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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선생님
 


  김재성 
 신간 <자연신학> 소개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
Toward a Theology of Nature: Essays on Science and Faith
Edited by Ted Peters (Louisville, Kentucky: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3).
박일준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2000년 3월 출간


편집자 서문: 판넨베르그의 신학과 자연 과학


아마도 판넨베르그가 최근의 신학적 토론에 가져다 준 가장 획기적이고 극적인 공헌은 바로 자연 과학자들에게 신학적 물음들을 던지면서 자신의 주체적 입장을 주도적으로 개진해 나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 공동체들이 20세기의 물리학과 생물학이 전개하는 세계관에 맞추어 종교적 비전을 순응시킴으로서 통합적 세계관을 모색하고 있는데 반해, 판넨베르그는 그 과정을 역전시키고 있다. 과학 이론들을 마치 완성된 완벽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에 단순히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뮌헨의 신학자 판넨베르그는 과학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을 불완전하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과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그려주고 있는 실재상에 하느님 개념을 통합할 것을 도전적으로 요구하는데까지 나아간다. 그는 주장하기를, 만일 하느님이 올바르게 고려되지 않는다면, 과학 이론은 그것이 설명하고자 하는 세계의 실재상을 완전하게 파악할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연 세계란 창조하는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만일 이 사실이 이해되지 못한다면, 자연 세계를 이해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판넨베르그가 신성한 어떤 것을 위반하고 있는 듯이 보일지도 모른다. 소위 말해 "두 문화"의 등장 이후 서구적 지성은 과학적인 것을 "신성한 것"(holy)으로 그리고 종교적인 것을 "세속적인 것"(profane)으로 교묘하게 위장시켜왔다. 그리고 급기야 우리는 과학적 지식은 순수하며, 반면 종교적 지식은 주관적 감정이나 격세유전적 미신으로서 불경하게 오염된 세속적인 것이라고 가정하기에 이르렀다. 과학적 지식은 합리적이고 경험적이어야 한다고 가정하면서, 반면 종교적 감성들은 증명불가능한 하느님의 실재와 관련된 근거없는 억측들을 늘어 놓으면서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럽히고 있다고 우리는 가정한다. 학문의 자유는 과학의 지식으로 건축된 성전에서 신학을 추방할 것을 요구한다. 지난 한세기 동안 혹은 그 이상 동안 신학자들은 이 금기를 위반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이나 자연 세계와 관련된 물음들을 구렁이 담넘어가듯 슬쩍 건너뛰면서, 자연 이해의 은총을 부여해 줄수 있는 사제권(司祭權)을 과학계에 양보해 왔다. 그러나 이제 판넨베르그는 서구 계몽기 문화가 신성시 해왔던 것을 세속화하려는 듯이 보인다. 그는 인식론적으로 성스러운 것들 중 가장 성스러운 것을 다시금 명백히 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앎의 상실은 결국 우리가 자연의 본성에 관하여 배워온 것을 지극히 편협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판넨베르그의 도전은 그의 주장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과학자들에게 상당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판넨베르그의 도전은 그들로 하여금 실험실로 다시 돌아가 기존하는 증거들의 의미를 재평가하고 미래의 연구활동을 새로운 물음들을 통해 설정해 나갈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신학자들에게도 판넨베르그의 도전은 상당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사실 이제까지 신학자들은 칸트적인 분할의 배후에 숨어 안주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칸트적 분할이란 이론적 지식과 윤리적 지식의 분할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와같은 칸트의 도식을 통해 신학자들은 과학에게 이론적 지식의 영역을 양보하면서 자신들은 윤리적 지식에로 나아갈수 있는 우세한 위치를 선점해 왔었다. 그래서 비록 자연 과학자들이 하느님을 그들의 세계관으로부터 배제시킨다 할지라도, 신학자들은 가치와 윤리의 영역에서 계속 밥벌이를 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그와같은 신학적 작업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판넨베르그는 말한다. 