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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연 
 신학사상 2012년 가을호(158집) 차례


이번 호에는
구약학 분야에서 김회권 숭실대 교수의 논문 “박윤선의 구약주석 비평”을 게재했다. 김 교수는 박윤선의 구약주석이 갖는 선구자적인 지위와 다대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석이 스스로 주창한 캘빈주의적 주경신학의 이상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결론지었다. 그것은 첫째, 캘빈주의적인 하나님 총체적 주권과 통치사상이 그의 주석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 그는 구약 원어본문 해석을 통한 고전적인 주해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 주로 서구학자들의 의견들을 취사선택하는 방식으로 진정한 주석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사회윤리 분야에서 강원돈 한신대 교수의 “독일개신교협의회 사회봉사국의 설립과 디아코니아 개념의 정립”이란 논문을 게재했다. 강교수는 독일개신교협의회 사회봉사국이 어떤 과정과 절차를 거쳐 설립되었는가를 분석하고, 이 기구의 과제와 임무를 살피고, 사회국가 독일에서 이 기구의 지도 아래서 이루어진 독일 디아코니아 활동의 성장을 분석하고, 이 기구의 설립 과정에서 디아코니아 개념이 어떻게 확립되었는가를 고찰했다.

양명수 이화여대 교수는 “칸트의 이성종교 이해- 바람의 대상과 두 가지 이율배반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썼다.  양 교수는 칸트에게서 종교는 희망 곧 ‘바람’에서 생긴다.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은 인간의 악의 성향 때문에 이 땅에서 바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보다 더 선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악에 대한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도덕적 노력을 지속할 수 있다. 여기서 요청되는 것이 대속의 은총이다. 도덕적 이념의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은총의 힘을 믿게 된다. 그 믿음은 인식인데, 이론적 인식이 아니고 실천적 인식이다. 칸트가 말하는 종교는 도덕에 의한 도덕을 위한 도덕의 종교다.

목회상담학 분야에서 정희성 이화여대 교수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사이’ 경험에 대한 ‘삭임’의 목회신학적 성찰”이란 논문에서 한국의 고유한 심리적 자원인 ‘삭임’을 기초로 예수 죽음과 부활 사이의 경험에 대해 연구했다. ‘삭임’이란 ‘발효 시키다, 숙성시키다’의 뜻 뿐 아니라 ‘썩다, 부패하다’의 뜻을 가진 한국 고유의 내재적 경험이며, 한국인의 한(恨)이 초극하는 과정에 발생하는 심리역동이다. 때문에 부패하고 썩어버린 예수 죽음과 이의 생산적 질적변화인 부활 사이 경험을 이해하는 주요 실마리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영성신학 분야에서 박병관 서강대 교수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와의 비교를 통하여 본『영신수련』에서의 ‘사용-향유’(uti-frui) 이론의 변용”이란 논문에서 토마스 아캠파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영신수련』사이에 존재하는 영성의 불연속성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자세한 문헌 비교를 했다. 『영신수련』의 ‘원리와 기초’의 편집과정에서 이냐시오가 관상적인 삶에 관한 해석이론의 근간이었던 ‘사용-향유’ 원리를 차용하면서도 활동 중심의 자신의 영적 삶의 방식의 원리와 기초를 표현하기 위하여 그 원리를 어떻게 변용시켰는지 자세히 분석했다.

예배학 분야에서 전병식 배화여대 교목실장은 “에큐메니칼 영성에 기초한 통일된 예배의식의 가능성”이란 논문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영성은 단순한 통합과 획일화를 요구하는 강요된 일치이기보다는, 교파적, 교리적, 지역적 차이성과 다양성을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어 가면서 하나의 신앙 모습을 표현하고 하나 된 행동을 표출하고자 하는 ‘하나 됨’ 또는 ‘하나로 되어가는’ 영성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따라서 에큐메니칼 영성은 공동예배를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전(全 )교회의 ‘신앙 표현에 대한 내용적 일치’를 추구하면서 그것이 활동하는 운동이 될 때에는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연합하여 행동하는 ‘참여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실천신학 분야에서 윤덕규 안양대 교수는 “영적 욕구와 영성 형성”이란 논문에서 한국개신교인들과 한국인들의 영적/초월적 욕구들에 응답하기 위해 한국개신교 영성형성을 위한 두 가지 측면을 제시한다. 첫째는 개신교신앙의 영성을 심화시키는 것이다. 둘째로, 기독교 텍스트와 우리의 삶의 경험을 연결함을 통해 영적 삶과 일상적/사회적 삶을 통합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성형성의 궁극적 목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삶의 아름다운 과실을 맺는 것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교육학 분야에서 박종석 서울신대 교수는 “주5일제와 BCM 교육목회제도”란 논문에서 주5일제 근무와 주5일제 수업의 전면적 시행을 맞아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은 한국 교회의 교육목회적 대응 방안을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BCM 교육목회제도에서 찾는 연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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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후기

1960년대 초부터 교통과 통신의 혁명적 발달로 세계가 1일 생활권이 되면서 이제 지구는 하나의 ‘지구마을’(global village)이 되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이제까지 서로 잘 몰랐고, 특히 서구에 의해 은폐되고, 조작되었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가 세계에 진면목을 드러내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세계 역사와 문화를 인식하는 관점이 혁명적으로 전환되었다. 세계관이 획일적인 서구적 관점에서 전지구적 다양한 관점으로 바뀐 것이다.
신학에서도 서구신학 중심에서 새로운 세계관의 변화에 따라 제3세계 신학,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신학이 등장했다. 이후 신학은 관념적 지식만으로 신을 인식한 서구신학 중심에서 현실 인식에 근거한 상황신학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  

반면에 중세기부터 정복적인 세계관으로 지구 곳곳을 정복해온 서구제국주의는 이런 지구마을 시대를 새로운 정복의 기회로 삼았다. 이 결과 지구마을이 ‘지구 약탈지’(global pillage)가 되었다. 마을의 V가 약탈지 P로 바뀐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신학에서도 V관점의 상황신학은 신학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서구신학만이 신학이라고 주장했던 신학자들은 P관점의 약탈과 소유를 신의 축복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P관점의 신학은 기독교와 교회를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했다. 결국 교회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구원해야 하는 현실이 되었다.  

신학사상은 V관점에서 신의 뜻과 시대를 읽는 신학을 위해 탄생했다. 이런 신학연구와 노력들이 중단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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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158집)              

연구 논문

김회권 ․ 박윤선의 구약주석 비평
강원돈 ․ 독일개신교협의회 사회봉사국의 설립과 디아코니아 개념의 정립
양명수 ․ 칸트의 이성종교 이해- 바람의 대상과 두 가지 이율배반을 중심으로
정희성 ․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사이’ 경험에 대한 ‘삭임’의 목회신학적 성찰
박병관 ․『그리스도를 본받아』와의 비교를 통하여 본『영신수련』에서의
           ‘사용-향유’(uti-frui) 이론의 변용
전병식 ․ 에큐메니칼 영성에 기초한 통일된 예배의식의 가능성
윤덕규 ․ 영적 욕구와 영성 형성
박종석 ․ 주5일제와 BCM 교육목회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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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소개)1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
‘사이’ 경험에 대한 ‘삭임’의 목회신학적 성찰

                                                                                           정희성 (이화여대 교수/ 목회상담학)


초록

내담자의 죽음같은 고통에 직면하여 목회신학자들은 십자가 사건의 목회신학적 해석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나, 정작 사흘에 걸친 예수 죽음에 관해서는 거의 관심하지 않았다. 이에 본 논문은 한국의 고유한 심리적 자원인 ‘삭임’을 기초로 예수 죽음과 부활 사이의 경험에 대해 연구하였다. ‘삭임’이란 ‘발효 시키다, 숙성시키다’의 뜻 뿐 아니라 ‘썩다, 부패하다’의 뜻을 가진 한국 고유의 내재적 경험이며, 한국인의 한(恨)이 초극하는 과정에 발생하는 심리역동이다. 때문에 부패하고 썩어버린 예수 죽음과 이의 생산적 질적변화인 부활 사이 경험을 이해하는 주요 실마리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삭임’의 관점에서 예수 죽음과 부활 사이의 경험을 이해한 결과 먼저, 예수 죽음 사이의 ‘시간성’, ‘과정성’, ‘다층성’이 드러났다. 다음으로 예수 죽음의 기간은 아들-아버지 하나님이 부재한 공간으로 이때 성령 하나님이 출현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실제 예수 죽음 사흘의 사이 경험을 실재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사실 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논문은 심각한 폭력과 외상 경험으로 어떤 인격적 하나님 이미지 조차 내적 대상으로 생산할 수 없는 내담자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쓰였다.  

