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소개
 
 
연구소 약사
 
 
연구소 소식
 
 
민중신학 자료
 
 
독자마당
 
 
월간살림
 
 
신학사상
 
 
신간안내
 
 
도서신청
 
 
관련 사이트 링크
 
 
안병무 선생님
 
신학사상 총목차 연구논문 투고규정 안내 신학사상 원문서비스


  한신연 
 신학사상 2012년 겨울호(159집) 차례


이번 호에는


이종록(구약학) 한일장신대 교수는 “하바 나길라! -고대 이스라엘의 축제에 대한 신학적·문화적 연구”에서 축제는 전복적이고 파괴적이라는 점에서 놀이와 구분 된다는 관점에서 고대 이스라엘에서 주요한 3대 축제는 모두 출애굽 사건과 연관을 갖는데, 이런 점에서 그 축제들은 사회질서전복을 통한 해방이라는 혁명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한다.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도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이 평화롭게 공생하는 진정한 잔치의 나라라는 점에서 축제의 나라이다. 이 교수는 이 논문에서 ‘축제 없는 축재(蓄財)의 세상에서, 우리는 온 생명체가 누리는 진정한 몸의 축제, 온전한 카니발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있다.  

김동건(조직신학) 영남신대 교수는 “크로산이 ‘역사적 예수’에 사용한 방법론 연구” 논문에서 새로운 역사적 예수 연구를 선도하는 크로산의 방법론을 분석했다. 크로산은 '삼중 교차적 과정'(a triple triadic process)을 거치는 방법론을 사용한다. 세 가지 차원의 연구에 따른 결과를 ‘교차적’으로 종합한다는 의미이다. 세 가지 차원의 연구는 인류학적 연구, 역사학적 연구, 문헌학적 연구이다. 삼중교차적 방법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각 차원의 연구가 상호 균등하고 조화있게 교차해야 한다. 이 논문은 각 차원의 교차가 얼마나 잘 이루어지는지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장윤재(조직신학) 이화여대 교수는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신학’을 향하여 -고든 카우프만의 ‘핵 시대의 신학’을 넘어서”의 논문에서 ‘현재 인간의 손에 전 인류뿐만 아니라 모든 지구 생명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는 핵의 힘이 쥐어진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 신학은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과 ‘생명’ 그리고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고든 카우프만과 샐리 맥페이그의 ‘핵 시대의 신학’을 비판하면서 이제는 우리가 단순히 ‘핵 시대의’ 신학이 아니라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신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승성(조직신학) 한신대 외래교수는 “탈근대적인 신 인식론의 가능성 탐구: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실재론적 관점과 돈 큐핏(Don Cupitt)의 반실재론적 관점을 넘어서”의 논문에서 칼 바르트(Karl Barth)는 실재론적인 관점에서, 돈 큐핏(Don Cupitt)은 반실재론적인 관점에서 주체와 객체를 분리시키는 근대주의의 이원론적인 신학을 했는데, 이제 탈근대시대에 이런 주객 도식을 넘어서는 신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 교수는 탈근대적인 신 인식론의 이론적 기반을 하이데거의 현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에서 찾고자 했다.

황재범(조직신학) 계명대 교수는 “초기 한국 개신교회가 한국 민주주의 문화의 형성에 끼친 영향: 한국장로교회를 중심으로” 논문에서 한국장로교회는 기독교 수용 초기부터 한국에 민주주의 문화의 초석을 놓았다고 한다. 황 교수는 네가지 사례를 들어 이것을 입증하려고 했다. 첫째, 19세기 후반 및 20세기 초까지 아프리카 및 아시아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의 복음의 설교 자체가 언설의 자유, 평등(특히 서민 및 여성의), 신앙과 양심의 자유 등 민주주의적 가치들을 높였다. 둘째, 한국장로교회에서 전면적으로 실시한 소위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자전, 자치, 자급”을 핵심으로 하는 바와 같이 개 교회의 민주주의적 자치를 강조하므로 교인들에게 민주주의를 효과적으로 학습시켰다. 셋째, 장로교회에서의 민주주의적 자치는 3단계적 대의적 민주주의 정치시스템(당회․노회․총회)으로 발전하게 해줌으로써 한국인들에게 민주주의 정치과정 실질적으로 경험하게 해주었다. 넷째, 한국장로교회는 1907년부터 한국 최초로 헌법을 채택하여 실시하므로 한국 전체에 헌법 민주주의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전현식(조직신학) 연세대 교수는 “패러다임 변화의 인식론적 함의: 학제간 대화와 신학간 대화를 위하여”라는 논문에서, 지금까지 전문화로 분화되었던 제학문들이 상호 연계, 통섭, 융합하고 있는 패러다임의 전환 환경에서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변화이론을 신학분야에 적용한 한스 큉의 연구를 통해 학제간, 신학간 대화를 실현하려고 했다. 전 교수는 과학적(객관적, 실증적, 보편적) 지식과 신학적 지식(주관적, 실존적, 고백적)의 이원론적 인식론의 한계를 비판하고 진리의 상황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신학간 대화를 구체화할 수 있는 인식론적 요소들로 기독교의 역사성, 성서(일차적 내적 권위)와 신학(이차적 기능적 권위)의 관계, 계시체험의 상대적 절대성, 신앙, 믿음과 신학의 역동적 관계성을 제시한다.

이정구(교회건축과 예술) 성공회대 총장은 “개신교회 예배공간의 정체성” 논문에서 한국 개신교는 교단과 교파마다 신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교회가 모두 유사한 예배공간을 구축하고 있는 현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칼뱅과 직접관련이 있는 유럽 개혁교회의 서로 상이한 두 예배공간을 통해 한국개신교회가 지행해야할 예배공간의 정체성을 모색하고 있다. 칼뱅이 1536년부터 25년간 설교를 했던 제네바(Jeneva)의 '성 삐에르(St. Pierre) 교회'와 칼뱅(Jean Calvin, 1509-64, Swiss)이 1538-41년 사이에 위그노(Huguenot)난민 목회를 했던 프랑스 슈트라스버그(Strasburg)시 부클레(Buckle) 4가 골목에 자리한 개혁교회의 상이한 두 예배공간이다. 삐에르교회는 성 화상을 제거하고 중세 가톨릭 예배공간을 그대로 사용한 교회이며, 슈트라스버그 개혁교회는 현대건축물로서 공간에 아무 장식 없이 옛 시온(Old Zion)교회의 설교대 형태를 설치한 교회이다.

조남신(실천신학) 예일신학대학원대 교수는 “제1청중, 제2본문- 루돌프 보렌(R. Bohren)의 설교청중이해에 대한 비교 분석적 고찰”의 논문은 ‘제1청중 제2본문’이란 독자적이고도 뿌리 깊은 테제로서 신학적 설교학과 경험과학적 설교학이라는 설교학의 방법론을 제시한 보렌의 연구를 통해 설교에서 간과되고 있는 설교청중이해에 초점을 두고 있다. 조 교수는 보렌이 청중문제를 가지고 시도하고 있는 것은 - 베버(O. Weber)와 판넨베르크(W. Pannenberg)의 말을 빌리면 - 위로부터의 설교학(선포 설교학)과 아래로부터의 설교학(상황 설교학) 사이를 매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실제적으로 오늘날 강단설교와 설교학의 과도한 청중예속성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청중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통해 설교청중에게 합당한 명예를 부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한다.


이번 호에 게재된 8편의 신학 논문들은 기존의 객관적 신학 패러다임을 넘어 각기 ‘역사’, ‘상황’, ‘독자’, ‘청중’의 관점에서 새로운 신학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이런 신학 작업은 우리나라 신학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동안 한국신학연구소에서는 서구 신학계에서 세계적으로 중요한 신학서적들을 번역 출판했는데, 최근에는 서구에서도 주목할 만한 신학서적이 출판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신학자들의 책들도 출판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오늘의 세계는 이미 어제와 다른 새로운 세계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과거 지식중심의 신학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새로운 미래는 이미 우리에게 와 있고, 일어나고 있다. 이런 현실화되고 있는 미래에 대한 인식과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미래는 희망이 아니라 재앙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제 신학은 과거 세계관과 과거 지식 중심이 아니라 미래의 관점에서 현실을 보고 신의 뜻을 묻는 미래 패러다임의 신학을 해야 할 것이다.

