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소개
 
 
연구소 약사
 
 
연구소 소식
 
 
민중신학 자료
 
 
독자마당
 
 
월간살림
 
 
신학사상
 
 
신간안내
 
 
도서신청
 
 
관련 사이트 링크
 
 
안병무 선생님
 
걸어오신길   저 서   성서 연구   추모 문집   사진 자료
 


  김재성(2004-01-09 16:09:46, Hit : 5499, Vote : 641
 예수의 설교

예수의 설교
―누가복음 12:22-29


안병무

이 텍스트를 선택하게 된 동기
1. 제목을 “예수의 설교”라 했는데 그것은 예수의 설교 전반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 텍스트 내에서 예수가 어떻게 설교했는지 말하려고 해서이다.
2. 설교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또 설교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구체적인 예를 알려주고 싶어서이다.
3. 이 텍스트는 현실과는 동떨어졌다는 비판을 받는 어려운 것이다.

설교의 청중
그날그날 먹을 것과 입을 것 때문에 배회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니 밥 먹을 걱정 없고 하루하루가 아니라 일년, 십년 혹은 일생의 생계를 걱정하는 계층도 그 대상이 아니다. 예수의 일생, 그와 연계된 민중들을 보면 가난이 밑바닥에, 사면에, 그리고 위에서 내리누르는 그런 현장이다.

설교의 내용
이렇게 가난함에 눌려있는 사람이 끝끝내 자기를 잃지 않고 자기를 지켜가는 길을 제시한다.
1. 가난하니까 가난한 것을 대비시키므로 위로를 하려고 하지 않고 풍요한 것에 시선을 돌리게 한다. 그것은 바로 자연이다. ‘너보다 더 불쌍한 저 사람을 보라’가 아니라 ‘저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저 자연 속에 요염하게 피어있는 백합을 보라.’ 저들은 가난의 상징이다. 아무것도 지닌 것이 없고 저축한 것이 없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는 일도 없다.
자연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런데 자연만큼 풍부한 존재는 없다. 온통 천지에 먹을 것으로 차 있지 않은가. 제가 벌어서 저축해서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널려있는 먹을 것을 보는 눈이 있고 그것으로 살아나가는 훈련이 되어 있다.
어떤 여자공동체가 한 달 동안 생식을 했다고 한다. 그런 다음에 나를 찾아왔는데 얼굴은 야위었으나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했다. 한 달 생식을 하고 나니 이 땅 위에는 먹을 것으로 차 있더라는 것이다. 독을 머금은 동식물만 가리면 어떤 풀도, 순도 심지어 나무 껍질도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먹어서는 안 된다고 애당초 시험조차 안해 보았던 것들도 모두 먹을 것으로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는 가난을 철저히 경험하고 삶의 풍요를 느낀 것이다.
서양 사람과 비교할 때 동양에는 이런 가난이 길게, 그리고 자주 휩쓴 흔적이 있다. 그래서 서양 사람과 비교할 때 우리가 먹는 식물의 가짓수가 훨씬 많다.
고사리, 도라지, 고구마 줄기, 더덕, 칡, 참대 순, 달래, 냉이, 씀바귀, 쑥, 도토리 등 거기에 송홧가루나 나무 껍질까지 포함해서―이런 것들 모두가 서양 사람들은 손을 대지 않는데 우리에게는 밥상을 풍부하게 한다. 이것은 가난에서 배운 지혜이다. 가난에서 배운 이 지혜가 오늘에 와서 비로소 인스턴트 음식에 대조해서 사람의 건강에 절대 유리한 식물이라는 것이 판명되고 있다.
그날의 먹을 것 때문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어디에 가면 죽 한 그릇 먹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고 ‘저 새를 보라’, ‘저 꽃을 보라’고 가르치는 예수의 설교.
현실과 아득히 떨어져 있는 것 같으나 현실에 가장 접근하는 민중들의 지혜와 맥을 같이하는 이 말을 들으라. 예수는 ‘일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 삶을 설계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2. 그러나 예수는 심미주의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설교는 일보 전진한다. 그는 기기묘묘한 자연에 도취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풍요함의 배후에 있는 이, 즉 하느님의 손길을 생각한다.
사람이 노력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이 자연은 바로 하느님의 손길로 키워지는 것이다. 예수는 동양의 도사들처럼 자연에 도취만 하거나 그 신비에 함몰되지 않고 거기서 하느님을 만난다. 호렙산이 따로 있으며 변화산이 따로 있으랴.
하느님을 만나는 일, 이것은 바로 인간이 나로서 살 수 있는 궁극적인 바탕이다. 그런데 가난함이 눈만 뜨면 가장 ‘하느님의 현재’를 실감할 수 있는 현장이 되고 있다. 여기서 예수의 설교의 극치가 나온다. 두려워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느님이 계시지 않느냐? 너를 품어주는 그 하느님이.
3. 그 다음 단계에서 예수는 사람이나 자연이나 꼭 같다는 말이냐는 의문을 가로막는다. 이것은 바로 사람의 영역과 능력이 자연의 그것보다는 진일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저 새도, 아무 분장도 안 하는 저 꽃도 먹이고 입히거든, 하물며 너, 사람을 내버려 두실 것이냐! 너는 사람이다. 사람됨을 잊지 마라. 가난 앞에도 사람됨을 포기하지 말아라.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인지 몰라도 자연과 구별해서 품어주는 하느님이 살아계시다. 사람은 이 하나님에게 응답하므로 자연과 다르다.
4. 하느님의 손길을 분명히 보라고 하는 예수는 다시 인간들의 정치적, 경제적 기술로 이루어놓은 풍요함과 대비시킨다. 꽃의 화려함을 보라고 하든 그는 갑자기 현실 문제로 눈을 돌리게 한다. 그것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행복의 상징처럼 알고 동경하는 왕의 영광, 구체적으로 솔로몬을 비하한다. 솔로몬을 언급한 그의 마음에는 그 시대의 지배자들이 착취로 부유해진 그들을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정치적 압제와 폭군 밑에 살고 있다는 그 현실에 돌아왔다. 그 어느 때 살았던 솔로몬 왕보다 인간의 행복의 원천을 솔로몬에 두고 있는 사람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파하고 자기 무능을 한탄하는 사람들에게, 솔로몬의 영화가 다 무슨 쓸모가 있는가? 저 들에 피었다가 지는 저 백합의 황홀함. 피었다가 며칠만에 스러지는 미미한 저 존재 앞에 솔로몬의 영광을 철저히 비하시킨다. 저 꽃의 화려함을 솔로몬의 영화가 어떻게 당하랴. 이렇게 대조시키면 결국 며칠 있다 져서 떨어지는 저 꽃보다 한정된 시들어진 운명을 지닌, 저 영화여!라는 말이 된다.
이상에서 예수의 설교를 이렇게 볼 때 예수는 모든 것의 증인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남이 못 보는 것을 본다. 그것을 증거한다. 가난 자체를 증오해서 폭력을 휘두르는 혁명가와는 달리 하느님의 풍요함이 가난보다 확실하게 있음을 제시한다.
설교의 핵심은 우리가 보고 듣고 내가 처한 상황을 경험하면서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을 증거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하늘로 구름을 타고 가라는 것도 아니요, 피었다 지는 한 폭의 자연이 되라는 것도 아니다. 그런 속에서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인식과 행위를 하라는 것이다.