주제어: 삭임, 사이, 십자가와 부활, 한, 정, 목회신학, 한국목회상담, 사흘


  
        죽음처럼 지난한 인생의 고통에 관심하며 어느 때부터이던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이 사흘 동안의 경험에 대해 목회신학의 관점에서 규명해보고 싶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니이까?(막15:34)”라며 최소한 절규라도 할 수 있었던 십자가상의 고난과 달리, 완전한 죽음 속에서 아들도 죽고 하나님도 부재했던 무덤 속 그 어두운 사흘의 죽음이 도대체 어떤 것이었는지를 말이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도 꺼져버리는 어두운 우울과 같았을지, 가슴 에이는 아픔 속에서 미칠 듯 발광하는 히스테리와 같았을지, 혹은 얼음같이 차갑게 나눠진 섬뜩한 분열과 같았을지 질문했다. 그런가하면 그 와중에서도
틈새를 비짖고 일어나는 삶을 향한 그 괴이한 충동이나 어설픈 해방감은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또 무슨 일이 그 사흘 사이에 일어났기에 예수의 썩어버린 육체가 새 형상을 입고 부활할 수 있었는지 고민했다.  
        ‘삭임’에 관한 논의를 다시 공부하며 오랫동안 생각했던 위 문제의 실마리를 발견했다. 벌써 십년도 훨씬 전 박사과정논문을 쓰면서 ‘삭임’이란 한국의 고유 정서에 대해 관심했었다. 그러나 당시 이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이 한국의 고유정서인 ‘삭임’이 그 어떤 심리학적 용어보다 예수 죽음과 부활 사이의 경험을 설명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본문에서 좀 더 상세히 살펴보겠지만, ‘삭임’이란 한(恨)이 초극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내적 경험으로 어원상 ‘썩다, 부패하다’의 뜻 뿐 아니라 ‘삭다, 발효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사흘 간의 죽음으로 완전히 썩어버렸을 예수의 육체가 새 형상과 새 맛을 지닌 존재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과정 속에 ‘삭임’이 일어난 때문은 아니었을까?
        한편, ‘삭임’의 논의는 한국 목회상담학의 새로운 자원이라 할 수 있다. 한국 목회상담학계는 서구의 경험과 다른 한국인의 고유한 아픔과 치유 경험에 관심하며 주로 한국인의 한(恨)의 정서에 관심해왔다. ‘삭임’은 그동안 한국 목회상담학계가 주목하지 않았던 새로운 치유 자원이다. 그런데 ‘삭임’은 가부장제에서 겹겹의 억압을 경험했던 과거 한국 여성들 뿐 아니라 현대 여성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내적자원이다. 추후 사례연구를 통해 더욱 보완하겠지만, 과거에 비해 여러 면에서 나은 삶을 사는 현대 한국여성 역시 삶의 수많은 고비와 좌절 속에서 바로 이 ‘삭임’을 극복의 한 자원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삭임’을 중심으로 한 본 연구는 사실 매우 실험적이며 상상적인 연구이다. 아무도 예수 죽음 사흘 기간을 정확히 규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담이 되지만, 이 논의가 조직신학적 성찰이라기보다 죽음같은 고통 및 초월과 관련한 인간 내적 경험에 대한 목회신학적 성찰이라 할 때 이와 같은 실험적 논의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먼저, ‘삭임’ 논의의 배경으로 목회신학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논의, 또 한국목회상담학에서의 한의 논의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삭임’이 무엇인지, 그리고 ‘삭임’의 목회신학적 함의는 또 무엇인지 고찰할 것이다. 이를 통해 ‘삭임’의 논의가 예수 죽음의 충분한 시간성, 과정성, 다층성을 강조하며, 아버지-아들 하나님의 완전한 죽음과 그 속에 부상하는 성령 하나님을 주목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1. 십자가 죽음과 부활사이

        목회신학에 있어 예수 십자가와 부활의 메타포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왔다. 즉, 십자가와 부활의 메타포는 목회상담이 일반상담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가 그 근거가 됨을 밝혀주기도 하며, 죽음까지 낮추신 예수처럼 목회상담가 역시 겸손과 정성을 다해 내담자의 마음에 귀 기울일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또한 십자가와 부활을 연결하여 이해할 경우 상담가는 내담자에게 현재 삶이 십자가 고통과 같이 가혹할지라도 언젠가 부활하신 예수처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희망을 불어넣을 수도 있다. 더불어 십자가와 부활은 내담자가 삶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대극적 상황, 즉 절망과 희망, 고통과 성취, 죄와 용서, 실패와 새로운 출발 등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상징이 된다는 것이다.
        성폭력, 가정폭력, 외상 등 소위 죽음만큼이나 치명적인 상처를 가진 내담자에 관심해온 목회신학자들은 특별히 십자가에 대한 대속론적 해석에 주목한다. 대속론이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떻게 인간의 죄를 대신했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켰는가에 관심하는 논의로 전통신학에서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어왔다. 가령, 안셀름은 대치 대속론(substitutional atonement)을 주장하며 십자가 사건은 죄인에게 마땅히 벌을 내려야 한다는 입장을 만족시켰다고 본다. 즉, 인간은 죄를 저질렀고 그 댓가를 치러야 하는데 예수가 이를 대신함으로써 인간은 영원한 저주의 형벌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벨라르의 경우에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희생적 사랑의 본보기로서 인간에게 바른 삶의 길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이레네우스는 몸값이론(ransom 혹은 Christus Victor)을 주장하여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간의 몸값이 치러졌으며 이로 이해 인간이 자유하게 되고 용서받았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십자가 사건에 대한 이와 같은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지만, 이들 논의는 결국 예수의 죽음이 인간구원에 필수불가결했다는 입장에 동의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담자의 가혹한 고통에 관심하는 목회신학자들은 십자가가 인간 구원에 필수요건이라는 위의 대속론에 대해 부정적이다. 여성신학자들은 성폭력과 가정폭력으로 고생하는 여성들에게 예수 십자가 죽음을 대속 행위로 강조하면, 이들 여성의 부당한 고통과 아픔을 당연시 하게 하는 문제를 가진다고 비판했다. 또 대속론의 강조를 통해 타인의 죄사함을 위해 누군가의 유기와 고초를 강조할 때 학대와 폭력을 미화시키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고 한다. 그들에 의하면, 누군가를 대신해 형벌을 받는다는 것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죄에 대한 책임은 인간 개개인이 각자 지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한 사건이라거나 인간 구원을 위한 사건으로 보기보다 현실의 왜곡되고 부정의한 인간관계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동학대에 관심하는 목회신학 관점에선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에 의한 아동학대라는 유비가 더 적나라하고 생생하기도 하다. 상담의 현장에서 목회상담가는 가정 경제 파탄이나 교육 등을 이유로 부모가 아이를 심하게 때리거나 심지어 살해하기도 한 경우를 만나게 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전통신학에서 이해한 십자가상의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의 모습은 희한하게도 가정 안에서 학대하는 아버지와 학대당하는 아이의 모습과 유사하다. 학대가정에서 아버지는 자신을 완벽한 모습으로 이상화하고, 아들은 무기력하고 무가치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아버지가 내리는 벌은 그 무엇이던 간에 정당하며, 아이는 무조건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하며 폭력을 가한다. 십자가의 예수 역시 강력하고 완벽한 아버지 앞에서 철저히 무력하게 벌 받는 아이의 모습과 같다. 아동폭력 희생자를 상담하는 목회신학자들에게 이런 십자가상의 아들과 아버지 하나님은 폭력 희생자의 순종과 희생을 강화하는 매우 불공정하고 잘못된 상징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목회신학자들은 생존자를 위한 목회신학은 백인 여성신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십자가 보다는 부활을 강조해야 한다는 입장에 관심하기도 한다. 제임스 폴링(James Poling)에 의하면, 백인 여성신학자들은 십자가는 구원론적 가치가 없는 단순한 비극적 사건으로 11세기 이전만 해도 교회의 예배와 행사에서 십자가가 항상 중심이 된 것은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즉, 11세기 이전 교회의 예식에서는 십자가 대신 예수의 부활과 승천이 중심이어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겐 파라다이스로 승천해서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이 부활과 낙원의 메시지는 십자가 이야기를 상대화시킬 뿐 아니라 다시 새 삶을 열 수 있을 것에 대한 희망을 갖도록 한다. 마찬가지로 끔찍한 경험으로 고통하는 내담자들에게도 부활과 낙원의 메타포는 생존할 수 있다는 희망, 현재와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목회신학자들은 성차별 뿐 아니라 인종차별, 또 계급차별과 같은 다양한 차별을 경험한 우머니스트 여성신학자들의 십자가 이해에도 관심한다. 우머니스트 여성신학자든 중산층 백인 여성들의 경험을 반영하는 백인 여성신학자들과 달리 성차별 뿐 아니라 인종차별을 비롯 다양한 노예생활 경험을 배경으로 십자가 사건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다. 그래서 그들은 백인 여성신학자들과 달리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흑인 여성들의 경험과 동일시하기도 하고, 고통의 의미를 보다 보다 세분화하기도 한다. 즉, 흑인 여성들의 고통은 세상의 불의로 인한 고통 뿐 아니라 정의와 평화를 위한 고통도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드로레스 윌리암스(Delores Williams)는 흑인 여성들에게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자신들과 같이 고통 당한 하나님 이해에 도움이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십자가 사건을 지나치게 강조할 필요도 미화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윌리암스는 예수는 삶을 위해 오셨지 죽음을 위해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기존의 신학적 논의를 차용하여 십자가에 관심하는 대부분의 논의와 달리,  폴링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애매모호함의 한 예시”라는 독창적 목회신학 관점에서의 해석을 시도한다. 그는 어릴 적 폭력 경험을 드디어 살해로 복수한 아동폭력 피해자의 예를 든다. 정당방위적 행위로 볼 수도 있지만, 그가 또 다른 아동을 폭력해왔음을 알게 되며, 정당방위라 할지라고 폭력으로 폭력은 극복할 수 없다고 한다. 즉, 폴링은 피해자라 할지라고 진정한 치유는 내면화된 폭력의 유혹을 극복하고 생명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폭력과 힘이 제일이라는 생각, 불의는 폭력으로 저항해도 된다는 생각이 가득한 세상에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부당한 폭력에조차 비폭력으로 저항한 사건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 애매모호함이 오히려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며, 예수의 부활은 바로 이 예수의 비폭력적 십자가 행위가 패배가 아니었음을 세상에 드러낸 사건이라고 했다.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목회신학적 논의는 부당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기존의 대속론적 관점을 비판하고 생존자의 회복과 치유를 돕는 다양한 방식의 십자가와 부활 이해에 관심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들은 죽음같은 고통을 겪고있는 내담자에 관심하면서도  내담자의 심리적 죽음을 상징할 수 있는 십자가와 부활 사이, 바로 예수 죽음 사흘 간의 경험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하고 있지 않다. 그리하여 철저한 파괴의 경험 속에서 어떤 인격적 내적 대상조차 가질 수 없는 심리적 죽음 상태의 내담자 경험까지는 포괄하지 못한다. 또한 수천년 기독교만을 문화유산으로 가지고 있는 서구와 달리 한국과 같은 다종교 배경의 기독교인의 경험 역시 포괄하는데 한계가 있다. 한국의 경우, 독실한 기독교인부터 초보기독교인, 혹은 기독교인이면서도 가정 배경등의 영항으로 타종교의 상징에 더욱 익숙한 경우, 고통의 순간에 인격적 하나님 이미지가 매우 생소하기 때문이다. ‘삭임’을 중심으로 이 사이경험에 대한 논의를 풀어나가기 전에 ‘삭임’의 논의가 한국목회상담학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또한 살펴보자.

