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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성(2004-01-09 16:08:07, Hit : 3726, Vote : 680
 조국 근대화와 민족문화

‘조국 근대화’와 민족 문화

* 이 글은 1977년 작성된 미발표 원고이며, 미간행 전집 [한국민족운동의 맥]에 수록되어 있다.




한국에 문화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 자체는 벌써 한국 문화에 대한 회의를 전제한다. 문화란 그 문화권에 속한 사람에게는 공기처럼 특별히 의식하지 못하나 자명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에 이상이 없을 때는 그러한 질문은 없다.
한 민족의 일부는 그 문화를 요람으로 해서, 나서 자라는 동안 그것을 자기 것으로 하는 동시에 자기를 문화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이상이 없는 경우 다이얼만 돌리면 전파를 포착해서 방송을 전달하는 라디오처럼 한 민족의 일부는 그 민족의 문화를 전달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동일성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게 된다는 것은 자기가 속한 문화에 이상이 있다는 증거다.
오늘날 우리는 주체성이니 또는 한국적이니 하는 물음과 논의를 많이 듣는다. 이것은 내가 자명적으로 알던 문화가 이미 자명적인 것이 아닌 까닭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여러 경유가 가능하겠으나 주된 것은 지금까지의 것과 다른 이질적인 요소가 많이 그리고 빨리 들어오므로 본래의 문화가 근본적인 동요를 일으키거나 아니면 급변하는 것에 적응할 수 없을 때 생기는 현상이다.
그런데 재래에 주체성이니 한국적이니 하는 것을 문제삼을 때에는 주로 정치나 전통적 사상의 측면에서 문제삼았던 것인데 이른바 근대화를 들고 나와서 경제 건설을 최대의 목표로 내세운 후로는 그것은 문화적인 측면에서 더 문제되고 있다. 왜 그럴까? 그리고 왜 그와 함께 문화 공백이니 문화 의식의 마멸이니 하는 소리가 높아지는가?

1. 문화란 어떤 것인가?

문(文)이란 유교에서는 역사라는 뜻도 되는데 그것은 현상적인 사실을 말하기보다는 그것의 의미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역사를 포괄적으로 나타낼 때에는 문물(文物)이라고 해서 문을 물과 일단 구별한다. 따라서 문화라고 하면 그것은 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의미화를 뜻한다. 그런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많은 논의가 있었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서서는 문화가 더 많이 논의됐는데 그 특징은 문화를 역사적으로 규명하는 데 사회학적 측면에서 논구한 점이다. 가령 ‘슈펭글러’(Spengler), ‘슈발트’(Schubart), ‘토인비’(Toynbee), 그리고 ‘소로킨’(Sorokin)등이 그 대표들이다. 이들은 문화에 대하여 거의 공통된 견해를 갖고 있다. 그 중에서 ‘소로킨’의 견해를 중심으로 문화와 한 공동체와의 관계를 단계적으로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성격을 드러낸다.
1) 한 공동체(민족)에는 여러 가지 문화적 요소들이 전승되어 있다. 그것은 과거의 유물, 외래적인 것, 또는 지금 가진 것 등이다. 그런데 그 여러 요소들이 마치 책상 위에 책이나, 재떨이, 단추 따위가 서로 연관도 없이 놓여 있거나 또는 쓰레기통에 들어 있는 무수한 식물성, 동물성, 광물성의 찌끼기들이 어떤 것은 썩은 대로 어떤 것은 젖은 대로 어떤 것은 마른 대로 마구 뒤섞인 채 잡다하게 모여 있는 경우, 말하자면 어떤 밖에서 주어진 힘에 의해서 같은 공간에 단순히 모여 있을 경우에 그것은 문화가 될 수 없고 하나의 집성의 불과하다.
2) 비록 여러 가지 요소들이 피차의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없으나 A라는 것과의 관계에서 간접적으로 관련될 수 있다. 가령, 주머니에 지갑, 빗, 수첩, 손수건 따위가 들어 있을 경우 그것들은 서로 필연적인 관련이 없는 것들의 집성이다. 그러나 그 주머니의 주인에게는 그것이 모두 필요하며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불편을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그 주인과의 관계에서 관련된다. 이같이 여러 가지 문화적 요소들은 어떤 집권자의 주권적 정책에 의해서 집성될 수 있으나 그 요소들이 피차 함께 도입되야 할 필연성이 없는 경우에 그 집권자와 더불어 그런 것은 해체되고 말 것이다.
