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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소(2004-01-09 16:18:54, Hit : 3742, Vote : 663
 건강한 삶을 위하여 / 살림 99.3

건강한 삶을 위하여 / 살림 99.3
―고통을 진통으로

안병무


불교에서는 사람의 삶을 한마디로 괴로움(苦)이라고 한다.
인간의 삶은 정말 괴롭기만 한 것인가. 만일에 인간의 삶이 그렇게 규정된다면 세상을 고해라고 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니까 오래 살면 사는 만큼 괴로운 바다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삶을 괴로움이라고 판정하는 불교는 그 내용을 가려서 낳음(生), 늙음, 병 그리고 죽음이라고 한다. 이것을 순서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은 나서 늙으면 병들어 죽는다는 간단한 도식이 된다. 그런데 병은 정말 늙음의 결과이며 늙음과 죽음 사이를 다리 놓는 역할밖에 하는 것이 없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병은 소극적인 의미만 가진 괴로움밖에 되지 않는다.
의사인 한 친구가  몸의 아픔은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몸에 이상이 생겼으니 주의하라는 신호라는 것이다. 병중에 제일 무서운 종류는 자각 증세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병은 그것을 발견한 때는 이미 손을 댈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픔은 바로 나의 건강에 기회를 주는 중요한 메신저 역할을 하는 셈이다. 아프면 의사를 찾아가든, 약을 사먹든, 몸조심을 하든 그것에 대응하는 지혜를 주는 것이며 따라서 아픔은 그 병에서 소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고마운 기능이다.
세상에는 타고난 건강 탓에 전혀 병이라고는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저들은 남의 아픔이 어느 정도인지도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을 대할 적마다 그를 위해 다행이라고 하면서도 부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세상에 분명히 아픔이 있고 고통이 이렇게 많은데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인간이란 얼마나 불행한가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서 어려움이나 괴로움을 거의 모르고 자랐다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와 꼭같은 생각을 한다. 많은 고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도 그들의 고통이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그것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인간으로서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갖추지 못한 상태가 아니겠는가. 아픔이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반드시 치료로만이 아니라 그 아픔을 이해하고 자기 아픔처럼 참여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아픈 자의 아픔은 그만큼 덜어지는 것이다. 아이가 앓으면 사실상 그의 어머니는 함께 앓는다. 참 애인이라면 이와 비슷한 상태로 빠져들어갈 것이다. 네 고통을 내가 대신 짊어진다는 사실이 확대되어 종교적으로까지 승화된다.
병과 고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나고 늙고 죽는 것은 사람이 관여할 수 없는 일이지만 병만은 사람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병에 의한 고통은 피할 수도 있고 극복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서는 적극적인 삶을 만들 수 있는 계기일 수 있다.
아픔에 대해서 고통·고난·진통 등의 용어가 있다. 이 셋의 언어학적인 본래의 구분에 대해서 나는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아픔에 대한 이해를 위해 이 셋을 이렇게 구분해 본다.
고통은 아픔과 마찬가지로 현재적인 것이다. 현재적이고 육체에 국한되어 있다. 무엇에 찔려도, 남에게 구타를 당해도, 사고로나 적대자에 의해 상처를 받아도 고통스럽다. 그런데 이런 아픔은 그 상처가 낫기만 하면 정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적이라고 성격화한다. 이에 대해서 고난은 과거와의 관계에서 과거의 어떤 결과로서 생긴 것이며 그것은 결코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의 아픔을 포괄하는 것이다. 시간적으로 보아도 아픔과는 달리 길다는 느낌을 준다. 아픔을 개인적인 경험으로 한정시킨다면 고난은 집단적인 성격을 지닐 수도 있다. 가령 전쟁을 만난 한민족, 특히 식민 세력 밑에 억압당하는 약한 민족을 고난 당하는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그 아픔을 정지시킬 방법이 무엇인지도, 내 손에 열쇠가 없는 아픔이다. 한국의 역사를 지정학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고난의 역사라고 단정하는 이들이 많다. 역사적으로 보아 그 아픔의 원인은 오래 전부터 줄달아 있었다는 판단이다. 그것을 병에 국한시켜 볼 때도 흔히 말하는 지병이라는 것이 고난이라는 말에 상응 될 것이다.
아픔은 치료하면 된다. 그러나 고난은 많은 원인이 얽혀있기 때문에 내 혼자 힘으로 헤어나기 어렵다. 그 병의 원인이 자기 생애의 어느 시점만이 아니라 부모에게까지 소급될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진통이란 현재도 과거도 아닌 미래와의 관계에서 고난의 승화를 의미한다. 진통의 구체적이고 전형적인 것은 바로 산고(産苦)이다. 남자는 아이를 낳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아이 낳는 고통을 실감할 수 없다. 그러나 엄마들은 진통을 죽음과 바꾸고 싶을 정도로 아프다는 것이다. 그 아픔이 그렇게 심해서 그 비명이 처절해도 그 고통의 현장은 결코 우울하지 않다. 까닭은 그 고통은 바로 한 생명을 낳기 위한 것이라는 뚜렷한 인식이 고통의 성격을 바꾸어놓기 때문이다. 진통은 한 생명을 낳기 위한 창조적 아픔이다.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세상에 고통하는 자가 있는 한 의식하거나 말거나 나는 고통 안에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고통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거나 숙명적인 판단을 갖고 사로잡혀 있는 한 고통은 점점 나를 고통의 늪 속으로 빠뜨려버린다. 고통을 진통으로 전환하라. 한마디로 고통을 창조의 동력으로 삼아라. 세상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참여하는 사람이 되도록 해라. 그리고 세상의 고통을 추방하고 고통에서 시달리는 자들을 대신하는 호소자가 되도록 하라. 내 아픔에서 네 아픔으로 관심을 옮겨라.
병상에서도 신음 대신 그 아픔을 시로, 산문으로 아니면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하라. 그런 작품이 마비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파스칼은 치통을 극복하기 위해 한 기하학 공식을 만들어 냈다고 하지 않는가. 어떤 사람은 그 아픔의 원인을 근절하기로 결심하고 새로운 처방법을 발견했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사람들에게는 고통은 없고 진통만이 있게 된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 살림 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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