할 수 없는 분위기입니다. 교수가 해야 할 말들을 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학교 교육을 완전히 지시 일변도로 만들어버렸으므로 교권이란 있을 자리도 없고, 교수에게 언론의 자유가 없으므로 아는 것도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없고 학생들과 터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육의 장에서 이것을 소화할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막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이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정통사회는 성립이 안 되고 무너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적 부조리는 제가 언급할 처지가 되지 않지만, 어쨌든 우리는 외국 경제에 종속되어 있는 경제체제라는 것은 모두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국내적으로는 한 곳에 집중된 자본체제입니다. 상품의 직접 생산자의 희생으로 우리 경제는 운영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어쩔 수 없는 균열이 생겨 남북의 분단에 못지 않을 만큼 그들의 사이가 분단되어 그들의 긴장관계는 일촉즉발의 위험 상태에 있습니다.
이러한 수박 겉핥기 식의 외적인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했습니다만, 이상의 제 원인을 다른 각도에서 정리를 하고 성서의 이야기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쏘로킨(Sorokin)이 사회를 본 세 유형이 있는데, 그 이야기에서 우리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되어있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쏘로킨에 의하면 사회에는 세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집성적 병존이란 것입니다. 이 말은 얼른 생각하기에 쓰레기통을 떠올리면 됩니다. 쓰레기통은 온갖 찌꺼기들을 쓸어넣은 것입니다. 그 안에서 이것들은 서로 만나야 할 필요가 없는데도 만나는 것입니다. 아무 관계가 없이 병존하고 있습니다. 즉 할 수 없이 나란히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간접적 공존입니다. 이것은 독재사회에 있는 것입니다. 보통 이야기할 때, 여기 있는 이 컵과 성경책과 이 노트들처럼 서로 직접 상관이 없으며 피차에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서로 공존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이것들은 같이 있을 필요가 없지만 서로 나 하나가 있음으로 해서 나를 간접으로 하여 공존만 합니다. 이것들은 내가 필요로 하기 때문에 공존하고 있지만 내가 없어지면 이것들도 공존할 필요가 없어져 해산이 됩니다.
세 번째는 유기적 관계입니다. 이것은 숙명 공동체입니다.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몸’은 가장 유기적인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이 서로 연결되어 도와주고 어느 한 쪽이 아프면 다른 것들이 모두 동시에 아픈 것 같은 유기성입니다.
쏘로킨의 이러한 분석에서 한국 사회는 어떤 것에 속합니까?지금 정부와 우리가 유기적 관계가 있습니까? 저는 아무래도 낯설게 느껴집니다. 우리 사회가 자꾸 이렇게 되어갑니다. 간접적으로 공존은 해도 유기적 관계가 없으므로 ‘너 따위는 없으면 더 좋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유기적 공동체적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구축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루아침에 다 무너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모래 위에 세운 것입니다. 그렇게 유기적 관계가 없으므로 어느 구석을 잘라내도 관계가 없는 것, 이것이 요즈음 한국 사회의 비극입니다. 크리스챤으로서 이러한 오늘의 한국 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집단적인 눈을 가지고 이 문제를 보면서 ‘크리스챤으로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를 자각하고 무엇을 공헌해야 할 것인가, 우리 민족사에서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며 할 수 있는가, 또 해보자는 것이 여러분의 목적인 것 같습니다.
이제 성서로 돌아가 봅시다. 제가 ‘집단적인 눈’이라 할 때 ‘집단적’이란 말은 ‘전체적인 눈’이라는 말과는 다른 것으로, 어떤 문제를 당하고 있거나 가진 사람들이 공동으로 보는 눈입니다. 거기에는 공동운명체로서 공동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 참여’를 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먼저 중요하게 정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정가의 보도처럼 알고 있는, 만물을 다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같이 알고 있는, 믿음이란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소위 ‘믿음이로만’이라는 말, 이 ‘믿음으로만’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믿음을 강조한 것은 바울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란 것을 바울은 절대로 한 가지 의미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루터에게 와서 바울의 믿음 이해의 의미를 단일화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적어도 다음 다섯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인식하고 있는 믿음은 종교 개혁 이후, 루터 이후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한 의미 중에 ‘믿음이 온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오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16, 그리고 4:23~25에서, 믿음 자체가 온다고 말합니다. 전문적으로 이야기하면 믿음 자체는 하나의 계시라고 봅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계시가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새 시대가 왔다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 자체가 주격이 되어 그것이 온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온다’는 것은 ‘율법이 온다’는 것과 대치가 되는 말입니다. 율법을 준 시대는 지나가고 믿음이 주어진 시대가 왔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목적격이 없습니다. 무엇을 믿는다는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믿음 자체가 삶의 존재 양식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반드시 예수를 믿음으로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믿음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3:26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그리스도는 별개의 것입니다.
