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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소(2004-01-09 16:21:45, Hit : 3935, Vote : 748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 살림 2000.2-3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 살림 2000.2-3

안병무


오늘 제목을 민중운동과 민중신학이라고 했습니다. 이 제목자체가 민중신학에 앞서서 민중운동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민중신학의 발상지는 교회도 아니고 대학도 아니고 또는 서재도 아니고 민중운동이 바로 그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민중이란 어떤 기존 개념으로써 고정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산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민중은 누구에게 규정되지 않고 주체적으로 스스로를 규정해 나갑니다. 민중은 물론 집단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이데(Idee)와 연결되는 인디비디움(Individium)과는 전혀 다릅니다. 민중은 희랍어에서 말하는 인디비디움처럼 이데를 관조하고 그것에 맞추어서 자기의 삶을 양육하는 모범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집단으로서의 민중은 계속 역사 안에서 사건을 일으키면서 자기를 형성해 갑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체험의 대상입니다. 따라서 민중은 정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하는 실체이기에 그 세계에 참여함으로써만 즉 프락시스를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민중사건을 다루는 민중신학은 이론보다 실천을 언제나 우위에 둡니다. 그러면 민중운동이 민중신학을 유도한 구체적 경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60년대에, 대개 중반부터라고 생각됩니다마는 일부 신학하는 사람들이 정치적 현실에 눈을 떴습니다. 그때 관심사는 인권이라는 차원에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권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사하면서 실제로 권리가 박탈된 실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또 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70년 21세의 청년 전태일이라는 한 노동자가 분신자살을 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전태일은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일개 노동자에 불과합니다. 그날그날의 양식을 위해서 바빴고 책을 읽을 시간도, 생각할 시간도, 공부할 시간도 갖지 못한 그런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른바 신학하는 사람들은 정기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어서 공부를 하고 연구를 하는 것을 사회로부터 권리로서 인정을 받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저는 몇 가지 어학도 하고 또 유학을 한 까닭에 국제적인 안목도 있어서 모든 것을 전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자부하고, 또 남도 그렇게 기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무 것도 배운 것이 없는 전태일이라는 한 노동자가 보고 있던 현실을 볼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태일이라는 한 청년이 이 노동자의 현실을 알리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현실은 마치 카프카의 성과 같이 꽉 막혀서 아무 것으로도 그의 말이 전달 안 되니까 결국에는 전달하는 방법으로 그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분신자살하는 방법으로 호소를 했는데, 이 때 비로소 신학하는 사람들 중에 일부가 눈이 뜨여서 비로소 동대문시장이 어디 있는지 거기에 노동의 조건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거기에 인권이 정말 어떻게 유린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책상에 앉아서 신학하는 그 사람들이 먼저 한 것도 아니고 그것과 상관 없이 현장에서 뛰고 있는 사람들, 목사들, 전도사들, 또는 그 외 평신도들이 거기에 눈을 떠서 그가 보여 준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어간 것입니다. 그가 죽은 이후에 비로소 한국에 슬럼에 침투해 들어가서 선교하는 운동 등등이 벌어졌으며,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NCC 산하에 인권위원회라는 것도 형성되고 선교위원회 등등이 형성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서 비로소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 민중에 대해서 관심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전태일 사건을 재빨리 인식한 것도 소위 이론을 수립하고 소위 전승하는 것을 임무로 하고 있는 이른바 학자들이 아니라 노동현장에 뛰어든 사람들, 즉 프락시스를 통해서 재빨리 그리고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이데는, 오늘 로고스에서 테오리라는 도식이 아니라, 사건에서 실천이라는 도식이 진실을 인식하는 척도라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부 