2. 한과 그 초극(超克) 사이

    해방신학의 영향 속에서, 또 한국의 암울한 독재의 상황에서 한국 민중신학자들은 서구와 구별되는 한국인의 고통 경험에 관심하며 한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민중신학자 현영학은 한이란 부정의로 인해 고통받으면서 생겨나는 분노이며, 무력감이며, 전적으로 버림받은 감정이라고 한다. 또 한은 내장을 끓는 예리한 고통의 감정이며, 복수에의 끈질긴 충동, 또 변화시키고자 하는 감정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한국인의 한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입, 통치자들의 지속적인 독재, 엄격한 규범 속에서의 차별로 인한 회한, 무기력함, 유기감과 같은 감정으로 오랜 억압 속에 시달려온 한국민중의 실존적 아픔과 고통을 핵심적으로 표현하는 감정이라고 했다. 서남동, 안병무를 비롯 많은 민중신학자들이 암울한 한국의 현실에서 한국인의 고유한 아픔과 고통에 대해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민중신학계의 활발한 논의를 배경으로 한국목회신학계에서는 김영애가 한국여성의 한에 관해 처음으로 연구를 시도했다. 김영애는 한국인에게 있어 한은 개인적인 차원의 경험일 뿐 아니라 한국이라는 민족공동체 구성원으로써 경험이라 하였다. 또한 한은 어려운 환경과 실존의 고통으로 인해 자신의 잠재력을 현실화시킬 수 없거나 현실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반복적으로 상실할 때 경험하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김영애는 한의 분석에 있어 민중신학에서와 같이 한을 초래하는 사회 정치적 요인에 대한 연구 뿐 아니라 심리내면의 기제, 그리고 한국종교의 영향을 함께 논하였다. 특히 김영애는 한국의 유교가 가부장제 삶과 가치를 내면화시켜 여성의 계층화와 억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유교와 달리 무교는 여성의 창조성, 인간성, 온전성을 극대화시키는 종교자원으로 이해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김영애에게 있어 한국여성의 한 초극을 위한 목회상담은 궁극적으로 한국 무교의 영향 속에 형성된 한풀이 목회상담을 의미한다. 김영애는 한국여성의 한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치유와 더불어 역기능적인 사회 구조를 치유해야한다고 주장하며 무교와 예수의 목회방법을 기초로 바람직한 목회상담가를 제시한다. 가령 성령충만함을 갈구하는 목회상담가, 여성의 사회적 상황을 이해하는 목회상담가, 또 무병을 앓고 치유자가 된 무당과 같이 치유받은 경험이 있는 상담가, 공동체굿에서의 무당과 같이 사회의 불의를 고발하는 상담가, 그리고 한 많은 여성의 한풀이를 여성무당이 담당했듯 의식화된 여성상담가의 목회상담을 적극 강조하고 있다. 더불어 한국인과 한국 여성을 위한 한풀이로서의 목회상담이 교회에서 일어나서 한국 여성 뿐 아니라 한국인 모두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상담이 이뤄지도록 해야한다고 한다.
        김영애의 연구가 한에 대한 총체적인 그림을 제공했다면, 이재훈의 한과 그 초극에 대한 연구는 보다 체계적이고 철저하다. 이재훈은 한국인의 내면의 상처인 한의 경험을 한국인의 민간전승, 무교, 문학작품, 민중신학 등에서 폭넓게 자료발굴을 시도하였을 뿐 아니라 멜라인 클라인과 칼 융의 이론을 빌려 한국인의 한에 대한 심층심리학적 분석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그 스스로 자기 한 연구의 “…독특한 공헌은 방법론적 도구로 심층심리학을 사용한 것과 관계된다. 한은 정신의 깊은 층에 존재하는 심리적 실재이기 때문에 한의 탐구에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심층심리학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정신분석학적 전통에 서있는 멜라니 클라인과 분석심리학 전통에 서 있는 칼 융은 서로의 접근이 매우 상이하나 이재훈은 클라인의 이론을 빌려 한의 병리적 측면과 그 내적 역동을 밝히며 융의 이론을 빌려서는 통전적 삶을 지향하는 한의 의미를 규명하여 한의 다양한 측면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필자 역시 박사논문을 통해 부분적으로 한국여성의 한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러나 앞선 학자들과 달리 진취적인 측면에서 한국 여성의 한 초극의 모습에 보다 관심했다. 심층심리학 관점에서 한국인의 한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리비도나 비애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병리적 정서라 했다. 이와 달리 필자는 한에 찌들려있으면서도 지혜롭고 밝게 살아온 한국 여성의 또 다른 모습을 포착하여 칼 융의 어머니 콤플렉스(mother complex)이론을 중심으로 한국 여성을 한의 생존자로 구성하고자 했다. 즉, 한국 여성들에게 있어 한국은 모국(母國), 즉 어머니 나라로 경험되는데 일제로 인한 모국의 상실, 또 잇달은 남북분단과 독재는 이 민족이라는 어머니에 대한 어머니 콤플렉스를 야기했다. 따라서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독재타파운동을 전개하며 ‘민족의 어머니,’ ‘사도적 어머니,’ ‘민중의 어머니’를 추구한 것은 어머니 콤플렉스의 한을 생산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한국의 민주화가 경제성장과 함께 한국인의 한 연구의 방향전환은 오규훈의 ‘정(情)’ 연구에 의해서였다. 정이란 한국인이 생산적으로 한을 극복한 결과 생기는 정서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정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며 색깔도 없다. 냄새도 나지 않고 맛도 없다. 무형, 무상, 무색, 무취, 무미다. 그렇다면 구상세계에서는 없는 것이 된다. 분명히 없는데 있는 것이 정이다. 존재하되 역동적으로 존재한다. 그 없는 것에 손을 대고 그 없는 것에 오장육부가 녹고 그 없는 것에 살이 여읜다.

