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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연 
 신학사상 2013년 봄호(160집) 차례


이번 호에는

구약학 분야에서 이영미 한신대 교수의 “구약의 제사장과 현대의 목회자”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이영미 교수는 논문에사 고대 이스라엘에는 크게 아론계열, 레위계열, 사독계열의 세 부류의 제사장 집단이 있었고, 이들의 지위는 역사적 단계에 따라 달라져 왔지만 생활은 레위기 법전에 있는 대로 청빈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제사장들이 올바른 제의와 율법을 가르치지 않고 성전에 바쳐진 제물과 십일조 이상을 탐내는 부와 권력을 추구했기 때문에 타락했다. 신명기와 말라기에 있는 제사장에 대한 성찰은 오늘날의 목회자들 역시 참 목회란 교회건물의 대형화와 교인수의 확대 등의 외적 성전권력의 확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회개하며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도록 이끄는 소명을 담당하는 것임을 다시 깨우치게  한다.

목회상담학 분야에서 홍영택 감신대 교수의 “이중구속(double bind)에 대한 목회상담학적 접근”이란 논문을 게재했다. 홍영택 교수는 목회상담학에서 가족치료의 개념인 이중구속(double bind)의 개념을 사용하여 인간의 실존의 기본적 딜렘마를 이해하고 이에 대한 해결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다. 신학과 심리학의 개념들을 함께 사용하여 가족치료에서 분화된 의사소통을 통해 이중구속을 넘어서고자 했다.(V. Satir) 신학적으로는 사람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향해 나아가 그 초월성에 참여함으로써 이중구속이 극복된다고 보고(P. Tillich), 이것을 율라노프(A. & B. Ulanov)는 종교적 복종이라고 부르는데, 진정한 종교적 복종은 자아와 타자를 긍정하면서도 공통의 가치를 향해 초월할 줄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목회상담학에서 김기철 감신대 강사의 “놀이로 구현되는 하나님 형상”이란 논문을 한편 더 게재했다. 김기철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형상이 구현되는 삶의 성격을 놀이로 표현할 수 있고 한다. 이 논문은 필자의 목회적, 임상적 현장경험에서 시작하여 몰트만의 놀이의 신학, 위니캇의 놀이의 심리학, 홀의 신학적 인간이해, 그래햄의 목회신학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발전되었다. 필자는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놀이’라고 인식하고 이 하나님의 놀이는 ‘사람의 놀이’를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놀이의 성격을 잃어가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새로운 놀이 목회상담을 통해 삶과 신앙의 생명력을 북돋아 주려고 한다.    
    
교회사 분야에서 정중호 계명대 교수의 “고려시대 기독교”라는 논문을 개제했다. 이 논문은  고려에 들어온 동방기독교인들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고려시대 기독교 상황을 밝히려고 했다. 이 논문은 우리나라에 전래된 기독교가 1784년 가톨릭, 1884년 개신교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고려시대부터 전래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고려에 온 동방기독교인들이 제한적이지만 국가 정책과 예술적인 면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기독교윤리학 분야에서 세편의 논문을 개제했는데, 김동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교수는 “미래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논문에서 과학기술의 진보로 인해 인류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테크놀로지에 대하여 그동안 기독교 신학은 어떠한 논의를 해왔는가? 라는 물음으로 시작해서 테크놀로지와 기독교가 현실적으로 처한 상호간의 관계성을 분석하고, 이러한 분석을 통하여 현대 테크놀로지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대응 및 논의의 방법과 방향을 제시하려고 했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과학의 발달을 멈출 수는 없고 불사(不死, immortality)의 미래 인간(posthuman)에 대한 윤리문제는 철학과 종교에서 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목사는 “안병무의 인권 사상”이란 논문에서 안병무의 인권 사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민중의 생존권을 인권의 핵심적 요체로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먹고사는 문제의 차원에 한정되지 않고 민중의 주체성을 온전히 구현하는 차원을 함축하고 있다. 필자는 안병무가 놓은 초석 위에서 인권에 관한 신학적 성찰을 진전시키는 것은 오늘이 신학이 감당해야 하는 중요한 과제라고 말한다.

김현수 장신대 강사는 “디트리히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에 대한 하나의 공적인 읽기”라는 논문에서 디트리히 본회퍼가 『나를 따르라(Discipleship)』 에서 제안하는 제자도는 정치와 사회 같은 공적인 영역에서 실현되어야 할 제자도라고 주장한다. 나를 따르라』에 대한 공적인 읽기는 두 가지 방법으로 진행된다. 첫째는 전기적 관점인데, 이 관점에서 읽으면 사회정치성이 드러난다. 두 번째는 『나를 따르라』에 드러나는 핵심주제인데, 그것은  정의와 평화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를 따르라』에 드러나는 제자도는 사회정치적인,  공적인 제자도로 볼 수 있다.

평화학 분야에서 김동진 한국신학연구소 연구원의 “종교의 평화적 가치 발견하기: 간디와 88선언” 논문을 게재했다. 김동진 박사는 인간 역사에서 발생한 폭력 가운데 종교는 다양한 역할을 보여 왔는데, 많은 경우 종교는 폭력적 행위나 전쟁을 부추기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또 어떤 경우에는 비폭력 행위나 평화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들도 있었다고 본다. 이에 착안하여 이 논문은 어떻게 하면 종교가 가진 평화적 가치와 그 실천이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가를 탐구한다. 이를 위해 이 논문은 인도의 비폭력 사티아그라하 운동과 한반도의 평화통일 운동에 나타난 힌두교와 기독교의 영향을 비교 분석했다. 특히 본 논문은 힌두교의 중요한 경전중 하나인 바가바드 기타에 대한 간디의 해석, 그리고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에 대한 88선언 작성자들의 해석을 비교하는데 그 초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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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후기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행복, 국민통합, 미래희망을 약속하며 박근혜정부를 출범시켰다. 박근혜 대통령은 군사독재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굴레와 비판을 넘어 대통령에 당선되었기 때문에 아픔과 한도 있겠지만 어둠의 혜원을 풀고 용서와 화해의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양극화를 해소하고 지역, 세대, 계층 간의 갈등을 국민대통합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은 공언한대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통해 안보를 튼튼히 하면서도 대북 인도적 지원과 북한과의 대화 및 교류협력을 병존시켜 한반도 평화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신학계에서도 우리사회에 만연한 한과 증오를 넘어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고 한반도 평화시대를 여는 신학적 초석을 놓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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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연구 논문

이영미 ․ 구약의 제사장과 현대의 목회자
홍영택 ․ 이중구속(double bind)에 대한 목회상담학적 접근
김기철 ․ 놀이로 구현되는 하나님 형상
정중호 ․ 고려시대 기독교
김동환 ․ 미래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최형묵 ․ 안병무의 인권 사상
김현수 ․ 디트리히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에 대한 하나의 공적인 읽기
김동진 ․ 종교의 평화적 가치 발견하기: 간디와 88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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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1

구약의 제사장과 현대의 목회자

                                                                                                  이영미 (한신대 교수/ 구약학)


초록

  제사장에 관한 구약의 언급들을 종합해보면 고대 이스라엘에는 크게 아론계열, 레위계열, 사독계열의 세 부류의 제사장 집단이 있었다. 이들의 지위는 역사적 단계에 따라 달라졌는데 왕정시대에는 레위계열 제사장들은 지방 성소를 중심으로 제의와 성전과 관련된 업무, 그리고 율법을 지키고 가르치는 일을 담당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은 사독계열 제사장이 담당해왔다. 중앙제의화를 핵심으로 하는 요시야 종교개혁은 지방제사장이었던 레위계열 제사장들의 지위를 약화시켰고 이들은 율법을 지키고 가르치는 일에 주력하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사독계열 제사장은 포로지로 잡혀가고 남아있던 아론계열 제사장이 제의를 담당하게 되었다. 고레스 칙령으로 포로지에서 사독계열 제사장이 유다로 돌아오면서 제사장들 간의 갈등이 심해졌는데 궁극적으로는 사독계열 제사장이 성전의 주도권을 차지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아론계열 제사장과 레위계열 제사장과 타협을 이루어 제사장은 아론의 후손이며 레위지파로 통합되었다.
  신명기 법전의 제사장의 수입원에 관한 규정은 제사장들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성별된 지파로서 성전에 바쳐진 제물과 십일조에 의존해서 살아가도록 규정하였다. 성직자들이 지나치게 재물을 축적하거나 극빈의 기초생활이 보장되지 못하는 양 극의 경우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이다. 제사장의 임무도 제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가르치는 일과 성전의 재정 관리, 재판 등 다양하였다.
  말라기 1장 6절에서 2장 9절의 제사장에 대한 비판논쟁은 제의와 율법을 지키고 가르치는 것 둘 모두 중요한 제사장 본연의 임무임을 보여준다. 거짓된 제의와 율법을 가르치고 실천하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제사장들은 하나님과의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깬 것이며 백성들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말라기의 제사장 비판은 오늘날의 목회자들 역시 참 목회란 교회건물의 대형화와 교인수의 확대 등의 외적 성전권력의 확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회개하며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도록 이끄는 소명을 담당하는 것임을 다시 성찰하게 한다.