=======================================================================================

차 례 (159집)              

연구 논문

이종록 ․ 하바 나길라! -고대 이스라엘의 축제에 대한 신학적·문화적 연구
김동건 ․ 크로산이 ‘역사적 예수’에 사용한 방법론 연구
장윤재 ․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신학’을 향하여
           -고든 카우프만의 ‘핵 시대의 신학’을 넘어서
오승성 ․ 탈근대적인 신 인식론의 가능성 탐구: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실재론적 관점과             돈 큐핏(Don Cupitt)의 반실재론적 관점을 넘어서
황재범 ․ 초기 한국 개신교회가 한국 민주주의 문화의 형성에 끼친 영향:
            한국장로교회를 중심으로
전현식 ․ 패러다임 변화의 인식론적 함의: 학제간 대화와 신학간 대화를 위하여
이정구 ․ 개신교회 예배공간의 정체성
조남신 ․ 제1청중, 제2본문- 루돌프 보렌(R. Bohren)의 설교청중이해에 대한 비교
             분석적 고찰


=======================================================================================

(논문소개)1

하바 나길라!
-고대 이스라엘의 축제에 대한 신학적·문화적 연구

이종록 (한일장신대 교수/ 구약학)

초록

이 논문은 축제에 대한 최근의 논의를 통해서 고대 이스라엘의 축제를 문화적으로, 특히 카니발에 비추어서 살펴보는 데 목적을 둔다. 축과 제로 이루어진 축제는 본질적으로 종교문화적이기 때문에, 축제를 연구하는 것은 종교적·문화적으로 현실을 살피는 일이다. 인간은 “호모 페스티부스,” 즉 축제하는 인간이며, 축제를 통해서 삶을 영위한다. 축제는 전복적이고 파괴적이라는 점에서 놀이와 구분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주요한 3대 축제는 모두 출애굽 사건과 연관을 갖는데, 이런 점에서 그 축제들은 사회질서전복을 통한 해방이라는 혁명적인 성격을 갖는다.
축제를 통해서 사람들은 음주가무를 즐겼는데, 성서를 보면, 신이 그런 축제를 사람들에게 명령한다는 점에서 신은 축제의 신이며 축제의 기획자이다. 구약성서에서 다윗, 히스기야, 그리고 요시야가 대표적인 축제 기획자들이고 축제의 왕들이다. 그리고 사람뿐만 아니라 신도 음주가무를 즐긴다(고 가상한다)는 점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축제는 신의 축제였다. 또한 축제의 카니발에서 특징적인 광대의 모습은 예수에게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고 어릿광대 모습은 다윗에게서 두드러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윗은 춤의 왕이었다.
인류 역사는 기득권층의 의도와 달리, 민중들이 축제를 통해서 새로운 삶을 꿈꾸고 그것을 실현해온 역사이다. 그래서 축제는 환상의 축제이며, 종말의 축제는 축재의 종말로 모두가 평등하게 어우러져 먹고 마시고 춤추며 사는 음주가무의 세상이다. 그것을 예수는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이 평화롭게 공생하는 진정한 잔치의 나라라는 점에서 더욱 카니발스럽다. 축제 없는 축재(蓄財)의 세상에서, 우리는 온 생명체가 누리는 진정한 몸의 축제, 온전한 카니발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한다.

주제어
축제, 카니발, 호모 페스티부스, 성서, 이스라엘, 엑소더스, 유월절



여는 글-축재(蓄財)와 축제(祝祭), 그 천양지차(天壤之差)

축제는 “축(祝)과 제(祭)가 포괄적으로 표현되는 문화현상”이고, “기득권적 권력, 불평등적 모순, 억압과 갈등, 어두움과 희미함을 걷어내고자 하는 것”이며, “비일상적인 전도현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사회인류학자이자 상징인류학자엿던 빅터 터너(Victor Turner)는 이러한 신성하고 종교적인 순간을 ‘리미날리티(Liminality) 단계’라 칭하고 이러한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나 그들이 모여 있는 상황이나 공간을 ‘코뮤니타스(Communitas)라고 부른다.” 그렇기에 축제에 대한 연구는 기본적으로 종교문화적 차원에서 현실을 직시하고 문제들을 풀어내려는 시도이다.
그런데 현대적 상황은 종교적·문화적 차원에서 볼 때, “축제 부재” 또는 “축제 빈곤”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 까닭은 항상 축재가 축제를 대체하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미켈란젤로가 대리석 조각상 만드는 과정을 예로 들면서, 조각하기 이전에 대리석은 그 전체가 유용한 가치를 갖지만, 조각하기 시작하면 그가 만들려 하는 모양 이외의 것들은 깎여 나갈 것들, 즉 쓰레기가 되는데, 이렇듯 “쓰레기의 분리와 파괴는 현대적 창조의 비법이 되었다”고 말한다. (少數)선택과 (多數)배제 원칙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을 정상적인 삶에서 제외하고 추방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 그 중에서 특히 퇴출과 비정규직 문제는 심각하다.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는 까닭은 시장(市場)이 신적인 능력을 갖는 만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장을 신격화하는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다. 장하준이 말하는 대로,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시대는 분명 축재(蓄財)의 시대이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축제마저도 축재를 위한 도구가 되었다. 그래서 축제는 범람하지만, 리미날리티와 코뮤니타스의 부재로 인해 진정한 축제를 누리지 못하는 상황이다. 만국박람회 이후 자본주의는 축제를 변질시켰다. 그래서 뒤비뇨는 축제가 끝났다고 한다. “축제들은 이윤의 제국주의에 의해 휩쓸려 가버렸고, 나선적인 종교적 탐닉 속에 섞여버렸다.” 그리고 중세 시대의 바보 제가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는 하비 콕스는 “오늘의 제축이나 환상의 형태는 예외 없이 위축되어 있고 절연(絶緣)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하면서, “오늘의 축전(祝典)은 만유질서(萬有秩序)의 역사 행렬과, 인간의 정신적 탐구를 담은 위대한 역사에 우리를 관련시켜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는 인류가 축재를 위해서 축제를 버렸다고 말하면서, 제축의 쇠퇴가 신의 죽음과 필연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더욱 축제가 필요한 시대이다. 이런 점에서 성서적 축제를 살피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본다.
이 논문은 최근의 축제 연구에 근거해서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축제들의 산학적이고 문화적인 의미를 유월절을 중심으로 살피는 데 목적을 둔다. 그런데 축제를 단순한 놀이를 넘어서는 중요한 문화현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지금까지는 고대 이스라엘의 축제를 주로 역사적인 측면에서 다루었지만, 여기서는 신학적이고 (종교)문화적인 측면에서 다루려고 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축제들이 언제 어떻게 발생했으며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규명하기 보다는, 성서 본문에 나타난 고대 이스라엘의 축제에 대한 이념, 즉 성서기자의 신학사상을 밝히려고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종교적 축제에 대한 문화적 이해와 적용을 심화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1. 호모 페스티부스(Homo Festivus)

목청을 뽑아 민요를 부르는 사람, 술에 취하여 마냥 흥겨워하는 사람, 풍자와 조소를 퍼붓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세상이 발칵 뒤집힌다. 말단 미직의 서사들도 얼굴에 물감칠을 하고 상사들의 예복을 걸치고서 거리를 활보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교회나 궁정에서 가지는 웅장한 예식을 흉내 내면서 이를 조롱하기도 한다. 때로는 악질 현감, 가짜 임금, 아이 주교(主敎)등을 선출하여 사건을 처리하기도 하고 풍자적인 모의 미사를 집전하기도 한다. ‘바보 제’의 기간 중에는 풍속이나 관례를 아무리 조롱하여도 상관이 없으며 국가 최고급의 명사들을 대상으로 야유를 퍼부어도 용납이 된다.

하비 콕스가 묘사하는 중세의 축제 장면이다. “축제” 하면 우렁찬 음악소리, 긴 행렬과 우스꽝스런 복장을 한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술을 비롯한 여러 음식들이 떠오른다. 섬에서 보낸 어린 시절. 명절 때 동네에서 소 한 마리를 잡아서 그것을 고르게 나누어 갖고, 그날 저녁과 밤에는 모두가 어우러져서 식사를 하고 소가죽을 굽는 불 옆에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그리고 동네에서 초상이 났을 때, 끝없이 이어지는 만장의 행렬, 그것은 또 다른 축제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속 깊은 흥겨움을, 그 다정한 어우러짐을, 그 청빈한 풍족함을, 그리고 그 스스럼없음을 잃었다. 인간이란 본래 무엇인가?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이고, 호모 파베르(homo faber)이며, 또한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이지만, 하비 콕스가 말한 대로, 더 본질적으로는 호모 페스티부스(homo festivus)이다.