오규훈은 자신의 박사논문을 통해 정에 대해 이론적 논의를 시도했을 뿐 아니라 15명의 한국인을 심층 인터뷰하여 정의 감정적, 물질적, 도덕적 측면을 규명하였다. 오규훈에 의하면 정은 단시간에 형성될 수 없는 감정으로 오랜 기간의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경험을 거친다.  또 물질적으로 서로 계산하지 않는 상호간 교류가 증가할 때 정이 생기며, 도덕적으로는 서로를 위해 희생적 혹은 헌신적이 된다고 한다. 결국 정은 따뜻함, 상호성, 끈끈함, 잔잔함, 비계산적 특성, 그리고 타인지향적 속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정에 대한 연구는 한국인의 한의 생산적인 측면에 주목한 연구이다. 해방신학의 영향 속에서, 또 오랜 외침과 한국 분단 및 독재치하에서, 서구와 비교하여 겹겹이 고통하는 피해자로서 한국인을 강조한 것이 한국목회상담학계가 한국인의 한에 관심한 계기였다. 그래서 한의 긍정적 측면과 생산적인 측면을 강조한다해도 여전히 그 바탕에는 피해자로서 한국인을 이해하는 것이 그 바탕에 놓여있었다. 반면, 정의 연구는 고생 가운데도 능동적인  한국인의 주체성, 다중성, 능동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국의 급격한 경제성장과 포스트모던담론의 영향으로 여겨지지만, 극한상황 속에서도 인간과 다른 인간, 인간과 특정 제도를 상호적대적으로 간주하지 않는 한의 건강한 측면을 강조했다는데서 매우 주요한 연구이다.
        한의 연구를 통해 한국목회상담학자들이 한국인의 고유정서에 관심하고, 이를 기초로 한국인을 위한 고유의 목회상담방안을 모색하고자 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사회, 정치적 관점뿐 아니라 심리학적 관점에서, 즉 프로이트, 융, 클라인과 연결하여 한을 연구하고자 한 것은 한의 독특한 치유적 자원을 발굴하는데 매우 주요한 통찰을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인의 고유한 치유자원에 대한 연구는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적극적으로 모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한풀이, 정 뿐 아니라 그 외의 자원에 대해서도 적극 발굴하고자 노력하여 오랜 고난의 역사에서 지혜롭게 버티고 살아온 한국인의 내적 자원을 계속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살펴볼 천이두의 ‘삭임’의 논의가 바로 그 노력의 하나이다.

3. 사이 경험으로서의 ‘삭임’

        천이두는 한국인의 한의 독특성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의 한 초극과정에 관심해야 한다고 한다. 김열규에 의하면 “한이란 말을 극동의 세 나라, 즉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이 다 같이 쓰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주장했다. 천이두는 한걸음 더 나아가 한은 동양과 서양에서 모두 발견되는 경험이라했다. 따라서 그는 한의 문화간 차이를 연구하려면 모든 문화권에서 경험하는 보편적 경험으로서의 한이 아니라 각 문화권마다 다른 한의 초극과정에 관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보편적인 한과 달리 한의 초극 과정은 각 문화권의 고유한 정체성이나 에토스를 드러낸다. 가령, 어떤 문화권에는 대립이나 보복 혹은 갈등으로 한을 초극하는 한편, 다른 문화권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한을 초극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한은 주로 타인에 대한 연민과 우호성을 전제하는 精으로(情恨論), 혹은 좌절이나 한탄 속에서도 이를 긍정적으로 극복하고자하는 願으로(願恨論) 극복해왔는데 바로 이 정(情)과 원(願)이 한국인의 고유한 특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고통과 억압에서 발생한 부정적인 한이 어떻게 선의와 인정넘치는 다정다한(多情多恨) 혹은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원(願)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일까? 천이두는 그것은 바로 한과 한 초극 사이에 발생하는 ‘삭임’ 때문이라고 한다. 정한론과 원한론에서 한국인의 한이 긍정적으로 부각되었으나 실제 한은 신세타령, 푸념, 하소연, 팔자, 한탄, 청승과 같이 서민들의 생활감정과 밀접한 퇴영적이고 과거지향적 정조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한의 긍정적 측면에만 주목하는 것은 한이 어떻게 원래의 독소와 공격성을 승화하고 표백시켰는가를 간과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 과정에 보다 관심해야 하는데 천이두는 ‘삭임’이 한과 그 초극 사이에 작용하여 한의 독소를 제거시켰다고 한다. 그는 또한 세월이 지난다고 해서 한의 독소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삭임’을 지속할 때 한의 부정적 성향이 제거된다는 것이다.

…한의 부정적 속성은 끊임없이 ‘삭는’ 것이며, 이 ‘삭임’의 기능에 의하여 한의 독소, 즉 공격성(怨) ․ 퇴영성(嘆)은 초극되어 미학적․ 윤리적 가치로 승화 ․ 발효되는 것이다. 즉 한국인은 자신의 한을 ‘삭이면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인간으로 성숙하는 것이며, 그 ‘삭은’ 한을 ‘푸는’ 과정에서 이를 즐기는 민족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적 한의 내재적 지향성으로서의 이 삭임의 기능이야말로 이른바 한의 진정한 고유성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천이두는 이와 같이 ‘삭임’이 바로 한의 진정한 독특성이라는 것이다. 한은 ‘설움의 덩어리,’ ‘아무것으로도 메워질 수 없는 그리움의 감정’으로 본래 부정적이며 퇴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삭임’을 통해 ‘증류한 연후의 맑은 물, ‘고요한 관조아래 승화된 경지,’ ‘희로애락의 격동을 모두 표백해버리고 난 뒤의 소소한 빛,’과 같이 생산적 경험으로 승화된다는 것이다. 천이두는 한국음식의 고유한 특징을 발효음식, 즉 김치, 젓갈, 간장등에서 찾는데 이는 ‘삭임’이 한국인의 고유한 특징임을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한 증거라는 것이다.
        그럼 ‘삭임’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천이두는 남광우의 <고어사전>, 유창돈의 <이조어사전> 그리고 <소학언해>를 참조하여 볼 때 삭임의 원형은 ‘삭다’이고 이는 고어 ‘석다’에서 유래하였다. 때문에 ‘삭임’의 고어는 ‘석임’으로, ‘석임’은 누룩이나 술을 뜻하는 말이며, ‘삭다’의 고어 ‘석다’는 ‘썩다, 부패하다’ 혹은 ‘삭다, 발효하다‘의 뜻이라고 천이두는 정의한다. 그리고 현대어로 삭임의 뜻을 정리해보면 ⓛ옷가지 따위가 오래되어 썩은 것처럼 되다(decay), ②단단한 물건, 짙은 액체 등이 묽어지게 되다(become sloppy), ③음식을 소화시키다(digest) ④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다(tolerate) ⑤ 김치, 술 , 땡감 따위를 삭게 하여 맛이 들게 하다(ripen)등의 뜻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삭임’은 바로 음식, 물건, 혹은 마음이  썩은 상태의 부정적 상황에서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상태로 변화하는 과정 중에 발생하는 애매모호한 과정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삭임은 또한 ‘맛. 멋, 슬기’의 미각적 가치, 미적 가치, 윤리적 가치를 포괄한다.  천이두에 의하면, 한국적 한을 가장 전형적으로 표상하고 판소리에서 예술성 높은 소리를 의미하는 시김새 좋은 소리의 ‘시김’은 어원적으로 ‘삭임’에서 나왔다. 그리하여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아 오랜 수련을 통해 곰삭아 멋진 소리를 시김새가 좋다고 한다. 그런데 멋이라는 말은 맛(味)에서 나왔고 동양문화권에서 미적가치는 미각적 가치 뿐 아니라 윤리적 가치와 통한다. 따라서 삭다, 삭이다, 시김새는 맛과 멋을 동시적으로 포괄하는 동시에 윤리적 차원의 슬기까지 포함한다. 즉 삭임이 음식에 적용될 경우 곰삭은 맛이, 판소리 같은 藝(예)에 적용될 경우 창조적 승화에 의한 멋이, 또 마음에 적용될 경우 한탄과 울분같은 마음의 독소가 희석된 슬기 혹은 마음의 평화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한편 한이 윤리적이 되려면 단순한 한풀이가 아니라 ‘삭임’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한다. 가령, 사람이 분노에 쌓여있을 때 ‘화(火) 난다,’ ‘가슴에 불이난다,’ ‘속이 상한다,’ 혹은 ‘속이 썩는다’ 라고 하는데 이는 ‘삭임’에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즉, ‘삭다, 삭이다’는 윤리적 측면에서 억울한 마음, 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부정적, 공격적 정서를 발효하고 정화시키는 것이다. 반면, ‘삭임’에 실패한 것, 즉 썩은 것, 설익은 것을 그대로 ‘풀이’하는 것은 썩고 미숙한 것을 그대로 개방하는 것이며 독소를 살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은 단순한 이완이나 카타르시스와 같은 ‘풀이’에 앞서 충분한 ‘삭임’을 해야하는 것이다. 삭임의 관점에서 윤리적 미덕이 있는 사람은 서럽고 한스런 일들을 내면에서 삭이는 과정에서 철들어가고 슬기를 터득한 그늘이 있는 사람, 멍이 있는 사람, 멋이 있는 사람을 말한다.  
        한편, 삭임의 주요한 또 하나의 특징은 한국인은 삭임을 통해 화해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천이두는 한국인의 한이 고유하다는 말이 성립되려면 한국인만 한을 경험한다거나 한국인의 한이 유난히 넓고, 깊고, 짙은 때문이 아니라 한국인이 한을 초극하는 방식이 다른 민족과 다르기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해야한다고 했다. 모든 민족, 혹은 모든 사람이 나름대로의 한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어떤 민족의 경우, 분노나 원한을 즉각적 반격이나 보복으로 푸는 경향이 강한가 하면, 다른 민족의 경우, 한을 야기한 대상을 끝까지 추적하여 징계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래서 결투가 기사도의 관행으로, 또 복수가 무사의 미덕으로 문화적으로 간주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이두에 의하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결투나 복수를 미덕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몫의 한을 ‘삭이면서’ 화해를 지향하고자 한다고 한다. 즉, 맛, 멋, 슬기로 한을 즐기면서 보복적 악순환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국인의 화해지향적 특성은 판소리와 같은 장르를 통해 뚜렷하게 살펴볼 수 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한국판소리, 즉 심청가, 춘향가등의 치명적 약점은 등장인물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대립-갈등하지만, 이를 극한까지 심화시켜 비극미를 고조시키는데까지는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한다. 천이두에 의하면 이와 같이 주인공이 비극적으로 끝나지 않고, 행복한 결말을 맞아 “결국은 다 잘 먹고 잘 살았더라”로 끝나는 것은 판소리 뿐 아니라 갑오경장 이전의 한국 소설 및 민담의 거의 공통된 특징이지만, 이것은 오히려 한국 문화의 약점이 아니라 삭임에 근거한 한국인의 독특한 화해지향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한다. 특별히 한국인들은 끊임없이 참혹한 외침을 당했는데도 비극적 모티브를 주요하게 생산하지 않았는데 이는 일종의 역설이며 이를 통해 볼 때 철저한 이원대립과 복수, 불구대천의 원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삭임을 통해 외부환경과 화해하고 선의와 관용으로 이끄는 것이 한국인의 개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한국 고유의 내적 경험인 ‘삭임’을 중심으로 십자가와 부활 사이를 성찰하면 어떻게 될까?

