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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연 
 신학사상 2013년 여름호(161집) 차례


이번 호에는

구약학에서 한신대 김창주 교수의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 ‘처음과 마지막’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의 상관관계”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은 창세기에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으로 끝나는 성경이 논리적으로 처음과 마지막의 연속성으로서 당연한 귀결로 간주할 수 있으나, 신학적으로 볼 때 창조주와 종말의주, 둘의 상관관계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논의했다.

조직신학 분야에서 손호현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교수의 “캐트린 테너의 대중문화의 신학: 대중문화로 본 하나님, 교회, 성서”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은 오늘날의 신학이 ‘관념철학’에서 ‘문화로의 전환’, 특히 ‘대중문화로의 전환’이란 관점에서 캐트린 테너의 신학을 연구했다. 테너는 교회가 문화적 섬나라가 안 되기 위해서는 성서를 고등문화의 고전에서 대중문화 텍스트로 읽어야 한다고 한다. 동시에 “하나님의 초월성”이 자기-비판적 문화로서 작용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정배 감신대 교수는 “한류(韓流)와 정의평화생명- 한류의 문화전략(담론)으로서 JPIC를 말하다”라는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은 최근 부각되고 있는 한류의 고유성을 인정하되 동북아 나아가 세계를 위한 문화담론으로 정착하기 위한 과제가 무엇인지를 적시했다. 한류의 본질을 현묘지도로서 풍류의 역할인 ‘接’과 ‘含’의 논리에서 찾고, 이런 두 논거를 지닌 풍류의 본질을 興, 情 그리고 한(아우름)으로 봤고, 그것이 유불선 종교들 속에서 저마다 강조되어 들어났고 나아가 한류의 개별 장르들에서 강조되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그 본질이 WCC의 JPIC 신학으로 언표 될 것이라 주장했다.

한형모 일본 교토대 연구원의 “타나베 하지메, 절대무의 매개 그리고 신 문제”라는 논문을 게재했는데, 타나베 하지메는 "신은 절대무이다“라는 명제에서 신학을 발전시켰다. “절대무는 사랑”이라고 보면서, 사랑인 절대무는 자기를 부정하고 자신의 고유한 실체를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절대무는 자기부정을 통해 유가 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겪은 십자가 상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절대무의 자기 부정을 보며, 인간을 향한 절대무의 사랑의 운동을 본다. 인간과 세상 곧 유의 세계는 자기를 부정하는 절대무를 매개로 하여 자신을 실현한다. 신의 사랑을 받은 인간은 무화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실현하고, 타인을 사랑하며 신의 사랑을 완성해 간다. 이렇게 타나베 하지메는 절대무 개념을 통해 신론과 자신의 종교철학을 제시한다. 한형모 박사는 이 연구를 아시아신학 발전의 과정으로 추구한다.  

기독교윤리 분야에서 양명수 이화여대 교수는 “퇴계와 칸트 그리고 아담 스미스의 감정론- 인문주의와 자본주의”논문에서 인간의 내적 숭고한 본성과 현실에서의 도덕규범의 조화를 모색하며 칸트, 퇴계의 인문주의와 아담스미스의 자본주의 탐구를 했다.  

권오왕 박사(숭실대 강사)는 “존 캅의 정치 윤리에 대한 기독교 현실주의적 일 고찰”이란 논문에서, 세계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존 캅의 기독교윤리를 모색한다. 그러나 존 캅의 기독교인들에게 지역적이고 자기충족적 공동체들의 의사 결정 체제에 대한 정치적 제안을 한 것은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에는 다소 이상적으로 보인다고 비판한다. 시민들의 세계적 연대를 이루는 것은 캅의 지역적 의사 결정 체제의 약점을 보완하여 힘의 균형으로서의 정의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선교학 분야에서 김대옥 한동대 교수는 “성경과 꾸란의 공통 내러티브를 통한 무슬림과의 선교적 대화 가능성 연구 -노아 내러티브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성경과 꾸란이 공유하고 있는 인물 내러티브를 통해 양 경전의 공통된 메시지를 강조함으로써 이슬람과의 선교적 대화 가능성을 모색하려고 했다. 김 교수는 서로 상관이 없을 것 같으면서도 동일한 양 경전의 노아 내러티브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상대의 경전을 이해하고 또 수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그러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상호간의 공통주제를 강조함으로써 두 경전 간의 대화를 통해 선교적 접점을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추적해 보았다.
    
최형근 서울신대 교수는 “한국교회 갱신을 위한 한 모색으로서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관한 고찰”이란 논문에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앙을 사유화시키고 제자도와 공동체를 파괴하는 뿌리로서 이원론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고찰하고 이것의 극복을 위해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특징인 제자도, 공동체, 평화와 화해를 살펴보고, 아나뱁티스트의 신앙적 특징을 실천하는 춘천 예수촌교회의 사례를 제시한다.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 시기에 교황과 황제의 재산을 공유화하는 과격한 종교개혁운동으로 시작된 아나뱁티즘은 초대교회가 추구하던 예수 따름의 제자도와 진정한 공동체, 그리고 평화와 화해를 통해 교회의 정체성을 추구했으나, 기존 제도교회에 의해 오랜 기간 동안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오늘 기독교는 아나뱁티스트에 의해 다시 개혁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편집후기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국민화합과 국민통합을 천명하고 남북관계도 신뢰관계로 발전시키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밝혀 국민들은 희망의 기대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정책과 선언은 구두선에 그치고, 실제로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어 국민들의 실망이 크다. 사회적으로 지역만이 아니라 계층 간의 갈등도 더욱 증폭되고, 빈부격차는 더 심화되어 빈민과 서민들은 물론 중산층까지도 몰락하는 고통을 겪고 있다. 남북 간에도 신뢰와는 정반대의 불신과 증오의 대결로 개성공단도 중단되고 남북 간에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이런 갈등과 고통의 현실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자들이 한반도와 우리현실을 직시하고 이 현실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증거하고 이에 참여하는 신학적 작업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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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161집)              

연구 논문

김창주 ․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처음과 마지막’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의 상관관계
손호현 ․ 캐트린 테너의 대중문화의 신학: 대중문화로 본 하나님, 교회, 성서
이정배 ․ 한류(韓流)와 정의평화생명- 한류의 문화전략(담론)으로서 JPIC를 말하다
한형모 ․ 타나베 하지메, 절대무의 매개 그리고 신 문제
양명수 ․ 퇴계와 칸트 그리고 아담 스미스의 감정론- 인문주의와 자본주의
권오왕 ․ 존 캅의 정치 윤리에 대한 기독교 현실주의적 일 고찰
김대옥 ․ 성경과 꾸란의 공통 내러티브를 통한 무슬림과의 선교적 대화 가능성 연구
         -노아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최형근 ․ 한국교회 갱신을 위한 한 모색으로서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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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1

존 캅의 정치 윤리에 대한 기독교 현실주의적 일 고찰


                                                                                           권오왕 (숭실대 강사/ 기독교윤리학)



초록

   세계화 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경향을 강력하게 보인다. 존 캅은 이렇게 경제적인 가치에 대한 절대적이고 우선적인 헌신을 경제주의라고 정의한다. 경제주의를 경제 원리로 받아들이는 강대국들은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시장의 확대를 추구하며 제3세계 국가들에게 무역 규제를 풀고 자유로운 시장 경제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할 것을 요청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추진한다. 더욱이, 경제주의는 그러한 국가들에서 지속가능한 지역적 경제 성장을 위협한다. 이러한 심각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캅은 기독교인들이 지구주의의 관점에서 민주중의와 지속가능한 경제 성장에 대한 비전을 세울 필요가 있음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의 지역적이고 자기충족적 공동체들의 의사 결정 체제에 대한 정치적 제안은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에는 다소 이상적으로 보인다. 시민들의 세계적 연대를 이루는 것은 캅의 지역적 의사 결정 체제의 약점을 보완하여 힘의 균형으로서의 정의를 이룰 수 있다.        

