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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소(2004-01-09 16:19:35, Hit : 4165, Vote : 662
 산 제물 / 살림 99.4

산 제물 / 살림 99.4
로마서 12장 1-2절

안병무

로마서 12장 1-2절을 읽었습니다. 그 초점은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이 기뻐하실 산 제물로 드리시오”라는 말씀입니다.
제물이라는 말도 현재 내게는 생소한 것이고, 또 제물과 산 제물의 차이가 뭔지도 상당히 문제가 되지만, 특별히 “몸으로 하느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시오”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떠한 것인지 이해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어떤 형태로나 헌신을 한다”는 그런 말은, 보통 청년들이 예배를 보면 헌신예배라고 하는데, 이것은 몸을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말만 따로 떨어져 있고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 다음에는 교회에 부분적으로 봉사하고 혹은 “헌금 같은 것을 조금 하고, 하는 것으로 내가 산 제사 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그저 해결해 버리거나, 아니면 별로 생각을 안 하고 말아 버립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한다는 말입니다. 몸을 “다른 것과 구별하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오늘은 특별히, 지금 불붙고 있는, 같이 기도하고 싸워야 될 한 문제에 대해서, 같이 생각하는 데 목적을 두고 이 시간을 응했습니다. 그러면서 산 제사,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가 무엇인가라는 의미를 확실히 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심청이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서에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물론 상황이 다릅니다. 이 심청이 이야기는 한마디로 말하면 몸으로 드리는 제물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심청은 더군다나 죽은 몸이 아니고 산 처녀이니까 산 제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심청이 이야기를 보면 여러 가지 동기가 상당히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첫째로, 상인들이 등장합니다. 상인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무역을 하는데, 물건을 싣고 오고가는 동안에 배가 파손되지 않도록 생각을 해서 언제든지 정기적으로 사람을, 그것도 처녀를 잡아서 수신(水神)에게 바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상인들의 동기는 자신들의 생명과 그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저들이 생각하기를, 산 사람의 생명을 요구한다고 생각되는 신에게 심청이를 사서 바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남을 희생시켜서 자신을 물론이요,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자는 것이 동기입니다. 이와 곁들여서 저들이 믿는 신이, 소위 저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신이 문제입니다. 그 신은 제물을 요구하는 신입니다. 제물도 순수 처녀를 요구하는 신과도 같습니다.
이러한 공포의 대상을 무마하는 행위가 제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우매성이 심청이를 산 제물로 바치게 한 동기 중의 하나입니다. 또 하나는 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자들의 동기입니다. 언제든지 우리 풍습 가운데, 우리가 자연적으로 생각하는 것 중에 거의 8할 이상을 점령하고 있는 것, 이것은 우리도 모르게 으레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지배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형성된 습관 같은 것, 사고 같은 것이 굉장히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그런 데 속하는 것입니다. 소위 충(忠)이라는 것과 더불어 효(孝)라는 것을 내세워서 극도로 찬양하고 높은 차원으로 그 가치를 높임으로써 위계질서를 유지하려는, 그럼으로써 지배 체계를 순조롭게 만들게 하기 위한 지배 이념의 하나입니다. 즉 통치자 측에서 심청이의 죽음을 효의 표준, 상징처럼 내세워서 이처럼 모두 충, 효를 하면 복을 받게 된다는 그런 말을 유포시켜서 국민을 세뇌하는 용(用)으로 사용을 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심청이 입장에서 보면 그는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어린 소녀가, 언제나 배가 고픈 소녀가 나를 잊어버리고,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즉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그런 내용인데, 저는 이런 것에 대해 자기 초월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 자체로 보면 대단히 고귀한 것입니다. 