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소개
 
 
연구소 약사
 
 
연구소 소식
 
 
민중신학 자료
 
 
독자마당
 
 
월간살림
 
 
신학사상
 
 
신간안내
 
 
도서신청
 
 
관련 사이트 링크
 
 
안병무 선생님
 
걸어오신길   저 서   성서 연구   추모 문집   사진 자료
 


  신학연구소(2004-01-09 16:24:00, Hit : 4382, Vote : 673
 참새 한 마리도!―마 10:26-31

참새 한 마리도!
―마 10:26-31


안병무

불안할 수밖에 없는 존재

구약에 나오는 엘리야의 이야기는 한 거인의 전설과 같다. 아합이라는 왕 때, 그의 아내인 이방 여인 이세벨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바알 종교와 그 추종자들이 침입하여 득세했을 때에 아무도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때에 엘리야는 홀홀 단신으로 450명의 바알의 사제들과 이른바 종교적 대결을 하고 마침내 450명을 단칼에 죽여버린다. 그 생의 거인됨은 그 다음에 아합 왕의 마차보다 앞질러서 내달리는 데서도 볼 수 있다.
그러던 그가 이세벨이 이 소식을 듣고 곧 보복하고야 말겠다는 말을 듣고는 순식간에 겁을 먹고 광야로 하루 종일 달리다가 로뎀나무 그늘에 쓰러져서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나를 죽여주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못한 사람입니다’라고 맥을 놓아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위에서 말한 그의 거인 같은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이 전설적인 이야기는 그러나 사실 우리의 삶의 한 단면이다. 엘리야의 하소연은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죽이려 한다’이다.
우리가 군중 속에서 왁왁 몰려지날 때에는, 더욱이 가까운 사람들과 어울려 있을 때는 든든하고 천하가 다 나를 위해 있는 것같이 느낀다. 그래서 나의 지반은 튼튼하고 나의 일은 다 내 계획대로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떤 계기에 우리는 거의 순간적으로 광야로 달리는 엘리야처럼 이제 ‘나 홀로’뿐이며 모두가 날 없애려고 찾는 것 같은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극히 사소한 동기에서 시작된다.
낮에는 그리고 대중 앞에서는 글로, 말로 자신이 있는 삶을 시위라도 하듯이 과시한다. 그러던 어느 밤이다. 12시가 훨씬 지났는데 대문을 심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식구들은 모두 잠이 들고 나만이 깨어 있다. 가슴이 고동을 친다. 문 두드리는 소리는 여전하며 이제 소리까지 지른다. 도둑놈일 수는 없다. 나는 옷을 주섬주섬 입는다. 저것이 무엇이더라도 나는 이제 혼자 당해야 한다. 차단된 이 시간에 내 친구들이 아무리 많으면 무슨 소용인가? 설사 내가 전화로 구원을 청한다고 해서 달려올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온다 한들 그들이 나를 도와줄 한계는 뻔한 것이다. ‘나만 홀로 남았다.’ ‘그래 각오하자!’ 그리고는 대문 쪽으로 향한다. 그때 내 머리에 ‘내가 어린이였다면 이때에는 아마도 엄마나 아빠한테 뛰어갔을 텐데!’ 그러나 나는 그럴 품은 없다.
때 아니게 울리는 전화 벨 소리, 때 아니게 들리는 억양 높은 소리, 12시 이후에 들리는 ‘쿵’ 하는 소리! 어쩌면 하찮은 일상적인 것이 순식간에 ‘나만이’라는 외로움을 안겨 준다.
독재자의 수법 중에서 중요한 것은 공포분위기라고 한다. 가령 히틀러 당시에 낮에는 나치 당원들이 매눈을 뜨고 살기에 찬 대행렬 시위를 했다. 의사당을 위시해서 스스로 방화하고 그 범인을 잡는다는 핑계로 단체들, 비타협자들에게 밤중에 들이닥치고 이집 저집의 대문을 차고 부수는 소리로 사람들을 떨게 하므로 모두에게 죄인 의식에 사로잡히게 하여 창문 밖에 머리도 내밀지 못하게 했다. 아이들은 부모의 가슴에 안긴다. 그런데 어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집 호주는 누구에게 자신의 머리를 묻고 숨을 수 있을까?
지난번에 애인과 남편의 돈을 빼앗기 위해서 수면제를 연거푸 먹여서 죽인 어떤 여인의 이야기를 신문이 크게 보도하는 통에 한동안 공포에 질린 남편들이 많았다고 한다. 자기 아내가 갑자기 원수로 둔갑하는 환상도 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따져보면 우리의 삶이 우습다. 대체로 ‘부부’라고 정해진 후에는 좋으나 궂으나 이른바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코카서스’의 쌍둥이처럼 언제나 함께 붙어 산다. 자신에서부터 주변의 그런 광경을 보면서 때때로 두 가지 생각이 스친다. 우선은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다. 어떻게 저렇게 줄곧 어울려 살까? 그러나 반면에 아연한 생각도 든다. 대체로 서로 만나게 된 계기를 보면 사실 우연이다. 따지고 보면 그를 내 아내, 내 남편으로 삼게 된 것은 그때, 거기에서 마주치지 않았던들 안 되었을 것이고 그때 거기에서 한 치라도 빗나갔다면 다른 사람과 그렇게 되었으리라. 선을 한두 번 보고 일생을 그렇게 살기로 결정했다는 사람들을 보며 그 눈이 보기 좋아서, 정직해 보여서 등등의 이유로 마음의 결정을 했다라고 하는데 선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위장하고 무장했는데 몇 차례 보고 일생을 맡기기로 한다는 것인가? 사람은 몇 십의 베일을 썼다고 한다. 가면을 벗으면 그 안에 또 가면이 있다. 그뿐 아니라 사람은 관계적 생물이기에 관계에 따라 그렇게 쉽게 변한다. 그러니 그러한 조건이 맞는 확률은 없다. 철저한 모험이다. 그렇게 보면 ‘삶’ 자체가 두려워진다.
얼마전 수유동에서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책가방을 든 채 차에 치어 그 자리에서 죽는 것을 본 어느 학생이 심각한 표정으로 ‘사는 게 무어냐?’고 물어왔다. 난 그때 적어도 몇 가지 일이 그 시점에서 마주쳐서 된 일이라고 했다. 운전수의 부주의, 그 학생의 부주의, 그리고 바로 그 두 부주의의 시간과 장소가 마주친 것이 그 학생의 죽음을 몰고 온 것이다. 그런데 그 교차점에 내가, 내가 사랑하는 이가 서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두려워 말라