주제어:
존 캅, 기독교 현실주의, 경제적 인간, 시민 연대, 공동체  



1. 들어가며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 질서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세계화 시대 속에 살고 있는 시민들은 세계화라는 삶의 맥락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의 맥락에 대한 윤리적인 평가와 더불어 삶의 규범을 형성할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다. 특히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경제 행위를 추구하는 경제적 인간(Economic Man, Homo economicus)을 이상적인 경제 행위의 주체로 상정하며 경제적인 가치에 절대적이고 최우선의 헌신을 다 부여하는 현상을 경제주의(economism)라고 존 캅은 정의한다. 경제적 인간은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에 대한 정부의 개입과 간섭을 자유로운 시장 경제에 대항하는 악한 세력이라고 판단한다. 특히 경제적 인간은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시장 경제 질서를 지지하면서 시장을 확대하고자 한다. 게다가 경제적 인간은 각국 내에서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유방임(laissez-faire) 시장 경제 체제를 추구함과 동시에 국가간 무역의 장벽을 제거하여 경제 활동의 국경선을 제거하는 정책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인다. 특별히 오늘날 자유 방임 경제 사상에 대한 열망과 환상이 신자유주의에 의해 지지받고 있는 경제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현했다. 미국과 같은 강대국들은 경제주의를 자국의 경제 운용의 암묵적 원칙으로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국가들은 제3세계 국가들에게 자국과의 무역에 있어서 규제를 완화할 것과 자유 시장에 대한 장벽을 제거할 것을 요구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위한 시장 확장을 추구한다. 그들은 제3세계의 개발도상국 혹은 후진국들을 북미자유무역협정(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s, NAFTA) 또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GATT)과 같은 무역 협정을 통하여 위협한다.
        이러한 양상은 2011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체결 및 국회 비준과 관련하여 한국 사회에 표면화되었다. 즉, 많은 국내 시민 사회 단체들과 종교인들은 협정의 체결과 국회의 비준 과정이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자유 무역으로 말미암아 경제적, 사회적 양극화는 심해지고 사회 경제 체제가 미국에 예속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으며 게다가 수많은 농민들이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협정 체결 및 비준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특별히 미국이 진행하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한미자유무역 협정 체결 및 비준 과정을 파악해 보면 다분히 강대국인 미국의 이해 득실에 따라서 한국의 정부가 타협한 불공정성이 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을 견제할 만한 정치 권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횡포를 견제함과 동시에 민주적 국제 질서를 세워서 지역 공동체 경제를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강대국들의 정책으로부터 보호하고 육성해야 할 기독교 정치 윤리적 과제가 있다.
        존 캅은 세계화를 뒷받침하는 경제주의의 출현과 논리, 그리고 경제주의가 가져오는 위기에 주목한다. 그는 과정 신학적 입장에서 생태계의 파괴와 양극화, 공동체성의 상실 과 같이 경제주의에 의해 야기된 지구에 대한 위기 상황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캅은 지구라는 “살아있는 행성(the one living planet)”이 갖고 있는 생명이라는 가치에 대한 헌신을 의미하는 지구주의(earthism)의 입장에서 기독교인들이 새로운 기독교 정치 윤리의 전망과 더불어 지속가능하면서도(sustaining) 자족적인(self-sufficient) 경제 성장의 비전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그는 이러한 새로운 사상을 세계에 대한 관계적 관점을 제시하는 범재신론(panentheism)에 기초하여 전개한다. 그러나 지역 공동체들의 의사 결정에 큰 가능성을 둔 캅의 제안은 집단이 이기적이라는 점을 주시하는 기독교 현실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이상적인 측면이 있다. 따라서 캅의 순전하고 지역적인 의사 결정 체제가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기독교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과 동시에 이기적인 죄성을 동시에 내포한 역설적 존재로 이해하여 집단간의 권력 관계를 이해하면서 민주주의와 세계 공동체 수립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이해하는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의 관점에서 캅의 논의를 평가하면 현실적인 인간과 집단에 관한 이해를 기초로 하여 캅의 주장을 보완할 수 있다. 특별히 니버가 주장한 권력 균형으로서의 사회 정의를 세계적 차원에서 이루기 위하여 지역 경제 공동체들의 시민들은 시민의 세계적인 연대를 이루어야 할 윤리적 과제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세계화 시대 속에서 제기되는 기독교 정치 윤리의 과제와 그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특별히 세계화가 경제주의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고 지적한 존 캅의 신학적 논리의 그의 정치 윤리, 그리고 그가 제시한 지역 공동체 의사 결정 체제와 생태적 경제 모형에 대한 그의 주장을 기독교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또한 새로운 세계적인 시민 연대의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한 신학 윤리적 반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2.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에 기초한 시장 경제 모형에 대한 존 캅의 비평      