인간이란 그 본성으로 미루어 볼 때 노동을 하고 사색을 하는 생물일 뿐만 아니라 노래와 춤과 기도와 설화와 경축의 행위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homo festivus(제축 인)이다. 인간적 생활이 지니고 있는 제축의 보편성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문화치고 제축성ㅇ르 지니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한 문화가 제축을 상실할 때 인간이 지니고 있어야 할 어떠한 보편적 특질이 존망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축제하는 생명체이고, 그렇기에 인간의 삶은 당연히 축제의 삶이어야 한다. 아무리 세속화된 세상을 산다고 해도, 인간은 근원적으로 성스러운 차원을 추구하며 그것을 축제를 통해서 이루려 한다. “축제 속에서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성스런 영역은 일상적 삶의 세속적인 부분의 존재가치를 더욱더 부각시켜” 준다. 그리고 인간들은 유토피아를 추구하며 이를 통해서 자신의 생존 의미를 확인하려 한다. 즉 문화정체성을 확인하려 하는데, 이를 위해 축제가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2. 카니발(Carnival)

호이징하가 말한 대로, 인간은 분명히 놀이하는 존재, 즉 호모 루덴스이다. 그러나 호이징하가 말하는 놀이는 일정한 규칙을 갖고 거기에 따르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축제와는 다르다. 뒤비뇨는 놀이와 축제를 구분한다. “사람들은 자주 ‘놀이’와 ‘축제’를 혼동한다. 놀이는 규칙의 수용을 이야기하며 과격한 근육행위에 기호를 부여하고 자연적인 행위로부터 분리되어 스텍터클로 통합되는 것이다. 반면에 축제는 규칙을 위반하는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모든 규칙을 파괴하는 것이다.” 축제, 특히 카니발은 일정한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일탈과 전복으로서의 축제는 기존의 규칙을 깨뜨린다는 점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현존하는 종교적, 정치적, 도덕적 가치와 규범과 금지들을 확고히 하려는

공식적인 축제와는 대조적으로 카니발은, 마치 지배적인 진리들과 현존하는 제도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된 것처럼, 모든 계층 질서적 관계, 특권, 규범, 금지의 일시적 파기를 축하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시간성의 축제이며, 생성과 변화 갱생의 축제인 것이다. 카니발은 모든 종류의 영구화(영구화), 완성, 그리고 완결성과도 적대적이다. 카니발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래를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욕의 사순절 이전에 벌어지는 일탈의 사육제(謝肉祭), 그 광란의 기간에 벌어지는 카니발은 원래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이교적인 것도 아니었다. 카니발은 원래 호모 페스티부스로서의 인간의 삶에서 비롯한 것이다. 기독교적이라거나 이교적이라고 말하기 이전의 원초적 본능(Basic Instinct)이라는 것이다.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는 로마의 바쿠스 축제로 이어졌고, 기독교 축제에 그 흔적을 남겼다.
류정아는 “카니발”의 어원으로 세 가지를 드는데, 첫째, “카루스 나발리스”(carus navalis, 배 마차)는 로마의 2월 축제에서 등장한 배 모양의 마차 행렬을 가리킨다. 둘째, “카르네(carne, 고기)”+“레바”(leva, 걷어낸다, 삼켜버린다.)이다. 셋째, “카로”(고기)+“발렌스”(valens)로, “고기로 잔뜩 배를 불린다.”이다. 윤선자는 셋째를 택한다.
윤선자는 카니발을 세분화하고 세밀하게 규정하는데, 12월 25일과 12일제를 포함하는 “광인의 축제”와 1월 17일 성 앙투완 축일에서 육식일까지의 “카니발 축제”로 나누고, 광인의 축제를 교회와 하위 성직자를 중심으로 벌어진 다소 종교적 축제로, 카니발 축제를 교회 밖 평신도를 중심으로 벌어진 세속적 축제로 규정한다. 광인의 축제는 아이를 비롯해서 사회적 약자와 불구자들을 위한 축제였는데, 점차 빈자와 광인을 위한 축제로 확대되었다. 광인의 축제에서는 가짜 주교인 “광인의 주교”를 등장시켰는데, 그는 하층민들의 대표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광인의 축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지배층이 부정적으로 여겨서 결국 17세기 이후에 사라졌다. 카니발 축제에서는 “카니발의 왕”의 행진과 화형식이 중요하다. “이 인형은 육식 화요일에 마을을 가로지르는 행렬을 벌이고, 그 행렬이 끝나면 모의재판을 받음과 동시에 화형을 당하였다.” 카니발 행진에서 중요한 것은 광인이었다. 광인은 그냥 미치광이가 아니고, 상태가 양호한 광인이거나 어릿광대들이었다. 이들은 궁정이나 성에 상주하기도 하고 유랑하기도 했다.
카니발의 특징은 첫째, 웃음과 익살, 풍자, 그리고 둘째, 웃음과 익살, 풍자가 과장되고 뒤집힌 육체와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괴기적 사실주의인데, 괴기적 사실주의는 뒤집기, 더럽히기, 자르기, 외설, 먹기(연회), 집단성의 성격을 갖는다. 바흐찐은 축제의 양상을 이렇게 묘사한다.

카니발적 유형의 광장 축제들, 개별적인 우스꽝스러운 의식과 전례들, 어릿광대와 익살꾼들, 거인들, 난쟁이들, 절름발이들, 잡다한 유형과 계급의 떠돌이 광대들, 수없이 다양한 패러디적 작품과 다른 많은 것들-이 모든 형식들은 통일된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형식들은 동일하면서도 총체적인 민중들의 웃음과 카니발적인 문화의 부분이자 편린들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지극히 세속적으로 보이는 축제가 교회를 중심으로 열렸다는 것이다. 중세 시대에 교회는 놀이와 연극이 벌어지는 유희의 장소였다. 그래서 교회에서 광인의 축제 같은 탈선적인 의례들도 행해졌다. 교회는 거룩한 곳이며, 동시에 지극히 세속적인 곳이었다. 교회 건물에는 거룩한 그림과 조각만 있었던 게 아니다. 괴기스럽고 풍자적인 그림과 조각들을 새겨놓았다. 도시도 그렇지만, 특히 농촌에서 교회는 축제의 장소였다. “농촌에서는 17세기까지도 교회에서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민중오락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런 점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축제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잔치였다.

넘쳐흐르는 풍요와 전 민중성은 물질·육체적 삶의 모든 이미지들이 지니고 있는 유쾌하고 축제적인(관습적 일상 생활이 아닌) 특이한 성격의 기초가 된다. 여기서 물질·육체적 원리는 축제적이고, 향연적이며, 광희적(狂喜的)인 원리이다. 이것은 〈전세계적 향연〉이다.

이런 점에서 카니발은 “고기의 축제”이고 “몸의 축제”이다. 중세 시대는 몸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는 점에서 물질적이고 육체적이었다.

3. 축제의 신·신의 축제

지금까지 축제에 대한 기본적인 것들을 살펴보았고, 이제는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고대 이스라엘의 축제를 다루려고 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제국주의에 침탈당하는 역사이다. 이스라엘은 앗시리아 제국, 바빌로니아 제국, 페르시아 제국, 헬라 제국,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런데 이 파란만장·우여곡절의 역사, 삶의 질곡 속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쁘게 사는 법, 삶을 축제로 만드는 비법을 터득했다. 우울한 역사 대(對) 축제의 삶. 그것이 바로 “하바 나길라”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축제의 삶을 명령한다.

22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히브리어 “아칼”)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24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아칼”) 즐거워할 것이며(“샤마흐”) 27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아자브”) 말지니라 28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아칼”)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4장).

이렇게 구체적으로 축제를 명령한다는 점에서 야훼는 “축제의 신”이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 년에 세 차례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했다. 물론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들은 그런 삶을 염원했고, 간혹 그렇게 했던 적도 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야 우리에게도 익숙한 일인데, 위에 인용한 본문 23절을 보면,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 십일조를 먹으라고 한다. 본문에서 핵심단어는 “먹는다”(“아칼”)이다. 그리고 거리가 멀면 돈을 갖고 가서 거기서 필요한 것들을 구입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고 하는데, 그 품목을 보면, 소(“바카르”), 양(“촌”), 포도주(“아인”), 그리고 독주(“쉐카르”),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들이다. 그리고 거기서 함께 먹고 즐거워하라(“샤마흐.”)고 한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제사만 드리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 단위로 다른 가족들과 함께 즐기러 갔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포도주와 독주를 사서 맘껏 마셔라.”고 일러준다. 음주가무(飮酒歌舞)를 명령한 것이다.
그리고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만 포도주와 술을 마시면서 즐기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물로 독주도 바쳤다. 민수기 28장 7절을 보면, “거룩한 곳에서 여호와께 독주(“쉐카르”)의 전제를 부어”드리라고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을 음주가무에 초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야훼는 축제를 명령하는 축제의 신일뿐만 아니라, 축제를 즐기는 신이었다는 점에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벌이는 축제는 “신의 축제”이기도 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독주를 마시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았다.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잠 20:1. 삼상 1:15도 참고하라.) 이사야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포한다( 사 5:11,22, 56:12). 그래서 예배드리는 제사장들, 나실인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은 독주를 삼가야 했다. 제사장(레 10:9), 나실인(민 6:3, 삿 13:4, 13:7,14,15,), 이스라엘(신 29:6),  왕(잠 3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축제에서만큼은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하나님은 매년 드리는 십일조 외에, 3년에 한 번씩 드리는 십일조로 삶의 터전이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먹고 배부르게 하라고 지시했다.(29절) 모두가 평등하게 즐기는 세상을 명령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즐겁게 먹고 마시면서, 특히 독주를 마시고 취해서 맘껏 즐기는 것은 물질·육체적 원리에 충실한 카니발, 그 몸의 축제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축제를 명령하는 하나님은 음주가무의 신이다. 예수도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자이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도 두드러지게, 예수가 잔치를 즐겼고, 하층민들, 즉 민중들과 음주가무를 하면서 어울려 놀았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잔치대왕, 카니발의 주이다.

4. 출애굽, 해방과 전복의 축제

프로이트는 ‘금기의 파괴’, 즉 일상적 억압을 벗어나는 ‘파괴적’ 행위가 축제라고 하였다. 그 점에서 봉건적 억압을 타파하고 해방을 가져온 ‘혁명적 날’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축제일 것이다. 그것은 즉흥적이고 자율적이었기에 그만큼 더 순수하고 본질적인 축제였다.