본서의 첫장에서 판넨베르그는 자신의 도전은 두가지 요점을 아주 분명하게 한다고 말한다: "만일 성서의 하느님이 우주의 창조자라면, 그 하느님에 대한 진술없이는 자연 과정을 완전히 혹은 적절하게 이해하는 일은 가능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자연이 성서의 하느님에 대한 진술없이 적절하게 이해되어질수 있다면, 그 하느님은 우주의 창조자일수 없으며 따라서 그는 참 하느님이 될 수 없고 그리고 윤리적 가르침의 근원으로 또한 확증될수도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적 신앙의 모태인 하느님이 또한 피조된 자연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윤리를 통해 하느님에로 나아가는 길을 주장할수 없다. 이론적 지식은 윤리적 지식의 토대(foundation)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판넨베르그의 통찰은 다음 세가지 점에서 중요하다. 첫째, 판넨베르그는 신학자들과 자연 과학자들 간에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를 보다 진지한 새로운 차원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둘째, 그는 신학을 특성상 과학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신학은 부분적으로 자연 과학 분야들과 동일한 방법들과 영역들을 공유하고 있음을 우리들에게 주지시키고 있다. 셋째, 그는 창조와 보전과 지배라는 기독교의 고전적 사명들을 근대 과학과 결합시킨 자연의 신학(theology of nature)을 통해 발전시켜 나가야 할것이라고 우리들에게 요청한다. 본서에 수록된 일곱 개의 논문은 이미 예전에 다른 문헌들을 통해 출판되었던 것들을 다시 편집하여 모은 것인데, 이 논문들을 통해 판넨베르그는 자신이 지향하는 자연의 신학을 명확하게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이 편집자 서문을 통해, 본 편집자는 신학자들과 과학자들 간의 상호교류에 판넨베르그의 도전이 던져주는 의미를 기술하고, 그의 과학적 자연의 신학이 취하고 있는 방향성을 간략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판넨베르그와 신학과 자연 과학 사이의 대화

판넨베르그가 어떤 점에서 신학자들과 과학자들 간에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에 적합성을 갖고 있는가? 신학자들과 과학자들 간의 대화를 곧장 묻는 것은 물론 건전한 대화가 현재 이루어지고 있음을 전제한다. 바로 그렇다. 그러나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계몽기 이후, 서구 대학들이 자연 과학 분야들을 합병한 이후, 우리는 지적인 배구 경기를 벌여왔다. 한편으로 우리는 과학주의(scientism)를 상대해야 했는데, 이는 이따금 "자연주의"(naturalism) 혹은 "세속적 인문주의"(secular humanism)라 불리기도 한다. 과학주의는 과학이 신뢰할만한 지식에로 나아가는 유일한 과정(課程)이라는 주장을 근거로 이 지적인 배구 경기에서 완벽한 승리를 호언한다. 오직 하나의 실재, 즉 자연 세계만이 존재하고 그리고 실험 과학은 이 실재(reality)에 관한 진리를 배울수 있는 유일한 그리고 신뢰성있는 방법을 제공한다. 그와 대조적으로 종교는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종교가 할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존재하지 않는 실재들에 관한 공상들을 창조해 내는 일 뿐이다. 따라서 신학자들이 말할수 있는 것이라곤, 실재하는 사물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겨우 사이비 지식(pseudo-knowledge)뿐이다.
그 반대편 네트에서 우리는 과학주의의 시합 상대를 발견하게 되는데, 통상 종교적 권위주의(religious authoritarianism)의 형태를 띈다. 이 팀에 속한 선수들은 특별 계시가 최고의 진리를 구성한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우리가 실험실이나 자연 이성으로부터 배운 것들은 모두 신앙의 관점에서 평가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권위주의는 두 무리의 선수군을 운영한다, 교회적 권위주의(the ecclesiastical)와 성서적 권위주의(the biblical)가 그들이다. 1864년 교화 피우스 9세가 공표한 『착오들에 관한 교서집』이 바로 교회적 권위주의 대표적인 예인데, 그 교서집에 따르면, 과학이나 철학이 보다 고등의 학문 분야인 신학의 감독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오이다. 자연 과학을 통해 앎을 획득하는 방법들이 우리가 신학적으로 신앙하는 바와 모순되는 결론을 제시할 때, 우리는 신학이 올바른 것이고 그외 다른 방법들은 틀렸음을 올곧게 주장해야만 한다. 교회는 계시된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과학이 취하는 입장을 감독할 권한이 있다. 이와 유사하게,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은 성서 본문 속에서 발견된다고 여겨지는 특별 계시에 근거하여 성서적 권위주의를 주장한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7일간의 창조를 통하여 종들(species)을 고정시켰음을 주장한다고 보기 때문에 근본주의자들은 장구한 시간에 걸쳐 한 종이 돌연변이를 통하여 또 다른 종으로 진화했다는 과학적 주장들의 진리치(truth value)를 부정한다. 즉, 권위가 이론을 물리친다.
