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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연 
 신학사상 2009년 가을호(146집) 차례


이번 호에는

구약학에서 박신배 교수(그리스도대)의 예루살렘에서만 예배를 드리라는 제의에 대한 연구로 “제의 중앙화의 역사성과 신학” 논문과  우상혁 교수(안양대)의 칠십인경에 대한 연구 “아리스테아스 서신과 칠십인경 개정” 논문을 게재하였다.

조직신학 분야에서 전철 교수(한신대 외래)의 노스 화이트헤드의 사건 개념을 신학적으로 해석한 논문 “화이트헤드 사건론의 신학적 함의”, 정재현 교수(연세대/ 철학적 신학)의 파니카의 연구를 전거로 종교신학에서 관계유형에 대한 논의를 한 연구 “‘종교적 인간’에서 ‘신앙하는 인간’으로: 종교신학에 대한 파니카의 비판을 통하여”라는 논문을 게재하였다.

여성신학에서 김애영 교수(한신대)의 여성해방적 예배의 추구, 내용, 양상과 전망에 대한 연구로 “여성해방적 예배의 추구와 전망”이란 논문을 게재하였다.

교회사 분야에서 백용기 교수(강남대)의 “WCC 창립 이전 세계 기독교대회 속에 나타난 한국 개신교 사회운동”에 대한 논문과 서정민 교수(연세대)의 “한국 무교회주의 운동사의 검토-한국교회사적 평가를 중심으로”라는 논문 두 편을 게재했다.

기독교윤리에서 이혁배 교수(숭실대)의 전환기를 맞고 있는 한국교회 선교적 과제를 추구하는 논문 “한국교회의 행태와 전망, 그리고 과제”를 게재했다.

목회상담학에서 정희성 교수(이화여대)의 교회여성의 우울의 심리학적인 원인을 규명하는 “여성우울의 심리학적 원인 연구: 교회 여성을 위하여”라는 논문을 게재하였다.  

정치종교사회학 분야에서 정태식 교수(경북대 강의전담)의 기독교의 바람직한 정치활동 모델을 모색한 “세속화 이론의 관점에서 본 종교의 정치참여 문제-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게재 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우리에게 화해와 용서, 사랑과 평화,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유지(遺志)를 남기고!

그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민주주의와 인권국가가 되게 했고, 햇볕정책과 함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의 기반을 구축했다. 또한 6.25이후 최대 국란이라고 했던 IMF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고 세계 최선두 IT 강국으로 도약하여 우리나라를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발전시켰다. 자주적 국제외교와 함께 노벨평화상 수상,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를 통해 우리 국민의 자긍심과 국가적 위상을 높였다.
사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목숨 건 희생과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민주주의와 인권을 누리고 경제적으로 이 만큼 잘 살게 되고 대한민국의 브랜드가 세계를 누비는 국제적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를 반문하게 된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역차별과 군사정권의 조작된 낙인 때문에 평생 ‘빨갱이’, ‘거짓말쟁이’, ‘돈에 욕심이 많은 사람’ 등의 누명을 쓰고 살았다. 그래도 그 분은 인내하고 자기를 죽이려 했던 박정희, 전두환 등 군사독재자들과 그 세력들 그리고 자신을 비난하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했다.
1980년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서 아들에게 쓴 옥중서신에는 이런 글이 있다.
“용서와 사랑은 진실로 너그러운 강자만이 할 수 있다. 꾸준히 노력하며 하느님께 자기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힘까지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언제나 기구하자. 그리하여 너나 내가 다 같이 사랑의 승자가 되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을 보면 정치인 김대중보다 깊은 신앙인의 모습을 보게 되고   깊이 있는 신학적 성찰은 마치 신학서적을 읽는 착각을 가지게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모하며 하느님께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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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46집)              

연구 논문
박신배 ․ 제의 중앙화의 역사성과 신학
우상혁 ․ 아리스테아스 서신과 칠십인경 개정
전  철 ․ 화이트헤드 사건론의 신학적 함의
정재현 ․ ‘종교적 인간’에서 ‘신앙하는 인간’으로:
             종교신학에 대한 파니카의 비판을 통하여
김애영 ․ 여성해방적 예배의 추구와 전망
백용기 ․ WCC 창립 이전 세계 기독교대회 속에 나타난 한국 개신교 사회운동
서정민 ․ 한국 무교회주의 운동사의 검토-한국교회사적 평가를 중심으로
이혁배 ․ 한국교회의 행태와 전망, 그리고 과제        
정희성 ․ 여성우울의 심리학적 원인 연구: 교회 여성을 위하여
정태식 ․ 세속화 이론의 관점에서 본 종교의 정치참여 문제
            - 미국 개신교 근본주의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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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소개)1


여성우울의 심리학적 원인 연구: 교회 여성을 위하여
                                            
                                           정희성 (이화여대 교수/목회상담학)

초록

        우울증은 현대 세계인을 강타하는 가장 치명적인 질병인 동시에 현저한 젠더차이, 즉 여성 발병율이 남성보다 현저하게 높은 정신질환이다. 다른 정신질환과 달리 한 개인의 심리세계 뿐 아니라 사회생활․ 가정생활․ 자녀양육․ 영적생활 전 영역에 부정적으로 영향 미치는 우울증은 왜 여성이 더 많이 걸리는 것일까?
        이의 문제에 관심하며 이 논문에서는 교회 여성 우울의 심리학적 원인을 규명하였다. 교회 여성의 우울은 생물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신학적 요인 등이 다양하게 얽히고 중첩되어 발생한다. 이에 대한 총괄적 연구를 장기목표로 세우고, 본 논문에서는 우선 여성우울의 심리학적 원인 연구에 집중하였다.
        먼저 우울증에 체계적인 연구를 시도한 프로이트의 이론을 살펴보았고, 다음으로 현대 여성 심리학자들의 우울이론을 그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교회 여성을 포함하여 여성의 우울은 심리내적 역동의 측면에서 뿐 아니라 가부장적 문화에서 여성이 경험하는 자아감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주제어: 우울, 여성의 우울, 멜랑코리, 우울과 젠더, 여성주의 심리학

        
  50대 초반 여 목사 K는 얼마 전부터 심한 우울 속에서 목회에도 관심이 없고, 사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고 느끼고 있다. 투철한 사명감 속에서 젊은 시절부터 최선을 다해 목회에 전념한 결과 독신 여 목사로서는 드물게 단독목회에 성공했고, 젊은 나이에 지방노회의 수장이 되었다. 그러나 요즘 K목사는 남편도 자식도 없이 하나님만 바라고 산 자신의 삶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자꾸 회의가 든다. 또 왠지 모를 허탈감 속에서 하루하루가 지겹고 견디기 힘들다.

  일찍 결혼해서 벌써 대학 간 자녀가 있는 40대 초반의 전업주부 L집사 역시 꽤 오랜 기간 동안 심한 우울 속에서 밤이면 잠 못 이루거나 울며 지새는 날이 많다. 얼마 전 L집사는 교회 구역장이 새로 이사 온 N집사에게는󰡒예쁘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에게는 아무 말도 안한 것이 너무 섭섭했다. 그래서 밤새 억울해하다 새벽같이 구역장한테 달려가 울며불며 따졌다. 그러나 곧 후회가 되어 요즘은 다시 심한 죄책감에 또 잠 못 이룬다. 남편에게도, 시부모에게도, 자식에게도, 교회에도 최선을 다했는데 모든 것이 다 헛되다는 생각, 허망하게 지나간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한 안타까움 등, 밤낮 오만가지 생각으로 잠 못 이루기 일쑤이다.  

