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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연 
 신학사상 2014년 봄호(164집)


권두언

신학사상은 한국역사, 문화, 사회에서의 신학, 세계 신학과의 대화, 민족의 평화통일에 기여하는 신학운동을 목적으로 1973년 우리나라 최초 신학전문 학술연구지(계간)로 창간되었습니다.
이런 목적에서 신학사상은 매호 마다 새롭게 연구되어지는 서구신학, 토착화신학, 남미해방신학, 아프리카신학, 제3세계신학, 그리고 한국의 민중신학, 토착화신학 등에 대한 지상심포지엄을 했습니다. 또한 국내외적으로 대두되었던 민주주의, 인권, 평화, 통일, 생태환경, 빈곤과 양극화, 과학기술 등과 관련된 정치, 경제, 사회적 이슈들, 특히 WCC가 제기하는 신학의 주제들도 함께 논의했습니다.
그래서 신학사상에는 신학자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역사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신학사상은 처음부터 에큐메니칼 정신을 가지고 출발했기 때문에 개신교만이 아니라 가톨릭, 불교, 유교, 민속종교, 이슬람교 등과도 종교 간의 대화를 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고, 신학사상이 한국학술진흥재단에 등재학술지로 선정되면서 신학자들의 연구업적 중심의 논문게재로 인해 최근 몇 년 동안은 지상심포지엄을 계속해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올해 4월부터 신학사상을 발간하는 한국신학연구소가 연구협동조합 형식으로 새롭게 출범하면서 신학사상의 권두 지상심포지엄을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학사상은 민중신학, 토착화신학, 등 한국 신학을 한층 발전시키고, 한국사회에서 지탄받고 있는 기독교를 살리는 새로운 신학운동을 전개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신학사상에 참여한 신학자들과 회원이 되어 주시고 구독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앞으로 더욱 많은 성원을 당부 드립니다.            
                                  

                                                                    
                                                                                                                      발행인  김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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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164집)              

『신학사상』심포지엄

동아시아 평화․안보 협력체제와 한반도 평화통일


연구 논문
김창주 ․ 토라 테라피: 오경의 규칙적인 낭독과 순환적인 독서
박태식 ․ 이것은 나의 살과 피
김동환 ․ 김재준의 정치사상
백용기 ․ 평신도신학으로서 디아코니아
임희숙 ․ 기독교가 성인들의 성 인식과 태도에 끼친 영향에 대한 연구
조남신 ․ 하나님의 이름 대언과 기도로서의 설교
        - 루돌프 보렌(R. Bohren)의 설교론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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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포지엄)

『신학사상』 심포지엄
동아시아 평화․안보 협력체제와 한반도 평화통일


일시 : 2014년 2월 17일
장소 : 김대중기념도서관 회의실
사회 : 김동진 (신학사상 편집간사)
패널 :
박경서 (유엔인권정책센터 이사장)
박순성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박종화 (경동교회 담임목사)
백학순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정리 : 정용택 (한신대 신학과 박사과정)



김동진: 먼저 『신학사상』이  “동아시아 평화․안보 협력체제와 한반도 평화통일”라는 주제로 개최한 지상 심포지엄에 귀중한 시간을 내주셔서 참여해주신데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심포지엄에 앞서 이번 심포지엄을 기획하게 된 목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신학사상』은 신학연구 전문학술지이지만, 『신학사상』이 추구하는 신학은 역사와 현실문제와 대화하는 신학입니다. 요즈음 동아시아에서 신 냉전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만큼 관련국들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고 있고, 남북관계에서도 긴장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기에 『신학사상』은 이러한 현실의 문제를 짚어 보고 문제 해결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필요를 절감하고 이번에 권두 지상 심포지움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세계는 동구권의 붕괴 이후 경제적 측면에서 국경의 의미가 사라진 세계 단일 자본주의 시장체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계 경제 환경이 지구적 차원으로 바뀌면서 유럽은 미국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EU 경제공동체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확산되는 가운데 미주지역,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에 연이어 지역경제공동체가 탄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여러 가지 논란에도 불구하고 EU는 경제공동체를 넘어 정치공동체로까지 발전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은 세계에서 인구도 제일 많고, 경제규모도 가장 크고, 군사적으로 첨예한 갈등 속에 대량살상무기가 가장 밀집된 지역인데도 불구하고, 과거 유럽에서 성립된 ‘헬싱키 체제’와 같은 역내 국가들의 평화 및 안보나 경제협력체제를 형성하기 위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오히려 최근에는 중국, 일본, 한반도 등 관련국들이 역사 문제, 영토 문제 등으로 첨예한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에 중국의 부상(浮上), 일본의 극우화 및 군사대국화,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 전략’ 등이 맞물리면서 패권 다툼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갈등 상황 가운데 최근 몇 년간 남북관계도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최근 들어서는 고위급 접촉, 이산가족 상봉 등을 통해 모종의 돌파구를 찾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곧 전쟁이 재발할 것만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아직까지 남북관계는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특히 북한 장성택의 숙청 이후 국내외적으로 북한에 대한 이미지가 더욱 부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심포지움에서 선생님들이 이런 현실을 어떻게 진단하시는지, 향후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보와 협력,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대해 어떻게 전망하시는지, 그리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과제들을 수행하여야 할 것인지 함께 대화를 나누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먼저 박종화 목사님이 토론의 물꼬를 터주시면 좋겠습니다.

동아시아 갈등의 원인과 해결의 길

박종화: 우선 제가 보기에 오늘날 동아시아의 갈등 상황은 고립된 섬과 같은 상황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글로벌 콘텍스트의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이 가능하리라 봅니다. 하나는 지정학적 맥락에서 다른 대륙과 대비하여 현재의 동아시아와 한반도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시대사적인 의미에서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문제를 접근하는 것입니다. 즉,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정확히는 대한제국 말기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이 어떤 점에서 비슷하고, 또 어떤 점에서 다른지 논의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상황을 진단할 때,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무엇이고, 또 공통점은 무엇인지, 나아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엇인지, 그 시대사적 의미를 고찰해봤으면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역사로부터 얻은 교훈을 현 시대의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용할 때, 어떤 점이 고려할 점인가를 토론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지정학적 맥락과 시대사적 의미, 이 두 가지를 놓고 봐야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문제가 풀리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백학순: 박종화 목사님이 큰 틀에서 문제제기를 해주셨는데요. 일단 현 시점에서 볼 때, 동아시아 갈등의 원인과 관련해 몇 가지 정치적 현실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국제사회에서 ‘힘의 전이(轉移)’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가 미국과 중국을 두 축으로 하는 구도로 바뀌고 있습니다. 즉 본격적인 세력의 전이가 구조적인 변화, 혹은 시스템의 변화로 가면서, 상황 변화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런 변화 속에서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여러 측면에서 쇠퇴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그러다보니 역사 문제, 영토문제 등이 다시 부각되면서 주변 국가들과 부딪치고 있습니다. 셋째로 이런 ‘세력전이’가 일어나고 국제사회의 힘의 구도의 큰 틀이 바뀌는 상황에서, 한반도의 분단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남북 간에 충돌이 일어나고, 미국과 중국은 서로 남북한을 각각 자기 영역으로 분리해서 끌어들이는 흡입력을 더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소련 붕괴 이후 국가안보, 체제안보에 대해 큰 우려를 갖고 있던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함으로써 국제사회와 북한의 갈등도 심화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는 ‘한반도의 비핵화’ 문제에서는 적어도 공통된 이해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북한에 대한 일종의 압력과 통제의 메커니즘으로 이용하고 있고요. 중국과 미국도 서로 이익이 부딪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한반도 비핵화에 관해서만큼은 공통된 이해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은 적어도 현 단계에서는 각자 서로의 이익에 부합하는, 소위 ‘신형 대국관계’의 틀에 합의하면서 동아시아의 갈등을 최대한 통제하고 있지만, 그러한 질서는 일시적인 해결책에 불과하고 근본적인 갈등 해결의 방법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시간이 갈수록 분명하게 드러나리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대화와 협력의 새로운 틀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를테면 '아세안'(동남아시아 국가연합, ASEAN)에서 하고 있는 'TAC', 즉 우호협력조약(Treaty of Amity and Cooperation) 같이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 간에 맺어진 평화조약을 참조하여, ‘동북아시아 우호협력조약'(NEA-TAC) 같은 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떤 다자협력체든 간에 북한을 배제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동아시아에서 많은 일들이 북한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는데,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무엇보다도 북한의 핵을 막을 수 없다고 봅니다.

