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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연구소(2004-01-09 16:10:53, Hit : 5576, Vote : 657
 사랑과 하느님

사랑과 하느님
―요한1서 4장 7-12절


안병무

요한의 편지는 “사랑”이라는 말로 일관한 유명한 편지이다. 지금 읽은 4장에는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영(靈)의 문제로 출발한다. 즉 세상에 영이 많은데 어떤 것이 참 영인지 어떻게 알 것인가 하는 것을 문제로 한다.
이 편지의 주인공은 ‘종교마다 다 하느님께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참 하느님께 속한 참 신앙의 기준을 말한다. 무엇보다도 예수가 육체, 즉 인간이었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는 영은 거짓 영이라고 하고 그에 비해서 그리스도의 신앙은 하느님께 속한 것임을 강조한다. 여기서 그 거짓 영이란 바로 당시의 영지주의를 말한다.
저들의 주장의 특징은 소위 그리스도 가현설이다. 저들이 말하는 구원이란 결국 사람의 영역에서 탈출하는 일이다. 저들은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구원이란 인간적인 것, 육체적인 것은 다 버리고 영만이 상승하는 것을 말한다. 이 편지의 주인공은 이러한 신앙 태도가 벌써 초대교회 안에 침입해서(3절), 혼란을 일으키는 것을 눈앞에 보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고 7절부터는 사랑과 하느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말한다.
그는 우선 중대한 선언을 한다. 그것은 하느님을 만나는 일은 오직 형제와 사랑하는 데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4:7-8, 12). 그리고 다음에 그는 모든 형이상학적인 종교를 다음과 같이 부정한다.
‘어느 때나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다’(12절). 이 말은 무엇보다도 신비주의적인 신앙 태도를 부정한다.
이는 사람이 기도든지 고행이든지 함으로써 어떤 몰아경에 몰입해서 그 영이 하늘로 올라가서 신과 그 세계를 경험한다는 당시의 영지주의를 거부할 뿐 아니라 구약 해석에 있어서도 혁명적인 말이다.
구약에는 여러 자료들이 있다. 가장 낡은 자료에는 하느님이 직접 사람들과 접촉하고 그 다음은 간접으로 꿈, 환상, 또는 천사 같은 것을 통해서 사람에게 보인다. 그리고 좀더 후기로 내려와서는 제사를 지내는 그 순간에만 하느님을 경험한다고 하였다. 이 마지막 계열이 성전 중심의 종교, 즉 의식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이 요한의 편지는 저들은 하느님을 본 것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그럼 아브라함과 같은 많은 족장들이 하느님과 대화했다는 것을 일체 부정하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라 저들이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함은 저들이 하느님을 객체로 본 것이 아니라는 해석이다. 즉 하느님을 형이상학적으로 객관화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사실상 구약, 족장들의 신앙은 어떤 신비주의도 사변도 아니고 삶 자체였던 것이다.
이 말은 유다 율법주의도 부정하고 있다. 유다 율법주의는 계명과만 마주서고 하느님은 사실상 사람의 영역 밖으로 멀리 후퇴한 피안적인 하나의 힘이었다. 그렇기에 저들이 직접 마주 선 것은 이 하느님이 아니라 ‘하지 말라’는 것이 중추를 이루고 있고 벌로 협박하는 율법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을 율법으로 바꾸어 가지는 한 역사적인 나의 삶 전체를 지배할 수는 없다. 하느님은 사실상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만 아니라 내 삶 전체를 지배해야 참 하느님이다.
이러한 하느님관(觀)을 부정한 이 편지의 주인공은 ‘하느님은 곧 사랑이다’(8절)라고 선언한다. ‘하느님은 사랑이다’라고 정의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의미한다.
첫째, 하느님은 ‘하지 말라’가 중추를 이루는 율법을 내세우고 벌로 협박하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를 사람에게 내맡기는, 사람의 삶에 대한 긍정의 의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뜻이 9절에 나타난다. 그는 우리를 사랑해서 그의 독생자(즉 그 자신)를 내 맡겼다고 한다.
