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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소(2004-01-09 16:21:25, Hit : 5431, Vote : 638
 새 것에의 길 / 살림 2000.1

새 것에의 길 / 살림 2000.1
―에베소서 2:11-22

안병무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라
옛적 일도 생각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라도 곧 나타날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도 또한 강을 내리라(이사야 43 :18∼19).

이 본문의 골격은 「전에는 …… 그러나 지금은」으로 되어 있다.

1. 현대와 새 것

새 것을 갈망하는 구절이 성서에 무수하게 많다. 그런데 그것은 언제나 낡은 것과 함께 말한다. 새 것은 언제나 낡은 것의 배제와 함께 병행된다.
그렇다면 성서는 무엇을 새 것, 새로 남, 새 마음, 새 계약,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 새 인간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현대인이 생각하는 그것과는 다르다. 현대인의 특징은 ‘발전’이라는 사상에 현혹되어 있다. ‘모든 것은 진보하고 발전한다.’ 이러한 생각은 과학 기술이 그런 것을 다 해결하도록 발전하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 기술은 거의 신적인 약속을 서슴지 않고 한다. 인간의 생활의 편리는 물론 마침내 죽음까지 몰아내리라고까지 한다. 그런 뜻에서 성서에서 말하는 새 하늘, 새 땅도 복지사회, 아니! 하느님의 나라마저도 진보의 결과로 오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진보, 발전, 성장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이기도 하다. 발전 또는 성장은 언제나 취사선택의 과정을 밟는다. 선택은 하나는 얻는 대신 다른 하나를 버리는 것을 뜻한다. 어떤 것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 한다. 우리의 생리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어느 일부분을 견고히 하는 과정에서 다른 부분을 약하게 만든다.
우리가 나갈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다른 가능성을 차단한다. 가령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 그가 한 학과를 선택함과 동시에 다른 가능성을 사전에 막는다. 과학을 선택하면 사상이나 예술성을 희생해야 한다. 결혼을 해도 모든 남자, 모든 여자가 내 애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게 된다. 젊음은 개방성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결단을 촉구하고 점점 선택을 강요받으므로 그 길, 그 세계는 좁아지고 거기서 늙어갈 길로 들어서게 된다.
시대적으로 보아도 그렇다. 현대인은 자유를 선택했다. 그것은 중요한 결단이었다. 그러나 자유에의 길은 보장이라는 것을 위태롭게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보장을 선택하면 오늘 우리 나라처럼 자유가 희생된다.
현대인은 이성에의 결단을 단행했다. 이것은 이른바 미신, 또는 신비를 버린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론 따위는 삭막한 길을 걷다가 퇴색하게 됐다.
현대는 국가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 국가체제는 개인의 존엄성을 위축시키고 인격 대신 기구라는 마력적인 것을 탄생하게 했다.
우리는 ‘거룩한 것’에 대해서 이른바 세속적(Secular)인 것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성 속의 구별과 또 종교적 권위를 추방했다. 그러나 그로 인해서 인간은 요람을 잃게 되었고, 그러므로 어디에서나 보이는 것 즉 물량적인 것이 척도가 되는 세계를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를 선택했을 때 희생된 것은 세상에서 말살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희생된 것은 끊임없이 되살아나려고 하고 변신하여 인간에게 복수한다.
가령 세속화, 이성적인 결단을 통한 종교는 낡은 권위에서의 해방의 희열을 느끼게 하나 동시에 희생된 것은 신흥종교, 이데올로기적 종교, 마약, 또는 악한 신비의 탈을 쓰고 계속 등장한다.
오늘의 세계는 과학 일변도의 선택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시켰는가. 오늘의 우리 나라가 근대화에의 선택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시키고 있는가? 더욱이 근대화를 경제제일로 이해하고 건설제일을 내세움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시키고 있는가? 가난하면서도 오고가는 인정, 맞아죽으면서도 지키던 신의 등등……. 우리는 시간이 새 것을 가져다 준다거나 진보는 행복의 관문이라고 믿지 않는다.
성서에서 새 것, 새 일을 말할 때는 결코 이러한 진보나 발전의 신념에서 하는 말은 아니다.

