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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연 
 신학사상 2013년 가을호(162집) 차례


이번 호에는

구약학에서 김래용 협성대 교수의 “스바냐서에 나타난 미쉬파트 연구”는 신약성서에도 422번 나타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공도, 정의, 율례, 법규, 판결, 규례, 법도, 재판, 법, 사연, 송사, 관습, 제도, 식양, 풍속, 심문, 직무 등)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구약 스바냐서에 미쉬파트는 네 번밖에 나오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주목해서 이에 대한 연구를 했다. 한다. 스바냐서에서 ‘미쉬파트’는 스바냐서의 두 개의 핵심 주제인 ‘야웨의 날’과 ‘남은 자’ 사상과 연결되어 야웨의 진노의 날을 피할 수 있는 선결요건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고, 또한 남은 자들로 정의되는 겸손한 자들이 우선적으로 행해야 하는 본질적인 것으로 묘사됨을 밝혔다.

신약학에서 김판임 세종대 교수의 “예수의 비유를 통해서 본 하나님의 정의”는 세가지 비유, 곧 노동과 임금(포도원주인의 비유), 부채탕감(탕감 받았으나 탕감해주지 않는 종의 비유), 부채 삭감(불의한 청지기 비유) 등 구체적인 경제 문제를 다루고 있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세 차원에서 밝혀보려 했다.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방법은 어떠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 때문에 실현되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조직신학에서 오승성 한신대 외래교수는 “하버마스의 공론장과 기독교 신앙 -기독교 전통 중심의 공공신학을 위하여”의 논문에서 하버마스는 공론장에서 공적 이성을 함양하려고 하지만 공동체의 덕을 함양하는 연대감과는 본질적인 관련이 없다고 이해한다. 이점에서 다문화 사회로 접어든 우리 사회가 무엇보다 필요로 하는 것은 차이와 다양성까지를 포용하도록 하는 연대감인데, 이것은 차이와 다양성을 아우르는 성육신 신앙에서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가 가진 특수한 종교 전통을 비판적으로 유지하면서 공론장에 참여하여 공적 이성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오갑 그리스도대 교수는 “한국교회의 유아기성에 대한 분석과 처방: 프로이트와 종교개혁 신학의 관점으로”의 논문에서 한국교회의 문제를 프로이트의 관점에서 유아기성에서 찾는다. 한국교회가 유아기적인 이유는 프로이트의 관점으로 설명될 수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신은 두려우면서도 매력적인 유아기의 아버지가 외부에 투사된 존재이다. 사람들은 그 신 앞에서 두려워하며 동시에 자신의 보호자의 역할을 맡기면서 의존한다. 그런 프로이트의 신이 바로 한국교회의 하나님과 흡사하다.
  한국교회 역시 전능하고, 강하고, 두려운 하나님을 강조한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불안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고, 하나님을 선포하고 대리하는 교회나 목사를 떠나지 못하고  자유인이나 주체가 아니라 교회의 종으로 예속되어 살아간다. 이런 한국교회의 유아기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만 의인이 되고 구원받는 종교개혁 신학의 재발견과 수용이 필요하다.

교회사에서 정병식 서울신대 교수는 “바티칸 단편』(Vatikanisches Fragment)에 나타난 루터신학 연구 -시편 4편을 중심으로”의 논문에서 1516년에 쓰인 루터신학의 중요한 원자료인 소위 “바티칸 단편”(Vatikanisches Fragment)을 연구를 통해 당시 루터 신학의 내용과 성격을 규명하고, 루터의 주해방법론, 기독론, 인간론, 신앙론, 참회 등 주요 주제 연구하여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의 발전과정을 고찰했다.

이국헌 삼육대 교수의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 이해와 경제 정의” 논문은 니버의 경제정의에 대한 연구이다. 그는 니버의 사회정의 활동에는 경제정의, 즉 경제민주화에 대한 관심이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이론을 통해 현재 논의되고 있는 경제정의에 대한 사상을 공유할 수 있다고 본다. 니버의 기독교현실주의 경제정의의 개념은 두 범주로 요약된다. 첫째, 그는 사회민주주의의 입장에서 경제민주화를 경제정의의 중요한 요소로 보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둘째, 1940년대 후반에 그는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진정한 대안으로서 복지자본주의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니버의 경제정의에 대한 이해는 자본주의 4.0의 시대인 21세기 경제윤리 패러다임에 어느 정도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철 숭실대 교수는 기독교사회학 분야 연구로 “물신주의 현상에 대한 기독교사회학적 연구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 이론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오늘날 기독교신앙에 도전을 가하고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물신주의에 대해 슬라예보 지젝의 관점에서 그 문제를 분석했다. 그는 이 시대는 다른 종교의 이방 신들보다도 더 강력하게 물질이라는 신이 맹위를 떨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더 조심해야할 우상은 타종교의 신이 아니라 물질, 경제, 풍요라는 우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슬라예보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중심으로 이 물신 현상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분석하고, 기독교가 이에 대해 취해야 할 비판과 대안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황원숙 경일대 교수는 종교시 분야에서 “찬송 가사로서의 시편 번역: 존 밀턴의 시편 번역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통해 밀턴의 시편 번역의 뛰어난 언어적 능력보다 그의 시편의 시적 표현과 음률을 살리는 번역에 주목했다. 밀턴이 초기 습작시절부터 시작한 시편의 번역은 같은 시대, 같은 나라 사람들이 같은 언어로 번역한 것에 비해서 음악적인 면에 충실한 번역이다. 황 교수는 신학과 시적 자유를 결합한 밀턴처럼 우리나라에도 예배 찬송에 시편의 전승을 더 많이 도입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으로 시편의 음악적 사용의 범위를 넓혀주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편집후기

우리나라에서 교회는 점점 더 빛을 잃고, 신학도 하나님의 지혜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르게 실천하는 신앙의 안내자가 아니라 과거 주지주의, 교리주의 범주 안에서 안주하고 있기 때문에 생명력을 상실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8편의 논문 연구자들은 교회와 신학의 바른 길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과 이를 활용한 새누리당의 국기문란 및 국정농단에 대해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기독교, 가톨릭, 불교, 원불교의 성직자들이 선언문을 발표하고 이런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종교의식을 잇 따라 거행하고 있다. 또한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도 전국적으로 번져가고, 일반시민들은 물론 심지어 고등학생들도 촛불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 대화의 해법이 아닐 때 촛불은 그냥 꺼지지 않고 횃불이 될 수 있다. 현재 국민은 이 문제보다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시급하기 때문에 아직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지 않지만 이 문제와 민생문제가 겹치면 사태가 심각해질 수 있다.

우리 사회는 교회를 향해 찬송가 가사처럼 “믿는 자여 어이 할꼬”를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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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논문
김래용 ․ 스바냐서에 나타난 미쉬파트(jP'v.mi) 연구
김판임 ․ 예수의 비유를 통해서 본 하나님의 정의
오승성 ․ 하버마스의 공론장과 기독교 신앙 -기독교 전통 중심의 공공신학을 위하여
이오갑 ․ 한국교회의 유아기성에 대한 분석과 처방: 프로이트와 종교개혁 신학의 관점으로
정병식 ․ 『바티칸 단편』(Vatikanisches Fragment)에 나타난 루터신학 연구
             -시편 4편을 중심으로
이국헌․ 라인홀드 니버의 인간 이해와 경제 정의
이   철․ 물신주의 현상에 대한 기독교사회학적 연구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 이론을 중심으로
황원숙․ 찬송 가사로서의 시편 번역: 존 밀턴의 시편 번역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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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1

물신주의 현상에 대한 기독교사회학적 연구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 이론을 중심으로


이 철(숭실대 교수/ 기독교사회학)



초록:

  오늘날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경제와 물질은 거대한 파도처럼 우리 사회와 개인들에게 몰아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파고가 높은 이때, 경제와 물질을 숭상하는 물신주의는 교회와 신앙에 대해서도 지대한 도전을 감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나 신앙인들은 하나님이나 성서의 권위나 힘 보다는 세상의 물질에 더욱 휘둘릴 수가 있다. 본 논문은 이러한 상황을 반추하면서 오늘날 기독교신앙에 도전을 가하고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물신주의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 이 시대는 다른 종교의 이방 신들보다도 더 강력하게 물질이라는 신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더 조심해야할 우상은 타종교의 신이 아니라 물질, 경제, 풍요라는 우상이라는 것이다. 이 물신 현상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분석하고, 기독교가 이에 대해 취해야 할 비판과 대안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이 주제에 대해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라캉(Jacques Lacan)의 정신분석학, 마르크시즘, 헤겔 철학을 접목시키면서 접근한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이론, 특히 그의 대표작인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주제어:
물신주의, 프로이트, 라캉, 지젝, 마르크시즘, 이데올로기