박순성: 저는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보”라고 하는 오늘 심포지엄의 주제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제가 전공한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를 문득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저서인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1776)과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1759)에 모두 나오는 얘기인데요, 그가 이해하기로, 유럽에서 국가들 사이의 갈등과 분쟁은 왕들의 야심이나, 혹은 상인들의 질투심에 의해서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살았을 당시의 세계에서, 왕들에 의한 폭력과 부정의는 해결하기 쉽지 않지만, 적어도 상인들의 탐욕과 독점정신은 그나마 자유무역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스미스는 생각했습니다. 저는 오늘날 한반도와 동아시아에서 ‘비-평화’가 아담 스미스가 말한 왕들의 야심이나 상인들의 질투심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고민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제국주의적 지배’라고 말하는 19세기 말의 세계적 억압체제는 정치적 야심과 상인적 질투심의 결합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작동하였다는 것입니다.
선진자본주의국가가 후진적 비자본주의 지역이나 국가를 지배하자 피지배지역의 인민들과 지도자들은 민족의 이름으로 저항을 하거나, 혹은 제국주의와 선진자본주의에 대한 대항이념으로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이념으로 투쟁을 했습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두 개의 저항적 이념은 제국주의·자본주의라는 지배적 이념과 대립했고, 결국 20세기는 일종의 이념투쟁의 시기가 되었습니다. 한반도에서의 갈등도 한국전쟁에서 보듯이 결국 이념투쟁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 북한은 한국전쟁을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공산주의 이념과 민족 이념을 결합시키는 형태로 정당화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20세기 후반부터, 최근 21세기에 들어와서까지도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갈등의 핵심 원인은 ‘일본 제국주의의 청산’ 문제입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함에 따라 동아시아에서 ‘평화적 근대질서’가 확립되지 못하고, 이는 오늘날 영토분쟁이나 역사전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국 오늘날 동아시아 지역의 비-평화 상태를 근본적 지점으로까지 파고 들어가 보면, 정치적 권력일 수도 있고, 경제적 권력일 수도 있고, 문화적 권력일 수도 있는데, 이들 권력이 야기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지향점이나 가치를 우리가 찾아내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립과 갈등을 불러오는 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어떤 가치체계를 말하는 것이지요. 저는 오늘 여기 『신학사상』의 심포지엄에 참여하면서 이러한 지향점이나 가치를 신학의 언어에서, 혹은 민주적 가치 지향의 언어에서 찾을 수 있는가를 제 나름대로 고민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에서 백학순 박사님이 말씀하신 동아시아와 한반도에서 현실 정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기저에 깔려 있는 인류 사회의 사상의 문제를 고민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우리가 인류 사회를 평화의 길로 이끄는 사상과 그것을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전략을 함께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지요. 또 이 두 차원의 문제에 대한 토론이 한국 사회의 평화와 관련한 논의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박경서: 저는 유럽의 역사를 먼저 훑어본 후, 동아시아의 역사를 보는 그런 방식을 학생들에게 늘 가르쳐왔는데, 결국 유럽이 오랜 역사 경험 속에서 고민한 것은 ‘인간의 존엄의 문제’라고 봐요. ‘인간의 존엄’이 국가의 차원으로 확장되었을 때 ‘평화’의 문제가 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보편적 인권’의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 사상이라든가 화해 사상이라든가 하는 것은 ‘명예혁명’이 일어난 1688년부터 1789년 ‘프랑스 대혁명’까지 1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사상적인 기저를 갖고 있었던 유럽의 민족들에게서 먼저 나온 것입니다. 반면에 봉건사회로부터 뒤늦게 벗어난 동아시아 민족들의 경우를 보면, 우선 중국은 손문(孫文)의 사상이 모택동(毛澤東)의 사상과 장개석(蔣介石)의 사상을 낳음으로써 그 둘이 서로 치열하게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1905년 미국과 일본이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음으로써 미국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침략하고 한반도를 '보호령'으로 삼아 통치하는 것을 용인했습니다. 이 밀약의 내용은 1924년에야 처음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거의 18-19년 동안 비밀에 부쳐졌다가 그때 비로소 드러난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일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나중에 다시 한반도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는데, 그렇게 해서는 문제가 제대로 해결될 수 없지요.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과정을 보면서, 동아시아 갈등은 여러 이유들 때문에 비롯되었지만, 결국에는 이 지역에서 훌륭한 정치지도자가 없었기에 일어났다고 봅니다.
유럽을 보면,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46년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한 유명한 연설에서, 유럽의 통합과 유럽 공동체에 관한 비전을 제시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나 드골(Charles de Gaulle)은 상대국가를 순방하면서, 프랑스와 독일이 겪은 전쟁의 상처를 아물게 하자고 합의했는데,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이 하나의 역사교과서를 공동으로 사용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프랑스의 외무장관 로베르트 슈망(Robert Schuman)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에서부터 시작하여 유럽 통합의 실질적인 과정을 직접 기획한 지도자였습니다. 유럽공동체의 시작인 ‘로마 조약’(Treaty of Rome)이 1957년에 체결되었는데, 그 조약은 당시 유럽에서 헤게모니 쟁탈을 막기 위한 것이었죠. 오랫동안 유럽의 주도권을 놓고 독일과 프랑스 등이 각축을 벌여 왔는데, 그로 인한 전쟁을 막기 위해 체결된 조약이 바로 로마조약이었습니다. 슈망을 중심으로 여러 지도자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로 구성된 베네룩스 삼국과 독일연방공화국․프랑스․이탈리아 등 모두 6개국이 유럽 공동체 설립을 위하여 우선 간단한 것부터 하자는 취지에서 독일의 석탄과 프랑스의 철을 공동으로 활용하는 데 합의하여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출범시켰고, 그것이 발전하여 유럽경제공동체(EEC)를 이루었고, 더 나아가 28개국의 회원으로 구성된 유럽 연합(EU)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일일이 다 거론할 수 없지만, 유럽에는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뛰어난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동아시아에는 그런 지도자가 없어요. 세계를 돌아다니다 보면, 동아시아처럼 희망 없는 지역이 없어요. 지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서도 자기들끼리 모여서 무엇인가를 해보자 하고, 동남아시아에서는 아세안(ASEAN)이 나왔고, 유럽은 유럽공동체로 나가고 있고, 북미에서는 캐나다와 미국, 멕시코가 ‘북미 자유 무역 협정’(NAFTA)을 만들었는데, 동아시아에서는 아직도 19세기적인 쟁탈전을 벌이면서 서로 대치관계를 맺고 있어요. 그러나 바로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는 역설적으로 큰 지도자가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악순환이 계속 반복될 겁니다. 그러한 악순환 한가운데 한반도가 있어요. 한반도가 자의든 타의든 그러한 악순환의 빌미가 되었으니,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정신으로, 한반도가 악순환을 끊는 주도권을 잡아야 하고, 남과 북이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프랑스와 독일이 주도권을 잡은 유럽 공동체처럼, 남과 북이 주도권을 잡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협력 체제를 만들어 가도록 이끄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독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같은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그는1971년부터 ‘동방정책’을 추진했는데, 그의 구상이 결국 1975년 유럽의 다자간 안보협력을 제도화한 ‘헬싱키 프로세스’의 근거를 제공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지도자가 없는 동아시아에서는 시민들이 그런 해결 방안을 만들어 가야 해요. 정치가들이 하지 않기 때문에, 시민들이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지도자가 동아시아에서 나오게 하려면, 우선 시민세력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그 기반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저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헬싱키 프로세스를 다시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헬싱키 프로세스는 동서독의 관계를 평화공존으로 전환시키면서 마침내 국제적인 환영을 받게 되었거든요. 헬싱키 프로세스에 참여한 35개국을 같이 움직이게 한 밑바탕에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세 개의 바구니가 있었어요. 첫째 큰 바구니에는 경제협력이 들어 있었고, 둘째 바구니에는 안보가 들어 있었고, 셋째 바구니에는 인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동서독을 제외한 33개국이 세 개의 바구니 중에서 하나나 둘, 혹은 셋을 모두 갖기 위해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헬싱키 프로세스에는 10개의 원칙이 있었는데 참여하고자 하는 나라가 그 가운데 2~3개 원칙에 찬성하기만 해도 참여할 수 있게 하는 포용적인 틀을 만들었어요. 이 과정에서 동서독은 1975년 불가침조약을 맺고, 더 나아가 평화협정으로까지 나아가게 된 것이죠. 그 당시 소련은 경제협력 때문에 핼싱키 프로세스에 들어왔습니다. 경제협력 때문에 소련이 먼저 들어오니까 다른 동구권 국가들도 들어오게 되었죠. 그 후에 소련이 주도하니까 처음에는 헬싱키 프로세스에 소극적이던 미국도 들어왔어요. 미국이 들어오니, 캐나다가 들어오고, 결국 유럽의 모든 나라들이 들어와서 총 35개국이 참여하기에 이르렀고, 1975년 헬싱키 의정서가 채택되면서 서독은 동독의 인권 상황이 개선되도록 건설적으로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6자 회담이 하지 못하는 다자 외교를 통해서 한반도 평화공존 체제를 만들어가는 방법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 동아시아의 현실에 맞게 헬싱키 프로세스 같은 틀을 모색해야 한다고 봅니다.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쉬운 일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지혜를 발휘하여야 할 것입니다. 쉽게 합의점을 찾기 어려운 정치적인 문제는 일단 놓아두고, 조류독감이나 황사 같은 자연재해에 대한 예방조치를 공동으로 찾는 일에서 시작하면 별다른 반대가 없을 것이란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김동진: 말씀해 주신 것처럼 식민지와 분단의 아픔을 갖고 있고, 동아시아 갈등의 중심에 서 있는 한반도, 즉 남북한이 동아시아 평화의 사상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북한 핵문제를 논의하다 보니까 ‘6자 회담’을 내놓을 수 있는 상상력이 발생하게 되었고, ‘9․19 공동성명’ 이후 ‘2․13 합의’에서 ‘동북아 평화 안보 체제’ 실무그룹이 제안되었다는 것도 결국 한반도의 평화가 동아시아 평화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을 잘 보여 줍니다.
그렇지만 유럽의 경험이 동아시아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앞서 박경서 박사님이 유럽의 헬싱키 협약과 서독 동방정책의 연관관계에 대한 언급도 잠시 해주셨는데요. 사실 헬싱키 협약 이후 동구권이 붕괴되고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일된 역사적 사례를 알고 있는 북한은 헬싱키 협약이나 그와 유사한 프로세스에 대해 그리 긍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유럽의 경험에서 비추어볼 때, 현재 동아시아의 현실에서 ‘동아시아 평화·안보 협력 체제’의 형성 과정과 한반도의 평화, 좀 더 나아가서 한반도의 통일은 어떤 함수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요?