        우선 캅은 경제적 인간을 추구하는 경제주의가 공동체성을 파괴함을 지적한다. 경제적 인간은 공동체로부터 독립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공동체를 파괴하는 정책을 펼 가능성이 높다. 자본주의적 산업화에 따른 농촌 인구의 도시로의 이동으로 말미암아 농촌과 지역 사회의 인구는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공장은 이익이 되는 곳으로 이전하게 된다. 농촌과 지역사회의 공동체적인 삶의 양식은 자신의 이익 추구와 자유로운 경쟁이 삶의 지배적인 원리로 작동하는 자본주의적인 삶의 양식으로 대체된다. 자본주의적 산업화로 인한 농촌의 근대화는 도리어 공동체성의 상실을 가져오고 도시에 사는 시민들도 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될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경제주의를 지지하는 경제 이론은 시장 경제의 과도한 발전을 가져오고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의 차이를 심화시키면서 생태계의 파괴 등 전지구적 재앙을 가져온 경제 활동의 실행을 지원하는 역할을 많은 국가들에서 담당해왔다. 근대의 경제 체제에서 인간은 자연을 인간의 이용 대상으로 간주한다. 자연 자원을 이용하고 개간하여 인공적 상품을 생산했다. 자연 자원 가운데 하나인 토지 역시 자본의 한 형태로 취급되고 사고 팔리는 상품으로 간주되었다. 캅은 경제주의가 자연의 중요성을 무시했으며 자본에 통합되어진 자연이 상품처럼 취급되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경제주의는 자연을 돌보지 않고 자연 자원으로부터 상품을 생산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 한편 많은 경제학자들은 자연 자원이 쉽게 다른 자원으로 대체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기술 발전으로 자연 자원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 자원의 부족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게다가 많은 기독교인들은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창세기 1장 28절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인간중심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자연을 파괴하고 이용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판단한다. 즉, 그들은 인간과 자연을 둘로 나누어 자연을 대상화함으로써 인간에게 하나님이 자연과 다른 “피조물들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했기 때문에 “인간의 목적을 위하여 환경을 기술적으로 조작”는 것을 기독교가 정당화한다고 판단한다.
        이와 같이 인간을 공동체와 관련없는 개인으로, 자연을 인간의 도구로 이해한 결과 경제적 사고에서 공동체적 가치가 상당부분 배제되기 때문에 전통적인 공동체적 삶의 양식은 해체되기 쉽다. 또한 자연은 다만 인간의 개발 대상으로서만 존재하지 그 자체로서는 가치를 갖지 않기 때문에 자연은 인간에 의해 개발되고 파괴되며 그로 인한 문제에 대한 대응은 성장 위주 경제 정책에 종속된다. 경제주의에 기초하여 경제 성장을 위해 자연 자원을 상품 생산과 판매를 위해서 과도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개발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지구 생태계의 파괴를 가져왔으며 인간 상호간의 관계도 붕괴되어갔다. 인간 중심적으로 자연을 이해하여 인간의 이익을 위해 과도하게 자연을 개발한 것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삶에 있어서도 비인간적인 삶의 양식을 초래했다. 이러한 무분별한 환경 개발은 심지어 "생명권"(biosphere)의 파괴로까지 이어져왔다.
        그런데 경제 성장이 전지구적 삶의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경제 성장 정책에 우선적인 관심이 주어지면서 경제주의에 의한 공동체적 생활 양식의 붕괴와 생태계 파괴는 용인되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즉,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 생산성의 성장이 실업, 복지, 그리고 생태계 파괴와 같은 모든 경제 문제들의 해결 방안이며 경제 성장이 인류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경제 성장이 환경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경제 성장을 통해 부유해진 계층의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환경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초적 필요를 충족시키면 장기적 관점에서 중요한 환경 문제에 집중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은 부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투쟁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대다수 사람들의 환경에 대한 행태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또한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은 생산 증대를 추구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도리어 자연 환경을 파괴할 수 있다. 다음으로 경제 성장이 정치적 조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인권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경제 활동에서의 자유의 경험은 정치 영역에서 자유를 요구하게 하고 증대하는 번영은 모든 이에게 만족을 주게 되면서 계급 투쟁의 요인은 감소하게 된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멕시코와 같은 국가에서는 도리어 가난한 자들의 민주화와 인권에 대한 요구를 정부가 군사력을 사용하여 억누름으로써 국가 경제의 성장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성장을 별로 가져오지 못했다. 게다가 경제 성장이 고용을 창출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많은 나라에서 경제 성장은 도리어 실업을 증대했다. 경제 성장의 중요한 양상 가운데 하나는 더 많은 상품을 더 적은 노동력을 고용함으로 생산성을 증대시키고 비용을 절감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계화를 통한 산업화는 농촌의 농업을 상업적으로 변화시키면서 동시에 농업에 종사하던 많은 사람들의 실업을 초래했다. 캅이 지적한 바와 같이 거대한 도매점인 월마트가 들어오면 몇몇 사람들이 월마트에 점원으로 고용될 수 있지만 그 인근의 수많은 소매상들의 몰락을 초래한다. 그러다 보니 경제 성장이 가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된다. 지난 50년간 가난의 해결에 있어서 경제 성장이 성공한 것이 거의 없다. 오히려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은 국내적으로, 국제적으로 부의 편중 및 빈부 격차를 증대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정부는 부의 지나친 집중이 시장의 올바른 기능을 저해한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많은 국가에는 시장에서 부자가 독점적으로 얻는 이익에 제한을 가하는 법이 있으나 성장 지향적 분위기는 그 법의 집행을 어렵게 만든다. 게다가 점증하는 기업의 힘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법을 세우도록 하지 시장의 올바른 기능을 위해 법을 세우도록 하지 않는다.
        그런데 경제적 인간은 경제적 생산성의 향상이 전지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정부가 상품의 생산에 개입하거나 물가를 규제하는 등의 방법으로 시장에  개입하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즉, 캅이 지적하듯이 경제적 인간은 정부의 중요한 기능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정부의 개입에 대한 원칙이 있음을 주장한다. 우선, 정부의 시장에의 간섭과 개입으로 인한 자유로운 경제 활동에 대한 규제는 투자를 왜곡시킴으로 말미암아 시장의 확장을 늦추기 때문에 경제 성장을 방해한다. 이 사실이 시장과 관련해서 정부가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정부는 사기업이 담당해서 건설하거나 설비하기에 이익이 되지 않는, 고속도로와 같은 필요한 사회 기반 시설을 제공해야 한다. 정부의 공권력 행사는 공공 질서를 보장해야 한다. 정부는 판매에 있어서 속임수나 사기를 막아야 하며 시장으로부터 건전한 상행위를 위협하는 위험한 요소들을 제거해야 한다. 정부는 노동 현장의 안전과 보건을 감시해야 하며 어린이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도록 제한을 가해야 한다. 정부의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은 상행위로부터 야기되는 환경의 오염을 막고 필요한 상품 생산의 독점을 막아서 시장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이렇게 자유로운 시장 경제를 추구하는 경제적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자국 내 시장에서 정부는 시장 경제의 주체인 생산자와 소비자의 자유로운 시장 경제 활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지원과 감독, 혹은 견제 등의 방식으로 제한적으로 개입해야 하며 그 개입도 개인의 자유로운 시장 경제 활동을 지지하고 격려하는 방향으로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경제적 인간의 시장 경제 활동을 지지하는 자유 방임적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제한적으로만 유용할 뿐”이임을 캅은 지적한다. 경제주의 아래에서 시민들은 타인들과 자연을 시장 경제 체제에서 이익 추구를 위한 유용성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하다. 경제주의는 또한 경제적 양극화를 심화시키면서 가난한 자들을 사회적으로 소외된 존재로 만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이 사회적 범죄를 짓도록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경제주의는 또한 무분별한 자연 자원의 개발로 이어져 전세계적 환경 파괴를 일으키며 환경 문제를 발생시킨다. 시장 경제 모형은 시장의 확장과 성장에 관심을 쏟다 보니 자연 자원의 투입과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서 배출되는 쓰레기의 자연 환경에의 방출을 통해서 전지구적인 환경 파괴를 가져오게 되었다. 게다가 인간은 시장에서 경쟁하는 존재라기 보다는 공동체내에 존재하며 공동체 내에서 상호간에 속하는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주의는 공동체적 정신을 파괴한다. 경제주의는 특별히 제3세계에 위협적이다. 미국과 서구의 제국주의적 국가들은 대체적으로 제3세계의 경제 문제에 간섭하면서 자국의 시장을 확장시키기 위해 자유 무역에 대한 장벽을 제거할 것을 요구한다. 때때로 강대국들은 가난한 국가들을 통제하기 위해 군사력까지 사용한다.    