1. 들어가는 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대한 대답이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던진 곳은 ‘빌립보 가이샤랴’ 지방이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중요한 질문을 이곳에서 하셨을까? 이 질문이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이었던 가버나움에서 북쪽으로 40Km 정도 떨어진 이곳에서 제기된데에는 어떤 숨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이는 이곳이 특별한 지역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가이샤랴’는 ‘가이사’ 곧 로마 황제의 칭호에서 왔다. 기원 전 1세기경에 헤롯대왕은 로마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며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이곳에 왕궁과 성전을 세우고 이름을 ‘가이샤라’라고 칭하였다. 그 후 이 지역은 헤롯대왕의 아들 필립(빌립보)이 관할하게 되었는데, 그는 지중해에 건설된 항구도시인 ‘가이사랴’와 이곳을 구별하기 위해 개명을 시도하였고, 결국 ‘가이샤라’라는 이름에 자신의 이름인 ‘빌립보’를 첨가하였다. 이곳은 당시 세계 제국인 로마의 황제와 이스라엘의 왕가의 권세와 통치가 공개적으로 인정되고 칭송되던 장소이었다.
  한편, 이곳의 원래 이름은 파니아스(Panius)이었다. 이곳이 그렇게 불렸던 이유는 이곳이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가축과 목자의 신인 판(Pan)신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가축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자들에게 이곳은 자신들의 부와 경제를 지켜주고 세워줄 중요한 지리적 장소이었다. 이 때문에 이곳에서는 지속적으로 판신을 숭배하고 제사를 드리는 예배가 드려졌는데, 고증에 따르면 대리석으로 만든 웅장한 신전이 세 채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판신 외에도 제우스와 헤르메스에 대한 제사도 이곳에서 함께 드려졌는데, 판신은 제우스의 아들인 헤르메스가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파니아스라고 불리기 이전의 이곳 이름은 발리나스(Balinas)이었다. 시기적으로 구약시대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이 지명이 발리나스인 이유는 이곳이 풍요의 신인 바알을 예배하던 중심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구약 성서를 통해 잘 알려진 바알 종교가 어떤 목표를 위해 숭배되었는지는 이미 익히 잘 숙지된 바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이곳은 황제와 왕의 도시, 경제와 물질의 도시, 또한 풍요의 도시 였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에서 데리고 온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물어본 것이다. 이를 오늘날로 바꾸어 말해 본다면,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워싱턴에서, 라스베이거스에서 예수님의 존재와 능력에 대해 물어본 것이다. 예수님의 위상과 힘에 대해 인정하기 쉽지 않은, 그보다는 오히려 부인하기 쉬운 곳에서 베드로는 용케 제대로 고백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고백이 쉽지 않았음을 알고 있고 그리하여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질문은 오늘날에도 반복적으로 제기된다. 오히려 어쩌면 지금 이곳이 이 천년 전 빌립보 가이샤랴에서보다 재대로 대답하기 더 힘들지 모른다.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진 국가, 극으로 치닫는 물질/경제 만능주의, 깊어지는 향락과 풍요의 매혹 등이 만들어내는 현실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이나 권위는 쉽게 잊히고 부인된다. 본 논문은 이러한 상황을 반추하면서 오늘날 기독교신앙에 도전을 가하고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물신주의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 이 시대는 다른 종교의 이방 신들보다도 더 강력하게 물질이라는 신이 힘을 떨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우상은 타종교의 신이 아니라 물질/경제/풍요이다. 이 물신 현상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분석하고, 기독교가 이에 대해 취해야 할 비판과 대안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이 주제에 대해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라캉(Jacques Lacan)의 정신분석학, 마르크시즘, 헤겔 철학을 접목시키면서 접근한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이론, 특히 그의 대표작인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기독교적으로 평가하고자 한다.

2. 물신주의 분석

  지젝이 자주 사용하는 예화가 있다. 공장에서 매일 무엇인가를 훔쳐내 간다고 의심을 받는 노동자가 있었다. 경비원은 그 노동자가 퇴근할 때마다 그가 끌고 가는 수레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수레 안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노동자가 훔쳐가고 있는 것은 바로 수례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지젝은 이 예화가 주는 암시를 여러 경우들에 적용하여 사용하는데 우리는 물신주의 분석에서도 이 예화를 동일하게 활용할 수 있다. 물질 혹은 상품이 물신적 위치나 힘을 갖게 되는 것은 물질/상품 안에 있는 어떤 내용 때문이 아니라 물질/상품 그 자체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물신화의 이유를 해당 물건 안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되는 어떤 내용(질, 디자인, 또는 가격)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제거하고 상품 그 자체, 더 자세히 말하면 상품 형식 그 자체에 있는 비밀을 찾아내야 한다. 지젝은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상품 물신화 분석의 핵심 내용이라고 지적한다. 지젝은 동일한 내용의 것이 프로이트의 꿈 분석에서 반복되어 나타난다고 언급한 후 이를 근거로 ‘증상’ 개념을 고안한 학자가 마르크스라는 라캉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이제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 숨어있는 사회계급

  라캉에 따르면(그리고 지젝 역시 주장하길) 꿈에 대한 해석에서 프로이트가 주목한 것은 꿈의 내용(수레 안)이 아니라 꿈의 형식 그 자체(수레)이었다. 그럼에도 다수는 이에 대한 곡해로 인해 프로이트의 꿈 해석 이론을 비판한다. 다시 말해, 이들은 꿈 내용에 주목한 것이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는 ‘범성욕주의’와 관련된 꿈 해석이다. 이들은 프로이트가 무의식적인 범 성욕주의를 주창했기에 꿈속에서 표현되는 욕망에서도 성적인 본능이 나타나야하는데 꿈에 대한(정확히 말하면, 꿈 내용에 대한) 분석에서 그러한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이 지적한 모순은 전형적으로 꿈 내용과 꿈 형식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론적 실책으로 인해 초래된 결과이다. 프로이트는 꿈 형식에 대한 분석과 관련하여 ‘전치’와 ‘응축’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간단히 말해, 전치는 다른 어떤 것으로 대치된다는 것이고, 응축은 여러 가지 것들이 하나로 압축되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꿈을 내용 그대로 분석한다는 것은 꿈의 형식 구조인 전치와 압축을 간과한 분석이라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이다. 한편, 전치와 응축은 무의식적으로 발생하는 것이기에 개인이 이를 의식적으로 인식하거나 간파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분석자의 도움이 요청된다.
  동일한 과정이 라캉의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있다’는 명제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 여기서 라캉이 주목한 것은 언어의 내용이 아니라 언어의 형식이다. 따라서 내담자의 무의식을 살펴보려는 분석자는 내담자의 언어 내용에 어떤 ‘비밀’이 있다고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그가 관심을 두고 분석하는 것은 내담자의 말 속에 나타나는 언어 형식이다. 라캉이 관심을 둔 언어 형식은 ‘은유’와 ‘환유’이다.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의 이론을 빌려온 이 두 용어는 각각 프로이트의 전치와 응축에 대응한다. 따라서 분석자는 내담자의 언어에 나타난 은유와 환유에 주목하면서 증상을 분석해야 한다. 동일하게, 은유와 환유는 무의식적으로 발생하므로 내담자는 은유 및 환유적으로 움직이는 무의식적 사고에 대해 인식, 인지하기 어렵다.
  지젝은 동일한 과정이 물신 현상에서도 다시 반복 된다고 말한다. 물신주의를 분석하기 위해 물건의 질, 디자인, 기능, 가격 등과 같은 것들(곧 물건의 ‘내용’)에 주목한다면 우리는 다시 실책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이러한 것들 안에 상품이 물신이 되는 ‘비밀’이 존재한다고 보곤 하는데, 이러한 오인은 상품 내용과 상품 형식 그 자체를 구분하지 못하는데서 기인된다. 더 나아가, 상품 물신화의 원인이 상품과 상품간의 상대적이고 대비적인 관계(예: A보다 질이 좋고 비싼 B), 곧 사물들 간의 관계에 있다거나, 상품을 생산되기 위해 뒤에서 필요했던 노동의 가치 차이로부터 기인된다고 보는 것 역시 오인이다. 지젝은 이것 모두가 상품 내용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것들보다는 상품 형식 그 자체, 보다 정확히 말해 상품에게 물신성을 주입하고 물신화를 발생시킨 형식(혹은 구조)을 살펴보아야하고 하고, 바로 여기서 물신주의의 ‘비밀’이 있다고 말한다.
  이 형식 구조를 살펴보기 위해 지젝은 헤겔의 ‘주인과 종의 변증법’과 유사한 ‘왕과 신하’의 관계를 언급한다. 이는 그가 상품 물신을 ‘인간의 눈에는 사물들 간의 관계라는 환상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만, 사실상은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근거하여 분석하기 때문이다. 주인이 주인일 수 있는 이유는 종이 있기 때문이듯이 왕은 신하가 있기 때문에 왕이다. 왕과 신하 간에는 이러한 의존 관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하는 왕이 이러한 관계와 상관없이 이미 그 자체로 왕이기 때문에 충성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왕 자체 안에 왕일 이유나 속성이 있는 것처럼. 지젝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왕으로 존재하는 것’을 결정한 것은 왕 개인의 ‘자연적인’ 속성이라는 듯이 말이다.” 이 전도된 오인 속에서 신하와 왕의 상관관계(의존관계)는 숨겨지고 ‘왕’은 왕의 자리로 등극한다.
  물신화 역시 전도된 오인 과정을 거친 결과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살고 있는 소비자들은 상품이 ‘신’이 되는 것이 상품 내용으로 인해(즉, 상품 내용 안에 그것을 ‘신’으로 존재하도록 결정하는 어떤 속성이 있음으로 인해 혹은 그 상품이 다른 상품에 대해 갖는 상대적 가치로 인해) 초래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품의 물신화 과정은 이 같은 상품들 간의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들 간의 관계(신분관계)에 의해 진행되고 결정된다.(이에 대해서는 바로 아래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물신화가 상품들 간의 관계의 효과라고 생각하는 오인 과정으로 인해 실제 요인인 인간들 간의 관계는 의식되지 못한 채 물신 현상 뒤로 ‘억압’되어 숨어버린다. 그리고 이 오인과 억압은 무의식적으로 실행되고 처리된다. 그리하여 상품의 물신화는 마치 상품과 관련된 인간들의 관계와는 상관없는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물신화된 상품은 인간관계(신분관계, 계급, 지위)로부터 자유로운 듯이 행동하는 것이다.
  이제 A라는 물건의 물신화에 대해 살펴보자. 물건 A가 물신화되는 과정에는 A라는 물건과 관련하여 그것을 소유한 계급과 그렇지 못한 계급(쉽게 말해, 부르주아와 노동자)간의 간극이 존재한다(더 정확히 말하면, 존재해야 한다). 물신화는 A라는 물건에 대한 부르주아와 노동자 간의 차이나 구별이 만들어낸 효과이기 때문이다. A라는 물건이 ‘신’의 위치까지 올라간 것은 그것에 대한 ‘접근성’에서 있어 두 계급 간에 나타나는 차이 때문이다. 이를 역설적으로 서술하면, 부르주아나 노동자가 모두 동일하게 접근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은 물신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또한 노동자가 소유하는 상품 역시 물신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단지 부르주아가 갖는(그러므로 향유하는) 상품만이 물신의 대상으로 떠오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물신화는 물건의 내용이 아니라 물건의 형식이나 구조(물건에 대해 인간들 간에 맺는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의거한다는 것이다. 이 같이 특정한 상품 이면에는 항상 특정한 사회적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작용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무의식적으로 처리되어 결국 ‘억압’되고 숨겨진다. 그래서 분석가(사회학자, 철학자 등등)는 이를 밝혀내어 내담자(소비자)에게 필요한 설명을 제시한다.
  이상의 내용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라캉의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명제를 빗대어 “상품은 인간관계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따라서 무의식 혹은 무의식으로 인해 나타나는 심리적 증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특히 은유와 환유)를 분석해야 하듯이, 상품 물신화라는 사회적 증상을 살펴보려면 상품과 관련된 인간들 간의 관계를 해석해 내야 한다. 마르크스와 라캉, 이 둘에게 있어 해석의 대상, 곧 증상은 상이하였지만, 그 증상의 인식이나 분석을 수행하는데 있어 ‘내용’ 보다는 ‘형식(구조) 그 자체’에 주목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는 서로 동일한 관점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주장될 수 있다. 그래서 라캉은 증상의 개념을 고안한 학자가 마르크스라고 언급한 것이다.

