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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소(2004-01-09 16:21:05, Hit : 6022, Vote : 649
 예수, 통일의 기수 / 살림 99.11

예수, 통일의 기수 / 살림 99.11
요한복음 15:7-17

안병무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는 내용은 요한복음 4장에 있는 것인데 내용이 길어서 15장 7-17절까지 내용을 읽게 했습니다. 그 내용의 중심은 역시 내가 너희들에게 주는 계명은 아주 낡은 것이면서 새 것, 아주 새 것이면서 낡은 것인데 그게 바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랑과 평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인데 통일문제라는 것도 결국 거기 귀착이 되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이 뜻을 명심하면서 요한복음 4장을 중심으로 제목은 어울리지 않지만 ‘예수, 통일의 기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너무도 순진한 마음으로 법망에 걸릴 줄 알면서도 월북해서 김일성을 만났다는 죄목으로 귀국하자마자 체포됐던, 그러다 병이 났다는 이유로 석방된 73세의 문익환 목사를 다시 잡아 가둔 것이 계기입니다. 홍근수 목사가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지상과제로 대변하다가 지금 역시 똑같은 이유로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나오기는 했지만 조용술 목사 그리고 아직도 감옥에 있는 이해학 목사 모두가 해외에서 이북사람들과 통일 논의를 하고 왔다는 죄목으로 수감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잘 아시는 문규현 신부, 임수경 양도 티없는 맑은 마음을 가지고 가서 한국의 학생들 좁게는 여성의 기상을 휘날렸는데 그들도 역시 감옥에서 내놓는다 하면서 정치 협상의 희생물로 삼고 있는 이런 실정입니다. 그후 여러 사람들이 모두가 기원하고 염원하는 통일문제를 위해서 애썼는데 그것을 구실로 감옥에 넣었습니다.
집권자 자신들과 장사꾼들은 마음놓고 계속 서로 만나면서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단지 반정부적인 의견을 말했거나 그런 위치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그걸 빌미로 그들을 잡아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문제가 너무도 자명하기는 하지만 이런 마당에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에게서 우리 하는 일이 정당한지 또 어떻게 해야 할지 한 측면적인 단서를 좀 찾아보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의 이야기인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은 제가 여러 번 다른 측면에서 설교도 했고 그리고 『살림』지에다가 제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무대는 사마리아 시카로라는 시골, 야곱이 팠다는 우물가입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는 도중에 그 우물가에 걸터앉았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우리 향린교회에서 ‘구걸하는 초월자’라는 제목으로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목이 말라서 물 한 모금 달라는 그 초라한 모습을 제가 여러분에게 소개한 일이 있습니다. 그는 지금 시장하고 목이 마르고 피곤해서 우물가에 걸터앉았습니다. 일행인 제자들은 너무 배가 고파서 요기할 수 있는 먹을 것을 사려고 어느 동네로 갔습니다. 그러니 예수는 지금 혼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장면은 얘기 중에도 많이 나옵니다. 로맨틱한 장면, 우물가에는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고 처녀가 물 길러 왔는데 목마른 나그네가 지나가다가 물 한 그릇 주시오 하니까 처녀가 얼굴은 쳐다보지 못하면서도 버드나무 가지를 물바가지에 띄워서 줬다. 그 이유를 후에 알아보니까 “당신이 갑자기 마시면 몸에 이상이 올까봐 불면서 먹으라고 드렸습니다.” 한국에서만 있을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요새 여자들 그런 여자가 하나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여튼 아주 좋은 무대입니다.
예수도 그런 세대입니다. 30대 초반인지 아직 전인지 젊은 청년이 지금 우물가에 앉았다가 아름다웠을거라고 상상되는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들고 오는 것을 보고 “저 물 한 그릇만 주십시오”아니면 “냉수 한 그릇만 주십시오” 그렇게 간청을 합니다. 유대 사람들은 갈릴리 지방으로 갈 때나 또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는 그 중간에 놓여 있는 사마리아를 거쳐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유대 사람과 갈릴리 사람 사이에 사마리아 사람과의 적대관계 때문에 우회해서 갑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내용은 예수의 일행들은 사마리아로 거쳐가야만 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유는 없는데 ‘dei’라는 희랍말인데 영어로 말하면 ‘MUST’ 즉 꼭 가야만 했다는 결의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꼭 갈릴리를 거쳐 갈 마음을 예수가 가진 것입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는 사마리아에 들른 것입니다.