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믿음은 미래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로마서  4:3과 갈라디아서 3:6~7에 있습니다.
네 번째가 우리가 지금까지 보통 이야기해 온 ‘……을 믿는다’는 목적격의 표현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섯 번째 이것은 중요한 것인데, 역시 성서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교리를 믿는 것, 즉 고백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다섯 번째 것을 붙잡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예수도 상관없고 예수에 관한 교리를 믿고 있습니다. 물론 믿음을 가지면 모든 난관을 딛고 일어서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믿음만’이라고 하면, 즉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에서 믿음만이라고 한다면 성서에 있어서 중요한 두 가지 요소가 묵살이 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닮는 노력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노력도 쏙 빼고 편안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고린도전서 11:1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본받으시오’라고 말합니다. 이때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처럼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고난에 내가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29에서 바울은 ‘나는 그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그의 고난에 참여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명하는 것, 원하는 뜻을 행하는 것, 즉 이 두 요소는 모두 행동입니다. ‘믿음으로만’이 이상하게도 행동에서 나를 쏙 빼고도 내가 편안히 크리스챤으로 남을 수 있게 하는 무서운 함정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여러 관점에서 믿음을 이야기 했으나 루터는 하나만 집중시켜 이야기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을 믿으라, 믿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모든 것의 열쇠로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동 없이도 크리스챤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세기 로마 교회가 성령 운동을 이단으로 몰아 박해하고 있을 때, 소위 성령을 받은 그룹을 이끌고 있었던 토마스 뭔쩌란 유명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을 때 그는 대단히 환영하며 동의하고 지지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한 가지 루터를 비판한 것이 있습니다. 루터는 ‘그저 믿으면 은총으로 공로없이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달콤한 그리스도만 이야기하고 쓴 예수는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달콤한 그리스도만 이야기하고 명령하고, 너를 극복하고,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한 것은 싫어하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믿음을 주장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본받는다, 따른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공관서에서는 믿음이 강조되지도 작용하지도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현장이 있습니다. 믿음의 중요한 것은 소위 업적에 의해서 형성된 기존 체제 질서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믿음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민족의 경계도 없어지고, 사회 계급도 남녀 계층도 깨어집니다. 즉, 유대인과 이방민족과 종과 상전과 남자 여자가 따로 없으며 공로 있는 자 없는 자의 자리, 약한 자는 밑바닥에 있고 강한 자는 위에 있는 그런 것들도 모두 없어집니다. 그런 면에서 믿음이란 대단한 선언입니다. 그러나 그런 면은 보지 않고 믿음을 세상을 등지고 안주하는 장으로 보았으므로 이것이 우리에게 크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크리스챤이 천만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천만이 정말 움직이면 우리 한국 사회는 분명히 유기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달팽이처럼 굴 속에 들어가 엎드려 버렸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만’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오늘 이 땅의 그리스도인은 먼저 세계를 위해 존재해야 하며,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요구한다면 이 ‘믿음으로만’이라는 데서 해방받아야겠습니다.

이제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오늘의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많은데, 저는 성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적어도 무엇을 비젼으로 제시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 고민을 하면서 얻어낸 한 열쇠가 있습니다.