분명히 산 제물입니다. 그러나 심청이의 죽음은 하느님이 기뻐하는 산 제물은 아닙니다. 지배층의, 기존 체제에 의한 희생의 제물일 따름이지 하느님이 기뻐하는 산 제물은 아닙니다. 그 아름다운 뜻이 무죄의 제물이 되게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중이 등장을 합니다. 그것은 그 당시의 불교를 상징합니다. 이 불교는 현 체제, 혹은 지배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전제로 해서 그들의 생존을 도모하는 그런 종교로 여기에는 등장합니다. 이 잘못된 것을 깨고, 타파해서 그런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이용하려는 종교, 이것이 지금까지의 종교의 아주 더러운 측면입니다. 사람의 허점, 약점을 이용해서 자기를 비대화시키고 있는 종교, 그리스도교도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그리스도교가 비대화하고 있는 가운데 이런 면이 그대로 있습니다. 억울한 심청이가 여전히 교회에서도 이용되어, 교회가 착복하는 기회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종교인들은 자신을 바친다, 그야말로 ‘자신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고사하고 세상에서 실컷 즐기고 죽어서도 윗자리에 앉기 위해서 열심을 내거나, 나아가서는 종교를 미끼로 돈을 버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교회 어디에 이 산 제물이 바쳐질 틈이 있나, 제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하느님이 기뻐하는 산 제물이 될 수가 있을까요?” 이 심청이 이야기 자체는 분명히 산 제물이지만 하느님이 기뻐하는 산 제물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심청이 이야기를 좀더 발전시켜서 본다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심청은 효라는 체제 유지의 이념의 노예가 되고, 상인들은 무지와 이기욕의 노예가 되는 마당에, 바로 그 틈을 타서 종교가 어부지리를 함으로써 마침내 순박한 생명을 잡아가 죽이려고 하는 현장에서 그것과 맞서서, “아니다. 그런 따위의 탐욕의 신은 흡혈귀다. 그런 종교는 거부해야 한다. 저 상인놈들은 이권을 위해서는 생명도 불사하는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저들은 살인의 하수인이다. 이런 생각을 만들어 낸 것은 손에 들어온 권력을 오래오래 누리기 위한 지배자들이 만들어 낸 기만이다” 이렇게 사실을 그대로 폭로하면서 길을 가로막는 자가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 상인, 그 지배층 그리고 종교인 등이 야합한 힘에 의해서 수난을 당하거나 어쩌면 암살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이런 경우, 이 때야말로 단순한 산 제물이 아니고, 하느님이 기뻐하는 산 제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풍조하고 다른 산 것이다. 세상을 영위하는 하느님의 산 제물의 모습이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제물이라는 말을 쉽게 쓰고 있으나 소화는 못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죽음을 우리는 제물이라고, 하느님에게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바쳐진 제물이라는 설명이 우리의 귀에는 익숙하나, 소화 못하는 이야기로 그대로 예수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예수가 제물이라는 말은 맞지가 않습니다. 예수는 사실 제물이 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는 제물이 되고 있는 심청이 경우와 같이 강자에 의해서 조종되는, 거기에 야합하는 세력에 희생되는 심청과 같은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또 그런 사람들 편에 서서, 대항해서 행진하다가, 바로 그런 체제에 의해서 살해된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제물이라는 말을 썼느냐 하면, 물론 유대교 배경도 있고, 헬레니즘 영역에도 그것이 상식화되어 있는, 즉 제사 종교(cult), 이 시기의 언어 속에서 사는 종교인들에게 설명하기 쉬우니까 예수는 하나님에게 바쳐진 제물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희생 제물, 예수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런 희생 제물의 사건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산 제물을 드리는 사건이 지금 한국에 계속 비대해지는, 교회 안에서가 아니고, 또 크리스챤들 사이에서가 아니고─교회도 아니고 크리스챤도 아니고, 그런 이름도 부르지 않는─아주 전혀 다른 데서 이런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산 제물을 바치는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중 하나는 오늘에도 해결되지 않는 불붙은 사건으로써 여러분도 알고 있는 권 양의 경우입니다. 