동아시아 평화·안보 협력체제의 형성과 한반도 평화·통일의 함수 관계

박종화: 한반도 분단과 통일 문제를 두고 어차피 남북 간에 해결해야 하는 부분, 동시에 남북을 넘어선 국제적 해법, 그 두 개가 모두 섞여 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정학적 맥락에서 한반도의 위치가 무엇인가를 묻는 저의 질문 속에는 “국제공조를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으려는 목적이 담겨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제가 신학의 입장에서 말씀을 드린다면, 유럽의 경우와 동아시아의 경우가 서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를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동아시아는 지나치게 ‘명분론’에 경사되어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말이죠. 예를 들어,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사죄를 못 한다고 할 때, 일본은 자기들의 철학을 들어 명분을 강조합니다. 자신들은 과거에 대하여 현재의 시점에서 사죄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죠. 당대에 옳았다고 판단하여 그렇게 실천했으면 그것이 진실이지, 영구불변하는 진실 규정 같은 것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당대에 천황이 명령하여 그대로 따랐으면 그것이 그 상황에선 절대 진리이지,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 진리를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구불변하는 절대 진리의 관점에서 과거의 행동에 대한 판단을 다시 내릴 수는 없다는 논리입니다. 불교도 안 되고, 기독교도 안 되고, 오직 신도(神道)만 되는 일본에서는 일본 나름의 명분이 있고, 그것이 종교화․규범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명분론은 유럽의 경우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는 아마도 유럽 전체가 기독교 문명이라는 공통의 기반 위에 서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독교 문명에 대한 해석은 나라들마다 미묘한 차이를 보이겠지만, 기본적으로 역사적 과오를 회개하여 용서를 받는 것이 맞고, 그렇게 용서를 받고 나서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을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공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일본을 아무리 방문하고, 일본인들과 토론을 해봐도, 그런 사고방식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외교적 실리보다는 일본식의 명분론을 더 중요시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일본식 종교라고까지 표현하긴 어려울 것 같고, 일본식 사고방식이나 일본식 철학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명분론이 매우 강합니다. 중국은 자신들이 제국주의를 추구했다는 것을 반성하지 않고 있고, 지금도 여전히 제국주의적인 외교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명분론이 상당히 강합니다. 어디서 명분론이 나타나는가 하면, 특히 남북 간의 관계에서 그렇습니다. 북한도 얼핏 보면 실리적인 것 같지만, 명분론에 빠져 있고, 남한 역시 굉장히 명분주의가 강합니다. 예를 들면, “남과 북이 합해서 경제공동체를 만들어서 같이 '윈-윈‘(Win-Win)하자,” 그래서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평화적으로 관리해 보자,” 이런 것이 실리주의적 접근일 텐데, 그런 게 통하지 않는 까닭은 남북한의 명분론이 강하게 부딪치기 때문이죠. 우리 사회에서 북한과 친해지면 무조건 싫은 것이고, 북한과는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념적 편향성이 더해진 명분론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실리주의를 통한 협력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속으로는 강한 명분론을 갖고 있어서 그것이 실리주의와 자꾸만 충돌하게 된다는 말이에요. 동아시아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때,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관해서 경제적으로는 동의하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하여 계속해서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데에는 너무나 큰 어려움을 느낍니다. 거기서 서로 갈리게 됩니다. 제가 방금 ‘마음’이라고 표현했지만, 마음을 모으지 못하는 것은 사상과 사고의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제가 혼자 내린 잠정적인 결론이 있습니다. 한반도 통일을 위해 명분론 싸움은 부차적인 것으로 두고, 실리 위주의 접근, 서로 ‘윈-윈’ 하는 전략으로 통일의 체제를 만들어 가는 것이 비교적 쉬운 길이라는 것입니다. 명분 싸움을 실리적 접근 뒤에 놓으면 어떻겠느냐 하는 거죠. 예를 들어 일본과 우리가 과거사 문제로 지금껏 싸워왔지만, 어차피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 해야 할 싸움이니까, 일단 한반도의 통일이 일본에게 주는 이익은 무엇이고, 중국에게 주는 이익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면서, 실리주의적인 설득을 통해서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를 실리와 타협 중심의 공동체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각국이 저마다 갖고 있는 독특한 명분론은 점진적으로 해소해야 할 장기적인 과제로 놓고, 단기적인 과제는 ‘공리’(共利), 즉 공동의 이익을 살리는 실리 위주의 접근을 하자는 것인데요, 이를 통해 정치적인 실리도 살릴 수 있고, 경제적 실리도 살릴 수 있고, 환경적 실리도 살릴 수 있겠죠. 우리 사회를 실리 중심의 타협주의 평화공동체로 만들어 나가고, 그 안에 있는 내적인 갈등은 중장기적인 해결의 과제로 놓자는 것입니다.
명분 싸움은 쉽게 결론이 안 나옵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교과서 문제나 과거사 문제는 일본이 사죄를 한 뒤에도 시간이 지나면 또 뒤집어 버리기 때문에, 그 문제는 장기적인 과제로 놓고, 일단 우리들이 함께 평화 체제부터 최대한 먼저 만들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명분 차원의 문제는 점진적으로 해결해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사 문제만 갖고 싸워서 실리적 평화 통일 무드를 깨뜨리지 말고, 우선 동아시아 국가들의 국가적․경제적․정치적 공동이익을 중심으로 평화 체제를 만드는 단기적 과제에 집중하는 것이 어떤가, 저는 그런 생각입니다.  
        