3. 존 캅의 기독교 정치 윤리                          

        지금까지 캅의 분석을 살펴본 바와 같이 경제주의는 공동체 중심의 삶의 양식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자연 환경의 파괴로 인하여 전지구적 재앙을 가져오는 위험이 있다. 이 장에서는 생태계의 파괴 없이 경제적인 삶을 꾸리는 새로운 기독교 정치 윤리에 대한 캅의 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경제적 인간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행위의 자유로운 선택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선택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과 인간과 자연간의 상호 관계에 대한 선택의 책임의 중요성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인간 상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는 재화와 용역의 생산과 소비만큼 중요하며, 따라서 인간 공동체를 계속해서 파괴시킴이 없이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식을 찾는 것은 중요한 기독교 윤리적 과제이다. 경제주의에 의해 야기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여 이해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극복하면서 인간과 자연을 상호 관계적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세계관위에 시도되어야 한다. 캅은 기독교인들이 지구주의와 범재신론의 관점에서 인간을 새롭게 이해하고 인간 상호간의,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여 인간과 공동체의 새로운 비전을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과 세계가 상호 영향을 미친다는 범재신론에 따르면 하나님은 세계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세계는 하나님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영원하지만 하나님의 경험의 성격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관계적인 시각은 인간과 지구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인간과 자연 또한 공동체적 존재로서 지구에 존재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범재신론과 지구주의는 경제주의를 극복하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 범재신론적(panentheistic) 관점에 따라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를 이해해 보면, 하나님의 초월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성경에 충실하다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기독교인의 경험을 무시할 가능성이 있다. 범재신론에 따르면, 피조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신적 생명에 참여한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 대한 지식은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다. 세상의 기쁨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신다. 인간의 결정은 다른 피조물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를 이해하면 지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중요성에 대한 인간의 감각이 높아진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또한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에 존재하며 미래에 존재할 모든 존재는 하나님 생명의 일부이다. 그러나 캅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이 하는 것, 인간이 다른 인간 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과 피조 세계, 지구에 대해 하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캅은 특히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에 의해 파괴된 생태계를 회복하고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경제 모형을 범재신론적 지구주의의 입장에서 제안한다. 즉, 그는 지구주의의 관점에서 기독교인들이 경제 모형을 평가하는데 적용할 수 있는 4가지 원리를 제시한다. 우선, 기독교인들은 가난한 자에 대한 정책의 효과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의사 결정은 가능한 한 가장 낮은 단계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하는 보충성의 원리가 지지되어야 한다. 인간은 건강한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믿는다. 또한 인간은 전 인류의 복지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이러한 4가지 원리에 비추어 볼 때 경제주의에 기초한 경제 활동은 바람직하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캅은 생태적 모델에 입각하여 경제 모델이 구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태적 모델은 모든 개개 인간의 본질적 가치에 대하여 강조한다. 물론 개개인은 관계 속에서 그들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공동체적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단지 관계의 산물만은 아니다. 자유로운 개인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존재를 초월한다. 즉, “개개인은 관계로부터 창조적 종합을 창조한다.” 그러나 개개 인간의 초월성은 무한하지 않다. 인간은 그들의 역사적 상황과 이해 관계에 의해 “조건지어지고(conditioned)” “제한된다(constrained)”. 그런데 "본질적 가치는 인간에게만 제한되어있지 않다." 자연 환경의 파괴는 인간에게 큰 영향을 미치며 인간과 자연 환경은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본질적 가치는 자연에도 존재한다. 이렇게 볼 때 경제가 추구하는 목적은 인간과 자연 모두의 공생(symbiosis)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생태적 경제 모델의 입장에서 캅은 지역 경제의 자족적 성장, 공동체의 발전, 그리고 탈중심화를 통한 지역적 의사결정 체제를 지지하며 지구의 회복을 통해 기업과 자연 모두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우선 캅은 인간 상호간 그리고 더 넓은 세상과 관계를 맺고 있는 공동체 속의 인간(persons-in-community)에 대한 이해에 기초한 경제 이론을 발전시킬 것을 제안한다. 즉, 인간을 시장 속의 개인(individual-in-market)으로 이해하는 관점을 공동체 속의 인간(person-in-community)으로 이해하는 관점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캅은 주장한다. 오늘날 세계화된 사회 속에서 경제 활동의 근본 원리에 개인주의적인 인간 이해와 더불어,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보다는 분리성을 인정하는 이원론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에 기초한 경제 사상은 인간 공동체로부터, 그리고 인간과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성으로부터 추상화되어 분리된 것이다. 캅은 인간과 다른 인간 및 자연과의 관계성속에서 인간이 존재함을 주장한다. 인간은 공동체 내에서 형성되고 정보를 얻고 교육받는다. 진정한 개체성은 공동체에서, 공동체를 통해서 달성된다. 인간은 자연 환경도 포함한 공동체 속에서 존재하는 공동체 속의 인간으로서 존재한다. 경제가 지향하는 목표 또한 공동체의 공유된 목표와 일관성을 갖도록 공동체가 조직되어야 한다.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의 실현을 위해서는 정치의 경제에 대한 우위성을 회복하는 새로운 정치적 질서에 대한 이상이 필요하다. 그러나 과거에 정치가 경제에 대해서 우위성을 담지했던 민족주의 시대에는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등 파괴적인 결과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적 질서의 구상은 과거의 민족주의에 매여 있어서는 안된다.  
        다음으로 캅은 경제 성장에 필요한 부존 자원의 한계에 주목한다. 즉, 과도한 경제 성장은 제한된 자원을 파괴시키며 고갈시킬 뿐만 아니라 자연 자원을 획득하기 위한 국가간 경쟁 및 충돌의 가능성을 높인다. 따라서 시장의 확장을 향한 경제 성장이라는 목표가 아니라 공동체의 재건을 향한 경제 성장이라는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 시장의 규모에 관한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다. 우선, 캅은 지속가능한 경제 성장을 제안한다. 전체 지구의 상황에서 전체 경제와 관련하여 인간 경제 활동의 최적 규모는 근본적으로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의 과제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오늘날의 경제 규모는 현실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unsustainable). 시장 경제의 규모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재화와 용역의 생산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압력을 지구 환경에 가했는가를 밝혀야 한다. 특별히 생산 과정에서의 환경에 대한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는 상품의 생산과 공급의 과정을 축소해야 한다. 즉, 기계화되고 전문화된 공장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으로부터 공동체적이고 참여적이며 자연적인 생산 과정으로의 전환은 환경에 더 적은 압력과 충격을 주게 된다. 이러한 변화 과정은 시장 경제의 성장 지향적 정책에서 전지구적 복지로의 방향의 전환을 의미한다. 축소된 상품의 생산 과정은 경제적 자립 및 더 축소된 영역에서의 상대적 안정성을 가져오며 시장의 성장이 아닌 공동체의 부흥에 기여하게 된다. 또한 공동체적 삶을 목표로 삼는 경제 체제는 공동체에 봉사해야 한다. 건강한 공동체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통해서 생계의 수단에 대한 기본적인 조절을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자기충족적(self-sufficient) 경제 단위들이 소규모 지역에서 존재할 때 가능하다. 노동의 기쁨과 공평한 분배, 그리고 검소한 삶의 실천은 공동체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만족을 느끼게 하며 삶의 의미를 소비나 소유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다른 성원에의 복지에의 공헌에서 찾도록 한다. 캅은 기독교인들이 지향하는 공동체는 몇몇 초국가적 기업에 모든 사람들이 종속되는 것이 아닌 자유로운 사람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자기충족적인 지역 경제 공동체의 활성화가 단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는 세계 경제 통합보다 더 선호된다.
        캅은 생태적 경제 모형을 추구하기 위한 시민의 정치 윤리를 제시한다. 즉, 자기충족적 지역 경제 공동체에서 정치적 의사 결정이 구성원들의 민주적 참여에 의해 이루어진다. 게다가 탈규제를 통한 부유한 선진국들의 과도한 경제적 개입으로부터 가난한 국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캅은 가난한 국가들이 탈중심화된 새로운 의사 결정 체제를 세울 수 있는 어느 정도 민족주의적인 입장을 취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자기 충족적 지역 경제 공동체들은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지속적인 경제 활동의 조건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에 관한 타당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결정이 반드시 옳거나 현명하다고 보장할 수는 없으며 비극적인 상황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 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만일 모든 정치 권력이 지역 공동체에 주어진다면, 권력이 이웃과 지구의 미래를 위해 파괴적인 방법으로 행사될 수도 있다. 캅은 이러한 체제의 약점을 인정한다. 즉, 때때로 지역 경제 공동체의 의사 결정이 잘못될 수 있다. 공동체의 미래를 올바르지 않게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많은 재난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만약 지속가능한 자기충족적 경제 공동체간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그들 사이의 분쟁을 어떻게 조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지역 경제 공동체 중심의 의사 결정 체제의 약점을 보완할 필요가 제기된다. 캅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갈등 상황에 관하여, “공동체의 공동체의 공동체의 공동체”(communities of communities of communities of communities)가 더 작은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4. 존 캅의 정치 윤리에 대한 기독교 현실주의적 논평  
        
