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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소(2004-01-09 16:23:01, Hit : 5537, Vote : 682
 한국의 인간상 / 살림 2000.7

한국의 인간상 / 살림 2000.7

안병무


한국 사람을 보는 눈

한국의 인간상을 한국 사람이 그리는 일이 가능할까가 문제이다. 그 까닭은 그 자신이 그 민족 속에 있기 때문에 도저히 객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은 자기 모습을 그리고 말게 될 위험이 있다.
그러면 외국인이 한국의 인간상을 바로 그릴 수 있을까? 저들은 밖에서 보기 때문에 객관적일 수 없으리라. 그러나 저들도 자기들의 입장 또는 인간상에 비추어 보기 때문에 일그러뜨릴 위험성이 있다. 사실상 외국인들이 본 한국인의 모습은 거의 눈에 띈 이색적인 부분만 찍어 확대한 것이었다. 그런 것들을 보면 한국 사람은 역시 한국 사람이 더 잘 본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한국 사람의 모습을 어느 정도로라도 사실에 가깝도록 파악하려면 외국 사람과 비교하고 외국인에게 비친 한국 사람의 모습을 검토하면서 제 모습을 객관화해 보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국 사람의 바탕

독일 있을 때, 한국민속예술단이 온 적이 있다. 향수에 젖어 있던 나는 열병에라도 걸린 듯이 흥분해서 주최자라도 된 양 독일 친구들을 초대했다. 객석에 앉은 나는 두 가지 눈으로 관찰했다. 하나는 같은 민족의 눈이요, 다른 하나는 독일 사람들 특히 내가 잘 아는 독일 친구들의 눈이었다. 저들은 동양 하면 정적(靜的)이고 내향적이어서 그것이 좋게 발전하면 현인(賢人)적이요 나쁘게 주저앉으면 게으름이 그 모습이리라 하는데 나도 서구인들 속에서 살면서 그런 우리 모습에 고정됐던 것이다. 그런데 무대에서 연출되는 모습은 전혀 달랐다. 음악·춤 할 것 없이 경쾌(輕快)했다. 극히 단조로운 음률과 율동이었으나 화사하고 경쾌하게 하늘에라도 금방 날아 오르려는 그런 모습이었다. 독일 사람들은 황홀경에 빠졌으며, 신문은 경탄의 찬사로 박수를 보냈다. 그것을 본 저들은 한국인의 인상을 바꾸어야 했다. 저들은 한국을 생각하면 틀림없이 군취가무, 주야부절(群聚歌舞晝夜不絶), 연일가무(連日歌舞) 즉 무리들이 모여 연일 밤낮 춤추고 노래하는 민족이라고 옛날 중국 사람들의 스케치와 같은 연상을 하리라.
저들은 한국 사람을 스페인 사람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사실상 서구에서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여 준다. 검은 머리와 비교적 작은 체구의 저들은 모이면 춤이요 노래이다. 더욱이 저들의 음률은 아랍의 영향을 받아서 동양적이다.
무대에서 연출하는 모습을 우리 민족상의 눈으로 보면 저들의 비교는 그럴 법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 스페인은 지금의 일상 생활이 그렇고 우리는 우리가 지니고 있던 것을 모아 꾸며 놓은 것이다. 저들은 무대만 봤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일상 생활의 모습과 대조했다. 분명히 한국인의 타고난 기질은 경쾌하고, 낙관적이며, 위로 향한 희망을 가졌으리라. 우리의 이러한 기질은 지붕·처마밑·옷소매·남자들의 갓 같은 것에서 풍기며 음악이나 예술이 그렇다.

줄기찬 희망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은 한국 사람의 기본적인 삶의 자세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아무리 두들겨 맞고 고난 속에 넘어져 깔려도 최후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무거움에 눌린 듯한 지붕 처마 끝은 그래도 하늘을 향해 치솟은 것처럼 축 늘어진 옷소매, 심지어 버선 코, 고무신 끝 부분까지 위를 향해서 아주 주저앉아 버리지는 않는다. 밑에 깔린 레슬링 선수가 등만은 땅에 붙이지 않는 듯한 그런 자세이다. 서양의 독설스러운 기자가 거리에서 지게에 비스듬히 누워 입벌리고 낮잠 자는 사람의 모습을 한국인의 상징처럼 말하고 저러고도 사는 게 이상하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음을 믿는 대범성을 몰라서 하는 소리이다. 희랍의 디오게네스를 정말 숭상한다면 좀 다른 눈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선사상(仙思想)을 비롯한 불교, 도교 등에서 훈련된 궁극적인 것으로 눈에 보이는 희비애락을 아래로 깔아 버릴 줄 아는 피가 흐르고 있다. 이러한 바탕이 있기에 한족·만주·몽고족 등이 제 문턱 드나들 듯 침범했어도 끝내 자기를 잃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 뜻에서 한국 사람에게 ‘종교적’이라는 말을 쓴다면 옳은 말이다.