2. 종교가 말하는 새 것

성서에서 새로운 존재, 새 사건이란 사람이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기대하지 않을 때, 오히려 절망과 죽음의 현실에서 돌발적으로 온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절망, 그 체념, 또 죽음 자체가 새 것을 가져 온다는 것이 아니다. 새 것은 지금 있는 것의 필연으로 오는 것이 아니란 말이며, 그것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내가 새 일을 하리라” 하시는 하느님에게서만 온다는 것이다. 이 새 것은 그러므로 인간이 진실의 과정에서 보다 나은 것을선택하는 것 이전에 그런 것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제 우리가 선정한 에베소서를 주목하자.
15절에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든다”는 말씀이 있다.
하나의 새 사람! 이것은 새해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진보하여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새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이 만드신다는 것이다. 어떻게?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그것은 〈조문의 율법〉→〈서로 멀다〉→〈원수였다〉와 〈조문폐기〉→〈서로 가까워졌다〉→〈한 몸으로 만들다〉라는 대립된 두 양상이다. 낡은 것의 특징은 조문으로 된 율법에 의해서 조종되는 현실, 나와 네가 먼 거리에 있을 뿐 아니라 원수가 되어 있는 현실이고 새 것, 새 일, 새 사람의 현실이란 조문이 폐기되어 서로 가까워질 뿐 아니라 마침내 한 몸처럼 되는 현실이다.
낡은 것이란 법칙의 세계요, 새 것이란 은총의 세계다. 그런데 법칙이 없으면 세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법을 선택했다. 그것은 혼란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래서 힘의 법칙, 경제법칙 등을 마침내 절대적인 것으로 삼아 버릴뿐 아니라 법에 의한 질서 수립에서 새 사람이 나오리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가령 마르크시즘 따위는 그러한 신념을 절대화한 경우다. 경제질서를 바꿔라, 힘의 위치를 바꾸어라 그러면 새 인간이 창조된다는 것이 그 신념이다. 랍비 유대교도 기능에 있어서 이와 같았다. 그러나 법적 질서가 확립되면 될수록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멀어진다. 그것이 고도로 발달하면 그것은 기계사회가 된다. 기계사회에는 감정, 아니 사랑 따위는 사라진다. 이런 것이 이른바 근대사회에서는 가정에까지 침투되므로 가족 사이마저도 냉정하게 만들어 버린다. 법 앞에서 사람은 시비를 가린다. 그러므로 결국 피차 냉혹한 원수까지 되어 버린다. 법 절대주의는 유대사회를 마비시켰다. 그것은 종교의 이름으로 절대화되어 냉혹하게 나와 나 아닌 것을 가려내는 배타주의로 흘러서 이단을 처단하고 죄인을 색출하는 데 중심 과제가 있는 듯한 사회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 것은 낡은 세계다. 그것은 낡은 것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몰라도 거기서 새 것, 즉 구원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이렇게 확신하고 유대 율법에 반기를 든 이가 그리스도다. 율법이 사람을 살려야 할 텐데 오히려 죽인다! 이 법은 폐기되야 한다. 새 것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이 법칙의 세계다. 아니 적어도 거기서 새 것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이에 반해서 정말 새 것, 새 사람이 되는 길은 멀어진 인간이 가까워지고 마침내 한 몸처럼 될 때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문의 낡은 것〉을 폐기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울의 절규다.
이와 꼭 같은 뜻에서 이사야는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라, 옛적 일도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언제 어떻게 했으니……’ 하는 생각이 뇌리에 있는 한 너와 나와의 새 관계는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 너와 내가 한 몸 같은 연대성이 의식되지 않으면 절대로 새 사람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적 사고에는 용서가 없다. 법적 사고는 따진다. 그래서 시비가 되고 시비에 의해서 처리하면 그것은 반드시 다음의 불화의 불씨를 낳는다. 이래서 전도자는 “하늘 아래에는 새 것이 없다”고 한다. 즉 악순환의 반복이다.

3. 새 것은 어떻게 오는가

그러면 새 것은 어떻게 오나? 그러나 이것을 사람이 어떻게 하나? 시비를 가리지 않고 어떻게 사회가 성립이 되나? 그렇다. 그러나 이것도 바로 낡은 질서에 꼭 잡혀 있는 논리다.
바울은, 이런 논리와 현실에서 스스로 해방되는 기적이 사람에게서 일어나리라고 믿지 못했다. 그는 오직 이러한 엄청난 현실을 바로 그리스도의 사건에서 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그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서로 원수 된 것을 자기 몸으로 해소시키신 분입니다 …… 서로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없이 하시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둘을 한 몸으로 만들어 하느님과 화해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일이 어찌 있을 수 있느냐고 저항했다. 그러나 결국 그 앞에 굴복한 것이다. 그는 그래서 바로 이 십자가의 사건에서 새 사람의 길을 발견했다. 그래서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 중요한 사실은, 새 사람은 수양으로 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사건 즉 자기 몸으로 원수를 해소시키는 일에 참여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새 사람은 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화해의 공동체를 이룰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교회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중심한 새로운 공동체여야 한다. 이 공동체는 법이나 질서 또는 살림살이를 잘 해서 되는 현실이 아니다. 너와 나의 관계를 지배하는 것이 법이 아니라 바로 십자가다. 이것을 떠나서는 절대 새 인간이 될 수는 없다. 가정도 시비로 되는 법이 없거늘 하물며 새 공동체라는 교회가 시비를 가리는 것으로 되리라는 것은 망상이며 그런 교회는 있을 필요가 없다.
십자가의 사건은 2천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나 언제나 새로운 사건이며 그래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삶에서 그것을 실현함으로써 새 사건이 되며 우리는 그 안에서 날로 새롭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 살림 2000.2-3
예수, 통일의 기수 / 살림 9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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