백학순: 동아시아 평화·안보 협력체제가 생기면, 우리에게는 ‘평화통일’의 공간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동아시아 평화·안보 협력체제가 구성되었다는 말은, 그 체제 안에 북한도 포함되었다는 뜻이니까, 남북한이 한반도 문제에 관해서 주변 국가들에게 어떤 부담이나 위험이 되지 않고, 남북통일을 우호적인 대외 환경 속에서 추구할 수 있는 상황이 현실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앞서 박종화 목사님이 실리적인 공존을 말씀하셨는데, 저도 당연히 그렇게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리적인 공존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고자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노력을 기본 바탕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실리를 추구해가는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고 봐요.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갈등을 푸는 실리적 해결 방안들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평화공존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 정부와 비정부 부문이 함께 노력을 해야 하고, 국제적인 연대도 필요한데, 여기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경제, 정치, 군사 분야 어느 분야에서든지 간에, ‘상대방이 있는 관계’를 ‘상대방이 있는 관계’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상대방이 있는 관계’를 마치 ‘상대방이 없는 관계’인 것처럼 규정하게 되면,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상대방이 있는 관계’를 ‘상대방이 있는 관계’로 인정하면서, 현실적으로 내가 원하는 목표를 상대방의 협력을 받아 서로 윈-윈하는 방식으로 달성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인식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관계나 남북관계를 다룰 때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원칙이라고 봐야겠지요.
이러한 평화공존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려면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정치, 시민사회, 국제 연대에 이르기까지 성숙하고 전략적인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앞서 박경서 박사님이 남북 간에 서로 협력하고 화해하고 신뢰를 쌓아나가는 데 민족지도자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동아시아 갈등과 남북 분단은 강대국들에게 우선적 책임이 있다는 점에서, 한반도 평화공존과 남북통일을 달성하는 데에는 남북한 리더십이 당연히 필요하지만, 이와 동시에 미국이나 중국 같은 강대국들의 리더십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것은 우리가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예컨대, 클린턴 대통령 이후로 미국에는 그런 리더십이 없기 때문에, 북핵문제만 보더라도 상황이 더욱 더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 있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한 가지 더 강조할 것이 있습니다. 냉전 틀이 깨지면서 새로운 강대국 중심의 체제와 질서가 형성되는 과도기에 강대국들이 평화·안보 협력 체제의 필요성을 말할 때에는, 현재의 국제관계 상황을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끔 관리해야 한다는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필요성이 그 배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까딱 잘못하다가는, 과거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강대국들이 약소국들의 희생 위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강화하는 질서를 만들어내기 십상입니다. 따라서 미국과 중국이 새로운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질서를 형성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남북한이 서로 협력하여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의 이익을 지키고 관철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박순성: 왜 21세기 초반에 들어와서 북핵문제와 관련한 6자회담을 함으로써, 한반도 문제를 동아시아 문제로 확장하게 되었는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생각이 겹쳐 있는 것 같습니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협력은 한반도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생각, 즉 한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동아시아의 평화가 실현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한 쪽에 있습니다. 다른 한 쪽에는 사실상 동아시아에서의 평화와 협력의 길은, 미국과 중국, 더 나아가서 일본과 러시아, 남북한, 대만까지 다 합쳐서 이 모든 나라들이 큰 구상을 세우지 못하면, 결코 발견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생각을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결합할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또한 세계경제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군비경쟁의 중심이기도 한 동아시아에서 어떻게 ‘영합 게임’(zero-sum game)이 아닌 ‘정합 게임’(positive-sum game)의 모델을 만들 수 있을까를 놓고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동아시아에서 과연 유럽식의 방식이 가능할 것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것인가, 저는 아직도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유럽과 비교했을 때 동아시아에서는 무엇보다도 국력의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유럽을 주도하던 나라들의 인구 규모나 경제 규모는 서로 엇비슷했습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중국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너무 큽니다. 따라서 ‘동아시아판 헬싱키프로세스’, ‘동아시아판 경제·안보협력체’가 유럽과 비슷한 방식으로 가능할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이와 동시에 과거 동아시아의 ‘중화체제’에 대한 비판적 검토도 해야 합니다. 저는 섣불리 유럽연합의 경험을 동아시아에 적용하려고 하면, 그 구상이 제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탁상공론(卓上空論)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21세기 인류 사회가 직면한 환경이나 생태, 에너지, 자원 등의 새로운 문제를 20세기식의 사고방식이나, 여기서 더 거슬러 올라가, 중상주의 시대의 왕과 상인의 관점, 이른바 '영합 게임‘의 시각에서 풀 수 있는가를 놓고서도 새롭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동아시아 질서가 불안정한 이유는 20세기 방식으로, 즉 민족과 체제와 이념 투쟁의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 나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일본 문제에 대해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왜 일본은 독일과 다른 길을 가게 되었는가? 이것은 오늘날 동아시아 평화에 관련된 핵심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일본의 책임을 추궁해 왔습니다. “독일은 철저하게 반성했는데, 일본은 왜 반성하지 않는가?” “왜 일본은 종군위안부, 학살 등을 인정하지 않는가?” “왜 일본은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 주장하는가?” 이런 식으로 일본에게 책임을 물었지요. 그런데 저는 이 문제를,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과 결합된 미일동맹체제와 분리시켜 생각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일본의 평범한 시민들이 다께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할 때, 저는 그 사람들도 결국 미일동맹체제의 희생자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미국이 미일동맹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일본이 과거사를 충분히 반성할 수 있는 정치적, 외교적 여건을 만드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봅니다. 역사적 반성을 보류시킨 것이죠. 냉전체제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동맹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만들어 놓았지만, 실제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고 확장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동안 한일 진보지식인 연대, 한일 종교인 연대 등을 통해서 역사나 영토 문제를 다른 식으로 풀어 나가려는 많은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나 영토 문제를 한국의 입장에서만, 혹은 한민족의 입장에서만 보고 접근한다면 해법을 찾기 어렵다고 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에서 어떻게 한민족이 희생되었고 일본의 민중이 희생되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일본 민중의 희생을 깔고 일본의 천황제나 일본 군국주의의 잔재들, 그리고 기득권 세력들이 되살아났는지에 대해 우리가 깊이 분석하고 성찰하고, 일본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본의 민중이 거짓된 삶을 살아 왔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가 더욱 설득력 있는 담론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아시아 평화체제 형성에서, 특히 역사나 영토 문제를 다룰 때 매우 중요한 지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일본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의 희생자라는 담론을 통해서 자신을 합리화하듯이 한국이나 중국도 희생자 담론을 통해서 자신들을 무조건 정당화하려는 데서 이제는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현재의 질서가 존속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동아시아 전체가, 또 전 세계가 더 깊은 문명사적 고민을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정치지도자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종교적․신학적 차원의 고민이 필요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사상적·사회과학적 고민이 필요할 것입니다.

박경서: 희생자 담론은 분명히 한계가 있어요. 그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가치를 통해서 평화․협력의 길을 가야 해요. 유럽의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대로는 희망이 없다는 강한 인식과 반성, 그리고 평화, 공동 안보, 공동 번영이라는 가치에 대한 헌신입니다. 동아시아 차원의 경제협력에 대한 구상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공동번영과 평화를 저해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로서 경제적 관점에서 인간의 존재가치를 평가하는 입장이 너무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바꾸려면, 미래를 보는 안목에서 평화와 공동번영의 가치가 경제적 가치보다 훨씬 우선한다고 보고 장기적으로 경제가치의 우위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지도자들이 몇 사람이라도 나오도록 우리가 부추겨야 합니다. 그러려면 굉장히 긴 시간이 걸리겠지요. 유럽만 해도, 1958년 유럽 경제 공동체가 탄생하여 오늘의 EU 회원국이 28개국이 되기까지 56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이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기에 동아시아에서는 비록 늦었더라도 지금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한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한 채 22세기가 되어도 동아시아의 갈등과 한반도의 분단 문제는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이 독도 문제로 계속해서 싸울 것이 아니라 제3의 길을 찾아야 할 텐데, 비슷한 일이 유럽에서도 있었습니다. 히틀러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략하고 그 땅에 독일인들을 이주시켰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와 동독 총리 빌리 슈토프는 히틀러가 강제 점령했던 땅을 폴란드와 체코에 다시 돌려주자고 했어요. 그러자 서독 의회가 들고 일어나 빌리 브란트를 불신임하려고 했는데, 기독교민주당의 젊은 국회의원 12명이 사회민주당 출신의 총리인 브란트를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브란트가 자신들과 다른 정당 소속이지만, 그가 하는 일은 미래를 보는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브란트의 불신임안에 반대했고, 그 덕분에 브란트는 다시 살아나서 동방정책을 계속 추진했고, 결국 헬싱키 프로세스까지 진행하게 된 것이죠. 그런 식으로 독일, 폴란드, 체코 등이 휩쓸려 들어갈 수 있었던 유럽 분쟁이 EU를 통해 해결된 것입니다. 동아시아에서도 그런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미군이 지금처럼 일본과 남한을 껴안는 군사동맹체제를 유지하는 역할에 국한된다면, 결국 중국을 코너로 몰아 중국을 도발하게 되어 있다고 봅니다. 앞으로 동아시아에서 미군의 역할은 유럽통합 과정에서와 같이 평화 파수꾼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른바 제1강대국과 제2강대국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여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국면을 타개하여 평화를 지키는 군대로 미군을 한 단계 격상시키는 작업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박순성: 박경서 박사님이 하신 말씀에 몇 마디 덧붙이자면, 현재 동아시아에서 유지되는 군사동맹체제나 경제사회질서가 앞으로 5~10년이 지나면 존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인식이 전반적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빅경서 박사님이 경제번영을 통한 인류문명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너무나 중요한 지적입니다. 현 동맹체제의 지속불가능성, 경제중심 질서의 지속불가능성을 제대로 인식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것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그 새로운 것은 평화사상일 수도 있고, 신학사상일 수도 있고, 민주주의의 확장·심화일 수도 있겠죠.