실락원 이야기에 선악과가 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다 먹어도 이것만은 먹지 말라는 것을 세워놓았습니다. 여기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해석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성(性)이라 하는 것, 지혜라 하는 것 등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최근 제가 한 생각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선악과는 공(公)이라는 것입니다. 공은 사유화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이 아담과 그리스도를 연결시켜 놓았습니다. 원인이 아담에게 있었고 해결이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공은 사유화해서는 안되는 것─사람이 소유해서는 안되는 것,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 역사는 사유화하는 것으로써 타락하고 비극이 시작된 것입니다. 성서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땅은 공적인 것이지 사유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소유했느냐 하는 것은 텍사스 필름 같은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총잡이, 깡패가 총을 들고 구역을 정해놓고 자기 것이라 하며 가까이 오면 쏘아 죽여서 사유화를 했습니다. 세계 역사가 어떻게 되었나를 세계 지도를 놓고 보면 모두 공적인 큰 땅, 작은 땅들을 들어가 경계선을 만들어 놓고 자신의 것이라  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유해서 국경을 만들었고 그것이 진전되어 하늘과 바다까지도 사유화를 했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비극입니다. 성서에서도 카인과 아벨이 싸워 카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것은 카인이 하나님을 독점하고 사유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바벨탑도 하느님을 사유화하고 독점하려 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그것을 파괴해버립니다. 엑소더스(exodus)의 대 이집트제국도 하느님에게 속한 것을 즉 공을 사유화한 구조적인 실체입니다. 이렇게 사유화한 그 안에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종과 그를 섬기는 자로 계속 분화되어 갑니다.
의(義)라는 것도 원래 공(公)입니다. 이것 마저도 사유화한 것이 종교 귀족이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6에 하느님이 공의(公義)를 베푼다고 했습니다. 의란 하느님께만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사유화해서 하나님 이데올로기를 만들거나, 자기의 사유의 거점으로 삼아버린 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로마서 13:1에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 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권세에 복종하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이것을 권세를 가진 이는 누구나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그에게 복종하라는, 즉 관권에 복종하라는 교훈인 것으로 배워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가 가르쳐준 것은 권세는 하느님에게만 속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공입니다. 그러므로 공은 사유화하면 그 순간에 타락하여 썩기 시작합니다. 권력이란 것을 사유화한 것이 독재자들입니다. 공을 깬 자들입니다.
땅도 공이요, 하늘도 공이요, 바다도 공이요, 의도 공이고, 혹은 지혜도 공입니다. 지금은 지혜도 정보라는 것으로 차단하고 사유화하여 하나의 힘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유화를 통해 가공적인 힘이 생깁니다. 이것이 세계를 망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의 문제도 바로 이 공을 사유화한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유화하면 안 되는 것을 사유화하는 데서 죄(罪)는 시작됩니다. 죄는 공을 사유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이것은 성(性)이라해도 좋습니다.성(性)은 공이지 사유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당신의 아들, 딸도 당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공입니다. 우리가 지금 맡아 있는 것은 위탁받은 것이므로 내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필요하면 내놓아야 합니다. 그것은 공이며 하나님의 것입니다. 공을 공으로 되돌리는 것이 인류가 할 일이고, 기독교의 목적도 바로 그것이며 성서의 목표도 그것입니다. 누가복음 4:18에 가난한 사람에게 먼저 기쁜 소식을 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때 가난한 사람들은 빼앗긴 사람, 추방된 사람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기쁜 소식은 무엇이겠습니까 공을 공으로 돌려주는 것입니다. 포로된 사람을 해방시키는 것, 눈먼 자를 눈뜨게 하는 것, 눌린 자를 해방시키는 것, 주의 은총의 날을 선포하는 것은 원래의 상태로 돌리는 것을 의미하며, 잘못된 것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예수의 현신이 이와 부합됩니다. 예수가 와서 처음 선언한 주제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왕국,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하며, 이는 하나님만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 공을 공으로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자도 인간으로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없어지는 것,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현실입니다. 예수의 구체적 행위를 보면 모두 사유화된 것을 공으로 돌리기 위한 구체적인 프락시스(Praxis)입니다. 십자가의 죽음마저도 사유화된 것을 공으로 돌리는 최후의 결단에 해당하는 사건입니다. 