여성 목회상담가 수잔 던랩(Susan Dunlap)은 위의 사례와 같이 우울한 많은 교회 여성을 상담하며 교회 현장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우울에 더 취약하다는 사실에 매우 애석해한다. 우울은 특별히 기독교신앙의 핵심덕목인 믿음․ 사랑․ 소망조차 잃게 하는 치명적 정신질환인데, 교회에 헌신적인 여성들이 남성보다 현저하게 더 많이 우울을 경험한다는 것이 도무지 안타까워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우울은 현재 한국과 세계에서 빠른 속 발병이 증가하고 있어 향후 십 여 년 내에 민족․ 젠더․ 인종․ 종교를 초월하여 세계인을 위협하는 최고의 질병이 될 것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우울은 젠더 간 심각한 발병차이를 드러내어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적게는 2배, 많게는 4배에서 6배 정도 더 발병한다. 특히 젠더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16세에서 55세 사이에 우울증 발병의 젠더차이도 가장 크게 나타난다.    
        왜 교회 여성이 남성보다 더 우울에 취약할까? 바로 이의 문제에 관심하며 교회 여성 우울의 목회상담적 이해란 장기 연구목표를 설정하고, 그 첫 과제로서 여성 우울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을 본 논문을 통해 시도하고자 한다. 교회 여성의 우울은 생리적․ 심리적․ 사회적․ 신학적 요인이 다양하고 얽히고 작용하며 초래되는 질병이다. 본 논문에서는 먼저 교회 여성우울의 심리학적 원인이해에 집중하여 프로이트와 현대 여성학자들의 이론을 살펴볼 것이다. 프로이트는 귀신론이나 체질론이 주도했던 우울증 이해에 ‘상실(loss)’이란 개념을 도입하여 우울의 심리역동을 체계적으로 규명하였다. 다나 잭(Dana Jack), 해리엇 러너(Harriet Lerner)같은 현대 여성학자들은 프로이트를 넘어서 여성이 우울에 취약한 원인을 문화 분석에 근거하여 설명하였다. 이를 통해 여성의 우울증은 심리내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남성중심적 사회문화에서 경험하는 여성의 자아상실 및 자아감(sense of the self)과 연관되어있음을 밝힌다.

1. 프로이트의 우울증이해  

   현대 심리학의 거장 프로이트는 우울증을 대상상실 (loss of the object)로 인한 정신질환으로 규정함으로써 우울 심리역동이해의 초석을 놓았다. 오랫동안 체액론(humoral theory)이나 축귀론(exorcism) 등으로 조야하게 이해되어온 우울증에 대해, 프로이트는 깊이 있는 심리분석을 시도함으로써 우울증으로 고통 하는 남녀 내담자들의 심리 역동에 대한 주요한 통찰을 제공하였다.
1) 역사적 배경
        고대에 임상적 관심을 필요로 하는 정서장애는 주로 종교지도자나 무당의 해석에 의존하였다. 이미 고대에도 일상적인 고통과 특수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정서장애를 분리하여 이해하였는데, 과도한 우울이나 두려움 ․ 초조 ․ 의존 ․ 강박 증세를 보일 경우, 초자연적 힘이 개입한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무당이나 종교지도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는 다양한 축귀의식을 행하거나, 신의 도우심이 내려 환자가 평안하기를 기도하며 환자를 종교 사원에 재우는 것을 주요 치료방안으로 삼았다.
        그리스 시대에 접어들며 정신질환에 대한 초자연적 이해는 점차 사라지고, 관찰과 이성을 통한 이해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보편적인 원리가 있다고 믿고, 하늘과 땅․ 천체의 괘도․ 계절의 변화․ 생물과 무생물의 상승 및 하강주기 등에 관심하며, 정신장애의 귀신론에 반기를 들었다. 특별히 엠페도클스(Empedocles)는 우주는 흙 ․ 불 ․ 물 ․ 공기 4원소의 혼합으로 구성되어있다는 피타고라스학파의 이론을 바탕으로 정신질환의 체액론을 주장하였고, 기원전 5세기경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역시 이 이론을 받아들였다.  
        17세기까지 우울 이해를 주도했던 이론은 히포크라테스의 4 체액론이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정신질환을 멜랑코리(melancholia), 광증(mania), 뇌염(brain fever) 셋으로 구분하고, 정신질환은 귀신이나 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육체의 비정상성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인간의 몸은 피(blood), 황담즙(yellow bile), 흑담즙(black bile), 점액질(phlegm)의 네 체액으로 구성되어있고, 이 체액은 각기 계절과 기후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였다. 피는 봄 ․ 열기 ․ 강우, 황담즙은 여름 ․ 열기 ․ 건조, 흑담즙은 가을 ․ 건조 ․ 냉기, 점액질은 겨울 ․ 냉기 ․ 강우와 연관되어있다. 우울의 또 다른 명칭인 멜랑코리(melancholia)의 어원에서 암시하듯, 히포크라테스는 우울은 바로 이 흑담즙이 과도하거나 흑담즙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할 때 발생한다고 하였다.  
        한편, 종교적 권위가 압도적이었던 중세에는 다시 그리스 이전 시대로 회귀하여 종교지도자들이 우울이나 정신장애의 이해를 주도하였다. 이들은 우울이나 정신질환을 귀신과의 접촉에 의한 것으로 간주하여 축귀론을 옹호하였고, 우울 환자를 마녀로 의심하기도 했다. 이 같은 이해는 17-18세기에는 더욱 혹독해져 교회는 심문관을 각 마을로 보내 광증, 정신분열증, 심각한 우울증을 보이는 환자들을 색출하여 화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오랜 세기에 걸쳐 십만이 넘게 처형된 마녀사냥에 우울환자를 비롯한 정신질환자가 다수 포함되었다. 그 뿐 아니라 이후에도 우울환자나 정서장애자들은 동물같이 취급되어, 외딴 수용소에 쇠줄로 묶여 감금되거나 작은 관 같은 상자에 갇혀 지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중세의 또 하나의 특징은 우울을 기독교인의 부도덕성을 표상하는 윤리적 용어로 차용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중세 교회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범하기 쉬운 죄 된 삶의 경향을󰡐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the seven deadly sins)󰡑라 지칭하였는데, 그 중 하나인 accidie가 바로 우울 증상이었다. 도심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수련하는 수사들이 시편 91편 6절에서와 같이 “밝은 대낮의 사탄(noonday demon)”에 공격당해, 하루가 마치 쉰 시간이나 되는 것처럼 나태해지고, 자기와 일을 증오하고 불면과 유혹 속에서 결국 종교생활을 그만두기까지 하게 하는 것을 지칭하였다.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는 처음에는 수사들의 병적 상황을 묘사하는데 사용되다 중세에 기독교인 전체의 비윤리적 모습을 진단하는 수단으로 확장되었었는데, 우울 증상이 그 하나로 포함되었던 것이다.
        우울이나 정신장애 질환에 대한 과학적인 관심은 19세기 후반에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에밀 크래플린(Emile Kraeplin)은 정신장애의 다양한 유형을 구분하고 분류하는 최초의 체계 중 하나를 제안하였다. 이는 정신장애의 원인과 치료에 대한 연구수행에 앞서 반드시 필요한 획기적 약진이었다. 크래플린은 중증 정신장애를 크게 두 집단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조울 신경증(manic-depressive psychosis)이고, 다른 하나는 후에 정신분열증으로 불리는 치매(dementia praecox)였다. 크래플린은 조울 신경증은 신진대사의 불규정성에서, 정신분열증은 화학적 불균형에서 초래되었다고 주장했다.
        비슷한 시기에 프로이트도 장 샤르코(Jean Charcot)와 함께 연구하며 우울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샤르코는 프랑스의 유명한 신경의학자로서 최면을 써서 여성이 히스테리로 고생하는 것을 도왔다. 히스테리는 당시 중상층 빅토리아 여성들에게 매우 흔한 정신장애였는데 샤르코는 그런 환자들에게 최면을 걸고 증상완화의 가능성을 제안하여 내담자의 감정 해소, 카타르시스, 또 외상사건을 자세히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처럼 카타르시스나 최면을 통해 마음의 숨어있는 영역을 깨우는 샤르코의 연구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발견에 도움을 주어 프로이트의 우울이론 전개에 도움을 주었다.
2) 우울증과 대상상실
        프로이트가 우울에 관심하게 된 것은 1914년경부터였다. 당시 프로이트는 “남성 동성애의 분류(The nosology of male homosexuality)”와 “현실감 발달의 단계(stages in the development of the sense of reality)” 같은 논문을 출판하였는데, 같은 시기 우울문제에도 관심하여 비엔나 정신분석학회에서 1914년 12월 30일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어 1915년 2월 논문의 초고를 아브라함 (Abraham)에게 보내 우울과 리비도적 에너지의 구강기 연관성에 관한 조언을 들은 후 1915년 5월 4일 논문을 완성하였다. 그의 논문은 “애도와 멜랑코리(Mourning and melancholia)”란 제목으로 2년 후 1917년 출판되었다.
        󰡒애도와 멜랑코리󰡓에서 프로이트는 우울과 애도의 비교를 통해 우울의 독특한 심리학적 역동을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프로이트는 우울과 애도는 원인과 증상 면에서 매우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즉, 애도는 일반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 혹은 나라 ․ 자유 ․ 이상과 같이 조금 추상적인 것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반면 우울은 병리적이라 여기지만, 그 원인은 애도와 거의 비슷한 이유의 상실 때문에 발생한다. 조금 차이가 있다면 애도와 달리 우울은 다양한 상실을 포함하는데, 애도보다 조금 더 이상적인 것의 상실, 실제 죽은 것이 아니더라도 더 이상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의 상실, 혹은 의식으로 인지할 수 없는 무의식적 대상 상실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우울과 애도는 또한 그 증상에 있어서도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자기 존중의 장애가 애도에서는 부재한다. 그렇지만, 그 외의 다른 증상은 모두 동일하다.” 우울은 심각하게 고통스런 낙담, 외부 세상에 대한 흥미상실, 사랑능력의 상실, 모든 활동의 억제, 자기 책망, 자기 중상의 증상 뿐 아니라 자기 체벌의 망상적 기대를 최고도로 드러내 자기 존중감의 저하를 나타낸다. 프로이트는 애도의 경우도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로 인해 야기되어, 외부 세계에 대한 흥미를 상실하고, 새로운 대상을 받아들일 능력을 상실하는 등 우울과 매우 유사한 증상을 보인다고 한다. 애도가 자기 비하나 자기 존중감의 심한 상실을 드러내지 않을 뿐 그 외의 증상은 우울과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다.
        한편, 프로이트는 우울 성격의 규명을 위해 애도의 심리학적 역동에 관심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애도는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에서 초래되었기 때문에 현실에서 대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대상을 향했던 이전의 리비도와 애착은 모두 철수해야 한다. 그러나 이 리비도를 철수해야 한다는 요구는 강한 저항에 직면하며, 신경증적 환상 속에서 상실한 대상에 매달리고, 리비도는 대상에게 묶이며, 철수가 지연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애도에서 이와 같은 현상이 병리적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데 이는 시간이 흐르면 점차 애도의 작업이 종료되며, 자아는 자유해지고, 리비도도 더 이상 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우울은 애도와 유사해보이지만, 다른 역동에 바탕한다고 프로이트는 주장한다. 프로이트는 애도에서와 같이 우울에서도 특정인에게 부착된 리비도적 애착이 한때 존재했고,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의 실망감 혹은 실수 때문에 대상관계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 결과 정상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대상으로부터의 리비도를 철수하고, 그 에너지를 새로운 대상에 대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우울에서는 새로운 대상으로 리비도가 철수하지 않고 자아 속으로 철수한다. 다시 말하면, “대상의 그림자가 자아에게 떨어진 것이다”라고 표현하듯, 우울 속에서 유기된 대상과 자아의 동일시가 일어나고, 바로 이 때문에 우울이 병리적이 된다. 애도에서는 세상이 약해지고, 공허해지지만, 우울에서는 바로 자아 그 자체가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우울의 병리적 성향 규명을 위해 프로이트는 또한 우울에서의 자아의 분리에 관심한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달리 우울환자의 경우, 자아존중감이 과도하게 약화되어 우울 환자는 자기 자신이 무가치하고, 어떤 성취도 이룰 수 없고, 도덕적으로도 벌 받아 마땅하며, 자기 책망과 과도한 자기비판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이는 바로 대상상실이 자아상실로 변형되어 나타난 결과로 자아와 사랑하는 대상 사이의 갈등이 자아의 분열을 초래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소위 비판적 매개(critical agency), 혹은 양심이라고 불리는 것이 자아에서 분리되어 나와 독자적인 행동을 하게 되며 자아의 나머지를 무의식적으로 적대하고 감시할 뿐 아니라 대상으로 삼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울에서는 도덕적 잣대를 근거로 자아에 대한 심한 불만족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되는 것이다. 우울환자가 일반적인 잣대보다 훨씬 높은 잣대를 들이대어 자기를 지나치게 책망하고 벌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울과 연관하여 가장 많이 논의하는 것은 바로 자살이다. 프로이트 역시 이를 간파하며 어떻게 자신이 자신을 죽일 수 있겠는가를 질문하며, 우울의 상황에서 자살이 가능한 까닭을 바로 위의 논의에 기초하여 전개한다. 임상경험을 통해 프로이트는 우울여성의 자기책망의 내용이 실제 자신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우울을 야기한 여인의 남편에 대한 책망이라고 파악하였다. 때문에 프로이트는 우울에서 의미 있는 대상 상실의 경험은 대상을 향한 사랑과 자신을 유기한 대상에 대한 분노가 혼합되어 있고, 그 혼합된 감정이 자아에 전이되어 잃어버린 대상을 자기 안에 흡수하게 된다고 한다. 자살은 바로 자기 안에 통합된 이 대상을 무의식적으로 대상 혹은 타자로 다루기 때문에 가능하며, 자살을 통해 자아는 바로 이 대상/타자 제거를 시도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울환자에게서 많이 드러나는 자기증오, 자기-체벌, 혹은 환자 역할(sick role) 역시 공격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안에 통합된 대상에 대해 고통을 가하고 복수하는 위의 심리역동의 한 반영이라는 것이다.
        우울에 대한 프로이트의 고전적 논문은 우울에 대한 조야한 이해를 주로 한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볼 때 가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특별히 대상 상실의 개념을 중심으로 우울의 심리역동을 세밀히 분석하였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이론은 젠더 중립적(gender neutral)이어서, 여성이 왜 남성보다 더 우울을 경험하는가에 대한 젠더차이를 규명해내지는 못하였다. 또한 우울을 개인의 문제로 봄으로써 우울 배후의 문화적 분석이나 대인관계에서 힘의 역동에 대해 적절한 관심을 표명하지 못하였다.