프랑스 대혁명 이상으로 출애굽은 축제의 전형적인 모습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주님의 밤”에 이루어진 출애굽 사건은 다름 아닌 기존 질서를 깨뜨리고 전복(顚覆)을 야기하는 혁명의 축제였다. 애굽의 지배를 벗어나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축제. 하나님은 그것을 대대로 지키라고 명령한다. 일탈과 전복의 축제, 혁명의 축제를 지시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3대 축제(무교절, 칠칠절, 초막절)는 모두 출애굽과 이어진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축제는 거의 대다수가 출애굽을 기념하는 축제, 해방의 축제, 평등의 축제였다.
출애굽기 15장은 출애굽이 축제였음을, 노래와 춤으로 이루어진 즐거운 축제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20절) 그리고 이스라엘이 정기적으로 드리는 제사 자체도 축제였다.

25 왕이 레위 사람들을 여호와의 전에 두어서 다윗과 왕의 선견자 갓과 선지자 나단이 명령한 대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게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선지자들로 이렇게 명령하셨음이라 26 레위 사람은 다윗의 악기를 잡고 제사장은 나팔을 잡고 서매 27 히스기야가 명령하여 번제를 제단에 드릴 새 번제 드리기를 시작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시로 노래하고 나팔을 불며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악기를 울리고 28 온 회중이 경배하며 노래하는 자들은 노래하고 나팔 부는 자들은 나팔을 불어 번제를 마치기까지 이르니라 29 제사 드리기를 마치매 왕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다 엎드려 경배하니라 30 히스기야 왕이 귀인들과 더불어 레위 사람을 명령하여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매 그들이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예배하니라(대하 29장)

역대하 29장 25-30절을 보면,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진지하게 제사 드리는 동안, 찬양 하는 사람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했다. 그들은 그것을 즐겼다(샤마흐). 축과 제가 함께 어우러져, 말 그대로 축제를 한 것이다.
우리가 위대한 개혁자로 아는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축제의 왕”이었는데, 히스기야 “왕이 방백들과 예루살렘 온 회중과 더불어 의논하고 둘째 달에 유월절을 지키려 하였”다(대하 30:2). 이 구절이 말하는 것처럼, 고대 이스라엘에서 축제는 평등의 축제였다.

23  온 회중이 다시 칠 일을 지키기로 결의하고 이에 또 칠 일을 즐겁게(샤마흐) 지켰더라 24 유다 왕 히스기야가 수송아지 천 마리와 양 칠천 마리를 회중에게 주었고 방백들은 수송아지 천 마리와 양 만 마리를 회중에게 주었으며 자신들을 성결하게 한 제사장들도 많았더라 25 유다 온 회중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이스라엘에서 온 모든 회중과 이스라엘 땅에서 나온 나그네들과 유다에 사는을나그네들이 다 즐거워하였으므로(샤마흐). 26 예루살렘에 큰 기쁨(심하-게돌라)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기쁨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 27 그 때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서 백성을 위하여 축복하였으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리고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이르렀더라(대하 30장).

이렇게 구약성경이 보여주는 축제, 특히 유월절 축제는 전복의 혁명적 축제였으며, 온 이스라엘이 참여하는 평등과 화합의 축제였고, 모두에게 기쁨을 주는 잔치였다.  

7 요시야가 그 모인 모든 이를 위하여 백성들에게 자기의 소유 양 떼 중에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 삼만 마리와 수소 삼천 마리를 내어 유월절 제물로 주매 8 방백들도 즐거이 희생을 드려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주었고 하나님의 전을 주장하는 자 힐기야와 스가랴와 여히엘은 제사장들에게 양 이천육백 마리와 수소 삼백 마리를 유월절 제물로 주었고 9 또 레위 사람들의 우두머리들 곧 고나냐와 그의 형제 스마야와 느다넬과 또 하사뱌와 여이엘과 요사밧은 양 오천 마리와 수소 오백 마리를 레위 사람들에게 유월절 제물로 주었더라(대하 35장)

요시야는 자신이 소유한 가축들 가운데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 삼만 마리, 그리고 수소 삼천 마리를 내놓았다. 이것은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자신의 사유 재산을 내놓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히스기야도 유월절을 지키면서 자신의 사유 재산을 회중들을 위해서 내놓았다. “유다 왕 히스기야가 수송아지 천 마리와 양 칠천 마리를 회중에게 주었고”(대하 30:24).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회중들을 위해서 내놓은 가축들 수를 비교해보면, 히스기야는 모두 7천 마리를 내놓았고, 요시야는 33,000마리를 내놓았기 때문에, 요시야가 히스기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많이 내놓았다. 음주가무를 위해서.

5. 축제의 주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느라 탈진상태에 빠졌던 헨리 나우웬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준 그림,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 그 그림의 원전은 하나님 나라가 축제의 나라임을 보여준다.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장)

“우리가 먹고 즐기자.”(하바 나길라) 아버지가 베푼 "당연한“ 잔치는 큰 아들(로 대표되는 기득권층)의 생각을 뒤엎는 참된 축제였다. 그런데 예수는 잃은 아들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들려주신 잃은 양 이야기와 잃은 드라크마 이야기도 모두 잔치로 마무리하신다. 여기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이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이다.
이렇듯 하나님 나라를 축제의 나라로 보여준 예수는 그분 자신이 축제의 주였다. 국교화 이후 로마의 축제들이 기독교화하면서, 12일제가 확립되었는데, “12일제는 12월 25일 성탄절부터 1월 6일 예수공현절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예수공현절에는 “축제의 왕”을 뽑았는데, 그래서 예수공현절을 “왕의 축제”로 불렀다. 이것은 바빌로니아의 임시 왕을 연상케 하지만, 축제 마지막에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바빌로니아의 임시 왕과는 달리, 예수공현절의 왕은 축제를 주관하는 축제의 영웅이자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예수는 축제의 기획자였다. 마가복음 14장 12-16절은 예수가 잔치를 기획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17-42절은 예수가 잔치를 주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예수는 비통한 마지막 밤을 제자들과 함께 지내는 뜻 깊은 잔치를 기획하고 주관하셨다. 그 잔치는 음주가무와 행진으로 이어지는 작은 축제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유월절 잔치, 즉 출애굽 잔치였다. 그러니 그 잔치는 분명 이 세상 가치관을 뒤엎는 전복의 축제였고, 예수가 이 세상의 진정한 왕으로 등극하는 혁명적 축제였다. 그리고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중 잔치, 마지막 축제를 약속했다는 점에서도 그는 영원한 축제의 기획자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들은 축제 기획자들이며 연출자들이었다. 이런 모습이 다윗에게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2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삼하 6장).

역대기 기자는 다윗이 직접 법궤를 운반하는 축제를 기획하고 그 축제에 직접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윗을 본받아 히스기야도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 축제를 대대적으로 기획하고 연출했다.

1 히스기야가 온 이스라엘과 유다에 사람을 보내고 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편지를 보내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에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라 2 왕이 방백들과 예루살렘 온 회중과 더불어 의논하고 둘째 달에 유월절을 지키려 하였으니 3 이는 성결하게 한 제사장들이 부족하고 백성도 예루살렘에 모이지 못하였으므로 그 정한 때에 지킬 수 없었음이라 4 왕과 온 회중이 이 일을 좋게 여기고 5 드디어 왕이 명령을 내려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온 이스라엘에 공포하여 일제히 예루살렘으로 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라 하니 이는 기록한 규례대로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였음이더라(대하 30장)

히스기야는 자신이 통치하던 남 왕국 유다 지역뿐만 아니라 북 왕국 지역도 축제에 포함시키려고 했고,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축제에 초청했다. 열왕기와 달리 역대기는 히스기야가 유월절 축제를 행했음을 밝히고, 방백들과 백성들, 즉 유력한 시민들과 함께 의논하면서 축제를 기획하고 진행했음을 애써 보여준다. 히스기야의 개혁정신을 이어받은 그의 증손 요시야도 직접 축제를 기획하고 연출한다.