물을 한 그릇 달라는 나그네에게 물을 거절하는 일은 없습니다. 사람의 도리로서 안 되는 일입니다. 남녀 구별을 심하게 하는 한국의 처녀도, 얼굴을 돌리면서도 물을 주는 형편인데 여기 이 여자는 그래도 경험도 있고 한 여자이니까, 한 번도 아니고 4-5번이나 결혼한 여자니까 그렇게 부끄러워 할 것도 없을 터인데도 이 단순한 생존의 본능적인 욕구를 거절합니다. 물을 못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이면서 어떻게 사마리아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 유대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과의 사이에 막힌 담벽이 있는 것을 여기에 노출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우리는 사귈 수 없는 원수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당신과 나는 남자와 여자입니다. 남녀간의 담벽입니다. 남녀는 척 만나면 붙는 것 같아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원래는 원수관계입니다. 참 힘든 관계입니다. 그 둘이라는 게 만나면 까딱하면 칼로 쳐죽일 만큼 증오심이 언제나 동반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섹스도 있거니와 다른 노력을 많이 합니다. 고우면 죽어라 하고 곱지만 밉기 시작하면 칼로 죽일 정도로 미우니까 굉장히 미운 겁니다. 남녀관계는 원래 원수관계라고 어느 심리학자가 말한 적이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커버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한다하고 또 서로 연결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다른 것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크게 말하면 사랑이겠지만 그것만 쏙 빼놓고 보면 그렇게 싫은 관계는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당신은 남자고 나는 여자, 당신은 유대 남자이고 나는 사마리아 여자, 그런데 당신이 나에게 물을 달라니…….
두 장벽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분단상태입니다. 원래 유대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과는 같은 혈족입니다. 물론 갈릴리도 같은 혈족이었는데 팔레스틴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서 거듭 침략되는 과정에서 이게 다 분열된 것입니다. 즉 내부적인 이유가 아니라 외부적인 원인에 의해서 그들은 분열된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일찍이 주전 800년 때부터 ‘오므리’라는 왕 때, 이스라엘 민족의 수도로 지정이 되었던 유서깊은 곳입니다. 이스라엘 전체 민족의 수도입니다. 남북왕조가 갈라졌을 때도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주로 북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앗시리아를 위시해서 페르시아, 그리이스, 로마 등등이 계속 침범하게 될 때에 이렇게 찢기고 저렇게 찢겨서 결국 내부적으로까지 여러가지 이질화 현상이 일어나고 서로 적대관계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 사람하고 사마리아 사람과의 적대관계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유대 소위 상류층들이 성전을 재건하는 데 있어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피가 섞였다” 또 “너희들 종교는 다른 종교들과 많이 섞여서 더러워졌으니까 너희들의 손은 빌리지 않는다. 너희들은 더러운 것들이다. 너희들은 부정한 것들이다” 하니까 성전재건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마리아 사람은 분노하여 너희들하고 우리들은 꼭 그럴 필요가 없다. 너희들이 예루살렘 성전 지으면 거기 참여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끼리 하겠다고 하고서 저 사마리아 그리심 산 꼭대기에 성전을 따로 세웠습니다. 이때부터 성전과 성전이 중간에 놓이고 이것이 적대관계를 이데올로기화해서 그 사이가 아주 극적으로 나빠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관계가 얼마나 거리가 있느냐 하면 사마리아 사람이 이방인이라는 그런 관념으로까지 발전됐던 증거가 마태복음에 나오는 얘기로서 예수가 제자를 파견할 때 너희들은 이방에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에도 가지 말고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만 찾아가라 할 정도로 그 관계는 소원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갈릴리 지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고향인 갈릴리 지방도 이렇게 찢기고 저렇게 찢기고, 이런 강대세력들이 점령을 해서 다른 문화를 남기고 피를 쏟고 했다는 이유로 계속 여기에 붙었다 저기에 붙었다 속국으로 빙빙 돌기를 600년간이나 계속했기 때문에 유대 사람들은 “이방인의 땅, 갈릴리”라고 불렀습니다. 둘의 공통점은 사마리아 사람이나 갈릴리 사람들은 꼭 같이 예루살렘을 중심한 유대 사람들에 의해서는 멸시를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람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갈릴리 사람들은 그래도 성전은 사마리아의 성전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은 여기 갈릴리 사람도 싫어했던 것입니다. 