신학하는 사람들이 책상에서 민중현장으로 그 자리를 옮기려고 노력했고, 민중이 일으킨 사건을 쫓아가서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책을 통한 이론 따위에서 발견되지 못했던 사실에 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기존 체제에 용납되지 않아서 저들 일부는 대학에서 한 번 혹은 두 번 쫓겨났는가 하면, 범법자로 규정되어서 투옥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론 따위보다 전적으로 민중의 현장에서 그들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고통과를 비교하면 그들이 받은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신학하는 사람들이 대학에서 쫓겨 나서 우리는 참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갈릴리 공동체라는 것을 형성했습니다. 일 주일에 한 번씩 모이는 이 자리는 수난당하고 있는 민중들과 이른바 학자들의 만남의 장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관권의 감시 하에서 그때는 다시 체포될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긴장 속에서 신학자들과 수난당하는 민중은 나와 너, 즉 주체와 객체가 아니라 우리라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민중신학이라는 것이 형성되어 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민중신학이 무엇을 말하고 지금 어디까지 왔나. 민중신학은 민중을 객체로 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민중이 주체가 되어 일으키는 민중사건을 체험하는 그대로 그것을 언어화하여 증언자 역할을 담당하는 일, 그것이 민중신학이 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민중신학이냐고? 그것은 민중사건을 증언하되 신학적 논리와 언어로써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도 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 민중사건이 있고 다른 한편 신학이론이나 언어가 있는 것을 접목하는 것이냐? 아니면 민중사건을 신학의 세계로 흡수해 버린다는 말이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교는 그 자체의 오랜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유산이 있습니다. 이 유산 속에는 하느님, 그리스도 혹은 교회 등등의 주제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안에 그 원천은 성서라는 한 책 안에 들어 있습니다. 물론 성서 자체가 그런 것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닙니다. 그런 주제들은 이미 성서가 있기 전에 있었던 것들입니다. 그런 주제들은 인간의 삶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또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특유의 집단이 이러한 주제들을 자기들의 역사 속에서 체온화했으며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사건으로 증언, 고백해 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형성된 것이 성서입니다. 성서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한 종족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에서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특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특수한 것이 보편과 통합니다. 그것은 이미 히브리화된 그런 주제들이 언젠지 모르게 전 인류의 것으로 확산된 데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을 정복한 그리스도교는 그와 더불어 변질됐던 것입니다. 일약 강자의 영역에 속하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강자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는데 그 언어는 그레꼬 로마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변질됐는가 하면, 무한한 노예를 부리면서도 형제 사랑을 설교할 수 있었고, 도살할 목적으로 십자군을 일으키는 무자비한 폭군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신의 이름을 들먹거리고 신의 사랑을 들먹거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강자의 이데올로기가 된 신학이 하는 마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이 같은 신학의 눈으로 현실을 보고 해석하고 또 그렇게 하도록 강요해 왔습니다. 한국을 지배한 신학도 바로 이러한 유산을 그대로 수입해 들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민중사건을 체험한 신학자의 눈에 성서가 전혀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그 성서 자체도 민중사건의 증언이라는 사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물론 성서 자체에도 군주 중심적인 이데올로기가 산재되어 있습니다. 신을 말하면서 실상은 강자 이데올로기를 말하고 계급적 갈등을 은폐하고 강자의 탄압이나 일방적 착취를 정당화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민중적 사건의 도도한 흐름 속에 부딪쳐서 일으키는 물거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석가는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개인적인 현상을 ‘고’(苦)라고 보고 인간이 도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이 같은 고통에서 해탈할 수 있는가 하는 데 모든 생각을 몰두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경전은 삶에 대한 형이상학적 문제에 집중합니다. 