1 요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여호와께 유월절을 지켜 첫째 달 열넷째 날에 유월절 어린 양을 잡으니라 2 왕이 제사장들에게 그들의 직분을 맡기고 격려하여 여호와의 전에서 직무를 수행하게 하고…4 너희는 이스라엘 왕 다윗의 글과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글을 준행하여 너희 족속대로 반열을 따라 스스로 준비하고 5 너희 형제 모든 백성의 족속의 서열대로 또는 레위 족속의 서열대로 성소에 서서 6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 너희 형제들을 위하여 준비하되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전하신 말씀을 따라 행할지니라 (대하 35장)

6. 축제의 광대

예수가 직접 기획하고 진행한 소박하지만 거룩한 유월절 잔치가 끝난 다음, 이스라엘 사람들이 벌이는 유월절 축제는 예수가 사람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는 한바탕 카니발로 끝났다. 그래서 예수는 성육신의 주이고 카니발의 주이다. 그런데 예수가 조롱당하고 죽었다는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축제의 광대였다. 콕스는 현대에 들어와서 그리스도에 대한 전통적인 이미지들이 그 권능을 상실하고, 그리스도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광대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는 “현대의 세속적 심상(심상)에 어릿광대 기질이 재출현하고 있지 않았던들 광대 모자를 쓰고 광대 반점을 얼굴에 칠한 그리스도를 등장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말하면서, 찰리 채플린 같은 현대 광대들이 광대 그리스도 등장에 일조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콕스는 성서에서도 그리스도는 광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기존 권위를 무시하고 거부하고 조롱했으며, 이곳저곳으로 유랑하고, 결국 조롱을 당하며 처형당한 것을 언급한다. 사람들은 예수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힌 다음,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인사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를 카니발의 광대로 여겼고, 결국 카니발의 광대로 처형했음을 보여준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도 신년 축제를 벌이는 11일 동안 임시 왕국을 설정하고 그 왕국을 다스리는 임시 왕을 뽑고, 그를 조롱했다는 점에서 축제 광대의 역사는 매우 길다.
그리고 “축제의 광대”는 다윗을 떠올리게 한다. 다윗 역시 광대 왕이었으며 축제의 왕이었다. 다윗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사울을 피해서 블레셋에 망명했다가, 다시 살기 위해 미친 광대노릇을 해야 했고, 그래서 진짜 미치광이로 인정받고(삼상 21:12-15), 블레셋에서 추방당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했다. 그리고 그는 왕위에 오른 다음, 자신이 기획한 축제에서 어릿광대 노릇을 했다.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메카르케르 베콜-오즈”)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메팟제즈 우메카르케르”)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삼하 6장)

벌거벗은 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격렬한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나중에 미갈은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20절)라고 비아냥대면서 업신여기는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이것은 다윗이 축제에서 저급한 미치광이 광대노릇을 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다윗은 축제의 광대이고, 진정 “춤의 왕”이다. 교회역사를 보면, 축제의 시대에 춤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에서 춤을 췄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는 대성당과 수도원에서 교회의 커다란 축제와 관련된, 특이한 축연들이 벌어졌다. 부활절 그리고 특히 성탄절에 노래와 춤은 단지 하급 성직자들만이 아니라,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도 참여했다. 수도원 경내에서, 수사들은 이웃한 수도원의 수녀들과 어울려 춤추었다. 주교들도 그들의 즐거움에 끼어들고자 교인들을 찾아왔다. 에르푸르트 시(시)의 연대기에는 뇌출혈로 사망했을 정도로 과격하게 춤에 빠져들었던 주교의 이야기가 인용되어 있다.

7. 축재의 환상·환상의 축제

하비 콕스는 축재를 위해 상실한 제축과 환상의 회복을 강조하고, “제축과 환상이 없이는 인간은 결코 역사적 존재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제축과 환상을 시간적으로 구분한다. “제축이 인간의 현재의 생활에 과거의 사건들을 재생시킴으로써 인간 경험을 확충시키는 것이라면, 환상은 이를 미래의 영역으로 확대시키는 일종의 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호모 페스티부스로서의 인간은 호모 판타지아(homo fantasia)이다.
그렇기 때문에 축재의 환상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과거 역사에서 보듯이, 민중이 축제를 주도하고 참여해야 한다. 바흐찐은 카니발을 “웃음의 원리 속에서 구성된 민중들의 제2의 삶이며, 민중들의 축제적 삶”으로 규정했다. 기득권층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민중들은 언제나 축제를 주도하고 창조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중세시대가 그러했다. 그리고 바로크 시대는 왕족이나 귀족, 또는 부르주아 시민 계층이 축제를 주도했는데, 혹세무민하려는 동기가 강했다. 그 시대가 매우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축제가 빈번했는데, 그 축제는 당시의 비참한 현실을 가리려는 허상이고 눈속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중들은 그러한 허위의 축제를 그들만의 삶의 축제로 바꾸어버렸다. 기득권층들이 민중들로 하여금 삶을 간과하고 회피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주는 그 환상들을 민중들은 되레 삶의 원동력을 얻는 상상의 잔치로 바꾸고, 기득권층이 깔아놓은 멍석에서 그들만의 축제를 즐긴 것이다. 그들은 그런 잔치를 통해서 비극적인 현실을 이겨내고 삶의 밝은 미래를 소망했다.

이 덕분에 민중 축제적 이미지들은 현실을 파악할 수 있는 강력한 예술적 무기가 될 수 있었고, 진정으로 넓고 깊은 리얼리즘의 기초가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민중적 이미지들은 현실을 자연주의적이고, 순간적이고, 공허하며, 무의미하고 분산된 모습이 아니라, 현실의 생성 과정 그 자체와 그 의미, 그리고 이러한 과정의 방향을 포착하게 해주었다. 민중 축제적 이미지 체계의 심도 있는 보편적 성격과 명료한 낙관주의는 여기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서구의 바로크 양식이 제국주의적 침략을 통해 남미로 들어가서 발생한 남미의 바로크 예술에서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이사야처럼 하나님 나라를 보는 예언자들이다. 이사야가 소망한 세상은 모두가 어우러지는 축제의 세상이었다(사 2:2-4). 하나님의 산으로 이어지는 끝 모를 행렬. 전쟁 없는 세상. 모두가 평등한 세상.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획하고, 이사야가 미리 목격하는 온전한 축제의 모습이다. 이사야의 상상력은 얼마나 탁월한가. 그런데 이사야의 이 놀라운 상상력도 요나서 3장 7-8절이 보여주는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들도 다 굵은 베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는 그 놀라운 장면을 묘사하는 상상력. 그들이 마침내 그들이 누리는 용서(10절)의 축제.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 놀라운 상상력은 노아 계약에서 비롯했음이 분명하다.

8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10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11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13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14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15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16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창 9장)

본문은 놀라운 사상을 담고 있는데, 사람뿐만 아니고, 땅과 이 세상 모든 생명체가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신의 백성들”이라는 것이다. 본문은 이것을, 밑줄 친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반복해서 들려줌으로써, 기존의 인간중심적 가치를 뒤엎고 깨드린다. 이 놀라운 전복(顚覆)의 사상은 온 생명체가 참여하는 종말의 축제로 이어진다. 스가랴가 말하는 대로, 말방울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기록하는 세상.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는” 세상.(슥 14:20) 이 놀라운 상상과 사상. 여기에 근거해서 우리는 호흡이 있는 것들, 즉 모든 생명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종국의 항구적인 잔치를 꿈꾼다. 이것이 인간과 모든 생명체를 아우르는 “몸들의 축제”(肉祝), 온전한 카니발(謝肉祭)이다. 그 종말의 축제, 모두가 꿈꾸면서 미리 경험했던 그 축제에 모든 생명체들이 참여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닫는 글-축재의 종말·종말의 축제

지금까지 축제에 대한 최근의 논의를 통해서 고대 이스라엘의 축제를 문화적으로, 특히 카니발에 비추어서 살펴보았다. 축과 제로 이루어진 축제는 본질적으로 종교문화적이기 때문에, 축제를 연구하는 것은 종교적·문화적으로 현실을 살피는 일이다. 인간은 “호모 페스티부스,” 즉 축제하는 인간이며, 축제를 통해서 삶을 영위한다. 축제는 전복적이고 파괴적이라는 점에서 놀이와 구분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주요한 3대 축제는 모두 출애굽 사건과 연관을 갖는데, 이런 점에서 그 축제들은 사회질서전복을 통한 해방이라는 혁명적인 성격을 갖는다.
축제를 통해서 사람들은 음주가무를 즐겼는데, 성서를 보면, 신이 그런 축제를 사람들에게 명령한다는 점에서 신은 축제의 신이며 축제의 기획자이다. 구약성서에서 다윗, 히스기야, 그리고 요시야가 대표적인 축제 기획자들이고 축제의 왕들이다. 그리고 사람뿐만 아니라 신도 음주가무를 즐긴다(고 가상한다)는 점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축제는 신의 축제였다. 또한 축제의 카니발에서 특징적인 광대의 모습은 예수에게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고 어릿광대 모습은 다윗에게서 두드러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윗은 춤의 왕이었다.
인류 역사는 기득권층의 의도와 달리, 민중들이 축제를 통해서 새로운 삶을 꿈꾸고 그것을 실현해온 역사이다. 그래서 축제는 환상의 축제이며, 종말의 축제는 축재의 종말로 모두가 평등하게 어우러져 먹고 마시고 춤추며 사는 음주가무의 세상이다. 그것을 예수는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이 평화롭게 공생하는 진정한 잔치의 나라라는 점에서 더욱 카니발스럽다. 축제 없는 축재(蓄財)의 세상에서, 우리는 온 생명체가 누리는 진정한 몸의 축제, 온전한 카니발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한다. “하바 나길라!”


