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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연 
 현대성서학 연구:난외(欄外)의 전망- 2008년 2월 20일 출판


페르나도 세고비아 지음/ 박노훈 옮김/ 255쪽/ 10,000원

지난 사반세기 동안 성서학은 성서비평의 개념과 실천 그리고 교수법에 있어 매우 큰 변화를 목도하여왔다 . 본서를 통해 세고비아 박사는 현재의 성서 교육에 등장한 다양한 모델들과 그 실제를 분석하고 , 비서구권의 목소리에 큰 관심을 표한다 . 라틴아메리카와 흑인, 여성 그리고 제 3세계의 성경읽기에 담긴 주요 흐름들을 돌아보고 , 그간의 지배적 성서해석 유형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도전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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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 페르난도 세고비아는 20대 중반에 노트르담 대학교에서 신학박사를 취득한 이후 줄곧 성서학의 방법론 및 비평이론에 천착하여 왔다. 성서학자로서 요한복음 연구 및 초기 기독교사 연구, 신학자로서는 비서구세계 및 제3세계의 신학, 그리고 문화학자로서 디아스포라 및 탈식민주의 연구로 탁월한 기여를 하였고, 미 성서학회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까지 JBL 및 JSNT, SEMEIA STUDIES 등 다수의 신학저널을 편집하기도 하였다. 본서에서 세고비아는 지난 25년간 겪어온 성서비평의 개념 및 실제, 그리고 교수법에서의 급격한 변화를 분석하며, 특히 비서구 사회의 커져가는 목소리들에 대하여 조명한다.

[역자 소개]

박노훈: 연세대학교, 서울신학대학원(M.Div.), 예일신학대학원(S.T.M.), 밴더빌트대학원(Ph.D. Candi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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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 이 매혹적인 저서에서 페르난도 세고비아 박사는 최근의 성서 연구에서 나타난 방법론적 , 해석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들을 진단하고 , 그 다양한 연구들을 세분하여 매우 설득력 있게 평가하고 있다. 요컨대, 본서는 성서학의 전망과 도전을 매우 탁월하고 대담하게 묘사한다 . 성서비평의 현재와 미래에 관심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꼭 접해야 되는, 널리 활용되어야 할 역작임을 확신한다 ."

                                  엘리자베스 피오렌자 (Elisabeth Schssler Fiorenza), Harvard Divinity School

" 이 탁월한 연구서는 학문으로서의 성서학에 관하여 지난 20 세기 후반에 쓰여진 가장 중요한 논문들을 함께 모아놓은 것이다 ….본서가 모든 성서학자와 교사 및 학생들에게 읽혀져할 할 이유는 바로 우리의 과거와 미래를 사려깊은 분별과 명징한 평정심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

                                                      메리 앤 탈버트 (Mary Ann Tolbert), Pacific School of Reli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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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한글판 서문]

나는 본서 <현대성서학 연구: 난외(欄外)의 전망>의 한국어판 서문을 요청받고 매우 큰 기쁨과 겸손한 마음으로 즐거운 회상에 잠겨 있습니다. 내가 본서의 출판에 즈음하여 갖는 큰 기쁨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만, 이는 무엇보다 많은 수고와 정성이 깃든 노력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번역은 커다란 인내와 세심한 관심을 요구하는 매우 힘들고 정교한 작업입니다. 이를 아마도 지속적인 사랑의 노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술된 책은 그것이 현지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사회, 문화의 체계와 관계를 맺으며 더욱 새롭고 의미 있는 대화를 불러일으킵니다. 교회와 신학의 두 영역에서 뛰어난 역사를 이루고 있는 한국의 독특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로서 나는 이 같은 번역의 출간이 이제는 세계화된 세상과 오늘의 교회 현장 속에서 보다 더 의미 있는 대화를 이끌어 내는 확대된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같은 대화는 그동안 서구세계를 통해서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던 이전의 대화와는 다른 다중심적이며, 다각적인 성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한편 내가 겸손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는 많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나는 한국의 신학에 대하여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습니다. 특별히 민중 신학의 전통과 그 전통이 불러일으킨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에 대한 관심은 매우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같은 신학적 기여가 서구중심을 떠나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발전되어 온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탈식민주의와 자유를 위해 끝없이 노력해 온 그 여러 목소리들 중에 내 작은 소리 하나도 보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제가 품게 되는 또 다른 겸손의 이유는 그 많은 정치적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한국인의 끈기와 결속에 대한 감탄 때문입니다. 일제 식민지의 오랜 지속과 한국전쟁이 초래한 민족적 참담함, 그리고 이어진 고통스런 분열과 엄청난 시련들을 끝까지 딛고 일어선 한국을 생각해 봅니다. 그 같은 희생과 노력에 대하여 저는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즐거운 회상에 빠져들 수 있었던 것도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그동안 신학대학원에서 혹은 성직(聖職)을 훈련하는 여러 기관들 속에서 많은 한국 학생들과 배움을 같이 하며 논문을 지도할 수 있었던 일을 커다란 영예와 특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예외 없이 이들 모두는 성직자와 신학자로서 자신이 부름 받은 소명, 곧 인간의 고귀함과 사회의 공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일에 매우 헌신되어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이들 하나하나가 타인의 본이 되는 학문적 동료요, 훌륭한 대화의 동지였음을 고백합니다.

비록 대한민국을 방문할 기회가 아직은 없었지만, 나는 본서가 먼저 소개될 수 있음을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본서의 번역자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나의 감사를 표현 할 수 있는 어휘가 많지 않으나, 이 경우 스페인어의 어떤 표현 하나가 적당하리라 생각됩니다. ¡Qué Dios se lo pague!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시길 바랍니다!) 여기에서의 보상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닌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베푸시는 하늘의 복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나로서는 이것이 적절한 감사의 표현이 되길 희망합니다. 출판과 번역을 도와주신 한국신학연구소와 함승우 국장님에게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한국의 모든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좋으신 은혜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페르난도 세고비아 (Fernando F. Segovia)
                                          Oberlin Graduate Professor of New Testament and Early Christianity
                                                                                                             Vanderbilt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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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한글판서문]

저자 페르난도 세고비아는 독실한 크리스쳔 신학자로서 성서해석이론과 문화연구에 조예가 깊은 미국의 대표적 성서학자입니다. 그는 남미 쿠바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고 20대 중반에 노트르담(Notre Dam) 대학교에서 신약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본서를 통해 저자는 19세기 중반부터 현재에 이르도록-특별히 자신의 학문적 여로(旅路)에서 목도한-그동안 변화하며 발전해 온 다양한 성서해석 이론들을 비평적으로 소고(溯考)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성서 교수법과 연관된 네 가지의 해석학의 전형(典型)들-곧 역사비평, 문학비평, 사회문화비평(혹은 사회학적 비평), 그리고 문화연구 등-에 대한 깊은 성찰은 서구의 성서학 전반을 되돌아보는 포괄적 개관 및 입문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서의 진정한 취지는 독자들로 하여금 성서해석의 전 과정 속에 녹아있는 본문과 해석 그리고 해석자의 역할 및 전망을 분명히 인식함으로써 성서해석의 결과에 대하여 스스로 마땅한 책임을 다하도록 격려하고자 함입니다. 이 과정에서 약자와 소외자와 눌린자들의 목소리에 대한 윤리적 예민함은 격려되고, 억압적, 지배적 해석학의 과거 모습들에 대하여는 깊은 반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21세기 기독교 신학의 새로운 전기에 놓여 있는 우리들에게 본서는 성서해석 및 교육에 대한 매우 실제적인 안내와 더불어 그에 따른 도전과 기회를 함께 제공하고 있습니다. 본서와의 의미 있는 대화를 통하여 독자들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공동의 믿음이 더욱 깊어지기를 희망합니다.