2) 환상 대상으로서의 물신

  라캉의 지적 궤적을 따라가면, 증상 이후에 환상 이론이 나타난다. 환상은 라캉 이론에서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매우 매혹적인 이론으로 라캉 이론가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환상 이론은 다양한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다루어질 수 있지만 여기서는 물신과 관련된 환상에 대해서만 살펴보자. 라캉이 환상에 주목하게 된 것은 내담자에게 증상의 의미를 분석하여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증상이 사라지지 않은데 있었다. 라캉은 그 이유를 환상이 주는 향락에서 찾는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내담자는 자신의 증상의 원인(혹은 의미)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분석가는 내담자가 소지하고 있는 증상의 ‘기표’들을 은유와 환유의 방식으로 관찰하면서 그 안에서 대표적인 원인이 되는 기표, 곧 ‘주인기표’를 찾아내어 그것을 ‘고정점’으로 하여 다른 기표들을 연쇄시키면서 증상을 분석해 낸다. 이 모든 과정은 소급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를 ‘사후 작용’이라고도 일컫는다. 이 소급 작용을 통해 증상은 이해할 수 있는 의미로 내담자에게 제시된다.
  이를 우리의 주제인 물신화 증상과 연결시켜 예를 들어보자. 끊임없이 옷을 구입하는 여성 쇼퍼홀릭(shopaholic)이 있다고 하자. 그녀는 필요 때문에 옷을 구입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계속 옷을 구입할 충분한 재정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위의 만류와 핀잔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옷을 구입한다. 이 여인을 프로이트가 자주 언급한 ‘엠마’ 사례 방식으로 접근해 보면, 그에게는 어린 시절 옷과 관련된 어떤 것(혹은 일)로 인해 수치나 고통을 겪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때 그녀는 그 사건의 의미를 충분히 알 수 없는 시기이었기에 그 때 느낀 경험이나 감정은 무의식 속으로 억압된다. 그런데 프로이트와 라캉이 지적하듯이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하면서 증상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증상은 내담자가 성장하면서 해당 사건의 의미를 알게 된 이후에 나타난다. 그리하여 그녀는 증상의 하나로서 옷 쇼퍼홀릭의 삶을 산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왜 증상을 반복적하면서 살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또한 멈출 수도 없다. 자신의 의식과 의지를 넘어선 무의식적 차원이 그녀의 쇼퍼홀릭적 삶 안에 존재,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상담자만이 그녀가 보여주고 말하는 기표들의 분석을 통하여 증상을 해석 한 후 이를 내담자에게 제시한다.(이 논문의 주제에 맞춰 말한다면, 그 증상이 상품 내용 혹은 물질들 간의 관계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었던 상처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 간의 신분 관계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밝혀준다) 내담자는 이것을 가지고 이전의 관련된 모든 사건의 경험들을 조망, 조직하면서(다시 말해, 증상의 원인과 결과를 연결시키면서) 증상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소급적으로 작용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실은 원인이 결과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그 역이 오히려 사실이며, 지젝의 표현을 따르면 분석이 ‘진리’를 생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담자는 이 ‘진리’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증상을 이해한다.
  문제는 내담자가 이 과정을 통해 증상의 원인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증상이 사라지지 않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 내담자는 계속 옷 쇼퍼홀릭의 삶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라캉은 그 이유를 향락과 관련된 환상이 그 증상 안에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지젝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완전한 해석이 이루어지고 나서도 주체는 자신의 증상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환상 때문에 주체가 자기 자신보다 증상을 더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환상이 무엇이기에 자신을 괴롭히는 증상도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 한 가지 이유지만 두 가지로 나뉘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환상은 타자(사물 혹은 사람) 안에 있는 공백을 채우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상징계(언어계) 안으로 태어난 모든 대상은 언어의 한계로 인해 분리, 결여되고 ‘빗금 쳐진’ 대상이 된다. 상징계조차도 역시 동일하게 불완전한 체계이다. 환상(혹은 환상 대상 a)은 타자의 이 같은 결여나 공백을 채워 타자가 마치 ‘완전함’ ‘충만함’ ‘일관성’ ‘영속성’ ‘통합성’ ‘균질성’ 등과 같은 속성들을 갖춘 것으로 인식하도록 한다. 이는 왜상(歪像, anamorphosis) 효과이다. 그러나 주체는 이를 제대로 응시하지 못한 채 환상이 만든 타자를 욕망하고 그 타자를 소유하거나 동일시하려 한다. 이를 통해 주체가 기획하는 것은 자신의 결여와 욕망의 공백 또한 채우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계에서 결코 가능한 것이 아니다. 상징계 자체가 결여와 공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환상은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래서 개인들은 환상을 쫓고 또한 환상이 깨지기도 한다.
  환상을 포기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 역시 주체의 결여와 욕망과 관계되어 있다. 만일 환상이 없다면 타자의 결여나 욕망은 주체에게 “견딜 수 없는 수수께끼”일 것이다. 다시 말해, 주체는 끊임없이 타자의 결여와 욕망에 대해 물으면서 그 공백을 대면해야 할 것이며, 동시에 자신의 결여와 공백 또한 감내해야 할 것이다. 환상은 스크린처럼 이러한 공백과 결여를 은폐해왔다. 그러나 이제 스크린이 거둬진다면 주체는 실재(혹은 균열되고 결여된 타자와 자기)를 직면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환상은 주체를 지켜주는 위치에 서있다. 다시 말해 환상을 통해 주체는 상징계 안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주체는 환상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지젝은 이에 대해 환상은 “현실을 왜곡한다. 동시에 현실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고 표현하였다
  이제 우리는 옷 쇼퍼홀릭 여성이 증상의 의미, 곧 반복적인 옷 구매 행위의 이유를 알고 난 후에도 왜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지 알 수 있다. 그녀에게 있어 옷은 환상(혹은 환상 대상 a)이다. 환상이 스며든 옷은 그에게 있어 단순한 옷이 아니라 ‘완전함’ ‘충만함’ ‘영속함’ 등이 기입된 대상이다.(옷 쇼퍼홀릭이 아닌 사람들이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에 빠진 남녀를 생각해보면 된다) 그녀는 옷(혹은 이성)에서 결여나 공백을 볼 수 없다. 그녀는 이 ‘완전하고 충만한’ 옷(이성)을 욕망하고 소유하고자 한다. 이 소유함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결여와 공백을 채울 수 있다고 보고 또한 채우려 한다. 한편, 이 옷은 그녀가 자신이나 타인의 결여나 공백을 대면하지 않게 할 수 있는 보호막이기도 하다. 그러한 결여나 공백이 이 옷으로 인해 가려짐에 따라 그는 상징계 안에서 자신의 삶(진정한 삶이 아니라 ‘실정적’인 삶)을 영위해 나가게 된다.
  이러한 환상에 대한 치유나 해결은 환상 횡단하기 혹은 거리두기라는 중요한 단계를 완수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라캉과 지젝은 보고 있다. 이러한 횡단과 거리두기를 통해 주체는 환상(환상 대상 a)이 “어떻게 타자의 빈 공간, 결여, 공백을 은폐하고 채우는지를 체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옷 쇼퍼홀릭에 적용하면, 그는 옷이 단순한 옷이 아니라 환상(대상 a)라는 것을 깨닫고 옷이 ‘충만함’이나 ‘완전함’을 줄 수 있다는 환상을 가로지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증상 해결에 더욱 요청되는 이유는 환상이 증상 해석을 방해하여 내담자의 치유를 지연시키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상품 물신화는 바로 이 같은 환상이 개입된 현상이라고 분석될 수 있다. 앞 장에서 분석하였듯이 물신화 증상은 물건들 간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들 간의 관계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그렇다면 물건 안에는 그 물건이 ‘신’적인 위치로 등극케 하는 어떤 본질적 가치나 속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증상 해석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물신주의를 벗어버리지 못한다. 환상이 그 안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물건으로 인해 자신이 마치 다른 사람들(대부분의 경우, 상위 계급인 혹은 광고에 나오는 ‘유명인’)처럼 행복, 기쁨, 보호, 만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캉이나 지젝이 물신화 증상에 대한 치유를 제시한다면 환상과의 거리두기 혹은 가로지르기일 것이다. 환상이 주는 것(정확히 말해, 줄 수 있다고 제시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그것은 단지 ‘환상’ 스크린이고 보호막이라는 것을 소비자들로 하여금 알게 하여 상품 물신 증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또다시 제기되는 문제는 환상을 횡단하고 거리두기를 수행하여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증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개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라캉이나 지젝은 이러한 증세에 대해 어떤 해석을 내릴까? 이는 다음 장의 주제이다.