2. 우울증의 여성주의적 이해

        급격한 사회변화와 함께 19세기 처음으로 여성의 우울증상이 부각되며, 여성이 우울증에 왜 더 취약한가에 대한 질문이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전문가들의 논의에도 불구하고, 이는 오히려 여성의 문제성을 더욱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에 현대 여성학자들은 문화분석에 기초하여 우울증상을 연구함으로써 우울증과 젠더 연구의 구조적 전환을 시도한다. 즉,  ‘대상(object)’에서 ‘자아(self)󰡑로, ‘여성󰡑에서  ‘문화’가 문제다 라는 시각의 전환을 개시하였다.  
1) 역사적 배경
        19세기에 우울증의 젠더차이에 관심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정신장애에 다음과 같은 증상을 드러내는 중산층 이상의 여성이 획기적으로 증가하였기 때문이었다.

여성은 점차 창백해지고 마르고 거의 먹지 않으며, 먹어도 거의 살이 찌지 않는다. 바느질하기, 읽기, 쓰기, 산보하기 등 모든 것에 싫증을 내고, 소파와 침대만을 유일한 휴식처로 삼는다. 치료에 비싼 돈을 들여 보지만, 여전히 아프고 쑤시고 잠 못 이루며, 지속적인 자극과 끊임없는 원기회복제가 필요하다…….

