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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성(2004-01-09 16:04:58, Hit : 3323, Vote : 703
 대학의 권위

대학의 권위

안병무

대학이라는 것이 학문의 최고 전당인가? 그러면 한국에는 대학이 없다. 대학은 이론의 자유 전당인가? 그렇다면 한국에는 대학이 없다. 대학은 진리 자체를 추구하는 것을 최상의 목표로 하는가? 그렇다면 더욱 한국에는 대학이 없다.
하기는 위에서 내세운 대학의 정의는 이미 과거에 속한 것인지 모른다. 선도상으로나 방향으로나 오늘날의 한국의 대학에 크게 영향을 끼치는 대학 이념은 위에서 내세운 것과는 아주 다르다. 그 곳에서는 대학은 공민의 common sense를 순종하기 위한 교양기관이다. 실질적인 전문화는 대학원에서 시작되고 대학 안의 분과는 그것과의 교량역할을 하는 데 불과하다. 해방 이후 대학의 전통이 없던 한국에 이러한 미국의 대학선도가 직수입됐으며, 과거의 전문학교들은 질적인 변동 없이 곧 대학으로 승격 되었으며, 눈치 빠른 사람들이 아무런 정신적인 여건도 갖추지 못한 채 하나의 기업으로서 대학을 건설해 일약 총장이요, 학장으로서 학계에 열쇠를 잡는 중요한 위치를 점령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많은 굴지의 갑부들까지 되었다는 기현상을 배출했다.
왜 우리는 미국의 선도를 본받아야만 하는가? 그것은 우선 무슨 반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외적 여건이 만든 것이다. 해방후 미군정은 이 선도를 우리에게 강요하였다. 당시에 우리의 실권자들은 대부분 미국 유학생들이었다. 오랫동안 대학에 굶주렸던 민중은 대학의 민중화에 박차를 가했다. 대학교육의 이념은 진리의 전당이라는 상형화를 구축할 가능성을 사전에 빼앗았다. 미국의 실리주의가 진리라는 것을 하나의 추상개념으로 비웃게 하였다.
미국을 닮는 것을 나쁘다고 할 사람은 없다. 단지 개구리가 소의 배를 닮는 우를 걱정할 따름이다. 미국은 오랜 유럽과의 교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아니 그들은 유럽에 정신적인 호수를 박고 자기를 개척한 것이다. 그들은 우리와 비하면 거의 무한대에 가깝도록 풍요한 나라이다. 대학은 저들에게 있어서 전체 형성에 적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는 평화적으로 저들의 선도만 추진해 왔다. 아카데미즘(Academism)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 공민교육적인 대학선도추진은 기형아 탄생의 서곡이다. 정신적인 방향의 설정도 없는 대학의 남발은 학문이라는 간판을 건 기업인의 운동장 건설을 공포한 셈이다. 대학의 원산지는 유럽이다. 유럽은 1000년의 대학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독일에서 군정을 실시함과 동시에 대학제도를 미국의 그것에 맞추어 뜯어 고쳤다. 그러나 독일의 대학 정신은 그것에 굴하지 않고 끝끝내 자기를 다시 되찾았다. 유럽의 대학은 진리 탐구와 기술 훈련을 엄격히 구별하는 전통을 가졌다. 그렇기에 공과나 상과, 기·예과는 대학밖에 두었다. 대학은 직업을 주는 기관은 아니다. 그러므로 대학의 학위와 득학의 기술은 다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카데미즘 수립이 가능했다.
일본은 유럽의 대학 이념을 수입했다. 선도는 영국과 독일의 것을 절충했다. 따라서 저들도 상과, 공과, 음악 또는 미술학교를 독립시켰다. 저들은 이러한 제도를 몇 세대 동안 전승하므로 아카데미즘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따라서 2차 세계대전후 미국의 제도를 강요받았으나 아카데미즘의 큰 위협은 받지 않았다.
그런데 아카데미즘의 전통을 체험하지 못한 우리 나라는 다양한 문제 속에서 대학을 수호할 능력이 없는 성 싶다. 한국의 대학은 입학이나 졸업에 대한 전적인 권한도 부여받고 있지 않으며 교수, 심지어 이사회의 이사 임명까지도 문교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뿐 아니라 대학행정은 문교부의 계속적인 지시를 처리하는 데 많은 정력을 쏟아야 한다. 그것도 국립대학이라면 또 모르겠다. 그런데 국가로부터 한 푼의 원조도 받지 않는 사학의 경우고 보면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대학의 가장 중요한 특권인 학위증마저도 문교부가 준다. 졸업생 선정은 대학 자체에서 하는데 왜 문교부에서 학위증을 주어야 할까? 이것은 학위의 남발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즉 대학당국을 신용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그나마의 여건에서도 창의적이요, 개성적인 교육을 기대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학은 진리 탐구나 인격 도야 따위는 애당초 외면하고 자타가 공인하는 하나의 기업체로 탈바꿈하고 있다. “학원업만큼 확실한 기업은 없다.” 이 말이 일선의 상식이 되어 버렸으니 그 안에서 대학 권위 운운하는 것은 애당초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이러한 풍토 속에 신학대학이라는 것이 있다. 신학대학의 이념은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진리 탐구일 것이다. 그와 관련해서 기독교 내의 지도자 육성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이렇게 정의하면 이것은 특수 목적을 위한 대학이다. 그러나 문교부의 간섭은 똑같다. 게다가 각 신학교마다 그 교파의 총회가 있다. 이 총회가 음으로 양으로 간섭한다. 이래서 신학대학에는 크게 두 주인이 있는 셈이다. 현실적으로 보아 신학대학은 영리 단체는 아니다. 적은 학생 수에 수업료는 다른 대학의 1/3선이다. 그러니 재단으로부터 약 70%의 재정 후원을 받는다. 이렇게 되면 정말 교육을 위한 기관이다. 그런데 그것이 대학의 구실을 못한다. 까닭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외부로부터의 간섭이다. 그 간섭의 성격을 보면 불리한 동기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 것들은 외면하더라도 적극적인 기대 자체에 문제가 있다. 즉 그 기대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밝히라는 것 자체보다는 실용적인 요청이 앞서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써먹을 사람을 배출하라는 것이다. 서구에서 인간을 인격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기능으로 전락시키는 풍조가 들어왔다고들 하나 실은 그것은 유교가 뿌린 씨이다.
유생이란 관리후보생이다. 따라서 유교에서의 교육이란 바로 관리 양성이 목표가 된다. 한국에서는 공부라면 과거 보는 일이었다. 우리말에 인재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인간을 기능으로 본다. 즉,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다. 그렇기에 배인학당이 아니라 배재학당이다. 그런데 이런 사고가 기독교 안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교파마다 자기 교파에서 써먹을 인재를 기르려고 한다. 이러한 풍조가 강하면 대학은 제 구실을 못하고, 잘하면 사관학교가 될 뿐이다. 이렇게 되면 학생들도 모든 것을 실리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써먹을 수 없는 학문은 추상적이다. 눈에 뜨이도록 행동하게 하는 학문만이 의미 있다. 그럼으로써 진리 자체를 위해서 깊이 잠겨버리려는 태도는 점점 희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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