이에 대해서 성서는 엑소더스라는 사건에서 출발합니다. 이 사건은 구약성서에 기조를 이루어서 계속 반복되어 재현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민중의 사건입니다. 개인의 사건이나 집단적 사건입니다. 형이상학적 물음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형이하학적인 역사적인 현장에서 제기된 문제를 절대적인 이런 요청에서 출발합니다. 유교는 그 기점을 공자에게 둔다면 정치적인 모티브가 표면에 나타나는 점에서 불교와 차원을 달리합니다. 공자는 군웅할거(群雄割據)한 당시의 봉건주들을 찾아다니면서 정치적 개혁을 종용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뜻이 성취되지 않으니까 마침내 그는 제자들을 모아서 그들을 훈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제자들을 훈련한 목표는 옳은 정치를 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을 훈련해 내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군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치적인 엘리트를 양성하는 데 목표를 둔 것입니다. 이 엘리트들을 통해서 정치의 정도를 걷게 하자는 것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지도자 양성이라거나 그런 이들을 통해서 기존 정치체제를 쇄신하겠다는 의지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세라는 큰 인물이 합비루라는 민중을 이집트의 탄압의 현장에서 탈출시키고 그들과 운명을 같이 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예수가 갈릴리 민중들과 더불어 울고 웃으며 마침내 그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가 처형됐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따른 자들을 제자라고 소위 마데타이라고, 제자들이라고 번역했으나 그것은 교양이나 인생의 어떤 문제를 가르치려고 훈련한 그런 대상을 말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새나라 건설의 일꾼으로 부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 전체의 주류는 철학도 아니고 지혜도 아니고 해방사건, 그 자체가 기조를 이루고 주류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해방사건을 핵심으로 한 성서의 주류로는 이것을 제가 오늘 맥을 좀 짚어본다면 대체로 아래와 같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지금까지 민중신학을 한 사람들이 관여하거나 발굴한 혹은 해석한 총 결산이기도 하겠습니다. 이미 언급한대로 구약성서에서 엑소더스가 첫 사건으로 서술됩니다. 자기해방을 성취한 이들을 성서는 히브리인이라고 하고 또는 이스라엘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사실상 한 민족이 아니고 한 계층인 것이 지금 영국에서 밝혀졌습니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의미가 부각됐습니다. 합비루, 소위 히브리, 원래 발음은 합비루라는 것인데 그것은 그런 계급이 중동아시아 일대에 만연되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그 시대에 민중이었던 것입니다. 이집트에 있던 이 합비루들이 그들을 탄압하고 착취하던 소위 이른바 호루스라는 창조주의 화신이라고 선전하고 있는 파라오 제국에서 탈출해서 자율과 자주적으로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찾아 떠난 것입니다. 많은 고초 끝에 상륙한 지점은 바로 현재 팔레스틴인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는 많은 군소군주들이 할거하여 그 주면에 있는 주민들을 강제로 노예화하여 노동력을 착취했던 것입니다. 이 농노화된 이들은 역시 가나안 안에 있는 합비루들이었습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합비루들과 가나안 땅에 있는 합비루들이 만난 것이, 그들이 규합한 것이 제2의 엑소더스를 일으키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계속해서 자율적인 종족동맹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이 공동체를 학자들은 암픽티오니라고 명명합니다. 저들을 결속시킨 그 기치는 모노야훼이즘(야훼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야훼만이 우리를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주권이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얼핏 종교적인 공동체로 인식하기 쉽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가나안 본토의 합비루들은 ‘엘’이라는 것을 근간으로 한 이름의 신을 섬겨 왔습니다. 엘로힘이라든가 엘 샤다이라든지 등등. 이에 반해서 군주을 위시한 지배층은 바알이라는 신을 지배이데올로기로 삼았습니다. 구약에는 바알 신과 야훼 신과의 대결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 차원의 싸움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권력에 대결하는 싸움이었습니다. 그것은 바알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지배층과 야훼만을 내세운 피지배계급인 합비루들과의 투쟁을 나타낸 것입니다. 