둘째, 하느님이 사랑이라 함은 피안적으로 객관화할 수 있는 어떤 객체가 아니라 관계에 있어서만 존재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사랑-그것은 나와 너와의 관계에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지 독립된 어떤 실체는 아니다. 즉 나와 너, 즉 “우리”라는 범주 안에서 성립되는 것이지 유아독존적인 것이 아니다.
아버지, 어머니라는 말이 아들, 딸과의 관계를 벌써 전제하고 그 앞에서만 성립되듯이 하느님이 사랑이라고 하는 말에는 벌써 사랑을 나눌 자가 포함되어 있다. 이 말은 어떤 초자연적인 피안에 도사리고 있어 가끔 경우에 따라 내려와서 사람에게 간섭하는 이가 아니라 나와 직결된, 나를 떠난 그, 또는 그를 떠난 나를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말이 된다.    
시편 42편에서는 ‘너희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며 그 하느님을 보여달라는 원수들의 힐난에 대답할 길이 없어 호소한다. 요한복음에 빌립이 하느님을 보여달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보여줄 수 있는 하느님은 없다. 예수는 그래서 그 빌립의 요구가 부당한 것을 지적하면서 ‘네가 나와 그렇게 오래 있으면서도 하느님을 보여 달라느냐? 나를 보았으면 하느님을 보았을 텐데’라고 말한다. 즉 예수는 지금의 삶을 떠나서 어떤 객체를 찾는 그런 사고를 부정했다. 여기서도 ‘하느님은 사랑이다’라고 할 때에는 이런 요구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편지에서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한 것은 어떤 사변적, 우주론적인 원리의 파악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사건으로서의 예수의 생애, 무엇보다도 그의 십자가의 사실에서 계시되었음을 말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이 ‘나는 너를 사랑한다’로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예수의 사건은 객관화해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계시는 아닌 것이다. 이것은 실존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 자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행위에서 나를 보았다. 그의 십자가에서 내 죽음을 보았다. 그의 부활에서 내 새 가능성을 보았다. 이 전체 사건에서 내가 사랑을 받고 있는 하느님의 ‘너’인 것을 실존적으로 경험했다. 이렇게 이 사건은 피안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다 차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어느 때나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단언하는 이 편지는 그 대신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길이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하느님의 실존적인 이해에서이다. 그 길은 12절에 나오는 대로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리라’라는 것이다.
보는 것! 즉, 이것은 객관화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오직 그와 더불어 산다는 것이다. 즉 ‘사랑해라. 거기서 하느님이 너와 더불어 있다. 오직 거기에만, 너희들이 사랑하는 그 속에서만 하느님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하느님은 바로 너의 생활 속에서, 너의 역사적인 생활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분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면 이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그것은 어떤 신비한 매개물인가? 여기서는 어떤 사랑, 어떻게 하는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사랑은 에로스가 아니다. 또 리비도가 아니다’라고 사랑을 규정하지 않는다. 사랑에 대해서 정의한 것이 있다면 18절에 나오는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라는 것이다. 사랑은 두려움, 공포의 반대이다. 이 말은 사랑에 대한 정의라기보다는 ‘사랑! 그것에는 과감해라. 사랑에서는 두려워 말라’라는 말이다.
결국 사랑이란 것은 사람들에게 이미 자명한 것임을 전제한다. 누구나 이미 하고 있고, 원하고 있고,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새로운 신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사랑에 대한 언어적인 규정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랑할 때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사랑하려고 할 때 또 사랑할 때 스스로 참 하느님이 나와 함께 있음을 체험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제 우리는 자명한 몇 가지 현상을 생각해 보자.
첫째, 어떤 경우, 어떤 장소에서 나를 요구하고 어떤 경우에야 내게 요구되는 분이라면 그는 하느님은 아니다. 나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전체로서의 나를 요구하고 나도 하느님을 내 삶 전체와 관련된 전체로서 요구하여야 참 산 하느님이다. 처음에는 신앙 생활을 정신 수양의 일부로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 생활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역시 하느님은 나를 전체로서 요구함을 경험한다.