3) 위의 경우와는 달리 문화적 요소들이 밖으로부터의 압력에 의해서 인과율적으로 피차 관련이 되어 한 문화의 양상을 형성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겨울이 오면 의복, 이불들이 두꺼워지고 여름이 오면 그런 것들이 엷어진다. 전쟁이 일어나면 모든 생활양식이나 도구가 간소화되어 그 나라의 생산력이 전쟁 완수를 위한 것으로 바뀌어짐과 동시에 정치나 경제체제는 이른바 기동성적 체제로 바뀌어 진다. 이런 경우의 현실은 모든 것이 피차에 유기적 관계를 가지나 그것들은 역학적인 유대를 가질 뿐이고 그 자체에 어떤 의미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형성된 문화는 그 긴장관계가 유지되는 한에서만 성립되나, 그것이 만성화됨과 더불어 붕괴되는 수밖에 없다.
4) 이에 대해서 이른바 집성적인 공존은 용납하지 않고 논리적으로나 의미상으로 납득되는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형성되는 문화의 관계가 있다. 즉 A와 B가 그저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니라 “A는 B다”가 되야 하며 이런 것이 둘, 저런 것이 둘이 있을 뿐이 아니라 둘에 둘을 합하면 넷이다 하는 뜻이 밝혀질 때 공존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상태다.
이러한 문화의 경우는 어느 하나도 우연이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의 의미가 없는 한 자연히 도태될 뿐 아니라 그것은 전체를 방해하기 때문에 도태해 버려야 한다. 가령 수학이나 물리, 생물적 존재 양식이 그런 것이다. 그 특징은 단순한 나열이 아니고 그 관련은 반드시 어떤 것을 지시하며 여럿이 모여 하나의 결론을 내는 것이다. 문화 형태가 이렇게 되면 그 안의 모든 것은 의미적인 통일을 이루며 그 조직은 의미화된다. 그것은 예술품과도 비길 수 있을 것이다. 예술품이란 단순히 색과 선의 나열이 아니라 그런 것의 구성(Composition)일 때 그 모든 것이 의미를 갖게 된다. 말하자면 그 요소들과 구성은 직결된다.
5) 그런데 이렇게 나타나는 의미는 그것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나 정신적 또는 심미적인 주관성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가 물질적으로 객관화될 때, 다시 말하면 경험적인 사회 문화가 될 때 사적인 문화에서 공적인 문화가 되어 한 민족의 자기 구현만이 아니라 세계의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이상과 같이 문화를 규정해 볼 때 한국의 문화 양상은 어떠한가?

2. 한국의 양상

중앙청 근방에서부터 서울을 구경한다. 일본에 의해서 세워진 근세 서구식 건물의 아류인 중앙청 건물들이 옛 궁전을 뒤로 물리치고 우뚝 서 있다. 그 앞에는 콘크리트로 모조된 조선시대의 광화문이 서 있는데 거리를 두고 보면 서구식 중앙청 건물에 베로 만든 입마개를 씌워 놓은 것 같다. 그 뒤에는 중앙청에 눌려 숨어 있는 듯한 중국 건물의 모조품인 조선시대의 궁전이 있는데 그 오른쪽에는 이 궁전의 사생아와도 같은 동양 콘크리트 건물인 박물관이 새로 세워졌으며, 중앙청 좌우면에는 현대 미국식 종합청사가 새로 서 있다. 그 앞을 걸어오면 역시 새로 세워진 충무공의 동상이 비동양적 얼굴에 큰 칼을 잡고 중앙청 수위대장처럼 서 있고 그 앞 좌우로 더러운 속치마같이 생긴 지하도 출입구 지방이 펄렁이는가 하면 입구 앞에는 초라한 보신각이 혹처럼 붙어 있다.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향하면 고속도로가 근대화의 상징처럼 뻗어있다. 그러나 그 옆에는 천년의 빚에 눌린 슬레이트 지붕을 한 집들이 마치 누더기 옷에 구제품 모자를 얻어 쓴 듯한 모습으로 섞여 있기도 한다. 농부들은 여전히 지게를 지고 논뚝을 걸어가는데 화려한 고속도로에는 고급차들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어떤 서민층의 가정에든지 들어가 보면, 온돌방에 의자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고, 냉장고, 텔레비전 곁에는 요강이 있고, 벽에는 동양화 쪽자와 서양 그림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으며 식사 후에는 숭늉이 들어오고 또 커피를 가져온다.