3) 증환으로서의 물신 현상

  라캉은 이러한 증세를 증환(sinthome)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설명을 시도한다. 증환이라는 용어 혹은 증환으로서의 증상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개념이다. 많은 설명과 여러 오해가 존재한다. 증환에 대한 지젝의 표현을 인용해 보자.

증환으로서의 증상은 문자 그대로 우리의 유일한 실체, 우리 존재의 유일한 실정적 지탱물, 주체에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다. 바꿔 말해서 증상은 우리(주체들)가 ‘광기를 피할 수 있는’ 방법, ‘무(無)(근본적인 정신병적 자폐증, 상징적 세계의 와해) 대신에 유(증상-형성물)를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다. 증상[증환]은 향락을 어떤 상징적인 기표 형성물과 하나의 매듭으로 묶어줌으로써 우리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에 최소한의 일관성을 보장해 주는 방법인 것이다.

또 다른 곳에서 지젝은 이렇게 서술한다.

증환이 네트워크의 사슬 속에 매어 있지 않으면서 향락이 직접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어떤 기표인 이상, 그것의 위상은 당연히 ‘정신신체적’이다. 다시 말해 그 무엇도 표상하지 않고 그 누구도 대표하지 않으면서 혐오스런 향락을 입증하는 무언의 보증서일 뿐인 무시무시한 신체적 흔적인 것이다.

이상의 기술을 모두 완전하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거기서 증환을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중요한 단서들을 포착해낼 수가 있다. 먼저, 증환은 상징계의 네트워크의 사슬(상징계 기표 사슬, 더 포괄적으로 말해, 상징계) 속에 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증환이 라캉이 언급한 실재계와 관계된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재계는 상징계에서 벗어난 혹은 상징계가 포획할 수 없는 영역으로, 그곳은 기표의 의미화 작용이 멈춰진 공간이다. 이러한 사실을 더욱 지지해주는 것은 ‘정신신체적’이라는 지적, 그리고 이것은 ‘그 무엇도 표상하지 않고 그 누구도 대표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이는 증환이 상징계의 기표 작용에 의해 표상되지도 대표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증환이 칸트(Immanuel Kant)가 언급한 ‘물자체’(Das Ding an sich)와 유사한 실재계에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다음으로, 증환은 ‘우리 존재의 유일한 실정적 지탱물, 주체에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며 ‘우리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에 최소한의 일관성을 보장해 주는 방법’이라고 지적하였는데, 이 두 표현은 사실 동일한 것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곧, 증환은 ‘질병’의 일환으로, 그것은 혐오스럽고 외설적이고 위험하고 파괴적이지만 동시에 그것의 존재로 말미암아 존재(주체)는 지탱되고 (최소한의) 일관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라캉이 제시한 실재계의 본질과 기능에 정확히 부합된다. 실재계는 상징계를 언제든지 침투하여 훼파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실재계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상징계는 현재와 같이 유지되고 지속된다. 만일 이 실재계적 증환이 주체로부터 제거된다면 그는 존재의 일관성이나 존재를 보장해줄 지탱물을 상실하고 ‘무’(‘상징적 세계의 와해’) 또는 ‘광기’(죽음 충동이나 정신병적 자살)와 같은 것들을 대면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향락이 직접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혹은 ‘혐오스런 향락을 입증하는’ 증상에 대해 살펴보자. 여기서 지젝이 언급한 향락은 라캉의 주이상스(Jouissance)로, 고통 속에 쾌락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예는 여럿 있지만 이곳에 적합한 예는 ‘어머니의 육체’이다. ‘쾌락적이지만 동시에 외설적이고 혐오스럽고 위험하고 파괴적’일 수 있는, 그래서 고통적인 이 어머니의 육체는 유아가 엄마와의 2자 관계에서 가졌던 경험과 연관되어 있다. 상상계가 주로 장악하던 이 시기 때 유아는 자신의 요구에 충실하게 부응해주는 어머니를 나르시스즘적으로 전유하며 자신의 욕망을 좇아 쾌락을 즐긴다. 대상관계이론가 위니캇(D. W. Winnicutt)의 표현을 빌리면, 이때 유아는 어머니의 헌신으로 인해 ‘전능감’도 유지한다. 그러나 이러한 항유는 프로이트에 따르면 오이디푸스기에 진입함으로써, 라캉에 의하면 ‘아버지의 법’(혹은 상징계)의 개입으로 인해 금지당하기 시작한다. 라캉은 금지는 욕망을 일으킨다고 보았는데, 유아는 이로 인해 더욱 강한 쾌락과 고통의 양극단을 오가면서 이 시기를 보낸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 법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유아의 이 쾌락과 고통의 자극과 경험은 억압되어 무의식의 영역으로 밀려나 버린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억압된 것은 끊임없이 회귀한다. 문제는 이 억압된 욕망이 상징계에서는 허락될 수도 표상이나 대표될 수도 없는 ‘외설적이고 위험하고 파괴적인’ 충동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 고통스럽고 쾌락적인 향략(혹은 증환)은 상징계에서 배제된 채 실재계(혹은 넓은 의미의 무의식)를 떠돌면서 상징계의 진입을 열망한다. 이런 의미에서 향락은 ‘무언의 보증서’ 곧 상징계(언어계)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럼에도 존재한다는 증명서요, 유아기 때로 소급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신체적 흔적’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기표로 덮여지지 않으면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물질적인 잔여물로 남아 계속 회귀(출몰)하는 실재계적인 어떤 것이다. 지젝이 증환의 위상에 대해 ‘정신신체적’이라고 지적한 것은 바로 증환의 이 같은 실재계적 차원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같은 “소름끼치는” 잔여물을 “불가능한 향락(Jouissance)의 물질화”라고 불렀다.
  이제 한 가지만 더 언급하면 증환의 주요한 속성이 어느 정도 설명된다. 바로 증환과 상징계의 관계이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증환과 상징계는 의미적으로 연결될 수 없다. 증환이 상징계의 의미 체계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고, 이를 달리 말하면 상징계가 증환을 포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이 이렇다 하여 양자가 어떠한 연결 관계도 갖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인용된 지젝의 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한다. 비록 증환이 상징계의 기표 연쇄의 사슬(의미화 과정)에 매어있지 않다고 그는 지적했지만 그렇다고 이 말이 증환은 상징계의 아무 기표적 연결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증환은 상징계의 어느 한 기표에 묶여질 수 있다.(물론 기표 사슬의 연쇄에 맞물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 기표에 묶이는 것이므로 의미화 과정에 참여하거나 의미를 산출할 수는 없다) 이런 차원에서 지젝은 ‘증상[증환]은 향락을 어떤 상징적인 기표 형성물과 하나의 매듭으로 묶어줌으로써’라고 하였으며, 또한 ‘증환이 네트워크의 사슬 속에 매어 있지 않으면서 향락이 직접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어떤 기표’라고 기술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가 언급한 ‘증상-형성물’은 향락이 증환에 의해 어떤 기표와 묶여져 생성된 형성물로 보아야 하며, 이를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밖’으로는 기표를 갖고 있으나 ‘안’으로는 향락을 내포하고 있는 것, 그래서 ‘향락이 스며들어 있는 기표’가 된다. 우리는 지젝의 지적대로 이 ‘유’ 곧 ‘증상-형상물’ 혹은 ‘향락 기표’를 선택함으로써 ‘무’나 ‘광기’(실재계 차원)를 피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된 옷 쇼퍼홀릭을 예로 든다면 바로 옷이 ‘증상-형성물’ 혹은 ‘향락 기표’가 될 수 있다.
  한편, 왜 옷인가? 물론 어떤 것도 ‘증상-형성물’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상징계의 어떤 기표도 이를 위해 선택될 수 있다. 다만 이 내담자에게는 그것이 옷이었을 뿐이다. 여기서 집고 넘어갈 것은 증환과 그 ‘기표’ 간에는 아무런 본질적 혹은 직접적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소쉬르에 따르면 그것은 자의적이고, 프로이트에 따르면 전치와 압축이며, 라캉에 따르면 은유와 환유의 방식을 통해 그것들은 서로 묶여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옷일 수도 있고, 돈, 남자, 여자, 명품, 명예, 권력일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이 글의 결론 부분에 도달하였다. 물신주의라는 증세가 증상이나 환상의 차원을 넘어 증환으로까지 지속된다면 이것은 증상 분석이나 환상 횡단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이때가 되면 주체는 이미 어떤 특정 기표(혹은 증상-형성물)에 향락을 기입한 이후이다. 이런 증환은 주체에게 쾌락과 함께 고통과 위협을 줄 수도 있고 파멸을 불러 올 수도 있지만 동시에 주체로 하여금 현실 세계 내에서 최소한의 일관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 혹은 적어도 실재계를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않게 함으로써 상징계 내에서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는 것을 가능케 하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증환에 대한 분석가가의 치료는 어떻게 종결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소 모호하다. 어쩌면 완전한 대답, 완전한 해결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상징계(언어계)에 의해 빗금 쳐지고 분리된 존재들로, 결코 상징계 진입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고, 그렇다고 어떤 욕망(예, 어머니의 육체에 대한 욕망)에 대해서도 의미를 제공할 수 있는 완전한 상징계(메타 언어계)를 만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증환에 대한 분석 과정의 종결점에 대해 지젝은 라캉의 이론을 따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증환과 자신을 동일화 하라!(좀더 적극적으로 표현하자면, 너의 증환을 즐겨라!) 분석은 내담자가 “자기 증상[증환]의 실재 속에서, 자기 존재의 유일한 지탱물을 인정할 수 있는 순간에 종결된다.” 다시 말해, “당신은 그 ‘병리적인’ 특수성 속에서 당신 존재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어떤 요소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런 의미에서 프로이트의 유명한 명제, “Wo Es war, soll Ich werden.”을 새롭게 해석한다. 곧 여기서 Es는 증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증환이 있는 곳에 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분석은 종결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증환이 포기되거나 멈추어 질지는 의문이다. 지적하였듯이 우리는 이미 상징계에 진입하면서 이전에 전유하던 쾌락을 억압당했고, 완전한 상징계 또한 불가능하기에 증환은 원천적으로 피할 수 없는 증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개인이나 문화(상징계)에 따라 증세의 편차가 있을 뿐이라 하겠다. 결국 증환으로서의 옷 쇼퍼홀릭 증세는 포기되거나 치유되기가 쉽지 않다. 증환으로서의 물신주의 역시 동일하다.