박 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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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현재의 이 저서는 지난 5년여 동안 저술된 여덟 편의 특정한 소론들을 하나로 모은 것이다. 하나의 장르로서 소론들의 모음은 다소 헐거운 것에서 부터 매우 집약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실로 이 점에 있어 어떤 전형(典型)은 없으며, 형태의 차이가 있다면 전적으로 그 같은 기획을 불러일으킨 상황과 목적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본서의 경우 그에 걸맞은 상황과 목적, 그 양자에 관한 설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1977년도부터 성서학이라는 전문영역에서 학자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당시는 전통적 역사비평 방법이 여전히 성서학 전반을 주도하던 시기였다. 또한 당시는 어떤 특정한 불협화음이 이 성서학 영역에서 처음 발생하여 서서히 그 목소리를 높여 가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나는 그러한 소리를 막연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그 같은 현상은 몇 년 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실로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나는 성서비평의 개념과 실제, 그리고 그 교수법의 근본적 변화들을 교육의 현장에서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 이 변화들은 나 자신에게도 상당한 부분의 변혁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다수의 다른 학문 분야에 대한 오랜 기간의 폭넓은 독서와 내 자신의 주 전공인 성서학의 토대 및 목표들에까지 깊은 성찰을 요하는 것이었다.
   그 후 나는 학자들의 해석이 갖는 개별적 관심사가 아닌 그들이 내어놓는 그 해석의 주된 모델들을 통해 그리고 그 근간이 되는 해석의 원칙뿐만 아니라 방법과 이론의 측면에서 본 서로 다른 모델들의 상호관계를 통해 성서비평의 전(全)행로를 기록하기로 하였다. 이를 통해 성서학과 나 자신에게 일어난 그 모든 변화들을 감수(甘受)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내가 이를 개념화하고 명확히 하면 할수록 분명히 깨닫는 것은 내가 목격한 것이 탈식민지화와 해방의 한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개념의 사용이 나로서는 전혀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나는 비서구 세계와 서구에 거하는 비서구 디아스포라인 양쪽 모두의 후손으로서, 내 자신의 상황과 그 전망을 더욱 영민하게 인식해 가던 차였다.
   나는 내 자신의 출생과 사회화의 주요한 무대가 되었던 라틴 아메리카의 배경으로 보거나 혹은 망명과 더불어 이차적 사회화의 주된 무대가 되었던 미국 내의 소수 민족/인종의 일원으로 보거나, 학문의 출발점에 서 있던 당시의 나는 그야말로 소수의 성서학자 그룹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사실 비서구 세계의 신학적 담론이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과 같은 방식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입문의 시기 이후 어떤 급진적 변화가 성서학을 포함하여 기독교 연구의 전반에 걸쳐 거대한 스펙트럼 속에서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비서구권 출신의 학자들이 더욱 더 성서비평과 신학 일반의 영역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미국 내에서는 민족적, 인종적 소수자들의 수가 빠른 속도로 점증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탈식민지화의 연구 노력이 이룬 개화(開花)와 해방에 관한 연구의 확장과 다양화는 근래에 비로소 목도할 수 있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로서는 성서비평의 지난 행로를 묘사하며 탈식민지화와 해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매우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성서학과 나 자신의 궤적을 함께 들여다보며, 성서연구와 탈식민지연구 사이의 교차점을 심중히 돌아보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 저서는 그 같은 노력의 결실로서 여덟 편의 소론 형식으로 구성된 비평적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처음의 네 편-주: 이 네 편 가운데 수록되지는 않았으나 연관된 다른 두 논문들 중에는 디아스포라 해석학에 대한 것과 간문화(intercultural) 비평에 대한 것이 있음-은 본래 성서비평의 행로에 관한 연구서의 일부로서 의도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진행되어 온 다수의 학자들과의 공동 작업으로 인해 일부는 각기 다른 공간에서 먼저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제 본서에서 이 모든 논문을 함께 대할 수 있게 된 것은 나로서는 즐거움-곧, 최초 기획의 부분적 수행-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위에 언급한 두 편을 생략하였기에 이를 부분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 논문들은 여기가 아닌 또 다른 연구서에서 더욱 적당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리라 믿는다. 후반부의 네 편은 더욱 진전된 공동기획의 결과물로서 전반부 네 편에 대한 논리적 확장에 해당되는 것이다. 예컨대, 후반부의 처음 두 편에서는 성서비평과 탈식민지화 및 해방의 전지구적 과정 사이에 놓인 상호관계에 대해 논하는 반면, 마지막 두 편에서는 성서학과 그 전문성에 있어 비서구권 목소리의 지위와 역할을 더욱 세부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전반부 소론들과 더불어 이 같은 후반부의 논리적 구성은 나로서는 하나의 통찰-지난 수년에 걸쳐 비평가로서 내 자신의 연구가 반영하고 있는 발전적 통찰-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독자들이 그 적절함을 발견할 수 있다면 내게는 퍽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두 여덟 편의 소론들을 나는 다음의 네 부분으로 정렬했다. 처음 제1부에서는 학문으로서 성서비평의 최근의 궤도-“해석의 주요한 모델들과 전략들”-를 추적하는 일을 다루고 있다. 제2부에서는 그 같은 궤도 속에 수행되고 있는 교육적 담론들과 그 실제-“교육의 주요한 모델들과 전략들”-에 대한 연구를 담고 있다. 제3부는 성서비평과 탈식민주의 연구 사이의 접점-“성서 연구와 탈식민주의 연구”-을 탐색하고 있다. 제4부는 사적(私的), 일반적 모든 차원에서 성서비평의 “다름(혹은 타자)”에 관한 질문들-“바깥 세계로부터의 목소리들”-을 탐구한다.
   전체적 구성 및 조합에도 불구하고 어떤 반복되는 부분이 이러한 종류의 기획에 불가피하게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현재 이 저서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비록 하나하나의 단편이 갖는 구조와 일관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중복을 최소한으로 유지하고자 하였으나, 어떤 반복이 남아 있다면 그에 대하여는 독자의 친절한 관용을 얻고자 한다. 본서에 담긴 소론들은 다른 곳에 수록된 최초의 형태들과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집자의 작업을 최소한으로 제한하였는데, 단 일련의 도서목록 구성, 참조 자료의 업데이트, 그리고 중복을 피하기 위한 생략 등과 관련하여 일정한 변화를 동반하고 있다.    
   나는 본 연구서의 제목으로 현대성서학 연구: 난외의 전망으로 정하였다. 이 제목은 각각의 소론들과 전체의 구성 속에서 발견되는 주제로서, 앞에서 언급한 주제, 곧 성서비평의 학문이 지난 사반세기 동안 목도해 온 논쟁-즉, 이론적/방법론적 다양성과 사회문화적 다양성, 이 양자 속에 공히 담긴 탈식민지화와 해방의 과정-을 두드러지게 표현한 것이다. 부제목은 그 같은 주장을 내어놓게 된 전망과 더불어 본 연구서의 탈근대적 입장을 함께 전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성서학의 발전과 최근의 궤적에 대한 내 자신의 전망이자 정리와 구성이라 할 것이다.
   때로 나는 많은 이들로부터 다양한 저작들 속에 흩어져 있는 여러 소론들을 하나로 모아줄 것을 요청받곤 하였다. 현재의 연구서는 이것을 현실화한 최초의 작품으로서 그 같은 바램이 만들어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비록 현재의 저서가 각기 다른 구성요인들과 더불어 지난 수년 동안의 확장된 기획을 드러내고 있을지라도, 그 같은 요청들에 대하여 현재의 결과를 생각하며 매우 큰 감사를 표하는 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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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에서.....)

제2부 교육의 주요한 모델들과 전략들

1

현대성서비평의 교육학적 담론과 그 실제

   20세기 성서비평의 담론에 대한 이전 분석에서 나는 현대 성서비평의 세계가 각각 그 자신의 독특한 담론 양식과 해석 입장의 광대한 스펙트럼을 지닌 네 가지 주요한 경쟁적 패러다임들(혹은 포괄적 모델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그려 보았다. 이러한 네 가지 패러다임들을 다음과 같이 구별 했는데, 그것은 역사비평, 문학비평, 문화비평, 그리고 문화 연구이다.
   나는 이러한 해석의 포괄적 모델들이 현재 세기의 전환점에서 이 학과 전체에 대해 도식화 했던 “구획”이나 특별한 발전 과정에서 비롯된 결과이고, 이 학과의 공적인 무대에서 다른 수준의 경쟁을 체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다양한 경쟁 준비 상태를 나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첫째로, 전통적으로 이해되고 수행된 역사비평은 매우 약화되어 거의 절대적인 지배권을 누리던 이 전의 옥좌에서 내려앉은 상태이다. 그리고 그 자신의 방법론적인 전략들과 이론적인 토대들에 대해 어떻게 제대로 방어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둘째로, 역사비평이 차지했던 그 옥좌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독창적 방법론 두 가지는 문학비평과 문화비평이다. 이 둘은 역사비평에 대해 날카롭고 성공적인 도전을 제기한 이래 이 학과 내에서 완전히 둥지를 텄고, 방법과 이론 양자에서 완전히 세련된 모습을 갖춤으로 학문간 대화와 교환에서 상당히 활기를 띠게 되었다. 끝으로, 이제 갓 출현한 문화 연구는 근본적으로 혼혈아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문화연구는 문학비평과 문화비평에 의해 이 학과에 도입된 방법론적이고 이론적인 엄청난 변화들의 산물이고, 또 한편으로는 다른 모든 고전적인 신학 영역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학과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인구 통계학적이고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의 결정적 변동의 결과로 태동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결정적 변동이라 함은 철저히 서구 남성 성직자의 영역이었던 곳에 침투해 들어온 외부인(서구 여성들, 비서구 비평가들과 신학자들, 그리고 서구에 거주하는 비서구 소수자들이다)의 계속적 증가를 말한다. 네 가지 패러다임들 사이의 경쟁적 상태에 대한 이와 같은 평가는 유럽보다는 북미의 사정을 더욱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여기저기서 현저한 예외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여러 면에서 “옛 세계” 즉 유럽은 미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미 다루어서 해결하고 넘어간 문제들과 이제 막 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더 나아가 나는 네 가지 패러다임들 모두에 이런 저런 방식으로 영향을 끼친 여섯 가지 기본적인 요소들(혹은 원칙들)의 비교 분석을 통하여, 해석의 포괄적 모델들 각각의 구성과 활용에 영향을 미친 다수의 근본적인 전제들을 표면에 드러내어 풀어 보려고 노력해왔다. 그 여섯 가지 기본 요소들은 의미의 소재, 읽기 전략, 이론적 토대들, 독자의 역할, 신학적 전제들, 그리고 교육학적 함의 등이다. 메타이론을 소개함에 있어 이러한 연습의 주요 목적은 모든 단계마다 오늘날 이 학과의 전문적인 실천자들에게 주어진 다양한 선택지와 선택들을 최대로 간략하게 개관하는 것이다. 이 선택들과 선택지들은 두말할 필요 없이 비평가가 지닌 이 학과의 이해와 실천에 대한 즉각적이고도 불가피한 결과들을 알려주는 신호들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주장한 바와 같이 지금 상황은 1970년대 중반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예를 들어, 지배적인 패러다임(역사비평) 내의 방법론적인 다양성이 동일한 담론 양식에 속한다는 점에 대체적으로 합의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방법론적 다양성은 (1) 담론 양식에 있어 광범위하게 다른 특징을 보이는 패러다임의 다양성, (2) 이전의 지배적인 패러다임 내에 존재하는 것 보다 조절하고 초월하기 훨씬 더 어려운 종류의 각 패러다임내의 방법들과 이론들의 다양성, 그리고 (3) 모든 패러다임들을 가로 지르는 이데올로기 문제를 전면에 드러내는 해석의 다양성에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환이 이 학과에  유익한가, 혹은 무익한가의 문제와는 별개로-저자주: 결국 그것은 매우 개인적이고 컨텍스트에 좌우되는 판단이 될 것이다-그러한 전환이 가지는 함의와 부수적 의미들이 모든 비평가들의 비평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철회될 수 없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보다 명백하며 지속적인 고찰을 요구한다.

