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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소(2004-01-09 16:24:46, Hit : 4167, Vote : 632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십니까?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십니까?
―마태복음 27:45-54


안병무


2천 년 전 로마의 식민지 팔레스틴에서 묘한 재판이 벌어졌다. 식민지 백성인 유대인들이 청년 예수를 로마의 총독에게 끌고 가서 사형시켜 달라고 졸랐다. 그들이 내세운 것은 저가 자칭 ꡐ유대인의 왕ꡑ이라고 하니 로마를 반역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내적인 이유는 종교적인 것이었다. 즉 이 청년 예수가 저들의 전통적인 종교를 모독하고 파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예수는 로마에 반역한 정치범의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억울한 재판이다. 그러나 이 억울한 재판을 받은 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다. 본문에서 예수는 총독이 매우 이상히 여길 정도로 한마디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왜 침묵을 지켰을까? 그 재판이 옳다고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스토아적인 아픔이나 억울함을 초월한 이이기 때문일까?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은 그렇게 초연한 예수로 묘사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예수는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죽음을 예감하고 고투한 기록을 한결같이 전한다. 마태에 따른다면 겟세마네 동산에 이른 이 예수는 ꡐ내 마음이 외로워 죽을 지경이다.ꡑ 그리고 마가는 객관적인 서술에서 ꡐ예수께서는 공포와 불안을 느끼셨습니다ꡑ라고 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ꡐ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도록 하라ꡑ라고 했다. 마치 외로워, 외로워서 저들의 도움을 청하는 것처럼 그렇게 애원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잤다. 그래서 예수는 ꡐ너희는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ꡑ라고 한다. 이 예수는 절대로 초연하지 않다.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십자가의 위기보다도 마음, 신앙의 위기다. 그는 시험에 들고 있다. 그리고 이제 최후적으로 담판을 해야 하는 결단 앞에서 몸부림친다.
본문의 기록을 순수하게 인간 심리적으로 추리한다면 어떻게 될까? 예수는 지금 마침내 절벽 앞에 서 있다. 더 어떻게 헤어날 수 없는 절망 속에 있다. 그는 이제 완전히 알 수 없는 복면(腹面)의 힘에서 추격을 받다가 완전히 포위되고 만 것이다. 그 어디에서도 단 한 줄기의 희망도, 솟아날 구멍도 없다. 이게 무슨 일인가? 이럴 수가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공중에 나는 새도, 들에 백합화도 하느님이 먹이고, 입히신다고 하던 그 낙관적인 예수에게 이런 캄캄한, 이해할 수 없는 곤경이 왔다.
그는 절대적으로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을 믿고 전했다. 마치 보통 사람의 눈에는 가려진 저 미래를 환하게 내다 볼 수 있는 고유한 눈을 가진 이처럼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다. 그는 모든 모순 속에서도, 고뇌 속에서도, 아니 한 마리의 새, 한 포기의 풀에서도 하느님의 손길을 보는 고유한 눈을 가진 사람처럼 말씀했고 따라서 그에게 공명하는 제자들, 많은 군중들을 얻었고 그에게는 특수한 능력이 실증되는 듯했는데 일은 어디서부터 엇갈리기 시작했는지 문득 홀로 남게 되었다.
그나마 세 제자들을 이끌고 왔는데 저들마저 졸고만 있다. 이제 오직 홀로 있다. ꡐ하느님! 그래도 당신만은! 하느님 당신은 전능하십니다. 나를 이 절망에서 구해 주십시오.ꡑ 이렇게 애타게 그에게 최후적인 희망을 걸고 매달린다. 그러나 구약의 많은 인물들이 외칠 때마다 구원의 손길을 펴시던 그 하느님은 그의 매달림을 외면한다. 어디 있는지, 없는지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고 그는 오직 홀로만 있다. 웬일일까? 이럴 수 있을까?
인간들에게 어떤 도움을 기대하는 것을 포기한 지는 이미 오래다. 그래서 갯세마네에 오른 것이다. 이를 이렇게 절망 속에 포위하고 마는 힘은 벌써 인간이 풀거나 대항할 수 없는 ꡐ운명ꡑ과도 같은 어떤 힘이 하는 일이다. 이 운명과도 같은 힘은 이제 마지막 시험에로 그를 끌어올렸다. 너를 도와줄 존재는 아무도 없다. 제자도 저 여인들도 못한다. 아니, 네가 자명적으로 생각했던 그 하느님마저도 너를 돕지 못한다. 이제 그를 불러 봐라. 없지. 그럼 그를 부인해라. 다 소용없는 것이었다고 고백하라! 하느님도 없다고 저주하라! 이것은 정말 최후적인 시험이다. 광야에서 시험하던 그 시험이 여기까지 따라 왔다! ꡐ거기서 내려 떨어져 봐라. 만일 하느님이 정말 있다면 그래도 너를 살려줄 것이다ꡑ 하던 그 시험이 이제 여기 다시 등장했다. ꡐ하느님 날 도와주십시오.ꡑ 그래도 침묵뿐이다. 이제는 그 예수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를 부인하는 길밖에 없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는 항복하지 않는다. 