이래서 결국 셋으로 크게 나누어졌는데 예수 때는 더군다나 헤롯대왕이라는 사람이 셋으로 끊어서 갈라놓는 바람에 더욱 극심한 적대관계가 고정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여인은 물론 한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마리아라는 한 집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적의에 찬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인데 예수는 왜 사마리아로 가려고 결심했을까? 통일의 시각에서 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 적대관계를 가지고 있는 여기 누군가가 이 막힌 문을 열어주어야 하는데 예수는 왜 사마리아에 들어갔나? 막힌 담을 헐기 위해서, 수문을 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전제 밑에서 이 내용을 풀이해 보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문제가 많이 있다는 것이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잘 나타납니다. 예수는 물 한 그릇을 달라 하는 것으로 접근을 합니다. 이것은 어떤 정치성도 없고 사람이면 외면할 수 없는 요청입니다.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앞서 말한 대로 사람의 본성을 외면했습니다. 거부했습니다. 그 여자는, 즉 사마리아 사람들은 분단의 포로가 된 셈입니다. 사람으로 돌아가지 않고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것에 매여서 거기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가면을 쓴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우리 남북의 양 정권이 통일이라고 말로는 내세우면서도 고정관념 지역적 문제를 꼬투리 잡으면서 사실은 통일을 안 하려고 방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공사상을 오래 집요하게 끌고 가면서 아직도 그것을 무기로 해서 방해하려고 하는데 저희들도 모르게, 국민들도 거기에 세뇌돼서 으레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냉대 정도를 각오하지 않고 거기에 들어간 예수는 아닙니다. 뻔히 알면서 이런 말쯤은 각오하고 물 한 모금 달라고 해 본 것입니다. 찝쩍거리기 시작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대답이 당신이 하느님의 은사가, 선물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Gift’ 선물이 어떤 것인지 알았던들, 당신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군지 알았던들, 오히려 내게서 생수를 달라고 했을 텐데라는 엉뚱한 얘기를 예수가 합니다. “물 한 그릇 달라는데 왜 안 줘. 그것도 사람이야, 이 따위 나쁜 년이” 그러면 끝나는 것인데 아니 “물 달라는 사람이 누군지 알았던들,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던들 나더러 물을 달라고 했을 텐데” 그 말은 “나는 얼마든지 줄 용의가 있다”는 그런 자세를 보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사라는 것이 무엇일까? 해석이 여러 가지로 신학적으로 복잡하게 들어갑니다마는 우선 우리는 이렇게 간단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 우물의 물은 내 것도 네 것도 아니고 하느님이 준 것, 달라면 주어야 할 공적인 것, 하느님의 선물이지 야곱의 것도 내 것도 네 것도 아닌데 그것을 안 주다니 그걸 알았다면 그렇게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분단되어서 비극 속에 있는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통일의 뜻이 있음을 알았다면’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물 달라는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면’하는 것도 너무 깊이 그리스도론적으로―물론 요한 전체로서는 그런 관점이 있습니다마는―이해하지 않더라도 우리 상식 선에서 여인은 단지 물 달라는 그를 보고서 유대 남자, 치근거리는 유대 남자, 그리고 지금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픈 굶주린 남자, 하잘 것 없는 지나가는 나그네 그 이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내게 피해를 주려는 사람이라고 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악의가 없는 참 평화와 선의를 가진 그런 남자, 그런데 당장 목이 마른 남자라는 것, 그걸 볼 눈이 없었습니다. 목이 마른 사람이 물을 달라는 그것을 거절한다면 그건 어디가 병난 증거입니다. 그건 으레 주어야 할 일 아닙니까? 사람이면 주어야 합니다. 우리말에 ‘먹는 개는 차지 말라’ 그런 말이 있지만, 어쩌면 ‘개도 물을 달라고 하면 거절하지 말라’ 그런 말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더군다나 사람이 달라는데 그걸 거절하게 만든 것이 뭐냐 도대체…… 이 여자가 사실 병들어 있다. 우리에게 그런 게 있습니다. 자명한 것인데 으레 줘야 할 것인데 못 주니, 그러기 싫어지니, 그 마음에 병이 든 것입니다. 기가 막힌 것입니다. 이 여자는 병들었습니다.