김동진: 선생님들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동아시아의 평화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실리적 접근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평화공존의 정신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을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현 군사동맹체제 및 경제 질서의 한계를 인식하고 문명사적 차원에서 새로운 상상력이 요구된다는 말씀에도 적극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런데 올해 초부터 한국 사회에서는 보수 언론이 주도한 ‘통일이 미래’라는 신년기획이 지면을 장식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통일 대박론’을 제기하는 등, 경제효과라는 실리적 차원에서 통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북한에서도 김정은 체제가 출범하면서 경제발전에 대한 높은 관심이 표출되고, 6.28 조치나 특수경제지대 개발, 마식령 스키장, 문수 물놀이장 건설 등과 같이,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남북 관계 개선에 대해서도 상당히 실리에 근거를 둔 해석들이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장성택 숙청 이후에 북한이 남북 대화에 나서는 것도, 장성택 숙청 이후에 북중 관계가 약간 불편해지면서, 남북 관계 개선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을 뿐만 아니라 외국자본 투자에 유리한 대외환경을 조성하고, 나아가서는 북미관계 개선을 이끌어 내어 경제제재를 완화하는 것과 같은 실리를 추구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들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북한의 변화, 그리고 향후 한반도 평화통일의 전망에 대해 어떻게 보고 계시는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현 정부 대북정책과 북한의 변화, 그리고 한반도 평화통일

박종화: 제가 그동안 북한 사람들을 만나보니까, 북한이 원하는 것은 빠른 시일 내에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공존하는 것입니다. 어떤 용어로 표현하든지 간에 북한이 원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남한이 원하는 것은 흡수 통일입니다. 바로 그런 흡수 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통일 대박론’이니까요. 그런데 통일 대박은 곧 경제 대박을 의미하는 것인데, 문제는 경제 대박이 흡수 통일에서 오지 않고 평화공존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경제적 시장 논리를 갖고 그렇게 설득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선 훨씬 좋은 전략이라고 봅니다. 최근에 저는 중소기업 경영자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들도 “통일 과정이 대박일 수 있다.”고 말하더군요. 현재 중국에 진출한 기업들은 인건비가 너무 비싸서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한답니다. 그래서 베트남으로 진출하는 것이지요. 5-6년이 지나면 그곳의 인건비도 비싸질 것이기 때문에 그 뒤에 우리 기업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북한 밖에 없다고 합니다. 개성공단 같은 것을 수십 개 만든다면 우리 기업으로서는 제일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흡수 통일이 되면 되겠냐고 물었더니, 그분들은 “아니!”라고 답합니다. 흡수 통일이 되면 오히려 인건비가 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보기에는 평화공존 상태에서 현재의 개성공단이 모델이 되어야 통일이 대박이라는 것입니다. 그분들에게는 흡수 통일이 결코 대박이 아니고, 평화 공존 속에서 북한에 대한 투자가 이뤄지는 것이 통일 대박론입니다. 제 이야기는 통일 대박론을 놓고 정치 이념적으로 흡수 통일이냐, 평화공존이냐 하는 논란만을 되풀이하지 말고, 현실적 이해관계 속에서 경제적 실리 위주로 접근하는 일도 가능하도록 계속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족 경제 공동체라는 각도에서, 저는 솔직담백하게 사람들을 상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거기에는 이념적 좌우나 종북․반북도 없습니다. 정치 논리는 종북이냐, 반북이냐를 따지는 식으로 갈 수도 있고, 기독교 선교의 논리에도 그런 이념적인 영향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경제 논리는 그런 이념 논란의 바람을 거의 타지 않습니다. 저는 개성공단의 경우를 보면서, 지금은 경제논리가 더욱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정치인들이나 통일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해주면, 그 뒤에서 종교나 NGO가 인도주의적인 접근이나 선교적 지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하는 사람이 정치하는 사람들한테 무슨 얘기를 하면, 공중에 붕 뜬 이야기만 하고,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많이 받아요. 그래서 거꾸로 저는 순수한 정치적 실리주의에 입각하여 가능한 포맷을 얘기해보고 싶은 것이에요. 일본과 벌이는 역사 논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문제는 장기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그게 걸림돌이 되어 현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일이죠. 역사 문제는 전 국민적 차원에서 장기적으로 해결해나갈 문제이기에, 모든 갈등이 다 해소되어야만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되겠지요. 모든 갈등을 다 해결하려고 들기보다는 놓아두어야 할 갈등은 놓아두어야 할 것입니다. 장기적인 갈등 가운데는 긍정적인 갈등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현실적인 공조체제를 먼저 이야기하고, 가능한 한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장기적인 문제를 푸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다시 남북한 문제로 돌아와서 말하자면, 현재 우리는 너무 큰 문제만 갖고 싸우다가, 현실적․실리적 이익을 못 얻고 있으니 통일에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제가 실리를 주장하는 이유는 실리 그 자체가 해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평화와 통일을 위한 사상적 기반의 조성이나 이념이나 도덕적 문제의 해결 같이 큰 사안들은 장기적인 과제로 미뤄놓으면 이를 뒤에서 풀어나갈 것이니, 정치하는 분들이나 실물 경제학 하는 분들은 우선적으로 해결 가능한 현실적 과제부터 찾아서 그 해법을 실리적 차원에서 남북한에 제시해 달라는 뜻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흑백을 가리는 논란보다 하나를 시작하면 서로 양해하면서 긍정적인 활동을 같이 나누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진짜고 저것은 가짜라고 가르는 흑백사고 때문에 남북 갈등보다 남남 갈등이 더 심각해요. 국제 활동보다 한국에서의 내부 활동이 더 어렵고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계산된 언어와 계산된 관점도 중요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합의 하에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서 국내적․국제적 의견을 수렴해나가는 것도 지혜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정부가 갖고 있는 틀을 깨뜨려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차라리 용어는 보수의 용어인데, 그 의미를 다른 식으로 풀어 보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지요. 현 정권이나 보수진영에서 말하는 ‘통일 대박’은 흡수 통일이겠지만, 우리가 말하는 ‘통일 대박’은 평화공존을 의미합니다. 해석은 다르게 하지만, 이슈를 빼앗기지는 말자는 것이죠.