초점을 여기에 두고 이 말을 꼭 전하고 같이 생각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권 양은 지금 인천 감옥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권 양은 서울대 4학년생인 23세의 꽃 같은 시기의 처녀입니다. 그는 일반적 의미에서 미래의 행복이 약속된 재원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같은 처지에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어떤 계기였는지, 노동자 특히 여공들의 세계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알고, 자기가 몸소 체험하기 위해서, 자기를 격하시켜서, 그들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 여공이 되었습니다. 그 비참한 삶에 동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러기 위해서 이름을 바꿀 필요가 있었고, 자기가 대학생이라는 것을 감추어야 됩니다. 그래서 허명숙이라는 가명으로 이른바, 위장 취업을 했습니다. 부천 성신기업이라는 데 지난 5월 20일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반인보다 특별히 용감한 여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평범한 여학생입니다. 그것은, 그가 8일만에 너무 무서워서, 발각되는 날이면 봉변을 받을까봐 그만 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6월 4일에 자기 자취방에 9시경 갑자기 부천 경찰서 경찰들이 쳐들어 와서 그를 붙잡아 갔습니다. 처음에는 주민등록증을 위조했다는 혐의로써 조사하다가 인천 사건의 주동자를 대라는 것, 그들이 어디에 숨었는지 대라는 것에 초점을 기울였습니다. 그날 새벽 3시까지 아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욕적인 언사와 행동으로 취조를 받았습니다. 6월 5일에도 계속 똑같은 방법으로, 험한 말, 입에도 담을 수 없는 말로 모욕을 당하면서 심문을 당하다가, 6월 6일에 마침내 그들이 하도 심하게 모욕을 주고 협박을 하니까 허위 고백을 했는데, 그것이 발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부천 경찰서 서장이라는 자가 소위 문 반장이라는 자에게 “문귀동! 자네가 맡아서 일을 해보게” 하고 또 그녀를 맡겼습니다. 그 문귀동이라는 자가 이것을 계기로 삼아서 그녀를 끌고 수사실에 갔습니다. 새벽 4시부터, 그것도 새벽에 남자가 젊은 처녀와 단둘이 있게 하고, 거기서 6시 반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폭언과 모욕을 했습니다.
여자에게, 처녀에게 아니 사람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제가 오늘 여기에서는 언급할 수 없고, 반드시 이 내용을 못 읽은 사람은 구해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 고백의 내용을 그대로 나는 여기에서 입으로 담을 수가 없습니다. 모욕과 공갈을 했고 마침내 공포증에 떨려 어떻게 할 줄 모르는 상태까지 빠지게 한 그 다음, 6월 7일에 밤 9시경부터 불이 꺼진 수사실에서, 밖의 불이 약간 비쳐서 사람이 희미하게 보이는 방에서 두 사람과 함께 수갑을 뒤로 채우고, 무릎을 끓게 한 다음, 양 다리 사이에 각목을 끼워 넣고 넓적다리와 허리 부위 등을 마구 짓밟아서 비명을 울리게 했습니다. “이년! 안 대면 너는 죽는 줄 알아라” 극단의 공포조로 말했습니다. 그래도 응하지 않으니까 마침내 다른 사람을 다 내보내고, 2평쯤 되는 자기 방으로 끌고 들어가서 의자를 마주놓고, 앉혀 놓은 다음 권 양을 홀딱 벗기고, 그 자신도 옷을 벗고, 마침내 책상 위에 눕혀 온갖 희롱을 다하고, 그것도 추잡스러운 방법을 다 동원해서 색마와 같은 방법을 다 써 가며 11시까지 희롱을 하면서 강간을 했습니다. 이렇게 당한 권 양은 그 후 10일간 유치장에 있었는데 그 날의 악몽에 계속 시달리면서 먹지도 못했고 몇 번이고 죽을 것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생각했습니다. 이대로 죽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대로 죽었어도 그는 제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하느님이 기뻐하는 제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미 유린당한 여자다. 이대로 죽으면, 정말로 하느님이 기뻐할 제물일 수는 없다” 그는 결심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자기가 당한 일을 폭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전에도 이런 일이 무수히 일어났지만 언제까지, 늘 실패한 이유가 본인이 이것을 노출하는 것이, 그야말로 처녀가 이런 것을 노출하는 것은 자기의 생명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관념이 꽉 차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결코 고백을 안 해서 성사를 시켜 본 일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후에는 유야 무야 되고 말았는데, 권 양은 대담하게 결심했습니다. 이건 죽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온 사람에게 이 말을 했습니다. 변호사들도 처음에는 그가 전한 것을 믿지 않다가, 결국에는 변호사들이 파견되어서 자세히 들었습니다. 변호사들은 법률적 차원에서 혹시 거기에 과장이 없는지를 자세히 조사하고, 확실하다는 신념이 생겼습니다. 마침내 부천 경찰서 서장을 위시해서 그 악동, 문귀동이와 그 외 몇몇 사람들을 고발했습니다.