우리는 또한 권위주의적 근본주의자들을 교체하여 시합에 나서기를 대기하고 있는 과학적 창조론자들(scientific creationists)을 이 지적 배구 경기의 선수 대기석에서 보게 된다. 이들의 전략은 다르다. 1920년대의 근본주의자들은 성서가 하느님으로부터 영감받은 책이라는 근거에서 성서의 권위를 주장했다면, 오늘날의 과학적 창조론자들은 과학에 근거하여 시합을 이끌어 가고자 한다. 계시된 지식과 과학적 지식은 동일한 영역에 속하며 따라서 그 양자는 조화해야 한다고 그들은 가정한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과학적 주장과 종교적 주장 사이에 논쟁이 벌어질 경우, 그것은 곧 경쟁하는 과학 이론들 간의 논쟁인 셈이다. 즉, 이들에 따르면, 성서가 기술하고 있는 칠일 간의 창조는 사실상 과학 이론으로서 지질학과 생물학의 증거들을 통해 확증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주장하기를, 창세기의 기록이 그의 경쟁이론, 즉 진화론보다 우수함은 바로 그 증거들을 통해 이미 입증되었다. 이는 비권위주의적인 신앙에로의 접근 방법으로서, 창조론자들은 시합의 승패 여부를 떠나 과학자들이 준수하고 있는 동일한 규칙에 따라 시합을 진행하기를 원하고 있다.
기존의 과학자들이 한편을 이루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적 권위주의자들, 근본주의적 권위주의자들 혹은 과학적 창조론자들 중 하나가 시합 상대로 나서 벌이는 뜨거운 논쟁 게임을 우리는 기대해 볼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느 한편이 이기고 다른 한편이 져야하는 맹렬한 시합을 우리는 예상해 볼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20세기를 살아가면서 그와같은 지적인 배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는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네트를 오가면서 퍼부어지는 강력한 공격을 거의 보지 못하고 있다. 왜? 왜냐하면 양편의 선수들 대부분이 "두 언어 규칙"(two-language rule)을 채택해왔기 때문이다. 두 언어 이론(two language theory)에 따르면,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서로 독립된 지식 분야에서 일하고, 서로 독립된 별개의 언어로 말하며 그래서 각자의 주어진 분야에 최선을 다하면서 상대방의 작업에 간여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가 기술해온 두 팀들은 자기들끼리 자체 연습경기를 하면서 네트 너머에 있는 상대편과는 경기를 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창조론자들이 이 두 언어 규칙을 무시하고 과학자들 진영으로 공을 서브해도, 과학자들은 그 공을 받아 응수하지 않는다. 자유주의 혹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종교팀의 네 번째 교체 선수로 코트에 등장했지만, 그들은 그 두 언어 규칙에 얽매여 네트 너머로 전혀 공을 보낼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20세기 과학자들의 팀을 아주 행복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두 언어 이론(two-language theory)은 시합 자체를 없애 버렸다. 주로 자유주의 신학자들(liberal theologians)과 신정통주의(neo-orthodox) 신학자들이 선호했던 이 입장은 기독교인들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는 하느님과 그 하느님이 만든 관찰가능한 피조 세계 사이에는 어찌되었건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잠정적으로 서로 다른 질문들을 묻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지금 이 세계를 다루는 객관적 지식을 묻고 있는 반면, 신학자들은 실존적 혹은 인격적 지식을 탐구하면서 이 세계를 초월하는 존재와 우리의 관계를 다룬다. 과학자들은 "어떻게?"(how)를 묻는다. 신학자들은 "왜?"(why)를 묻는다. 과학자들은 사실을 다루고, 신학자들은 가치를 다룬다. 과학자들은 적절한 원인들을 탐구하고, 신학자들은 궁극적인 기원을 탐구한다. 이 분열된 두 언어들은 우리로 하여금 물론 두 언어를 배우게 만든다 - 즉 과학과 신앙을 갈등없이 탐구하게 만든다.
신학자들 뿐만 아니라 과학자들도 이 두 언어 게임을 하였다. 1939년 "과학과 종교"에 관한 연설에서 저명한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쉬타인(Albert Einstein)은 사실의 언어와 가치의 언어를 구별하였다. 그에 따르면, "과학은 오직 그것이 무엇인지만을 확인할수 있지만, 그것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반면 종교는 오직 인간의 사고와 행위를 평가하는 작업들만을 다룬다." 아인쉬타인의 언급 속에서 중요한 단어는 "오직"이란 단어이다. 왜냐하면 그 단어는 각 언어를 각자의 고유 영역에 국한시킨다는 의미를 담지하기 때문이다. 즉 종교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사실이 아니라, 가치에 대해 말한다.