주제어:
제사장직, 사독제사장, 레위제사장, 아론제사장, 말라기, 레위인, 성직자


  
1.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는 2013년 부산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 제 10차 총회를 개최할 만큼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이번 WCC 총회대회는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의 지도자들을 맞아 그동안의 양적인 성장만큼 성숙한 영성과 성화된 교회공동체의 깊이를 보여줄 좋은 기회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교회의 대형화와 물량주의, 성공주의가 불러온 금권주의 행태와 일부 목회자들의 무리한 교회세습 시도, 성추행 파문, 공금횡령, 선교비 남용 등에 관한 보도들은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전(前)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이 자신이 담임하던 교회를 아들에게 세습하는가 하면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한 한 원로목사는 이를 공개적으로 참회하기도 했다. 청년사역의 모범으로 손꼽혔던 목사가 성폭행 혐의로 사임을 하고는 다시 교회를 개척했다는 보도도 들린다. 이로 인해 목회자들의 권위는 바닥까지 실추되고 사회로부터 질타를 받았다. 목회자의 세금 납부문제가 사회의 이슈로 떠오르는 것도 목사가 더 이상 성직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하나의 직업으로 간주되는 현실을 반추해주는 한 예일 것이다.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들의 자성적 노력도 있었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2012년 총회임시입법회의에서 우리나라 교회역사상 처음으로 '교회세습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 주최로 '교회세습, 신학으로 조명하다'라는 학술 심포지엄이 개최되기도 하였다. 2011년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목회자들이 윤리실천 강령을 발표하기도 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는 2011년 정기총회에서 목회자윤리실천강령 제정을 결의하고 그 안이 신학부 검토를 거쳐 2012년 9월 총회에 헌의안으로 제출하였으나 총회의 파행적 진행으로 통과되지는 못했다. 또한 기독교 윤리실천운동 부설 기독교윤리연구소는 “목회자와 성”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2012년은 목회자 세금 납부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유경동은 목회자 세금납부 논쟁과 관련한 신학적 문제로 “돈에 대한 기독교의 정신을 규명하고,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다시금 성직자로서의 권위를 회복하고 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보다 근본적인 혁신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이 글은 구약에 나타난 제사장의 역할과 처우를 살펴보고 말라기 예언자의 제사장 비판을 통해 현대사회 참 목회자상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2. 구약의 제사장

  1) 구약성서에 나타난 제사장들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장직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19세기 말부터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지만, 자료의 부족과 복합성 때문에 그 역사를 재구성하기는 쉽지 않았다. 노퍼스(G. Knoppers)는 “제사장직에 대한 초기 역사를 재구성하는 일은 이스라엘 종교사에서 가장 난해한 문제들 중 하나”라고 토로한다. 실제로 구약의 제사장 계보는 단순하지 않고 그 진술도 일목요연하지 않다. 민수기 26장 57절은 레위 지파의 족보를 게르손, 고핫, 므라리 가계로 나누지만, 58절은 남부 구릉 지대 출신의 다섯 제사장 집단- 립니, 헤브론, 말리, 무시(즉 “모세 자손”), 고라-을 언급한다. 처음 두 집단의 이름은 남부 성읍들(립나와 헤브론)과 일치하고 마지막 두 집단은 다른 전승들 속에 나오는 제사장 계열들이다(민 16장). 제사장에 대한 소개도 전승에 따라 다르다. 오경에는 사독제사장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아론제사장(출-민)과 레위제사장(신)만 언급된다. 오경 안에서도 출애굽기와 민수기까지의 제사장 문서에는 레위인이 아론계열 제사장을 보좌하는 집단으로 묘사되지만 신명기에는 아론계열 제사장이나 사독계열 제사장을 우대하는 모습은 나타나지 않아 관점에 차이를 보인다. 반면 사독계열 제사장은 신명기 역사서(삼하, 왕상)와 에스겔, 역대기서에만 언급된다.  
  이처럼 구약의 제사장직의 역사 재구성이 쉬운 작업은 아닐지라도 구약에 나타난 자료들을 기초로 살펴보면 구약의 제사장이 하나의 부류가 아니라 현대 개신교회가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등의 교파가 있는 것처럼 다양한 제사장 가문이 존재했으며, 구약시대 주요한 3대 제사장 계열로는 아론계열, 레위계열, 사독계열을 손꼽을 수 있다.

  (1) 아론계열 제사장
  아론계열 제사장이란 말 그대로 아론의 후손들을 가리킨다. 출애굽기 29장 1-25절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되었다. 민수기 27장 12-23절에 따르면 아론이 죽은 후 엘르아살과 아론의 자손들이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되었다. 이들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브네 아하론 학코하님; 레 1:5, 8, 11; 2:2; 3:2; 21:1, 21), ‘아론의 자손’(브네 아하론; 레 3:5, 8, 13; 6:14, 22; 7:33; 22:4)으로 불리며 제의를 담당하였다. 레위기뿐만 아니라 출애굽기와 민수기의 제사법에서도 제의는 아론계열 제사장들이 담당하였다. 오경의 제사법을 다루는 출애굽기-민수기에서는 레위계열 제사장은 별도로 언급되지는 않고, 레위인들이 아론계열 제사장을 돕는 자들로 묘사된다(민 3:5-10).
  최종경전의 위치에서 아론계열 제사장을 소개하는 출애굽기에서 민수기까지의 본문은 이스라엘 역사의 초기 상황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비평적 관점에서 보면 포로후기의 제사장 계열들 간의 경쟁과 갈등을 증언해준다. 종교사적으로 아론계열 제사장은 왕정시대 예루살렘 성전제의에서 아무 역할을 못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축출되었다(왕상 2:26-27). 아론계열 제사장들이 제의에서 중심 역할을 담당한 것은 유다의 멸망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이 바벨론으로 유배되어 가고 그 빈자리를 아론계열 제사장들이 메우던 때부터이다. 그러나 고레스 칙령으로 포로지에서 사독계열 제사장들이 돌아오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아론계열 제사장을 연구한 케네트(R. H. Kennett)는 바벨론 포로지에서 돌아온 사독계열 제사장들은 유다에 남아있던 아론계열 제사장들과 경쟁하다가 결국 그들과 타협함으로써 두 계열의 제사장들이 동등한 지위가 되고 성서(토라)에서 “아론의 자손들”이란 애매한 말로 모호하게 표현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아론계열 제사장들의 비전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유다에 남아서 제의를 담당했던 그들의 역사적 정황과 맞물려있다. 그들은 성전이 아닌 회막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이 다스리는 거룩한 공동체의 재건을 부르짖는다. 오경의 제사장 규정은 성전종교에 비판적이며 하나님이 다스리는 공동체는 정치사회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론계열 제사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백성의 인격적인 교제로 이루어진다고 역설한다.

  (2) 레위계열 제사장
  레위계열 제사장은 신명기에 등장한다. 족보상 이들은 립니와 무시 가계로 구분된다. 이들은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별되어 다른 지파 사람들처럼 차지할 땅이나 유산이 없으므로(수 13:14, 33; 14:3-4; 18:7),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과 십일조에 의존하여 살아가도록 임명받았다(신 18:1-8). 레위계열 제사장은 언약궤를 메고 그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였고(신 10:8; 17:18; 31:9, 24-26; 수 3:3; 삿 17-18장; 삼상 6:15), 하나님의 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온전한 번제를 제단에 드리는 임무를 부여받았다(33:8-11). 첫 번째 언급되는 레위계열 제사장은 사사기 17장 7-13절에 나오는 미가의 집에서 제사장으로 봉사했던 레위 제사장인데 이들은 주로 지방 성소에서 제의를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다의 멸망으로 중앙성소의 제사장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그들이 없는 동안 레위계열 제사장들은 유다에 남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제의를 담당하였다(렘 4:15; 겔 11:15). 포로기 예언자 에스겔은 성전 멸망의 책임이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에 있으며 레위 사람들이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일에 동참했다고 비판한다(겔 44:10; 48:11). 이로써 에스겔은 레위 사람에게서 제사장의 직무를 박탈하고(겔 44:10-14) 대신 희생제물을 잡거나 성전의 허드렛일을 맡는 하등 제사장으로 강등시킨다(겔 44:15-31; 참조 겔 40:45-46). 실제로 고레스 칙령이후 사독계열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사독계열 제사장과 레위인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 투쟁에서 레위계열 제사장들은 포로 이후 공동체의 기본적인 종교적, 사회적 기구들로부터 배제되고 소수의 주변부 세력이 되었다.
  신명기에는 레위계열 제사장과 병행해서 레위지파가 언급된다. 이 둘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지만 레위계열 제사장과 레위지파는 중첩되면서도 동일한 범주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장의 역사를 재건한 코디(Aelred Cody)는 이 둘 사이에 구분이 있다고 본다. 그는 신명기에서 모든 레위인은 제사장이거나 제사장 후보생들이지만 신명기의 모든 제사장들이 레위지파와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신명기에는 “레위”란 지파적 개념으로, 제사장은 직무상의 개념으로 쓰였다. 레위지파란 결국 제사장을 포함한 성직과 관련된 일을 담당하는 유동인구를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단위로 제사장보다는 상위 범주이다. 우택주는 지파가 민족이나 부족의 개념이 아닌 행정적인 구분을 위한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회막을 중심으로 한 아론계열 제사장과 달리 레위계열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신앙공동체 개혁을 염원한다. 초기 이스라엘부터 제사장직을 담당해오던 레위계열 제사장들은 요시야 종교개혁으로 지방 성소를 잃고 지방의 제의제사장으로서의 역할보다는 언약궤와 율법책과 관련된 가르침의 역할이 더 부각된 것으로 보인다. 모세의 설교로 대표되는 신명기에 레위계열 제사장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점도 하나님과 백성의 중재자로서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선포와 실천을 통해 의로운 개혁공동체를 이루려는 레위계열 제사장의 비전과 맥을 같이한다.