엘 또는 야훼라는 이름의 신을 섬기는 이 합비루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신앙의 대상을 내용상으로 일치시켰습니다. 그것은 합비루의 신이라는 뜻입니다. 가난하고 눌린 자의 신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야훼 또는 엘이라는 신의 이름을 병존시켰습니다. 이러한 기치 아래 이들은 군주 없는 민중에 의해서 자치하는 국가형태의 공동체를 형성했는데 이것이 고대 이스라엘의 종족동맹입니다. 이 같은 종족공동체가 200년 동안을 계속했습니다. 이로써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아래 인간이 없는 철저한 평등적 사회가 이룩될 수 있다는 것을 적어도 분명하게 역사적으로 보여 준 셈입니다. 이 공동체에도 물론 사사 또는 판관이라고 번역되는 그런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군주나 추장과도 전혀 다릅니다. 저들은 외세의 침입이나 천재지변 같은 재화가 일어났을 때, 즉 비상한 때마다 민중에 의해 추대되어서 지도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직책은 물론 세습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구체적인 역할이 끝날 때에는 곧 다시 초야에 돌아가서 자기가 하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한 도성도 물론 없었지마는 그들을 위한 무슨 궁성 따위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민중에 의한 공동체가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붕괴됩니다. 군주제도에 오염된 일부 사람들이 군주국을 만들기 위해서 왕을 옹립하는 책략을 계속 벌여 왔던 것입니다. 저들과 이것에 반한 세력이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다가 마침내 절충안으로 세워진 것이 사울왕 시대입니다. 사울은 왕이라고 하나 왕도도 없고 궁전도 없었고 전제성도 행사하지 않은 그런 중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군주국을 형성한 사람은 반디트(bandit)의 장으로써 여기저기에 군주국을 찾아다니면서 대리 전쟁 같은 것을 해주고 이권을 노리는 다윗이라는 사람과 그 부하들이었습니다. 다윗이 이끄는 무력 반디트들은 먼저 이스라엘의 숙적인 블레셋 군주국에 기식하면서 세력을 길러서 이스라엘에 인접한 유대라는 지역을 빼앗아서 왕으로 군림하고 블레셋과 싸우는 이스라엘을 협공해서 마침내 쇠약해진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점령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군주국을 만든 것입니다. 이로써 민중에 의해서 이룩된 이스라엘은 무너지고 군주국 이스라엘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다시 민중은 수난기에 들어섭니다. 이때부터 예언자라는 일군의 집단이 등장합니다. 저들은 무관의 왕자처럼 군주을 위시한 지배층을 공격 비판하면서 고통하는 민중의 뜻을 대변했습니다. 진정한 민중의 대변자들은 목숨을 내걸고 싸웠습니다. 그 중의 일부 예언자들은 이 따위 체제의 나라는 차라리 멸망하는 것이 옳다고 확신했고 또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저들을 일컬어서 소위 ‘불 구원의 예언자’란 그런 이름을 붙일 정도였습니다.
진정한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뜻과 민중의 소리를 분리시키지 않았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저들의 주장은 맞아떨어져서 이스라엘군주국은 분단되고 그것은 차례 차례로 망해 버리고 맙니다. 외세가 침략할 때마다 지도층이 포로로 잡혀갑니다. 저들은 예외 없이 큰 지주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저들의 소유의 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사람들은 피지배 계급들뿐이었습니다. 이들은 바로 빼앗길 것이 없어서 거기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저들은 외세에 의해서 저들 자신이 점령하고 남은 땅덩어리를 분배받게 된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갔던 본래의 지주였던 귀족층은 저들을 멸시하는 뜻으로 ‘땅의 사람’이라고, 암하아렛츠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우리말로는 쌍놈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그 시대에 민중의 호칭입니다. 민족적으로 보아서 지리멸렬된 저들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상류층은 언제나 재빨리 말을 바꾸어 타고 외세에 붙어 기식하여 살아 갔으나 그럴 줄 모르는 민중은 절망 속에서 새로운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것을 일명 묵시문학운동, 혹은 묵시운동이라고 합니다. 사상적으로 보면 이것은 종말사상입니다. 기존의 것이 철저한 멸망한 다음에 새로운 역사를 잇는 새로운 개벽시대가 온다는 사상입니다.
타협해서 이권을 노리는 반민족, 반민중의 본산인 예루살렘을 탈출해서 일부는 철저한 사유재산 포기와 금욕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내일을 준비하는 삶을 영위했으며, 일부는 짐승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는 생활을 포기하고 입산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적을 무찌르고 혁명을 가져 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전자가 소위 에세네파라는 것이고 후자가 젤롯당이라 명명된 무리들입니다. 저들은 함께 묵시문학파에 속해 있습니다. 이럴 때 예수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의 공생애의 출발에 대해서 마가복음서는 다음과 같은 몇 마디로 성격화합니다.