3. 물신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비판 및 대안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을 재소환해 보자. 그녀는 남자와 다섯 번 결혼하였고 현재 여섯 번째와는 동거중이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행동이 수치인 것을 안다.(그래서 다른 아낙들이 물 길으러 오지 않는 정오에 우물가에 혼자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혹은 증상)를 포기할 수 없다. 다섯 번의 결혼 실패를 통해 남자에 대해 충분히 알았을 텐데도 그것을 포기할 수 없다. 단순한 증상일까? 만약 그렇다면 누군가 그녀에게 증상의 의미를 알려 주면 문제는 해결된다. 예를 들어, 남자(‘수레’ 안의 내용)가 아니라 다른 것(‘수레 그 자체’)에 주목하면서, 실제로 그녀가 진정으로 찾았던 것은 사랑 혹은 왕자 같은 남자였는데 그간 그녀는 결코 사랑도 줄 수 없고 왕자도 될 수 없는 ‘개구리’같은 남자들을 좇았다고 해석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 ‘개구리’(남자)를 좇는 증상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환상이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환상은 남자 안에 있는 공백이나 결여를 채우면서 그가 완벽하고 충만한 사랑을 갖춘 ‘왕자’라고(혹은 ‘왕자’로 변할 것이라고) 환상하고, 그로 인해 자신 역시 ‘공주’ 같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환상하는 것이다. 이런 환상은 환상의 본질을 깨닫고 가로질러지거나 거리두기를 하면 증상은 사라진다.
  그러나 만일 사마리아 여인의 증세가 증환 수준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성서의 내용은 이를 뒷받침할 어떤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미 다섯 번이나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남자와 동거한다는 사실을 볼 때 증환 증세가 있다고 주장될 수도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여인의 증세는 증상 해석이나 환상 횡단으로는 사라질 수 없다. 이미 불가능한 향략(주이상스)이 기표(여기서는 남자)에 직접적으로 스며들어간 상태이다. 물론 이 기표는 상징계의 기표사슬에 매어 있지 않기에 기표의 의미화가 불가능하여 기표(남자)를 해석하거나 그 여인에게 남자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 주는 것은 무의미 할 것이다. 향락이 이 기표와 하나의 매듭으로 묶어진 것은 순전히 자의적이거나 혹은 은유나 환유의 경로를 따라 결정된 것일 것이다. 따라서 그 기표가 반드시 남자였을 필연성은 없다. 결국 이 여인에게 남자는 ‘유’(증상-형성물)이고 그것의 위상은 ‘정신신체적’(실재계적)이다. 물론 이 남자 증환으로 인해 그녀는 ‘무’(상징적 세계의 와해)나 ‘광기’(죽음 충동이나 정신병적 자살), 혹은 좀 더 광범위하게 표현하면 실재계와의 대면을 피할 수 있고, 나름대로 그 사회 안에서 최소한의 일관성을 가지고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만일 라캉이나 지젝이 이런 상태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다면 면담은 어떤 내용으로 종결되었을까? 아마 그녀에게 “너의 증상과 너를 동일시하라!”고, 다시 말해 “너의 병리적인 특수성 속에서 네 존재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어떤 요소를 인정하라!”고 말하거나 그녀에게 “Wo Es war, soll Ich werden.”이라 말하였을지 모른다. 요점은, 증환의 원인과 결과를 깨닫고 수용하라 그러면 어느 정도 평안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근본적이고 완전한 치료는 이 현실(상징계)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치료는 어떠하였을까? 성서는 이를 정확히 판단할만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지 않지만 다음 사항들을 감안해 볼 때 치유는 성공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그녀는 생전 처음 본 예수님이 자신의 삶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많이 놀란다. 그래서 그녀는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녀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리이다.”라고 하고 이에 예수님이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고 말해준다. 모든 면담이 마칠 때, 사마리아 여인은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라고 말했는데, 이를 라캉의 이론에 비추어보면 그녀에게 있어 예수님은 대타자의 위치와 역할에 정확하게 일치한다. 대타자는 내담자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로 상정된 타자이다. 물론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는 빗금 쳐져 있고 결여되어 있다. 상징계의 대타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상징계의 대타자일지 그것을 넘어선 대타자일지에 대한 의견 개진은 접어두자. 분명한 것은 그 여인이 증언하였듯이 예수님은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계셨고 따라서 대타자로서 혹은 치유자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다음으로 치유 성공 가능성을 높게 본 것은 그녀의 증세(증환으로 인해 생긴 증세)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대인기피증’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날씨가 더운 이스라엘의 풍습에 따르면 물 기르는 일은 정오가 아니라 아침이나 오후 늦게였다. 이혼이 흔한 오늘날도 아닌 그 옛날에 다섯 번이나 이혼하고도 또 남자와 동거하는 그녀는 사람들을 피했을 것이고 그래서 사람이 없는 정오에 우물가를 찾았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면담 후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그들을 예수께 인도하였다는 것은 매우 획기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여인이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도 계속 남자를 찾아다니면서 동거나 결혼을 이전같이 반복했을까 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고 본다면 증환은 사라진 것이다.
  근거가 부족하지만 이러한 유추와 판단을 시도한 이유는 오늘날 한국교회와 교인들이 갖고 있는 물신주의 증세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가 물신주의의 늪에 깊이 빠져 있다는 사실은 이미 엄연한 기정사실이다. 이제 우리가 더 유의해야 할 것은 타종교(우상) 숭배가 아니라 물신을 숭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이 증세를 치유할 것인가?
  해결책은 오늘날 물신주의가 어느 수준에 도달해 있는가 하는 것에 좌우된다고 본다. 증상 정도라면 증상의 원인, 의미를 해석해 주는 차원에서 해결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만일 환상이 작동하고 있다면 환상의 본질과 효과에 대해 분석하면서 가로지르기나 거리두기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수준이 증환 정도라면 그 증세는 쉽게 포기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현 상징계에서는 혹은 상징계-내-존재(‘being-in-the-the symbolic’)에게서는 그 증세가 사라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한 대안이 한 가지 있다면 완전한 대타자(상징계에 속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선 대타자)가 출현하여 실재계까지도 취급, 분석하면서 이 증세를 치유하는 경우이다. 물론 이것은 라캉과 지젝의 이론에 없는 내용이다. 이는 기독교적인 인식론인 삼위 일체 하나님의 무소부재 편재성(곧, 실재계에도 관할하고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전지전능한 ‘대타자’)에 의거한 것이다. 사회학, 철학,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일이 결코 인정될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기독교학이기에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이다. 어쩌면 사마리아 여인에게 혹 발생했었을 지도 모르는 가능성 말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고 있는 한국 교회와 교인들은 물신주의에 심각히 오염되어 있다. 현대판 ‘빌립보 가이샤라’인 ‘서울 왕국’에서는 정치권력, 문화권력, 경제세력이 각기 웅대한 신전들을 세우고 성장과 풍요를 약속하며 숭배를 요구하고 있다. 이 거대하고 위협적인 신전들 앞에서 신앙인들은 베드로처럼 하나님을 ‘살아계시다’고 증거해야 하고, 예수님을 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주’(主)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을 살펴볼 때 이러한 고백은 둘째 치고, 교회 안에서 조차도 물신이 강력하게 ‘살아있고’ 또한 ‘주’의 위치를 점유하여 숭배를 받고 있다고 사료된다. 그것도 증상 정도가 아니라 증환 정도의 수준에서 그러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상의 논의와 대안 모색은 매우 긴요한 절차이며 과제라고 판단된다.