여기에서 서구인과 대화를 해보면 언제나 그들은 가진 자고 우리는 못 가진 자로서 도무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서구사회 자체가 유기적인 사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유화가 엄격히 되어 있는 사회이므로 그렇습니다. 이런 면에서 마르크시즘 자체는 이 사유화를 부정했다는 점에서 폭탄적인 선언입니다. 사유화라는 데에 대한 경고를 일으킨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공산주의는 모든 물(物)은 공이라는 것이나, 권력을 독점해서 사유화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당(黨)은 비판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하느님의 자리에 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권력 자체의 마력을 낙관했던 것입니다. 권력도 공이어야 합니다. 사유화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공(公)에로의 방향만 지향하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김지하가 말한 이른바 ‘밥상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김지하의 유명한 ‘하늘은 밥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늘을 혼자 못 가지는 것처럼 밥도 혼자 먹으면 안되고, 하늘을 더불어 보아야 하는 것처럼 밥도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내 언어로 쓰면 하늘도 공이요, 밥, 물질도 공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자신이 민중들과 같이 먹고 마셨다는 것은 더불어 나누어 먹는다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 주시려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누어 먹는 밥상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기존의 체제 속에서 내 소유라는 것을 다 정해놓고 이 틀을 전제로 예수, 또 하느님을 생각하므로 여기서 한계가 생기는 것입니다. 기득권을 놓고 생각하면 풀릴 수 없습니다. 사유화된 것을 공으로 지향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할 일은 나누는 것입니다. 나눈다는 것은 기독교의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과학적인 프로그램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자율성을 준 것입니다.
처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 주의 죽음을 기념해서 그의 살을 기념해서 떡을 먹고 피를 기념해서 술을 마시고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애찬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란해지자 바울이 그것을 의식화(Sacrament)하였습니다. 성찬은 더불어 먹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점점 형식화시켜 버렸습니다. 작은 떡 하나를 먹고 나누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배고픈 사람이 있다고 할 경우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요한복음서 기자는 너무 형식화되고 종교 예식으로 성찬이 남은 것을 비판해서 최후 만찬의 장면을 그의 복음서에서 빠뜨렸습니다. 그리고 민중의 현장인 6장에서 ‘내 살을 먹으라. 내 피를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저항입니다. 우리의 나눔이란 것이 그렇게 형식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인 것을 왜 사유화하려 합니까? 내가 가진 것은 모두 공입니다.
근래 제가 희망을 두는 것은 요즈음 일어나고 있는 조그마한 교회 운동들입니다. 제가 파악한 것이 24군데인데, 기장, 예장, 감리교 등의 젊은 목사들이 그냥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노동자들 사이로 빈민가로 들어가 생활 수준을 그들 수준으로 낮추고 그들과 모든 것─먹는 것뿐 아니라, 감정, 생각까지─을 나눕니다. 그냥 더불어 삽니다. 이들은 알알이 흩어진 관계 속에 접근해 유기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들은 말하기를 그들이야말로 민중신학의 담지자라고 자부합니다. 여기서 저는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버릴 때, 사유화를 포기할 때 유기적 관계가생겨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한국 교회의 미래를 저들에게서 봅니다. 그들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우리 교회는 돈을 모아서 무엇에 씁니까? 그들은 더불어 나누면서 공(公)으로 가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사적으로나 교회로나 그러한 새로운 움직임에 주목하고 힘이 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누가복음에 많이 나오는 가난한 자의 이야기의 대상, 청중은 가진 자입니다. 그것은 가진 자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진 자에게 가난한 자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가진 자들이 가난한 자의 이야기를 듣고 받아들여 자기를 나눔으로써 구원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만은 안 됩니다. 자기의 것을 나누려 노력하는 젊은 청년들과의 유대 관계 하에서라도 가난한 자들을 볼 때, 우리에게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공(公)은 사유해서는 안 됩니다. 공을 사유한 데서 오는 모든 죄를 청산하기 위해 온 이가 예수입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말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공을 공으로 돌리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치·경제·사회의 일체의 기존적인 것을 끝내버리자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는 종말적인 것입니다. 참 의미의 크리스챤은 언제나 종말적인 것을 가집니다. 종말적인 생각이란 것은 지금 나를 보장하고 있는 일체의 것을 버리고 공(公)을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문: 성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도그마(dogma)와 ‘집단적인 눈’ 즉 의식을 가지고 대한다는 것과의 차이점을 알고 싶습니다.