“세례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는 갈릴리로 갔다.” 세례요한도 엣세네파와 같이 금욕생활을 하면서 한 집단을 형성하고 민족혁명을 부르짓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도 그 운동에 가담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그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그에게 큰 비중을 두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랬는데 이 세례요한이 갈릴리 지방의 봉건주인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서 체포된 것입니다. 동기는 그의 불륜을 비난한 것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은 요세푸스의 기록이나 성서 자체의 것을 분석해 보면, 그는 소요죄(騷擾罪)로 체포된 것입니다. 민중 소요죄가 원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첫 무대, 공생애의 첫 무대는 세례요한을 체포한 안티파스의 지배 영역인 갈릴리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비장한 결의와 죽음의 각오를 단적으로 잘 표시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그 자신도 세례요한과 같은 운명을 전제로 하고 공생애에 뛰어들었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갈릴리, 이 땅은 농노들이 군주에게 반란하여 종족동맹을 형성했던 본거지입니다. 유대 중심적인 사회에서 계속 천시되어 왔으며 600년 동안 분단상태에서 외세에 짓밟히는 수난을 겪은 그런 땅입니다. 그 땅 자체는 비옥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예루살렘을 위시한 도시의 지주들에 의해서 농민들은 땅 없는 소작인, 또는 품팔이로 전락했고, 게다가 삶의 근거를 빼앗긴 민중들이 거기로 몰려들어와서 마침내 암하아렛츠의 중심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거기에서 그렇게 살 수도 없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도 없는 많은 암하아렛츠들이 결국 살 길이 없어 모든 것을 집어치우고 입산을 했습니다. 산으로 들어가서 반디트, 게릴라부대 같은 것을 조직했습니다. 임꺽정, 장길산 얘기 같은 데서 보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이 갈릴리 산에 우글우글했습니다. 이런 속에서 젤롯당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 젤롯당을 중심으로 민족적 열기가 굉장히 고조화된 그런 때였습니다.
예수는 갈릴리로 가되 바로 이 민중들에게로 갔다고 합니다. 거기서 그는 또 그 민중들과 더불어 살며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의 주장은 하느님의 나라 도래라는 것으로 집약됩니다. 그것은 묵시문학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나라는 종말적인 성격을 뚜렷이 지니고 있습니다. 이 악의 세력이 지배하는 시대는 영원히 가고 하느님 주권만이 인정되는 새 시대가 온다는 그런 선언입니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종족동맹의 성격과 방불합니다. 그것은 동시에 당시 민중들의 염원을 집약한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는 민중들의 무조건적인 호응을 받았을 뿐 아니라 동시에 그는 아무런 조건 없이 이 민중들을 받아들입니다. 이런 표현은 오해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예수는 주체고 민중은 객체라는 그런 오해 말입니다. 민중신학의 시각에서 볼 때 예수의 민중 얘기는 나, 너가 없고 우리만이 있습니다. 당시의 다른 책들, 혹은 일반 문헌들의 서술법처럼 예수를 중심하고, 그를 구심점으로 하고 민중들이 둘러싼 식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그러나 절대로 예수가 주체이고 민중이 객체라는 관찰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의 등장과 더불어 그는 곧 민중에 의해서 둘러싸입니다. 이로부터 사건이 연속됩니다. 그런데 예수가 어떤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그들에게 갔다는 인상은 전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예수는 프로그램으로 나타내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민중에게 끌려다닌 인상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끌리는 것이 끄는 것이고 끄는 것이 끌리는 것입니다. 사건 중에서 소경이 눈을 뜨고, 정신병자가 낫고, 앉은뱅이가 걷는 등 병의 치유 얘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계획적으로 병을 고치기 위해 나섰다는 인상은 별로 없습니다. 주도권(initiative)은 병자 자신, 혹은 그와 함께 하는 친척, 아니면 그의 친구들이 취합니다. 예수는 수동적으로 그의 욕구에 응할 뿐입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합니다. 그 하나는 예수가 그들을 고쳤을 때 내가 너를 고쳤다 그런 것이 아니고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는 선언입니다. 믿음이라는 말을 잠깐 보류해 두면 ‘네가 너를 낫게 했다’, 그런 말이 되겠습니다. 믿음이라는 말을 포함시킨다면 그것은 절대 그리스도론적인 믿음은 아닙니다. 네가, 너의 자의식이, 네게 대한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 고향 또는 집으로 돌아가라는 권고입니다. 병을 고친 다음에는 예수를 따르겠다는 사람마저도 그것을 막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들의 병에서의 해방은 예수가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했다는 그런 뉘앙스를 짙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적어도 주객도식은 지양됩니다. 예수는 그들을 본향에 돌려보냈고, 돌려보내는 것을 병 고치는 일과 결부시켰습니다. 그것은 저들의 잃어버린 사회적 권리를 도로 찾아 주는 해방행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민중과 더불어 살던 예수는 마침내 그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으로 돌진합니다. 