예수가 그에게 “오히려 나에게 생수를 달라고 할 거다” 그 말도 또 우리가 발전시켜서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마는 쉽게 봅시다. 물론 내용은 차원이 높은 얘기지만 그러나 쉬운 말로 풀어 봅시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그냥 움츠렸습니다. 의사가 치료하려고 왔는데도 아픈 상처를 꽉 끌어안고 오히려 그를 적대시하고 공포에 질린 사람같이 된 셈입니다. 이 여인은 그런 데서 해방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과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마음과 마음을 열면 그 사이에서 끝없는 생수가 솟게 되어 있습니다. 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다 주고 싶은데 바로 그 사람에게는 목이 말라도 주기 싫을까? 있는 건 다 뽑아주고 싶다. 주어도 주어도 끝없이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끝없이 끝없이 영원히 흐르는 생수가 있습니다. 그게 꽉 막혔습니다.
그 점에선 돌아가신 함석헌 선생이 말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폐병환자들 있는 데서 “이 폐병쟁이들아 하필이면 폐병이냐. 폐병이 걸렸으면 소리라도 꽥꽥치고, 무슨 시를 쓰던, 그림을 그리던, 비명이라도 질러서, 꽉꽉 말라버린 고갈된 사람들의 마음을 뚫어서 사랑의 샘이 솟도록 할 줄 알아야지. 빌빌 누워서 아프다고 개인적인 생각만 하느냐”하고 막 욕을 했습니다. 그 영감이 아파서 죽을 것 같은 사람에게 욕까지 했으니까 기분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으나 진실입니다. 환자, 불쌍한 사람들의 중요한 역할은 우리 마음을 찌르는 것입니다. 고갈된 내 마음, 불쌍한 사람을 보고도 아무 감동이 없는 사람들에게 적어도 감동을 일으켜서 ‘내가 사람새끼가 아니구나. 저 사람을 보고 그대로 지나갔구나. 저 내민 손 저 창백한 손 거기에 돈 한푼 집어줄 마음이 없었으니 내가 뭔가 병든 것이 아닌가?’ 그런 자극이라도 주어야지. 그러니 나하고 네가 마음을 열면, 너와 분단된 관계를 제거하면 우리 사이에서 생수가 물 솟듯 할 텐데, 사랑이 싹틀 텐데, 인간애가 발동할 텐데, 불쌍한 것이 무엇인지 알 텐데, 물을 한 사발이고 두 사발이고 자꾸 먹이면서 걱정할 텐데. 아니면 한국의 얘기처럼 오히려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할까봐 버드나무 가지를 넣는 그런 심정까지도 생길 텐데, 이 여자가 꽉 막혀 버렸습니다. 영원한 생수가 솟을 텐데 하는 것은 네 마음만 열며는 기적이 일어날 텐데, 이게 현실입니다. 그 배후의 얘기는 제가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일상에서 너무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얘기입니다.
우리에게 무한한 생명의 생수가 있다는 것, 나는 요새 그것을 기(氣)라는 말로 자꾸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기가 있다. 나와 너 사이에 기가 막혔다. 기가 막혀서 통하지 않는다. 이 기가 통하며는 기적이 일어난다. 왜 새끼하고 에미 사이에는―거기도 막히는 게 요새 많지만요. 새끼가 커 갈수록 막힙니다―하여튼 그게 열리면 별 일이 다 있고 놀라울 정도의 모성애가 발동합니다. 그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안 됩니다. 내가 무능한 사람일까? 내가 왜 이렇게 답답한 사람일까? 그걸 느끼지 않습니까? 그게 기가 막혀서 그럽니다. 생수가 솟아나지를 않아 고갈되서 그만 보면 밉기만 해서 아무 것도 안 나옵니다. 마음을 얼마나 내놓느냐에 따라서 영원한 생수가 우리에게 솟아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기적을 낳습니다. 사랑은 마음을 열어놓을 때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여인은 “당신은 두레박도 없는데, 우리 조상 야곱이 준 물인데” 이렇게 대답합니다. 조금 애매합니다. 여자들이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신 두레박도 없는데 무슨 물을 준다는 겁니까? 동문서답입니다. 그리고 이 우물이 어떤 우물인지 아십니까? 이건 적어도 우리 조상 야곱이 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인의 막힌 또 하나의 장벽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여자의 말이 ‘당신은 목마른 남자, 물을 보면서도 물 길을 도구도 하나 못 가진 사람’에 불과합니다.