대학은 건물에서부터 궤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구미적이다. 교과 내용은 구미의 언어와 논리를 전제로 한 것이며 그 안에 한국의 것은 다른 많은 전공 과목 중의 하나로서 국문학, 한국사 정도다. 가령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등에서 한국의 것을 다루는 경우에도 그것은 피차의 교류 없이 평행을 긋는다.
학생은 우선 외국어 습득에 모든 젊음을 바쳐야 한다. 민주주의를 국시인 줄 알고 자유를 구가하다가 철통에 맞는 일을 반복한 저들은 이 부조리의 이유에 대한 대답을 못가진 채 속으로 독이 되어 저항과 투쟁이 생리화된다.
저들은 집에 아직도 도사리고 있는 삼강오륜과 학원에서의 데모, 집에서의 매일 먹는 된장과 다방에서 마시는 커피, 온돌방에서 책 보던 자세와 고고춤, 70%의 초가집과 수억대의 고급 주택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대답을 못 얻고도 그런 것을 물을 시간이 있으면 취직을 위한 도식을 외우는 일에 바쳐야 한다.
라디오를 켜면 분명히 한국인의 이름을 가진 작곡가의 것인데 미국 아니면 일본 노래가 들리거나 때때로 늦은 밤에 우리 고유의 아악이나 민요들이 참견한다. 그림도 조각도 천하대장군 빼고는 중국, 서구의 것이며 문학도 그 표현 방법이나 구상은 물론 그 내용도 사물의 해석자는 보이지 않는 혼합지의 진열이다.
이 모든 것이 한국 땅에서 생기는 일이며 또, 한국 사람의 이름으로 되는 것이니 한국의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의 문화라고 하면 그것은 무지의 억지다.
문화란 한 공동체를 결속하는 유기성을 가진 것이다. 문화는 많은 요소들이 피차 인과적인 관계를 가지며 그 전체가 어떤 의미를 드러낼 때 성립된다. 그것은 마치 생물과도 같다. 그러므로 그 중에 어느 것도 무의미하게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가 한 몸을 형성해서 그 어떤 것을 지향하는 데 구심적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하나를 빼버리면 전체에 영향이 있으며 반대로 어떤 이질적인 것이 대입하면 전체로써 그것을 배격하거나 동화작용을 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다.
이른바 한국의 문화재들은 우리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가? 그것들을 제거하면 우리의 삶 전체에 영향이 있겠는가? 있다면 문화재를 지정할 때는 그토록 소문을 내고도 쇼윈도에 내놓지 않은 것들은 매스컴이 고발하지 않는 한 아무렇게나 내버리거나 함부로 이리 뜯고 저리 옮기지는 못한 것이며, 이른바 산 문화재라고 지정한 인사들이 반은 쓰러져 죽어도 아랑곳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우리의 과거의 역사가 남긴 문화재가 ‘재’로만 남았지 우리의 삶과는 유리되어 있는 증거다. 그런 것들은 형식상으로 나열된 문화재지 이미 문화 형성에서 제외된 채 굳은살처럼 매달려 있을 뿐이다.
반면에 중앙청 앞에 세워진 날조된 근화문이나 철로연변의 슬레이트 지붕, 그리고 남대문 옆 수출고 게시판 따위가 제거된다면 우리에게 어떤 피해가 올까?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은 한낱 덧붙은 혹 같은 것에 불과하다.
아니 우리 나라에 문화적 요소들이 상호인과적 관계를 갖고 한을 지향하는 것으로 권력과 재택이 유기적 관계를 갖고 정권을 유지하는 것 외에 어떤 것이 있을까? 대학과 비판 정신, 언론과 자유, 민주주의와 인권, 민주 시민과 사회 참여, 노동과 분배, 군대와 정치 중립, 삼권분립과 국가, 사실과 진실한 보도, 근대화된 합리성, 이런 것들은 근대 사회에 있어서 끊으면 죽는것과 같은 것인데 사실상 마음대로 이렇게 저렇게 유린하고 그 관계를 마구 바꾸어 버리지 않나!
이 나라의 문화 형성의 원천인 학원을 담당하는 문교 정책의 난맥상은 그 실책을 묻기 전에 그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땅의 문화의 공백을 뜻하는 것이며 적어도 정부가 한국에 기존의 문화는 없다는 전제를 가진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마당에 모든 문화 행사, 문화상 수여 따위는 문화 부재의 신호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다.