그 고발장의 처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권 양을 접견한 후 풍문으로 전해들은 성 고문 행위가 사실이란 것을 확인하고 …… 경악과 공분을 느낌과 아울러 인간에 대한 믿음마저 앗아간 암담한 좌절감을 느끼게 되었다. 단순히 충동적인 음욕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성이 고문의 도구로 악용되는, 계획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우리에게 더 큰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거기에는 권 양의 진술, 말로 할 수 없는 모욕적인, 부분적이고 상세한 이야기까지 그대로 다 기록했습니다. 이 소식이 교도소 내로 퍼져 나갔습니다. 마침내 6월 28일에 인천 교도소 여자 재소인들, 그 중에는 많은 잡범들이 섞였지만 전원이 이에 동조해서, 권 양을 위해 단식 투쟁에 돌입했습니다. 6월 29일에는 남자 재소자들에게도 전부 퍼져서 그들이 함께 단식투쟁을 하면서 “고문 강간 경찰 구속!”, “강간 경찰 조종한 파쇼 정권의 퇴진!”, “부천 경찰서장을 위시해서 내무장관 해임!” 등을 요구하면서 권 양을 위해서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 한 산 제물이 이 메마른 인정에 석유를 붓고 불을 붙인 거나 같았습니다. 이 한 사람이 산 제물로 바친 이 사건이 범국민운동으로 지금 전개되고 있습니다. 계속 불이 붙어 나가니까 정부는 보도를 완전히 봉쇄해 버렸습니다. 여기에서 변호사들은 검사진에게 소위 재정 신청이라는 것을 제출했는데, 거기서는 기각해 버리고, “그런 일은 없다. 얼결에 가슴 부근을 톡톡 쳤을 뿐이다” 라는 정도로 넘어가려 했습니다. 그러면서 장본인을 해고해 버리고 이러저러한 인사 처리나 하고, 그 일은 없었던 걸로 무마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검사 측에서 이들이 신청한 항의서를 기각해 버리는 것을 계기로 재판을 할 수밖에 없어져서 166명 변호사들이 그 재판의 변호를 신청했습니다. 이제 법정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권 양은 이제 법정에서 어떻게 할건가? 법정에서 자기 자신이 즉 범죄 했느냐, 안 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거기서 그녀는 여자로서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적어도 처녀로서는 생명 다음으로 알고 있는 정조라는 것을 그대로 노출해서, 마치 자기를 칼로 난도질하는 것과 같은 것을 계속하면서 방위를 해야 하는 그런 위치에 있습니다. 수치를 깨물면서 여자로서는 죽는다는 각오를 하면서 제물로 자기를 바칠 작정으로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급관리인 권 양의 아버지는 자기 직장에서 사표를 던지고 나왔습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여기저기서 운동이 벌어지고 신문이 보도하니까, 편지를 썼습니다. “제발 내 딸을 두 번씩 죽이지 마시오. 이젠 검찰이 그런 사실은 없다고 하니까, 이젠 그걸로 좋으니까 제발 다시는 문제삼지 말아 주시오”라고 각 곳에 편지를 썼습니다. 변호사들도 물론 이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래 할 수 없어 부모들이 요청하니까 변호사들이 권 양을 찾아가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 사실을 들은 권 양은 변호사들에게 구두로서 또박또박 적으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회답을 내 보냈습니다. “접견하신 변호인들로부터 제 부모님이 각 신문사에 편지를 보내 이제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고 요청했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이번 사건 때문에 당사자인 저보다 더 마음에 상처를 입으셨을 겁니다. 옛날 어른들이라 이런 문제의 분노보다도 수치심이 앞서는 것이 당연하며 딸의 장래를 무엇보다도 염려하는 심정에서 그런 편지를 보내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부모님의 뜻을 저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 나가는 사람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견해입니다. 부모님은 성추행이 없었다는 검찰의 거짓 발표를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고 딸의 진실을 거짓으로 만드는 결과를 원하시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고문당했던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대신하고, 이러한 인권유린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딸의 희생정신을 부모님이 이처럼 값없이 하시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이 세상의 진실이 거짓을 이길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도록, 이번 저의 싸움이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다는 희망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어떠한 압력이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싸우겠습니다. 