4. ‘삭임’의 목회신학적 성찰

        ‘삭임’의 관점에서 예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이 경험을 반추할 때 먼저 부각되는 것은 ‘삭임’의 논의가 십자가와 부활 사이의 충분한 시간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앞에서 간략히 살펴보았듯이 많은 여성신학자와 목회신학자가 여성 혹은 내담자의 경험을 숙고하며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왔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관심한 반면, 그 사이 경험인 죽음이후 부활 사흘간의 경험에는 거의 침묵하고 있다. 반면, ‘삭임’의 논의는 예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이가 꽤 오랜 시간에 걸칠 수 있다는 시간적 개념을 창출한다. 유대-기독교에서 ‘3’이라는 숫자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때 예수 죽음의 사흘 역시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삭임’이란 맛, 모양, 형태 등의 철저한 상함과 변형을 필요로 하는 오랜 기간의 숙성과 발효를 의미한다. 이 삭임의 관점에서 사이 경험을 읽을 때 예수의 죽음이 충분히 오랜 기간에 걸친 완전하고 철저한 부패와 상함, 변형이었을 수 있다고 이해하게 된다.  
        삭임의 관점은 또한 사이 경험의 과정성을 부각시킨다. 대부분의 여성신학자들과 목회신학자들은 예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는데 있어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유별나게 강조함으로 인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하나의 독립적이고 분리된 사건(an separate and independent event)이거나, 혹은 이들이 양극에 놓인 대립적 사건으로 이해하게 하는 것 같아 보인다. 이와 대조적으로 ‘삭임’의 논의는 예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사이의 ‘되어감(becoming)’을 강조한다. 예수 죽음의 사흘은 오랜 기간에 걸친 완벽한 죽음과 상함이었지만, 동시에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부활이라는 질적 변화의 과정이기도 했다. ‘삭임’은 죽음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맛, 형태, 마음의 썩은 것 같이 되어감, 흐물흐물해짐, 상한 냄새가 나게 됨과 같은 다양한 과정 속에서 곰삭은 맛, 멋들어진 시김새, 그늘지은 슬기를 창출해내는 과정을 포함한다. 따라서 ‘삭임’의 논의는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서 부정적 경험이 그 독소를 제거하고 정화시키는 과정의 경험에 머무를 수 있게 한다.
        ‘삭임’의 관점은 십자가와 부활 사이 경험의 다층성을 강조한다. 전통신학의 논의와 달리 여성신학이나 목회신학은 인간경험에 대한 진지한 성찰 속에서 예수 십자가 부활을 새로운 시각에서 논의하고자 하나 대체로 이들 논의는 예수 십자가와 부활의 경험을 대속 혹은 연대(solidarity)와 같은 특정의 성공적 의미 창출하는 것에 관심하여 해석하고자 한다. ‘삭임’의 논의는 이와 달리 십자가와 부활의 사이의 공간은 지극히 복잡하고 다면적일 수 있음을 지시한다. ‘삭임’은 모든 한스러움의 상황이 반드시 성공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어두운 자락의 한이 밝은 자락의 한 혹은 정으로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은 거의 무한대 빛깔일 수 있다고 한다. 사람마다 또 동일한 경험을 하는 사람이라도 그 생애의 굽이굽이의 수효만큼,  또 그 사람됨의 정도에 비례하여 삭임의 빛깔은 수백수천개 일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삭임’의 논의는 십자가와 부활 사이 공간의 다층적이고, 임의적인 결합과 신비한 수많은 발생과 생성을 포용한다.
        한편, 삭임의 과정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으로 볼 수 있다. ‘삭임’의 관점에서 십자가와 부활 사이 경험을 숙고할 때 분명한 것은 예수 죽음 사흘의 기간 중 아들 하나님과 아버지 하나님의 모두 없으셨다는 것이다. 내담자의 죽음 같은 고통에 관심해온 목회신학자들은 아들의 끔찍한 참상을 허용하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수용한다. 성폭력, 가정폭력 등의 학대 상황에서 강력한 힘으로 힘없는 가족 구성원을 가혹하게 학대하는 그 모습을 바로 십자가 상의 아들 하나님과 아버지 하나님이 재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목회신학자들과 내담자에게 있어 아들 하나님과 아버지 하나님은 인격적 내적 대상으로 존재함을 전제한다. 아들 하나님 역시 십자가 위에서 온 몸을 벗긴 채 혹독하게 고난당하고 조롱거리가 되지만 그 역시 그의 고통과 죽음 속에서도 여전히 내담자나 여성을 위로하기도 하고(doing), 고통을 조장하기도 하면서(doing) 여전히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반면, ‘삭임’의 관점에서 바라본 예수 죽음 후 사흘간은 아들 하나님도 없고, 아버지 하나님도 없는 공간이다. 예수의 시체가 무덤으로 가기 전 로마 병정들은 예수가 죽은 것을 확실히 확인하고 그의 다리를 꺾지 않았다. 또한 창으로 예수의 몸을 찔러 그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확인했다(요19:32-33). 그 뒤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예수는 옮겨져 향료와 삼베로 감싸진 채 아직 한 번도 장사지낸 적 없는 새 무덤에 묻혔다. 아들 하나님은 바로 그 공간에서 썩어 문들어졌고, 상한 냄새를 풍기며 죽어있었고, 아버지 하나님 역시 사랑하는 외아들의 죽음으로 그와의 인격적 관계를 완전히 상실한 죽음의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영혼을 상실할 정도의 집요하고 가공할만한 폭력을 당해 어떤 인격적인 내적 대상도 창출할 수 없는 내담자의 죽음같은 심리적 공간의 경험을 숙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아들도 죽고 아버지도 죽은 하나님 없음의 사이 공간에서 그럼 어떻게 부활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세계 제2차 대전 중 전쟁 포로 생활을 3년간이나 했던 유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은 이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 대해 깊이 묵상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아들의 죽음은…아들의 죽음과 아버지의 아픔으로부터 다시 살게 하는 사랑의 영이 생성되는 하나님의 사건의 시작을 의미한다.” 몰트만은 아들의 죽음 속에서 아버지가 당하는 고통은 죽음만큼 크며, 아들의 죽음은 곧 하나님의 아버지됨의 죽음이라했다. 그런데 바로 그곳, 아들 하나님과 아버지 하나님의 죽음의 시간에 성령 하나님이 시작한다고 했다. 즉 내담자의 인격적 내적 대상이 완전히 상실된 곳에 부상하는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이며, 성령 하나님이 아들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썩음, 상함, 부패의 부정적이고 퇴영적인 한을 생산적인 경험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활동하는 ‘삭임’의 하나님 역시 바로 이 성령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이 공간에서 활동하는 ‘삭임’의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생명의 영, 살리는 영, 부활의 영이다. 몰트만이 성령을 공동체와 연결시킨 반면, 판넨버그는 생명의 영, 살리시는 영으로서의 성령을 우선시하였다. 그에 의하면, 성령 하나님의 활동은 구원의 역사 이전에 존재했으며, 창조의 시간에 하나님의 능력과 호흡과 모든 운동과 생명의 기한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생명의 영은 흙으로 돌아간 자들에게 생기를 부어 살리시는 하나님(시104:29-30), 피조물에게 호흡, 생령, 살아있는 영을 부으신 거룩한 하나님(창2:7), 골짜기 마른 뼈들을 서로 연결시켜, 힘줄과 살갗이 붙고, 살아오르고 생기있게 하시고 마침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다. 죽음같은 상황 속에서 ‘삭임’을 가능케 하고 새로운 존재로 다시 창조되는 것은 바로 이 생명의 영의 활동 때문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없는 곳에서 활동하는 ‘삭임’의 하나님은 또한 기독교 공동체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영이다. 판넨버그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성령의 경험이 왜곡되어 영이 오직 개인체험의 영역에만 관여하거나 기독교 공동체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령은 그에 의하면 기독교 공동체 혹은 개인적 신앙 경험을 다른 인간적 경험과 구분하지 않는다고 한다. 영은 기독교 공동체 경험과 기독교 개인 경험을 넘어서서 다른 인간적 경험과 공동체와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영의 영향력이 창조 안에서 우선한다는 것이다. 몰트만 역시, ‘생명을 주시는 영,’ 혹은 ‘생명을 긍정하시는 하나님’은 보편적 성격을 지닌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성령은 생명의 원천이며, 교회 안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 개인의 영혼구원사역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다. 또 열린 우정(open friendship)을 통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 심지어는 생태계까지 열려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죽음 속에서 부상하는 삭임의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바로 하나님 창조의 모든 세계에 열려있는 보편적인 영이다.