오늘의 한국에는 문화가 없고 그저 문화‘재’만이 있다. 그것들은 상호불가분의 관계에서 모여진 것이 아니라 우연히 또는 밖으로부터의 강요에 의해서 한국이라는 공간에 집합돼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호주머니에 모인 물건들처럼 공간의 주인의 호주머니에서 그의 필요에 따라 집산이합될 뿐이다.

3. 문화 형성과 주체성

우리는 분명히 우리 역사에서 신라 문화, 조선조 문화를 내세울 수 있다. 까닭은 두 문화에는 중추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 문화에는 불교, 조선조 문화에는 유교가 있었다. 그것들에 대한 시비는 좌우간 그 사회의 정치 체제에서 관혼상제에 이르기까지 국민 전체의 생활을 일관한 힘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문물은 오늘날에도 석연하게 판별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의 문화는 일제의 우리 문화 말살 정치에 의해서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더 촉진한 것은 우리 자신이었다. 그것은 “새문화=근대화=서구화”라는 사고 때문이었다. 개화기의 인사들은 일본을 업고 그것을 통해서 구미의 문물을 입수해서 새 문화를 형성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본 점령하에도 변함이 없었다. 해방은 바로 이러한 숙원이 이루어진 듯 우리는 아무 비판 없이 미국 문화의 홍수에 그대로 몸을 내맡겼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 문화의 토착화를 의미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헌법과 유행은 미국 식이었으나 정치를 위시해서 그 어느 부분에서도 미국적인 것으로 체질화된 것은 없다.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계속적으로 찾아서 얻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주체성(Identity)이다. 이것은 오랜 식민의 서러움을 풀지 못한 약소 민족의 당연한 역사적 과제다. 그러므로 이것이 민족, 조국애, 주체성, 민족적 민주주의, 조국의 근대화 따위의 구호로 계속 반복돼야만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 민족사적 요청과 미국을 중추로 하는 세계사적 추세는 결코 조화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일찍이 ‘슈펭글러’(Spengler)는 그의 유명한 『서구문화의 몰락』에서 서구문명의 역사적 추세를 다음과 같이 성격화했다. 즉 고향, 조국, 종족, 혈족 대신에 대 국가, 마음의 종교 대신에 이론적 유사 종교 아니면 죽은 형이상학, 옛부터 전통의 전승이나 고서에 대한 존중 대신 실용주의, 민족국가 대신에 국제적 공동체, 생산적인 대지나 사실적 가치 대신에 돈과 허영적 가치, 민족 대신에 대중, 모성보다 여성, 국가화 대신에 국제적 침략, 내향적 방향 대신 외향적 힘, 질과 통일 대신에 과대망상, 혼합주의 권력욕, 계급 투쟁 등으로 바뀐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그 문화의 몰락을 뜻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 서구 문화를 역사적으로 그리고 사회학적으로 고찰한 ‘소로킨’은 근세 이후의 서구 문화를 감각적 문화라고 단정했다. 그는 근대의 구미를 지배하는 물질주의, 실용주의, 공리주의, 관료주의 그리고 폭력의 대결 따위는 이 감각 문화의 필연적 소산이라고 했다. 이러한 문화에는 조국이니 전통이니 따위의 전통적 고정 개념이 용인될 수 없다. 그런데 잃었던 조국에 대한 향수에 젖은 한국의 역사적 요청과 이것이 어떻게 직선적으로 부합될 수 있겠는가?
이승만 박사는 반일 반공을 국시처럼 내세움으로써 조국애를 나타냈다. 그러므로 그 정치는 미국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이성, 합리성, 실리성 따위는 조국이라는 도그마 앞에 무색하게 한 대신 고집과 과대망상과 지배욕이 그 정치의 동력이 됐었다. 지극히 작은 나라를 대한이라고 명명한 것과 미국에 절대 의존하는 수밖에 없는 체면과 실리 사이에서 미국 문화는 부조리의 경로를 통해서 단편적으로 들어와서 인체에 박힌 파편과 같은 역할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승만 한 사람에게 그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그때 우리 국민 전체의 자세가 그러했다. 저들의 비분강개와 실리 추구의 모순이 정면 충돌함으로써 모든 관계가 끊긴 혼란을 일으킨 것이다.