나는 싸우겠다는 결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폭로할 때 수치심은 다 버렸습니다. 이것은 수치심 따위를 따질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와서 이 사건을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뒤로 밀어 버린다는 것은 이미 한번 죽은 저를 두 번 죽이는 결과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는 저의 모든 것을 내 던지고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싸울 것입니다. 밖에 계신 모든 분들께서도 함께 끝까지 진실을 밝혀 나가 주시기를 호소합니다” 라고 7월 26일에 홍성우, 조형래 변호사 두 분을 통해서 전달했습니다.
권 양은 이제 분명히 자신을 한 제물로 바치겠다고 결심한 것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부모의 “한 번 죽은 아이를 왜 두 번 죽이려고 합니까?” 하는 말이 “왜? 이 소문을 퍼뜨려서 아이의 장래를 망치려고 합니까?” 하는 견해인 데 대해, 권 양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왜, 내가 한번 죽었는데 두 번 죽이렵니까” 하는 다른 견해를 가졌습니다. “나를, 죽은 것과 같은 몸을, 그야말로 살아 있는 정신으로 되살려서, 이제 앞으로는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산 제물로 바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는 한번 죽었는데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두 번 죽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두 번 죽는 진실이 이제 재판 과정에서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게 처참하게 재판정에서 구체적인 물증을 대면서, 몸으로 물증을 내대는 상황을 안중에 두면서도, 이런 야수들과 그들에게 희생될 한국의 여성들을 위해서 싸우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어제 저녁에 나는 여기까지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감고 권 양이라는 얼굴 모르는 소녀에게 절을 했습니다. “참 산 제물이 여기 있구나” 하는 확실한 자신을 가졌습니다. 그가 예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는 분명히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지금 굳혀져 있으며 앞으로 이것이 그대로 재현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산 제물이 자기를 죽이면서, 우리의 썩은 나라를 살리려는 싸움을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이 기뻐하는 산 제물이다”라고, 나는 이렇게 지금 증언을 합니다. 이 증언을 끝끝내 할 것입니다. 증언은 원래 martyr입니다. Martyr는 순교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증언한다는 말은 순교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 한국은 진실을 끝끝내 진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죽음의 위협을 받는 그런 현장입니다. 우리는 권 양의 사건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우리가 “저것은 예수의 사건이 지금 일어나는 것이다”라든지 “하느님이 기뻐하는 산 제물이다”라고 증언하면, 이것은 정부는 물론이고 기독교 교회로부터도 무서운 공격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사실이니까, 이것을 끝끝내 산 제물이라고 증거하는 것, 이것에 의해서 우리가 수난을 당하고, 어쩌면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제물이라는 것은 한 곳에 바쳐지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죽은 조상에게 바쳤다가 그걸 받아서 나누어 먹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반드시 먹는 것, 위를 채운다는 의미만이 아니고 한 곳에 바쳤다가 나눠 먹는 것이기 때문에, 그 먹는 것이 중요해서 ‘식구’라는 말을 썼습니다. 부락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락제를 지내면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음식을 차려 오고, 그 다음에 돈을 거두어서 돼지 같은 것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고, 그걸 같이 다 나누어 먹습니다. 