이전까지 정신장애에 젠더차이는 단순히 기독교의 타락설화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아담보다 이브가 더 죄를 많이 지은 까닭이라 이해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위와 같은 여성 정신장애의 창궐에 관심하며 연구자들은 왜 여성들이 우울을 비롯한 정신장애에 더 고통 하는가를 심각하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도하였다.  
        이의 해결을 위해 산업혁명이후 분명해진 젠더역할의 차이를 응용하고자 하는 노력도 있었다. 가정경제활동에서 비교적 동등한 역할을 담당했던 이전 사회와 달리 산업혁명은 남성과 여성을 각기 일터와 가정으로 재배치했다. 그러면서 남성은 이성적․공격적인 반면, 여성은 남성의 반대 혹은 보조로서 감정적 ․ 관계적이라고 규정, 명확한 젠더구획을 설정하였다. 정신치료에도 이와 같은 견해가 반영되어 여성의 정신치료로 ‘휴식치료(rest cure)󰡑를 제시하였는데, 이는 여성이 자녀에 대한 헌신적인 돌봄과 남편의 보조 역할로 돌아갈 때 치료될 수 있다는 인식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울증상을 나타내는 한 여성 작가에게 의사는 여성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고 남성의 역할을 한 때문으로 보고 살아있는 동안 절대로 다시는 펜이나 화필을 잡지 않도록 권고했다. 남성이 주로 하는 책 쓰기를 완전히 포기하고 집에서 자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쉬어야 낫는다는 것이었다.   정상성을 대변하는 남성의 반대 혹은 결여로서 여성을 이해함으로써 여성은 신경장애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었다.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관심 역시 우울에 있어 여성의 본래적 취약성을 설명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우울발병의 가능성이 여성 전체에게 매우 높지만, 우울은 특별히 여성의 재생산 기능시기, 즉 초경, 임신, 산후, 폐경기에도 많이 발병한다. 때문에 호르몬의 기능에 대한 현대의 발견 이전까지 여성의 재생산과 정서기능장애와의 관련성은 그리스 시대 이후 별 변화 없이 끊임없이 논의되어왔다. 이에 따르면, 여성의 자궁, 난소 및 기타 생식기관은 정서를 통제하는 뇌와 경쟁하며 혈액을 공급받는다. 그런데 재생산 기능을 활발히 수행하는 동안 부족한 혈액을 뇌로부터 가져오는데 이로 인해 뇌가 충분히 기능하지 못함으로 여성은 지적 능력 뿐 아니라 이성적 ․ 합리적 능력이 저하된다는 것이다. 여성의 모성본능 역시 타인에 대해 비이기적 태도와 헌신적 감정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여성의 정신 상태를 유약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울증에 대한 프로이트의 역동이론이 젠더 중립적이었던 반면, 프로이트의 발달이론은 우울 및 정신장애의 취약한 여성성을 설명하는 효과적 자원으로 사용되었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모든 성인의 인격구조는 어린 시절 심리성적 발달단계의 경험에 기초한다. 그런데 남아와 여아는 그들의 신체적 다름, 즉 남근의 유무 때문에 성활동을 다르게 경험하고, 이로 인해 남녀의 성별 태도도 궁극적으로 다르게 발달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남근기에 여아는 자신을 결함 있는 존재로 자각, 남아보다 좀 더 자기학대적이며,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성향을 갖게 되며, 이것이 여성의 정상적인 성격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여성성이 우울에 취약하게 하는 성향이므로, 여성성 그 자체가 바로 우울 취약 요인이라는 것이다.
        여성 이론가인 캐런 호니(Karen Horney)나 클라라 톰슨(Clara Thompson)이 이와 같은 프로이트 이론에 반박을 시도하였다. 호니는 인간의 성격발달에 있어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가부장적 사회와 문화가 여성의 창조성을 저하한다고 간파하였다. 또한 여성의 열등감이나 매조키즘, 수동성 등은 남근선망 때문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사회의 차별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남근을 그 주요 이유로 한 프로이트의 이론을 거부하고,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을 수동적․ 자기학대적․ 자기도취적 성향을 강화한다고 주장했다. 톰슨 역시 호니처럼 여성이 남성보다 더 죄책감․ 열등감․ 자기경멸을 갖는 경향은 생물학적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여성 심리의 변화는 법적․ 정치적․ 사회․경제적 변화가 동반될 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호니나 톰슨의 주장은 남성보다 여성이 더 수동적이고 가학적이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자체를 도전한 것은 아니었으며 당대 많은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다.  
        우울의 젠더차이를 여성의 취약성으로 보는 견해에 대한 근본적 반박은 현대 여성주의 이론가들에 의해 시도된다. 이들은 19세기 이후 전개된 젠더차이에 관한 다양한 논의는 여성에게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여성을 문제로 귀결시키는 상황을 초래하였다고 본다. 즉, 정신장애와 젠더에 관한 전통적 논의는 심리학적, 생물학적, 사회학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취약한 상황에 있으며 여성의 구조적 취약성이 결국 우울이나 정신장애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도식을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별히 전통 이론은 건강한 성인의 자존감은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내적자원 혹은 독립적 자원에 의해 유래한다고 보았는데 남성과 달리 여성을 관계적이고 의존적으로 규정할 경우 여성을 이중구속에 묶이게 한다는 것이다. 즉, 관계성을 지향하게 하면서 동시에 그 가치를 낮게 평가함으로써 여성은 여성적이 될수록 병리적이 되는 문제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주의자들은 “관계에 대한 불건전한 의존을 중심으로 여성 우울증의 취약성을 설명하는 것은 재고 할 필요가 있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특히 최근 관계적 자아 이론가들은(self-in relation theorists) 남성과 달리 여성은 분리되고 독립된 존재로 자신을 이해하는 것 보다 자신을 관계적인 존재로 경험하는 것이 더 정상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애착을 성장의 주요자원으로 본 대상관계이론가들의 영향 속에서 여성은 남성과 다른 자아 수용능력 및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이의 형성에는 관계와 문화가 영향 미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여성의 관계성을 여성의 약점이 아닌 장점으로 보고, 우울의 젠더차이는 여성의 관계적 능력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가부장적 문화 배경에서 경험하는 여성 관계성의 질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여성우울이해의 방향전환을 시도한다.
2) 우울증, 젠더, 그리고 자아상실
        우울증의 젠더차이를 문화분석을 통해 여성에게 좀 더 건설적인 방법으로 규명해내고자 하는 여성학자들은 다시 프로이트의 통찰에 귀 기울이며 우울에 관한 프로이트의 역동이론을 문화분석을 통해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전개한다. 그리하여 프로이트의 역동이론이 우울을󰡐대상(object)󰡑과 연관하여 이해한 반면, 현대 여성학자들은 우울의 관심을 󰡐자아(self)󰡑로 이동하여 관심한다. 즉 프로이트를 비롯한 이전의 우울연구가 문화적 컨택스트와 유리되거나 분리된 남성 중심적 문화배경을 전제하였다면,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우울증상의 이해에 있어 젠더차별적 문화배경에 관심하며 이의 배경에서 삶을 영위하는 여성의 자아경험이 우울의 젠더차이를 초래한다고 이해한다.
        먼저, 여성학자들은 프로이트와 대조적으로 여성 우울의 주요원인은 ‘자아상실’로 이해한다. 러너는 상실을 우울과 연관시킨 프로이트의 통찰이 뛰어나지만, 여성의 우울은 프로이트가 지적한 대상상실로 야기된 것이라기보다 가부장제 문화에서 관계와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를 상실한 때문이라고 한다. 즉 여성의 우울은 관계성에 예속되고 관계에 자신을 맞추려고 압박당할 때 일어나는데, 남성 중심적 가정과 사회 문화에서 여성은󰡐나󰡑와󰡐우리󰡑사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지속적으로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 욕구와 반대되는 일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회문화 속에서 확고화된 젠더역할의 내면화가 여성의 자아상실을 초래하고 결국 우울의 젠더차이를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러너는 또한 여성우울의 젠더차이는 여성의 관계적 성향 그 자체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 문화에서 󰡒여성에게 무엇이 일어나는가?󰡓에 주목할 때 규명될 수 있다고 한다. 앞서 간략히 살펴본 대로 프로이트 뿐 아니라 몇몇 이론가들은 남성과 비교할 때 여성은 관계적이고 돌봄 지향적이라고 하였고, 이를 여성우울증의 본래적 원인으로 이해함으로써 여성을 문제시하였다. 그러나 러너는 여성의 관계적 능력 및 감정적 연관능력은 인간으로서의 장점이며 원초적 필요로서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관계성 성향을 악용하여 여성의 지나친 자기상실을 강요하고 왜곡하는 문화가 문제라는 것이다. 특히 여성의 자기상실과 자기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수세대간에 걸친 문화경험으로써, 여성이 자신의 원가족과 결혼생활 속에서 자신에 대한 의심을 키우고 자기의 본래적 욕구를 누르도록 하였다. 따라서 여성의 우울은 가부장적 문화의 역기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으며, 가족과 문화의 상호순환하는 압력 속에서 여성의 자아상실이 강화되었다고 주장한다.  
        한편 우울의 젠더차이를 이해하는데 있어 여성학자들이 우울에서 여성의 기능을 좀 더 적극적으로 묘사하는󰡐침묵하는 자아(silencing self)󰡑에 주목한다. 프로이트는 우울의 주요한 특징으로 비판적 매개로서 초자아과 원자아의 갈등을 지적했고, 발달이론을 통해 초자아 혹은 도덕성 발달에 있어 젠더차이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초자아나 도덕성에 대한 감각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우울의 젠더문제에 관해서는 무심하였다. 잭은 바로 이점을 문제 삼으며 여성우울환자에 대한 임상연구를 통해 여성우울의 취약성을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적으로 규명해낸다. 즉, 여성이 우울에 취약한 이유는 가부장제 사회문화의 영향으로 형성된 자아간 갈등 속에서 도덕성을 강화시키는 침묵시키는 자아 때문이라는 것이다.
        잭은 우울한 여성은 가부장적 문화 배경 속에서󰡐선함의 모델(model of goodness)'을 도덕적으로 이상화하고 이의 실현을 추구하지만 불행한 결혼관계가 주요 원인인 대부분의 우울환자의 삶에서 이를 실현하는 것은 거의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울한 여성은 지속적으로 이타성․ 헌신을 특징으로 하는 ‘선함의 모델’을 가족 및 결혼 관계에서 이루기를 원하며 갈등하는 두 자아를 내면에 경험하게 된다. 하나는 가부장제 문화 규준에 순응하려고 하는 관습적 자아(conventional self)이고 다른 하나는 진정한 자기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진짜 자아(authentic self)이다. 두 자아는 대립하고 반목하지만, 우울한 여성 대부분에게 있어 관습적 자아가 진짜자아를 지속적으로 통제하고 교육하며 침묵시킨다. 즉, 우울한 여성이 표면적으로는 수동적이고 의존적이며 무력해보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 그 내면에서는 진짜 자아를 침묵시키고 재갈물리는 관습적 자아가 활발히 작동하고 있으며, 이 과정 속에서 경험하는 자기 정죄감, 죄책감, 내면의 분열 등이 우울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자기는 의미 있는 타자와의 관계에서만 주로 형성되는가? 던랩은 이를 질문하며 여성의 우울이해에 있어 직업적/소명적 자아(the vocational self)󰡑라는 새로운 개념을 소개한다. 우울에 관한 프로이트의 이해가 주로 의미있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상실감에 집중하였고, 여성학자들도 우울의 젠더차 규명에 있어 가족이나 결혼에서의 관계 문제에 집중하여 연구하였다. 그러나 던랩은 여성의 자아를 지나치게 사적 관계성 안에서만 정의하고자 하는 것은 문제이며, 공적 영역에서 경험하는 소명적 자아의 자아수행감과 자아만족도, 신학적으로는 소명감의 회복이 여성우울의 극복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던랩은 초기 여성운동에서와 같이 중산층 백인 여성의 관점에서 일에 대한 순진한 낭만화나 생존을 위해 심한 격무에 시달려야하는 하류층 여성의 노동문제를 간과하지는 않는다. 다만 여성 자신의 능력과 열정이 공적 세계에서 인정을 받고 적절한 공적 역할과 대우를 받을 때 우울의 젠더차이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또한 던랩은 우울한 여성의 자아 이해에 중요한 점은 “자아 언어를 구원하는 것, 최소한 자아를 근대와 탈근대의 중간에 잠정적으로 놓은 것이 바로 우리의 책임이다󰡓라고 한다. 여성 우울의 특성을 규명하는데 있어 관계적 자아 이론가들은 가부장제 문화에서 여성의 자아에 관심하였지만, 이는 여전히 실증인식론의 관점에서 남성과 여성의 젠더차이를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던랩은 사회구성적 관점에서의 자아이해가 사회․ 정치․ 경제 체제에 의해 지속적으로 형성되는 다중 자아를 제안하기 때문에 여성의 자아가 과거나 현재를 넘어 미래에 개방되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본다. 그러나 던랩은 동시에 자아의 완전한 해체가 여성의 우울치료에 효과적이라고도 주장하지 않는다. 이는 우울한 여성이 가장 두려워하는󰡒거기 아무 것도 없다(there is nothing there)󰡓는 생각을 강화할 뿐 아니라 공감대상, 공감 내용에 대한 구체적 지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울한 여성의 자아는 근대와 탈근대의 중간에 위치시키거나,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가 주장처럼 󰡐과정 중의 주체(subject-in-process)’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과정 중의 주체란 분해되지 않으면서도 변화하는 주체, 개방적인 주체, 유동적인 주체를 강조하기 때문에 우울 여성의 정체성을 지지하면서도 변화와 유동성 개방성을 지향할 수 있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3. 목회상담에의 함의