결론
끝으로 그는 두 가지를 말씀한다.
첫째는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염려는 내일에 맡길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 것으로 넉넉하다”(마 6:34). 그날그날의 먹을 것을 위해 일하지 말라. 돈과 계산하며 직장을 드나드는 사람만큼 피곤하고 비참한 사람은 없다.
둘째는 너 이제 먼저 모든 것에 앞서서 할 일은 ‘그 나라를 구하라.’ 역사의 지평에서, 현재라는 짐에 눌려 한치 앞도 못 내다보는 그런 비참한 이가 되지 말라. 네가 너 됨은 희망이 있어서 되는 것이다. 그 나라란 바로 희망의 상징이다. 심리적인 요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보다 나은 우리 말로 하면 천지 개벽의 그때를 실질적으로 기다리고 그때를 앞당기려고 그 투쟁 속에 참여했다.

(※ 이 글은 1996년 7월 21일 한백교회에서 한 설교다. 설교를 준비한 메모지 내용을 그대로 옮겼다. 살림 2001년 3월호에 수록되었다.)




사랑과 하느님
주체성과 신앙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zero
한국신학연구소 / Korea Theological Study Institute / http://www.ktsi.or.kr
03752 서울시 서대문구 경기대로 55 선교교육원내 / Tel 02-738-3265~7 , Fax 02-738-0167 , E-mail :
Copyright 2000-2020 KTSI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