5·16 군사정권은 민족적 위기를 극복할 결사대로 자처하고 칼로 정권을 잡았다. 폭력으로 민주주의가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국민들은 저들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것은 조국, 잘난 조국을 기대하는 염원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이 정권은 우선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을 내세웠으며 민족적 주체성, 새로운 질서 수립 등을 공약했다. 이것은 조국, 민족을 앞세운 민중의 염원에 상부된 것이다. 그러기에 저들이 일제 정치, 문화 활동의 정치, 교육을 위시한 모든 제도에 세찬 수술을 할 때에도 국민들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얼마 후 민족적 민주주의란 술어는 없어지고 조국의 근대화라는 슬로건이 그것을 대신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바로 이 표어다. 근대화에 조국이 붙어 있다. 조국이란 개념에 아무런 새로운 해석이 없는 한 전근대적 민족주의다. 반면에 근대화는 바로 경제제일주의로 표현됐다. 이것은 철저한 실리주의에 서야 한다. 그런데 이 둘이 어떻게 일치되는가? 현정권은 실리성을 위해 반일(反日)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때 국민은 총궐기했다. 그것은 실리보다 조국이라는 것의 향수가 더 중요하다는 국민들의 뜻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현정부는 반공은 계속 밀고 나왔다. 그것은 실리와 상충되지 않는가? 결국은 그 때문에 일본을 비난하던 그 정경분리 정책에로 전환하는 수밖에 없게 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렇게 되면 그 ‘조국’의 주체성은 어디서 구하는가? 결국 근대화라는 슬로건 밑에 ‘조국’이란 개념은 물러난 것이다. 그래서 남은 것은 잘살면 된다이다. 그런데 그 잘사는 것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것이다. GNP의 척도가 바로 잘산다는 표상이다.
정부는 근대화를 위해 세계의 자본을 끌어들인다. 저들은 그것으로 어떤 공장이 건설된다는 생각은 해도 그 차관, 그 기계가 들어올 때 타고 들어오는 문화의 물결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외국의 자본과 더불어 일본을 위시한 의질(疑疾) 문화가 홍수처럼 들어와서 점점 그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이제 공산 계열과의 경제교류의 문을 통해서 그곳의 문화가 안 들어 온다고 생각하는가? 무엇으로 이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이질 문화에 대비할 것인가?

4. 근대화와 문화 의식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물음에 뚜렷한 청사진을 제시할 사람은 없으며 있다고 해도 어떤 정책으로 하루아침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문화에 대한 기본적 자세에 대해서 몇 가지 지적하고 싶다. 이것은 근대화에 대한 이해와 관련된 것이다.
단순한 근대화가 아니라 ‘조국’의 근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활동이라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근대화’는 문화 의식의 차원에서야 한다. 근대화는 곧 경제 건설이라는 사고는 ‘조국’을 뺀 건설로 몰아버릴 위험을 내포한다. 우리 나라의 과거에는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중국 대륙에서 원군을 청하므로 나라를 망친 역사가 계속됐다. 그것은 나라를 군사적 차원으로 본 데서 온 비극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국을 경제적 차원에서만 생각하므로 외국 자본에 나라의 주체성을 팔아먹을 위기에 있다. 기계를 외국에서 들어오면 여기서도 똑같은 생산력을 낼지 몰라도 그와 더불어 외래 문화가 함께 들어온다. 토인비는 한 사람의 영양이 다른 사람에게서는 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질 문화와의 접촉에 있어서도 해당된다고 했다. 그는 한 민족의 문화에 다른 문화의 부분이 이식될 때 미치는 영향을 역사적으로 검토하여 이 사실을 입증한다.
서구의 근대화는 결코 경제적 차원에서 이해될 수 없으며 그렇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화적 차원에서 직시해야 한다. 이미 지적한 대로 문화 철학자들은 근세 서구 문화를 감각 문화라고 했다. 즉 그것의 궁극적 가치는 감각적인 것이란 말이다. 그 진단이야 어떻게 됐던지 그러한 문화의 결실인 경제, 기술만을 따서 우리에게 이식할 수도 없거니와 그럴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토양이 마련되고 그것에 어떤 변화가 올 것을 검토하지 않는 한 그것은 나라를 송두리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체험하고 있다. 그러므로 경제 건설을 제일로 내세우면서 댄스홀 급습이니 일본의 자본을 들여오면서 일본의 가요를 금한다는 따위의 처사는 모르고 하는 짓이라면 기막힌 일이며, 부정부패의 현상이 우연처럼 야단하는 것도 가소로운 일이다.