그 말이 옳아도 그래도 긍정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를 욥의 이야기에서 본다. 욥이 너무나도 억울한 고난 속에서 신음하면서 그 뜻을 몰라 몸부림칠 때 그 아내는 ꡐ그 하느님을 부인하고 저주하시오.ꡑ ꡐ이래도 그 하느님 소리를 하겠소?ꡑ 한다. 지금 예수는 이러한 소리를 들을 법도 한 처지에 있다. 그러나 끝끝내 일반 논리에 항복하지 않는다. 그는 ꡒ그래도 이제라도ꡓ 하는 듯이 ꡐ하느님 뜻대로 하십시오ꡑ 하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 운명의 손이 이끄는 대로 심판대, 그리고 십자가의 사형장까지 끌려간다. ꡒ이제나 저제나?ꡓ 아슬아슬한 장면이다. 시시각각으로 최후적인 선언을 강요당해야 할 시각이 다가온다.
본문에 그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 저들은 증인들이다. 저들은 정말 하느님이 있나 없나 하는 판가름을 이 예수의 운명에다 걸고 있다. 이제라도 어떤 기적이 있어 저를 갑자기 십자가에서 끌어내릴지 모른다. 그러면 그 하느님은 정말 존재한다. 억울함, 모순이 지배하는 듯한 현실은 그것으로 극복된다. 그래서 저들은 ꡐ십자가에서 이제라도 내려오너라! 그러면 우리는 믿겠다ꡑ고 말한다. 이것은 믿음의 희망, 즉 하느님은 엄연히 세상을 바르게 이끈다는 것을 기대하는 사람의 소리일 수도 있고, 또 ꡒ아니, 하느님은 있어서는 안 된다. 저를 통해서 하느님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저는 거기서 못 내려와야 한다. 내려오기만 해 봐라. 너는 못 내려 와야만 한다. 그러면 나는 최후적으로 ꡐ이제 됐다. 하느님은 없다ꡑ 하면서 내 삶의 설계에서 영원히 하느님의 영상을 지워 버리련다ꡓ라는 심정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다.
이 순간! ꡒ하느님은 있나, 없나?ꡓ ꡒ있는 것은 이 적나라한 현실뿐인가, 아닌가?ꡓ 이러한 판가름의 순간이다! 이 순간은 ꡒ하느님을 영원히 역사상에서 추방하나? 아니면 영원한 하느님을 절대 승인하나?ꡓ를 판가름할 이 순간이다!
예수는 ꡒ엘리! 엘리!ꡓ라고 소리친다. 군중들은 긴장한다. ꡐ아마 엘리야를 부르나 보다. 그가 내려와 구원해 주나 보자.ꡑ 그러나 대답이 없다. 그러면! 이제는 예수도 별 재간 없이 이 하느님을 부인하고, 이 모순의 현실만이 있을 따름이라는 선언을 인간들 앞에서 하거나, 아니면 그래도 하느님은 엄연히 존재한다는 실증을 보여야 한다. 요한복음은 후자를 선택한다. ꡐ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ꡑ라고! 그러나 이 본문은 그 어느 것도 아닌 천만 뜻밖의 마지막 말씀을 남긴다. ꡐ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ꡑ
이 최후의 비명이 어떻게 들리는가! 이 비명이 그 군중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 하느님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에게도, 또 하느님이 없음을 확증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도 철저한 실망을 주는 비명이 아닌가?
예수는 그래도 하느님을 부정하지 않는다. 여전히 ꡐ나의 하느님!ꡑ이다. 예수는 하느님이 여전히 버릴 수도, 구할 수도 있는 절대적 주관자임을 고백한다. 그러나 반면에 그 하느님이 나와 함께 해서 내가 승리했다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ꡒ엘리! 엘리!ꡓ는 철저히 버림받은 자의 비명이다.
이 비명 자체는 역사에서 2천 년 동안 쉬지 않고 줄곧 메아리친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생활 속에서 계속 들리는 소리다. 그러나 이 비명이 바로 우리를 구원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바로 우리의 처지를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일은 괴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오늘의 세계 속에서 ꡒ너희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ꡓ는 소리가 조소로 나타난다. 이러한 과학적인 대낮에 하느님을 운운할 수 있는가? 우리는 오늘날 자신 있게 ꡐ보라, 그러니까 하느님이 우리 삶을, 우리 역사를 이끄시는 게 아니냐?ꡑ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 삶의 현실을 납득할 수 있는가? 아니, 억울함의 연속이 아닌가? 아무리 따져도 ꡐ이렇다!ꡑ 하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데 내 잘못도 찾을 수 없는데, 꼼짝할 수 없는 처지에 휘몰리지 않는가? 내 마음 안에 있는 이 모순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ꡐ어쩌면 일이 이렇게도 안 될까?ꡑ 하는 그런 처지에 놓이지 않는가? 이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는 이런 한복판에서! 경제제일주의에 의해 신앙은 고사하고 정신마저도 소외당하는 이 상황에서!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신앙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서 우리는 불가능하다고 손을 들 것인가? 아니,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의 귀에 그러한 극한 상황 속에서 소리 지른 예수의 비명이 바로 나를 대신해 준 비명으로 들리지 않는가?