  (3) 사독계열 제사장
  구약에는 사독(짜디크)이 총 52번 언급된다. 사독계열 제사장은 이스라엘 왕정 초기역사에서 주요 제사장으로 등장한다. 다윗시대 제사장 계열들은 모세계열 제사장인 아비아달과 아론 계열 제사장인 사독으로 대표되었고, 분열왕국 시대 북왕국 이스라엘에서는 단의 제사장(모세계열)과 벧엘의 제사장(아론계열)으로 대별되었다. 솔로몬은 다윗시절의 대제사장 아비아달을 쫓아대고 그 대신 사독을 대제사장에 임명하였다(대상 2:27). 사독은 사무엘하 8장 17절에 “아히둡의 아들”로 나오고, 사무엘하 15장 24-29절에는 하나님의 궤를 메고 가는 제사장으로 아비아달과 함께 언급된다. 역대기상 6장 1-15절의 계보는 사독이 아론-엘르아살-비느하스의 계보를 잇는 후손이라고 소개한다. 역대기상 16장 39절은 다윗시대 때 기브온 산당에 제사장 사독이 야웨를 섬기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밖에 사독에 대한 언급은 열왕기하 15장 33절에 “요담의 모친 여루사가 사독의 딸”이란 언급(대하 27:1)과 역대하 31장 10절에서 히스기야 왕 시대의 대제사장 아사랴가 “사독의 족속”이라고 불린 점이다. 성서 외 자료에서는 “사독의 후손들”이 벤 시락(51:13-30)과 키르벳 쿰란(Khirbet Qumran)의 다마스커스 문서와 카이로 게니자(Cairo genizah)의 사독 제사장의 단편들 등에서 언급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처럼 왕정시대 사독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의 제의를 주도 혹은 독점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독제사장이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직을 독점했다는 가정은 성서본문 자체보다는 학자들의 주장에 근거한다. 알베르츠(R. Albertz)는 사독 제사장이 포로 이후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지배적인 제사장직분의 수행자로서 “제단의 사역과 성전을 세우는 그 자체는 배타적으로 예루살렘의 사독 제사장에 의해 수행된” 것으로 본다.” 성서에서 사독은 솔로몬 통치기간 이후 언급되지 않고 있으며 그 다음 언급되는 본문이 사독계열을 영원한 제사장 가문으로 격상시키는 에스겔 40-48장이다(겔 40:46; 43:19; 44:15; 48:11).
  바벨론 포로지에서의 사독계열 제사장들은 경전 작업을 통해 자신들의 전통을 보존하던 중 고레스의 칙령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된다. 바벨론에서 귀환하였지만 사독계열 제사장은 당시 유다와 예루살렘의 종교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아론계열 제사장을 밀어내지 못하다가 궁극적으로는 성전의 주도권을 차지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독계열 제사장은 자신들을 아론의 후손으로 하는 통일된 제사장 계보를 확립하고, 자신들의 문서에 레위계열 제사장들의 전통도 함께 병행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다른 계열 제사장과 화해를 모색하였다. 이들 제사장들은 ‘아론의 후손들’로 그리고 더 넓게는 ‘레위 지파’로 거슬러 그 기원을 설명하게 되었다. 노트도 사독계열 제사장들은 페르시아 시대 자신들의 권위와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들의 기원을 요시야 시대보다 더 오래된, 왕정의 시작 시점으로 소급하고 아울러 자신들이 아론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사독계열 제사장들의 비전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신정정치(theocrarcy)이다. 사독 가문은 하스모니안 시기까지 이르는 제2성전 시기 동안 대제사장의 역할을 통제하였다. 핸슨은 사독계열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왕정을 섬기다가 신정정치(성직자 통치)를 거쳐, 제국의 군주를 섬기는 것으로 바뀌어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페르시아 식민시대 이후 두 세기동안 다윗의 후손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유다의 통치는 신정정치로 변모하였다. 520년 여호야긴의 고손이고 스알디엘의 아들인 스룹바벨이 유다의 총독(페하트, 학 1:1)으로 부임하고 여호수아가 대제사장이었다. 445년에는 느헤미야가 총독(느 5:14)으로 활동했다. 다윗의 후손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332년 알렉산더가 유다를 점령할 때 대 제사장 야두아(Yaddua)가 집권하고 있었다. 그는 군대와 군장비, 식량을 통제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알렉산더 군대에 성문을 열거나 저항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기원전 2-3세기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기원전 175-163) 이후 급속히 몰락한다.

  2) 구약의 제사장직 역사 재구성
  (1) 왕정이전 시대
  초기 이스라엘 사회는 각 지방에 성소가 존재했으며 지방 성소에는 혈통이 다른 다양한 제사장 집단이 제의에 종사했다. 이 당시 제사장은 반드시 레위인이 아니었다. 그 예로 제사장으로 종사했던 사무엘은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고(삼상 1:1;2:18; 9:11-13; 13:5-15), 엘리아살은 기랏여아림 사람이었으며(삼상 7:1), 유다지파 출신인 다윗의 아들들도 제사장 직무를 맡았다(삼하 8:18). 왕정이 시작되면서 레위계열 제사장이 지방 제사장으로 자리를 굳혔고, 예루살렘 성전의 제의는 사독계열 제사장이 맡게 되었다. 사독의 등장에 앞서 사무엘상 1-3장의 사무엘의 출생과 소명 이야기는 실로의 엘리 제사장 자손들이 대제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된 정당한 사유를 설명해줌으로써 이후 등장하는 사독계열 제사장의 정당성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삼하 15:24-37; 20:25; 왕상 1:22-39; cf. 2:26-27). 윌슨(R. Wilson)은 “만약 아비아달이 실제로 엘리의 후손이었다면 사무엘상 2장 22-36절에서 나타난 몇몇의 신탁 형태는 어떻게 지금 사독 제사장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력한 제사장 가문이 되었는지 그리고 아비아달의 후손들이 왜 그들의 제사장 직분을 잃어버렸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2) 왕정 시대
  왕정시대에는 제사장직에 특별한 차별이 없이 예루살렘의 중앙제의는 사독 제사장들이 담당하고 다른 제사장들은 지방제의를 맡았다. 포로기 이전까지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이의 구분이 없었으며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 초에는 모든 제사장들이 레위였으며 모든 레위들이 제사장이거나 제사장 후보자들이었다. 그러나 중앙제의화를 핵심으로 하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으로 지방 성소를 담당했던 지방제사장인 레위계열 제사장들은 지방 산당을 철거로 그 지위에 큰 위협을 받았다(왕하 23장).
  요시야 종교개혁 때 피해를 본 지역은 벧엘과 아랏, 그리고 브엘세바이다. 벧엘은 아론제사장이 있는 곳이고, 아랏은 고라 자손인 레위제사장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며, 브엘세바 역시 레위제사장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열왕기하 23장 5절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의 조치들 중 하나로 이전 유다 왕들이 세운 케마림(제사장)과 바알과 해와 달과 성좌들과 하늘의 모든 성군들에게 분향하는 자들을 폐하였다고 말한다. 케마림은 스바냐 1장 4절에서 제사장들을 코하님과 케마림으로 구별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케마림은 천체 숭배의 앗시리아 종교와 관련된 제의활동을 한 제사장들로 지방의 야웨 제사장들(코하님)과 구분되었다. 케마림과 달리 레위제사장인 지방의 야웨 제사장들(코하님)은 면직되지는 않았지만 산당이 헐리게 되자 봉사할 제단을 잃은 채 예루살렘 중앙제단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그의 형제 중에서 무교병을 먹는 처지가 되었다(왕하 23:9). 신명기법전에는 중앙제의화에도 불구하고 레위 제사장이 중앙성소에서 제의를 담당할 수 있다고 서술하지만(신 18:1-8), 종교개혁의 소멸로 레위인들의 지위가 보장되지 못한 채, 점차 그 권한을 잃고 주변부로 밀려나게 되었다.  