마태복음 10장 26-31절에는 세 번이나 반복해서 ‘두려워하지 마시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을 놓고 생각하면서 오히려 위에서 말한 기억들이 되살아나면서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나?’ 하고 자문했다.
그러나 이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서 이 말은 바로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한 말이다. 그러면 두려워하는 사람이 따로 있나? 따지고 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인간 전체에게 하신 말이다. 그런데 그 청중은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두려워말라고 한다. 말하자면 지금 이것은 박해를 직면한 사람들에게 한 말이다. 이 사람들이란 형제끼리 서로 잡아 넘겨 죽게 하고 부자간의 투쟁을 만들어내고 누군가를 짓누름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그것은 만연되어 있다. 그러기에 오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실은 어느 칼에 어느 증오의 손에 죽을지 모르는 위험 상황에 있다.
그래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나? 이 본문은 세 번 두려워 말라고 하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 세 가지를 들면서 용기를 내라고 한다.
첫째로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폭로되기 마련이라고 한다. ‘이것은 진리는, 정의는, 선은 반드시 이긴다’, ‘불의는 악은 반드시 망한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역사는 공과 죄를 반드시 가려낸다’는 뜻으로 받을 수 있다. 이것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중요한 전제이다. 무엇을 해도 신념이 있어야만 한다. 하물며 진리를 실천하려는 사람들에게 신념이 없다면 어떻게 진리를 이 세상에서 이루어갈 수 있으랴! 진리에 대한 신념은 분명히 공포에서 해방해 준다. 그러나 공리적(公利的)인 진리에는 회의가 생긴다. ‘사필귀정’이란 우리의 현실이 아니다. 이럴 때 우리는 힘이 빠진다. 그래서 ‘그래보아야 별 수가 안 생기더라!’ 하면서 주저앉아 진리고 뭐고 제쳐놓고 제 살길을 위해 주판알을 튕기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에는 객관적 법칙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어두운 데서 즉 비밀히 말한 것이 반드시 너희를 통해 실현되리라는 예언이며 동시에 명령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덧붙여서 내가 비밀히 한 말을 외치라고 한다. 이것은 공포에서의 해방의 중요한 비결이다. 그것은 진리의 투사로 나설 때 공포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두려워하는 동안에는 해소되지 않는다. 두려움은 두려움의 굴 속에서 뛰쳐나와야만 해소된다.
둘째로 ‘두려워 마시오’ 하고, ‘두려워 할 분을 두려워하라’ 고 한다. 두려움의 소굴은 바로 내 마음이 집착된 바로 그것, 그곳이다. 돈에 애착하는 자에게는 바로 그 재산이 두려움의 소굴이다. 사랑하는 이가 바로 내 두려움의 소굴이다. 정말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부분적인 것을 잃을까봐 겁에 질릴 때 온다. 그러나 내 전체와 관련된 한 분을 두려워하라! 그런 순간 사소한 두려움을 안겨주는 도깨비는 다 사라진다.
닉스가 죽었을 때 그의 삶을 추도한 비문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은 전도인이 여기 누웠다’라고 되어 있다. 사람이 나를 불의로 협박할 때에 협박 자체보다는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피해를 당할 것에 대한 애착 때문에 더 두렵다. 그러나 내 전체를 심판할 이를 정말 생각하면 그 큰 두려움이 인간적인 공포를 삼켜버린다. 내가 다 잃어도 나는 인간임을 포기할 수 없다. 라티머 감독이 헨리 왕이 임석한 자리에서 설교를 해야 했을 때에 헨리 왕의 신하로부터 ‘라티머야! 저기 왕이 임석했으니 주의하라’는 소리를 들었으나 그 다음에 곧바로 ‘라티머야! 만왕의 왕이 여기 계시니 주의하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그렇다 정말 두려워 할 분을 두려워할 때 인간을 죄어오는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대담하게 “나”를 내맡겨라!