미운 놈 떡 한 개 더 준다

6·25동란을 보도한 서양 사람들은 한국 사람을 평하기를 ‘잔인하다’고 했으며, 한국을 소개하는 글에 이조시대 당쟁 등을 들어 그러한 단정을 곧잘 한다. 그러나 그런 잔인성은 공산주의가 한 것이고 정권욕이 한 일이지 한국 사람 자체의 모습은 아니다.
옛 글에 한국 사람을 ‘인’(仁)으로 성격 지은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논어에서 ‘인’을 공관신민혜(恭寬信敏惠)라고 정의했는데 한국 사람이 바로 그렇다. 무엇보다도 미운 놈 떡 한 개 더 준다는 것이 한국인의 본바탕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우리는 너무 실리적인 각도에서 자학적인 평가만 해서 약자로 자처해 왔지만 그렇게만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외국을 침략한 역사가 없다. 또 힘을 가지고도 양보를 잘 해 왔다. 중국·일본 등은 복수를 최고의 미덕처럼 생각해 왔으나 우리는 용서(寬)가 그 특징이다. 무엇보다 잔악했던 일제가 항복했을 때 일본인들에게 베푼 그 관용성을 보라! 복수는 고사하고 정말 저들에게 떡 한 개 더 주는 모습을 보였다. 우리에게 사대주의 근성이 있다고만 나무라지 말아야 한다. 그 속의 인자(仁者)의 모습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우리말에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내게 잔악했어도 웃고 마주 서면 깨끗이 과거를 청산할 줄 아는 민족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잘 속고 계속 밑지기는 했을 망정……

이지러진 얼굴

그러나 이상에 그런 모습이 오늘날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본래의 얼굴이 많이 이지러졌다. 경쾌한 예술적 모습은 비애와 애상의 모습으로 변하고, 종교적 대범성은 숙명적인 체념이 되어 게으름으로 떨어지고, 인(仁)의 모습은 비열한 굴종 아니면 참으로 잔인하게마저 되어 가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오랜 고난의 역사가 남긴 흔적이다. 우리네의 마음씨에, 얼굴 표정에, 사랑이나 예술적 표현에까지 짓눌리고 얻어맞은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다.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려다가 얻어맞고 또 맞아 허리가 구부러졌다. 그래도 머리만은 끝까지 하늘을 향한 것을 일제가 그 목마저 짓눌렀던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그의 책 『한국 역사』에서 이 민족이 그렇게 당당한 출발을 했었는데 오늘날 왜 이런 꼴이 됐느냐고 곡(哭)한다.
생기발랄하던 청년이 징용에 끌려갔다가 병들어 돌아온 모습 같다. 함 선생은 오늘의 한국인의 모습이 이 꼴로 된 책임을 우리 자신에게만 묻지 않고 역사에 묻는다. 그는 한국인의 오늘의 꼴을 로댕의 ‘노창기(老娼妓)’라는 조각에서 보면서 세계에 그 책임을 묻는다. 얼른 보면 그 노창기를 멸시하고 침뱉을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 아름답던 젊은 여인을 저 꼴로 만들었는가? 남자들이 아닌가! 그러고도 저들은 여전히 신사들이고, 이 수난의 여인은 멸시의 대상이다.
한국인을 이렇게 만든 것은 세계의 부강 너희들이 아니냐! 그러고도…… 이것이 그의 항의이다. 그러나 그 항의 다음에는 우리가 세계사적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자부심을 일깨워 주려고 한다. 이 부르짖음은 땅에 떨어뜨렸던 머리를 다시 들려는 한국인의 한 울부짖음이다. 이 부르짖음은 그 개인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의 한국 사람 전체의 것이다.
한 외국인은 한국의 8할이 빈민굴에서 산다는 기사를 썼다. 나는 그들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농촌을 두고 한 말이었다. 내 눈에는 한국의 농촌의 풍경은 얻어맞고 맞아 쓰러진 무리들의 공동묘지 같은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그 푹 수그린 초가의 모습이 거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사람은 서서히 머리를 들기 시작한다. 나는 약간의 공장이 더 서 가는 것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재기하려는 의욕이다. 오늘의 우리 국력의 성장을 어떤 위정자의 공로에 돌려서는 안 된다. 아니 그것은 바로 우리 대중의 재기의 모습이다. 푸른 하늘과 화사한 날씨가, 저 아름다운 강산이 우리를 무덤에 그래도 누워 있게 하지 않았다. 체념했던 머리를 들어 보니 들린다. 구부러진 팔을 그대로 내버려뒀다가 펴 보니 펴진다. 이제 저들은 용기를 얻기 시작했다. ‘나는 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내 위에 덮이고 덮였던 오랜 역사의 먼지를 털면서 일어나려 하고 있다. 무너진 하늘을 뚫고 머리를 들기 시작한다. 빙긋이 웃기 시작한다. 마치 다시 노래하고 춤추려는 서곡이듯이.
이제 이들이 미운 놈 떡 한 개 더 주기 위해서 팔을 펴는 날이면─그날은 아직은 멀다. 당분간은 굶주렸던 제 배 채우기에 분주할 테니까─축 늘어진 초가집 처마 끝이 하늘을 향해 뻗치듯이 한국인의 모습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상(像)이란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로 결정된다. 우리 민족이 어느 한 초점에 마음을 모으고 세계의 시선을 거기 모으면 오늘날 얻어맞은 새우로 보이는 한국의 지형이 내달리려는 호랑이로 보이게 되듯이 우리의 초라하게 보이던 바로 그것이 위험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의 질서와 하느님의 질서
어떻게 자라는지 몰라 / 살림 2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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