참고문헌

김규원, 『축제, 세상의 빛을 담다-색으로 보는 유럽축제 이야기』, 서울 : (주)시공사·시공아트, 2006, 2008.
김미성, 「축제와 환상」, 조성애 외, 『축제문화의 제현상』,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6, pp.99-122.
김정숙, “바로끄 감성의 형성과 특징,” 한국불어불문학회, 『불어불문학연구』 26권 (1991), pp.19-46.
남덕현, 「문화이론을 통해 본 축제의 의미」, 남덕현 외, 『축제와 문화적 본질』,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6, 2010, pp.3-26.
남덕현 외, 『축제와 문화적 본질』,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6, 2010.
류정아, 『축제인류학』, 서울: (주)살림출판사, 2003.
배희숙, 「‘온 이스라엘’을 회복한 개혁의 왕 히스기야」, 목회와신학 편집부 엮음, 『역대하,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두란노 HOW 주석 13,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9, pp.251-267.
송상기, 『멕시코의 바로크와 근대성』, 서울:고려대학교 출판부, 2002.
오정근, 『기호학적 접근방법에 의한 축제의 의미와 의미구조』, 파주 :한국학술정보(주), 2010.
윤선자, 『축제의 문화사』, 파주: (주)도서출판 한길사, 2008.
윤선자, 『축제의 정치사』, 파주: (주)도서출판 한길사, 2008.
장하준 외, 『불량사회와 그 적들-좋은 시민들이 들려주는 우리 사회 이야기』, 서울 :알렙, 2011.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장하준,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하다』, 서울: 도서출판 부키, 2010, 2011.
조성애 외, 『축제문화의 제현상』,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6.
전동열, 「독일 중세와 근대 카니발의 사회적 기능-라인 지역 카니발의 ‘바보’의 역할을 중심으로」, 조성애 외, 『축제문화의 제현상』,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6, pp.47-74.
진인혜, 「축제와 혁명」, 남덕현 외, 『축제와 문화적 본질』,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6, 2010, pp.99-120.

Anderson,A.A., 2 Samuel, WBC. 11, Dallas, Texas : Word Books, Publisher, 1986.
Bakhtin,M., Rabelais and his World, 이덕형·최건영 옮김, 『프랑수아 라베르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 서울 : 아카넷, 2001.
Bauman,Z., Wasted Lives-Modernity and its Outcasts, 정일준 옮김,『쓰레기가 되는 삶들-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서울 :새물결출판사, 2008.
Bazin,G., Baroque and Rococo, 김미정 옮김, 『바로크와 로코코』, 서울: (주)시공사, 2000, 2005.
Bloch,A.P., Midrashic Comments on the Torah- Torah Thoughts for Sabbaths and Holidays,  Hoboken, NJ.: Ktab Publishing House, Inc., 1991.
Champfleury, Histoire de la Caricature, 정진국 옮김, 『풍자예술의 역사-고대와 중세의 패러디 이미지』, 서울 : 까지글방, 2001.
Cox,H., The Feast of Fools, 김천배 역, 『바보제-제축과 환상의 신학』, 서울 : 현대사상사, 1973, 1992.
Cox,H., The Future of Faith, 김창락 옮김, 『종교의 미래-예수의 시대에서 미래의 종교를 보다』, 서울 : (주)문예출판사, 2010.
Dillard,R.B., 2 Chronicles, 정일오 옮김, 『역대하』, WBC 성경주석 15, 서울: 도서출판 솔로몬, 2005.
Duvignaud,J., Fȇtes et civilisations, 류정아 옮김, 『축제와 문명』, 파주 : (주)도서출판 한길사, 1998, 2003.
Eisenberg,R.L., The JPS Guide to Jewish Traditions, Philadelphia : The Jewish Publication Society, 2004.
Hitchens,C., God is not great, 김승욱 옮김, 『신은 위대하지 않다』, 파주: (주)알마, 2008.
Huizinga,J., Homo Ludens, 김윤수 옮김, 『호모 루덴스-놀이와 문화에 관한 한 연구』, 서울 : 도서출판 까치, 1981
Klein,R.W., 1 Samuel, WBC. 10, Waco, Texas : Word Books, Publisher, 1983.
LaCapra,D., “Bakhtin, Marxism and the Carnivalesque,” 유명숙 옮김, 「바흐친,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축제적인 것」, 여홍상 엮음, 『바흐친과 문화 이론』, 서울 :(주)문학과지성사, 1995, pp.183-221.
Lachmann,R., “Bakhtin and Carnival:Culture as Counter-Culture,” 여홍상 옮김, 「축제와 민중 문화」, 여홍상 엮음, 『바흐친과 문화 이론』, 서울 :(주)문학과지성사, 1995, pp.57-105.
McCarter,P.K., II Samuel, AB., Garden City, NY.: Doubleday & Company, Inc., 1984.
Plummer,A., The International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 Luke, Edinburgh : T&T Clark, 1981.
Soggin,J.A. Israele in epoca biblica. Istituzionii feste, cerimonie, rituali, tr. John Bowden, Israel in the Biblical Period-Institutions, Festivals, Ceremonies, Rituals, Edinburgh : T&T Clark, 2001.
Stallybrass,P. and Allon White, The Politics and Poetics of Transgression, pp.1-26, 원용진 옮김, 「바흐친과 문화사회사」, 여홍상 엮음, 『바흐친과 문화 이론』, 서울 :(주)문학과지성사, 1995, pp.113-143.
Schauss,H., The Jewish Festivals- A Guide to Their History and Observance, New York : Schocken Books, 1996.
Tapié,V.L., Baroque et Classicisme, 정진국 옮김, 『바로크와 고전주의』, 서울 : 까치글방, 2008.
Tuell,S.S., First and Second Chronicles. Interpretation- A Bible Commentary for Teaching and Preaching, Louisville : John Knox Press, 2001.
Williamson,H.G.M, Israel in the Books of Chronicles,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7.



Abstract

A Theological and Cultural Study
of the Festivals of the Ancient Israel

Lee, Jong locke

This paper is about the cultural study of the festivals of the ancient Israel, according to the recent theories of the festivals, especially, of the Carnival.
Festivals, which consists of celebration and ritual, is basically religious and cultural. Therefore, to study any festival is to consider our reality religiously and culturally.
Human beings are not only Homo Sapiens or Homo Faber, but also Homo Ludens and Homo Festivus. All of us are Homo Festivus, who enjoy festivals and who recognize and make our lives through festivals.
Then, it seems that play and festival are same or similar, but festival is very different from play, on that point that festival is subversive and destructive.
The three major pilgrimage festivals of the ancient Israel are related to the event of Exodus, that is the event of liberation from oppression and exploitation. Therefore, the festivals of the ancient Israel are the ones of subversion of the current social order and the ones of liberation of the oppressive political system.
At festivals, they enjoy heavy drinking, loud singing, and violent dancing. It is God who commands those things. God is the god of festivals and the producer of festivals. And in the Old Testament, the important festival producers are David, Hezekiah, and Josiah. All of them are the real kings and the kings of festival.
At festivals, the ancient Israelites offered many things to God, especially wine and intoxicant. This means that God drinks wine and intoxicant during festivals. God commands the festivals to the Israelites and he enjoys that festivals with them. Therefore, the festivals of the ancient Israel are the ones of god.
During Carnival, they chose any clown as the king of festival. Jesus was arrested by soldiers during the passover festival and was ridiculed by them. Soldiers put a thorn crown on his head and purple gown on him and called him the king of Judah and whipped him. They wrote on the plate of the cross that he is the king of Judah. Jesus was the crown chosen by them as the king of festival and died as the clown king of Judah on the cross.
David was also the clown of festival that he had planned and produced. He danced violently without noticing his nakedness. He was ridiculed because of his vulgarity. David the king was the clown, the vulgar king of carnival and the king of nude dance.
Human history is the one that the people dream the new life and realize that life through festivals, differently from the intention of those who have already acquired. Thus, festivals are the ones of the fantasy and the end of the festivals, that is, the festival of the end is the world that all of us are equal and eat, drink, and dance without discrimination. That is the Kingdom of God, which Jesus wished and sacrificed his life for. Then, the Kingdom of God is not only the one of the human beings, but also of the all of the living creatures, the kingdom of flesh that all of them eat, drink, and dance. That is the real world of carnival.
Now living in the world of the accumulation of wealth without festivals, we hope the Kingdom of God, the world of the perfect festival. “Hava Nagila!”

Keywords:
Festival, Carnival, Homo Festivus, Bible, Israel, Exodus, Passover
====================================================================

(논문소개)2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신학’을 향하여
- 고든 카우프만의 ‘핵 시대의 신학’을 넘어서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조직신학)


초록

동서냉전으로 핵무기의 위협이 절정에 달했던 1985년에 미국 하버드대학의 신학자 고든 카우프만은 핵은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고, 적그리스도적이며, 그 자체로 성령의 역사에 반대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후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인류는 여전히 핵무기로 인한 전 지구 생명공동체 멸절의 위협 아래 살고 있다. 인류는 또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표방하며 지난 반세기 이상 세계 각지에 세워진 수많은 핵발전소로부터 방사능 피폭의 위협을 받으며 살고 있다. 작년 3월의 일본 후쿠시마 대재앙은 핵발전의 위험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으며, 인류가 시급히 핵으로부터 문명사적 전환을 꾀해야 한다는 일대 경종을 울려주었다. 인간의 손에 전 인류뿐만 아니라 모든 지구 생명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이 쥐어진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독교 신학은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과 ‘생명’ 그리고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가? 이 글은 고든 카우프만과 샐리 맥페이그의 ‘핵 시대의 신학’을 분석하고 비판하면서 이제 우리가 단순히 ‘핵 시대의’ 신학이 아니라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신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 기본적인 방법론으로 필자는 우리가 철저히 ‘피폭자’의 자리에 설 것을 요청하면서, 핵에 대한 거짓 신화들, 즉 핵과 평화는 양립 가능하며, 핵은 기후변화의 대안적 에너지이고, 핵발전은 안전하며, 그리고 또한 우리에게 끊임없이 전기가 필요하다는 거짓 신화들을 비판하고 핵과 기독교 신앙이 결코 양립할 수 없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핵 지뢰밭’으로 부상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우리가 발전시켜 나가야 할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신학’은 한국과 동북아시아는 물론 세계사적 지평과 중요성을 갖는 실질적인 생명과 평화의 신학이 될 것이라고 확언한다.