4. 나오는 말

  『피로 사회』를 저술한 한병철은 그 책 시작에서 각 시대마다 고유한 질병이 있다고 적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물신주의라는 질병을 심히 앓고 있다. 거의 중병 상태로까지 진전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로 그러하듯이 중병은 환자가 인식하지 못한 채 지속될 수 있다. 우리는 물신화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악화되는지 어떤 파국적 결과를 몰고 올지 그리고 해결책이나 대안이 있는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물신화된 삶을 좇는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물신주의로 만연된 삶을 되돌아보고 그 심각성과 파괴적 결과(특히, 인간과 인간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간의 관계에 대하여)를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멈추고 생각하고 중지하고 되돌아서는 것이 문제가 있는 곳 어디서든 필요하지만 여기서도 또한 긴히 필요하다. 물신주의는 인간을 결코 풍요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속박하고 소외시키며 개체 인간을 도구화, 물화시키는 것이다. 기독교학은 물론 인문학적으로 그것은 용인될 수 없는 것으로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논박되고 대처되어야 한다.
  얼마 전 신문 지상에 나온 어떤 기자의 글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가족모임을 위한 식사 자리에서 늘 부닥치는 고민. 코스요리 3개 중 어떤 것을 고를지다. 선택은 대부분 중간 것이다. ‘5만·4만·3만원’짜리 레스토랑 메뉴건, ‘3만·2만·1만원’짜리 한식당 세트건 다르지 않다. 제일 비싼 건 부담스럽고, 가장 싼 것은 빈약해 보인다. 그저 둘째가 무난하다. 음식은 중요하지 않다. 몇 년 전 뉴욕타임스에 실린 레스토랑 컨설턴트에 대한 기사도 같은 맥락이다. 가격을 매겨주는 컨설턴트는 최고가 코스의 값을 올릴 때 매출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안다. 최고가 요리를 시키는 사람은 드물어도 고객은 그 다음 가격대의 요리를 주문한다. 이 둘째 요리에서 많은 이윤이 남도록 메뉴를 조절한다.

  이 기자는 음식(‘수레’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상품’들 간의 관계(즉, 고가, 중가, 저가 음식 간의 내용 차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파악했다는 사실에서 그의 판단은 지젝의 지적에 정확히 부합된다. 그러나 이 기자가 몰랐던 것은 그의 선택 뒤에 무의식적으로 실행되고 처리된 사람들 간의 관계(신분/계급)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그저 둘째가 무난하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둘째의 내용은 음식일까, 가격일까, 계급일까? 분명 그것은 음식도 가격도 아닌 계급이다. 그래서 그는 음식이나 가격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신분/계급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음식이나 가격을 구매, 소비, ‘식사’한 것이 아니라 신분/계급을 구매, 소비, ‘식사’한 것이다. 음식뿐이랴? 옷, 집, 자동차, 액세서리, 선물, 취미, 결혼 대상 등등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대상들은 끊임없이 출현하고 선택은 이어진다. 이런 상태에서 옷을 입는 것은 신분/계급을 입는 것이며, 사람을 만나는 것은 계급과 계급이 만나는 것이다. 물질주의는 이러한 방식으로 개인과 개인들 간의 삶을 구조화시킨다. 분명한 것은 물질주의는 언제든지 물신주의로 발전할 수 있다.
  이제 이 신문 기자가 반복적으로 두 번째 것을 선택하는 이유(증상)에 대해 말해보자. 흥미로운 예상은 이 기자가 뉴욕의 레스토랑에 가서도 두 번째 것을 선택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증상에 대해 기자에게 그 의미를 해석해 주었을 때 그 증상이 이전처럼 반복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증상 수준에 있는 증세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거기에는 환상까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곧 그 ‘음식’(혹은 레스토랑의 식사)이 자신의 결여 혹은 공백을 채워주거나 가려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자신의 ‘높여진’ 위상을 생각하며 즐길 것이다. 그리하여 이 환상에 대해 그것의 본질과 실체에 대해 분석해주면서 환상을 가로질러 주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증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참고문헌

윤창희. “비교하지마.” 『중앙일보』 2013년 3월 13일, 34.
이  철. “욕망과 환상의 거미줄에 걸려 있는 한국교회: 후기구조주의의 접근.” 『제3회 숭실        기독교학회 정기학술대회 자료집』. 2012. 11. 28.
한병철. 『피로사회』 김태환 옮김, 서울: 문학과 지성, 2012.
도널드 위니캇. 『놀이와 현실』 이재훈 옮김. 서울: 한국심리치료연구소, 1997.
숀 호머. 『라캉 읽기』 김서영 옮김. 서울: 은행나무, 2006.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서울: 인간사랑, 2002.
___________. 『How To Read  라캉』 박정수 옮김. 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09.
___________.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이운경 옮김. 서울: 한문화, 2010.
___________.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이현우, 김희진, 정일        권 옮김. 서울: 난장이, 2011.
신구 가즈시계. 『라캉의 정신분석: 대상-a는 황금수이다』 김병준 옮김. 서울: 은행나무, 2007.
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탄생』 임진수 옮김. 서울: 열린책,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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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2

예수의 비유를 통해서 본 하나님의 정의

김판임 (세종대 교수/ 신약학)


초록

  이 논문은 세 가지 예수의 비유를 해석하여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예수의 이해에 도달하고자 한다. 세 비유는 각각 노동과 임금(포도원주인의 비유), 부채탕감(탕감 받았으나 탕감해주지 않는 종의 비유), 부채 삭감(불의한 청지기 비유) 등 구체적인 경제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 정의는 경제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예수의 비유가 글이 아니라 말로 전달되었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청중의 반응을 상상해보는 방법을 적용하여 비유의 핵심 메시지를 이끌어내 보았다. 청중의 반응에 대한 재구성은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시대 상황에 대한 지식을 전제할 때 가능하다.
  연구결과 포도원주인의 비유에서는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인지, 탕감 받았으나 탕감해주지 않는 종의 비유에서는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방법은 어떠해야 하는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는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 때문에 실현되어야 하는지, 정의의 목적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정의는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며, 방법은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하나님이 정의를 실현하려는 목적은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세 비유 모두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를 보인다.

주제어:
하나님의 정의, 예수, 포도원주인의 비유, 탕감, 불의의 청지기 비유




1. 들어가는 말

1) 문제제기와 연구목표: 예수와 정의

몇 년 전부터 한국 사회에서 “정의”가 화두로 떠올랐다. 미국 하버드대의 교수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100만부 이상 팔렸을 뿐만 아니라 여러 대학에서 강연자로 초빙한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에 떠오르는 정의에 대한 관심의 뜨거움을 말해주는 것이리라. 또한 교계의 소식은 2013년 세계 교회협의회 10차 대회가 부산에서 열리게 되었고, 그 주제가 “생명과 평화를 위한 정의”라는 것이다. 생명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는 전쟁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평화를 최고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 정의라고 이해할 때, 이 주제는 기독교의 핵심적 사상이며, 한국뿐만 아니라 전 지구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을 예방하고 치유할 수 있는 좋은 주제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신약성서학을 전공하는 필자에게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기독교의 핵심인물이라 할 수 있는 예수의 사상을 이야기 할 때 정의가 별로 논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수가 (구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마 22: 36-40/막 12:28-34/눅 10: 27)고 가르쳤던 사실이 너무나 강조되어, 정의는 기독교 안에서 그 자리를 잃고 사랑만 기독교의 핵심적 윤리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다른 모든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에게도 최고의 가치는 성서에 있고, 구약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활동은 언제나 두 가지 차원에서 언급된다. 사랑(헤세드)와 정의(체덱).  예수는 과연 하나님의 사랑만 언급하고 하나님의 정의는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이 논문은 예수의 메시지나 사상 연구에서 오랫동안 간과되었던 하나님의 정의가 예수가 말한 비유들을 통해 얼마나 강렬하게 전달되고 있는지 찾아보고 하나님의 정의의 내용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2) 연구방법: 예수와 비유