        캅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시대 속에서 자유 방임적 시장 경제 질서의 추구에 의해 파괴된 생태계를 회복시키고 공동체적 삶의 양식을 부흥시키는 새로운 기독교 정치 윤리를 제안한다. 필자는 경제주의에 의해 발생된 심각한 문제들과 경제 생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전망을 세울 필요를 제시하면서 생태적 경제 모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캅의 사상은 중요하다고 판단한다. 캅이 제시한 생태적 경제 모델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파괴된 관계를 회복시키는 새로운 관계적인 세계관의 수립에 공헌할 수 있다. 시장에 존재하는 개인으로부터 공동체에 존재하는 인간으로 경제적 인간관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그의 제안은 인상적이다. 캅은 또한 의사 결정에 있어서 지역 공동체를 구성하는 시민의 참여와 민주적 역할을 강조하는 정치 윤리를 제안한다. 의사 결정 과정에 있어서 지역 공동체의 중심성에 대한 그의 강조는 가난한 국가들의 경제를 보호하고 그들의 지속가능한 경제 성장을 지지하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캅의 경제 체제에 대한 이해는 미국과 같은 강대국들과의 협상에 있어서 협상 당사자들이 지켜야 할 협상의 윤리적 가치, 즉 경제 공동체의 자기충족적이며 공생을 추구하는 지역적 경제 공동체의 가치를 보호하고 상호 배려해야 한다는 협상의 윤리적 가치를 제시하는 데 공헌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과연 캅이 주장한 대로 공동체 속의 인간으로의 인간관의 전환과,  지역적 경제 공동체의 수립으로 구체화되는 생태계 경제 모형의 실현이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이 지배적인 오늘날 역사의 현실 속에서 얼마나 가능할지에 관한 물음을 제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현실의 인간 역사에서 공동체적 인간 이해에 입각한 생태적 경제 모델의 실현 가능성을 판단하기 위하여 인간과 집단, 사회 정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기독교 현실주의적 논의를 펼친 라인홀드 니버의 입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니버는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인간도 도덕적 교육이나 종교적 감화에 의해 어느 정도 선한 방향으로 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집단의 경우 그 집단의 강한 이기성과 비도덕성 때문에 집단간의 관계는 불가피하게 이기적인 집단간의 권력 관계이다. 특별히 니버는 디트로이트에서 목회하면서 자유방임 자본주의 체제에서 발생하는 부자와 가난한 자,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경제적, 사회적 양극화로 말미암은 갈등과 대립에 주목한다. 즉, 니버에 따르면 고전적 자유방임주의에 기초한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의 이기성에 대한 통찰을 받아들여 세워져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자유방임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약점은, 노동자들의 사회적 상호 작용에 의해 생산되는 재산을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이다. 또한 자유방임 자본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로운 열정이 질서와 조화를 이루도록 제한될 수 있지만 니버는 이기적인 집단 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활력(vitality)이 조정되고 관리되지 않으면 사회의 질서가 무너질 위험이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자유방임 시장경제 체제는 재산의 방어적 성격을 강조한다. 즉, 재산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침해로부터 그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물질적 자원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기적인 인간은 재산을 취득하게 되면 더 많은 재산을 추구하도록 자극받게 되며, 그 결과 재산의 추구가 소수의 특권층에 집중되게 되어 도리어 사회적 부정의를 가져오게 된다.    
        게다가 자본가는 상품을 생산하여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하여 값싼 원료와 노동력, 그리고 상품을 판매할 더 큰 시장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상품 생산자와 판매자에게 다른 국가로 가서 상품을 판매하고 원료와 노동력을 획득할 동기를 제공한다. 결국 자본주의는 제국주의를 가져오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게다가 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유기적인 힘, 즉 언어와 민족성과 같이 “의식적인 정치적 통제에 영향을 잘 받지” 않으면서 집단적으로 응집하는 힘에 의해 국가의 이기심이 형성되는데 이렇게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국가들의 관계 속에서 완벽한 이상적인 세계 정부는 존재하기 어렵다. 현실적으로 볼 때에도 그러한 이상적인 세계 정부의 존재는 가능하지 않았다. 니버의 지적대로, 세계 정부를 세우기 위해서는 새로운 입법 기관을 비롯한 법적 조직을 구축하여 새로운 주권을 세계 정부에 부여해야 한다. 그런데 세계 각국이 자신의 주권을 축소 혹은 포기하면서까지 세계 정부에 주권을 주기 위해 국제적 회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이러한 제안의 실현가능성은 거의 없다. 냉전 체제에서 소련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이 세계 정부의 권력에 복종하고 자기들의 권력을 축소하리라는 기대는 매우 순진한 것이라는 니버의 통찰력은 주목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세계 정부의 권력에 복종하기에는 세계 사회의 통합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니버는 지적한다. 사회의 통합을 위해서는 인종, 역사, 언어, 문화, 종교에서 공통된 요인이 필요한데 세계 사회가 공유하는 요소가 부족하여 사회를 조직적으로 통합하는 힘이 부족하다. 니버에 따르면 공공선을 증진하는 방향에 기초해서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부자들의 이기적인 이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정부는 타락했고 국가의 의사결정이 바로 기득권층의 의사 결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현실의 양상이다. 이렇게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고 추구하는 방향으로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는 국가들에 의해 구성되는 국제 관계는 무정부적이며 지나치게 경쟁적이기 쉽다.
        그러나 니버는 세계 정부의 가능성에 대하여 완전히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는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필요성, 그리고 사회 정의의 구조를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설명하면서 세계 정부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그의 입장을 제시한다. 즉, 니버는 민주주의가 인간의 정의를 향한 능력 때문에 가능하고 인간의 부정의를 향한 경향성 때문에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정의의 구조로서 권력의 균형과 함께 조직하는 중심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집단간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간의 권력 관계인데 어느 한 집단에 권력이 집중되면 전제 정치가 발생하므로 권력의 균형이 필요하며, 집단간의 관계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정치 세력이 존재하지 않으면 무정부상태에 빠질 우려가 있으므로 조직하는 중심이 필요하다. 따라서 니버는 권력 균형과 조직하는 중심이 정의의 구조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조직하는 중심(the organizing center)은 국제 질서에서는 세계 정부가 존재해야 할 필요성과 동시에 가능성을 설명한다. 물론 니버는 세계 정부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인정한다. 다시 말하면, 니버에게 있어서 불편부당한 입장에서 집단간의 갈등에서 충돌하는 이해 관계를 중재하는 조직하는 중심으로서의 세계 정부는 “국가들의 상호의존 때문에 하나의 가능성인 반면에, 지구 공동체에 내에 충분한 유기적인 결합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의 불가능성”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니버와 캅의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입장은 서로 공통된 점이 있다. 캅과 니버 모두 자유방임 시장경제체제가 가져오는 실업, 양극화, 제3세계에 대한 제국의 지배력 강화 등과 같은 위기 상황에 대해서 우려를 표한다. 그러나 문제 상황에 대한 해결 방안에 대해서는 두 학자 사이에 차이가 있다. 인간을 하나님의 역사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능동적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이해하는 캅은 범재신론적 관점에서 시장 속에서 활동하는 이기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공동체 속에서 다른 인간 뿐만 아니라 자연과 조화로운 관계를 이룰 수 있는 존재로서 변화될 가능성을 긍정한다. 그러나 니버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캅의 입장은 이상적으로 느껴진다. 니버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이기심을 인정하며 집단 간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집단간의 권력 관계임을 지적한다. 따라서 캅이 제안했던 지역 공동체간의 유기적 의사 결정 구조도 현실적으로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니버의 입장에서는, 캅이 주장한 대로 시장 속에서 존재하는 이기적인 경제적 인간이 공동체 속에 관계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으로 변화되는 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교육과 종교적 체험을 통해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집단의 차원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과연 캅이 주장하는 대로 환경과 생태의 보전 때문에 자신의 경제 규모를 지속가능성에 비추어 얼마나 조정 혹은 축소시킬 수 있을지, 그리고 공동체의 부흥을 위해 시장의 확장을 위한 활동을 스스로 얼마나 제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또한 캅의 공동체적 인간 이해는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의사 결정이 가능한 지역적 공동체의 수립 가능성을 긍정하면서 하위의 지역 공동체의 의사 결정이 어려울 경우 상위의 지역 공동체의 의사 결정에 의존하는 형태의 정치적 구조가 가능함을 주장한다. 시민들이 검소한 생활과 공정한 분배, 그리고 복지에의 공헌을 통해 삶의 만족과 의미를 얻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의사 결정 과정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지역적 경제 공동체를 이루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이기적인 인간 개개인이 과연 자신의 욕구를 절제하면서 얼마나 타인의 이익과 약자의 복지를 고려하면서 검소하게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하는 참여적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을지 의문시된다. 인간은 니버에 따르면 야수적인 본성에 이끌리기 쉽기 때문에 자신의 탐욕을 절제하여 캅이 제시하는 지역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자기 희생과 배려를 실천하기 어려운 속성을 갖고 있다. 또한 니버가 주장한대로 민주주의는 인간의 정의를 향한 능력 때문에 가능한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 인간의 부정의를 향한 경향성 때문에 필요한 측면도 있다. 즉, 공공선을 추구하며 의사 결정 과정에 민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시민이 한편으로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 관계에 따라서 부패할 가능성도 여전히 존재한다. 게다가 자기 이익을 우선시하는 집단 간에 하위의 의사 결정이 상위의 의사 결정에 의존하게 되면 도리어 권력이 강한 집단이 약한 집단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더 높다. 필자의 판단에 따르면 지역 경제 공동체에 의사 결정을 맡길 경우 과도한 탈중심화에 따라 지역 공동체에 분쟁 조정의 역할을 맡길 경우 “무정부상태”(anarchy)와 같은 위기 상황이 도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라인홀드 니버가 지적하는 것과 같이 집단 자체의 이기성 또한 집단간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배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기적인 집단이 다른 집단의 문제에 개입하여 공정하고 정의롭게 분쟁을 조정할 수 있을지 의문시된다.
        따라서 캅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하여 지역 공동체 중심의 의사 결정 체제의 약점에 대해 민주적인 세계 정부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세계 경제에로의 헌신에 비추어 볼 때, 특별한 경제 기구에로 권력을 돌리는 것에 대한 대안은 진정한 세계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이론상 그러한 정부는 전 인류의 선을 위해 어디서나 상업 행위를 규제할 수 있는 세계적 표준을 세울 수 있다. 이것은 인류의 미래와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결정을 기업의 손에 맡기는 것 보다는 선호될 수 있다. 그런데 캅은 세계 정부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세계 정부의 존재가 가져올 위험성에 대비하기 위하여 세계 정부에 권력이 주어지는 만큼 지역 단계에서도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군사적 권력이 지역 공동체에 분배되어야 한다. 지역주의(localism)는 연방주의(federalism)와 결합되어져서 다양한 지역 공동체들이 “공동체의 공동체의 공동체”로서 인식되어져야 한다. 만일 작은 공동체들이 그들 자신의 결정을 내릴 수 없다면, 그 공동체를 포함하고 있는 더 큰 공동체들이 그들을 위해서 관련된 사안에 대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다. 의사 결정 권력의 지역적 분산은 지역 공동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권력의 남용을 막는다. 또한 전지구적으로 인권에 대한 기준이 세워져서 의사 결정과 지역적 권력 행사에 있어서 모든 단계마다 적용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지역 정부는 소수자들의 참여를 배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경제 정치 권력을 탈중심화하여, 정치적 의사 결정을 지역 공동체로부터 형성하고 그 지역 공동체에서 대표자를 선출하여 그보다 더 높은 단계의 공동체인 공동체의 공동체의 의사 결정에 참여하도록 함으로써 지역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의 정치적 참여도를 높이고 지역적 결정의 중요성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시민이 세계 정부에 진정한 참여와 소속감을 느낄 범위에 대해서는 낙관적이기 어렵다. 그러한 정부가 시민보다는 그러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본가들에 의해 영향받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 정부에 지나친 권력이 부여될 경우에 세계 정부의 권력 남용과 독재와 같은 위기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결국 세계 정부의 존재 필요성이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세계 정부의 존재가 가져올 위기 상황 또한 세계 정부 수립 가능성에 있어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세계 정부에 관한 논의와 관련해서도 그것의 필요성과 수립 가능성과 동시에 세계 정부가 가져올 위기 상황의 발생과 세계 정부의 불가능성 또한 충분히 논의되어야 한다고 판단된다. 물론 데이빗 그리핀(David Ray Griffin)이 지적하는 대로 핵무기 위협의 증대, 세계 생태계 위기, 그리고 세계 제국의 두려움 등의 상황 속에서 세계 정부는 필요하다. 세계 정부가 전제적 경향을 띌 수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에 대해서 그리핀은 세계 정부가 시민의 참여에 의한 민주 정부가 될 수 있으며 그럴 경우 전제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특별히 세계 시민 사회(global civil society)의 등장으로 세계 시민이 공통의 명분을 갖고 헌신하고 특별히 비정부조직(Non-Governmental Organizations, NGOs)들이 세계 경제 위기와 핵전쟁의 위험, 그리고 생태계 문제와 세계적 양극화와 인권의 문제 등에 대해서 위기 의식을 같이하면서 동시에 세계 정부의 존재 필요성에 대한 의식을 공유하게 되어 세계 민주 정부 수립이라는 하나의 명분아래 협력하면 세계 정부의 수립을 위한 실천적인 진전을 볼 수 있다. 또한 세계 정부는 국제 관계를 조정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한편으로 세계 정부는 부유한 강대국들의 이익에 의해 이용되는 국제연합(the United Nations)이 부유한 국가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약한 국가들을 부당하게 다루는 세계 질서 속에서 민주주의의 수립을 위해 필요하다. 다른 한편으로, 세계 정부는 비민주적 국제 관계의 영향으로부터 약소국들의 민주주의의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들과 다국적 기업들의 영향력이 약소국과의 관계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현실에서 과연 민주적인 세계 정부의 수립이 가능할지 의문이 제기된다.    