근대화를 경제 제일로 이해하고 그리고 내몰려고 하는 것은 후진국이라는 것을 경제적 차원으로 이해하는 데서 온 열등감과 직결된다. 국민소득이 낮으면 후진국이라면 돈 없는 놈은 못난 놈이라는 풍조와 돈을 벌기 위해서 무슨 짓도 하겠다는 풍조가 이상할 게 없지 않겠는가? 국제적으로 GNP 경쟁하는 것이나 고급 주택으로 자기를 시위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으며 망국적 소비의 허영과 수입고는 알리지 않고 수출고만 알리는 게시판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경제 건설이 있어야 민주주의도 가능하다는 말과 돈이 없으니 강도짓이라도 할 수밖에 없다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아니! 소유의 경쟁에서 이길 때 우리도 열등감에서 벗어나 행복하리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경제 원칙상 영원히 이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후진국이라는 개념도 문화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정말 후진국이라면 바로 자기 문화를 못가진 데 있으며 문화 의식이 뚜렷하다면 우리는 후진국이 아니다. 누가 초가삼간에는 문화가 있을 수 없으며 웃을 수 없다고 했는가?
토인비는 한 문화는 도전과 대응에 의해 형성된다고 했다. 우리가 우리의 문화의 공백을 극복하려는 도전이 필요하다. 이날까지 우리는 우리의 약점인 빈곤, 나약성, 동양적 매너리즘 따위에만 도전했다. 그러나 이제는 강자에게서 몰려오는 것에 도전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것은 이른바 퇴폐 풍조 단속 따위의 말초적 도전이 아니라 저들이 정한 기준, 가치관과의 도전이어야 한다. 이제는 강자들이 만든 게임에 뛰어들지 말고 -그래 봐야 밤낮 질테니- 우리의 게임을 장만해야 한다. 까닭은 이제는 ‘나는 네가 아니다’, ‘네 것이 곧 내 것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감각 문화의 막동이인 물질문명에 대한 도전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은 쇄국주의나 배타주의를 뜻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먹지 않고 살 준비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가난한 나라, 약자의 세계사적 대응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일찍이 소로킨은 미국의 문화를 극복하기 위해서 예언자적 심혈을 기울여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이전에 미국 문화의 궁극적 가치관에 도전해서 이것을 바꾸지 않으면 스스로를 망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문화를 피라미드형의 동체로 보았는데 그 첨단에 어떤 극성이 자리 잡느냐에서 그 문화의 성격과 운명이 결정된다고 보고, 문화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이 극성을 대치시키는 길뿐이라고 했다. 그는 근대 후 서구 문화에는 감각적인 것이 이끌어 왔는데 그것이 궁극적 가치로 돼 있는 한 결국 공산주의 따위가 가장 강해질 온상이기에 다른 극성으로 대치해야만 산다고 했다. 그 다른 것은 크게 말해서 정신적인 것이다. 이것은 중대한 경고였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 없이 같은 성격의 문화를 철저화한 서구 문명이 이끌어 온 이유는 이제 물질 문화에 의한 과잉된 생산과 그것에서 온 폐물 때문에 마침내 생태학적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이와 반대로 이 세계에는 가난한 나라와 인간들이 GNP 경쟁에서 계속적인 수탈만 당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사적 위기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그것은 물질‘문명’에 대해서 정신적인 것이 극성으로 되는 ‘문화’로의 가치관의 전환이다. 쉽게 말해서 물질의 경쟁에서 문화창조의 장으로, 먹기 위해 사는 삶에서 살기 위해 먹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국의 근대화란 경제 건설이 아니라 문화 창조여야 한다. 문화는 결코 빈부의 차에서 그 질의 우열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 민족의 문화란 구성원의 총화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어떤 정권의 정책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정권이 문화 형성을 방해할 수는 있다. 그것은 권력으로 국민의 감정, 사상, 언론, 신앙 등을 억누르는 경우다. 참 문화는 이러한 자유 없이 창조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의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는 어떠한 구실도 문화 의식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문화의 창조는 자유를 수호하는 국민들의 운동과 더불어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이러한 문화 창조의 전선에 서겠는가 하는 것이다. 토인비는 이른바 “창조적 적은 무리”(Creative Minority)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한다. 누가 그 적은 무리겠는가? 그것은 배고파서 빵의 노예가 된 외적 프롤레타리아도 아니요, 그렇다고 포식 상태에 있어서 문화 의식에 가난한 내적 프롤레타리아도 될 수 없고 문화 의식을 가진 지식층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지식층이 돈 제일주의에 머물러 있는 한 문화도 조국의 장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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