제물을 나누어 먹는 것은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나누어 먹듯, 그의 정신을 나누어 먹듯, 권 양의 숭고한 절규를, 그의 숭고한 정신을 우리는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아니 거기에 참여해야 합니다. 참여한다는 것은 진실을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진실로서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는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하느님이 기뻐하는 산 제물이 되는 길입니다. 이것도 못하면 우리가 크리스챤이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나는 이와 관련해서 그림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그림은 세상을 뜬 한 민중 화가가 그린 것입니다. 대강의 그림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춤을 추고 있습니다. 큰 잔치를 벌이는 것 같습니다. 그 분이 세상을 떠서, 그 분이 어떠한 의도로 이 그림을 그렸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제 나름대로의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한쪽에서는 호랑이가 있고, 또 다른 한쪽에는 곰이 있습니다. 이는 한국 민족의 상징입니다. 여기서 이 양쪽의 호랑이나 곰은 통일대원(統一大願)이라는 통일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모두 춤을 추는 것은 기뻐서 축제를 올리는 것은 아닙니다. 대원(大願)을 지금 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분명히 이것은 제사를 지내는 것과 비슷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가운데 조금 높게 제단 같은 것이 있고, 그 위에는 큰 북이 하나 있습니다. 이 북에는 묘하게도 불이 붙고 있습니다. 나는 이 그림을 두고 나름대로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이 북 치는 여자의 위치가 3·8 경계선입니다. 이걸 가만히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겨 나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이것은 한국 민중의 축제를 그린 그림입니다. 민중은 모두 나와서 신명나게 춤을 춥니다. 한국 민족의 상징인 곰과 호랑이도 한데 어울렸습니다. 한반도는 민중의 춤으로 덮인 한마당으로 화해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기쁨의 축제가 아닙니다. 해방과 평화를 갈구하는 기도요, 한 맺힌 절규입니다. 그림 한가운데는 민중의, 그 중에도 민중인 여인이 큰북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북이 놓인 자리는 세계냉전체제가 한반도의 허리를 잘라 만든 군사 분계선, 분계선은 불길이 타오르는 제단, 여인은 제단 위에 바쳐진 산 제물, 이 분계선을 제거할 날만이 한국 민중이 사는 날이요, 그것은 또한 세계 평화가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둥 두둥 둥 둥 …… 북소리는 이 땅에 평화가 올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금년 크리스마스 그리고 훗날 평화의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에도 한국 민중은 이 축제를 벌릴 것입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 여러 벗들과 함께…….”
우리가, 앞으로 크리스챤들이 민족사에서 살아 남아서 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산 제물이 되는 길인데, 결국 살 길은 우리 민족사적으로 본다면 민족통일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냉전체제에서 분단된 이것을 누가 제거할 것입니까? 이걸 제거하기 위해선 반드시 산 제물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크리스챤들이 담당할 용기가 없으면 우리는 이 민족사에서 제거되고 말 것이고, 하느님도 크리스챤을 버릴 것이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현상과 같이 산 제물이 오히려 교회 밖에, 다른 데서 바쳐지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다같이 권 양을 생각하면서 기도를 드립시다.




설교 / 살림 99.5
현실과 이상 사이의 교회상 / 살림 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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