5. 시민의 세계적 연대를 향하여

        지금까지 필자는 세계화 시대에 가속화되고 있는 경제적 양극화와 생태계 파괴를 막고 민주적 세계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기독교 정치 윤리를 모색하기 위해 존 캅의 주장을 기독교 현실주의의 입장에서 살펴보았다. 특별히 지속가능하고 자기충족적인 경제 공동체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과 지역 경제 공동체 수립에 대한 현실주의적 측면에서의 이해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사회의 현실 속에서 시민으로 하여금 올바른 현실 인식을 갖추어 준다. 게다가 필자는 캅이 주장한 지역적 경제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민주적 의사 결정 구조 설립의 제안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긍정한다. 시민의 자율적 참여와 지속가능하며 자기충족적인 경제 규모를 설정하고 공공선을 추구하는 지역적 경제 공동체와 민주적 의사 결정 체제의 수립은 초강대국에 의한 경제적 침탈을 막고 생태적 경제 체제를 이룰 수 있는 이상적인 방안이라고 판단된다. 다만 캅의 대안이 보다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니버의 입장에서 가능한 비평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즉, 인간의 역설적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니버가 제시한 사회 정의의 구조와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주의적 옹호는 지역공동체 상호간의 올바른 관계를 세우기 위해 여전히 중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즉, 니버가 제시한 대로 현실의 역사 속에서 완전한 하나님 나라는 불가능하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역사속에서 완성되었지만 그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의 가능성”(the impossible possibility)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집단 간의 갈등 역시 인간과 집단을 현실주의적으로 이해할 때 보다 역사 속에서 실천 가능한 갈등 해결의 방안을 추구할 수 있다. 따라서 집단간의 권력 균형과 조직하는 중심 두 가지로 구성된 정의의 구조는 여전히 유효하다.
        따라서 필자는 국제 사회에서 오늘날의 과제가 제국주의적인 미국의 권력의 행사를 견제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시급한 윤리적 과제임을 상기해 본다. 이 과제와 관련하여 페터 울리히(Peter Ulrich)는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의 추진에 따라 발생한 사회적 양극화와 국제금융위기는 국제 무역에 있어서 윤리적 질서를 세울 세계 정부가 부재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정책적 실현 가능성의 정도”에 따라서 세계무역기구(WTO)나 “인간적이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이고 생태적인 관점을 지닌 국제연합(UN) 기구들”의 역할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세계무역기구 안에 경쟁적 사고가 지배적”이며 국제연합의 기구들은 “세계무역기구에 의해 제지당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세계 정부의 부재에 대한 대안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물론 필자는 역사의 현장에서 세계 정부의 민주적 실현 가능성과 동시에 세계 정부의 필요성에 대한 캅과 그리핀의 주장에 공감한다. 하지만 초강대국인 미국과 같은 제국의 영향력이 지대한 현실에서 세계 정부의 실현 가능성은 여전히 니버가 주장한대로 불가능한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국과 같은 강대국의 경제적 지배 구조의 확장에 대비하여 그 나머지 국가들, 특히 제3세계 국가들이 환경의 보전과 생태적 가치를 위한 연대를 통하여 니버가 주장한 권력의 균형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고 판단한다. 연대의 형성에 관한 안셀름 민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과 자연 만물은 역사 속에서 상호 의존하는 사회적 존재이다. 또한 상호 의존적인 인간에게는 사회적 불의와 같은 윤리적 물음에 대하여 “윤리적이며 정치적인 연대의 행위”가 요청되기 때문에 상호 의존은 인간과 자연의 “공통의 운명”이다. 특별히 세계화 시대에 인간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전지구적 차원에서 상호 의존적이다. 더우기 인간은 초월적인 희망을 추구하며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에서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서 창조된 존재이며 연대는 바로 “성도의 교제(the communion of saints)", 즉 "코이노이아(koinonia)"에서 실현된다. 따라서 강대국의 불의한 힘의 행사를 견제하고 권력 균형으로서의 사회 정의를 위해 저항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제3세계 국가들의 시민들이 공통의 문제 의식을 공유하여 시민의 세계적 연대(global solidarity of citizens)를 구축하여 지역 공동체의 연대를 이루어 힘을 결집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한국과 같이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과의 협상에서 불가피하게 초래되는 힘의 불균형에 의한 피해를 받기 쉬운 국가들, 특히 제3세계 국가들은 민주적인 세계 질서와 평화를 추구하며 생태계 파괴와 불필요한 전쟁을 막기 위해서 지역적 경제 공동체의 수립과 더불어 지역 경제 공동체들의 시민의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연대는 불의한 힘의 행사로부터 자국의 시민 사회의 해방을 향한 저항을 중심 과제로 삼고 다른 지역의 시민들을 그 중심 과제를 이루기 위해 연대하려는 시민과의 연대(solidarity with citizens)와 다르다. 즉, 시민과의 연대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구조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우선 순위의 목적으로 삼는다. 따라서 특권적인 중심적 집단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연대를 구축하기에 적합한 집단들을 선택할 수 있게 되어 특정 집단이 연대를 이용하는 듯한 양상을 보일 수 있다. 그렇지만 시민의 연대는 자신이 속한 특정 집단의 관심으로부터 “탈중심화(decentering)”하여 연대에 참여한 모두의 필요와 관심사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세계화 시대에 억압받는 국가의 시민들은 제국주의적 영향력에 대항하기 위한 공통의 목적을 공유하고 추구하는 상호 의존적인 “공통적 운명의 주체들”이다. 이들은 시민의 세계적 연대를 이루어 상호 의존적인 세계화 시대에 “어느 특정 집단의 중심성도 배제”하면서 권력 균형으로서의 정의를 추구하기 위한 시민의 세계적인 연대를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의 시민들도 특별히 경제주의의 논리에 의해 좌우되는 자유무역협정이 갖는 폐해를 지적하고 극복하기 위해 권력 균형으로서의 사회 정의를 이루기 위한 시민의 세계적인 연대를 이루기 위하여 공통된 문제 의식과 목표를 추구하는 다른 국가의 시민들과 협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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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f John B. Cobb, Jr.'s Political Ethics from the Perspective of Christian Realism

