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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소(2004-01-09 16:22:21, Hit : 3856, Vote : 648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살림 2000.5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살림 2000.5
―요한복음 21:15-17

안병무
부모, 또는 자기가 섬기던 사람이 죽었을 때 그의 소원을 들어주는 일은 동서고금에 중요한 일로 생각되었다. 세익스피어의 소설인 햄릿에서처럼 부모나 형제의 원수를 갚는다거나 그가 원하던 소원을 들어주는 일들이 그렇다. 또는 생전에 잘 드시던 음식을 제상에 놓는다거나 장례를 치르며 사자(死者)의 관에 노자 돈을 넣는 일 등이 그렇다.
그것에 대해서 예수와 그 제자들의 경우를 한번 보자. 15절은 13절의 계속이다. 새벽에 예수는 피곤한 저들에게 아침 조반을 장만해서 먹게 하고 그리고 베드로에게 특히 묻는다. ‘네가 나를 저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이것은 부활 후의 장면이다. 그런데 이것을 바로 십자가 직전의 장면과 비교하여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최후 만찬에서는 ‘너희 중에 나를 팔 사람이 있느니라’고 한다. 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한다. 십자가에까지는, 즉 고난은 예수가 홀로 참가하고, 또 그것을 전제로 하고, 십자가의 고난으로 죽음을 극복한 다음에 이제 예수는 저들에게 사랑의 고백을 시킨다.
둘째, 베다니에서의 최후의 만찬은 종말의 직전에서 하는 송별의 만찬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벌써 새 출발의 축하, 즉 새로운 만남이 시작된다.
셋째, 여기서는 세 번을 계속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이것은 베드로가 세 번 예수를 부인한 것과 맞먹는다. 십자가 사건 전에는 사랑을 아무리 맹세해도 그것을 결코 용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활 후에는 예수가 그에게 오히려 사랑을 요청하며 고백하게 한다. 벌써 여기서는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게 주께 향한 사랑은 주어질 때에만 가능한 것이지 인간적인 정열이나 소질이나 결심으로 되어지는 일이 아니다.
사실상 베드로는 벌써 그 사랑을 포기하고 그의 생애에서 예수와의 1년은 물에 던진 돌의 파문 정도일 뿐 이제 그는 다시 갈릴래아 바다의 일상 생활로 돌입했다. 사랑이란 센티멘탈리즘으로 되는 것도, 결심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구체적인 과업을 눈에 두고 그 과업을 이루어 가는 것을 통해서만 그 사랑이 실현되고 지속된다. 이제 예수는 이 실망에서 일상 생활로 돌아간 저를 찾아온 것이다. 그것은 이 사랑을 참 실현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에게 한 과업을 주기 위해서.
이것을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될까? 그의 사랑은 일단 부정되었다. 자기가 정열적인 고백과 결의를 한 것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야 비로소 참 사랑이 가능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예수의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이제 그가 사랑한다면 그 사랑마저도 주어지는 것이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고백이다.
사람이란 모든 것을 산 채로는 먹지 못한다. 죽여서 먹는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일단 부정됨으로서만 비로소 새 사랑이 가능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부정된 채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종교심도 그렇다! 이것은 아무리 열심이라도 그것이 일단 자기 안에서 부정된 후에라야만 참 신앙이 출발된다.
성서 본문을 한번 보자. 일단 상황은 ‘조반을 먹은 후’이다. 12절에서는 주님인 줄 알았으나 ‘당신이 누구인가?’를 감히 묻는 이가 없더라고 한다. 참 이제는 내 결심, 내 자신이 다 후회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제는 내 운명은 내 손에 없고, 그의 처분만 기다리는 장면! 돌아온 탕자처럼, 간음한 여인이 찾아온 남편 앞에 있듯이, 단지 그의 처분만 기다리는 그 장면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런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고 부른다. ‘안레데’(Anrede)이다. 직접 내게 대하고 묻는 것이다. 1대 1의 관계이다. ‘너희들’ 이 아니라 ‘너’이다.