        이상에서 교회 여성우울증의 심리학적 요인을 프로이트와 현대 여성학자들의 이론을 통해 살펴보았다. 우울이 귀신이나 체액의 문제에서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심리역동을 가진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우울이론의 체계적 분석에 주요한 전환점이 되었지만, 우울에 대한 교회나 일반 여성의 취약성에 대한 이론은 무엇보다도 현대 여성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즉 가부장적 사회문화에서 경험하는 여성의 왜곡된 자아경험, 즉 자아상실, 침묵시키는 자아, 직업적/소명적 자아의 부재 때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현대 여성학자들은 이를 통해 여성의 우울은 여성이라면 본질적으로 내재한 심리적 혹은 생리학적 문제 때문에 야기된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 문화에서 왜곡된 관계의 축적으로 야기된 자아감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위의 논의가 우울증을 앓는 교회 여성의 목회상담에 갖는 함의는 무엇인가? 먼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은 목회상담가는 우울증으로 상담하러오는 교회여성에 대해 젠더적 예민함(gender sensitivity)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혹자는 우울증은 상실이나 실존적 불안을 이유로 여성 뿐 아니라 남성도 경험하는 문제라 주장함으로써 우울증에 대한 젠더관점의 목회상담이 불필요하다고도 한다. 이는 우울이 성활동이 활발한 여성에게 현저할 정도로 뚜렷이 나타나는 질환이라는 객관적 정보조차 간과하는 것으로, 젠더차이에 대한 목회상담가의의 무관심의 실태를 드러낸다. 목회상담가는 우울이 남성과 여성 간 젠더차이를 확연히 드러내는 질병임을 인식하고 젠더문제가 교회 여성 우울의 주요 요인일 수 있음을 인식해야한다.
        다음으로 우울한 교회 여성의 상담에 있어 목회상담가는 교회 여성이 주변 관계에서 경험하는 자아감에 대해 세심하게 관심해야한다. 현재 주류교회의 입장은 아니지만, 교회 변방에서는 교회 여성의 우울은 사탄이나 귀신이 개입한 때문으로 보기도 하고, 여성의 우울에 대한 목회상담이 지나치게 약물치료나 기타 심리내적 전문가의 지도에 의존하기도 한다. 필요에 따라 약물이나 심리 접근을 병행할 수 있으나, 우울증의 젠더차이에 예민한  목회상담가는 우울증상을 보이는 교회 여성이 가족․ 직장․ 교회 등 주변의 의미 있는 관계에서 경험하는 자아 경험에 대해 주의 깊게 관찰하며 접근해야한다.  
        우울한 교회 여성을 상담하는 목회상담가는 또한 교회 여성의 자아감 회복을 위해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재성찰할 필요가 있다. 예수의 선교는 모든 인간--남성․ 여성․ 소수자등에 대한 평등한 사랑과 해방을 선포하였지만, 교회는 기독교 신학화 과정 속에서 죄된 인간을 강조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인간의 우울을 조장하였다. 이에 더해 전통 기독교 신학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더 죄 많은 존재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교회는 여성의 자아 상실을 더욱 심화하고 강화하였다. 때문에 목회상담가는 전통 기독교신학에 대한 무조건적 수용을 지양하고, 여성을 존중하고 사랑하셨던 예수의 본모습으로 돌아가 우울한 여성의 진정한 자기회복을 도와야 할 것이다.  
        그럼 젠더 차이에 관심하는 우울한 여성의 목회상담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한 목회상담가의 사례연구를 통해 이에 대한 간략한 그림을 그려보자. 30대 초반의 여신도 S는 자신이 우울을 앓고 있는 것 같이 느껴져서 목회상담가를 찾아왔다. S는 자신의 일본어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다국적 기업에서 자신보다 서른 살이나 위인 남성 상사를 제치고 11명의 남성 스태프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지만, 남성 동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늘 불안하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종종 공허하고, 압도되는 느낌에 사로잡혀있거나 무언가 진이 빠지고 상실한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한편, S는 2년 동안 진지하게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그 역시 S를 자주 볼 수 없다고 심하게 불평하여 S의 스트레스는 더욱 고조되었다. 점차 S는 몸무게가 급격히 늘며 잠자기 만을 원하였고, 항상 피곤하고 정신집중이 안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상담을 통해 목회상담가는 S의 진술처럼 S가 현재 우울을 앓고 있다고 생각하고 상담에서 우선적으로 우울 문제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목회상담가는 먼저 정신과의사를 통해 S가 항우울제를 복용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S는 약의 도움 없이 자신의 문제를 풀고 싶다고 강하게 저항하여 목회상담가는 우울증상에 있어서 약 처방의 필요성을 상세히 설명하며 항우울제에 대한 그녀의 부담을 완화시켜주었다. 그 후 목회상담가는 규준화된 양식을 통해 S가 일과 남자친구 관계 외에 자신의 삶에 자신감이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활동이 거의 없음을 파악하고, S가 자신감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활동을 찾아보고 시도해보도록 도왔다.
        위의 접근이 일반 상담가와 유사한 접근이라면 젠더차이에 예민한 목회상담가로서  위의 상담가는 S의 우울이 젠더로 인해 의미 있는 관계에서 또 직장에서 느끼는 자아감과 관련 있는지 관심하였다. 그리하여 목회상담가는 S가 자신의 젠더 때문에 일종의 이중구속에 빠져있음을 발견하였다. 즉 S는 여성인 자신이 일에서 성공하면, 남자들이 위협감을 느껴 자신을 원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일에서 실패하면 실패자로 인식되어 남자들이 자신을 원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S의 남자친구는 정서적으로 매우 요구가 많고 지배적이어서, 여성학자 잭이 지적한대로 S는 남자친구와 의견이 다른 경우나 남자친구가 분노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경우 미리 예견하여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먼저 침묵시키는 경향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목회상담가는 S가 직면한 직장생활이나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직접 다루거나 S의 심리내적 문제에 치중하기보다, S가 자신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진정한 자아감을 회복하도록 하는데 치료의 중점을 두었다. 가령 S가 진정한 자기에게 가장 근접하게 다가갔다고 느꼈던 때를 회상하도록 하거나,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고 기분이 어땠는지, 또 그때의 친구관계, 직장생활, 가족관계를 말하도록 도왔다. 혹은 S가 당시의 회상 속에서 현재 그녀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무엇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등을 생각하며 S의 주변관계를 성찰하도록 하였다. 결국 S는 자신이 남자친구나 직장생활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남자친구와의 관계에 매우 지쳐있고, 남성 동료들의 평가에도 지나치게 민감하였음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S는 다시 목회상담가의 도움으로 자신이 일본어와 문화가 좋아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처음의 경험을 회상하고 남성 동료의 평가보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삶을 평가하는 방법, 남자 친구 뿐 아니라 다른 친구나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남자친구에게 지나치게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자기 관계와 감정을 성찰하는 방법 등, 자기 사랑의 다양한 방법의 모색과 실천 속에서 점차 우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우울한 S가 치유되는 과정에서 중요했던 것은 목회상담가가 S의 자아감 회복을 위해 대인관계측면을 넘어서서 접근한 것이었다. 목회상담가는 S가 우울에서 벗어나는 길은 대인관계 문제도 중요하지만 S가 자신을󰡐소명적/직업적 자아󰡑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S가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보람을 느끼는 직업을 통해 성취감과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하였다. 또한 목회상담가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애타게 찾으시는 하나님,” “제자들을 소명의 길로 인도하신 예수” 등 성서적 이미지에 기반하여 여성 S의 자기사랑과 자기돌봄이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것으로 확신하며 신실하게 S의 회복을 도왔던 것이다.    
        교회 현장에서 우울한 많은 여성을 접하면서도 젠더차이에 대한 진지한 관심 속에서 목회상담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목회상담가로서 우울증의 젠더차이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 뿐 아니라 생리적․ 인지적․ 신학적 요인에 대한 추후 연구를 통해 우울한 교회 여성에 보다 효과적인 목회상담이 이루어지도록 지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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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소개) 2