여기에다 우리는 야곱의 자손이다. 이 싸움이 심했습니다. 누가 정통이냐, 우린 야곱의 직계 후손들이다. 구체적 증거로여기 야곱의 우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 너희들이 잘났다고 하지만 우리는 직계다. 그래서 싸움이 신랄했습니다. 또 하나의 장벽입니다. 예수교 장로회가 정통이다, 기장이 정통이다. 이 여자도 거기에 막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혈통으로 전통을 이어받았는데, 이것은 전통이라는 관념입니다. 우리야말로 너희보다 진짜 우리 조상 야곱의 후예다. 양쪽이 모두 합법정부, 유일한 합법정부, 여기서는 백두산까지 우리 땅이라고 하고 이북에서는 저 한라산까지 우리 땅이라고 하고 우리만이 유일한 정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통정부라고 고집합니다. 서로 양보하기는커녕 다른 쪽을 흡수할 생각만 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경우나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는 “그래 이 물을 내가 먹으면 또 목이 마르지, 그렇지만 내가 지금 말하는 물은 한번 마시면 영원히 마르지 않고 속에서 계속 샘물이 솟아난다.” 목마른 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내 안에서 영원히 솟는 샘이 실제로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서 경험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경험을 합니다. 그것이 영원히 솟는 것입니다. 한번 먹으면 목마르지 않는, 다른 면에서 보면, 사랑하는 사이에 보면 또 보고 싶고, 입맞추면 또 맞추고 싶고…….
말의 차원은 다릅니다. 그러나 이처럼 절실한 문제가 앞서야 합니다. 너와 내가 마음을 열어서 우리 안에 있는 물이 영원히 솟게 해야 합니다. 일시적인 정치적 수습 따위 같은 것만 가지고서는 근본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고갈된 내 마음의 샘을 솟게 해야 비로소 참 통일이 오는 것입니다. 여자는 그 물을 제게도 좀 줘서 구질구질하게 밤낮 물 길러 왔다갔다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합니다. 난 이해를 합니다. 밤낮 물동이 들고, 옛날 여자는 부엌하고 물 길러 가는 그 사이밖에 모릅니다. 하도 말할 대상이 없으니까 거기서 종알종알 하는 게 온 동네로 퍼지고 그게 정보의 창고고 자기 스트레스 해소의 장입니다. 일상생활에 지치기 때문에 반복 좀 안 하게 해주십시오. 역시 아직도 여인은, 이 사마리아 사람은 이기적인 개인수준에 착안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니라 내 문제에 아직도 막혀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무의미성을 폭로한 셈입니다. 이렇게 나 하나만을 고집한 내가 실상 아무 것도 아닌 허무한 것을 고백한 셈입니다. 한 면이 무너져간 셈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점점 더 이기적이고 보다 더 가져야 한다는 그런 생각으로 자기를 억지로 포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물이 나오게 하려면 마음을 열어야 할 텐데 자꾸 오히려 힘으로써 이기심을 극대화함으로써 그런 문을 닫게 합니다.
남북정권이 바로 이런 정치 노름을 하고 있습니다. 남북 교류라는 것도 남쪽에서 처음부터 장난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대로 하다가 그 다음에는 “창구는 하나” 하더니 완전히 독점 구멍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허락을 받으면 죄가 없고 허락 못 받으면 죄가 있는 것입니다. 가서 무엇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나쁜 놈들이 어디 있습니까? 남북교류를 이기적으로 독점하고 있으니까 남북관계는 담이 점점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 유리한 것은 주십시오 하고 서로 그럽니다. 나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기에 통일이 되지 않습니다. 양 정부 어느 정부건, 정부차원에서는 통일이 안 된다는 주장을 합니다.