백학순: 박종화 목사님의 말씀은 모두 올바른 지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명박 정부에서 보았듯이, 북한을 다룰 때 겉으로는 ‘상생과 공영’을 이야기하면서 속내는 ‘상대방이 있는 관계’를 마치 ‘상대방이 없는 관계’처럼 규정하면서 ‘북한 위기론’, ‘북한 급변사태론’, ‘통일준비론’ 등 이름만 바꾼 북한붕괴론을 들고 나왔고, 박근혜 정부도 붕괴론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이는 ‘통일 대박론’을 들고 나오고 있지요. 우리 국민들에게 북한은 화해하고 협력하여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뤄나가야 할 ‘동포’인 동시에 패망시켜 제거시켜야 할 ‘적’이라는 이중적 인식의 대상이지만, 그 동안 북한을 붕괴시키는 노력은 실제로 어떤 의미 있는 효과를 보지 못했고, 오히려 남북간에 불신만 깊어지면서 천안함 침몰사건, 연평도 포격사건에서 보듯이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지요. 따라서 다시 강조하는 셈입니다만, ‘상대방이 있는 관계’는 ‘상대방이 있는 관계’로 인정하고, 서로 윈-윈하여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는 방법 밖에는 없는데, 집권세력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거든요. 박종화 목사님이 잘 지적하셨습니다만, 국내외 전문가들이 통일이 되면 비용보다는 편익이 커질 것이고, 서 통일은 대박을 낼 것이라고 하는 소위 통일대박론을 얘기할 때, 그들의 분석에서 공통된 전제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통일이 대박이 되기 위해서는, 북한의 급속한 붕괴나 전쟁을 통한 무력통일이 아닌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대박론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점진적․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달성해야 한다는 설명을 따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점진적․평화적인 방식으로 대박이 나는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5.24 조치’를 해제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최근에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통일부 장관은 북측에서 ‘원인 해결’을 하지 않으면 우리 정부에서도 ‘5.24 조치’를 해제하기 어렵다는 식으로 답변을 하더군요. 우리 정부가 원하는 ‘원인 해결’은 북한이 천안함 사건을 자신들이 일으켰음을 인정하고, 관련자를 처벌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것인데, 북한은 그 동안 자신이 천안함을 침몰시켰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고 있지 않지 않아요? 그리니 우리 정부는 결국 5.24 조치를 해제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5.24 조치를 해제하지 않고서 통일대박론을 이야기하니까, 국민들은 박근혜 정부가 북한붕괴론을 전제한다고 느끼는 것이지요. 더구나 국가정보원 원장이 2015년, 즉 내년까지 한반도가 자유민주주의체제로 통일되어 있을 것이라는 식의 표현을 하고 있잖습니까? 박근혜 정부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북한붕괴론을 선호하는 식으로 남북관계를 다룬다면, 남북관계는 ‘상대방이 있는 관계’이니만큼, 이명박 정부처럼 대북정책에서 정책목표를 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박경서: 저는, 일반 시민들이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지도자를 뽑는 시대가 오도록 하려면, 오랜 시간 동안 공감대 확산을 위한 교육을 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해결 방안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법적․제도적 장치만 갖고서는 현재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하기 어려워요. 결국 평화공존을 추구하는 필요한 법이나 제도도 현재의 지도자들이 만들어야 가능한 것일 텐데 그들이 그런 법을 만들 수 있을까요? 따라서 그런 지도자들이 발을 못 붙이도록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평화와 공존의 가치가 지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동독과 서독에서는 민족의 문제나 통일의 문제만큼은 정권을 초월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법적 장치보다도 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서독 교회가 동독 교회의 목회자들의 월급을 분단 40여 년 동안 지원했는데, 그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거든요. 한반도에서도 인도적 차원의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접근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는 데 교회와 『신학사상』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형상으로 만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 - 교회는 그것을 자신의 임무로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북한에 있는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으니,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우리가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나설 때, 비로소 거기서 평화가 나오고, 공존이 나오고, 공동번영이 나오는 것입니다. 남쪽이 주는 돈이 북한의 유일무이한 자원일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전 세계가 북한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지원해줄 때, 남한의 지원금은 그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을 때조차도 26~32% 밖에 안 됐어요.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제대로 가르쳐줘야 합니다. 또 남한이 북한을 지원하는 것이 결코 ‘퍼주기’가 아니라는 것도 가르쳐야 합니다. 예를 들면, 북한에 의약품을 지원할 때, 물품은 북한으로 가지만, 물품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돈은 이곳에 남거든요.
북한의 현실에 관해서도 오늘의 지도자들이나 전문가들은 어떤 의미에서 전반적으로 다들 모호한 가운데 추측만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북한을 대화의 자리로 끌어내서 그들이 무슨 얘기든 하도록 만들어야 우리도 정확한 정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에, 어렵고 밉더라도 북한을 끌어내서 대화를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봐요. 이번에 제가 놀랐던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북한이 ‘키 리졸브’ 훈련에도 불구하고 이산가족 상봉을 수용했다는 것입니다. 역시 쌍방이 합일점을 향해 달릴 때는 서로 조금씩 양보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입증된 사실이에요. 북한이 무엇을 요구할지 모르겠지만, 남한도 북한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조금씩 양보하고, 모든 것이 복잡하게 엉켜 있는 남북 관계에서 지금과 같은 만남은 갈등을 풀어가는 데 있어 굉장히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백학순 박사님이 말한 것처럼,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진지하게 듣고, 우리가 양보할 수 있는 것은 양보하고, 그쪽으로부터 양보를 받아낼 것은 받아내고 하면서 모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활용해서 남북대화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미리 의제를 정할 것도 없이 만나고, 의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또 만나자고 하면서 한반도의 평화공존과 동아시아 평화 공동체의 문제 등을 놓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참 좋겠어요. 그렇게 하려면, 더불어 사는 것, 평화가 경제보다도 훨씬 앞서는 인간의 고귀한 가치라고 하는 신념이 그 기저에 깔려 있어야 해요.

박종화: 저는 남한의 역사적 경험을 돌이켜 보면서, 그 경험을 북한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은 일본이나 다른 나라의 반쪽이 아니라 남한의 반쪽이니까요. 제가 아직 독일에 있을 때, 독일에서는 88 서울 올림픽 개최에 대해 엄청난 반대운동이 있었습니다. 88 서울 올림픽은 정통성이 없는 독재정권이 벌이는 일종의 ‘쇼’이고, 한국 경제와 통일에도 방해가 된다고 해서 독일 교민들과 운동가들이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물론 올림픽이 한국 사회의 문제를 가린다는 비판도 타당한 것이었겠지만, 올림픽이 민주화 과정에서 안전판 역할을 한 것 역시 부정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 탄압을 받으면서 그를 극도로 증오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박정희의 ‘산업화’가 단순히 슬로건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산업화에 대한 예전의 생각을 바꿔서, 어쩌면 ‘산업화’를 통해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니까 정치적 자유에 대한 문제의식이 싹틀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밥을 주면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머리도 크게 된다는 거죠. 즉, 산업화를 하면 민주화가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북한에 적용해도 큰 무리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흡수 통일 같은 이야기를 하지 말고, 북한이 남한과 평화공존을 하면서 자생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1960년대로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자생적 민주화 의식이 생겨났듯이, 북한 역시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저는 독일이나 체코, 루마니아 등을 보면서 정치 체제의 해체는 가능하지만, 심성이나 사회생활이나 종교성은 해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체제의 외형적 조건은 변할 수 있지만, 그 체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은 쉽게 안 바뀐다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이행했어도 종교는 안 바뀌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정치적 통일을 하게 되면, 북한 사람들이나 남한 사람들 역시 외형적 체제를 변화시킬 수는 있어도, 내면의 변화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가능한 한 북한 체제 하에서 북한의 산업화가 일어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봅니다. 그게 통일을 위한 사회적 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자존심도 덜 상하고요. 독일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못했는데, 우리는 독일의 예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정치적 통일 이전에 이러한 과정을 자연스럽게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정치적 자유와 변화는 그 결과로서 얻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정치인들이 지독한 실리주의자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은 정치인들에게 도덕군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국민들에게 좋은 정치지도자는 도덕군자가 아니라, 정치적 현실주의를 떳떳하게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정권을 바꿔 보면서 배운 것은 정권이 바뀌어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고 봅니다. 진보 정치인들이라도 표를 얻어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자신과 상반되는 견해도 수용하더라는 것입니다. 보수도 자신의 권력을 얻기 위해선 진보의 주장을 수용해야 하지요. 이런 점을 놓고 볼 때, 우리가 사는 시대는 보수건 진보건 자신의 이념을 화석화하지 않고 현실적인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그런 시대인 것입니다. 동방정책을 추진한 사람은  빌리 브란트였지만, 그 열매를 거둔 사람은 콜(Helmut Josef Michael Kohl)이었지 않습니까?
제가 말하는 타협적 현실주의는 누가 일을 시작했더라도 그 열매가 있고 정치적 이득이 있으면 그것을 취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게끔 사회적 여론과 분위기가 조성되어 국가의 이익이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정치인들이 불필요한 이념 논쟁에 속박되지 말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도덕적인 차원에서 평화의 담론을 형성하여야 하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한국의 정치인들은 정치적 책임의식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내세운 정책에 대해서 책임을 잘 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치인을 필요악이라고 느끼는 것 같아요. 만일 그렇다면, 정치인들이 최악까지는 아니더라도 차악은 될 수 있도록 현실적으로 잘 해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저는 정치인들이 오늘 시대에 맞고 사람들 사이에서 공통기반이 큰 정치를 하는 것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반도의 국민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되는 정치를 하면, 시민사회도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못하기에 불필요한 이념적 담론으로 인해 너무 큰 소모전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남북 분단도 소모적이지만, 우리 내부에서 소모적인 이념적 대립의 벽이 불필요할 정도로 너무 높다고 봐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도 우리 내부의 소모적인 갈등이 심해서 언제까지 이런 상황을 겪어야 하나 좀 답답합니다.