● 우리는 고대 본문들-실제로 “고대” 그 자체인-에 어떤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며, 왜 그     렇게 해야 하는가?
● 비평가로서 성서비평가의 역할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 성서비평과 인문학/사회과학과의 관계는 무엇이며, 성서비평과 다른 신학영역과의 관계     는 무엇인가?
● 성서비평가와 교회의 관계, 성서비평가와 다른 종교 전통과의 관계, 성비비평가와 다른     종교전통에서 통용되는 비평 양식들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 성서비평가가 세상과 사회에 대해 가지는 관계는 무엇인가?
● 성서 해석의 윤리적, 사회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책임은 무엇인가?
● 오늘날 이 시대에 성서비평 교육은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가?

각 질문들의 중요성과 비중을 고려할 때 이러한 문제들을 성찰하기 원하는 비평가는 질문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숙고해 나아가야지, 이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는 다른 특별한 방법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허사이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 나는 그 마지막 질문-성서비평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초점을 두기 원한다. 이미 앞서의 장들에서 나는 네 가지 성서비평 패러다임들의 핵심을 개관 할 때 여섯 가지 중심 항목별로 각 비평 패러다임을 설명한 바 있는데, 마지막 여섯 번째 항목으로 이 성서비평 교육의 문제를 표면화하여 논의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두 단계로 나누어 설명을 해 보고자 한다.
   먼저, 나는 첫 세 가지 패러다임들 (역사비평, 문학비평, 문화비평) 각각이 함축하고 있는 고유한 교육적 담론과 실행을 더욱 체계적인 방식으로 조사해 보고자 한다. 처음부터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이 분석 작업에는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상당한 장애물이 놓여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위 세 가지 패러다임 중 어느 것과 관련해서도 성서비평 교육의 문제가 정식으로 제기된 적은 거의 없으며, 그 문제가 제기될 때조차도 명시적으로 다루어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장애물의 존재가 의미하는 바는 내가 제안하고자 하는 분석 작업이 그동안 주로 암시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던 것을 명백하게 만드는 작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분석 작업을 통해 나는 각각의 패러다임이 전제하고 있는 교육적 담론과 실행들을 표면에 드러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전적으로 연역적인 작업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귀납적으로 회상하는 작업의 성격도 지니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완전히 문외한으로서도 아니고 참여적 관찰자로서도 아닌, 잘 알고 있는 내부인으로서 이 문제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우연히도 나는 이 학과가 새로운 성서비평 패러다임들을 개발하고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그 패러다임 각각의 연구자요 실행자로서 그 과정에 참여해 왔기 때문에 이러한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다.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각 패러다임의 이상과 목표를 구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들의 저서에서 이러한 이상과 목표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는 여러 개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연역과 회상을 통한 이 분석 작업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대화 상대자가 될 사람들은 모두 각각의 패러다임들의 주요 대표자들이자 뛰어난 대변인들에 해당한다. 힘주어 말하지만 이 작업에서 나의 목표는 잘라내고 태우고 뽑아내고 파괴하는 초토화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내가 많이 배워왔고 그들의 저작들에 친숙해 질 기회가 있었던 바로 그 사람들과의 비평적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서구 자본주의와 팽창주의가 성행할 때에 맞추어 출현하게 된 까닭에 성서비평은 무자비할 정도로 "용맹스런" 투쟁을 신봉하며 너무나도 일상적으로 그와 같이 자르고 태우고 찢고 파괴하는 일들을 자행해 왔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두 번째 단계로 나는 최근 문화연구 패러다임의 영역 내에서 성서비평 교육의 새로운 방향성에 대한 제고를 요청하기 시작한 다양한 목소리들과의 대화를 앞서와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할 것이다. 이때에 나는 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확장되고 있는 방법론적, 이론적 장치들과 점증하는 세계화 현상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분석의 목적은 이 학과에 대해 제시된 다양한 진단들과-이 학과의 현재 상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그에 상응하는 처방들을 분석하는 것이다.
   내 정의에 따른다면 그 자체로 간문화(intercultural) 비평의 중심적 구성 요소라 할 수 있는 이중적 분석과 관여는 두 가지 기본적인 목적을 갖는다. 하나는 새로운 세기에 직면하여 이 학과의 교육적 논의가 갖는 방향성과 경향을 드러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 연구의 관점에 비추어 내 자신의 건설적인 교육적 제안을 위해 사전 준비를 하는 것이다.