주제어
핵무기, 핵발전(원전), 하나님의 주권, 생명, 평화, 신학

1. 들어가는 말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주의 ‘죽음의 여행’이라는 뜻을 가진 한 사막에서 사상 첫 핵폭탄 실험이 실시되었다. 엄청난 뇌성과 충격파가 사막을 집어삼켰다. 이내 상공 9킬로미터까지 거대한 버섯 모양의 구름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투명하고 아름다운 빛깔이었으며, 장엄하고, 두려웠다”고 한 육군 장성은 회고했다. 멀찍이서 폭발을 지켜보고 있던 이 실험 책임자 로버트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탄식했다. “이제 나는 죽음, 곧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
  같은 해 8월 6일, 히로시마 상공에 ‘리틀보이’(소년)란 암호명의 두 번째 핵폭탄이 떨어졌다. 며칠 후 나가사키에 ‘팻맨’(뚱보)이라는 이름의 세 번째 핵폭탄이 투하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각각 16만, 8만이 사망했다. 미국에 뒤이어 소련이 핵무장을 했고(1949년). 영국(1952년), 프랑스(1960년), 그리고 중국(1966년)이 뒤를 이었다. 동서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1985년에 지구촌에는 약 6만기의 핵탄두가 발사대기 상태에 있었다. 숨도 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냉전이 끝났지만 지금도 지구촌에는 약 2만기의 핵탄두가 있다. 숫자는 줄었지만 파괴력은 오히려 더 커졌다. 미국과 러시아가 보유한 핵탄두 중 2천기는 지금도 단추만 누르면 발사가 가능한 상태다. 핵무기의 위협이 절정에 이르렀던 1985년에 미국 하버드의 신학자 고든 카우프만(Gordon D. Kaufman)은『핵시대의 신학 Theology for a Nuclear Age』에서 핵은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고, 적그리스도적이며, 그 자체로 성령의 역사에 반대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핵무기로 인한 전 지구 생명공동체 멸절의 위협 아래 살고 있다.
  우리는 또한 핵발전으로 인한 피폭의 위협 아래 살고 있다. 일본에 핵폭탄이 떨어진 후, 그 가공할 파괴력에 대한 죄의식까지 한 몫 하면서, 미국의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이른바 “핵의 평화적 이용”(Atom for Peace)이라는 구호를 표방하게 되었고, 이 때 ‘폭탄용’ 원자로는 ‘상업용’ 원자로로 둔갑하게 된다. 그 결과 1956년 영국에 셀라필드(Sellafield) 핵발전소, 1957년 미국에 십핑포트(Shippingport) 핵발전소가 세워지면서 핵산업(nuclear industry)이라는 게 태동한다. 하지만 1979년 미국의 스리마일섬(Three Mile Island) 핵발전소 폭발과 1986년 구소련 체르노빌 핵발전소 대참사로 핵산업은 급격히 위축되다가, 이후 각국이 지구온난화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기사회생 하는가 싶더니, 작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대재앙으로 다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다음은 후쿠시마 대재앙 1년이 지난 뒤 이 곳을 찾은 사람의 방문기이다.

후쿠시마 원전 일대는 지옥 상황이다. 젖소들은 물 한 모금을 먹겠다고 마른 수로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대고, 방사선에 피폭한 애완동물들이 인적 끊긴 거리를 헤매고, 소와 돼지 사체가 곳곳에 널려 썩어가고 있다. 논과 밭에는 키만큼 자란 잡초만 우겨져 있다. 바닷가인 후쿠시마 원전에서 반경 20킬로미터 반원형 지역 628제곱킬로미터가 출입 금지 구역이다. 서울(605제곱킬로미터)보다 넓은 면적이 유령 지대가 돼가고 있는 것이다. 사고 원전에서 핵연료를 회수하고 시설을 해체하는 데는 30~40년이 더 걸릴 거라고 한다. 도쿄 사람들은 규슈 쌀을 사다 먹고, 수돗물이 겁나 생수를 사 마시고, 원전 사고 이전에 만든 통조림만 아이에게 먹인다는 주부도 많다. 일본 정부는 향후 10년간의 복구비용을 23조엔(약 314조원)으로 추산하고 있다.

  인류는 20세기 중반 이후 ‘핵 시대’(nuclear age)를 살고 있다. 핵 시대란 핵무기와 핵발전이라는 ‘죽음의 놀이’를 가지고 생명과 평화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시대다. 핵 시대란 핵에 대한 무지와 탐욕 그리고 무서운 자기기만 속에 생명을 담보로 평화를 도박하는 ‘죽임의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다. 이런 핵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신앙의 요청은 분명하다. 인간을 포함하여 이 땅의 모든 생명이 평화 속에 살려면 이제 우리는 ‘핵 없는 세상’을 꿈꾸고, 이야기하고, 또 실천해야 한다. ‘핵 시대’를 탈출해 ‘핵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여정은 “젖과 꿀이 흐르는” 생명과 평화의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21세기 ‘출애굽’ 사건이 될 것이다.