1세기 초 예수가 없었다면 기독교도 없었을 것이다. 예수는 여느 학자처럼 글을 쓴 적이 없다. 베스트셀러는커녕 작은 문서조차도 남긴 적이 없다. 그는 다만 입을 열어 말을 했을 뿐이다. 그가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희망도 비전도 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많은 학자들은 예수가 말한 것의 주제를 “하나님나라”라고 하고, 그의 이야기들이 주로 비유였다고 결론 내렸다.
하나님나라에 관한 그의 말들은 너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들은 청중의 머리에서 잊히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영화나 드라마, 혹은 콘서트와 같은 예술적인 작품들을 통해 감동을 받곤 한다. 어떤 작품은 오래 기억되고 어떤 작품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기도 한다. 예수 시대 사람들은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하는 데에는 이야기가 사용하였다. 예수가 비유를 통해 하나님나라에 관한 비전을 제시한 것에 근거하여 예수는 천재였다고 극찬을 한 학자가 있다. 필자도 이에 동의하는 바이다. 예수는 놀라운 비전을 쉬운 이야기로 전한 천재적인 이야기꾼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기억하는 것, 익히 들었던 말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예수의 말은 그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하나님나라에 관해 말할 때, 사람들은 이전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그렸다. 새로운 세계에서 그들은 경이로워하고 기대에 부풀었으며, 그리하여 그들이 처한 현실세계를 이겨낼 수 있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들에겐 예수 시대와 또 다른 삶의 문제들이 있었으며, 그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예수의 비유가 힘이 되기도 했다.
예수의 비유에 등장하는 소재들과 인물들을 중심으로 살펴본다면, 그의 청중이 어떠한 사람들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막 4:1-9: 마 13:1-9; 눅 8:5-8),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막 4:26-29), “겨자씨의 비유”(막 4:30-32; 마 13:31-32; 눅 3:18-19)등은 그의 청중들이 농사꾼들임을 말해준다. “그물비유”(마 13:47-48)는 그의 청중 중에 어부들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지만, 예수 당시 농사꾼이나 어부들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다.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마 13:44)”에서는 밭을 갈던 농사꾼이 땅 속에서 보물을 발견하고도 발견하자마자 가지지 못하고 자기 모든 것을 팔아 그 땅을 사기까지 땅 속에 감추어 두는 것으로 보아 자기 땅을 일구는 농사꾼이 아니라 남의 땅을 부쳐 먹고 사는 소작인임을 알 수 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 20:1-16)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예수의 청중들 중에는 포도원 주인과 같은 사람이나 혹 삭개오와 같은 재산가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 외엔 아무 것도 가진 것이라고는 없는, 일용직노동자나 소작인과 같은 극빈자들이다.
이 논문에서는 예수의 비유 중에서 셋을 선택하였다. 이 세 비유들은 모두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경제생활을 소재로 하고 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 20:1-15), 탕감 받았으나 탕감해주지 않은 종의 비유(마18:23-34), 그리고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눅 16:1-8a)이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는 하나님의 정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비유 해석에 있어서 필자는 비유를 듣는 청중을 설정하고, 청중이 예수의 비유 이야기를 들으며 호흡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추론해 보는 방식을 시도해 보았다. 그것은 예수가 비유를 글로 쓴 것이 아니라 말로 행하였다는 점, 즉 구술행위였다는 점에 착안하였다. 기록된 글을 읽으며 연구하는 행위는 기록된 글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객관화하는 고도의 사유 활동이지만, 듣는 행위는 화자와의 일치감과 즉각적인 깨달음을 얻는 직관적 행위이다.  예수의 비유 해석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 예수의 사상과 멀어져 간 이유는 예수의 비유를 듣기 보다는 기록된 문서를 읽고 사유하는 연구방법에 천착하였기 때문이다.
  
2. 본론

1) 포도원주인의 비유(마 20:1-15)
  -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예수의 답변

이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나온다. 그러나 예수의 진정한 비유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포도원은 예수의 비유 소재로 많이 등장한다. 이 비유에서는 포도원이 아니라 포도원주인이 하나님나라에 비유되었다. 다른 비유들에 비해 매우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1)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                                  
이 비유는 3막 극의 드라마처럼 전개되고 있는데, 이 점은 이미 몇몇 학자들에 의해 포착되었다. 필자는 듣기 훈련을 위해 청중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상상해본다.

제1장면) 새벽녘 인력시장
이야기> 아침 해가 채 떠오르지 않은 푸르스름한 새벽녘, 하루 일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인력시장에 포도원 주인이 나타난다. 하루에 한 데나리온을 지급하겠다고 하자 몇 명의 사람이 일을 하겠다고 일어선다. 포도원 주인은 그들에게 말한다.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청중> ‘요즘같이 실업자가 많은 때에 오늘 일을 얻은 사람들은 다행이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일용직노동자들인데, 일을 얻은 사람은 하루를 살겠지만 일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어찌할꼬.’

제2장면) 장터
이야기> 오전9시 경 하루의 일상이 시작되는 시간, 포도원 주인은 장터로 간다. 새벽 인력시장에서 일을 얻지 못한 사람들이 장터에서 서성이고 있다. 포도원 주인은 몇몇 사람들에게 자기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라고 한다. 하루 품삯은 적절하게 주겠다고 한다.
  청중> ‘적절한 임금이 얼마나 되는 걸까? 아무렴 어때, 일이 없이 빈둥거리며 노는 것보다야 낫겠지.’
이야기> 주인은 세 시간 후인 정오에도 나가 똑같이 일군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인다. 또 세 시간이 지나자 다시 장터에 나가 똑같이 포도원으로 불러들인다.(반복)
그리고 오후 5시쯤 하루 일을 마감하기에 1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 되었다. 포도원 주인이 다시 장터에 나간다. 장터에는 하루 일을 얻지 못해 아직도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주인은 그들에게 묻는다. “너희가 어찌하여 그렇게 빈둥거리고 있느냐?” 그들은 대답한다. “우리들에게 일을 주는 사람이 없나이다.”
청중> ‘그럼 그렇지. 실업자들이 뭐 일하기 싫어서 일을 안 하는 건가. 아무도 일을 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노는 거지. 그 사람들 참 속 시원히 말 잘하네. 우리 현실을 그대로 말해주는군.’
이야기> 주인은 말한다. “너희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청중>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람.  조금 있으면 해가 질텐데 일을 하라니..... 주인은 도대체  얼마를 주려는 걸까?  여하튼 저 일군들은 포도원에 가서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해야겠지.’