5. 목회상담적 함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이 경험에 대한 성찰 속에서 한국인의 고유한 자원인 ‘삭임’을 중심으로 목회신학적 성찰을 시도했다. 삭임의 목회상담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사이의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서 죽음경험의 시간성, 과정성, 다원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아버지-아들 하나님의 죽음 속에서 부상하는 ‘삭임’의 하나님, 성령 하나님 중심의 목회상담의 시작을 의미했다. 이와 같은 삭임의 논의가 목회상담에 주는 함의는 첫째, ‘삭임’의 목회상담은 찾는 ‘회복의 상담’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창조의 상담’이라는 것이다. 기존 목회상담에서 상담가와 내담자 관계의 전형은 아버지 하나님 혹은 아들 하나님이었고, 상담자는 이 하나님을 대변하여 내담자 안의 의미있는 관계(significant relationship)의 회복을 목표로 했다. 때문에 상담이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내담자 안에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쓸모있는 관계 자원의 회복을 찾는 것이었다. 반면, 삭임의 목회상담은 아버지-아들 하나님의 부재를 전제하기 때문에 상담가와 내담자 모두 전적으로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다. 즉, 끔찍한 외상 속에서 의미있는 내적 대상을 하나도 갖고 있지않은 썩어 문들어진 내담자 뿐 아니라 그런 내담자의 현존 앞에 함께 상담가 역시 함께 속이 썩어있다. 따라서 상담은 좋은 자원의 회복이 아니라 없음에서 만들어감의 상담, 과정중의 상담인 것이다.  
        그렇지만 ‘삭임’의 목회상담은 내담자와 상담가의 철저한 수동성을 전제로 하는 상담은 아니다. 고통의 현실 앞에서 내담자와 상담가의 철저한 무기력함이 강조되는 경우 성서나 교리 등 외부의 권위적인 지도나 교훈이 상담의 주요 방안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삭임의 목회상담은 이와 달리 내담자와 상담가의 무기력함을 강조하지만 내담자와 상담가의 무력한 순응이나 체념을 강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정적이고 퇴영적인 한의 악순환을 반복하지 않고자 하는 한의 ‘삭임’은 한을 삭히려는 주체의 불퇴전(不退轉)의 정진, 즉 오랜 시간의 긴장 맺힌 정신집중이 끝없이 필요한 때문이다. 그리하여 ‘삭임’의 목회상담은 심한 부패와 흐물흐물해짐 속에서 철저히 무능력하지만, 죽은 자를 살리시는 창조의 영을 희미하게 자각하며 내담자와 상담자 양쪽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또 서로가 창조세계에 스스로를 온 힘 다해 내어놓고 채워지도록 은근과 끈기로 버티고 노력하는 상호주체적 상담이다.
        한편, ‘삭임’의 목회상담은 죽음에 대한 독특한 애도과정을 특징으로 한다. 그간 목회신학에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관심하면서도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놓인 사흘의 경험에 충분히 관심하지 못한 것은 서양 문화에 남아있는 죽음에 대한 부정적 사고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반면, 예수 죽음의 사흘 경험에 주목하는 삭임의 목회상담은 내담자의 심리적 죽음에 대한 오랜 시간의 삭임과 묵힘의 애도 상담이면서 동시에 전형적인 서양의 애도방식을 넘어선다. 한국인 한의 전형을 묘사하는 판소리는 말할 것도 없이 외세와 지배층으로부터 철저히 유린 당하는 한많은 민초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유사한 일본이나 서양의 서사가 처절함과 숭고함의 정서로 가득찬 반면, 판소리는 웃음과 해학, 즉흥성과 명랑성, 관용성과 서민성을 특징으로 한다. 삭임의 목회상담 역시 암담한 현실에 대해 진지한 애도를 반복하지만 동시에 내담자와 상담가, 내담자와 창조세계, 또 상담자와 창조세계 간 살아있는 영의 다양한 창조 활동에 기꺼이 반응하고 열려있는 상담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삭임’의 목회상담은 장인정신에 기초하여 다양한 아름다움(美)을 만들어가는 미학적 상담이다. 조선시대 ‘쟁이’란 예술과 기술분야에 뛰어난 솜씨를 갖춘 사람을 뜻하는 ‘재인(才人)’에서 나온 말로 재능있는 사람이라는 뜻 뿐 아니라 예술가 광대를 지칭했다. 이들은 신분적, 경제적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갈고 닦기위해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아버지-아들 하나님에 기초한 상담이 상대적으로 구원론적 혹은 일원론적 관점에서의 의미추구를 지향한다면, 아버지-아들의 부재 속에서 생성하는 ‘삭임’의 목회상담은  장인정신으로 혼을 다해 미각적, 미학적, 윤리적 차원에서 맛, 멋, 슬기의 예술적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내담자와 상담가는 내담자가 기존의 특정 가치에 부합하거나 삶의 재적응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혼을 다해 충분한 시간과 과정을 거쳐 내담자가 자신 만의 예술적 맛, 멋, 슬기에 도달하도록 삭히고 묵혀야 하는 것이다.
        예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이 경험에 관심하며 살펴본 삭임의 목회상담은 한 초극과정에서 발생하는 한국인의 내적 역동에 관심하여 고안한 독특한 형태의 상담이라 할 수 있다. 추후 심층적인 이론연구 뿐 아니라 사례연구를 통해 이를 보완하고자 하며, 고된 삶속에서 심리적 죽음을 경험하는 내담자들에 대한 지속적 연구를 통해 삭임 목회상담의 실제 임상 기술을 고안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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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소개)2

주5일제와 BCM 교육목회제도

                                                                                         박종석(서울신대 교수/ 기독교교육학)
                          
초록

이 논문은 2011년 주5일제 근무와 2012년 주5일제 수업(이하 주5일제)의 전면적 시행을 맞아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은 한국 교회의 교육목회적 대응 방안의 제안이다. 주5일제에 대한 교회교육의 대응은 교회 교육부서와 목회적 차원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행해졌으나 그 신학적․이론적 근거가 허약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경우 BCM 교육목회제도는 그 동안 교회 교육현장에서의 실천을 통해 그 효과가 검증되었는데, 특히 사회와의 관계를 고려하고 있어 주5일제에 대한 타당하며 유효한 대응 방안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BCM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론을 바탕으로 교회가 개인, 소그룹, 회중, 사회, 그리고 성서와 전통이라는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 사이의 유기적 관계의 실현을 추구한다.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 사이에는 스무 가지 관계 개념이 가능한데, 여기서는 사회와 다른 요소들 사이의 관계 개념 여덟 가지를 검토한다.
   사회와 다른 구성 요소들 사이의 관계 개념은 교회의 사명인 케리그마, 레이투르기아, 디다케, 코이노니아, 그리고 디아코니아라는 배경과의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 주5일제에 대한 교육목회적 대응이 교회 전체의 것이 되도록 했다. 나아가 주5일제에 대한 교육목회적 처방의 교육 대상을 주로 아동과 학생에 한정하는 현실을 교회 회중 전체에게로 확장시킴으로써 교회의 신앙교육공동체 형성을 꾀하고 있다.