여기에서 마침내 예수는 포문을 엽니다. 그 고정관념, 허위 그 위선의 뿌리를 흔들어 놓기로 결심합니다. 갑자기 예수가 “당신 남편 좀 데리고 오십시오”하니까 “남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본래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니까 지금 남편이야 제 남편이겠소?” 약점을 찌른 것입니다. 허위를 찌른 것입니다. 야곱의 전통을 자랑하면서 자기 나름으로서는 한 번 남자에게 물도 안 주겠다 하는 아주 정숙한 여자로 위장을 했었는데 그 허위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는 그걸 노렸던 것입니다. 또 함석헌 선생이 생각이 납니다. 1958년 『사상계』에다가 이런 글을 썼다가 잡혀가서 40일 동안 거꾸로 매달려서 별 고문을 다 당했습니다. 그 내용이 “남한은 북한을 소련, 중공의 꼭두각시라고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고 하니 남이 볼 때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6·25는 꼭두각시 노름이었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았어야 할 텐데 민중은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 될 것이 없지 않을까?” 이런 글을 썼다가 끌려가서 “네가 이런 글을 썼다고 해서 대통령이라도 될 줄 알았느냐?”고 하면서 때리고 야단했습니다. 그 놈이 후에 자랑을 삼는데 “이 새끼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적어도 함석헌을 고문한 나다.” 그래서 드러났습니다. 그 후에 조사해 보니까 일제시대 고등계 형사였습니다.
홍 목사가 한 것이 뭐 있습니까? 너도나도 같은 건데 뭘 그러냐? 왜 자꾸 한 쪽만 나쁘다고 할 것 뭐 있느냐, 네가 원수로 보니까 저 쪽도 원수로 볼 수밖에 없다. 어느 한 쪽이 정말 원하면 시작을 해야 할 것 아니냐. 또 사실은 사실대로 진실을 들여다 보면서 해야 한다. 정말 통일을 원한다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랬다고 잡아갔습니다. 그게 통일 안 하겠다는 말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예수도 잡아가야 합니다. 기득권을 고집하면서 통일은 무슨 통일입니까? 결국 예수운동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예수가 한 이 폭로와 같은 행동을 민중운동화한 것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여인은 대결의 근거에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자기 약점에서 도피하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이 여자는 그걸 계기로 급전해서 종교문제로 돌아섭니다. 갑자기 말을 돌려서 “당신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제일 옳다고 하고 우리는 여기 그리심 산의 성전이 옳다고 하는데 어느 것이 진짜입니까?” 종교문제를 들고나옵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느 것이 진짜 본산입니까? 지금은 분명히 사마리아 성전이 중심이라고 확신을 가졌던 그가 문제제기를 합니다. 성전은 확실히 분단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는 여기에 대해서 이데올로기고 체제고 다 분단을 고착화하는 역할 외에는 아무 것도 못한다, 예루살렘 성전이고 그리심 산의 성전이고 그런 것은 지금 권력을 가진 자들이 분단을 고정화하는 이데올로기 역할밖에는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이다. 고집하고 있는 한 통일은 오지 않는다. 그런 때는 지나갔다. 그런 것 가지고 이유를 삼아서 분단을 합리화하는 때는 지나갔다. 성전종교시대는 지나갔다. 하느님은 영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그런 때가 왔다고 보았습니다. 난 이 말을 오늘에 적용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젠 정말 이데올로기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도 손을 들었고, 동부 전체가 이제는 차원을 달리하려고 합니다. 이젠 정말 세계가 부득이 담을 열고 길을 통하지 않으면 죽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이다. 하느님은 진리다. 진리와 영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는다. 하느님은 지금 세계의 역사를 뒤집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과 북, 남은 이북이 폐쇄 사회라고 계속 선전에 광분하고 있고 그러면서 반공사상에 뿌리를 둔 보안법을 끝끝내 물고 늘어집니다. 남북을 통일하겠다고 하고서 반공법 가지고 됩니까? 거짓말 중의 거짓말입니다. 반공법은 무슨 위장을 했든지 반공사상입니다. 