답: 도그마와 집단적인 눈과의 차이점이라는 말은 말이 좀 맞지 않는데, 도그마라는 것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독단입니다. 거기에는 상대방의 이해를 동반하지 않고 선언을 해서 그것에 승복을 요구하는 성격이 있습니다. 성서를 열어보기 전에 그것을 하느님 말씀이라 믿는 것은 독단이고, 성서를 열어보고 하느님 말씀을 믿으라는 것은 독단이 아닙니다. 집단적인 눈으로 보라는 것은 성서 자체가 보는 눈이 집단적인 눈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개인의 눈으로 보아왔습니다. 개인의 운명, 슬픔, 아픔, 위로받음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성서가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인자, 하나님 아들, 고난의 종, 메시아, 전부 집단개념입니다. 이것은 학문적으로 입증된 것입니다. 그러나 서구에서 그 소위 인격이라는 개념이 너무 발달한 나머지 집단개념이 자꾸 후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결속이 되어 내 운명, 네 운명이 연결되어 있는데, 마치 내가 고립된 사람인 것처럼 보아왔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문: 성서의 공(公)개념을 사회에서 이루기 위해서 성서 속에 따로 프로그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적인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현대에는 가장 근접한 사회과학적인 프로그램이라면 사회주의 사상, 공산주의 사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같은 사상들과 성서의 공(公)개념과 차이점이 있다면,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답: 저는 사상적인 문제가 많은 것을 전제로 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현실 문제에 접근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위해 공개념을 내세웠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 또는 하느님의 질서 등 여러 가지로 부를 수 있습니다. 공(公)이라는 말은 반드시 기독교에만 속한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반에게 설명하는 데서, 종교적인 개념이 아닌 것으로 공을 내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공을 성취해 나가기 위해 기독교에 특유한 것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사유화된 공을 다시 공으로 하려는 것이 실락원(失樂園) 이후 예수에 이르기까지의 운동이었다고 했습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다른 프로그램이 없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폭력을 써도 되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만 다른 프로그램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이룰 수 있는가는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지혜와 힘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윤리가 있고, 기독교 교육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살 수 있는 참 사회, 질서를 위해 교육을 하자는 것이지 기독교인에게만 따로 교육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바탕에는 신학(Theology)이 있습니다. 신학은 사실 인간학(Anthropology)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말하려면 신을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입니다. 그와 반대로 신을 말하려면 인간을 말하지 않고는 신을 말하지 못합니다.
문: 교수님께서는 코뮤니즘(communism)이라는 것이 공(公)개념, 공사상으로 돌린다는 데서 하나의 큰 진전이 있었다고 말씀하셨고, 기독교도 마찬가지 방향으로 추구해 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점에서 물질주의(Materialism)과 관념론(Idealism)의 대립관계가 기독교에서 어떤 대립의 유의(有意)가 있는 것인지, 바꾸어 말해서 기독교라는 것이 반드시 물질주의를 수용할 수 없다든가, 또는 관념론은 수용할 수 없다든가, 아니면 두 가지 모두가 기독교라는 것과는 무관하게 수용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크리스챤으로서 학생들과 대화를 해보면 그들은 ‘과학성이 없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때 과학성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으면, ‘구체적으로 유물사관이 과학성이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기독교도 유물사관에 맞는 한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미인데, 그 말은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유물사관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어느 쪽이냐고 물어봤더니 전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물질사관, 그것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지요. 데이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이 ‘물(物)자체는 하느님이 창조하셨다’고 말했어요. 물 자체를 우리 기독교에서는 절대로 악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물이라는 것, 그것을 수용하고도 크리스챤으로서의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관념론은 하나님은 무엇이냐, 즉 What이라는 물음을 제기하는 데서 생깁니다. 그러나 성서는 원래 하느님이 누구냐, 어떠하느냐, 즉 Why나 Who라고 묻습니다. 나와의 관계에서 물을 때에는 관념론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희랍문화와 연관되면서 관념론이 발전했습니다. 관념론은 사변의 유희입니다. 기독교에는 백해무익이라고 생각합니다. 관념론은 관념론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한동안 필요했던 것입니다. 관념론과 성서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건강한 삶을 위하여 / 살림 99.3
인권과 생권 / 살림 9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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