사랑도 그런 것이다. 사람의 삶 전체를 언제나 어느 장소에서나 끝없이 요구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하나의 오락처럼 심심풀이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이것은 내 삶 전체를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니 사랑, 그것이 곧 내 실존의 다른 표현인 것을 우리는 경험한다.

둘째, 사랑은 객관화할 수 없다. 사랑은 관계적인 것이다. 또 사랑은 나와 유리해서 중립적으로 파악될 수 없다.
사랑은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누구를 사랑하려고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사랑을 받고 싶다는 말과 구별이 안 된다. 나는 사랑을 소원한다. 그러나 주고받고 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은 나 혼자 처리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받지 않으면 안 되며 아무리 받고 싶어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은 이렇게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랑은 내 속성같이 즉 내가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사실상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내 안에 있으면서도 나를 초월해 있다.
사랑은 내 안에 있으면서 내 한계를 넘어서 있다는 사실은 사랑을 하면 할수록 느껴지는 현실이다. 할 수 없다고 해서 정지할 수 없다. 내 사랑하려는 욕구나 받으려는 욕구는 내 한계, 즉 내 영역 밖에 있다. 이 사랑의 요구는 이만하면 족하다가 없다. 받으면 받을수록 더, 더, 보다 더에로 나를 휘몬다. 그래서 사랑은 마침내 내 한계성을 뛰어 넘어서 내가 해체될 듯한 상황에 나를 몰아 넣는다.
이래서 사람들은 고독을 말한다. 고독이란 나는 나로 있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고독욕은 사랑의 관계에서 보면 나는 나로 사랑을 받고 싶고 제3인칭인 ‘es’로서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한 주체적 존재로서 인정받고 싶다. 어떤 밖의 기준에 비추어 본 내가 아닌 글자 그대로의 ‘나’로 받아달라는 것이다. 고독은 그래서 고립이 아니다. 주체적인 나로서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는 표현이다.
나는 아내이다. 밥 잘하는 아내, 아이 잘 기르는 아내,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아내가 아니라 ‘나’로서 사랑받고 싶다. 그게 아닐 때, 즉 ‘그것(es)’으로 취급받을 때 고독을 느낀다.
나는 남편이다. 돈 벌어오는 건강한 남편, 머리 좋은 그런 남자가 아니라, 아니 인격마저도 아닌, 바로 나로서 취급받고 싶다. 이 말은 나의 사랑의 욕구는 전체를 요구한다. 어느 부분이 아니다.
이 매스컴의 시대는 자꾸 사람을 가치, 기술의 척도로 보게 하고 그렇게 사람을 대한다. 나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 그래서 매스컴에서 이야기하는 기술을 습득해야 산다고 굳게 믿는다. 그리고 각종 기술을 배우기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뛰어 다닌다. 정말 북한에서처럼 새벽 별 보기 운동부터 해서 천 번 삽질하고 한 번 허리 펴기 운동을 한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외롭다. 그래서 현대 청년들은 나는 “잡초”라고 한다. 사람 취급을 못 받고 부분품으로 취급받는 데 대한 반발이다.
예수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다. 그리고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한다. 우선 네 몸같이라면 자명적이라는 말이다. 나는 내 소원이 무엇임을 안다. 그러나 정말 나는 나를 사랑하는 데로 끌려 들어가고 있으나 내가 날 사랑하는 것도 나 혼자 할 수 없는 것에 새삼 놀란다. 내가 날 사랑하는 일, 그것도 남과의 관계에서만 이루어진다. 내가 내게 좋아지는 것도 내게 있는 어떤 것을 남이, 네가 좋아한다고 볼 때 좋아진다. 난 내가 오히려 싫어지는 수도 있다. 그것도 내가 아니라 네가 싫어하니까 싫어진다.