복음서에는 왜 그가 최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진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시기는 바로 엑소더스, 즉 이집트에서 해방된 그 때를 기념하는 해방절이라는 것은 주목할 일입니다. 그 때 많은 세계에 흩어졌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운집했습니다. 낮에는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다가 밤이면 시외로 빠져나가 어디엔가 은신하고 있었다는 서술입니다. 그것은 그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낮에는 많은 군중들에게 자신을 묻고 밤에는 어둠에 자신을 감췄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마침내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숙청합니다. 그리고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놓이지 않을 만큼 철저히 무너지리라고 저주합니다. 예루살렘, 많은 예언자의 피를 흘린 예루살렘, 철저히 진실을 거부한 예루살렘. 성전, 야훼를 감금한 감옥, 다윗 왕좌가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데올로기 역할을 한 허상, 지금은 민중에게서 경제적 착취의 본산이 된 복마전. 이것은 영원히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반예루살렘, 반성전적인 행동은 민중운동의 일환으로서 크라이막스의 전초전이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예수는 마침내 체포되어, 로마 제국에 의해서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처형될 때 그의 좌우에는 이른바 강도라고 번역되는 소위 레스타이라는 이들과 함께 처형됩니다. 로마 제국은 모름지기 예수를 젤롯당의 일원으로 보아서 그를 처형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의 죄명은 유대인의 왕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면 로마 제국의 반란자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는 철저히 정치범으로 체포되어서 처형됐다는 말이 됩니다. 하여간 그는 체포되어서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그를 따르던 민중들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습니다. 무엇이 남았습니까? 어떤 성과를 거두었습니까? 없습니다. 그를 따르던, 가장 측근에 있던 자들도 다 도망을 했고, 해방절에 모인 군중들도 그의 편에 선 자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철저한 패배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는 공포 분위기에 쌓여 있었습니다. 누구도 예수를 어떻게, 누가, 왜, 어디서 죽였느냐 하는 말을 정확히 얘기할 수 없었습니다. 후에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도 공적으로 얘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 예수의 민중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취한 방법은 예수의 사건을 어떻게든 전하기는 전해야겠는데 물론 공적으로 문서화할 수도 없고, 공적으로 말할 수도 없으니까 이름 없는 예수의 민중들이 입에서 입으로 자기들이 본 예수의 사건을 그대로 전한 것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그는 죽었다. 집권자의 측에서 보면 이것은 유언비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사건은 유언비어의 형태를 가지고 계속 뻗어나간 것입니다. 이 유언비어가 예수의 사건의 증언이, 예수의 죽음의 사건의 증언이 다 시들어져간, 다 죽어간, 다 절망한 예수의 민중을 다시 일으키는 계기를 준 것입니다.
그의 민중들은 재기했습니다. 다 탄 재에서 불이 일어나듯이 예수의 민중은 일어났습니다. 패배했던 저들은 다시 모였습니다. 사도행전에는 100여 명이라고 했는데 일약 한 3,000 명이 불어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공포에 움츠리고 있었던 그의 민중들이 그를 죽인 권세에 정면으로 맞서서 사자후를 토하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예수를 처형한 바로 50일 만인 오순절에 그들이 일대 사건을 일으킵니다. 예수의 민중들은 예루살렘으로 결집했습니다. 예수를 처형한 고장, 저들이 혼비백산해서 등을 돌렸던 고장, 갈릴리 사람들을 천시할 뿐만 아니라 저들을 위험분자로 경계하는 그런 고장, 바로 그 고장에 모여든 이 예수의 민중들은 거기에 모여든 군중의 한복판에서 예수를 죽인 저들을 고발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의 고발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여 온 이들을 충동했습니다. 청중들은 “저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저들의 말이 우리말로 들리느냐”고 놀라움을 표시합니다. 이것을 성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 날의 중요한 의미는 바로 갈릴리 민중들이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이런 전환을 가져오게 했나? 사람들은 예수가 부활한 것을 체험함으로써 이런 전환점이 왔다고 합니다. 부활이 무엇입니까? 부활한다는 말의 한 단어로서 에게이로(egeiro)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봉기한다는 말로도 쓰입니다. 저들은 봉기했습니다. 부활 경험은 저들을 죽음에서, 절망에서 일어나게 한 것입니다. 저들은 죽은 예수가 일어났다고 증언하면서 일어났습니다. 저들은 예수 얘기를 하면서 자기들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일어났다는 신념이 저들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렇게 일어난 예수의 민중들은 약소민족을 침략하기 위해서 만든 로마의 군사도로를 거꾸로 이용해서, 로마의 점령 도시를 하나하나 점령해 가면서 마침내 로마의 수도 로마까지 돌입하게 됐고, 그것을 기점으로 그들이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는 사건에까지 그 일은 추진이 됐던 것입니다.