제의 중앙화의 역사성과 신학

                                                 박신배 (그리스도대 조교수/ 구약학)


초록

이 논문의 목적은 신 12장의 제의 중앙화 요구,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예배를 드리라는 제의 주장을 연구하는데 있다. 이 제의 중앙화의 역사성과 신명기 사가의 신학을 연구하는데 목적이 있다. 과연 제의 중앙화가 언제부터 시행되었는가. 솔로몬 왕 때 시행된 제의 중앙화는 히스기야 시대 처음으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적의 침입을 대비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목적으로 실시하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적 제의 중앙화를 실시한 시대는 히스기야 때라는 것을 입증한다. 지방 성소 폐쇄와 성전의 십일조세, 제의 개혁 대상 등의 논의를 통하여 히스기야의 제의 중앙화 개혁은 역사성이 있음을 밝힌다. 신명기 역사 본문에서 히스기야 제의 중앙화 본문에 대한 연구에 주목하여, 제의 중앙화의 역사성을 증거한다. 느후스단 기사와 유월절 준수에 대한 역대기 전승, 랍사게 연설, 고고학적 증빙(하란제의), 므낫세의 관계에서 제의 개혁 등을 살핀다.
신명기 사가의 신학과 히스기야 제의 중앙화의 역사성이 어떻게 구별되고, 인식되는지 연구한다. 그래서 신명기 역사서 전반에 대한 제의 중앙화 신학을 연구한다. 여호수아 시대부터 시작하여 사사 시대, 바빌론 포로, 귀환 시대까지 제의 중앙화의 신학적 성격을 살핀다. 제의 중앙화와 제의 순수화의 강조와 더불어 신명기 역사 신학은 가나안 정복, 이방 침공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제의 순수화에서 실패할 때 이방으로부터 침공 받는다. 히스기야, 요시야 시대는 특별한 제의 중앙화 신학으로 발전되어 제의 개혁을 하고 야웨 신앙에 충실함에도 침공당하는 역사를 본다. 그 후 포로 시대는 제의 중앙화의 영성화가 이루어져 회당 제의가 형성된다. 이를 통해 제의 중앙화 전승이 시대마다 다른 형태로 발전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논문은 제의 중앙화 전승의 전체 발전 양상을 염두에 두며, 그 역사성과 신학에 대하여 연구한 것이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 논문에서는 각 시대 마다 그 전승을 세밀하게 살피지 못한 한계도 있다. 이는 다음의 연구과제로 돌린다.

주제어: 제의 중앙화, 제의 영성화, 히스기야 개혁의 역사성, 신명기 역사 신학, 제의 중앙화 전승, 제의 순수화, 역사적 증빙



1. 들어가는 말

신명기 신학에서 제의 중앙화는 중요한 신학주제로 신명기 역사 논의에 있어서 중심 문제가 되었다. 신명기 역사에서 ‘제의 중앙화’의 요구와 기원, 그리고 후대에 제의 중앙화 대한 발전된 상태에 대한 문제 등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라는 신명기(신 12: 5, 11, 14, 18)의 제의 중앙화 요구는 언제 실제로 이루어졌는지, 신명기 법전(신 12 - 26장) 안에서 과연 이 제의 중앙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히스기야 시대에 제의 중앙화 시행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성서 본문에 나타난 그 보도가 사실인지,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실로서 역사성을 담보하고 있는지, 히스기야 왕 당시에 제의 중앙화에 대한 신학적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신명기 역사 전체 신학의 큰 틀에서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제의 중앙화의 전승이 언제 시작되고 어떻게 변천되었는지, 그 전승의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찾고자 한다. 신명기 개혁 운동은 열왕기하에 기록된 히스기야 왕과 요시야왕의 통치시대를 중심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두 왕의 시대에 제의 중앙화가 강조된다. 신명기 역사의 전체 맥락에서 이 논문에서는 제의 중앙화의 시기와 역사, 그 역사성, 그리고 신명기 역사에 나타난 신학적 의미를 고찰하는 것이 목표이다.

2. 제의 중앙화 조치와 히스기야 개혁

벨하우젠은 솔로몬 시대 이전에는 예루살렘 제의중앙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스라엘 역사 초기에는 합법성을 지닌, 유일한 중앙 성소를 찾아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족장시대에는 세겜, 벧엘, 브엘세바의 성소가 나타나고, 사사시대가 끝날 즈음에는 실로가 합법적인 제의 장소가 되었지만 유일한 제의 중심지라고 언급하지 않았다. 그 후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후 한 민족, 한 왕국이라는 통일 의식으로 백성을 연합하고 일체감을 갖기 위해 하나로 묶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제의 중앙화를 이루었다.

“솔로몬 성전은 그의 관저가 있는 도시의 매력을 증가시키도록 계획되었다. 이런 방식의 정치적인 중앙화가 제의의 중앙화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을 것이고, 정치적인 중앙화의 경향이 두 왕국의 분열 이후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분명하다. 왕실의 제사장들, 거대한 국가적인 성전들, 전체 백성이 모이는 축제, 웅대한 규모의 희생제의, 이러한 것들은 단순했던 제의가 이제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인상을 보여주는 특징이 되었다.”