                    
                  1) 역사, 문학, 문화비평에 담긴 교육학적 담론과 그 실제

                               역사비평    

   1장에서 역사비평에 깔려있는 교육철학적 모델에 대한 예비적 평가를 시도하면서, 나는 다수의 기본 원칙들과 함의들에 대해 관찰 할 수 있었다. 첫째, 이 모델은 박식한 교사가 지식을 전수하고 학생이 수동적으로 그 지식을 수용하는 형태를 보여준다. 보편적이고 학식 있는 독자-구성 이라는 교육 목표에 맞추어 이 모델은 올바른 방법론적 도구들의 적절한 전파와 획득을 통해 독자들/학생들이 자신들의 사회문화적인 정초(moorings)나 신학적인 이해에 영향을 받지 않는 학식 있고 보편적인 교사들/비평가들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학식의 전수에 대한 강조를 고려할 때 이 모델은 학문적 계보(누가 누구를 낳았는가? 어느 학교에서 누구와 공부했는가?)와 비평적인 사회적 방언(본문에 대한 적절한 접근: 부적절한 접근)의 견지에서 서로 명예를 다투는 피라미드식 구조를 보여주며, 매우 권위적이고 전형적인 가부장적 성격을 보여준다. 셋째, 다시 한 번 보편적이고 학식 있는 독자-구성이라는 교육 목표와 관련해 생각해 볼 때, 이 모델은 역사비평의 예비 실행자들과 신봉자들의 가입 의식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서 비인간화의 과정을 필요로 하게 된다. 학생/독자들은 그들 자신을 독자들로 읽지 않는 방식을 배움으로써 교사/비평가가 될 수 있다. 자신들을 독자로서 읽어내는 일은 자신들의 신학적 전제들을 표면화시킴으로써 그 전제들을 적절하게 확인해낸 후에 해석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제거하기 위한 목적에 한해서 허용된다. 결국 이 모델에서 나는 학생들/독자들이 본문과 그 의미의 설명을 위해 교사/비평가를 의지하게 되는 구조에 머물러 있게 된다고 결론 내렸다. 이 모델에서는 단지 과학적 도구들의 획득과 사회문화적인 변수들의 제거를 통해 적절히 활성화되고 배양된 이성의 목소리만이  해석의 문제에 관해 권위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역사비평과 관련한 대화상대자로 조셉 피츠마이어(Joseph A. Fitzmyer, S.J.)를 선택했는데, 몇 년 전에 그가 현대 성서비평의 문제를 특집호로 다룬 신학 연구(Theological Studies)에 기고한 논문을 중심으로 대화를 시도하고자 한다. 이 연구에서 피츠 마이어는 역사비평에 제기한 네 가지 도전들과 관련하여 간결하고 예리하고 활력 있는 방식으로 역사비평을 변호하고자 시도한다. 그 네 가지 도전은 다음과 같다: (1) 로마 카톨릭 그룹 내의 순수주의: 역사비평은 모더니즘에 사로잡혀 있고 성서가 “하나님 말씀"이라는 특성을 과소평가 한다; (2) 로마 카톨릭 그룹 내의 자유주의: 역사비평은 전통적, 민속적 카톨릭주의의 종말을 대변 한다; (3) 신학적 비평: 역사비평은 본문의 최종 형태에 어떤 관심도 보여주지 않는다. 본문의 문학적 특징들, 정경 내의 위치, 그리고 신학적인 의미들에 주목하지 않는다; (4) 개신교 그룹 내의 근본주의: 역사비평은 기록된 말씀의 권위와 본문의 영감을 무시함으로써 기독교 교리의 근본을 저버린다. 그러나 매우 흥미 있는 것은 이 논문이 1989년에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에서 피츠마이어는 학문적 비평 전통 내에서 제기된 어떠한 도전도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변호 그 자체는 역사적인 궤도, 읽기 전략, 이데올로기적 전제, 그리고 교회론적 역할 같은 역사비평 방법의 다양한 측면들을 건드리면서 폭넓게 수행된다. 나아가 변호는 종교 역사가와 기독교 신학자로서 비평가가 가지는 관점에서 수행된다. 이 관점은 두 가지 견해를 포괄하고 있는데, 하나는 비평이 역사적 재구성과 신학적 초보 연구(고대 기록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와 관계된 것이라는 견해이며, 다른 하나는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교리와 삶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오직 역사비평의 채널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그 말씀의 안내와 판단에 종속된다는 견해이다. 그 방어/변호는 또한 방법과 전제를 근본적으로 구분한다.  
   기본적인 핵심과 이어지는 정교화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는 방법 그 자체는 “중립적”인 것 즉 “전제”를 가지지 않는 특징을 지닌다. 고전 문헌학이 그 핵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본문의 성격(본문의 확정)과 역사적 성격(진정성, 통일성, 기록 연대와 장소, 문서의 내용, 기록의 계기나 목적)에 대한 질문들이 중심 문제로 다루어진다. 이러한 핵심을 넘어서 우리는 일련의 정교화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정교화는 엄격히 말해 역사비평의 한 부분을 형성하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과 연결을 가지게 되었다. 문학비평(구조, 스타일, 형태), 자료 비평, 양식 비평, 그리고 편집 비평이 그와 같은 정교화에 해당한다. 따라서 문헌학으로서의 역사비평이라는 관점에서 성서는 고대에 기록된 문서에 해당하며,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저자 자신들에 의해 의도된 의미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성서도 다른 고대 기록들과 마찬가지로 접근되고 분석되어야 한다. 즉 역사적 배경, 당시의 상황, 그리고 원래 기록된 언어 등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방법의 중립적인 성격을 고려할 때, 이 방법은 다른 전제들을 고려하면서 추구되어야 한다. 그 전제들 중 몇 가지는 이 방법을 부당하게 "부패시켰다"라고 일컫는 반면(예를 들어 19C의 합리주의적 분석 또는 도전; 루돌프 불트만의 비신화화하는 실존주의적 접근), 특별히 어떤 것은 피츠마이어(Fitzmyer)가 “문헌학 그 이상”이라고 칭한 제대로 된 “주석”으로 묘사 된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관점에서 정의된 이러한 주석은, 고대의 기록이기도 한 성서를 인간의 말로 표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을 것을 요청한다. 이와 같은 견해는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여러 전제들을 수반한다. 성경은 성령의 인도하에 기록되었고, 유대-기독교 유산에 대해 권위를 가지며, 교회와 구원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졌으며, 백성들의 “공동체적인 신앙-생활 내에서” 그 전승이 출현한 맥락 속에서만 적절히 해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석으로서의 역사비평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성서 속에서 역사적이고 유일하게 말씀하셨고, 그래서 인간의 말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가 지닌 적절하고 올바른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역사비평과 신앙을 전제한 접근이라는 조합이 요구된다.
   결국 피츠마이어는 이러한 접근의 교육적 함의가 무엇인지를 넌지시 내비친다. 요컨대 역사비평이 성서 자체에 의해 암시된 것처럼(벧후 3:15-15과 사도행전 8장) 독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부과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적절한 읽기와 해석이 가능하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역사비평 뿐 이라는 것이다. 역사비평이 함축하는 이와 같은 교육모델의 특징은 혼동될 수 없으며 앞에서 열거한 모든 예비적 관찰이 사실임을 확인해 준다. 그 예비적 관찰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학생/독자들은 비평가/교사가 되기 위해 고전 문헌학의 원칙들과 정교화 된 기술들을 철저히 숙달할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학생/독자들은 성서 해석자가 되기 위해 적절한 신앙적 전제를 소유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한편으로 학생/독자들은 고찰하고자 하는 시기와 영역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 즉 본문에 사용된 원어들, 당대의 상황들, 그리고 역사적 배경들과 관련된 전문 지식을 습득해야만 한다. 다른 한편으로 학생/독자들은 주석 전통, 그 주석 전통에 깔려있는 다양한 전제들, 그리고 적절한 성서 주석에 필요한 신앙적 전제들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정통해 있어야 한다.      
   둘째, 그러한 원칙들과 기술들 그리고 전문적 지식과 학식의 소유가 전제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교사/비평가들이 고대의 기록으로서의 성서의 의미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다. 같은 방식으로, 주석의 전통에 깔려있는 전제들에 대한 정통한 지식과 신앙적 전제들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요구 사항을 고려 할 때, 교사/성서 주석가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의 의미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다.
   셋째, 이러한 탁월한 지식과 학문적 수련은 비평가들로 하여금 객관적이고 공정한 연구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러한 지식과 학문적 수련이 비평가들로 하여금 사회적 위치와 이데올로기를 초월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원래의 저자들에 의해 의도된 본문(고대의 기록)의 원래 의미를 복원하도록 허용해 주기 때문이다. 유사한 방식으로 이러한 정통함과 신앙적 토대는 그들의 역사적 연구에 적절한 방향을 제시 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러한 정통함과 신앙적 정초가 그 연구를 건전한 논의의 맥락 속에 위치시켜주며, 또한 주석가들이 성서 저자들에 의해 의도된 본문(하나님의 말씀)의 온전한 의미를 복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출현하게 되는 것은 철저히 피라미드식 서열 구조를 보여주는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교육 모델이다. 이 모델에서 이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자로서의 교사/비평가는 고대 기록으로서의 본문에 담겨있는 역사적 신비들을 수집하여 학생/독자들에게 유포시켜야 하고, 신앙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자로서의 교사/주석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본문에 숨겨져 있는 신학적 신비들의 베일을 벗겨내어 학생/독자들에게 밝히 알려 주어야 한다. 또한 이 모델에서 교사/비평가는 본문의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 사회적 위치와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넘어서야 하며, 교사/성서 주석가는 본문의 온전한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역사적 상황 속에 자신들을 위치시켜야 한다.  
                                  