이상은 70년대 한국의 민중사건에 충격을 받은 눈으로 본 성서의 맥입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민중신학의 과제는 끝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민중사건을 체험함과 동시에 성서를 재해석하는 것 외에 적어도 다음 세 가지의 물음이 제기되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우리가 발견한 것은 민중사건이기 때문에 한국 역사와 현실에서 민중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오랜 그리고 두터운 지층을 형성한 그리스도교 유산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고, 끝으로, 성서에 나타난 민중사건과 한국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일어나고 있는 민중운동과 그 사건을 어떻게 관련시켜야 하는가 하는 과제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문제를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은 순수 학문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도 하지마는 지금 제가 성서를 풀이한 얘기 중에서나 제가 말한 얘기 중에 그 얘기 자체가 정통적인 신학의 반제로서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보면 한국의 역사와 오늘의 현실을 민중신학적 차원에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서남동 교수는 신학자로서 한국 역사를 민족사관으로 풀이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풀이는 왕조사관에 대입한 민중사관에 동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 작업에서 신학과 어떻게 접목시키는가 하는 데 다음과 같은 열쇠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성령론적 공시적 해석이라고 일컫습니다. 이것을 전통적인 기독론적 통시적 해석과 대조를 시킵니다. 그는 기독론적 해석에서는 이미 주어진 종교적인 범주에 맞기 때문에 적합성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성령론적 해석에서는 지금 현실의 경험과 맥락에 맞지 않기 때문에 적합성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서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기독론적 해석에서는 나사렛 예수가 나를 위해서, 나를 대신해서 속죄한 것이지만 성령론적 해석에서는 내가 예수를 재현한 것이고 지금 예수 사건이 다시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의 입장을 양자택일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상호보충적으로 생각해야 되겠지만 민중신학에서는 현재의 성령의 역사가 문제의 핵심이고 물려받은 전통은 해석의 전거의 구실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입장에서 그는 김지하의 담시인 『장일담』에서 한국의 민중전통과 그리스도교 민중전통의 합류를 봅니다. 그가 성령론적 공시적인 해석이란 말을 할 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를 민중신학의 기조로 깔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역사만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의 역사도 그 예외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역사 개입은 바로 해방의 사건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민중 속에서 일어납니다. 모세를 민중해방의 역군으로 내세운 하느님은 또한 한국에서 전봉준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 내세웠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민중해방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중해방사건의 이해를 심화하고, 성서의 민중해방사건을 통해서 한국의 민중해방사를 전망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된다는 것이 민중신학의 주장입니다. 여기까지 민중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론이 없습니다. 단 아직 답변해야 할 소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민중이라는 이 두 말입니다. 일반 민중론에서는 하느님이라는 말이 꼭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민중신학에서는 하느님이라는 말을 넣습니다. 두 다른 대상으로 보이는 이것이 전제되어 있고 그것이 합류를 필요로 한다 하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 둘은 엄격히 다른 것인데 이것을 합류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은 한 사건, 또는 한 현실을 두 가지 측면에서 말한 언어가 하느님이요, 민중이 아니겠나 하는 문제입니다. 한국민중운동사에서도 인내천이라는 기치가 내세워졌습니다. 이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 두 실체에 인이라는 것과 천이라는 것의 합류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한 사건, 또는 한 현실을 말하는 두 언어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하여간 민중신학은 한국의 민중체험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하나는 한국사적인 맥에서 민중사건을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론적 전통에서 이것을 이해하는 과제입니다.
