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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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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소(2004-01-09 16:24:21, Hit : 3682, Vote : 647
 생각하기에 따라서

생각하기에 따라서


안병무


어느 날 밤 한 모임에서 강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내가 타려고 했던 버스는 콩나물 시루 같아서 그냥 보내고 택시도 얼른 눈에 띄지 않아 나는 청계천 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내가 디딘 한 발이 허공을 밟는 듯하다가 내 다리는 무릎 위까지 무슨 동굴에 빠져들 듯 빨려 들어갔다. 물론 보기 좋게 쓰러졌다. 어두운 대로에 그런 ‘동굴’이 아무런 표지판도 없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힐끗 보면서 아마도 한잔 한 사람인가 보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통이 터질 듯했다. 무슨 시정(市政)이 이 꼴이야! 도대체 세금은 받아서 무엇에 쓰고 하루에도 수만 명의 사람들이 오가는 이런 대로에 이런 ‘동굴’을 이렇게 방치한단 말이냐!
그러나 분한 생각이 가시기 시작하면서 “아무리 바쁜 걸음이라도 발끝은 살피면서 가야지 …… 돌다리도 두드려 보면서 가랬는데……”하는 자성(自省)에로 생각이 돌기 시작했다. 그것이 꼬리를 물어 내 성격을 반성하면서 걷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가려던 방향을 훨씬 지나 엉뚱한 데로 걷고 있었다. 결국 못난 놈은 나로구나!
그 순간 언젠가 만주 벌판에서 눈이 하얗게 쌓인 데를 가다가 눈보라가 몰아쳐 길이 보이지 않는 밤길을 걸었던 생각이 난다. 도무지 방향을 알 수 없어서 무턱대고 무엇인가가 지나간 듯한 발자국만 더듬으면서 걷고 또 걸었다. 얼마를 갔는지 모른다. 마침내 저 아래 컴컴한 것이 보여서 내가 향하는 동리의 집인 줄 알고 그리로 접근했더니 갑자기 개들이 늑대처럼 발악하며 짖어댔다. 그래도 그곳이 사람이 사는 동리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리로 향했더니 어느 중국 사람의 집이다. 무작정 그 집의 대문을 두드렸더니 주인인 듯한 사람이 문을 열었다. 개들은 곧 나를 잡아 찢어버리려는 듯이 나를 포위했으나 주인의 만류로 덤벼들지는 않았다. 손짓, 발짓을 다 동원해서 내가 가려는 길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정반대 방향으로 왔다면서 자기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떠나라고 하여 신세를 졌던 일이 생각났다. 어처구니없는 밤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아무리 어두워도 방향은 정하고 가야지 발끝만 보고 가면 반드시 실패하는 법이라던 어느 어른의 말씀이 새삼 생각되어 ‘고생 끝에 삶의 원리를 배웠구나!’고 생각하여 그 밤의 고생을 말끔히 청산했다.
사람마다 그런 경험이 있겠지만 무슨 목적을 갖고 꾸준히 많은 정력과 시간을 바쳤던 일을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한 채 그만둬야 했던 쓴 경험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자기 딴에는 애써 심어 놓았는데 결실을 못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더욱이 어떤 음모나 질투 때문에 자기가 심은 것의 결실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와 같은 쓴 경험을 당하여 분한 생각에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그 일을 사수하려고 저항하다가 끝내는 패배하여 떠나야 할 어느 순간 문득 ‘심는 자와 거두는 자는 따로 있다’라는 성서의 말씀이 전광석화처럼 떠올라서 나를 깨우쳤다. 그때 내 분노는 말끔히 가셔지고 이름 모를 누구인가가 내가 심은 것의 결실을 거둘 것을 상상하면서 미소를 지었었다. 내가 심은 것은 내가 거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세상을 좀먹고 마침내는 그 심은 것마저도 망쳐버리는 것이다. 한 민족이나 나라가 제대로 되려면 열심히 심을 것을 심으며 그 결실은 다음 세대가 거둘 것을 전제하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만년대계’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내가 심은 것을 내가 먹어야 한다면 뒤에 오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곰곰히 했었다. 이것이 계기가 된 탓인지 언제부터인가 나는 ‘도덕경’의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라는 말을 내 삶의 좌표처럼 생각하게 됐고, 그것은 내 억울함을 쉽게 잊는 큰 요소가 되고 있다.