주제어
주5일제, BCM 교육목회제도, 사회와 개인, 관계 개념, 교회의 사명    


1. 들어가는 글

   2012년부터 초․중․고교에서 원칙적으로 전면 주5일 수업제가 실시된다. 정부는 주5일 수업제를 지역·학교별 여건에 따라 학교운영위원회 심의를 거쳐 시도교육감의 승인을 받아 자율 시행토록 할 방침이다. 주5일 수업제는 주5일 근무제와 맞물려 있다. 주5일 근무제는 2004년 7월부터 공기업·금융업·보험업 및 1,000인 이상 사업장을 시작으로 2011년 7월부터 20인 미만(5-19명) 사업장에까지 실시하게 되었다. 교육과학기술부나 고용노동부는 주5일 수업제의 취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주5일 수업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더라도 부모가 자녀를 돌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본 것이다. 주5일제의 시행은 사회 전체의 교육적 인프라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 될 것이다. 주5일제의 시행으로 관련 인프라는 학교로부터 가정, 그리고 지역사회로까지 확장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주5일 근무제와 주5일 수업제의 전면 실시는 교회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사회적 상황이다. 주5일 근무제와 주5일 수업제가 근로시간의 축소를 통한 일자리 창출, 삶의 질과 교육의 질을 높인다는 면에서 사회적으로 반기는 분위기지만 주일(일요일)에 집중되어 있던 휴일이 토요일에까지 확대되면서 신앙생활이 이완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분위기다. 이와 같은 분위기로부터 자연스레 종교계의 대처 방안이 나오게 되었다. 종교계의 대처 방안은 종교의 성격, 그리고 지역에 따라 온도 차이가 있다.

   “각 종교의 표정은 일단 불교 맑음, 가톨릭 어중간, 개신교 흐림으로 나타난다. 전국의 국립공원은 물론 주요 경승지에 사찰을 두고 있는 불교계는 비교적 느긋하다. 특별한 시설투자나 새로운 프로그램 개발 없이도 도회지를 떠난 시민들의 눈과 발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생명평화, 내적 성찰이 시대정신으로 떠오르면서 불교의 범신론적 세계관이 각광을 받고 있어 불교계를 더욱 고무시키고 있다. 반면 도심 교회 중심의 가톨릭이나 개신교는 도시를 떠나는 신도들의 발길을 교회로 돌리게 할 대책 마련이 급선무다.”

   “종교계는 주5일제에 대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기에 바쁘다. 교회나 사찰의 도농간 자매결연, 새로     운 신행프로그램 개발 및 확정, 성직자 교육, 예배 및 예불 시간 변경 문제 등이 여기에 포함된       다.”
  
   교육목회 역시 이 같은 새로운 상황에 접하여 변화를 꾀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교회는 개교회적으로도 몇 교회가 모여 연합해서, 또는 교단적 차원에서 대처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이들 교회들은 토요학교, 문화센터, 체험활동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기관들에서 행하는 대부분의 프로그램들은 당위성 면에서 그 근거가 약하다. 대부분의 교회가 사회 속의 섬으로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5일제를 대하는 교회의 선교전략은 여전히 본질적으로 자폐적이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는,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변한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그것은 교회와 사회가 이해의 바탕에서 만나는 지점에서 가능할 것이다.  
   시대적으로 대 사회적 관계를 재정립해야 할 교회에게 주5일제는 호기가 될 수 있다. 교육목회적 차원에서 BCM(The Body of Christ Model) 교육목회제도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 BCM 교육목회제도와 사회

   1) BCM 교육목회제도의 개요

   BCM은 서울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연구소가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아 2005-7년에 걸쳐 개발한 교육목회제도이다. BCM은 교단 총회로부터 소속 교회 모두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할 목회제도로 결의되었고 그동안 교회교육 현장에서 실시되어 그 효과를 보여주고 있는 검증된 제도이다.  
   “BCM”이란 명칭은 ‘그리스도의 몸’(the Body of Christ) 교회론으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 교회론은 주요한 몇 가지 구성층으로 이루어진 현실 교회의 유기적 성격을 드러내기에 적절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교회 구성단위들 간의 상호작용의 성격을 나타내기에 적절하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생각하는 BCM은 자연스레 교회 구성을 가능케 하는 기능적 본성을 상호작용으로부터 유기적 성격으로 파악한다. 교회의 유기적 성격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BCM은 시스템 이론을 채택하고 있다.
   시스템은 상호작용 하는 부분들로 이루어진 통일된 유기체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시스템에서 강조하는 점은 전체, 그리고 그것들을 구성하는 부분들 간의 상호작용이다. BCM은 교회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개인, 소그룹, 회중, 성서와 전통, 그리고 사회 등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이 BCM의 특징 중의 하나는 교회의 성장 지체와 영향력 감소가 사회의 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의 부족이라는 인식 하에 교회가 그 안에 자리한 ‘사회’를 교회의 구성 요소로 삼았다는 점이다. 교회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은 상호 간의 교류와 작용을 통해 유기체를 이루게 되는데, 상호작용 관계의 내용을 친밀감, 돌봄 등 20가지 개념으로 제안하고 있다. 이 같은 개념들은 교회의 사명인 케리그마(Kerygma), 디다케(Didache), 레이투르기아(Leitourgia), 코이노니아(Koinonia), 디아코니아(Diakonia)와 연결시켜 교회의 본성과 동떨어지지 않게 하고 있다. 이 같은 내용들을 구체화하기 위해 BCM은 20가지 주요 개념들을 새김마루, 소망마루 등 5개의 마루를 마련하고 있으며 그 아래 각각의 개념에 대해 창의적 프로그램의 공간인 4개의 터를 펼쳐놓고 있다. 정리하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는 BCM 교육목회제도는 케리그마 등의 교회의 사명이 유기체적 관계의 성격을 강조하는 개인, 소그룹 등의 교회의 구성 요소들 사이의 고유성, 기억 등의 20가지 관계 개념의 실현을 통해 완수 된다는 것이다.
   이 BCM 교육목회제도는 기존의 교회학교를 장으로 하는 연령별 교육을 공동체교육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며, 교회의 사명을 이루어가며 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가운데 동시에 성장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2) BCM 교육목회제도의 사회적 관계 개념

   앞에서 언급했듯이 BCM 교육목회제도는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구성요소를 개인, 소그룹, 회중, 성서와 전통, 그리고 사회로 보고 있으며, 그 요소들 사이의 관계 개념을 아래 그림에서와 같이 20가지로 보고 있다.
  
<그림1> BCM 교육목회제도의 구성요소와 관계 개념도
        
   위의 <그림1>에서 보듯이 이 중에서 주5일제와 관련된, 사회와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개념은 행동양식, 화해, 문화풍토, 참여, 변화, 이상, 개방성, 그리고 기독교윤리다. 주5일제에 대한 BCM 교육목회제도의 대응을 논의하는 이 글의 목적상 사회와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개념에 대한 개략적 설명은 논의의 기초내용으로서 진전과 구체화를 위해서 필요할 것이다.
  
   (1) 사회와 개인의 관계: 행동양식과 화해

   사회는 개인의 ‘행동양식’을 형성한다. 행동양식은 개인이나 집단의 행동이 “비슷한 상황에서는 반복, 유형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와 같이 유형화한 행동의 총체를 행동양식이라 한다. 각 성원이 공통의 행동양식을 공유하는 것은 사회의 존속유지를 위해 필요하다. 개인이 사회의 행동양식을 학습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은 사회화의 측면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소위 사회화(socialization)라고 하는 것으로 사회는 인간 형성의 환경으로 작용하면서 다양한 경로들을 통하여 그 사회가 요구하는 적절하고 바람직한 가치 규범이나 생활 방식 등을 내면화한다. 이 같은 사회의 기제 안에서 세상 안의 그리스도인에게는 기독교적 생활양식과 세상의 행동양식 사이에 어떤 균형을 취해야 하느냐 하는 과제가 주어져 있다.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60-80년대의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사회를 ‘세상’이라 부르며 정죄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것은 H. 리처드 니버(H. Richard Niebuhr)가 말한, 세상과 그리스도는 관계가 없다는 분리되어 있다는 관점에 감정까지 곁들인 문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선교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부정적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 개인은 사회로부터 동떨어져 있거나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그는 존재론적으로 사회적 존재이다. 사회가 있기에 그는 개인일 수 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사회인이다. 그리스도인은 시․공간을 초월한 추상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이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신체를 지닌 사회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같은 자기 존재의 전제조건을 인정하고 어떻게 사회 안의 존재가 될 수 있느냐라는 문제를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회를 향한 손 내밈을 ‘화해’로 표현 할 수 있을 것이다. 화해란 말은 싸움하던 것을 멈추고 서로 가지고 있던 안 좋은 감정을 풀어 없애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이 사회에 대해 갖고 있는 부정적 감정은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질적으로 다르다는 데서 따르는 비하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저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실재만이 아니라면 사회에 대한 부정은 하나님 나라의 다른 한 면인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외면하는 것이다. 미래에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여기서 지금 이루어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이다. 세상을 향한 화해의 몸짓만이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다.    