문학비평  

   문학비평에 깔려있는 교육철학적 모델에 관하여 나는 그 기본적인 원칙들과 함의들이 역사비평의 그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1장에서 언급 했다. 첫째, 이 모델 역시 세련된 전이와 수동적인 획득과 관련되어 있다. 처음에는 보편적이고 학식 있는 독자-구성체를 요구하고 이후에는 더욱 구체적이고 형식적인 독자-구성체를 요구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만약 올바른 신학적, 방법론적인 장치들이 적절히 보급되고 학습되기만 한다면, 모든 학생/독자들이 사회문화적인 정초나 신학적 설득에 영향을 받지 않는 교사/비평가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모델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둘째, 세련된 전이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를 고려할 때 이 모델은 문학적인 사회 방언(어떤 비평적 입장을 따랐는가?)과 외부적 권위(어떤 비평가들을 읽었는가?)라는 견지에서 서로 명예를 다투는 근본에 있어 고도로 피라미드식 계층 구조를 보여주며, 권위적, 전형적인 가부장적 성격을 보여준다. 셋째, 보편적이고 학식 있는 독자이든 구체적이고 형식적인 독자이든 어느 쪽 독자-구성체 개념을 사용하느냐 와는 상관없이, 이 모델은 모든 예비 실행자들과 신봉자들의 가입의식에 있어 현실의 독자들의 읽기를 계속해서 삼가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모델은 분명 비인간화화의 이상(ideal)에 집착한다. 현실의 학생/독자들은 그들 자신을 읽지 않는 법을 배움으로써 교사/비평가가 될 것이다. 본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과 본문 읽기에서 독자가 차지하는 역할이 상당하다는 사실에 대해 더욱 주목하게 되면서부터 확실히 약화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이 모델에서 학생/독자들은 본문과 그 본문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궁극적으로 교사/비평가들에게 계속적으로 의존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문학비평과 관련한 대화상대로 Mark Allen Powell의 작품을 다루어 보고자 하는데, 특히 Fortress Press에서 출판한 성서학 입문 시리즈를 위해 그가 집필한 서사비평에 대한 개론서를 참조하고자 한다. 이 책은 문학비평 자체 내의 다른 접근 방식들과 역사비평의 조명 하에 문학비평의 한 지류라고 할 수 있는 서사비평의 방법들, 목적들, 그리고 결과들을 설명하고자 하는 작품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연구는 공식적 변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비교 설명의 논조를 채용하는데, 이는 이 책을 집필할 당시(1990)에 문학비평- 그리고 분명히 서사비평-이 이미 이 학과에서 훌륭히 자기 입장을 굳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함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책의 주요 저술 목적은 서사비평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비평을 역사비평과 차별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차별화를 위한 이러한 시도는 종교 역사가와 기독교 신학자로서의 비평가가 갖는 관점에서 수행된다. 이 관점은 비평이 문학적 분석과 신학적 초보 연구(문학작품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 양자와 관련되어 있다는 견해를 포괄한다.  
   포웰(Powell)은 문학비평을 전통적 비평(역사비평: 역자 주)과 구별함으로써 시작 한다. 역사비평이 역사적 상황들의 견지에서 본문을 설명하고자 했다면 문학비평은 본문 자체의 문학적 특성에 초점을 둔다. 그 결과 두 가지 접근들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기본적인 차이가 쉽게 윤곽을 드러낸다. (1) 문학비평은 본문의 형성 과정이 아니라 최종 형태로 주어진 있는 그대로의 본문에 집중 한다; (2) 문학비평은 문맥상 흐름의 단절이나 이해불가능성 보다는 전체로서의 본문의 단일성과 일관성을 강조 한다; (3) 문학비평은 본문을 역사적 재구성을 위한 수단으로 보지 않고 본문 그 자체를 목적으로 간주 한다; (4) 문학비평은 진화 모델이나 발굴 모델보다는 해석의 의사소통 모델을 채택한다. 이 두 비평 방법이 본문에 대해 보여준 차이점들과 서로 다른 통찰에도 불구하고 포웰은 두 가지 접근들이 상호 대립적이라기보다는 상호 보충적 관계에 있다고 주장 한다. 즉 포웰의 주장은 문학비평이 역사비평의 정당성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본문을 문학작품으로 연구하기 위해 역사성의 문제를 유보한다는 것이다. 사실 포웰은 심지어 서사비평이 진정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내러티브에 의해 가정된 사회적, 역사적인 정황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포웰에게 있어 문학비평은 그것이 최종 형태의 본문을 분석의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역사비평에 대한 일종의 절정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음으로 포웰은 서사비평을 문학비평 자체 내의 다른 “읽기 방식들”-구조주의, 수사 비평, 그리고 독자반응 비평-과 구별 한다. 서사비평의 목적은 “내재된” 독자 즉 본문에 의해 전제되고, 본문 안에 존재하며, 본문으로부터 재구성될 수 있는 독자의 견지에서 본문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서사비평은 문학비평 내의 다른 흐름들과 쉽게 구별될 수 있다.  (1) 구조주의는 “능력을 갖춘” 독자 즉 본문을 뒷받침하는 심층 구조들과 코드들을 이해하는 독자를 주장 한다; (2) 수사 비평은 "의도된" 독자 즉 본문이 최초로 말을 건넨 독자를 선택 한다; (3) 독자반응 비평은 처음 읽는 독자 즉 순서대로 본문을 따라가며 읽어가게 되는 독자를 선호 한다. 본문접근에 있어 발생하는 이러한 차이와 다른 통찰에도 불구하고 포웰은 다양한 접근들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성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성을 암묵적으로 주장 한다. “내재된” 독자 개념을 통한 읽기를 분명 선호하지만 서사비평은 다른 접근들에서 사용되는 읽기 방법들의 타당성을 의문시 하지 않는다. 따라서 포웰에게 있어 최종 형태의 본문이 분석의 초점이 되기만 한다면, 그 본문은 수많은 다른 “읽기 방식들”에 종속될 수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사비평을 포함한 문학비평이 하나의 방법과 일련의 전제들을 수반한다는 사실은 앞서 살펴본 두 번의 차별화하는 설명의 시도에서 분명해졌다. 그것의 핵심적 원칙은 분명하다: 내재된 독자가 그렇게 읽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방식대로 본문을 읽는 것. 이러한 읽기 양식은 나아가 다음과 같이 묘사될 수도 있다. 첫째, 내재된 독자 즉 내재된 저자에 의해 구성되고 대화 상대가 되는 독자는 본문 자체가 제공하는 단서들에 근거해서 본문으로부터 재구성될 수 있다. 둘째, 이러한 읽기에서 독자는 본문에서 자신이 알고 있으리라 가정되지 않는 모든 사실은 그냥 지나치며, 본문에서 독자가 알고 있으리라 가정되는 모든 것은 알고 있을 것을 요구 받는다. 환언해서 이러한 읽기는 본문에 따라 독자가 질문할 것으로 가정되는 것들만을 추적하고 그 외의 질문들은 무시한다. 셋째, 이러한 읽기는 처음 읽는 독자를 반드시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는 독자를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읽기는 내재된 저자에 의해 본문에 도입된 다양한 내러티브 장치들을 좇아가야만 한다. 그러한 장치들은 이야기 및 강화(discourse), 다르게 표현하자면 내러티브의 내용(사건, 인물, 배경, 플롯) 및 내러티브의 수사학(관점, 내러티브의 차원들, 상징과 아이러니, 내러티브 패턴들)과 관계가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읽기의 목적은 내재된 저자에 의해 주어진 이야기를 본문 안에서 본문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내재된 독자라는 개념은 해석을 위한 확정적 표준들을 설정한다. 즉 모든 본문 읽기는 본문 자체 내에서 발견되는 지시와 기대들의 견지에서 정당화되는 것이다.        
     문학작품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서에 대한 포웰의 관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읽기는 더 깊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야기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경전으로서의 본문을 읽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서사비평이 신자들에게 주는 유익은 분명해진다. 첫째, 이러한 읽기는 시종일관 역사나 선사(prehistory)가 아닌 성서 자체에 초점을 두게 된다. 둘째, 이러한 읽기는 또한 자료나 전승들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의 권위 있는 본문으로 인정되는 정경 본문에 초점을 두게 된다. 셋째, 이러한 읽기는 계시가 과거에만 아니라 현재에도 본문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하도록 허용한다는 점에서 성령에 대한 기독교 교리와 또한 매우 일치한다. 끝으로, 이야기에 관한 집중을 통하여 이러한 읽기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변화의 문을 연다. 결과적으로 본문의 문학적 특징들에 빛을 비추어 줌으로써 서사비평은 본문의 사회 종교적이고 영적인 차원들-경전으로서 본문이 갖는 계시적이고 변화시키는 특성-을 활성화시킨다.
   전반적으로 포웰은 이러한 접근의 교육적 함의에 대해서는 간헐적이고 제한된 관심만을 보여 준다. 하지만 문학비평에 작용중인 교육 모델은 쉽게 밝혀질 수 있고 앞에서 언급한 다양한 예비적 관찰들을 사실로 확인해 준다.  
   첫째, 비록 이 방법이 어떤 점에서 전문적 독자들과 비전문적인 독자들을 서로 더욱 가깝게 만들어 준다고 할 수 있겠지만, 결국 학생/독자들은 교사/비평가가 되기 위해 문학비평, 특히 서사비평의 원칙들과 기술들을 숙달할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한 본문이 가정하고 있는 사회적, 역사적인 정황들에 대한 광대한 지식을 획득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동시에 신자들에게 그 방법이 가장 유익한 것으로 묘사된다 할지라도, 학생/독자들이 교사/비평가가 되기 위해 신앙적 입장을 소유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그 방법이 성서를 문학작품과 하나님의 말씀 양자로 간주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반면, 성서를 문학작품으로 읽기 위해 그것을 경전으로 간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둘째, 독자는 본문에 의해 전제된 사회적, 역사적인 정황들과 친숙할 뿐만 아니라 서사비평의 원칙들과 기술들에 정통할 것이 요구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성서가 문학작품으로 인정되든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든, 그 성서의 의미에 대한 열쇠는-본문 자체 내에 존재하는 상당한 정도의 모호성을 용인하면서-여전히 교사/비평가가 소유하고 있다. 이러한 숙달과 정통함을 통하여 교사/비평가들은 내재된 저자의 장치들과 의도를 좇아갈 수 있고, 본문의 적절한 이해-본문 그 자체에 의해 설정된 변수들 내에서 어느 정도의 의미 범위를 용인하면서-에 도달 할 수 있다.  
     셋째, 이러한 숙달과 정통함의 조화는 교사/비평가들을 사회적 위치와 이데올로기로부터 무관하도록 그 너머에 위치시키며, 그들로 하여금 그 내재된 저자에 의해 의도된 본문의 원래적 의미를 회복하도록 허용하는-본문 그 지체에 의해 도입된 모호성의 범위 내에서- 연구의 객관성과 공평성을 허용 한다. 동시에 신앙적 입장에서 작업하는 이들에게 있어 이러한 연구는 사회 종교적이고 영적인 측면 모두에서 즉각적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왜냐하면 본문의 이야기에 참여하고 내재된 저자에 의해 의도된 의미를 해독하는 확장된 과정 속에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성령의 계시를 위한 엄청난 기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교육 모델은 다시 한 번 고도의 피라미드식 계층 구조를 보여주며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다. 이 모델에서 교사/비평가는 학식 있고 보편적인(내재된) 독자의 목소리로서 본문의 문학적인 신비들을 포착해 그것들을 학생/독자들에게 드러내 주게 되는데, 그 신비들은 신앙 공동체의 회원들에게 사회 종교적이고 영적인 차원 모두에서 상당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이 모델에서 교사/비평가들은 본문의 원래적 의미에 도달하기 위해 사회적 위치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야 한다.