그 다음에 베드로에게 하는 말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이다. ‘저들보다 나를’이 아니고, ‘저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더 나를 사랑하느냐?’이다. 이제는 십자가에 죽기 전에 베드로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그 예수가 아니라 부활한 예수이다. 그 예수가 베드로 앞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대상이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주께서 아시나이다’이다. 이것은 자기가 확실히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자신이 없다는 말이다. 당신이 판단할 일이지 나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베드로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말한다. 부활한 그는 ‘복수해 달라’고도 또 마태복음에서처럼 ‘세계 전도를 해달라’고도 아니고, 그저 ‘내 양을 먹이라’고 할  뿐이다. 새 과제는 내 양을 먹이는 것이다. 여기서 ‘내 양’이란, 10장에서 예수가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한 바로 그의 것들이다. ‘먹이라’, ‘그의 것들을 먹인다’ 함은 당시에 모든 악한 것에서 보호하고 춥고 더운 것을 가리고 풀 있는 곳으로 인도하는 일이다. 거기에서는 도적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에 저 양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죽는 마당에 큰자식에게 막내를 부탁하는 모양이다.
여기서 다시 돌이켜 베드로의 입장을 한 번 보자. 그의 사랑은 일단 단절되어 있었다. 센티멘탈한 자기편에서 시작된 사랑은 좌절되었다. 다시 그와의 관계의 사랑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의 뜻을 한 과업으로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가 원하던 것은 그가 사랑하는 형제를 지키는 일이다. 나는 정말 그를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내 할 일은 그가 사랑하는 형제들을 위해서 내 목숨을 바치는 일이다. 예수는 두 번째에도 똑같은 질문을 한다. 그리고 똑같은 부탁을 다시 반복한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이 질문은 어떠했을까? 내가 정말 그런 자격이 있나?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나? 세 번째에 베드로는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내가 그를 사랑하는가? 그가 내 사랑을 부정한 게 아닌가? 정말 내게 그것이 가능할까? 그렇더라도 나는 해야 하겠다.
이제 예수를 사랑한다는 일은 감정에서, 또는 형이상학적인 기대에서부터 아주 구체적인 이웃과의 관계로 내려왔다. 그리고 이제 그를 사랑한다는 일은 이웃을 사랑한다는 일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사랑하면 고행을 하라, 기도하라, 또는 의식(儀式)을 지켜라’가 아니라, 바로 ‘내 양을, 즉 네 이웃을 모든 위험과 고통에서 건져 주라’로 된 것이다. 이렇게 할 때에만 그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 된다. 동시에 사실은 그렇게 할 때에만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를 알게 된다. 사랑, 그것은 궁극적으로 내가 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어떤 아버지가 재물만 밝히고 게으른 아들과 함께 살았다. 어떻게 하면 이런 아들을 바로잡을까 고민하던 중 병이 깊어서 죽게 되었다. 그의 아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얘야, 이 밭에 보물을 묻었다. 이 밭을 파헤쳐 보아라! 그러면 너는 큰 부자가 될 것이다.’ 이 아들은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그 밭에 나가서 밭을 구석구석 열심히 파헤쳤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보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돌짝 밭이던 그 밭에서 돌이 골라지고 이제 씨만 뿌리면 되게 되었다. 그 순간 그 아들은 아버지의 속뜻을 깨달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임종을 맞고 있었다. 그 아들은 이때 자신을 놓고 고민했던 아버지 앞에서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이다!
여기서 내 양, 또는 어린양이란 복수(複數)가 아니고 단수(單數)이다. 이것은 교회를 통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한 사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다.  참으로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 함은 내가 남을 도우려는 때, 사랑할 때에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때 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앎으로써 사랑하는 자기를 발견할 수 있겠거니와 참으로 그의 사랑이 얼마나 무한했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리라.