  (3) 왕정의 멸망과 포로기 이후
  구약의 다양한 제사장 집단들 사이에 오랫동안 존재해왔던 갈등이 포로지의 제사장 집단 일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서 성전 권력을 중심으로 더욱 심해졌다. 페르시아 식민시대 유다의 종교, 정치적 세력들을 연구한 스미스(Morton Smith)는 성소와 관련된 세 집단을 상정한다. 첫 번째는 “지방 세력”으로 바벨론 침략이후 유다에 남아있던 자들로 이들은 혼합주의적 종교성향을 가지고 바벨론에서 돌아온 세력과 적대하였다. 두 번째 세력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자들로 오직 야웨에게만 헌신하던 자들이다. 세 번째 세력은 “예루살렘의 제사장들로 성전재건에 있어서 경제적인 관심을 가진 자들”이다. 이 세 집단은 유다에서 정치적 투쟁에 휘말려있었는데, 느헤미야 지휘 하에서 레위인들은 일반인들과 연합하여 사독계열 제사장과 지방 귀족들과 맞서게 되었다. 느헤미야의 연합 시도는 잠깐 동안에만 효력을 발휘하였고 스미스가 “분리주의자들의 세력”이라고 부르는 이 연합은 “진정한 신명기사가적 개혁(sole Deuteronomistic reform)"의 이름으로 “이자면제, 빚진 땅과 재산의 양도, 채무탕감”을 주장하고 지방귀족들의 부정결함(impurity)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독계열 제사장과 지방 귀족들이 4세기 초에 그들의 세력을 얻고 성전에서의 위치를 굳힌다.
  또 다른 학자 폴 핸슨(Paul Hanson)은 이사야 56-66장과 스가랴 9-14장의 분석을 통해 포로기 이후 유다에서의 격렬한 갈등상황을 분석하고 이 시기에 묵시문학이 기원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사독계열 제사장을 포함하여 포로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성직자 정치(hierocracy) 세력을 형성하고 에스겔 40-48, 스가랴, 학개, 역대기 등을 발전시킨 반면 이상주의자들은 예언전통 특별히 신명기적 전통에서 출발하여 성직자 정치를 반대하고 제 3 이사야, 말라기, 느헤미야를 발전시켰다. 레위계열 제사장들은 이 부류에 속한다. 학개와 스가랴가 성직자 정치세력의 안건들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를 얻고 이에 대한 합법성을 부여받을 때까지만 해도 이상주의자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성직자 정치집단이 승리하게 되고 사독계열 제사장들이 자신들을 에스겔에 묘사된 “사독의 자손들”이란 용어보다 더 포괄적인 P의 “아론의 자손들”이란 말로 대치함으로써 다른 제사장 집단과의 화해의 태도를 보였다고 말한다. 성직자 정치세력인 사독계열 제사장은 종국에는 제사장직을 독점하게 되었다.

  3. 구약의 제사장들의 역할

  구약의 제사장은 흔히 제의만을 담당했던 직분으로 협소하게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장이 한 부류가 아니었던 것처럼 그들의 역할도 단일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의 담당자, 율법을 지키고 가르치는 자, 성전의 일을 담당하는 자, 그리고 기타 재판과 군사, 경제적인 의무까지 담당하는 등 다양한 일들을 담당해왔다.

  1) 제의 담당자
  구약에서 제사장들은 제의를 주관하는 성직자였다. 그들의 주요 업무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의 제의와 관련된 일이었으며, 1년에 한 번은 대속죄일로 대제사장이 집행했으며 제사장들이 그를 도왔다. 제사장 업무를 묘사하는 히브리어는 ‘세레트 베셈’과 ‘아마드 리프네’ 두 개가 사용되었다. 사라트 동사는 하나님에 대한 레위지파의 업무를 설명하는데 5번(민 3:31; 대하 23:6; 31:2; 대하 29:11ㅎ; 스 8:17) 쓰였다. 아마드 동사는 제사장과 레위지파가 제의를 담당하는 직무에 한해서 사용되었다. 20번 정도 사용되었는데 두 번은 레위지파가 회중 앞에 서서 섬기는 것으로 나온다(민 16:9; 겔 44:11ㅎ).  
  전승에 따라 제의 주도권이 다르게 나타난다. 레위기에서는 아론 계열 제사장만이 제사를 집전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에스겔은 사독 계열 제사장만 제의를 집전할 수 있고 에스겔은 이들을 ‘주께 가까이 나아가 수종드는 자’(겔 40:46; 43:19; 44:15; 48:11)로 표현한다. 왕정시대 예루살렘 중앙 성소는 사독 제사장들에 의해서, 그리고 지방 제의는 주로 레위 제사장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2) 율법책을 지키고 가르치는 자
  제사장들의 역할이 제의에만 국한되지 않고 율법책을 지키고 율법을 가르치는 역할도 포함되었다. 신명기에서는 레위인들의 교육의 직무를 여러 곳에서 강조한다(17:18; 27:14; 33:10). 역대기는 레위인을 야웨의 율법을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치는 사람(대하 17:7-9; 35:3; 느 8:5-9)으로 강조한다.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레위 사람들이 백성들에게 깨달을 수 있도록 말씀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레위기 10장 10-11절도 아론 제사장들이 야웨가 모세에게 명령한 규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치는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보여준다. 폰라트는 레위인 설교(대상 28:2-10; 대하 15:2-7; 16:7-9; 19:6-7; 20:15-17; 25:7-8)라는 양식을 분류하고 그 특징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한다: (1) 고대의 자료 특히 예언자의 예언을 인용한다. (2) 역사를 신학적으로 재해석한다. (3) 회중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천하기를 촉구한다.
  제사장들의 가르치는 역할이 중요한 직무로 떠오른 것은 유다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이라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경전 작업이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포로기를 거치면서 유대교가 제의종교에서 토라를 중심으로 한 문서종교로 변천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고 본다. 제의 중심의 종교에서 말씀 선포와 기도가 중심이 되는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제사장들은 설교를 통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3) 성전의 일을 담당하는 자
  열왕기하 12장 9-10절에는 ‘문을 지키는 제사장’(핫코하님 소프레 핫사프)이란 호칭이 나오는데 이는 성전재정을 관리하는 자에 대한 직함이었다. 다른 본문들에서는 ‘문을 지키는 자’(왕하 22:4; 23:4; 25:18; 렘 35:4; 52:24) 혹은 ‘문을 지키는 레위인’(대하 34:9)으로만 명명되고 제사장이란 직함은 등장하지 않는다. 예레미야 52장 24절에서는 세 명의 문을 지키는 자가 대제사장, 부제사장과 함께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명단에 포함되었다. 역대하 24장 5절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왕의 명령으로 지방에 파견되어 성전 수리를 위한 돈을 거두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왕의 지휘 아래 세금 징수의 실무를 담당했고(대하 24:8-11; 31:11-19), 포로후기에도 레위인들은 성전에서 십일조를 수납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하였다(느 10:39-40; 13:12-13; 대하 31:11-19).
  역대기서는 레위인들이 제사장과 더불어 성전의 일을 담당하였음을 보여주는데(대상 23:24, 26, 28, 32), 성전의 일이란 성전의 거룩한 것을 정결하게 유지시키는 일(대상 23:28), 성소에 있는 진설병과 소제물에 대한 관리(대상 3:29) 등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역할이 제의와도 관련되어 있었다고 보아야한다. 레위인들은 성전 예배에서 성가대의 대장이나 대원들로 참여하였다(대상 23:30-31). 매일 드리는 제사인 타미드는 레위인 성가대에 의해 찬양으로 행해졌는데(대상 16:4), 기도와 찬양이 제사를 대신하는 예배의식은 제의제사장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구약에는 성전과 관련된 여성들의 직분도 발견된다. 출애굽기 38장 8절에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이 언급되었으며 사무엘상 2장 22절은 엘리의 두 아들은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악행을 저질렀음을 고발한다. 엘리의 두 아들은 이 악행으로 인해 전쟁에서 죽는 심판을 받는다. 이 외에도 사사기 11장 34-40절에 하나님께 드려진 성녀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성막에서 봉사하는 여인들은 아마 청소와 함께 세탁일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4) 기타 재판, 정치, 군사적인 역할
  신명기법전에 성문 앞의 법정이 결정하기 어려운 소송 사건을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레위계열 제사장들에게로 가져오도록 규정하는 법조항을 고려해볼 때 제사장들이 재판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신 17:18; 21:5 참조). 학개 2장에서 제사장이 법에 대해 답해주는 직무도 행한다. 제사장들은 정치적 지도자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국가 정책에 관여하기도 하였다(왕하 11-12장). 학개와 스가랴에서 여호수아는 단순히 대제사장이 아니라 스룹바벨과 함께 정치에 관여하였다(학 1:1, 14; 2:2). 그라베는 제 2성전시대 제사장들의 정치 참여가 페르시아시대 성전과 제의가 가지는 중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레위인들은 군사적 역할도 담당하였다. 창세기 34장 25-31절과 49장 5-6절, 그리고 출애굽기 32장 25-29절은 레위인들이 무력을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출애굽기 32장 25-29절은 레위가 그들의 군사적 행동으로 제사장 직분을 위임받은 것으로 나온다(출 32:29). 다윗이 헤브론에 있을 때 그 휘하에 몰려온 지파들의 군사 명단에 레위인이 포함되어 있으며 아론과 사독까지 거론되고 있다(대상 12:22-40). 역대기에는 레위인이 무기를 소지하고 왕궁과 성전을 경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대하 23:2-8).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쿠테타를 일으키는 데 레위인이 동조하여 참여하였다. 이때 레위인들은 제사장과 함께 성전경비를 책임지는 일을 수행한 것이다. 레위인이 성전경비를 담당한 것은 역대기 곳곳에 나오며 느헤미야 13장 22절에서도 기술되어 있다. 정중호는 “레위인들은 무기를 소지하고 전투에 참가하고 쿠테타에도 가담하기도 하였지만 가족 공동체의 정결성을 보호하려는 차원에서 행동했고 종교적으로 야웨 종교의 정결성을 보호하려는 차원에서 행동하였다.”고 결론짓는다.