                                 문화비평    

   1장에서 문화비평의 기초가 되는 교육 모델을 처음으로 평가하면서 나는 그 기본적인 원칙들과 함의들이 역사비평의 그것들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을 지적 했다. 첫째, 이 모델은 다시 한 번 학식의 전수와 피동적인 수용을 포함 한다. 박식하고 보편적인 독자-구성체나 또는 박식하고 헌신된 독자-구성체를 요구하는 견지에서 이 모델은 만약 정당한 방법론적 도구들과 이론적인 장치들이 적절히 학습되고 획득될 때, 모든 학생/독자들은 자신의 사회문화적인 위치나 신학적인 성향이 어떠한 가에 상관없이 교사/비평가가 될 수 있다고 주장 한다. 둘째, 학식의 전수에 대한 지속적 강조를 고려할 때 이 모델도 마찬가지로 고도의 피라미드식 구조를 보여주고 권위적이면서 핵심에 있어서는 가부장적이다. 그러한 권위에 대한 경쟁적 주장은 학문영역의 사회적 방언(어떤 개별 학문영역을 따라가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외부적 권위(어떤 저자들이나 전통들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의 차원에서 개진된다. 셋째, 예비 실행자들과 신봉자들을 위한 가입의식의 한 부분으로서 이 모델은 기존에 통용중인 독자-구성체 개념에 의존하면서 현실의 독자들에 의한 어떠한 읽기도 삼갈 것을 요구하거나(저자주: 단지 사회문화적 전제들을 표면화하고 제거하며 문화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수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허용하는 경우는 있음) 또는 현실의 독자들에 의한 읽기는 사회 계급의 전망에 국한시키기를 요청한다. 사회계급의 관점에서 현실의 독자에 의한 읽기를 허용하는 마지막 선택지를 제외하면, 여전히 비인간화가 추구되어야 할 이상(ideal)으로 지배하게 된다. 다시 말해 학생/독자들은 자신들의 사회문화적 전제들을 전면에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읽지 않는 법을 배움으로써 교사/비평가가 되는 것을 기대하게 됨을 의미한다. 앞에서 말한 마지막 선택지의 경우, 모든 학생/독자들은 자신들을 읽는 법을 배워야 하겠지만 그것은 단지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범주에 국한시켜서 그렇게 해야 한다. 결국 나는 비록 사회 경제적 및 사회 문화적 특성들에 대한 관심의 증대로 인한 입장에 약간의 침식이 초래되기는 했지만, 이것은 학생/독자들이 본문과 그 의미의 설명을 위해 교사/비평가를 바라보는 또 다른 모델이라고 결론을 맺는다.
   문화비평에 대한 대화의 파트너로서 나는 말리나(Bruce J. Malina)의 저서를 살펴보고자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결국 사회과학 비평이라고 칭하게 된 것에 대해 최초의 주요한 모험에 대한 입문서 역할을 했던 그의 연구를 나는 마음에 두고 있다. 이 초기 연구는 역사비평에 의해 본문에 제기된 전통적인 질문들(몇 년 후 역사비평에 대한 그 자신의 방어에서, 피츠마이어가 제기했던 종류의 질문들)의 견지에서, 성서비평에 문화 인류학을 도입한 공식적인 변론에 해당한다. 비록 “문학적” 종류의 질문이 언급되었다 할지라도 말리나가 가졌던 문학적 관심은-저작 시기가 1981년임에도 불구하고-그 당시 매우 상승세에 있었던 문학비평에 의해 소개된 최근의 질문들이 아닌, 문학 형태와 스타일에 관한 역사비평의 전통적인 질문들과 관계된 것임이 분명하다.
   이 변론의 요점은 문화 인류학의 개념들과 모델들이 성서 연구에 기여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 인류학에 의해 제기된 기본적 질문들이 이 학과가 추구해야 할 정점일 뿐만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요소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전통적 인 비평이 무엇을,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역사적으로/문학적으로)와 같은 중요한 질문들에 답하고자 추구하는 반면, 문화 인류학은 문화 속의 의미를 규명하기 위하여 '왜'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 한다. 따라서 전통적인 비평은 문화 인류학에 의해 제공된 이러한 독특한 관점이 없이는 단지 매우 인상주의적인 방식으로 이 질문을 다룰 수 있을 뿐이며 따라서 민족 중심주의와 시대착오라는 이중 위험에 끊임없이 노출된 채로 남아 있게 된다. 변론 그 자체는 기독교 신학자로서가 아닌 종교사가로서 성서비평가의 전망에서 착수 되었다. 이 변론이 추구하는 것은 본문의 사회문화적 차원들에 초점을 둠으로써 더욱 정교화 된 종교사적 연구를 실습해 보는 것이다. 따라서 주요한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가 아닌 고대의 문화적 기록으로서의 성서이다. 결과적으로 이 실습의 목적은 이러한 본문들을 “먼 장소와 먼 시대”로부터 생성된 “이질적인” 본문으로 더욱 정확히 이해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말리나에게 있어 성서비평은 무엇보다도 먼저 교차문화적 이해를 위한 실습을 의미하며, 이러한 이해는 문화 인류학에 의지하지 않고는 불가능함이 입증 된다. 결국 말리나가 제안한 작업이 완벽한 역사비평을 위한  시도라고 기술하는 것은 아주 적절해 보인다.
   여기서 추구되는 교차문화 이해는 방법뿐만 아니라 전제들-모든 전제들이 적절하게 인식되지는 않는다.-과 연루된다. 논의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추적될 수 있다. 첫째, “그것들 자신의 관점에서”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현대의 독자들은 현대 세계와 고대 세계간의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간극을 교차 할 수 있다. 둘째, 그 어법 속에 구체화 된 본문의 의미는 본문이 나타난 사회체계로부터 비롯된다. 결과적으로 본문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의 배경이 되는 사회체계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셋째, 이러한 본문의 배경에 있는 사회체계의 이해를 위해서는 1세기 지중해 유역의 세계에서 작용했던 문화 이야기-문화적인 기록들, 단서들, 그리고 모델들-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넷째, 문화적, 역사적 간극을 가로질러 이 문화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석의 교차문화 모델에 의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모델들은 문화 이야기들 사이의 차이들이 날카롭게 정리되고 차별화되는 것을 가능케 함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화 이야기를 성서 본문 속으로 읽어 넣는 것을 피하게 해주고 따라서 “그것들 자신의 관점에서” 성서 본문들의 문화 이야기를 읽을 수 있게 해 준다. 끝으로 인간들은 이러한 모델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인들의 결과로 구성할 수 있다: (1)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경험의 모델들을 만들고, 문제의 다양한 모델들을 비교하는 인간들의 능력; (2) 그들 자신들이 변화한다는 인식; (3) 감정을 이입해서 다른 사람의 역할을 떠맡을 수 있는 그들의 능력. 요약해서 오직 문화 인류학만이 성서 연구를 위한 교차문화 모델을 제공할 수 있고, 오직 문화 인류학만이 이러한 본문들의 정확한 이해를 위한 열쇠를 제공 할 수 있다.
   시종일관 말리나는 사회과학 비평의 교육적 함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여기서의 정열적인 질문은 현대의 학생/독자들이 이러한 “이질적” 본문들 그리고 그 배경에 있는 “외국인들”에 대해 어떻게 정확하고 공평한 읽기와 해석을 성취시킬 수 있는가 이다. 그 결과로서 생기는 교육 모델은 아주 분명하며 앞에서 열거한  최초의 관찰을 따른다.
   첫째, 학생/독자들은 역사비평의 원칙들과 기술들을 숙달함으로써 그들은 전통적인 비평에서 특징적인 모든 중요한 질문들을 끊임없이 물을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 문화 인류학의 개념들과 모델들-특히 당대 지중해 사회나 다른 유사한 사회들의 연구에서 끌어낸-을 완전히 정통하게 됨으로써, 그들은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곳으로 나아 갈 수 있다. 그러나 학생/독자들은 교사/비평가가 되기 위하여 올바른 신앙적 입장을 소유할 필요는 없다. 사실상 그들이 이러한 본문들을 과거의 문화적 유물들로 보건 아니면 경전으로 간주하건, 학생/독자들은 1C 지중해 사회의 연구 그리고 현대의 지중해 사회와 다른 문화적 유비들의 인류학적 연구 양자에서 광대한 전문적 지식을 발전시켜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그들은 자료와 모델들 간의 적합성을 설립하고, 이러한 본문들의 공평하고 적합한 이해를 얻기 위해 고대 본문들의 실재에 비추어 문화 인류학의 교차문화 모델을 시험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문화 인류학의 개념들과 모델들에 대한 그들의 정통함뿐만 아니라 역사비평의 원칙들과 기술들에 대해 주어진 그들의 숙달이 요구됨을 고려 할 때, 교사/비평가들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되건 고대의 기록으로 인식되건 성서의 의미에 대한 열쇠를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 이러한 숙달과 정통함을 통하여 교사/비평가들은 본문의 배경에 있는 사회체계와 문화 이야기에 대한 것 뿐 아니라 본문들의 정확하고 공평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셋째, 역사비평과 문화 인류학 양자 모두에 대한 이해는 교사/비평가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사회체계와 문화 이야기의 전망으로 그들 자신을 읽도록 허용하고, 자기민족 중심주의와 시대착오의 수렁에서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본문들 배경에 있는 사회 체계와 문화 이야기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 본문들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이해에 있어서의-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분할을 가로질러-객관성과 공평성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사실상 학생/독자들의 인간화는 비인간화를 향한 도구로 기여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학생/독자들은 그들 자신의 사회체계와 문화 이야기를 표면화시킨 연후에 그것을 괄호로 처리함으로써 정확하게 감정을 이입시켜 현재와 과거 모두의 “외국인들”을 읽어 낼 수 있게 되고, 사회적 위치와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교사/비평가들이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교육 모델은 아직도 여전히 고도의 피라미드식 구조를 보여주며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이 모델에서는 교사/비평가가 박식하고 보편적이고 자기 계몽적인 독자의 목소리로서 본문의 사회문화적 신비들을 포착하여 그것들을 학생/독자들에게 중개한다. 이 모델에서 교사/비평가들은 본문의 의미에 도달하기 위하여 자기인식을 통해 사회적 위치와 이데올로기를 초월 한다.