이 본문은 벌써 베드로가 순교한 뒤에 씌어진 것으로서 베드로의 생애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다. 그가 순교했다는 것은 18절 아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하는 말로 알 수 있다. 어떻게 베드로가 마침내 예수 때문에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었을까? 그는 그렇게도 비겁했는데! 그렇게도 실패를 거듭했는데! 그는 인간적으로 결코 위대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하나의 자연인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렇게 마침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으로 골인한 것은 결국 그 자신이 아니라 예수에게서 온 힘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요한은 이것을 본문의 이야기를 통하여 ‘제가 아니다. 타력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그 타력은 양을 먹이는 동안에 왔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그는 사랑하는 이에게서 한 과업을 맡은 이이다. 이 세상에서 모든 복잡한 관계에서 내 선의가 여지없이 거부당하고 배신을 당할 때 ‘이 따위 짓을 왜 해’ 하고 반항하지만 만일에 그 다음에 ‘그러나’ 하게 될 때 그런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것을 그가 원했는데’ 하는 사랑의 대상이 없는 자는 반드시 넘어진다. 그런 데 대해서 번번히 자기 선의(善意)가 유린됨에도 불구하고 또는 내 자신 안에 있는 제한성 때문에 끊임없이 실망함에도 불구하고 되든 안 되든 ‘그가 원하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런 자신에 대해 재기(再起)하는 이, 그러한 사랑의 대상을 가진 이, 그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직업을 갖고 있다. 이 직업이라는 것 때문에 하루종일 시달린다. 젊어서는 어느 단계까지 해서 기반을 잡고 기반이 잡히면 새 상황으로 호전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더 많은 걱정, 더 많은 일만이 나를 짓누른다. ‘어느 단계에 오면’이라는 희망 속에서 그 고된 일들을 견디어 내지만 결국 도달하는 결론은 ‘이 따위 짓은 왜 해, 밥 세끼를 위해서?’라는 허탈감이다. 정말 밥 세끼를 위해서라면 너무나 서글픈 일이다. 결국 ‘자식을 위해서’라는 결론을 갖고 확실히 이러한 생각에서 사는 것은 무언가 나를 보람 있게 한다. 그러나 ‘자식을 위해서’ 라는 것에도 지친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의 유일한 삶의 푯대였던 그 자식의 배신 등에서 더욱 실망할 수도 있다.
루터는 직업이라는 말을 ‘Beruf’라는 뜻에서 강조했다. 직업, 그것은 Job이 아니라 Beruf이다. 이것은 사랑하는 이의 뜻에 의해서 되어진다. 그리고 그 Beruf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하는 일이다. 여기에 이 Beruf를 통해서 나를, 내 사랑을, 또는 그의 사랑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Beruf는 신성한 것이다. 이 Beruf는 그렇기 때문에 부패의 길로 갈 수 없다. 직업의 목적이 돈에 있다면 그 직업은 어쩔 수 없이 부패해진다. 그러나 Beruf는 그의 뜻을 위해,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할 때에 일반적인 직업처럼 부패해질 수 없다.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부패. 남녀노소, 직업의 귀천이 없이 돈에 의해서 얼굴에 의해서 자행되는 부패. 그것은 애국심, 새 것에 대한 비전(vision)이 없을 때에 온다. 참 그리스도인인가? 그러면 그는 그 Beruf에서 부패할 수 없다. 그에게 Beruf는 의무이며 동시에 사랑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을 때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이해 관계에서 해소되지 않고 그렇다고 해도 또 술로도 위안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에게 ‘그 때문에’가 있는가? ‘나 때문에’가 아니라 ‘그 때문에’ 내가 지금 무언가 붙잡고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네가 나를 사랑하면’, 그렇다. 그렇다면 나는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다.




어떻게 자라는지 몰라 / 살림 2000.6
부활절의 새 아침 / 살림 2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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