  4. 제사장들의 경제적 지위(신 18:1-8)

  신명기 법전은 제사장의 수입원에 대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신 18:1-8). 본 규정에 따르면, 제사장이건 성전과 관련된 업무를 맡은 레위지파이건 그들에게 공통점은 그들이 분깃이나 기업은 따로 없이 야웨께 드린 제물과 십일조로 살아가야 할 성별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야웨께서 그들의 기업이기 때문이다. 레위인들이 ‘분깃이나 기업이 없다’는 표현은 신명기 곳곳에 언급되어 있다(10:9; 12:12; 14:27, 29).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때 레위인들은 땅을 분배받지 않았다(신 10:8-9; 민 18:20-21). 그들은 48개의 성읍에 살 수 있도록 허락된다(민 35:1-8; 수 21:1-42). 레위인들의 수입은 야웨의 화제물과 첫 소산으로부터 얻는다. 레위기에 따르면 화제물은 번제(1:9), 소제물(2:3), 화목제(3:3), 속건제(7:5) 등이 포함된다.
  3-5절은 제사장들의 몫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3절은 제사장이 화제물의 앞다리와 두 볼과 위를 몫으로 취할 것으로 밝히지만 이는 레위기 7장 30, 32절과 민수기 18장 18절에서 제사장들은 가슴과 오른쪽 허벅지를 먹도록 한 규정과 다르다. 그 차이를 크리스텐센은 신명기의 목록이 랍비 문서에는 희생제물이 아닌 살육당한 짐승 목록임을 지적하고, 장일선은 제사장의 몫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정해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5절은 제사장들이 취할 몫의 신학적 근거가 야웨 앞에서 서서 섬기는 제사장의 특별한 지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 밖에도 제사장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 그리고 양털을 받을 수 있다. 이 목록들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주요산물들이다.
  제사장은 땅을 소유하지 못하며 생계수단은 자신들이 농사한 것이 아니라 제물로 바쳐진 것에 의존해야한다는 규정의 의미는 이중적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왕정시대 제사장들 사이에는 중앙제의와 지방 산당을 기반으로 안정되고 윤택한 삶을 영위한 제사장이 있었다. 그 밖에도 성전과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는 레위지파 제사장들이 있었다. 요시야 종교개혁 이후에는 지방성소의 파괴로 일터를 잃은 제사장들 중 일부는 제의를 수행할 다른 곳을 찾지 못하여 기초생활도 보장받지 못하는 수준의 삶을 살아가는 제사장들도 생겨났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명기 18장 1-8절의 규정은 클래범(Clabum)이 지적한 것처럼 한편으로는 제의 직무를 통해 기업 이상의 재산 축적을 행하는 지방제사장을 경계하는 법조항으로 제사장들은 신성한 야웨의 분깃으로 허락된 공식적인 몫을 제외한다면 이스라엘에서 어떤 상속이나 몫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경고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이 규정은 기초생활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처지의 제사장들에 대한 보호규정이 되기도 한다. 특별히 신명기의 다른 본문에서는 레위인들이 당대 사회의 3대 약자들-과부, 고아, 나그네와 함께 사회적 보호 대상으로 언급하면서 레위들을 제의 축제 식탁에 포함시킬 것을 권고하는 점도 주변부 제사장들의 인권과 생계를 보장해주려는 배려조항들이다.

  5. 말라기 예언자들의 제사장 비판

  말라기는 그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몇 가지 근거들에 근거해서 기원전 460년 후, 460-398년 사이의 본문으로 추정된다. 제사장에 대한 말라기의 비판은 예언자의 두 번째 법정 논쟁에 해당하는 1장 6절에서 2장 9절까지인데, 이 단락은 불의한 제의에 관한 비판을 담은 첫 단락(1:6-14)과 율법을 가르치고 깨우침의 소명을 강조하는 두 번째 단락(2:1-9)로 나뉜다. 각 단락을 시작하는 1장 6절과 2장 1절은 논쟁의 대상이 되는 제사장들(하코하님)을 언급하고 있다.

  (1) 불의한 제의에 대한 비판(말 1:6-14)
  말라기 1장 6-14절은 히브리 단어, 솀(이름; 6, 11x3, 12, 14)과 바짜(멸시하다; 6x2, 7, 12)를 반복함으로써 제의에 있어서 중심 문제가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고 공경하지 못하는 사실에 있음을 보여준다. 제물은 더렵혀졌고(가알; 7x2, 12) 하나님은 이를 기뻐 받지 아니하신다(8, 10). 제사장들의 구체적인 죄목이 7-8절에 열거된다. 그들의 죄목은 ‘더러운 떡’을 주의 제단에 드린 것(7a)과 야웨제의와 관련해서 멸시의 언어와 태도를 보인 점이다(7b). 야웨께서 흠없는 제물을 요구하셨음에도 불구하고(레 22:20-25; 신 15:21), 그들은 눈멀고 절룩거리고 병든 짐승들을 제물로 드렸다. 이러한 제물은 인간 총독에게도 바칠 수 없는 쓸모없는 것들이다. 바치는 제물에 대한 평가는 제사장들의 책임이므로(레 27:11-12, 14), 병들고 흠이 있는 동물들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것은 그들의 직무유기와 태만에 기인한 것이다. 기원전 8세기 히브리 예언자들 역시 헛된 제물에 대한 경고의 예언을 자주 들려준다(사 1:11-14; 암 5:21-22).
  제단에 바치는 가식적인 희생 제사는 야웨 하나님에 대한 내적인 무관심의 외적 표현이다. 그런데 말라기는 제사장들이 가식적인 제사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제물로 바친다(13절)고 고발한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중재하는 제의를 담당하는 제사장은 그에 적합한 경외심으로 임무를 수행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병든 제물로 야웨의 얼굴을 욕보이고 주의 제단을 사용하는 것은 제사장직에서 파면될 만한 중대한 악이다.  
  말라기 1장 6-14절이 제의를 담당하는 제사장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은 그 행동을 묘사하는 두 히브리 동사(나가쉬, 보오)의 반복을 통해 잘 드러난다. 나가쉬 동사가 네 번(7, 8*2, 11절) 나오고, 제물을 바치는 것을 묘사하는 보오 동사가 13절에 두 번 나온다. 제사장들의 직무를 묘사하기 위해 쓰인 히브리 동사 나가쉬(가까이 나아가다, 접근하다)는 제사장들이 제단으로 나갈 때(카알형), 혹은 제물을 가지고 나갈 때(니팔형; 드물게 히필형)으로 쓰인다. 포로기 혹은 포로기 이후 본문에서 이 동사는 제사장적 직무를 묘사하는데 쓰인다(출 19:22). 에스겔 44장 13절에서 나가쉬 동사가 두 번 사용되는데 에스겔서에서 레위는 이등 제사장으로 제단에 가까이 나아가 제의적 직무를 담당할 수 없는 제사장으로 묘사된다. 레위기 2장 8절은 제단으로 나아가 제물을 바치는 것(나가쉬, 히필형)이 제사장의 고유직무임을 보여준다. 또한 레위기 8장 14절은 속죄제물을 바치는 데 이 동사(니팔형)가 쓰이고 있으며 출애굽기 32장 6절에서는 화목제물을 바치는데 이 동사(히필형)이 쓰이고 있다.
  말라기의 관심은 제의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성품, 그분과 제사장의 친밀한 교제, 그리고 그 교제로부터 흘러나와야하는 존경과 영광, 그리고 순종과 사랑의 마음이 담긴 응답에 있다. 그런데 제사장들의 마음이 부패하였다(2:2). 제사장은 올바른 제의를 통해 더렵혀진 야웨의 이름을 다시 높이 세워야한다(1:11).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거짓된 제물을 바치는 행위는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을 무효화시킬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