이것도 아직도 진행시켜야 할 과제입니다. 저는 화산맥이라는 말로 설명해 보려고 시도해 왔습니다. 화산맥은 남과 북, 또는 동과 서로 뻗쳐 있습니다. 그것이 여기저기서 동시적으로 또는 통시적으로 폭발되어서 활화산을 이룹니다. 해방의지는 화산맥처럼 지구를 꿰뚫고 잠재해 있다가 그때그때 지각을 뚫고 분출해서 활화산이 일어나듯이, 민중사건도 그렇게 일어납니다. 거기에 동과 서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얘기하면 하느님의 선교입니다. 하느님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거나 안 부르거나 아무 데서나 자기 일을 일으킬 수가 있다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그것은, 일어나는 사건들은 각기 독자성을 가지고 있지마는 같은 맥에 속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 역사와 이스라엘의 역사의 구분이 배제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제언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에 일어나고 있는 민중운동과 거기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제 얘기를 끝마치려고 합니다.
한국의 민중운동은 줄기차게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특히 광주의거 이래로 수천의 민중이 학살되었고, 수천의 민중이 투옥되었고, 수십의 학생노동자들이 분신자살함으로써 독재세력에 항거했습니다. 밀리고 미는 일이 반복됐는데, 마치 모세의 민중과 파라오와의 대결을 방불케 합니다.
나는 여기서 바로 이제 일어난 그리고 바로 어제도 일어난 민중봉기사건의 계기를 마련한 박종철 군의 피살 사건을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그 성격을 풀이해 보고자 합니다. 박 군은 한 학생으로서 민주전선에 가담해서 경찰의 주목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한 그가 아무도 모르게 경찰에 납치되어서 무서운 고문으로 피살됐습니다. 이것으로 종철 군의 저항운동은 끝났습니다. 그의 투쟁 의지는 너무도 맥없이 끝났습니다. 그는 분명히 투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투쟁과 피살은 반드시 원인과 결과는 아닙니다. 그의 투쟁이 피살에 해당될 만큼 가열했다면 그는 영웅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영웅이 아닙니다. 흔히 있어 왔듯이 그의 죽음을 한낮 자살로 처리하더라도 듣는 사람들은 담담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흔한 일 중의 하나로 끝나고 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의 현장에 불려간 한 의사가 그의 죽음이 고문에 의한 것이라고 한 증언, 그것이 큰 계기가 돼서 활화산이 되어서 민중운동으로 번져 나가게 됐습니다. 분노한 민중의 함성이 정부당국을 연거푸 거짓말을 하게 했고, 마침내 일부 책임자들이 물러나야 하는 사건으로까지 번지게 됐습니다. 이로써 폭발된 활화산은 진화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 사제단에 의해서 발표된 내용이 마침내 다시 민중폭발적인 사건으로 번져 갔습니다. 이 활화산은 계속 불을 뿜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죽은 한 학생이 계속 민중봉기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는 민중봉기 속에서 부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박종철이라는 한 학생이 위대해서 홀로 일으킨 사건입니까? 아니, 민중이 일으키는 사건입니다. 민중은 박종철의 죽음에서 자기들의 죽음을 보고 있습니다. 이들이 일어남으로써 죽은 박종철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박 군과 민중은 너와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건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박 군은 크리스천도 아니고, 따라서 그의 사건이 교회 내의 일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된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이 사건에서 그리스도의 사건을 경험합니다. 이 사건에 관여되지 않은 그리스도라면 그가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아니, 그리스도는 이 사건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니, 그리스도의 부활사건과 박 군의 부활사건은 한 맥에 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건이 아키타이프(archetype),즉 원형적인 활화산이라면, 박종철 사건을 통해서 예수의 민중사건은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까닭은 예수의 사건은 민중해방사건이고 박종철 사건도 민중해방사건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민중운동에서 그리스도 사건을 보고 그것을 증언하는 것이 민중신학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민중신학은 언제나 민중운동에 바싹 붙어서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을 증언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으며 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성서 한 구절을 읽고 끝마치겠습니다.

“예수께서도 자기 피로 민중을 구별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가 당한 수치를 걸머지고 영문 밖에 계신 그에게로 나갑시다”(히 13:12-13).




부활절의 새 아침 / 살림 2000.4
새 것에의 길 / 살림 2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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