Kwon, Oh-Wang
          
In the era of globalization, many people, as homo economicus, tend strongly to maximize economic benefit to live an affluent life. John B. Cobb Jr. defines this absolute and primary devotion to economic value as economism.  Superpowers that accept economism as their principle of economy pursue the expansion of the market for economic advantage and promote neoliberal policies, requiring the Third World to deregulate and eliminate the obstacles to a free market. Moreover, economism threatens the sustainable and local growth of economy of those countries. In order to cope with these serious situations, Cobb suggests that Christians need to establish a new vision of democracy and sustainable economic growth in terms of earthism. But his political suggestion of the decision-making system of local and self-sufficient communities seems to be somewhat ideal from the perspective of Reinhold Niebuhr's Christian realism. The establishment of a global solidarity of citizens will achieve justice as the balance of power by complementing the weaknesses of Cobb's local decision-making system.    

Key Word:
John B. Cobb, Jr., Christian Realism, Homo Economicus, Solidarity of Citizens,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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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2

          퇴계와 칸트 그리고 아담 스미스의 감정론- 인문주의와 자본주의


                                                                                           양명수 (이화여대 교수/ 기독교윤리)


초록

        칸트나 퇴계 같은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에게 매우 숭고한 본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적 인간의 감정은 악에 흐르기 쉬운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그들은 높은 이념의 실현을 위해 고도의 자기수양을 요구했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물욕을 없앰으로써,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물질을 둘러싼 폭력의 악순환을 끊으려는 숭고한 시도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힘의 싸움의 뿌리가 되는 인간의 이기심을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내면의 평화를 통해 세상의 평화를 도모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의 자본주의 철학은 물욕이나 이기심을 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높고 숭고한 도덕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일상에서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바탕으로 도덕규범을 찾았다. 인문주의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공공선을 개인의 희생이나 고도의 자기 수양에서 찾지 않고, 이기심의 적절한 조절을 통해 찾으려고 했다. 그것은 인간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자기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에, 너무 어렵지 않게 현실화될 수 있는 도덕성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욕망은 정당화되고, 다만 타자와의 공존의 가능성이라는 조건을 만족시키면 되게 되었다.

주제어:
퇴계, 칸트, 감정, 의지, 아담 스미스, 이기심



        몇 가지 논점을 가지고 얘기를 전개하려고 한다. 첫째, 인문주의자들에게 감정은 경계의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인문주의자들은 의지로 감정을 제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퇴계와 칸트는 이 문제에서 조금 차이가 나는데, 그것은 중세 형이상학과 근대 윤리학의 차이를 보여준다. 셋째, 인문주의자들은 이성과 감정의 싸움을 말하지만, 가장 높은 경지에서는 다시 감정을 거론하게 된다. 선에 이끌려 저절로 행하게 되는 것은 욕망에서 발생하는 감정과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다. 넷째, 자본주의 철학자 아담 스미스가 말하는 도덕 감정은 인문주의자들이 말하는 선한 본성의 발현과 무관하다. 자본주의는 높은 수준의 덕목을 요구하는 인문주의와는 다른 인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퇴계와 칸트를 통해 인문주의의 감정론을 살펴볼 것이다. 두 인문주의자의 공통된 관심사가 지역과 시대를 넘어서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동시에 둘의 차이를 봄으로써 성리학이라는 중세 인문주의와 서구의 근대 인문주의의 차이를 보겠다. 한편, 퇴계와 칸트의 인간론에 비하면 아담 스미스는 감정에 관해서 매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문주의와 자본주의 철학의 갈등의 원인을 인간론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1. 감정을 경계한 인문주의