  (2) 율법을 가르치고 깨우침의 소명 강조 (말 2:1-9)
  제사장을 향한 두 번째 말씀인 2장 1-9절은 ‘베아타(그리고 이제)’로 시작된다. 아타는 연속되는 논쟁에서 주제의 변화나 전이를 소개하면서 논리적인 연결과 동시에 그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수사기법으로 한 단원의 시작을 알리는데 종종 사용된다. 예언서에서 보통 아타는 심판 예언을 이끈다. 첫 번째 단락에서 비판의 주된 내용이었던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못할 경우에 대한 심판과 경고가 나온다. 주제의 연결은 예언의 대상자인 하코하님을 반복해서 명명하고 있으며, 내 이름 공경하지 못하면(2:2)이라는 첫 번째 단락의 주제어를  다시 받으면서 이루어진다. 또한 새로운 주제어들(레위[4, 5, 8], 언약[4, 5x2, 8], 율법[6, 7, 8 9])을 소개하면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고 율법을 지켜야할 이유를 제시해주고 있으며 이들 단어의 반복은 두 번째 단락의 주제가 제사장들의 의무가 율법준수와 이에 대한 가르침과 실천에 있음을 강조해준다. 말라기는 예언의 대상을 제사장으로 동일하게 명명함으로써 제사장이 제의와 말씀 실천의 임무 모두가 제사장의 기본적인 주요직무임을 상기시킨다.
  2절은 제사장들이 하나님 경외의 계약을 어길 경우 심판받을 수밖에 없다는 경고로 시작한다. 이로 인해 선포되는 저주는 신명기 28장 20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한 자에게 내리는 저주와 같다. 제사장들이 야웨의 뜻을 준수하도록 백성을 가르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해 야웨는 곡식의 생산을 적게 하며 백성의 삶을 궁핍하게 한다. 나아가 3절에서는 제사장으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제사장은 야웨의 제단으로부터 축출당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4-9절은 제사장들을 향해 레위와의 언약을 상기시키고 있다. ‘레위와의 언약’은 구약성서에서 이곳에만 언급되고 있다(hapax legomenon). 샤퍼는 이를 후대의 첨가라고 본다. 이 개념의 정확한 출처는 논쟁거리이지만 아마도 신명기 33장 8-11절 혹은 민수기 25장 10-13절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 언약은 ‘생명(하임)과 평강(샬롬)의 언약’인데 그 목적은 앞에서 제사장들을 향한 비판의 핵심이었던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을 회복시키려는 것이다. 6절은 레위인들이 언약에 준하여 “그의 입에는 진리(에메트)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아브라)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다”고 말한다. 히브리어 ‘아브라’는 일반적으로 ‘사악함’을 묘사하며(욥 6:29-30; 시 37:1), 맥락에 따라 ‘폭행’(미 3:10; 합 2:12)이나 ‘불의’(호 10:13)를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진리와 동의평행어로 거짓이나 속임수로 이해된다. 말에서 뿐 아니라 행동에 있어서도 화평과 정직함으로 하나님과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제사장의 정직한 언행은 백성을 교화시키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결과를 낳았다.  7절은 계속해서 제사장의 주요한 직무가 입술로 지식을 지키고 율법을 구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8세기 예언자들도 제사장들이 그들 본연의 책무인 야웨의 뜻을 분간하는 일과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가르치는 일(신 33:8, 10)을 외면하고 권력의 상층부 구성원으로서 끝없이 이권을 탐하는 죄를 책망한다(호 4:2-6; 6:6; 8:11-13; 미 3:11). 제사장들이 성직의 임무를 그치고 장사꾼들로 전락하여 돈 버는 일과 소유가 그들 행동의 유일한 규범이 되고 말았음을 탄식하였던 것이다.
  요약하면, 말라기는 제사장이 거짓된 제물을 바치고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것에 급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백성들이 진리의 길을 행하도록 이끌어야하는 본연의 소임을 다하지 못함을 책망했던 선배 예언자들과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별히 말라기는 제사장 사이의 구분을 레위지파로 통합하면서 차별을 두지 않음으로써 당대 성전제의를 통한 자신들의 권력을 확보하는데 관심을 가졌던 제의제사장(사독계열 제사장)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제사장의 범위를 제의에 한정하지 않고 성전과 관련된 일을 맡고 있는 레위인들도 포함시키고 있다. 이로써 성전 권력에만 관심이 있는 성전 제사장들을 향해 제사장이 진실한 제의를 담당하는 것 이상으로 백성들에게 진리의 율법을 선포하고 그들로 하여금 옳은 길을 따르도록 촉구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야 하는 소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6. 구약의 제사장과 현대의 목회자

  지금까지 구약에서 제사장은 아론계열, 레위계열, 사독계열의 다양한 제사장 집단들이 존재했으며 역사적 단계에 따라 제사장들의 서열의 변화와 갈등이 있었음을 보았다. 제사장들의 다양한 계보에도 불구하고 성직을 담당한 이들은 레위지파로 구별되어 다른 지파와 달리 하나님을 기업으로 하는 선별된 지파로 인식되었다. 성별된 자들로서 제사장들은 제의와 성전봉사를 담당하고, 율법책을 지키고 가르침으로써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중재하고 교화하며, 성전의 재정과 재판을 담당하였다. 제사장은 아닐지라도 성가대나 회계, 혹은 군사적인 봉사로 성소와 관련된 업무를 돌보는 성직자들도 레위지파에 포함되었다.
  무엇보다 제사장의 업무가 제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책을 지키고 이를 가르쳐 백성을 바로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는 임무도 제의적 임무만큼, 아니 더 중요한 임무로 간주됨을 예언자들의 비판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제의는 제사장이, 율법은 레위가 구분하여 담당한 직무가 아니라 이 둘 모두 제사장에게 부요된 주요한 책무인 것이다. 오늘날 교회 권력과 제도에 더 관심을 가지고 교회세습을 자행하고 이권을 위한 정치활동에 개입하는 목회자들은 위기 상황에서 제사장에게 주어진 일차적 책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 백성을 선도하는 일임을 강조하는 말라기의 예언에 귀기울여야할 것이다.  
  다음으로 제사장의 수입원에 대한 신명기 법전의 규정은 성별된 지파로서 레위지파는 그가 제사장이든, 제의가 아닌 다른 성직 담당한 자이든 모두 땅의 기업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에 의존하여 그 몫을 받도록 할당받았음을 명시한다(신 18:1-8). 레위지파가 다른 수입원이 아니라 오직 성소에 바쳐진 제물에 의존해야함을 강조하는 이 규정은 그릇된 제물로 재물을 착복하는 일부 제사장들에 대한 경고임과 동시에 기초 생활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영위하는 소외된 제사장들에 대한 보호의 요청이라는 이중적 의미로 해석하였다. 이 규정은 오늘날에도 목회자들이 귀기울여야할 가르침이다. 목회자들이 성별된 자로서의 소명의식을 회복하고 재물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교회재정을 건물의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선교를 위해 쓰고, 예수의 제자들처럼 기초생활비조차 벌지 못하며 헌신적으로 사역하는 목회자들을 배려할 수 있어야할 것이다. 목회자세금 문제도 이런 관점에서 신학적, 성서적 고찰이 진행되길 바란다.
  끝으로 진실한 제사와 율법에 기초한 삶과 목회를 요구하는 말라기의 제사장에 대한 비판은 성전(교회)과 제의(재물)를 둘러싼 탐욕과 권력화의 유혹을 받는 한국교회 대형교회 목회자들에게도 동일한 경고의 메시지가 될 것이다. 성전의 외적 성장과 번영은 신앙의 제도화, 직제의 위계질서 구축을 통한 권력화를 지향하게 유혹한다. 그러나 그 유혹은 페르시아 식민지 시대 종교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이상주의자들(핸슨의 용어), 혹은 신명기적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분리주의자들(스미스의 용어)이 신앙의 제도화보다는 신앙의 생활화와 실천을 통해 새 하늘 새 땅을 선포했음을 기억하며 뿌리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성직자는 세상의 재물을 착복하거나 탐내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힘써야하고,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을 농어촌교회나 빈민교회 선교에 나눠 쓸 수 있는 공의의 마음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성직자의 본분은 일상으로 담당해야하는 제의(예배)의 올바른 실천을 넘어 하나님의 백성에게 진리를 선포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공동체의 형성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임을 다시 되새겨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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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Priests in the Old Testament and Malachi’s Criticism on Priesthood