박순성: 박근혜 대통령이 말한 ‘통일은 대박’이라는 발언에 대해서는, 그 발언이 형성한 새로운 분위기를 잘 살려야 한다는 주장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주장들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을 표시하면서도, 비판적 지식인의 관점에서 세 가지 정도 비판을 하고 싶습니다. 우선, ‘통일은 대박이다’, ‘통일이 미래다’라고 할 때, 그 초점은 분명히 ‘경제’에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통일이나 평화를 말할 때는 ‘민족,’ ’역사,‘ ’분단의 고통,‘ ’이념 대립의 극복‘ 등을 먼저 말했고, 한반도가 평화통일이 되면 결과적으로 ’경제‘도 좋아질 것이라는 방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순서가 완전히 바뀌었죠. 경제적 이익이 통일이라는 목적에 수반되는 결과가 아니라 목적 그 자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저는 박종화 목사님이 현실주의를 말씀하셨을 때, 정치인들이 천박한 현실주의가 아니라 좀 더 좋은 현실주의를 실천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저도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현실주의적 접근을 받아들이지만, 최근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전적으로 경제적 관점에서만 통일을 보려는 것은 좋은 현실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통일은 대박’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좋은 현실주의인가에 대해서 저는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통일의 목적과 결과가 전도(顚倒)되었다는 것이죠. 박경서 박사님이 인간을 경제의 도구로 삼는 것이 지배적인 문화가 되었다고 비판하셨는데요, 요즘 교황도 그 부분을 계속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통일대박론이 전제하는 경제주의 혹은 경제중심주의에 대해 항상 비판의 시선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백학순 박사님도 여러 번 지적하셨는데, ‘통일은 대박이다,’ ‘통일이 미래다’는 말은 북한을 철저하게 객체화하고 있습니다. 북한과 어떻게 통일을 이룩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상 전무하고, 통일의 경제적 가치가 이러저러하다는 말만 있을 뿐입니다. ‘북한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이런 말에는 아예 빠져 있습니다. 객체화된 북한이 아니라, 타자로서 인정되는 북한, 공존과 통일의 파트너로서의 북한이라고 하는 개념이 1990년대 이후로 통일과 관련하여 계속해서 제시되어 왔는데, 지금 정부의 통일대박론에서는 이 개념이 사라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인식이 통일대박론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끝으로, 앞서 말한 두 가지 위험이 중첩되다 보면, 통일은 우리 사회의 ‘전진’(前進)이 아니라 ‘역진’(逆進)의 계기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경제주의가 더 심화되고, 모든 것이 국가와 자본의 지배를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하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과연 한반도의 통일이 역진의 계기가 아니라 전진의 계기, 진보의 계기가 되도록 할 수는 없을까 고민해야 합니다. 역사의 전진과 진보는, 박경서 박사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간 존엄의 확대,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기반의 확대, 경제적 번영의 종교적․도덕적․문화적 기반의 확대 같은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더라도, 최근 정부가 내놓은 통일대박론은 위험합니다. 저는 비판적 지식인들과 비판적 신학자들이 이런 점을 지적함으로써, ‘통일은 대박이다,’ ‘통일이 미래다’는 주장이 바로 설 수 있도록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학순: 박순성 교수님이 통일대박론에 관해 좋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현 정부의 통일대박론이 경제 중심적이라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에요. 통일이 되면, 분열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하나의 통합된 정체성이 되고, 우리 민족에게 덧씌워진 전쟁의 정체성이 평화의 정체성으로 바뀌고, 거기에 더해서 대규모의 경제적인 편익이 발생하게 되니, 이것이 대박 이 아니고 무엇인가! - 정부와 전문가들은 이런 식으로 말을 해야죠. 그렇게 설명해야 통일대박론이 하나의 담론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적실성을 갖게 되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북한을 객체화하고 ‘갑을 관계’에서 북한을 마치 ‘을’로 보는 태도도 불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상대방이 있는 관계’를 ‘상대방이 있는 관계’로 인정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말씀드린 것이지요.
북한정치를 연구하고 분석하는 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최근 북한의 변화는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자신의 시대’를 열고자 하는 정책과 직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20여 년간의 북한의 대외정책을 보면, 북한은 소련의 붕괴로 국제환경이 크게 악화된 상황에서 ‘앞으로 어떻게 생존과 발전을 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21세기 생존과 발전의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북한판 국가전략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미국, 남한, 일본 등 주변 국가들과 관계개선을 통해 6.25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내고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고, 미국과 일본과 관계정상화를 이룩함으로써 대외환경을 유리하게 바꾸고 한반도를 안정화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소련 붕괴 이후 북한에 대해 과도하게 커진 중국의 영향력을 상쇄하려는 균형전략적인 고려도 있고요. 지금 북한의 김정은은 중국의 시진핑(習近平)과 긴밀히 공조하면서 국제사회에 나오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결국 남한, 미국과 대화하고 협상하여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를 개선하여 ‘한반도 안정화’와 ‘대외관계의 안정화’를 달성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미국이 전혀 움직이질 않고 있으니, 요즈음에는 남한과의 관계를 개선해서 한반도를 안정화시키고 이를 신용(credit)으로 삼아서 미국과 국제사회로 나가야겠다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올해 한미합동군사훈련이 실행되는 중에 남북고위급 접촉을 통해 이산가족상봉에 합의하고 이를 진행한 것은 예전 같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북한은 어떻게 해서든지 남한과 대화를 하고 관계를 개선해서 한반도를 안정화시키고, 그 바탕 위에서 미국과의 관계개선으로 나아감으로써 ‘경제발전’과 ‘인민생활 향상’을 위한 ‘평화로운 환경’을 조성해내겠다는 것이지요.
앞서 박경서 박사님도 말씀해주셨지만, 지금부터 남북관계에서 의제 설정(agenda setting)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그 핵심은 북한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입니다. 아직까지도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로드맵조차 안 나와 있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이번 한미합동군사훈련이 끝나면 남북고위급 접촉이 재개될 텐데, 그때까지는 이미 우리 정부에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관한 로드맵을 완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 기본적인 자세는 역시 ‘상대방이 있는 관계’를 ‘상대방이 있는 관계’로 인정하는 것이지요. 북한이 나름대로 생존과 발전의 전략을 갖고서 자신의 필요에 의해 요즈음처럼 적극적으로 나올 때, 우리 정부는 북한이 우리에게 ‘굴복’해서 이렇게 나온다, 우리의 ‘원칙’이 통했다는 식의 ‘국내정치용’ 표현을 가능하면 삼가면서 실사구시적으로 북한을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남북관계나 외교에서 왜 어떤 상대와 대화를 하고, 왜 협상을 하는가 - 한 마디로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영향력과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한 일이거든요. 적어도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상대방이 도발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예를 들어, 박정희 대통령도 ‘7.4 남북공동성명’을 한 후에 청와대를 방문한 미국무부 동아태차관보에게, 자신은 ‘북한의 대화 의도를 신뢰하지는 않지만, 대화를 통해 북한의 의도를 테스트해보고, 또 최소한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북한의 도발을 막을 수 있다’는 식의 얘기를 했어요. 주제에서 조금 빗겨나는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마는, 저는 박근혜 정부의 대일외교가 크게 실패했다고 보는데요. 한일간에 대화가 끊어지다 보니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일본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하게 된 것이죠. 물론 우리 정부가 일본 정부와 대화한다고 해서 아베 총리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이겠습니다만, 한일관계에서 대화와 협상이 끊기다 보니 일본이 독도 문제나 야스쿠니 심사참배 등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해버린 것이죠. 이런 일들은 한 번 기정사실화되면, 나중에 되돌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남북관계에서만큼은 박근혜 정부가 상식적이면서도 실질적인 원칙들을 잘 지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박종화: 일반적으로 국제공조는 외교에 해당하고, 남북 관계는 특수 관계라고 보는데, 저는 남북 관계가 특수 관계인 측면도 분명히 있지만, 남북도 서로 외교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외교에는 언제나 상대방이 있죠. 그런데 현재 남북은 서로를 군사 작전의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있기는 한데, 상대방을 제거하려고 하죠. 납북이 특수 상황에 있기는 하지만 외교 관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남북 관계를 외교적으로 푸는 것이 최소한 50%는 있어야 합니다.
박근혜 정부의 남북 평화 관련 정책 가운데 하나가 ‘비무장지대(DMZ) 세계평화공원’인 것 같은데요. 제가 생각하기엔, 남한 정부가 좀 더 구체적으로 그곳에 ‘동북아 6자 회담 사무국’을 설치하고, ‘동북아 평화공동체’의 센터를 제공할 용의가 있다는 선언을 먼저 하고, 북한에게도 동의를 요청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북한이 그런 제안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고 봐요. 남한 정부가 그런 행동(action)을 취함으로써, 남북이 합의하고, 6자 회담의 나머지 네 국가들이 동참하게 되면, EU 본부나 NATO 본부가 프랑스와 독일의 치열한 싸움 때문에 양쪽 어디에도 못 가고, 제3지역인 벨기에로 갔던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죠. 우리는 EU 본부나 NATO 본부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으로는 그런 것이 갈 수가 없고, 남한이나 북한 어느 곳으로도 갈 수가 없어요. 결국 갈 수 있는 곳이 마땅히 없으니, 차라리 그것이 비무장지대의 평화공원 안으로 가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선언적인 제안은 일종의 정치적 이니셔티브(initiative)입니다. 일단 선언을 해놓고, 플러스 알파로 유엔 본부나 다른 국제기구들도 동의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뭔가 하나씩 실리 위주로 가시적인 효과를 만들어가지 않으면, 동아시아 국가들은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평화공원을 만들자는 얘기만 있지, 손에 잡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판문점’이 분단의 상징이라면, ‘평화공원’은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그런 평화공원을 만듦으로써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로 모아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평화공원은 남북 간의 이벤트 겸 6자 회담 국가들의 이벤트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 같아요. 저는 오히려 보수적인 정치지도자가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봐요. 평화공원은 작은 것 같지만 굉장히 큰 상징적인 행위일 수 있습니다.