                  2) 변화에 대한 최근의 요청: 문화연구          

성서학 영역을 위한 역사비평, 문학비평, 문화비평의 교육적 함의는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다. 나는 이제 이러한 실행과 담론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주장하는-다른 다양한 관점들로부터-과거 수년간에 출판된 다수의 연구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미 광대하고 끊임없이 확장되는 저서들의 양을 고려하면서 분석과 대화를 위한 다른 목소리들을 선택할 때 우리는 선별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이제부터 최근에 이루어진 발전의 견지에서, 특히 사회문화적 종류와 관련되고 가르침과 교육에 대해 상당한 강조점을 두고 있는 발전의 견지에서, 성서학 전반을 평가하는 일련의 대표적인 연구들을 채택할 것이다. 더군다나 서구에서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내 자신의 상황을 고려할 때, 나는 비록 이러한 논의가 전 지구적인 차원의 대화로 쉽게 확대될 수 있다 할지라도 대체로 미국 내에서 출현중인 논의에 집중해 보려 한다. 끝으로 나는 토론이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시간적 순서에 따라 우리가 살펴볼 연구물들을 배열할 것이다.

            
미국 흑인들과 학문의 장 - W. H. Myers(1991)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논의할 때 두말할 것도 없이 성서 연구에 있어서 미국 흑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해석학적 딜레마에 대한 마이어(William Myers)의 분석을 최우선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분석은 그 자체로서 이미 미국 흑인들의 성서해석의 문제를 다루는 포괄적이고 매우 성공적인 저술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 진단은 처음부터 아주 분명하게 표현 되는데, 성서 해석은 해석학적 소재들을 선택함에 있어서나 방법론적 관심을 추구함에 있어서나 해석의 역사 속의 특정 사건들을 강조할 때에 있어서나 심원하게 유럽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마이어의 이러한 진단은 특히 역사비평을 염두에 둔 것 이었다. 이러한 유럽 중심주의는 다음과 같은 직접적 결과들을 초래하게 된다. 우선 그것은 다른 많은 세계관들을 무시한 채 어떤 하나의 특정한 세계관을 고양시키게 되며, 그 시대의 뜨거운 논점들은 건드리지 않고 해석의 주요 과제들을 대체로 과거에 한정시키게 된다. 또한 유럽 중심주의는 해석의 다른 전통들을 고려에서 제외시켜 버리게 된다. 이러한 유럽 중심주의에 의한 성서와 그 해석에 대한 장악은 나아가 그들의 해석을 위한 특허 문서들과 규범들을 포함하여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문화체계에 대한 광범위한 유럽 중심적인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반영한다.  
   따라서 미국 흑인 비평가의 관점에서 볼 때 성서 해석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낯선 세계, 유럽 중심적 질문들과 관심사들이 다루어지는 세계에 들어감을 의미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외국인으로 여기지 않는 세계, 그 자신을 규범적이며 따라서 문화적 편견을 가지지 않았다고 내세우는 (유럽인의) 세계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그 결과는 근본적인 딜레마에 부딪힌다. 전적으로 매우 다른 해석 전승을 추구하며 성서학 내에서 유효하다고 인정되지 않는 전승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 낯선 흑인 비평가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한편으로 해방을 필요로 하는 억압받고 있는 미국 흑인 공동체를 위한 성서 해석의 타당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왜냐하면 성서는 이 흑인 공동체의 해방을 위한 전통적이고 강력한 도구로 기능해왔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유럽 중심적 접근이 해석 과제를 수행함에 기여한 바를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된다.  
   마이어는 계속해서 이러한 딜레마가 일반적인 신학 교육의 유럽 중심적 특성에 의해 강조 된다고 보았다. 그 특성은 유럽 중심적 교과과정의 절대적 지배, 미국 흑인 동료들의 결핍, 대안적인 모델들과 자원들의 부족, 변화에 대한 철저한 저항, 그리고 전승을 해석적 접근과 동일시하는 오랜 습관에 의해 드러나고 있다. 그 딜레마는 또한 미국 흑인 집단들의 외연 너머로 확대된다. 실제로 제3세계와 제1세계의 소수자들의 전망에서 볼 때 다른 사람들은 그 본문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고려하지 못하는 한 전통적인 접근은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유럽 중심적 경계 외부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있어 현재 상황에 내릴 수 있는 진단은 딜레마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이어에게 있어 변화를 위한 적절한 전략들에 대한 미국 흑인 자신들 내에 의견차이가 있음을 고려할 때, 치료를 위한 처방은 아직도 이 시점에서 완전히 명백하지 않다. 결국 마이어는 몇 가지 지침이 될 만한 원칙들을 제안하는 정도에 그치게 된다. 그 해결책은 (1) 미국 흑인 학자들 그룹 내부로부터 나와야 하고; (2) 대체로 상황적인 조사와 간학문적 조화의 조합을 대변하게 될 것이고; (3) 대체로 균형 잡힌 긴장을 유지하는 다양한 방법론의 채택을 수반하게 될 것이며; (4) 유럽, 유럽계 미국, 그리고 제3세계 출신의 비평가들과 대화하는 것을 포함해야 하고; 그리고 (5) 교육적 내용과 학문적 집회의 재조직을 수반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마이어는 그 최종적인 형태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과정과 그 최종적인 형태의 기능의 관점에서 보다 넓은 규범 개념을 요구한다. 마이어는 그렇게 함으로써 규범의 개념이 다른 신앙 공동체들의 그 규범 개념에 대한 접근들을 포함하는 데로 확장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유럽 중심주의의 외부에 있는 모든 자들을 마주 대하고 있는 그 해석학적 딜레마 뿐 만 아니라 본문과 그 해석에 대한 유럽 중심적 장악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지기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 한다.

              제3세계의 성서 연구 - P. J. Hartin(1992)  

   마이어의 연구보다 1년 뒤에 출현한 이 연구는 남아프리카(이 글이 쓰여 질 당시 남아프리카는 여전히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정책의 체계를 해체시켜가는 과정 중에 있었다)의 독특한 시각을 통하여, 특별히 거대 다수의 흑인 학생들이 그 구성원을 이루고 있는 큰 주립대학교의 맥락 속에서, 제3세계가 성서학의 교육과 관련하여 제기한 도전들을 다루고 있다. 이 연구가 제시한 진단과 처방은 즉각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데 그것은 남아프리카를 포함한 세계 도처에서 전혀 차별화되지 않은 동일한 방식으로 교수되어온 이 학과가 이제 해당 학생들의 필요와 상황-남아프리카의 경우 그것은 다문화와 다종교 사회의 현실과 관계 된다-을 고려하기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본질상 이중적인 교수 유형을 요구 한다. 한편으로 이 유형은 성서에 관한 정보의 보급과 흡수에 초점을 두는 대신, 성서가 학생들의 삶에 말을 걸도록 요구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 유형은 특별한 접근이나 문화적 이해를 성서 본문에 부과하는 대신에, 본문이 스스로 말하도록 허용 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의 목표는 “능력을 갖춘” 또는 “책임적인” 성서 학도를 배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역량은 두 가지 독특한 초점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학생들과 본문들이다. 첫째, 학생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능력 배양은 아프리카 전통 종교들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는데, 이는 그 전통들이 학생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둘째, 본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능력 배양은 본문들을 분석하는데 사용된 과학들에 부합하는 도구들과 방법들의 획득을 요구 한다. 셋째, 학생들과 본문들 모두의 관점에서 볼 때 능력 배양은 현실을 고도로 파편화된 것으로 바라보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헌신을 요구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러한 천착은 다양한 목적들에 기여 한다. 학생들과 관련하여 그것은 성서에 대한 어떤 하나의 문화적 이해를 절대시하는 것을 배제하는 것, 서로 다른 관점들을 가로질러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을 강조하는 것, 그리고 다른 민족들과 문화의 관점들에 대한 존중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의미 한다. 본문과 관련하여 그것은 다시 한 번 성서에 대한 어떤 하나의 접근 방식을 절대화시키는 것을 배제함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이러한 능력은 성서 본문에 대한 “실제 훈련”이라는 접근 방식에 의하여 분배되고 획득된다. 따라서 시종일관 교수의 초점은 성서 본문인데, 이 본문이야말로 이 학과내의 다양한 조사 영역에로 들어가는 진입점으로 사용 된다. 이러한 연구 영역들은 다시 커뮤니케이션 이론에 나오는 표준 모델의 주요한 구성 요소들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그것은 횡적 관점에서 볼 때 저자(생산), 본문, 그리고 독자(수용)의 순서를 보이며, 종적 관점에서 볼 때 본문과 참조의 관계를 말한다. 교수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먼저 독자로서의 학생에 대한 집중-학생 자신의 상황에서 수행되는 본문의 정밀한 읽기; (2) 생산과 참조 양자 모두의 관점에서 본문에 대한 집중; (3) 과거나 현재에 다른 독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본문의 수용에 대한 집중이라는 순서. 결국 결과는 과거와 현재 모두로부터 다문화와 다종교 사회 내에 처한 학생들 자신의 삶의 전망에서 산출되는 다른 읽기들과 나란히 함께 서게 되는 “충족적인” 읽기의 산출이어야 한다.    
   이러한 능력 배양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정치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 종교적이기도하다. 우선 배양된 능력은 성서로 하여금 상상력에 영감을 주도록 허용한다. 즉 학생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문화와 상황 내에서 성서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재상황화 하도록 허용한다. 그래서 그들 자신의 삶과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성서의 용어, 이야기, 내러티브를 통하여 구성되고 소통되게끔 이끌어 준다. 그 결과는 서로 다른 집단들과 문화들의 폭넓은 다양성을 반영하는 하나의 비슷한 상상적 재진술이 될 것이다. 그 모든 재진술은 동일한 메시지와 언어에 의존하지만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함에 있어 배양된 능력은 나아가 인간의 존엄, 정의, 그리고 평화와 같은 어떤 공통의 가치들을 동원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문화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방편으로 성서를 사용 한다. 하틴에게 있어 이러한 상황은 남아프리카가 겪는 진통을 해소하기 위해 오랫동안 갈구해 온 하나의 가능한 해결책을 대변한다.