지난 10여년 동안 그 두 언어 규칙이 "가설적 공명"(hypothetical consonance)이라는 새로운 접근방법으로 대치되면서, 게임 전체의 향방을 점차로 바꾸어 버렸다. 두 언어 이론을 주장하는 분리주의자들과는 달리, 공명을 추구하는 이들은 과학과 신학 모두 일정한 앎의 영역을 공유한다고 전제한다. 예를 들어, 자연 세계에 관한 과학적 지식은 곧 하느님이 피조한 세계에 관한 지식이다. 거기에는 오직 한 실재, 즉 창조자 하느님에 의해 피조된 피조물적 실재만이 존재한다. 가설적으로, 자연 세계를 통하여 습득된 지식은 우리가 하느님에 관하여 알고 있는 바에 기여해야 하고, 그리고, 역으로, 우리가 하느님에 관하여 알고 있는 바는 곧 우리가 어떻게 자연 세계를 이해해야 하는지에 영향을 미쳐야만 한다. 이제 할 일은 다양한 학문 분야들을 탐구하면서 가급적 중첩된것들, 공통적인 것들, 상호보완적인 것들을 찾아내는 일이다. 이 작업은 곧 개방적 정신의 과학자들과 성실한 신학자들이 서로 대화를 해야 할 이유를 제공한다. 가설적 공명은 승부를 가려야 하는 시합으로 우리를 다시금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 팀이 어떻게 경기를 운영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배구공을 네트 너머로 넘겨줄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두 언어 이론을 둘러싼 불만이 점증하면서 공명가능한 어떤 영역들이 분명히 존재할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차례로 이는 과학자들과 신학자들 간의 상호 호의적인 경기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물리학자들과 생물학자들은 교리학자들과 윤리학자들과의 만남을 교류하면서, 방법론과 개념구성 그리고 윤리성을 둘러싼 논점들을 가려내려고 노력 중이다. 그와같은 주제들을 다룰 학술 연구소들이 계속 설립되고 있고 그러면서 대화의 빈도수도 늘어나게 되었고 결국 대화 자체가 보다 복잡한 수준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독일에서 우리는 한스 메이(Hans May)가 이끄는 복음주의 학술 연구소(the Evangelische Akademie Loccum)을 주목하게 된다. 로마 근교의 바티칸 관측소는 몇몇 과학 연구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가 그러한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아써 피콕크(Arthur Peacocke)는 목회자 과학연합회(the Society of Ordained Scientists)를 설립하였다. 프린스턴에서 우리는 신학연구센터(the Center of Theological Inquiry)와 윈첼 반 호이스틴(Wentzel van Huyssteen)의 학문성에 주목하지 않을수 없다. 시카고에서 필립 헤프너(Philip Hefner)는 종교와 과학 연구소(the Center for Religion and Science)를 운영하고 있고, 버클리에서는 로버트 존 러셀(Robert John Russell)의 지도하에 신학과 자연 과학 연구소(the Center for Theology and the Natural Sciences)가 학술회의들과 대화 프로그램들을 후원하고 있다. 루터교와 침례교 그리고 미국 그리스도교는 과학과 기술 공학에 관한 특별 연구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구스타프스 아돌프스 칼리지(Gustavus Adolphus College)는 2년에 한변씩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들을 초청하여 신학자들과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비록 이러한 토론들을 통하여 아직 어떤 새로운 세계관이 출현한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계속 대화를 열어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현안적 관심사들을 바라보는 지평의 확장 가능성을 그 대화 속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아직 두 언어를 가지고 대화를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기서 상호대화를 향한 절실한 욕구를 보게 된다.
바로 이러한 상황들이 판넨베르그가 어떻게 신학은 보다 과학적이 될 수 있고 그리고 어떻게 과학은 보다 신학적이 될 수 있는지를 묻고있는 세계의 배경이 된다고 할수 있다. 그러한 대화들에서 가장 적극적인 참여자들 중의 하나인 판넨베르그는 간학문적 혹은 학제적 풍토(interdisciplinary setting)를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을 귀기울여 듣고; 그러면서 또한 과학자들에게 신학자로서 그의 주체적인 입장에 서서 자신의 할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간 <초대교회 사람들>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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