박순성: 박종화 목사님이 말씀하신 ‘평화공원’은 일종의 변증법적 결합의 한 형태인 것 같습니다. 6자회담이 처음 거론될 때, 한국 시민사회는 6자회담이 한반도문제를 국제화시키는 데 그치고 정작 남북한의 당사자성을 오히려 축소시킴으로써 남북한의 발언권을 약화시키지 않는가 하는 우려 때문에, 처음에는 6자회담을 부정하였다가 나중에 발전적으로 수용했습니다. 만일 한반도 DMZ에 만들어지는 평화공원 혹은 평화도시가 한반도 분쟁만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서 동아시아 분쟁이나 무력 충돌을 성찰하고 극복하는 상징적 공간이 된다면, 그 공간은 사람들이 새로운 행동을 하도록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공간은 새로운 사람들을 모으고, 새로운 사람들은 새로운 행동을 하게 되겠지요. 한반도 DMZ에 평화공원을 만들면서, 그것이 단순히 명목상의 세계평화공원이 아니라 실질적인 한반도의 평화공원,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공원이 된다면, 그것은 ‘한반도에서 동아시아와 세계로 가는 길’과 ‘세계와 동아시아에서 한반도로 오는 길’이 결합되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개성공단이나 평화공원처럼 앞으로도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질 터인데, 그런 공간을 만드는 일이 단순한 일회성 이벤트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공간에는 항상 행위주체가 있고, 새로운 행위주체는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행위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행위주체들과 행위들이 서로 충돌하고 배척하는 경계선을 강화하지 않고 행위주체들과 행위들이 서로 뒤섞이고 만나는 공간을 끊임없이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한 만남의 공간은 무력을 바깥으로 밀어내고, 협력과 우정의 주체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와 같은 새로운 공간에 대한 상상력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고민을 하면서 남북한은 평화와 협력의 공간을 더욱 다양하게 만들고 마음의 접촉지대를 넓히는 창의적인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백학순: 박종화 목사님 말씀대로 평화공원을 활용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일일 것 같습니다. 동아시아 여러 국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기구를 만들고, 그 기구를 평화공원 안에 유치해서, DMZ를 남북한뿐만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화해와 협력의 장으로 만들자는 것은 충분히 타당성 있는 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런 평화공원을 만들고자 한다면, 가장 좋은 장소는 판문점일 것입니다.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을 그 분단을 극복하는 평화의 상징으로 만드는 것이죠. 그런데 현 시점에서 한반도 평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DMZ 평화공원보다는 서해 바다의 평화가 더 시급합니다. 서해에서는 군사적 충돌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해 바다의 문제부터 해결하지 않고, 갑자기 DMZ 평화공원을 만들겠다고 하면, 생뚱맞게 들리기 마련이지요.

박경서: 이런 맥락에서 제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절반 이상의 우리 국민이 흡수 또는 무력 통일을 불가능하다는 보고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전쟁을 겪은 입장에서 우리 국민들에겐 전쟁은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 정치권의 일각에서 흡수 또는 무력 통일의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반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지난 정부와는 달리 현 정부가 일단 북한과 만나기는 한다는 점에서, 남북 관계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어요. 우리는, 유럽에서 헬싱키 프로세스를 진행할 때,  특별한 의제 없이 만나는 것 자체가 의제였고, 그렇게 만나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계속해서 프로세스를 진척시켰던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동아시아 차원에서 남과 북이 동시에 이니셔티브를 쥘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동아시아 평화 공동체가 성공한다고 봐요. 저는 남한이 일본과 미국과 중국과 러시아를 잘 조율하면 우리의 주도 아래서 동아시아 평화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습니다. 아주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6자 회담에서 다루기 쉽지 않은 문제를 다자 회담에서 다루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을 것입니다. 역사 문제나 영토 문제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최근 일본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안 좋고, 그래서 앞으로 일본이 6자 회담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국민들이 불편해 할 수도 있는데, 그럴 때 남과 북이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일본 역시 교과서 문제나 영토 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자세를 취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여러 가지 선택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이 주도권을 쥐고 나가야 한다, 저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동아시아 평화와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할

김동진: 마지막으로 동아시아 평화와 한반도 평화통일에 관련해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작년에 WCC 제10차 총회가 부산에서 열렸습니다. WCC 총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여러 가지 논란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그 총회가 한국 교회에 기여한 측면이 분명히 있었다고 봅니다. WCC 부산 총회가 한반도 분단 현실과 동아시아 갈등을 푸는 데 어떤 공헌을했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들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선생님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아울러 동아시아 평화와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하여, 앞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박순성: 한반도 평화·통일에 관련해서 시민사회나 종교계는 오랫동안 국가 차원의 외교만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해 왔습니다. 20세기말부터 시민사회 차원의 외교, 또는 공공외교가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만,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이러한 공공외교가 매우 위축되고 말았죠. 남북관계 차원의 민간교류와 협력뿐만이 아니라, 한-미, 한-일, 한-중 사이의 시민사회 외교도 알게 모르게 위축되었습니다. 그에 비해 경제 분야의 교류·협력은 굉장히 확대되어 왔습니다. 근대사회를 국가, 시장, 시민사회의 3분할 체제로 규정한다면, 최근 몇 년간 한국에서 크게 약화된 시민사회를 활성화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또한 국가나 중앙정부 차원의 외교를 넘어서고자 할 때, 시민사회뿐만 아니라 지방정부 차원의 활동도 매우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면 동아시아 국가들이 분권화를 심화시키면서 지방자치 단위의 외교를 심화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만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워낙 크기 때문에, 유럽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우리는 이 문제를 계속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평화와 협력의 행위주체를 형성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화와 협력의 행위주체를 국가로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것 같습니다. 유럽의 경우에는, 매우 역설적이지만, 국가가 스스로 국가의 주권을 해체하면서 더 높은 수준의 초국가체제를 만드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공공외교, 시민사회 외교, 지방 분권 외교 등과 더불어 다양한 행위주체들을 형성하기 위해 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종교계는 종교계대로, 시민단체는 시민단체대로, 지식인들은 지식인들대로, 새로운 행위주체를 만드는 노력을 각 영역에서 어떻게 열심히 해나갈 것인가, 그리고 국가는 그것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종교계의 경험과 노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다양한 종교가 각기 큰 규모를 유지하며 공존하고 있는 사회는 한국 사회 외에는 없다고 봅니다. 매우 특수한 경험이죠. 물론 한국에서도 종교 간의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종교 지도자들은 종교 간의 평화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고, 이 노력은 대단히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북관계에서도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 즉 개신교, 불교, 천주교, 원불교, 천도교, 유교, 민족종




신학사상 2014년 여름호(165집)
신학사상 2013년 겨울호(163집)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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