               페미니즘과 식민정책 - K. O'Brien Wicker(1993)

   이 연구는 비록 간결하지만 그것이 페미니즘 운동의 맥락으로부터 문화의 문제-계급, 종족, 그리고 인종에 대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하틴의 연구보다 1년 뒤에 출판된 이 연구는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수행된 성서 개론 및 주석에 해당되는 두 권의 기념비적인 저작의 한 부분을 형성 한다. 여기서 개진된 이 학과에 대한 진단은 실제로 이중적인 것으로서 이 연구는 동시에 회고적이면서도 전향적인 시각을 보여 준다.  
   첫 번째 수준의 전제는 다음과 같다: 이 연구는 본문들의 견지에서나 그 본문들에 대한 해석 역사의 견지에서나 성서학 영역이 철저히 가부장적이었다고 간주한다. 이 문제에 대한 처방은 이미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성서 본문에 나오는 여성에 대한 구체적 강조점을 지닌, 그리고 성서 본문에 대한 여성들의 읽기 혹은 성차별적 읽기들에 대한 독특한 강조점을 지닌 여성학과 페미니즘 연구의 보다 폭넓은 학문적 담론을 반영하는 교육적 전략을 요구한다. 두 번째 수준의 전제는 짐바브웨에서의 체류를 통해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인데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이 학과는 가부장적 전망에서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의 전망 그 자체에서도 깊이 서구적이다. 처방은 계급, 종족, 그리고 인종의 논점을 고려하는 페미니스트 교육 전략의 발전을 요구 한다. 다시 말해 아프리카에서 타문화를 경험하게 된 결과로서 위커(O'Brien Wicker)는 이 학과가 깊이 식민주의적이었음과, 그리고 이러한 식민주의 내에서 서구 여성들 자신도 서구 남성들만큼이나 철저히 식민주의에 연루되어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처방은 중산 계층과 상류 계층 서구 여성들의 관심과 쟁점의 범위를 넘어서는 페미니즘을 요구하되 그것은 국제적인 전망을 마음에 새기고 본질적으로 포스트식민주의적인 페미니즘인 것이다.  
   교육과 성서 연구의 전통적인 식민주의 양태에 반대되는 것으로 발전된 성서 연구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다음의 원칙들을 고수한다: (1) 가부장적 세계관,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선천적 우월성의 주장, 그리고 사적 영역에 대한 공적 영역의 주도권에 대한 거부; (2) 부당하고 정당하지 않은 기독교 반유대주의 운동의 비난; 그리고 (3) 식민지화 과정에서 작용했던 것들과 같은 기독교 제국주의의 다른 역사적 표현들에 대한 저항. 다양하게 실행되고 있는 이러한 처방의 근본적인 목적은 성서와 같은 텍스트가 여성해방적일 수 있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모든 인종, 모든 종족적 배경, 모든 계급에 속한 여성들과 남성들의 온전한 인간됨을 어떻게 증진시킬 수 있는 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위커가 볼 때 페미니즘에 의해 취해진 결정적인 단계는 서구의 식민지화 정책의 범주에 발목이 묶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차별 문제, 여성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숙고의 범위를 넘어감으로써 인종, 종족, 그리고 계급 문제의 숙고를 포함하는 단계로 나아가도록 다음 조치가 취해져야만 한다. 따라서 이 학과가 방향성과 실천에 근본적으로 서구적인 것으로 남아 있지 않으려면 전 지구적인 시각을 획득해야만 한다.

        전지구적 조망 - J. R. Levison and P. Pope-Levison(1995)

   두 명의 공동 저자는 신약 연구의 방법론과 성서 해석학에 관한 개론서의 한 부분으로 전지구적 해석학을 주제로 하는 하나의 논문을 기고했다. 방법론에 관한 저작 속에 전지구적 해석학에 관한 논문을 포함하게 되었다는 것은 다소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그 사실 자체가 이 학과의 상황에 대한 예리한 진단을 제공하고 있다. 이 진단도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제1세계의 전망에서 볼 때 비평가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모든 편견을 내어버림으로써“ 성서의 ”본래의 의미“를 발견하는 자로서의 비평가-이 비평가 자신의 컨텍스트에서 비롯된 “예단”이 본문 이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널리 인정되는 한 더 이상 지지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다른 한편 제3세계의 전망에서 볼 때 기독교의 무게 중심에 있어 신속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 변화는 제1세계로부터 멀어지고 제3세계로 향하는 무게 중심의 이동인데, 숫자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 그 생명력에 있어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따라서 해석에 있어서 컨텍스트가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고려할 때, 이 학과가 현재와 현시대에 부적절하게 남아 있는 통탄할만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전 지구적 조망을 발전시켜야만 한다.
   저자들은 앞에서 묘사된 전통적인 모델을 대체해 온 것으로 여기는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변증법적 해석학을 이 상황에 대한 처방으로 추천하는데, 이는 서구적 영감을 받은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움직임의 효과와 함의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된다. 첫째, 성서의 최초의 의미나 해석의 현대적 컨텍스트에 초점을 두는 대신, 이 모델은 남/여 해석자가 자신들의 상황에서부터 나온 구체적 질문들을 성서에로 가져오는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고대의 본문과 현재의 해석자간의 대화를 강조 한다. 둘째, 이러한 대화의 목적은 과거에도 유효하며 현재에도 적합한 방식으로 본문과 해석자라는 두 가지 지평의 융합을 초래 하는데 있다. 셋째, 현재 기독교가 확산되는 양상을 고려할 때 제1세계에 의한 어떠한 성서 해석도 본문의 의미를 더 이상 밝혀낼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할 수는 없는 것은 그들 자신의 질문을 해석 과정에 이입시키고 있는 컨텍스트의 역할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성서와의 대화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속행되어야만 한다.
   성서학에 대한 이같은 전 지구적 전망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명백하다. 그것은 라틴 아메리카의 관점에서 볼 때 계급투쟁, 온전한 해방, 그리고 정치와 종교 간의 관계에 대한 관심의 집중을 뜻하며, 아시아의 관점에서 볼 때 대중적 전통, 종교적 전통, 그리고 경제문제에 대한 관심의 집중을 뜻하며, 아프리카의 관점에서 볼 때 성서의 반향의 해석학에 지배적인 관심을 두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이러한 제3세계의 공헌에 대한 비평도 가능하다: (1) 풀뿌리 공동체들의 관점으로 읽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활용할 수 있는 대중적 해석의 실례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 있다; (2) 지평 융합은 본문과 컨텍스트간의 구별을 붕괴시킬 수 있다; (3) 신약의 해석은 종종 제2성전기 유대교에 대한 부정적 묘사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 때문에 반유대주의를 향한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따라서 논평의 요소들은 그 성격과 함의에 있어 아주 다양하다: (1) 첫 번째 논평은 이론적인 도전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함에 대한 지적이다; (2) 두 번째 논평은 이론적인 도전에 해당되지만 단지 가능성을 말한 것이며,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처방이 첨부된다: 즉 두 가지 지평들이 적절히 구별되는 반면 병행을 허용하는 수단으로 사회과학 비평을 적절히 사용하라; (3) 세 번째 논평 또한 이론적인 도전으로 사실에 기초한 도전이라 할 수 있고 다음과 같은 처방이 첨부된다: 제2성전기 유대교의 풍부한 다양성을 보여주는 조사를 보다 많이 사용하라.
   따라서 저자들이 볼 때 이 학과는 제1세계와 제3세계 내에서 이루어진 발전의




유일신 신앙의 여러 모습들-하나님은 어떻게 한 분이신가 - 2008년 4월 10일 출판
현대인과 제자도-2007년 10월 15일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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