                                                                                                                   Lee, Yeong-Mee  

  The present article aims to reflect the role and responsibility of ministers in the modern society through the status and roles of priest in the Old Testament. For this purpose, it briefly reviews the history of priesthood of ancient Israel and examines the prophet Malachi’s criticism on cultic priests in Malachi 1:6-2:9.
  The biblical texts on priest shows that there are three main priest families in the Old Testament: Aaronites, Levites, Zadokites. Unlike the common prejudice, the  priests not only took charge of the cult, performing sacrifices, but also involved in interpreting and teaching the Torah, collecting tithe, and even military duties in relation to the temple. Their status and roles had been changed according to different historical stage. The fate of the temple played major role in defining the relations between the priests. During the early Israelite society, priests were not necessarily from the tribe of Levi. But from the period of Monarchy, all the priests were categorized under the Levites, which refer to all kinds of ministry workers in relation to the cult or temple. During the monarchy, the Zadokite priests served in Jerusalem temple; the Levite priests, the local cults, until the reform of Josiah. The centralization of the cult by Josiah’s reform threatened the Levites priests who lost their local cult. Their role seemed to focus more on teaching than cultic performance since then. In the post-exilic period, Zadokite priests were conflicted with Levi priests and took the authority over the cult and the Temple. The Levite priests work to interpret and teach the Torah and serve other ministries in the Temple.
  The prophet Malachi addressed critical debate against the priest. The prophet used an inclusive term for all priests, the Levites, that diminishes the division among priests. He proclaimed that the true priesthood is to carry right sacrifice to God and to teach and live according to the Torah. The prophetic proclamation against cultic priests who concerned their own welfare and authority may pose a warning to the modern ministers who ruined the ministerial authority through their attempt to privatization of the church, financial corruption, or sexual harrassment. It reminded all modern ministers that the fundamental role of minister is to stand on the word of God and lead God’s people to walk with God.

Key words:
Priesthood, Zadokite, Aaron, Malachi, Levites, Mini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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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2)

미래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는가?*


                                                                     김동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교수/ 기독교윤리학)



초록

    과학기술의 진보로 인해 인류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해온 테크놀로지에 대하여 그동안 기독교 신학은 어떠한 논의를 해왔는가? 그동안의 논의가 21세기에 이르러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발전해가는 첨단 테크놀로지에 대한 논의로까지 확대되었는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21세기 첨단 테크놀로지의 발전 양상에 대하여 기독교 신학은 지금 무엇을 직시해야하고, 이제 무엇을 말해 주어야하며, 앞으로 어떠한 논의를 펼쳐가야 하는가?
    본 논문은 위와 같은 관심과 의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관심과 의문을 품은 채, 본 논문은 ‘미래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화두로 던지고 이에 대답해 가면서, 테크놀로지와 기독교가 현실적으로 처한 상호간의 관계성을 분석하고, 이러한 분석을 통하여 현대 테크놀로지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대응 및 논의의 방법과 방향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본 논문은 우선 21세기 첨단 GNR 테크놀로지의 최신 동향을 살펴보고, GNR 테크놀로지를 총체적으로 대표하는 AI 프로젝트를 통해 구현되어가는 미래 인간(posthuman)에 대하여 살펴본 후, 미래 인간의 구현을 통하여 현대 과학자들이 최종 목표로 삼게 된 불사(不死, immortality)를 분석해 봄으로써  그 목표가 어떻게 그들의 구원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학적 구원관이 기독교에 주는 새로운 도전은 무엇이며 기독교 신학은 이에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할지 살펴보고자 한다.

주제어
미래 인간, 테크놀로지, 생명윤리, 불사, 구원    


1. 들어가는 말

2012년 9월 28일 한국을 방문한 구글(Google)의 에릭 슈미트(Eric Schmidt) 회장은 서울 신촌 연세대 대강당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아침에 일어난 직후에, 잠들기 직전에, 잠을 자다 한밤중에 깨었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가? 바로 휴대폰이다”라고 말했다. 바로 휴대폰으로 대표되는 테크놀로지가 현대인의 삶에 얼마나 깊이 개입해 있으며 현대인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실질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는지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일찍이 마틴 하이데거가 단언했던 것처럼, “우리가 열정적으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상관없이, 우리는 어느 곳에서든지 테크놀로지에 구속되어 있으며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본 논문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 중 하나인 테크놀로지에 대한 최근의 동향을 살펴보고, 첨단 테크놀로지가 구현하고자하는 미래 인간(posthuman)에 대하여 파악한 후, 미래 인간의 구현을 통하여 현대 과학이 최종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를 찾아내어 그 목표가 기독교 신학에 주는 의미와 도전의 양상을 짚어봄으로써 앞으로 기독교 신학의 담론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를 진행시키기 위하여 화두로 던져진 질문은 ‘미래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는가’이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이전에 우선적으로 살펴보아야할 점은, 과연 이 질문이 과학의 질문인가 아니면 신학의 질문인가 하는 점이다. 만약 이 질문이 과학의 질문이라고 한다면 ‘구원’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만약 이 질문이 신학의 질문이라고 한다면 ‘미래 인간’이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들린다. 본 논문은, 이 질문이 지금 21세기에 주어진 질문이기에 과학과 신학 모두의 질문이 될 수 있다고 전제한다. 풀어 말하면, 미래 인간의 구현을 통하여 현대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시대적 관심을 기독교가 두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질문은 과학적인 신학의 질문이며, 이와 동시에 미래 인간을 구현하려는 최신 테크놀로지의 기독교를 향한 도전이 구원에 대하여 논의할 수 있는 데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에서 이 질문은 신학적인 과학의 질문이다. 이처럼 신학과 과학의 보다 심오해진 관계의 양상과, 보다 치열해진 상호간의 도전의 양상을 지금 21세기에 기독교가 처한 시대 상황으로 이해하면서, 본 논문은 이 질문에 대답해보고자 한다.

2. 미래 인간이란?