솔로몬 이후에 제의 중앙화가 얼마간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마리아가 멸망한 이후(주전722년)에 예루살렘과 성소의 중요성이 증대되면서 정치적, 종교적으로 예루살렘 중앙 성소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되고, 다른 성소들도 여전히 존재하였다. 이것은 초기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를 드렸다는 기사에서 엿볼 수 있다(왕상 3: 2-15). 솔로몬 이후 예루살렘 성전은 중앙 성소로서 중심의 위치를 차지하고, 백성들이 인정할 수 있는 중앙의 예배 장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방 성소들도 여전히 존재하였다. 벨하우젠은 히스기야 왕이 지방 성소들을 폐지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제의 중앙화 조치와 더불어 제의를 개혁하였다는 증거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제의 중앙화 노력은 의심스럽다고 주장한다.
벨하우젠은 히스기야 개혁을 보잘 것 없는 것 개혁 중에 하나로 보며, 지방의 다른 성소가 여전히 존재하였다는 논지에서 히스기야 개혁을 평가한다. 이러한 입장은 요시야 개혁에서도 똑같이 지방성소의 완전한 철폐 개혁(왕하 23장)에도 불구하고 요시야의 사후에 지방 산당이 사방에 퍼져 있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강력한 제의 중앙화 개혁을 통한 지방 산당의 폐지는 거의 불가능하였다고 보았다. 이러한 벨하우젠의 논의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히스기야 제의 개혁의 역사를 이해하려는 입장에서 논의하지 않고, 신명기 역사가의 제의 중앙화 강조를 후대의 역사적 산물로서 보는, 포로시대의 저자의 신학적 해석이라는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입장은 역사적 신빙성을 추구하지 않는, 신학적 사고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벨하우젠은 제의중앙화의 의지는 바빌론 포로 시대와 그 이후에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가졌던 생각이라고 보고 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들은 민족이 아닌 종교 단체였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에 정착하였고, 또한 지방 성소의 회복을 결코 생각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당연하다. 한 분이신 하나님은 단 한 곳의 예배 처소를 가지고 계신다는 원칙은 그들 존재의 일부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유월절 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제사 드리며 제의 중앙화 축제를 실시한 것은 언제인가. 대부분 요시야 왕 시대에 훌다가 신명기 율법책(원신명기, 신 12 - 26장)을 발견하고 종교 개혁을 일으킬 때 제의 중앙화 개혁을 시행하였다고 본다. 또한 분열왕국 초기에 여로보암 왕이 단과 벧엘에 성소를 만들자 남 유다의 초대왕 르호보암이 제의 중앙화를 시도하였다는 이론이 있다. 하지만 역사적인 신빙성의 측면을 좀 더 고려하면 제의 개혁을 시행해서 아시리아 산헤립 왕이 침공하는 것을 대비해야 하는 과제가 있어서 요시야보다 이전 시기인 히스기야 왕 때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고 본다. 히스기야 왕은 과거 솔로몬이 온 이스라엘 회중을 모아 놓고 제의를 거행했던 것을(왕상 8: 63-66), 다시 시행하며 통일 왕국을 다시 회복하고 싶은 꿈을 가졌다. 그는 아시리아에 굴종하던 선조 아버지의 정책을 바꾸어서 아시리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였다. 더욱이 히스기야는 북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이 야웨 신앙에서 벗어난 배교와 바알 ․ 아세라 우상숭배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로 인해 야웨가 심판하여 북이스라엘이 멸망하였다고 보고 제의 개혁을 하여 국력을 모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지방 산당을 철폐하고 예루살렘 제의 중앙화를 실시하였다. 지방의 산당이 우상숭배의 온상이어서, 백성들은 야웨 만을 섬기지 않고 가나안 종교, 바알 ․ 아세라 신을 산당에서 섬기므로 제의 순수화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산당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어, 앞으로는 더욱 종교 상황이 악화되어 속주로 전락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 야웨 제의 순수화는 요원해지고 야웨 종교에는 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제의 중앙화의 개혁 조치를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시행하였다. 이 제의 중앙화의 개혁 조치는 산헤립의 침공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히스기야가 제의 중앙화를 시행하며 예루살렘으로 제의를 집중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것은 경제, 정치적인 의미에서 아시리아에 대항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다 왕국은 아시리아의 속국 체제에서 나라 전체가 지방 산당을 철폐하고 세원이었던 지방 성소의 십일조 성전세를 중앙 성소에 보냈다. 따라서 이러한 움직임은 아시리아에 반란으로 인식하게 하였고, 결국 남유다가 제국에게 조공을 끊자 아시리아는 유다의 제의 중앙화 개혁과 일련의 히스기야 개혁 목적 달성을 무산시키려고 침공한다.

“히스기야가 통치하였을 때, 아시리아가 유다 지역을 침입하였다. 아시리아는 유다로부터 땅을 빼앗아서, 보다 안전한 블레셋에게 주었다(왕하 18: 13; 대하 32: 1). 히스기야가 몰수당한 장소에서 성소의 귀한 설비를 아시리아에 의해 순순히 양도하도록 허용하였다고 추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오히려 히스기야는 상황이 악화되자 외곽지역의 성소들을 자진 폐쇄하도록 명령을 하였다.”

