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소개
 
 
연구소 약사
 
 
연구소 소식
 
 
민중신학 자료
 
 
독자마당
 
 
월간살림
 
 
신학사상
 
 
신간안내
 
 
도서신청
 
 
관련 사이트 링크
 
 
안병무 선생님
 
걸어오신길   저 서   성서 연구   추모 문집   사진 자료
 


  신학연구소(2004-01-09 16:19:55, Hit : 3848, Vote : 654
 설교 / 살림 99.5

설교 / 살림 99.5

안병무

말의 설교

설교라는 말은 기독교 신교의 고유언어가 아니면서 신교교회에서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성격화되어 버렸다. 카톨릭의 중심은 설교에 있지 않고 미사에 있다. 근경에 와서 강론이라는 것이 약간은 길어지는 경향이 있으나 원래는 예배의 중심을 이루는 미사에 초점을 두었다. 불교 같은 다른 종교에 있어서도 가르침에 중심을 두는 파와 선을 중심으로 하는 파가 분화되어 있다. 선불에서는 참선에 초점을 두므로 말을 경시하는 데 대해서 교불은 경전을 가르치는 것을 본분으로 하기 때문에 설교를 많이 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신교에서 말하는 설교가 아니고 불교경전을 해석하는 강론이다. 한국 교회도 초창기에는 강론과 설교를 구별했었다. 강론을 일러 성경공부라고 했고 예배 때 하는 목사의 말을 설교라고 했다. 그러면 설교가 도대체 무엇이며 문제가 없는가.
스위스 바젤에 가면 칼빈이 설교했다는 교회가 있다. 그 교회의 분위기에서 정신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카톨릭에 유대적 전통인 제의적 성격을 과감히 탈피했다는 사실이다. 프로테스탄트는 제의성을 가진 것을 우상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축출했다. 그런 결과로 이 교회에 내부의 모든 장식이 제거됐다. 단 한 장의 그림도, 장식품도 없고 강대상이 한 가운데 있어 설교만 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교에 지성주의(주지주의)가 군림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입으로 말하는 것을 귀로 듣고 머리로 이해하는 것에만 의존하는 것이다. 사람은 정말 사물을 머리로만 이해하는가. 머리의 이해로 삶 전체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 카톨릭은 유대교나 마찬가지로 신을 인식하는데 모든 것을 다 동원하면 장엄한 음악이 압도한다. 사면에 만재한 성화들이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향불을 피워 취각을 통해서 속세와 구별된 다른 세계를 느끼게 한다. 미사에는 사제가 몸소 주는 떡을 혀에 대게 하고 십자가상에 입맞추게 하므로 느끼게 한다. 한마디로 모든 것을 동원하여 사람을 사로잡는다. 따라서 지성을 담당하는 머리의 역할은 극히 부분적이다.
카톨릭은 모든 문화적 요소, 종교적 요소를 다 동원하는 것으로 설교를 대신한다는 말이다.
어느 것이 일상성에서 해방되어 비상한 다른 세계를 인식하게 하는 데 옳은 방법인가.
머리에만 호소하는 주지적인 전통을 가진 신교가 점차적으로 예배의식이나 교회당의 내부구조를 찬란하게 장식하고 찬양대를 중요시하여 회중들의 시선에 장엄하게 안치하고 가능한 여러 악기들을 동원하여 회중을 사로잡으려고 하며 목사의 설교 자세도 말 자체보다 제스추어나 변조된 목소리, 괴이한 말투 등으로 변해간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귀에만 호소하면 된다는 칼빈의 주지주의만 갖고는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고 딴 면에서 보면 카톨릭화에로 전향해 가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성서 제일주의를 내세우면서 실상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되풀이 하는 것 외에 대부분의 내용은 윤리를 설교하고 있다. 윤리란 유교에서 말하는 것과 전혀 구별할 수 없으며 일반 상식인은 다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다. 가령 도적질하지 말라는 설교를 할 때 그것을 성서적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그것은 성서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도적질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모든 종교가 말하며 종교란 이름을 띠기 전에 상식으로 되어 있다. 십계명에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이 명기되어 있으니 그것은 성서의 가르침이라는 주장은 궤변이다. 또는 성서에 나오는 황금율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자는 먼저 남에게 대접하라’는 말이 성서에 있으니까 성서의 전용물인가. 그렇지 않다. 불경에도, 유교의 경전들에도 그리고 희랍고전에도 이것은 황금율로 통한다. 신의 이름을 빌릴 필요 없이 인간의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삶의 지혜이다.
지능에만 호소하는 말의 설교의 능력은 한계에 도달했다. 그것을 자인하는 신교의 목사들은 점차 카톨릭적 모습을 닮아가나 제의적인 종교일 수는 없기 때문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대중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분명히 우리는 제의적인 종교로 돌아갈 수는 없다. 기독교로서 새 출발할 때 유대의 제의종교와의 결별을 뚜렷히 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건이 제의종교의 종말을 가져왔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것을 말해서 유다교에서는 구체적으로 반복해서 제사를 지내나 그리스도는 자기 몸을 단 한번 바치는 것으로 제의종교를 끝냈다고 주장했다.