미래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미래 인간의 실현을 추진하고 있는 21세기 첨단 테크놀로지의 현주소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인 빌 조이(Bill Joy)는 21세기를 대표하는 세 가지 첨단 테크놀로지로서 유전학(Genetics), 나노기술(Nanotechnology), 로봇공학(Robotics)을 이야기한다. GNR 테크놀로지는, 20세기를 대표해온 세 가지 테크놀로지인 NBC, 즉 핵(Nuclear), 생물(Biological), 화학(Chemical) 공학을 넘어서는 최첨단 테크놀로지이다. GNR 테크놀로지가 NBC 테크놀로지를 넘어서는 가장 큰 특징은 자기 복제(self-replication)에 있다. 자기 복제의 능력은, 그 파급 효과에 있어서 NBC 테크놀로지를 능가하는 지속적인 영향력과 힘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핵공학의 기술로 만들어진 핵무기의 파괴력이 일회성에 머무르는 반면, 나노기술을 통하여 만들어진 나노봇(nanobot)의 파괴력은 스스로를 증가시키는 자기복제 능력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증대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실험대가 전쟁터였던 점을 감안해볼 때, GNR 테크놀로지의 실험대 또한 전쟁터가 되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된다. 20세기에 들어 인류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여 개발되기 시작한 NBC 테크놀로지를 살펴보자면, 핵기술이 핵무기로, 생물공학이 생체무기로, 화학공학이 화학무기로 실용화되어, 결국에는 인류에게 오히려 가장 큰 피해와 위협을 주게 된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 미치는 범위와 강도에서의 시대적 차이는 있겠으나, 세계 정치군사적 갈등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음을 볼 때, 21세기 GNR 테크놀로지의 가장 활발한 적용 현장 또한 전쟁터가 되리라는 것을 예상해보는 것은 크게 틀린 견해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NBC 테크놀로지에 대한 우려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GNR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대하여도 다분히 우려하는 입장을 표명하게 되었으며, 실질적으로 그 발전의 방향과 속도에 대하여 제동을 거는 목소리로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이러한 우려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NBC의 발전 속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속히 발전해가는 GNR의 발전 양상은, 마치 그동안 닫혀있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한, 걷잡을 수 없는 위험한 상황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예견들을 낳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과는 달리, 21세기 첨단 GNR 테크놀로지가 인류에게 줄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오히려 발전의 속도를 높여야한다는 입장이 현대 과학자들과 미래 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들의 논리에 의하면, 물론 GNR이 이전의 NBC가 주었던 것 못지않은 피해와 위협을 인류에게 줄 수도 있겠으나, GNR의 놀라운 기술력이 인류에게 줄 수 있는 혜택이 워낙 크기에, 상대적으로 볼 때 줄 수 있는 혜택이 미칠 수 있는 피해와 위협을 훨씬 능가할 것이며, 결국에는 그 피해와 위협까지도 극복해낼 것이므로 GNR은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합당하다. 이러한 긍정적인 입장에 힘입어 GNR이 그간의 우려의 목소리를 점차 뒤로한 채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21세기에 들어 각 국가 간에 일어나는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세계화 경쟁 구도 속에서 GNR 테크놀로지를 얼마나 소유하고 있으며 얼마나 진전시켰느냐가 그 국가의 발전 지수를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로서 점점 더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GNR을 총체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21세기 최첨단 테크놀로지 발전 프로젝트 중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미래 인간(posthuman)을 구현하려는 프로젝트일 것이다. 1960년 MIT의 존 맥카시(John McCarthy)에 의하여 처음 제시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을 향한 열망은 AI 프로그램을 구축하도록 만들었으며, 21세기에 들어와 첨단 테크놀로지인 GNR의 힘을 얻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명실 공히 21세기를 대표하는 최신 과학 프로젝트가 되었다. GNR의 총체적인 최고의 결과물이 AI라는 표면적인 이유 이전에, AI 프로젝트가 이러한 위치에까지 이를 수 있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AI 프로젝트야말로 모든 테크놀로지의 주체인 인간 스스로의 가치와 능력을 최대한도로 발휘시킴으로써 과학을 통하여 이루고자하는 인간의 욕구를 현실적으로 가장 잘 충족시킬 수 있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AI 프로젝트로 추진되는 미래 인간의 구현은, 우선 인간의 육체적 조건을 최상의 상태로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테크놀로지를 통칭하여 HET(Human Enhancement Technologies)라 부를 수 있겠으며, 그 적용 범위는 간단한 성형수술로부터 시작하여 인공피부, 인공의족, 인공심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인간의 신체부위를 대체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다. 물론 HET의 중심부에 GNR이 있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GNR을 통하여 인간의 육체적 조건을 최대한도로 증대시키는(enhance) 데에 가장 방해가 되는 요소는 질병이다.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은 AI 프로젝트가 GNR을 통하여 인간의 육체적인 부분을 강화시키기 위해 이루어 내고자하는 일차 목표이다. 이 목표를 이루고자 유전학은 게놈 프로젝트를 통하여 인간 질병의 근원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오고 있고, 나노기술은 나노봇을 이용하여 질병의 요소들을 제거하려고 애써오고 있으며, 로봇공학은 질병으로 인하여 손상된 신체부위를 기계로 대체해주려고 힘써오고 있다.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일차 목표를 달성한 후 AI 프로젝트가 추구하는 다음 목표는 ‘수명의 연장’이다. 최근 보험회사들이 선전문구로 사용하기 시작한 ‘인간 수명 100년 시대’라는 식의 표현은 20세기 테크놀로지 수준에서는 쉽게 사용할 수 없었던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이 현실적으로 실감나도록 해준 공로를 21세기 최신 테크놀로지에게 돌리려는 것에 특별히 반대할 현대인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AI 프로젝트가 추구하는 수명 연장이라는 목표의 도달점이 결코 100년 수준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수명의 연장이란 가능한 한 오래 사는 것을 뜻하고 있기에, 이 목표의 완성은 인간의 수명을 지속적으로 연장하여 결국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려는데 있다. 바로 불사(不死, immortality)를 향한 열망, 이것이야말로 AI 프로젝트가 21세기 첨단 GNR 테크놀로지를 통하여 품고 있는 강한 열망이요 궁극적인 목표이다.

3. 미래 인간과 구원

미래 인간을 구현하려는 AI 프로젝트가 첨단 테크놀로지의 힘을 얻어 추구하고 있는 최종 목표가 ‘불사’라는 사실은, 종교인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20세기 NBC 테크놀로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과학의 놀라운 진보는, 그동안 일반적으로 ‘생명윤리(학)’(bioethics)라는 주제 아래 과학과 종교 사이에 수많은 논쟁을 일으켜왔다. 그동안 논의되어온 생명윤리의 논쟁들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논쟁의 초점이 생명의 시작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생명을 인간 스스로가 다루려는 과학자들의 실험 자체가, 생명의 시작은 감히 인간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초인간적 범주에 속해있다고 믿는 종교인들에게는 종교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다. 특별히 생명의 근원을 신에게로 귀결시키는 창조 신앙을 가진 종교인 기독교나 이슬람 교인들에게 있어서, 생명의 시작을 인공적으로 조작하려는 과학자들의 행동은 분명 창조신에 대한 도전이요 기본 신앙인 창조 신앙을 위협하는 행동이다. 이러한 논의 속에서 이슈가 되어온 주제들은 임신, 태아, 시험관, 줄기세포, 유전자조작, 복제 등이다. 이 주제들에 대한 논쟁의 흐름을 한마디로 말하면, 생명의 근원에 대한 종교(신)와 과학(인간)의 갈등이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제시되는 기독교 신학의 사상적 핵심은 창조론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기에 창조된 인간의 생명은 창조자인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어야지 피조물인 인간에 의해 조작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 생명윤리의 논의가 생명의 시작에 주된 관심을 두었다고 하여 생명의 끝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낙태, 자살, 사형, 안락사와 같은 윤리적 이슈들은 생명의 끝에 대한 기독교적 생명윤리의 논의를 진전시켜왔다. 그러나 이러한 이슈들에 대한 기독교의 사상적 대응 역시 대부분 창조론에 맞추어져 왔다. 생명의 시작이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창조된 생명을 끝내는 권한 또한 창조자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창조론을 통하여 풀어내어야함은 사실 당연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동안의 생명윤리에 대한 이슈들은 주로 생명의 시작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그에 대응하기 위한 기독교의 사상적 핵심은 창조론이라고 정리해볼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그동안의 생명윤리의 이슈들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이 거의 대부분 현세적인 것, 즉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에 치중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다른 종교들과 비교해볼 때, 기독교는 현세적이며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을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다. 이 세상도 중요하나 궁극적으로는 현세를 넘어서 저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종교가 기독교이다. 눈에 보이는 것도 중요하나 종국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을 소망하는 종교가 기독교이다. 이를 앞서 살펴본 사상적 논의와 연결시켜 보자면, 기독교는 창조론으로 시작하여 구원론으로 이어짐으로써 완성되는 종교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생명윤리의 논의와 연관시키자면, 생명의 시작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창조 신앙을 바탕으로 하되, 창조된 생명의 끝은 이 육신적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되는, 그럼으로써 지상의 생명이 천국의 영생으로 이어지는 심오한 종교가 기독교이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의 창조론은 구원론과 잇대어 있으며, 진정한 창조론은 항상 현세와 내세, 육과 영, 생명의 시작과 끝을 함께 품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들을 염두하고 보면, 그동안 생명윤리의 논쟁 속에서 테크놀로지가 생명의 시작에 주된 관심을 두고 현세, 육체, 보이는 것에 치중하면서 주로 기독교의 창조 신앙에만 도전해왔다는 사실은, 그러한 도전이 정말로 위협적이며 총체적인 도전이었다고 말하기 어렵게 만든다. 엄밀히 말하면, 이제까지의 도전은 반쪽짜리 도전이었다. 도전이 반쪽짜리이니 그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대응도 반 정도에 그칠 수 있었다. 즉 하나님이 만드신 보이는 이 세상에서의, 육체에 깃든 생명에만 집중하면서, 생명의 시작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음을 주로 창조론을 통하여 창조 신앙을 재확인함으로써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21세기 첨단 테크놀로지가 생명의 시작을 넘어서서 생명의 끝에까지 본격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기독교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20세기 공상 과학소설에서나 등장하던 불사인(不死人)에 대한 동경이 21세기에 이르러 미래 인간 구현을 위한 AI 프로젝트를 통하여 과학자들의 현실적인 최종 목표가 되었다는 사실은, 과학의 역사에 있어서도 가히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테크놀로지의 1차 목표인 질병으로부터의 해방과 2차 목표인 인간 수명의 연장은 분명 20세기적, 즉 현세적, 가시적, 물질적 목표였다. 그러나 3차 목표인 불사 곧 죽지 않음은 21세기적, 즉 내세적, 가상적, 정신적 목표이다. 이에 대한 신학적 대응에 있어서, 테




신학사상 2013년 여름호(161집) 차례
신학사상 2012년 겨울호(159집)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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