어떤 여당사람이 “재야 세력은 불그스레하다” 이런 소리를 해서 희롱을 하지만 지금 소련을 위시해서 전 구라파, 중공까지 합해서 교육을 하면서 왔다갔다 하고 언제인지 모르지만 소련 문화세계로 급전하는 것 같은 그런 혼란을 일으키게 하는 마당에 불그스레한 것을 문제로 삼다니? 지금이야말로 참을 내세우고 영이 통해야 할 때입니다. 평화 조약을 왜 못합니까? 평화 조약을 체결하면 결국 무기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 되고 미군 철수가 불가피하게 전개될 테니 그래서 못하는 것 아닙니까? 왜 동포들끼리 평화적으로 안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아무리 버텨봐야 그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젠 그때가 아닙니다. 이제는 예루살렘 성전이고 사마리아 성전이고 왈가왈부할 때가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가 왔습니다. 참이 이기는 때입니다. 이제 우리는 낡은 귀신은 몰아 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국민을 우민취급을 하고 그때그때 잠깐잠깐 속이면서 넘어가려는 그 허점을 찔러서 항복을 받아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정말 영과 참으로 직결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분계선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무리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후에 후유증이 있다고 선전을 해도, 독일 같은 경우 내부적으로 어떻게 했는지 깊이는 모르지만 민에 의해서 담장을 넘고 헐어버리는 그런 운동이 앞서지 않았던들 이렇게 갑작스런 통일이 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정권이라는 것은 막는 역할을 하지, 여는 역할은 못합니다. 이 여인은 근본적으로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옳은 것은 알면서 정면으로 받지 않고 예수의 말을 받아가지고도 돌려버립니다. 우리도 장차 아는 게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분이 장차 오면 모든 걸 해결해 줄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또 회피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남북의 꼴과 꼭 같습니다. 아직 남한은 이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자꾸 속이는 것입니다. 통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통일을 하면 자기들이 설자 리가 없으니까…… 여기에 대해서 예수는 “너하고 말하는 초라한 나그네가 바로 그다.” 참 얘기가 재미있습니다. 지금 문을 열면 열린다. 그리스도가 네 곁에 있다. 네가 예수를 만날 열쇠를 가지고 있다. 통일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여인은 결국 항복합니다. 무장해제를 하나하나 당하더니 일상생활에서 생각을 바꿉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물동이를 들고 왔으니까 물동이에 물을 담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결국 물동이를 그대로 놔 두고 동네를 향해 달려갑니다. 좀 돌았습니다. 그는 이상한 사람 왔다고 소문을 냈습니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 다음에는 멀리 갔던 제자들도 몰려왔습니다. 이 예수의 일행들과 그 사마리아 사람들이 함께 며칠 지내면서 지금까지 막혔던 담을 헐었을지  그 상상을 여러분에게 맡깁니다. 어쨌든 서로 경쟁하면서 서로를 보고 “너 때문에 그런 줄 알아라”하던 사람들이 예수를 중심으로 예수 안에서 통일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얘기를 통일의 한 단면으로 보고, ‘예수, 통일의 기수’라는 별로 맞지 않은 언어를 썼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만들어 낸 것은 아닙니다. 유대 사람이 있을 때는, 유대교가 있을 때는 사마리아하고 유대 사람들이 완전히 절벽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이후에 곧 그리스도가 사마리아 한 복판에 섰습니다. 거기에 사마리아 사람 유대 사람 갈릴리 사람 아니 이방 사람까지 합해서 한 공동체를 이룬 도도한 교회가 일찍 섰습니다. 바로 이 장면을 여기에 반영한 것이라고 봅니다. 통일이 뭐냐? 결국 그런 거 아닙니까?
홍 목사는 바로 지금 이때라는 예수의 길을 제시한 것뿐이고 그걸 말한 것뿐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가 무엇을 위해서 온 분인지를 알린 것뿐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그렇게 행동하라는 것을 말한 것뿐입니다.




새 것에의 길 / 살림 2000.1
사랑 / 살림 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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