내가 이 본문에서 가장 감격한 세 번째 이유는 바로 ‘참새 두 마리가 한푼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중에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마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이다.
이것과 거의 같은 말씀이 산상수훈에도 있다. ‘공중의 새를 보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않느냐?’
우리 마당에는 참새들이 많다. 새벽이면 저 혼자 살았다는 듯이 재잘거린다. 하루 종일 참새 소리다. 저것들은 주인도 없고 정말 생활 설계도 없다. 무엇보다 저축하는 일이 없다. 도시에서는 어디서 자는지도 나는 잘 모른다. 요새는 공기총이 별로 없지만 그러나 저들은 언제나 위협 속에 있다.
나는 참새와 인연이 있다. 시골에서 겨울밤이면 아이들이 처마 밑을 뒤진다. 참새 일가족에 대한 야간의 가택수색인 셈이다. 곤히 잠든 참새 둥우리에 손을 들여밀어 참새를 잡아서 그 자리에서 목을 졸라 새끼줄에 매거나 아니면 한복 바지 속에 넣어버린다. 나는 큰 아이들과 몰려다닌 일이 있다. 그러던 어느날 밤에 사다리를 타고 오르다가 그것이 넘어지는 통에 깔려 한 팔이 탈골되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에 참새들은 모두 날아갔다. 그 후부터 나는 참새에 손을 대지 않는다. 참새들은 겨울이 오면 두껍게 깔린 눈 때문에 먹을 것이 없어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이용해서 마당에 덫을 놓고 모이를 놓아 잡는다. 사람들에게는 재미로 또는 한때의 별미로 맛보기 위해 그러겠지만 그것은 너무도 잔인하며 참새들의 삶은 보장되어 있지 않다.
이같이 아무런 보장이 없이 사는 참새도 하느님의 뜻이 없으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 얼마나 확고한 신앙이냐! 참새 한 마리도 그의 뜻에 의해서 살고 죽는다고 믿는 이가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지 않느냐!’고 한다. 이것은 바로 ‘그러니 참새보다 귀한 너희들이 두려워할 게 무어냐?’라고 환기시키므로 내맡기고 살라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생명이란 참새와 대동소이할 뿐이다. 우리 세대만 하더라도 꼭 포수의 총에 우연히도 맞지 않은 참새의 생이었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6·25 전쟁 등등. 그럴 때마다 나무에 앉은 새가 총성과 더불어 날듯이 홀홀 단신 날았다. 그 총에 맞지 않은 것이 우연일 수도 있고 그 총에 무수히 죽은 사람들이 우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총부리가 겨누고 있는 나뭇가지에 앉은 거지’ 이런 생각을 하면 삶이 무섭다.
장자(莊子)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는 활을 갖고 노농이라는 밤나무에 앉은 새를 보고 활을 겨누었다. 그런데 그 새는 그것도 모르고 그 앞에 거미를 잡아 먹으려고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거미는 그것도 모르고 그 앞의 매미를 덮치려고 하고 있는 것을 장자가 보고 활을 거두어 버렸는데 뒤늦게 안 일이지만 과수원 주인이 그를 도둑놈으로 알고 때려 눕히려고 노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삶의 무상을 노래했다. 그러나 성서는 그 새 한 마리도 하느님의 뜻이 있어 죽고 산다고 한다. 그런데 하물며 너희 삶이냐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여기서 숙명주의에 빠져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이 말은 무위도식하는 낙천가가 되라는 말도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쏘아도 죽지 않는 불사조라는 말도 아니다. 이것은 사나 죽으나 내 삶은 하느님의 손 안에서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믿고 살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러므로 안일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히 믿기 때문에 철저히 살라는 말이다.
이러한 확고한 신앙으로 두려움에서 해방되라는 것은 본문 처음의 말씀과 관련이 있다. 즉 ‘내가 어두운 데서 너희에게 말한 것을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말하자면 내 신념대로 진리대로 정정당당히 살라는 말이다. 왜 우리가 나를 속이고 사나? 왜 할 말을 못하나? 왜 아닌 것을 아니라고 못하나? 그것은 두려워서인가? 그러므로 성서는 ‘두려워 말라. 네 삶은 참새라고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너는 참 진리의 증인이 되리라, 너는 겁내지 말라. 그때 너는 참새 이상의 삶, 참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권고이다.

<살림 2001년 8월호에 수록>




생각하기에 따라서
권력의 질서와 하느님의 질서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zero
한국신학연구소 / Korea Theological Study Institute / http://www.ktsi.or.kr
03752 서울시 서대문구 경기대로 55 선교교육원내 / Tel 02-738-3265~7 , Fax 02-738-0167 , E-mail :
Copyright 2000-2020 KTSI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