   (2) 사회와 소그룹의 관계: 문화풍토와 참여

   사회는 소그룹에 ‘문화 풍토’를 제공한다. 풍토는 우선적으로 어떤 지역의  기후와 토지의 상태, 즉 지질, 지형, 그리고 그 모양새인 경관 등 인간의 생활환경으로서의 자연적이며 지리적인 상태의 총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풍토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과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것이다. 단순한 물적인 자연이 아니라 인간과의 상호 규정적인 관계 속에서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변화하여 가는 것으로서의 자연이다. 일상적인 사람들의 삶을 역사의 무대에 소생시킨 아날학파(Annales School)의 경우, 풍토는 시간이 잘 마모시키지 못하는 ‘장기지속(la longue duree)’적인 지리적인 삶이라는 역사의 지반을 구성한다. 하지만, 풍토는 어떤 일의 바탕이 되는 제도나 조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예컨대 정치 풍토, 학문 풍토 등이라고 할 때의 풍토가 그 경우이다. 이 경우의 풍토는 인간 생활의 다양한 차원에 영향을 미치는 배경적 요인들을 뜻한다.
   사회와 소그룹 사이의 개념인 ‘문화풍토’라는 용어는 특별히 인간의 행동 양식이 형성되는데 영향을 주는 다양한 조건들을 의미한다. 교회에서 소그룹은 영아부, 유치부, 유년부,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 청년부, 장년부, 그리고 노년부 등이다. 이들 소그룹은 다른 소그룹과 차별화된다. 소그룹이 서로 상이한 성격을 지니는 이유는 그 소그룹이 속한 각기 다른 문화풍토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요즘 소그룹은 그 운영을 위하여 인터넷상의 카페, 클럽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정보화 사회의 문화풍토 영향 때문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사회는 소그룹에 문화풍토를 제공함으로써 소그룹의 특성이 형성되는데 영향을 미친다.
   사회는 소그룹에 대하여 자신에게 맞는다고 여겨지는 문화풍토에 참여하라고 유혹한다. 그 참여가 마치 삶 자체인 것처럼 미혹한다. 그러므로 소그룹이 사회에 참여할 때는 주의를 해야 하는데 그 실제적 행위는 비판과 해석 등으로 나타나야 한다. 사회 참여가 개인 단위가 아닌 소그룹 단위에서 보다 용이하듯, 참여를 위한 정당성의 확보 역시 소그룹 구성원들 사이의 토의를 통한 비판과 해석의 유익이 있다. 여기서 분명히 할 점은 비판과 해석이 논리적 철학적 작업에 그쳐서는 안 되고 참여와 행동을 위한 전 단계로서 행위로 이어질 때 가치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3) 사회와 회중의 관계: 변화와 이상

   사회는 회중이 시대적 흐름을 따라 ‘변화’되도록 영향을 미친다. 회중은 현상적으로는 교회 전교인의 모임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즉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공동체를 이른다. 이 상호작용은 회중 구성원들 간의 작용이고 회중 전체와 회중 구성원들 간의 작용이기도한 변증법적 성격을 띤다. 구성원과 구성원, 그리고 구성원과 회중 사이의 상호작용의 본질은 관계로서 BCM 교육목회제도의 교회론인 ‘그리스도의 몸’은 바로 이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성립된다. 로렌스 O. 리처즈(Lawrence O. Richards)에 따르면 현대 교회는 이 관계성이 부족하여 병이 들었으므로 이 관계성을 회복할 때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되찾는다고 하였다.
   회중에 대한 사회의 변화 요구는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내용이 문제가 된다. 변화의 과정 역시 사회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다. 회중의 변화가 사회가 요구하는 내용을 그대로 수용한다거나 타협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중에 대한 사회의 요구와 회중이 이미 알고 있는 변해야 할 내용은 일치할 수 있다. 회중이 변하지 못하는 것은 변화되어야 할 방향이나 내용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회중은 자신이 어떤 식으로 바뀌어야 할 지 분명히 알고 있다. 회중에 대한 사회의 기대는 윤리적 보루로서 그리고 그것의 성의 있는 실천일 것이다.
   한편 회중은 자기 형성과 자기 상호작용을 넘어서 그 외부로까지 영향력을 행사한다. 넬슨에 따르면, ‘신앙공동체’(faith community)로서의 회중은 문화를 변화시키는 힘까지 지닌다. 문화를 변화시키는 힘은 무엇인가? 넬슨은 그것을 도덕심으로 본 것 같다. 신앙공동체인 회중은 사회화에 의해 회중을 형성하는데 그 형성의 내용은 도덕이다. 교회가 사회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삶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불신지옥 식의 복음이 아니다. 일단은 상식의 회복이 필요하며, 다음으로는 도덕의 회복이 필요하다. 회중은 회중으로 형성되며 그 회중은 자신을 변형시킨다. 그렇기에 회중은 우선 자기 안의 구성원들로부터 시작해서 상식과 도덕을 회복해야 하며 그것들이 모여서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회중이 될 것이다.  
   회중이 사회를 향하여 외칠 수 있는 이상은 우선은 복음이고 다음은 기독교적 정신이다. 그러나 복음이란 이상은 사회에게는 이질적이며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평가 때문에 소화하거나 설득할 수 있는 형태로 포장이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거부감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에 기독교정신이 무엇인지 검토해야 할 것이다. 사회를 염두에 둘 때 기독교정신은 가장 기독교적인 삼위일체라든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과 같은 기독교 종교적 내용은 거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사회가 기독교에 대해 갖추어야 한다고 보는 내용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교회가 건강하지 못하고 병들었음을 보여주는 그 같은 내용들에는 도덕성 상실,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물질만능주의와 권력 추구, 합리성 결여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부패한 사회에서 정직함을, 물질만능사회에서 인간과 인격의 회복을, 경쟁적 권력과 탐욕의 시대에 함께 잘 살기 위한 섬김과 희생과 봉사의 정신을, 폭력과 불합리가 난무한 사회에서 대화를 통한 소통과 상식을 말과 행위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4) 사회와 성서․전통의 관계: 개방성과 기독교윤리

   BCM 교육목회제도에서 성서와 전통은 성서의 정신과 교단, 즉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신학적 유산을 말한다. 이에 대한 사회의 요구는 개방성인데, 이는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성서와 전통의 교회 탈피에 대한 요구로서 공적 신학에 대한 요청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성서와 전통에 대한 시공을 극복하는 현대적 해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적 신학이라고 할 때 공적은 크게 두 가지 뜻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세계화의 여파로 가속화된 기독교 신학의 사적 영역화의 면에서 공적이라는 뜻은 교회와 신학의 배타적인 영혼구원 추구, 교회의 성장에 대한 전적 가치 부여라는 공공성 상실로부터의 탈피를 말한다. 그리하여 교회가 세계화와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책임성을 갖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의 공적이라는 의미는 이미 성서와 전통에 부여되어 있는 것으로서의 공적 성격이다. 즉 성서와 전통은, 그리고 교회의 실천은 사사로운 것이 아니며 공적으로 성립된 것이라는 의미에서이다. 따라서 전자의 공공성은 후자의 공적 성격에 의하여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교회 자체의 공공성과 교회의 공적 자산들을 명심하면서 인류사회와 창조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도전해 오는 공적인 이슈들에 응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성서와 전통이 사회에 제공할 수 있는 내용은 ‘기독교윤리’이다. 먼저 여기서 성서와 전통은 성서와 전통 각각에 해당하는 모든 내용으로 볼 수 없다. 그 내용이 엄청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서와 전통은 성서와 전통이 만나는 지점의 내용으로 보는 것이 명료하며 혼란으로 인한 낭비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경우에 성서와 전통이 만나는 지점은 소위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이다. 그러나 사회에 제공할 수 있는 개념이 ‘기독교윤리’이기 때문에 사중복음은 성결교회가 주장하는 날것 그대로서는 호소력을 상실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사중복음과 현대가 만나는 지점에서 기독교윤리의 내용을 검색해야 할 것




신학사상 2012년 겨울호(159집) 차례
신학사상 2012년 여름호(157집)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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