파스칼은 인간의 고독을 죽음과 관련시켜 생각했다. 아무리 무어라고 해도 죽는 것은 내가 혼자 죽는다. 그러나 사랑의 관계에서 보면 혼자 죽는 것은 사실이나 혼자 죽어도 좋다가 가능하다.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일도 혼자 되는 일이 아니다. 즉 고립 속에서 자기를 사랑할 수는 없다. 즉, 너를 사랑할 때 네게서 사랑받을 때 나도 날 사랑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네 몸같이’라고 할 때에 어쩔 수 없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그 이웃이 하나의 물건이 아니고 하나의 주체적인 ‘나’로서 사랑받고 싶어하는 것을 본다. 꼭 내가 그렇듯이! 나는 그 주체적 요구에 움츠려 든다. 나는 이웃을 사랑하려면 사랑할수록 그것은 어느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즉 내 존재 전체의 교환을 요구하는 일임을 경험한다. 그럴 때에 나는 무서운 장벽, 내가 안에 있는 듯하면서도 나를 초월한 내 한계 밖으로 내가 확대됨을 경험한다.
즉 사랑하려면 사랑할수록 사랑할 수 없는 나를 경험한다. 나는 오히려 반면에 사랑에 자신을 갖고 출발했다가 내 비굴함, 나의 제약성, 나의 이기성 앞에 마주 선다. 즉 내 실존에 마주 선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랑에서 리비도만도 아니며 에로스만도 아니고 어느 부분이 아니라 바로 전체로서의 내 실존과 마주 선다. 이렇게 사랑은 결국 내 실존의 속성이 아니라 바로 내 실존과 마주 선 또 하나의 현실임을 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사랑이란 내가 잡을 수 있는 것도 내가 이룰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내 실존 안에 있으면서 내 실존과 마주 서는 그 무엇이다. 놀랍게 이렇게 자명적인, 그저 보이는 것으로 생각되는 사랑은 하면 할수록 나와 거리가 멀다. 사랑, 사랑 그것은 하면 할수록 나를 사랑에 굶주리게 한다. 그래서 나를 마음이 가난하게, 굶주리게, 목마르게 한다.
그렇다고 이 사랑을 정지할 수는 없다. 사랑에는 충족이 없다고 나는 그만둘 수 없다. 여기서 내 안에 있는 자명적인 사랑에서 출발한 사람은 결국 사랑, 그것을 믿는 수밖에 없다. 이것을 믿을 때 사랑 자체는 내 소유가 아니다.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있음을 경험한다.
‘하느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 거하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리라.’
요한복음에도 ‘나를 보았으면 하느님을 보았고 하느님이 내 안에, 내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보지 않느냐?’고 한다.
복음서는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이 나는 너를 너로서 사랑한다는 것을 전한다.
요한복음 6장에서는 예수를 통해서 본 이 하느님의 사랑을 ‘내 피와 내 살을 먹으라. 그래야 너희가 산다’고 고백한다. 이 말은 이 하느님은 어떤 피안에 도사리고 있고 내게 어떤 계율을 주어 벌과 상을 어느 때에 주는 이가 아니라 그 자신을 우리와 관련지어 우리에게 내맡김으로써 우리의 존재의 근거가 되고 있는 하느님임을 말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우리가 찾아 올라가서 만날 그런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관계를 갖고 사랑을 하려고, 받으려고 하면서도 내 안에서 사랑에 굶주림을 느낄 때, 즉 사랑하면서 비로소 경험하는 사랑에 대한 굶주림 속에 찾아와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바로 그 안에 있다’는 것이 예수를 통해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정말로 그리스도인이란 예수의 사건을 통해서 이 일직선을 긋는 사랑을 믿는 이들이다.
‘모든 것이 다 나를 버려도 이 사랑은 나를 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다.

현대는 테크놀로지의 시대이다. 우리는 과거와 비교해 보면 성인이 되었다. 그러면 이제는 하느님은 필요 없는가? 아니, 바로 이 시대가 매스컴의 시대, 테크놀로지의 시대이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고독하다. 그것은 내가 늘 제3인칭인 ‘그것(es)’으로 취급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그렇기 때문에 주체적인 존재로서의 나를 주장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저들은 사랑에 굶주려 있다. 그러나 정말 사랑에 대한 갈구만은 여전히 사람들 속에 팽창해 있다.
그러는 한 하느님은 사랑으로서 언제나 내게 없어서는 안 되는 실존의 근거일 것이다.

(*이 글은 살림 2001년 4월호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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