몸의 설교

지능에 호소하는 말의 설교는 성서본문에 성실하면 메시지의 해석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일반윤리와 다를바 없는 보편적인 것을 반복하는 길밖에는 없다. 이 한계를 안 사람들은 몸의 설교를 시도했다. 몸의 설교란 지능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달라지는 현장에 참여함으로 사건을 일으켜 그것이 메시지로 세상에 알리어지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강단에서만 설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설교의 장이 바뀐다. 그것은 노동자가 투쟁하는 현장, 학생들이 데모하는 현장, 분신자살의 현장, 구타당하는 현장, 절규하는 현장에 직접 참여하는 일이다. 그런 현장에 참여하는 목사들 가운데 카톨릭과는 달리 제복이 없는 것을 기회로 갑자기 제복들을 만들어 입고 나는 목사라는 것을 밝히면서 현장에 출현한 것이다. 모순과 갈등의 현장에서 분명한 대답을 갖고 찾아간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특별한 시비판단이나 남에게 권하는 말이 필요없다. 단지 목사가 그런 현장에 참여했다는 것이 의미를 주는 것이다. 아니, 그것이 바로 설교인 것이다. 그것은 지능이 아니라 시각을 통해 감성에 호소하므로 머리를 끄덕이며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로서 느낄 수 있는 설교가 된다.
제일교회 목사는 수년간을 교회당을 떠나 매 주일마다 경찰서가 서 있는 거리를 설교의 장으로 했다. 차분한 내용을 준비하고 심오한 진리를 풀이하는 장이 될 수 없다. 비록 입으로 무엇인가 얘기해도 그 말을 하는 본인도 거기에 비중을 두지 않고 회중들도 그 말 자체에 감동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탄압을 하는 경찰, 그 현장을 몸소 찾아가서 예배드린다는 사실이 오가는 사람들에게 문제를 관심하게 하고 저들이 왜 거리에서 그것도 경찰서 앞에서 소동 아닌 소동을 벌이느냐는 질문을 일으키고 그것은 마침내 공공기관에 의해서 목사를 위시한 주역들이 박해를 받고 그 자리가 점령되기 때문에 여기에 모인 것이고 그런 불의한 세력에는 비록 총칼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굴복하지 않는 것이 진리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서 한 설교가 비록 출판물로 나왔어도 그것 자체만으로는 기억에 남은 것이 없으나 경찰서 앞에서 몸으로 한 설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아 있으며 거기서 나온 메세지는 기독교 영역을 벗어나고 국경선까지 넘어서 멀리 전파된 것이다.
독일의 죌레(Soelle)라는 여자 신학자는 한 동안 매 주일마다 그 주간에 일어난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정보를 모아 설교 대신 거기에 모인 회중과 공개토론을 하고 그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 까지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했다. 이것이 바로 몸의 설교인 것이다. 그 설교가 특별한 해답을 가져서가 아니라 저들이 몸으로 현장에 참여했다는 자체가 많은 의미를 준 것이다. 아니 그것이 중요한 설교가 된 것이다.
말의 설교에 대해서는 일간지에 단 한 줄의 관심도 표시하지 않으나 몸의 설교를 하는 목사에 대해서는 언제나 관심하고 기사화 했다. 목사나 신부가 감옥에 가는 것은 장사꾼이나 정치인이 가는 것과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한다. 채권자나 어떤 보험회사의 직원이 불행을 당한 사람의 집을 찾아가는 것과 목사의 방문은 다른 것이다. 불행의 현장에 참여했다는 자체가 사람들에게 말없는 설교가 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라는 말과 병상이거나 어떤 고난을 당한 현장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런데 근경에는 몸의 설교가 계속 줄어든다. 그것은 사건의 현장이 없기 때문인 것이 아니라 목사들이 그 현장에서 떠나 다시 자기 굴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정치적 박해가 있는 현장만이 현장이 아니다! 그런데 정치사건이 난무할 때는 목사들이 일부러 제복을 만들어 입고 현장에 나타났는데 현장이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때 입고 나서던 제복이 없어지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 대신 교회의 강단에서는 전혀 적(籍)을 알수 없는 해괴한 제복을 만들어 입고 그 위세를 드러내려고 한다. 그것은 마치 제의종교의 사제와도 비슷하다.
우리는 지금도 몸의 설교를 절실히 필요로하는 현장에 살고 있다. 과거의 몸의 설교는 대중의 물결을 타고 그것을 울타리로 삼고 했으나 이제는 대중의 관심 밖, 아니 대중에게서 잊혀지는 그늘진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장을 찾아나서야 할 때다. 우리는 지금도 큰 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보도에 연속 접하는데 대중매체는 그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사건의 현장을 크게 보도하다가 그 결과에서 지금도 신음하는 사람들을 완전히 잊게 한다. 대낮에 수십 미터의 불길을 뿜은 사건에서 희생된 그 많은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성수대교가 무너져서 의외의 봉변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어디서 어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가. 삼풍상가의 엄청난 사건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몇 사람 구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과대 선전하고 이름도 시체도 찾지 못한, 그 존재자체가 없어진, 그런 일을 당한 뼈아픈 현장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전하려고 하지 않는다. 카메라의 초점만 의식하고 음지에서 일어나는 비극의 현장을 외면하는 오늘에 참 의미의 몸으로 하는 설교를 요청하지 않는가.
몸의 설교는 결국 삶의 설교로 연결될 것이다. 말로 하는 전도에 대해서 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Nachfolge)이다. 따른다는 것이 참 의미의 복종이듯이 몸으로 하는 설교는 마침내 그것이 삶의 자리가 되고 삶 자체가 되어 설교로 변해야 될 것이다.
예수도 입으로 설교를 했다. 그러나 그의 설교의 극치는 십자가의 처형에 있다. 십자가에 그 몸이 달린 그 사건이 수천년을 두고 끝없이 끝없이 깊고 넓게 설교를 계속한다. 그런데 그 십자가 형에 우연히 몸만 달린 것이 십자가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삶의 결정이다. 그러므로 그의 몸으로 하는 설교를 바로 그의 삶에서 나온 설교인 것이다.
목사의 직을 내놓고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일두레를 만들고 스스로 밑바닥의 미쟁이가 된 허병섭 목사의 삶의 한 토막은 분명히 몸으로 하는 설교요 삶의 설교이다. 그것의 성공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참 말이 되기 위해 몸으로 노동자 현장에 목사로서가 아니라 그들과 같은 신분으로 변해서 참여했다는 자체가 크고 넓게 설교된 것이다.