제3장면) 포도원
이야기> 해가 저문 시간, 하루 일과가 끝나고 일용직 노동자들이 하루 임금을 받을 시간이다. 주인이 관리인에게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임금을 주라고 말한다. 노동자 한 사람마다 한 데나리온씩 받아간다.
청중> ‘아, 주인의 마음은 바로 마지막에 부른 저 사람에게도 하루 임금을 주고 싶었던 거구나. 감사하기 짝이 없다. 바로 그래. 최소한 가족들 입에 풀칠이나 하려면 적어도 한 데나리온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이야기> 일꾼들이 한 데나리온씩 받아가는 모습을 보자 새벽부터 와서 일한 사람들은 하루 일당 한 데나리온으로 계약하고 포도원에 일하러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네들은         좀 더 쳐 주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들에게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이 지급되자 그들은 항의한다. “맨 나중에 온 사람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 우리와 똑같이 지불합니까?”
청중> 당황! ‘노동자들이 어떻게 주인에게 대들 수가 있지? 간도 크다. 주인이 일을 주지 않았다면, 하루를 공치고 아무 것도 얻지 못했을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이유를 들어보니 그럴 듯도 하군. 나중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줄 정도로 관대하신 주인이라면 하루 종일 일한 노동자들에게는 좀 더 생각해 주어 두 세 데나리온 정도 주면 좋지 않았을까?
이야기> 그러나 이러한 불평은 포도원 주인에게 통하지 않았다. 주인은 말한다. “나는 당신을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돌아가시오, 당신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        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청중> ‘그래. 맞아. 애당초 하루 품삯은 한 데나리온이라고 일하기 전에 이미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나? 주인은 잘못한 것이 없다. 새벽부터 와서 종일 일한 사람이나 저녁 다 되어 와서 적게 일한 사람이나 주인이 같은 품삯을 주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다. 늦은 오후 시간에 노동자들을 불러 일할 기회를 줄 때에 이미 주인은 그들에게 하루 품삯을 주고자 한 것이다. 하루 품삯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것이라도 제공하고자 하는 주인의 마음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2) 비유 해석
많은 학자들이 이 비유를 해석했다. 초기 교부들과 중세 학자들에 의해 알레고리적 해석이 애호되었고, 알레고리적 해석이 배격된 이후 지금까지 가장 지배적인 해석은 예레미아스가 이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이 비유를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도 제시할 수 없는 소외된 자들, 즉 죄인들을 값없이 용서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이 비유는 적대자들을 향한 복음의 변호이다: “하나님은 전혀 자격이 없는 죄인들과 세리들도 그의 구원에 동참케 한다. 그는 마지막 날에 이와 같이 그들에게 행하실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공로에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이로써 이 비유가 유대교의 보응사상에 대결하는 것으로 해석해왔다. 마태복음 주석을 쓴 루츠, 한국의 비유 해석가 김득중, 김창락의 해석도 예레미아스의 해석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비유에서 예레미아스가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시다고 보는 점에는 필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선하므로 네가 나를 악하다 하느냐!”는 강한 호령에서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죄인들과 세리들을 구원에 동참케 하신다는 해석은 이 비유와 상관이 없다. 이러한 오류는 그가 전제로 가졌던 바울 신학적 입장에서 도출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비유에서 그 어떤 것도 죄인을 연상시키는 것은 없다. 하루 종일 일을 얻지 못하고 장터에서 빈둥거리다가 하루해가 지기 전에 일을 얻게 되어 1시간 밖에 일하지 못한 노동자가 게으르거나 방탕한 죄인인 것은 아니다. 다만 일을 얻지 못했을 뿐이다.  
쇼트로프는 이 비유가 실직이나 질병을 당했을 때 사회보장이 전혀 없는 일용직 노동자의 일상을 보여준다고 파악하였다. 새벽부터 종일토록 일한 노동자들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노동자들과 같은 품삯을 받게 되자 주인에게 항의한다. 이들의 항의에 대해 주인은 강한 질책을 하는데, 이를 근거로 하여 쇼트로프는 이 비유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공동체 안에서 죄인들과 비죄인들 사이의 차별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하여 “마 20:1-15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비판과 공격이 아니라 그들을 예수의 추종자들의 편에 서도록, 가난한 자와 세리와 죄인들과 연대하도록 하려는 시도”라고 해석한다. 피오렌자도 유사한 견해를 피력한다. “예수의 비유는 그의 청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선하심이 우리 모두 가운데, 의인과 죄인, 부자와 가난한 자, 남자와 여자, 바리새인과 예수의 제자 사이에 동등성과 연대성을 세우신다는 점을 인식하도록 자극한다.”
이들 여성신학자들은 이 비유에서 다양한 인간들의 동등성과 연대성을 강조함으로써 예레미아스보다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지만, 죄인과 비죄인(혹은 의인)이란 표현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예레미아스의 잘못된 전제를 기초로 하고 있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최근 한국의 여성신학자 김경희는 이 비유에서 죄인과 비죄인이란 표현이 사용되는 것의 문제를 지적하며, 이 비유는 하나님나라가 지향하는 바,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평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 비유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보는 학자들은 이 비유에서 포도원주인의 태도에 관한 것들이다. 가령 헤어초그는 이 비유에서 포도원주인은 기준 없이 자기 멋대로 같은 품삯을 주는 폭군같은 존재라고 비난하고 있으며, 국내 김선정은 이 비유의 주인은 맨 나중에 와서 일하게 된 품꾼에게만 자비한 주인이지, 새벽부터 와서 일한 일꾼에겐 전혀 자비롭지 못했다고 본다. 크로산도 같은 입장이다. “주인이 마지막 고용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다음에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비례해서 임금을 인상했더라면 그는 선하고 자비로웠을 것이다.” 크로산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포도 수확철이라 많은 노동자들이 필요하여 이른 새벽에 충분한 노동자를 고용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포도원주인은 구두쇠라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 적은 노동자를 고용하였고, 그리하여 일군들을 고용하기 위해 자주 장터에 나가야 했던 점을 지적하였다.이들은 모두 자신도 모르게 자본주의적 질서에 매몰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그러면서 비유의 핵심에서 벗어난다. 이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활동을 하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각 사람에게 계약된 금액보다 더 주려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주인의 처사에 불만을 표현한 일군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불평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한 경우들이 많았지만, 필자는 이 비유의 주인공이 포도원 품꾼들이 아니라 포도원주인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즉, 이 주인의 행위가 하나님나라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주인은 하루에 한 번만 아니라 여러 번 일군들을 불러 포도원으로 보냈으며, 심지어 해가 지기 한 시간 전에도 일없이 놀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과 대화한 후 “불쌍히 여겨” 자기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일자리를 준다. 그리고 모두 동일한 임금을 준다. 하루 임금은 노동자의 가족이 하루 이틀 먹고 살 수 있게 해주는 기본 급료에 해당하는 셈이다. 주인은 이것을 주고 싶어서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한 것이다. 주인의 마음은 일을 얻지 못해 하루 종일 놀고 있어야 했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3) 비유의 메시지: 하나님의 정의란 무엇인가
탁월한 관찰력으로 이 비유를 하나님의 정의라는 주제와 연결시킨 학자는 스캇이다. 그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비유의 주제는 하나님나라의 속성이다. 그것은 일과 급료로 나타났다. 그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정의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작용한다. 즉, 포도원주인이 사람을 불러 일을 시킬 때에는 - 새벽에 만나 일을 주든, 아니면 오후 늦은 시간에 만나 일을 주든 - 얼마나 적은 임금을 주어 이윤을 최대화할까와 같은 현대 경제학 원론의 이론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나라의 경제정의는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나라 백성들의 생명을 살리려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 비유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의 정의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작용하는 원리라고.

2) 탕감 받았으나 탕감해주지 않은 종의 비유(마 18:23-34)
  - 정의란 어떻게 실현하는가에 대한 예수의 답변

이 비유도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비유이다. 마태는 자신의 목회적 필요에 의해 이 비유를 예수의 다섯 가지 설교 중 네 번째인 교회에 관한 설교(18:1-35)의 마지막에 위치 설정을 하고 있다. 마태는 “몇 번이나 형제를 용서해야 하느냐?”는 베드로의 질문과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을 이 비유의 앞부분(마 18: 21-22)에 위치케 하고, 비유를 마친 후 비유에 대한 적용어로 “너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도 그와 같이 하리라(마 18:35)”는 말로써 비유의 틀을 제공하여 비유의 주제를 “무한한 용서”라는 주제에 대한 예화로 만들었다. 그러나 마태가 만든 비유의 틀을 제외하면, 23절로 시작하는 비유는 예수의 진정한 비유로서 손색이 없고,  마태가 만든 틀로부터 자유롭게 읽는다면 예수의 진정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1) 예수의 비유 새로 듣기

이 비유도 3막극의 드라마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23절은 비유의 서두로서 천국은 빚을 청산하려는 임금에게 비유되고 있다.

제1장면) 임금이 있는 왕궁
이야기> 임금과 빚진 자(종)의 대면이 이루어지고 있다.  종이 빚진 금액은 일만 데나리온이다.
  청중> ‘일만 달란트가 얼마야? 상상할 수도 없는 액수인데. 세상에 그 큰 빚을 어떻게 지게 된 거지? 그러나 저러나 그 많은 빚을 어떻게 갚나?’
  이야기> 사실 그 종은 일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갚을 수가 없다. 주인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을 것을 독촉한다. “너 자신과 아내와 자녀들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갚으라”고 한다.
  청중> ‘자기 자신을 팔고 아내와 자식, 모든 것을 판다고 해도 일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갚을 수가 있을까?’
  이야기> 그 종은 사실 갚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그렇다고 못 갚겠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못 갚겠다는 말은 주인의 노여움만 키울 뿐이다. 그래서 그는 엎드려 주인에게 사정하는 체한다. “내게 참으소서. 그리하면 내가 당신에게 모두 갚겠나이다.”
  청중> ‘암, 그래야지. 갚을 수 있건 없건 갚겠다는 의지가 있음을 말해야지.’
  이야기>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의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청중> ‘세상에, 그런 일이 . . .  대단한 주인이군. 그 많은 빚을 탕감하여 주다니.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어. 빚을 갚을 수 없는 형편인데. 그렇다고 죽여야겠어? 죽일 수도 없고 도로 받을 수도 없다면? 탕감밖엔 없지. 아무튼 탕감을 받은 사람은 앞으로 잘 살아야겠네!’

제2장면) 왕궁에서 마을로 가는 길
  이야기> 일만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등장한다. 길을 가는 도중에 자신에게 100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만난다. 그를 붙들어 목을 조르며 “네가 빚진 것을 모두 갚으라”고 말한다.
  청중> ‘100데나리온이라? 이 빚은 생활고로 인해 생긴 빚이군. 그 정도 빚은 우리들도 다 있지. 좀 참고 기다려 달라고 해. 절대로 떼어먹지 않겠다고 말이지. 언제가 될 진 몰라도 벌이가 나아지면 꼭 갚겠다고 말이야.’
  이야기> 그러자 빚진 동료가 엎드려 사정을 한다. “내게 참으소서. 그러면 내가 당신에게 갚으리이다.”
  청중> ‘그래야지. 잘했어. 지금은 형편이 어려워서 빚을 지고 있지만, 형편이 나아져서 일거리가 좀 많아지면 갚을 수 있지 않겠어! ’
  이야기> 그러나 그는 들어주지 않고 갚을 때까지 그를 옥에 가두었다.
  청중> ‘에구 저런, 자기는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 받았으면서, 어쩜 저렇게도 모질지? 백 데나리온의 빚이야 정말 좀 기다려주면 갚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빚을 못 갚는다고 감옥에 처넣다니, 해도 해도 너무 하군. 사람이 먹고 살아야 빚도 갚고 할 것 아니겠어!’
이야기> 그들 주변에 있던 여러 동료들이 이 일을 보고 민망히 여




신학사상 2013년 겨울호(163집) 차례
신학사상 2013년 여름호(161집)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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