        감정은 감(感)하여 응(應)한 결과이다. 감각기관이 어떤 사물이나 사태를 맞아 느끼고, 마음이 동하여 반응을 보인 것이 감정이다. 대개 감정은 생각보다 앞서 마음을 지배한다. 생각하기도 전에 마음을 이끌고 간다. 감정은 의지보다도 먼저 발생한다. 의지란, 마음을 먹고 마음을 쓰는 것이다. 일부러 마음먹기 전에 마음이 끌려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감정이다. 그러한 감정은 인문주의자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다. 인문주의자들은 사람의 마음씀씀이에 희망을 건 사람들인데, 마음을 써보기도 전에 감정이 마음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감정이 도덕적 선에 끌린다면 경계의 대상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 선악을 떠나, 감정은 일단 좋은 걸 좋아하면서 마음 전체를 쏠리게 만든다. 말하자면 감정은 좋은 걸 좋아하고 나쁜 걸 싫어하는 마음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끄는 좋은 것에는, 쾌락 곧 감각적 즐거움도 있고, 물질적으로 유익한 것도 있고, 도덕적인 선도 있다. 인문주의자들이 경계하는 감정은 감각적 쾌락이나 물질적 이득을 좋아해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 흔히 이성에 반대되는 감정이라고 할 때 그런 측면을 가리킨다. 감정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타고난 생의 욕구 또는 몸의 자연스런 욕망에 의해 일어난다. 또는 세상살이 속의 경쟁에서 누구를 이기려고 하는 지배욕이나 몸의 필요를 넘어선 물욕에서 발생한다.
        몸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욕망은 물론 자연스레 발생하는 데, 그 뿐 아니라 필요 이상을 소유하고 싶은 승부욕이나 물욕도 자연스레 발생한다. 두 개의 자연스러움은 조금 다르다. 인문주의자들이 볼 때, 몸의 필요를 넘어선 욕망은 원래의 본성이 아니라 세상에서 사느라고 형성된 습관이 본성(nature)처럼 굳어진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발생하지만, 원래의 자연(nature)은 아니다. 그러나 생각하기도 전에 저절로 발생한다는 점에서는 몸의 본능적 욕구와 다를 바 없다. 필요를 넘어서는 물욕이 우리도 모르게 저절로 발생해서 우리 마음을 지배한다. 칸트가 감정을 경계하고 퇴계가 칠정(七情)을 기발(氣發)이라고 보면서 경계한 것은, 우리의 일상적 감정이 몸의 요구를 벗어나 이기심과 물욕에서 발생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감정 자체는 부도덕하지도 않고 도덕적이지도 않은 경우가 있다. 배가 고픈데 밥에 끌리는 마음은 부도덕도 아니요 도덕도 아니다. 그리고 천억 원을 벌어 남보다 잘 살고 싶은 마음도 그 자체만으로는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배가 고파 남의 밥에 끌리는 감정은 부도덕을 낳을 수 있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겠다면 부도덕을 낳게 될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도덕적 상황에서 그런 감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점에 있다. 도덕적 상황이란, 자신을 이롭게 하려고 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의 이득과 충돌할 때 발생한다. 그 때 도덕적 선은, 자연스런 몸의 욕구나 끌리는 마음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발생한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이득에 끌리는 마음 곧 감정 자체가 악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감정 자체는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도덕적 상황에서 감정을 잘 통제해서 올바른 쪽으로 마음을 먹고 마음을 쓰느냐 하는 점이다. 마음이 끌려가는 대로 하지 않고, 생각하고 판단해서 옳은 쪽으로 마음을 먹어야 도덕적 상황에서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다. 감정을 절제해서 옳은 대로 행동하도록 이끄는 마음의 힘을 이성이라고 한다. 성리학의 용어로 하면 하늘의 리(理) 또는 마음의 성(性)의 힘이니, 두 말을 합하면 이성(理性)이 된다. 그렇다면 도덕적 상황이란 내면에서 이성과 감정의 싸움이 있는 상황이다. 또는 두 마음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도덕을 낳는 이성을 서양에서는 실천이성이라고 불렀는데, 곧 의지를 가리킨다. 밖에 끌려가는 마음을 정지시켜 내면에서 주체적으로 마음을 새로 먹고 도덕적 선을 낳도록 마음을 쓰는, 그런 마음의 능력을 가리켜 의지라고 한다. 성리학자들은 마음을 통솔하는 지(志) 와 의(意)를 논했으니, 합하면 의지가 된다. 의지를 가리켜 라틴어로는 볼룬따스(voluntas)라고 하고, 불어로는 볼롱떼(volonté)라고 하며, 독일어로 빌레(Wille)라고 하고 영어로 윌(will)인데, 모두 바란다 또는 원한다(vouloir, wollen)는 동사에서 나온 것이다. 의지는 욕구 또는 바람의 일종이다. 바라는 게 있어서 마음을 먹고 마음을 쓰는 것이다. 바람은 감정을 낳고, 의지는 감정에 뒤이어 발생한다. 좋은 것을 원하고 바라는 데서 감정이 먼저 발생하고, 그 다음에 그 감정을 따르거나 아니면 거꾸로 제어하면서 의지가 작동하는 것이다.
        인문주의자들은 사람의 마음의 능력에 희망을 건 사람들이다. 플라톤은 숨의 의미를 지니던 프뉴마(pneuma)의 의미를 바꾸어 마음이라고 보고, 마음 안에 진리를 알고 행하는 능력인 정신 곧 누우스(nōus)가 있다고 보았다. 공자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고 상덕치인(常德治人)을 말했고, 맹자는 사람의 마음을 알면 하늘을 안 것이라 했다. 마음의 덕을 의지해서 신화의 세계로부터 이성의 세계로 옮겨가려는 것이 인문주의자들의 관심이었다. 인문주의자들이 피지스(physis, 자연)에서 노모스(nomos, 법)로 옮겨간 것은, 자연스런 감정을 이기고, 이성의 법을 따라 행동하기를 바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성 곧 의지의 역할이다.
        조선의 퇴계나 서양의 칸트나 모두 사람의 의지가 악한 감정을 통솔하여 선을 이루기를 바랐다. 퇴계는 말한다. “의(意)가 마음의 발함이 되어 그 ‘정(情)’을 끼고 좌지우지하여 혹은 공정한 천리에 따르기도 하고, 혹은 사사로운 인간의 욕망을 따르기도 하는 것이다.” 천리에 따를 것인가 인간의 사욕을 따를 것인가 곧 도덕적 선악의 갈림은 감정 자체에 달려 있지 않고, 의지에 달린 것이다. 의지의 기능은 감정을 통솔하는 데 있다. 감정대로 해도 문제가 안 될 때는 괜찮은데, 감정대로 하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때, 의지는 좋은 것을 좇는 감정을 누르고 옳음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도덕적으로 좋음 곧 선이 발생한다. 도덕적 선은 옳음으로 해석된 좋음이요, 좋은 걸 좋아하는 일상적 감정을 의지가 통솔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만일 의지가 자유롭다면 선과 악은 사람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주체성을 바탕으로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데 관심을 가진 인문주의자들은 자유로운 의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
        칸트는 『윤리형이상학의 정초』를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이 세계에서 또는 도대체가 이 세계 밖에서까지라도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을 것은 오로지 선한 의지뿐이다.” 제한 없는 선 곧 무조건적인 선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의지밖에 없다는 것이다. 선의 본질은 선한 의지에 있다. 이것은 선악을, 사람이 바라는 것 곧 욕망과 의지의 대상에서 찾지 않겠다는 말이다. 선이 발생하는 자리는 사람의 마음이요 의지이다. 물론 행복이나 유익이나 쾌락은 좋은 것이요 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조건적으로만 선이다. 그런 것들을 좇아 발생하는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면 사람을 망치고 공동체를 망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칸트가 인간의 숭고함을 찾은 도덕적 선은, 옳음을 위해 유익이나 쾌락처럼 좋은 것을 포기할 수도 있는 의지에서 나온다. 올바른 마음에서 무조건적인 선을 찾기 때문에, 의무론적 윤리라고 한다. 좋은 보상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옳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숭고함을 보여주는 도덕성의 본질이다.
        여기서 기독교 윤리를 얘기해 보자. 이것은 칸트를 이해하고 나아가 퇴계의 리발(理發)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칸트와 퇴계는 모두 인간의 의지에 희망을 둔 사람으로서 기독교 윤리와 다르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선을 인간의 의지에서 찾지 않는다. 성서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떤 청년이 와서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물었다. 그 때 예수는 이렇게 답한다. “어찌하여 내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마태복음 19:16,17). 어떤 행위나 일이나 사람을 보고 선하다고 하는 것은 선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난다는 말이다. 성서에서 볼 때 선은 하나님이라는 실체이다. 선은 인간 밖에 이미 있는 것이지(id quod est), 인간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니다. 인간이 말하는 도덕적 선은 악과 대치하는 선인데, 하나님은 선악 이전의 선이다. 참된 선이란 선한 존재인 하나님에게서 파생된 것이요, 선  발생의 주도권은 정의(情意)가 있는 선한 하나님에게 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의지가 아니라 세상을 주관하는 선한 실체에 대한 경건한 신앙이다. 윤리적 선은 신과 인간의 관계인 신심(信心)의 열매이다. 인간의 선한 의지를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시도록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인간의 의지가 이기적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다고 보는 데서 생긴 것이다. 의지의 무능 때문에 사람은 선을 이루는 데 주체가 되지 못한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원죄론의 기본적 명제이다. 그는 본래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의지가 왜곡되어 악한 마음을 먹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고, 그 나쁜 습관은 마치 본성처럼 되어 저절로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현재의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다고 본다. 선악은 인간이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 점에서 인문주의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유가 없는 의지라는 개념은 루터 같은 종교개혁자들에게는 ‘




신학사상 2013년 가을호(162집) 차례
신학사상 2013년 봄호(160집)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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