2. 카우프만과 맥페이그의 ‘핵 시대의 신학’을 넘어서

  사실 ‘핵 시대’(nuclear age)의 도래의 문명사적 의미와 그것의 신학적 함의를 가장 먼저 포착한 사람은 하버드의 카우프만이다. 그는 핵 시대의 도래로 인류가 지구 상 모든 생명을 파멸시킬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이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종교적 상황(context)이다. 이 상황은 기독교나 다른 어느 종교 전통에서도 예상치 못한 혁명적 상황이다. 그러므로 핵 시대의 도래는 신학자들은 물론 모든 종교인들에게 지금까지 그들의 사유와 담론에서 당연시했던 모든 전제들을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카우프만은 핵 시대의 신학은 전통에 대한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급진적 비판과 완전히 새로운 ‘상상적 구성’(imaginative construction)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핵 시대에 카우프만이 기독교 전통에서 가장 큰 문제라 보고 급진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주권’(divine sovereignty)이었다. 인류가 버튼 하나만 누르면 지구 생명 전체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렇게 “철저하게 새롭고”(thoroughly new) 또 “근본적으로 유일무이한”(radically unique) 상황 속에서 과연 계속해서 하나님의 경륜과 사랑과 돌보심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한가? 카우프만은 그 둘 사이에 중대한 논리적 모순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카우프만은 무엇보다 핵을 ‘종말론’과 연계해 사유했다. 그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핵 대학살’(nuclear holocaust)의 가능성은 더 이상 아무런 구속적(救贖的, redemptive) 의미가 없는 종말론적 사건이라고 보았다. 전통적으로 서구신학의 종말론에서 역사의 종말은 어떤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창조주 혹은 역사의 주관자에 대한 믿음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었다. 그 종말의 형태가 파국이든 구원이든, 종말은 언제나 하나님의 행위의 절정이고 악에 대한 최종적 승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20세기 중반 이후 우리가 숙고해야 할 종말은 ‘핵 대학살에 의한 종말’로서,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의한 것임을 카우프만은 강조한다. 그것은 더 이상 인류의 구원을 가져오기 위한 어떤 원대한 섭리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기 도무지 어려운 것이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생명의 소멸 혹은 전적인 말살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모든 희망의 종말, 모든 바람의 종말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희망하는 자들의 종말, 모든 미래 세대의 종말이다. 핵폭발 이후 찾아올 이른바 핵겨울(nuclear winter)은 지구 위 모든 생명의 생존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며, 지구를 생명이 없었던 초기의 황폐한 상황으로 되돌려놓을 것이다. 요약하면 전통적 종말론에서는 늘 어떤 긍정적 의미가 있었다. 마침내 하나님의 공의가 승리할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핵 시대의 상황은 이와 전적으로 다르다. 인간의 손에 의한 핵 종말에서 우리는 아무 긍정적 의미도 산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카우프만은 이런 핵 시대의 상황에 대해 두 가지의 신학적 응답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나는 이러한 종말을 하나님의 의지의 결과과 행위로, 즉 노아시대에 하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이제는 홍수가 아니라 핵폭탄으로 하나님이 인류를 심판한다고 보는 것이다. (핵전쟁을 지상 최후의 아마겟돈 전쟁으로 보려는 근본주의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창조주이자 구속자가 되시는 하나님은 인류를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절대로 그런 파국을 허용하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물론 후자는 전자와 같이 극단적 입장을 취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카우프만은 ‘둘 다’ 핵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신학적 응답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둘 다 ‘하나님의 주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우프만에게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신학적 개념은 오늘날 인류가 처한 문제의 본질을 밝혀주기보다 오히려 감출 뿐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서구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원리는 이제 “낡았고”(outmoded), “잘못 인도하며”(misleading), “위험하기”(dangerous)까지 하다. 사도 바울은 “아무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낼 수 없다”(롬 8:38-39)고 선언했다. 하지만 카우프만은 이 선언이 우리 앞에 현실로 다가온 “진정으로 열린 우연성의 미래”에는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 이상 역사를 하나님의 ‘구원사’(救援史, salvation history)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핵무기로 인한 종말의 가능성은 “우리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핵무기로 인한 멸절의 가능성은 “우리 남자와 여자들”, 혹은 “핵무기를 보유한 강대국 시민들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핵 때문에 멸망하도록 하나님이 허용하지 않으실 거라는 생각에도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책임에 면죄부를 발행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손에 지구 전체를 파괴하고도 남는 엄청난 힘이 주어진 상황에서 이제 인간의 행위는 신적인 삶(divine life) 그 자체에도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이제 하나님에 대한 헌신은 지구 위에서 생명이 지속되도록 우리가 완전한 책임을 지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카우프만의 결론이다.  
  이와 같은 인식 속에서 카우프만은 핵 시대를 사는 신학자들은 더 이상 물려받은 전통의 전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각 세대의 신학자들은 각각 자신의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주어진 전통을 새롭게 해석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이전까지의 신학자들이 주로 전통에 충실했다면 오늘날 핵 시대의 신학자들은 그들보다 더욱 과감하고 창조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핵 시대의 신학자들은 물려받은 전통을 ‘탈구축’(deconstruction)하고 ‘재구축’(reconstruction) 해야 한다고 카우프만은 선언하였다.
  이와 같은 카우프만의 문제제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화답한 이는 미국의 생태여성주의신학자 샐리 맥페이그(Sallie McFague)이다. 카우프만이 ‘핵 시대’ 도래의 혁명적 의미와 그것의 깊은 신학적 함의를 포착하고 우리에게 새로운 신학적 상상과 구성을 촉구했다면, 이에 따라 실질적으로 의미 있는 신학적 재구성 작업을 시도한 이가 맥페이그라 할 수 있다. 핵 시대를 맞아 전통적인 하나님의 그림언어(imagery)가 군국주의나 도피주의를 조장하는 방식들과 맞서 싸우라는 카우프만의 요청에 응답하여, 맥페이그는『하나님의 모델들 : 생태시대, 핵시대의 신학 Models of God: Theology for an Ecological, Nuclear Age』에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은유와 모델을 제안한다.
  맥페이그 역시 핵 문제를 우리 시대 ‘가장 중대한 문제’로 규정한다. 카우프만을 따라 그녀 역시 ‘인간의 책임’을 고취시키지 않는 어떤 신학적 해석도 거부한다. 싫든 좋든 이제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는 힘을 가진 인간은 하나님과 ‘공동의 창조자’가 되었고, 따라서 과거에 하나님의 힘과 우리의 힘의 관계가 ‘이원적’이고 ‘비대칭적’인 것이었다면, 이제는 ‘연합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카우프만을 따라 맥페이그는 전통적인 하나님 이해에 문제를 제기한다. 세계 밖에 존재하며 단독적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힘으로서의 하나님은 핵 시대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 대신 우리에게는 “세계와 연합하고 상호 의존하는 당신 하나님”이 필요하고, 바로 이 하나님의 은유와 모델로서 맥페이그는 ‘어머니’ 하나님, ‘연인’ 하나님, 그리고 ‘친구’ 하나님을 제안한 것이다.
  맥페이그에게 문제의 핵심은 ‘지배로서의 힘’ 이해이다. 지배와 통제, 절대적 지배권과 주권으로 이해되는 힘이 문제의 본질이다. 하지만 전통적 서구신학의 하나님 이해도 이러한 힘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그 결과 유대-기독교의 하나님 묘사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형용사가 ‘전능하신’이다. 물론 이러한 견해가 반드시 지배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맥페이그는 여전히 힘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 그런 힘은 공유될 수 없는 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서 나온 개념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이다. 맥페이그는 이 개념을 “더욱 노골적으로 묘사하자면,”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백성들 편에서 그들의 적을 물리치는 일개 군왕이 되며, 이를 “더욱 세련되게 해석하자면,”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고통당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아버지라는 말이 된다고 비판한다. 전자의 하나님 이해는 ‘군국주의’를 강화하고, 후자의 하나님 이해는 ‘도피주의’를 강화한다. 하지만 군국주의를 지탱하는 ‘지배로서의 힘’은 핵 학살로 귀결되고, 도피주의를 지지하는 ‘섭리로서의 힘’은 우리를 복종시키고 잠재울 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그 둘이 아닌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 그리고 대안의 시작은 우리 인간에게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는 힘”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힘과 인간의 힘의 관계를 연합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것으로 다시 이해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맥페이그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세계 밖에 존재하면서 단독적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일방적 힘이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고 구원하는, 지고하고 거룩하며 인격적인 존재라고 보는 관점은 쉽게 분리와 이원론 그리고 통제의 개념들을 낳는다. 그래서 맥페이그는 “세계와 연합하고 상호 의존하는 당신 하나님”을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이 하나님의 새로운 은유와 모델로서 ‘어머니’ ‘연인’ ‘친구’를 제안했던 것이다. 이 은유와 모델들은 하나님과 세계 사이의 거리를 강조하고 세계의 하나님에 대한 일방적인 의존을 부추기는 위계론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은유나 모델과는 거리가 멀다. 이 은유와 모델들은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초월적이고, 또한 전능한 하나님 개념 대신 상호성, 책임 공유, 호혜성,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을 강조한다.
  나는 카우프만과 맥페이그의 작업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핵 시대의 신학’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맥페이그의 핵 시대에 대한 이해는 불완전하고 순진한 면까지 있다. 그녀는 핵전쟁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그런 의미에서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것은 언제나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남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핵무기를 터뜨리지 않더라도 날마다 실제로 방사능에 노출되고 있는 지구상 수많은 피폭자(被爆者)들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 소치다. 우라늄 채굴 광산 주위에 사는, 미국과 세계 곳곳의 원주민들에게 핵전쟁이란 미래의 일이 아니라 실재이고 매일의 일상이다. 핵발전소 사고로 인한 방사능의 ‘외부피폭’과 ‘내부피폭’으로 날마다 삶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 세계의 수많은 여성과 어린이와 태아들에게 핵전쟁은 결코 ‘실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카우프만과 맥페이그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을 문제로 삼았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핵 문제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침해와 도전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신앙의 언어다. 하나님의 주권을 말한다는 것은 이 세계의 궁극적 주권이 저 “통치자들과 권세자들”(powers and principalities, 골 2:15, 엡 6:12)에게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는 것을, 그래서 제 아무리 그들의 힘이 강해 보여도 그들의 지배에는 정당성이 없으며 정의롭지 못하다고 저항의 선언인 것이다. 그것은 실재에 대한 기술(記述, description)이 아니라 실재를 넘어선 것에 대한 지시(指示, prescription)이다. 맥페이그는 위계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이원론적인 개념들, 예를 들어 왕, 지배자, 주인, 통치자와 같은 하나님의 은유들을 비판하지만, 이런 개념은 핵으로 세상을 지배하며 주권자 노릇을 하고 있는 이 땅의 왕, 지배자, 주인, 통치자들을 - 혹은 이른바 5개의 핵무기 클럽(nuclear-weapon club) 국가들을 - ‘상대화’하는 언어로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카우프만 스스로가 ‘하나님’이라는 상징의 기능은 우리를 인간화하고 상대화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인간의 책임이 약화되는 것도 아니다. 세계의 주권이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엡 2:2)들에게 있지 않다면 우리는 거기에 순응하고 침묵할 필요는 없다. 맥페이그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과 다른 생명들을 파괴할 힘이 있다는 ‘지식’을 강조하고 그 지식에서 ‘책임’이 동반될 것이라 이야기하지만, 진정한 책임은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심장에서 나온다. 이 세계의 궁극적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가슴속으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서 어떻게 진정한 책임과 실천이 나오겠는가.
  더욱이 맥페이그와 카우프만은 마치 ‘우리’ 모두가 세상을 멸절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처럼 말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맥페이그는 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우리의 힘,” “세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 카우프만도 핵무기로 인한 멸절의 가능성은 “우리 남자와 여자들” 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누구이고 또 ‘인간’은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인가? 엄밀히 말해 나는 그들이 말하는 ‘우리’에 속해




신학사상 2013년 봄호(160집) 차례
신학사상 2012년 가을호(158집) 차례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zero
한국신학연구소 / Korea Theological Study Institute / http://www.ktsi.or.kr
03752 서울시 서대문구 경기대로 55 선교교육원내 / Tel 02-738-3265~7 , Fax 02-738-0167 , E-mail :
Copyright 2000-2020 KTSI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