설교는 하게 하는 것이다.

끝으로 나는 우리의 주제를 일단 벗어나서 또 하나의 설교의 길을 제시하겠다. 예수는 설교를 한 것만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설교를 들은 이다. “까마귀를 생각해 보아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또 곳간이나 창고도 없다. 그러나 하느님이 그것들을 길러 주신다. 백합꽃을 생각해 보아라 그것은 실도 만들지 않고 베를 만들지도 않는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를 누리던 솔로몬도 그 입은 것이 이 꽃 하나 만큼도 화려하지 않다.” 이 설교는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들려온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의 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라”. 새를 보란다. 꽃을 보란다. 그것들의 존재 자체가 인간들에게 무엇을 설교하는지 들으라는 것이다. 예수는 새들이 사는 것을 본다. 먹을 것을 걱정하는 초라한 인간에게 새들이 전하는  진실한 설교를 들은 것이다. 한 꽃에서 솔로몬 왕의 극대화된 화려함을 비웃고 입을 것을 위해 걱정하는 인간들의 초라함을 알려주는 설교를 들은 것이다. 이런 귀와 눈을 가진 사람이면 삶의 주변에서 무한한 설교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끝없는 사건들을 보는 눈과 들을 귀를 제대로 가진다면 우리는 거기서 얼마나 장엄한 설교를 들을 수 있으랴.
너는 입을 다물어라.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저 새나 꽃을 가르치듯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최대한 정직하게 알려서 그 사건 자체가 설교하게 해라. 불한당을 만나서 반쯤 죽게 된 사람이 비참한 모습을 드러내고 비명을 지를 때 거기서 나오는 설교를 들으라. 들은 것과 꼭같이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하여라. 그것이 수식없는 메시지로 사람들을 사로 잡으리라.
바울에게서 놀라운 다른 면을 본다. 그는 일생을 전도여행을 하며 말과 몸의 설교를 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설교를 듣고 보는 데 열중했다. 그는 만물을 진실한 마음으로 보고 들었다. 그러므로 거기서 들려오는 엄청난 설교를 들었다. 그것은 만물이 신음하는 소리인데 그 신음하는 내용은 ‘새로운 인간으로 탄생하라, 새로운 탄생하는 것을 기다려라’는 설교를 들었다. 그런데 이 설교는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 진동하는 우주 전체가 하나 되어 절실하게 갈구하는 소리로 들렸다. 그것이 만물의 탄식에서 인간 자신의 탄식, 나가서는 성령의 탄식,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탄식의 소리로 번져나갔다. 그는 만물이 전하는 설교를 들을 줄 알았고 볼 귀를 가진 것이다. 거기서 그는 그렇게 엄청난 진리를 터득한 것이다.
기독교의 설교는 너무 좁고 너무 메말라 있다. 그 설교의 소재는 더욱 그러하다. 무엇보다 설교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설교를 해야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맹목적이 되지 말고 언제나 귀와 눈을, 아니 감성까지 동원해서 설교를 들을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말로 변화시킬 때 지성이 필요한 것이다.




민중신학의 회고와 전망 / 살림 99.7
산 제물 / 살림 99.4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zero
한국신학연구소 / Korea Theological Study Institute / http://www.ktsi.or.kr
03752 서울시 서대문구 경기대로 55 선교교육원내 / Tel 02-738-3265~7 , Fax 02-738-0167 , E-mail :
Copyright 2000-2020 KTSI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