하루는 아침에 마당에를 나갔더니 담장 안에 있는 복숭아나무와 앵두나무에 처음으로 제법 소담하게 맺었던 열매가 깡그리 없어졌다. 그 두 그루의 나무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씨를 뿌려 둔 것이 자라나서 첫 열매를 맺은 것이기에 그토록 소중했었는데 누군가에게 물어보았더니 동네 아이들이 공을 주우러 담 너머로 들어왔다가 다 따갔다는 것이다. 그것도 지금 국민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도대체 어떻게 교육시키기에 저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어 우리나라 안에서 되어지는 아니꼬운 현상들을 생각하게 되었고, 다시 분통이 터졌다. 나는 이런 생각만 하면서 마치 나라 일을 혼자 도맡기라도 한 듯이 혼자 흥분하며, 거의 발작적으로 울화를 터뜨릴 길을 몰라 안타까와하는 버릇이 있다. 그런 상태에 있던 어느 순간 “갈 데까지 가 봐야 아닌 곳을 알지!”라는 누군가의 말이 내 흥분을 순간적으로 가라앉힌 기억이 있다. 결국 이렇게 나아가다가는 막다른 골목에 가서야 비로소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결국 이런 꼴도 모두 배우는 과정이지 하는 생각을 하며 마치 도사 같은 자리에 앉아서 오히려 그런 정도밖에 못되는 이 민족을 측은하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하기야 월반(越班)을 할 줄 아는 민족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그런 재간을 못 가진 민족인지라 남들이 그런 길을 가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서 다른 방향의 돌파구를 찾을 때에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모방하기 위해 그들의 처음의 실패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을 어쩌랴! 그래서 아마 성현들은 불의에 찬 세상을 보고 분노 대신 자비를 설교했는지 모르지…….
그러나 이렇게 생각으로 자기를 조종하는 버릇이 있는 나를 어떻게 봐야 하나? 생각하기에 따라? 이건 자기 책임 도피 아닌가! 비겁한 자의 안식처가 아닌가! 체험하고 주저앉은 컴플렉스에 잡힌 자기를 은폐하려고 ‘생각’이라는 가면으로 자기를 속이고 있지 않는가? 서울 대로에 함정이 있으면 당장 시청에라도 뛰어가서 그것을 즉시 고치도록 항의하고, 옳지 않은 것이 보이면, 또 그 결과가 어디에 부딪칠지를 정말로 알고 있으면 단신으로라도 이 대세라는 궤도에 몸을 내대면서라도 그 길을 가로막아야 할 게 아닌가! 생각하기에 따라서 내 분노는 가셨는지 몰라도 현실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지 않나? 그러면 도대체 누가 이 민족의 일을 책임진단 말인가? 이게 바로 이른바 생각한다느니 ‘지성인’이니 하는 패들이 약한 이유가 아니겠는가! ‘약하다’는 것은 결국 ‘약다’ 즉, 자기를 이롭게만 하는 잔꾀를 가진 자의 대명사가 아닌가! 결국 제 꾀에 자기도, 남도 함께 빠지게 하는 게 ‘생각하는 자’의 큰 범죄가 아닌가? 그래서 요새 인간들은 ‘사색’보다 ‘행동’이라는 것을 그토록 강조하는가 보다. 하여간 ‘생각하기에 따라서’라는 말은 보편진리는 절대로 아니다. 내가 편안하기 위해서, 즉 내가 상하지 않기 위해서 위기를 우선 모면하기 위한 꾀로써 생각한다는 것은 비겁한 자가 은신처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생각하기에 따라서’라는 것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존엄한 것이 된다. ‘내일 죽더라도 한 그루의 나무를 심자!’는 생각은 확실히 장한 생각이다. 그런 생각이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정말 내일 죽을 걸 알면서도 나무를 심는 행위로 옮겨질 때 그렇다. 내가 이런 일을 하면 이런 결과가 올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을 때 그 결과의 꽃은 내가 딸 것이라는 생각만 포기한다면 그 생각은 장한 행동으로 옮겨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생각한다는 것으로 현실과 나 사이의 완충 지대를 삼고 사실상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 속으로 오므라드는 것은 바로 인간에게만 있을 수 있는 이기심의 간교함이다.
생각하는 동물, 이것으로 인간을 사랑하려고 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파스칼의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에 자꾸 저항을 느낀다. 이 말은 사람은 바람에 휘고, 저리 휘면서 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갈대와는 다르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거기에 바람 부는 대로 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깃들어 있지 않나? 이에 대해서 ‘백절불굴’이라는 것으로 인간의 참 모습을 내세운 것이 오히려 참 인간이기 위한 좌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백절불굴’을 삶의 참 기상으로 판단한 것도 행동을 전제로 하지 않은 채 생각한 데서만 나온 결론이라면 ‘생각하기에 따라서’라는 말은 양면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1973년)

(<살림> 2001년 9월호에 실림)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십니까?
참새 한 마리도!―마 10: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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