ꡒ하느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ꡓ

예수의 이 비명은 역사상 가장 억울하고 비통한 고뇌 속에서 부르짖은 비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을 살면서 억울하고 비통한 나를 앞질러 대신해준 나의 주님의 소리가 아닌가? 이 악랄한 상황 속에서 짓눌려 죽는 한이 있어도, 그래서 그 상황에서 솟아날 것을 체념하면서도 ꡒ나의 하느님ꡓ을 부르고 죽은 그 예수! 그가 정말 진정한 나의 영원한 애인이 아니겠는가? 이 신앙고백은 우리 주의 죽음으로 얻어진 것이다. 이 신앙을 누가 기자는 바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이 비명 속에서 ꡐ내 아버지여!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옵니다ꡑ 하는 궁극적인 믿음을 읽었고 바로 이 신앙을 ꡐ다 이루었다ꡑ라는 소리로 해석한 것은 참 바로 본 것이다. 즉 ꡐ왜 날 버리십니까?ꡑ 이것은 ꡐ나는 그래도 당신의 것입니다ꡑ이며 바로 그랬기에 끝끝내 그 신앙을 관철했기에 ꡐ다 이룬 것이다.ꡑ 그런 뜻에서 그는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렸다는 고백은 참 옳은 것이다.
우리는 내 고통 속에서 절망하기 전에 좀 잠잠하고 저 예수의 비명에 귀를 기울이자! 내 비명은 아무리 심각해도 저분이 지른 비명에는 따르지 못하리라. 그는 우리에게 그래도 믿음을 권한다. 그것은 평화 속에서가 아니다. 죽음으로서 이겨 낸 그 믿음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극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본문은 그의 이 비극의 의미를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설명한다.

ꡒ세상은 캄캄했다. 태양은 빛을 잃었다. 그리고 죽은 자가 무덤을 헤치고 일어났다. 그리고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ꡓ

첫째로 태양이 빛을 잃었다. 질서 정연한 소위 사필귀정이니, 정의니 하는 것은 그 빛을 잃고 말았다. 예수를 이렇게 억울하게 죽게 하는 이 세상에 태양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낮에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밤에, 암흑에서나 될 수 있는 일이다. 빛이 지배하지 않고 암흑이 지배하는 것이다. 낡은 것은 이것으로 그 본질이 영원히 규정되었다. 그것은 암흑이다!
둘째로 그러나 그 대신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낡은 태양 아래서 불가능하던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ꡐ절대ꡑ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상대화되었다. 인간을 영원히 가두어 버린 무덤이, 죽음으로 가둔 것이 무너지고 새로운 삶이 나타났다. 예수는 죽었다. 억울하게 암흑의 힘에 눌려서! 그러나 그 죽음으로 이제 새 삶이 죽음 속에서 나타났다.
셋째로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막았던 휘장이, 그것은 영원히 구별되어야 할 것으로 알던 계급의 담이 무너졌다. 또한 휘장이 찢어짐은 무덤이 찢어진 것이므로 개인이 죽음에서 삶에로 변화되었다! 성전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너와 나와 죽은 것과 같은 관계에 새로운 공동체의 길이 열렸다고 한다. 이것은 놀라운 이해다. 예수의 죽음에서 이러한 새로운 세계, 새 삶의 탄생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사실을 직시하면 절망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신앙으로 알 수 있게 된다. 내 상황에서 다가오는 절망, 내 능력의 제한성 때문에 갖게 되는 자포자기, 내 이웃과의 관계에서 갖게 되는 온갖 이기심과 절망들 이제 그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담이 있을 수 없다는 선언을 우리는 여기서 듣게 된다. (1969. 3. 30/ 살림 2001년 10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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