로워리의 추정은 산헤립 침공 후 히스기야가 성소를 폐쇄하였을 것이라고 보는데 문제가 있다. 히스기야가 상황이 악화되자 성소를 폐쇄하기도 하였지만 이미 제의 중앙화 개혁을 통하여 상당한 부분 재화를 예루살렘으로 이동시키고 최소의 물자만을 남기고 있었던 상황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로워리는 침공 중에 산당이 폐쇄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점진적으로 성소를 폐쇄하였고, 각 성소들은 연속하여 폐쇄되었고, 금은으로 만든 제의적인 기구들은 유다의 유격대가 보호하여 아시리아 군대의 진격을 앞두고 퇴각케 함으로 포획 당하지는 않는다. 중앙 정부는 금, 은, 봉헌물과 신들의 석상을 예루살렘과 주요 요새도시로부터 제거하였다. 히스기야 통치 때에 유다의 전 도시로부터 모아진 귀중품이 예루살렘 도시로 들어왔다. 그 후에 히스기야는 공식적으로 예루살렘 외곽 모든 성소를 폐쇄하였다고 본다.”
지방 성소의 재건에 대한 관심과 히스기야 개혁 간의 관계는 밀접했고, 산헤립 침공에서 그 재원의 유무는 전쟁의 승패에 중요한 요소가 됐다. 그래서 로워리는 지방 산당의 성전세의 향방은 두 가지 의미에서 아시리아와 유다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았다. 아시리아에게는 침공 때에 경제적인 수입원이 끊긴다는 의미가 있고, 한편, 유다에게는 평시에 산당의 성전세로 국가 수입원이 되지만, 전시에는 산당을 폐지함으로 경제적인 곤란을 겪으므로 특별 십일조를 거두어야 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명기의 특별 십일조의 입법화는 제의 중앙화 개혁 실시 기간 동안에 생존을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이와 달리 크뤼제만은 고대 근동의 조세 제도를 연구하여 신명기(신 12: 7, 17-18; 14: 23, 26)와 비교하여 신명기 사가가 십일조세를 싫어했다고 주장한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십일조세는 지방 산당을 지원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십일조세의 일부가 제국세로 아시리아에 넘어가기 때문이다. 셋째 십일조세가 나약해가는 왕국을 유지해 주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크뤼제만은 신명기 사가가 왕정체제를 반대하는 문서라는 전제에서 이 주장을 하고 있다. 신명기 문서의 성격에서 십일조세가 히스기야 시대에 중앙 성소로 이전되었고, 국가의 수입과 재정에 크게 이바지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열왕기에 나타난 제의 조치로서 지방 성소들과 석상, 아세라 등은 아시리아가 예루살렘을 침입한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 이외에도 히스기야가 야웨께 순종하였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유일한 증거는 느후스단을 부순 것이다. 이 청동뱀 상을 유다 사람들이 숭배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히스기야가 사마리아 제의에 간섭하였다는 것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핸디는 히스기야 왕이 야웨 유일 신앙의 종교 정책을 지향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요시야왕의 제의 개혁의 목록에 나오는 신들을 히스기야 개혁 기사에는 거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히스기야가 잠재적으로 다신(多神) 체제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납득하기 힘든 것으로, 요시야의 목록에 나오는 신들을 제거하였다는 기사가 없더라도 산당과 바알 ․ 아세라 석상을 제거하였다는 것은 야웨 유일신 신앙을 나타내어, 오직 야웨를 섬기는 순수한 제의를 지향하는 조치였다. 히스기야는 후대의 요시야 왕과 버금가는 종교 개혁을 수행하였고, 아시리아로부터 독립하려는 의도로 제의 개혁을 시행하였다. 그는‘온 이스라엘’(남북통일)이라는 국가체제로 통일하려는 의지가 강하였다. 히스기야는 솔로몬 시대 이래로 처음으로 유월절 행사를 대대적으로 치렀고, 성전 제의 청결작업을 하였다(대하 29: 1 - 31: 21). 그래서 포로 시대의 신명기 편집자의 신학의 관점에서 히스기야가 온 이스라엘의 통일과 회복의 희망을 가진 자로서 역사적 이상자와 모델이 되었더라도, 히스기야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는 초기 신명기 역사가들도 그의 제의 중앙화 개혁을 보면서 히스기야를 제2의 다윗으로 보고 있다. 그는 북 이스라엘의 멸망과 같은 불행한 결과가 유다에는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고 통일의 시대를 열 통치자로 보았다. 이것은 이사야 전승에 잘 나타난다. 이사야 저자는 히스기야 왕을 임마누엘로서 온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로 보고 있다(사 7: 14-16; 9: 2-3; 11: 1-3).
한편, 북 이스라엘의 야웨 신앙 전승이 남 유다에서 보편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예루살렘 궁정에서 시행한 느후스단의 숭배 금지(왕하 18: 4)는 충격이었다. 북이스라엘에서는 자연스런 종교 행사가 남유다에서는 제의 개혁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핸디는 단지 느후스단을 신으로 숭배하였다는 언급만을 하고 있지만 실은 유다 사회 안에 청동뱀 숭배가 만연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느후스단은 북 이스라엘의 전통을 갖고 있어서 오래 동안 북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으로 모세의 전승과 함께 내려오며 민간 신앙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민 21장 6-9절은 이를 잘 보여 주는 구절이다.
핸디는 무거운 조공으로 인해 히스기야가 제의 개혁을 행할 수 없었다고 하며, 유다 종교를 대대적으로 개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시리아 왕 산헤립의 침공 기사에 나타난 바에 사마리아에 어떠한 소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역대기에 묘사된 히스기야 개혁의 대대적인 보도는 그 기사의 역사성을 크게 의심하게 하는 것이라 본다. 성서 기록의 제의 개혁 조치 기사는 단지 아시리아 피지배 상황에서 제의행사를 하는 몸부림치는 정도의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히스기야 치하에서 종교 개혁을 묘사하는 다른 증거는, 피 정복 국가의 상황에서 한 통치자가 제의 중앙화를 통한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갖는 행동으로 보일 수 있다. 이렇게 핸디는 종교 개혁 조치가 피정복의 상황에서 보이는 방어적인 수단의 하나로서 해석한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좀 더 적극적으로 제의 중앙화 개혁을 통하여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하며 총체적 개혁을 통해 국가의 총력을 모으는 저항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왜냐하면 수로 사업이나 히스기야 성벽을 수축한 것은 그러한 제의 중앙화의 일환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스기야의 개혁 동기는 단순히 개인적인 경건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정치적인 동기로 개혁한 것이었다. 더욱이 하나의 중앙 성소로 제의 중앙화한 것은 사법적 개혁을 수반하기도 한다. 지방 성소에서 사법 기능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왕하 18장 22절에 나타난 것처럼 제의 중앙화의 조치는 산당을 폐쇄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집중화시킴으로 왕과 성전, 지방 도시사이에 왕의 권위를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히스기야의 종교 ․ 정치적인 개혁운동은 다윗과 솔로몬의 옛 왕국을 회복하려는 목적을 가졌고, 이 당시의 다윗 왕조를 강화하며 히스기야 왕권을 강력하게 하며, 반 아시리아 정책을 전개하였다. 아시리아에 대항한 히스기야 중앙화 개혁은 조공거부를 하자마자 반란 행위가 되었다. 반란이 가시화되고 히스기야는 온 이스라엘의 통일이라는 국가적인 오랜 숙원을 이루기 위해 독립 운동과 정치적 목적을 수행하였다.
로워리는 최초의 남 유다의 히스기야의 반란(705-701BC)은 비참하게 끝났다고 보고, 경제 사회적인 관점에서 히스기야의 제의 중앙화의 조치는 일시적인 효과가 있었다고 보았다. 로워리는 히스기야 개혁은 일시적인 조치로서 아시리아의 침공에 긴급히 대처하는, 비상조치로서 히스기야 제의 개혁을 본다. 반면 요시야의 개혁은 비상조치가 아닌 항구적인 조치로서 조직적이고 포괄적인 제의 개혁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요시야의 제의 개혁 조치가 광범위하게 보도하고 있고, 율법책의 발견으로 인해 더 체계적으로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고 보기 때문이다. 로워리의 이 주장은 역사적으로 입증할 수 없고, 다만 신명기 역사가의 개혁기사의 분량이 많다는 것으로 대대적인 종교 개혁이 많다고 추정한 것이다. 오히려 히스기야 중앙화 개혁은 반란의 조직적인 대비책으로 항구적인 제의 조치를 취하여 반란을 성공으로 이끌려는 의지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왜냐하면 히스기야가 중앙화 개혁을 하고, 아시리아의 조공 지불 금지로 인해 산헤립 왕이 유다를 침공한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고, 그것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왕하 18: 13 - 19: 37). 또한 아시리아의 군대 장관의 입에서 제의 중앙화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고, 그것은 제 3자의 객관적인 입증(왕하 18: 22)이어서 그 신빙성이 있다. 따라서 히스기야가 조직적으로 제의 중앙화 개혁을 시행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은 종교적인 제의 조치가 국가의 힘을 모으는 정치적인 행위가 되고, 반란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를 통해 히스기야 시대의 상황을 더 생생하게 보여 준다. 히스기야의 제의 중앙화 개혁과 조공 금지를 통한 반란, 아시리아 제국이 이를 저지하기 위한 침공이라는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3. 제의 중앙화와 열왕기 본문의 역사성

히스기야 시대에 제의 중앙화에 대한 암시가 열왕기하18장 4절과 랍사게의 연설 본문(왕하 18: 19-35, 사 36: 4-20)에 나타난다. 이 본문에서 제의 중앙화의 역사성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자.
핸디는 히스기야 시대에 유월절 행사를 행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그 역사성은 의심하면서도 다른 제의를 개혁하고, 특히 느후스단 상을 부순 개혁은 인정한다. 부분적으로 개혁의 역사성을 인정한 대목이 열왕기의 개혁기사 본문이다. 그는 성소들(바모트)과 석상들(맛세바), 아세라 목록의 전형적인 기술 때문에 신명기 저자의 편집 이라고 본다. 열왕기와 역대기 기자가 히스기야 시대에 실제 사건에 근거한 이러한 개혁 행동을 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한다. 게다가 느후스단이라고 불리는 제의물의 파괴는 아마도 히스기야 통치 시대 동안에 발생하였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부분적인 역사성 인정은 역대기 역사자료를 후대의 역사 자료로 보는 데서 기인한다고 본다. 히스기야에 관한 역대기 전승 본문이나 열왕기 전승 본문이 히스기야 시대에도 공존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히스기야 시대의 유월절 기사나 열왕기의 제의 개혁 기사를 역사적 신빙성을 가진 기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다른 한편, 열왕기하 본문 안에서 히스기야 개혁의 역사성을 증거하고 있다. 랍사게의 연설은(왕하 18: 19-35/사 36: 4-20) 그 좋은 본보기이다. 그러나 할로웨이는 랍사게의 연설은 역사성이 없고,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의해 몰락 당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신학적으로 재구성되었다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고고학적인 연구 결과에 기인한다. 할로웨이는 신 아시리아의 제의 활동을 개관하며 달신 신(Sin)과 하란(Harran)의 신 아시리아의 제의 보호신과의 관련성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아시리아 정복 목록에서 하란의 언급을 주목하여 랍사게의 연설이 하나의 신학적인 기술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하란의 제의와 고고학적인 역사성과 연관시켜 히스기야 시대의‘하란의 실존이 없다’는 결론은 문제가 있다. 하란 지역과 하란의 역사성 부정은 랍사게의 연설에서 히스기야 제의 개혁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 본문의 역사성을 인정할 때 랍사게의 연설은 역사적으로 실재한 것으로 수용할 수 있다. 성서 기록의 역사성을 인정하는 것은 히브리 문학의 특징, 한 사실의 보도위에는 그 역사성이 있다는 측면을 간과하지 않는 결과이다. 따라서 랍사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적군의 수장이 인정하는 제의 중앙화(왕하 18: 23) 사실, 그에 따른 유다 왕국에 대한 조롱은 신빙성 있는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랍사게 연설 조롱 장면에서 제의 중앙화 조처와 그 개혁의 역사성은 입증된다고 볼 수 있다. 히스기야 왕은 아시리아 군대가 진격하기 전에 지방 성소들을 닫았기 때문에 지방 제의 장소들은 산헤립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폐쇄되었다.

“너희가 혹시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마는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산당과 제단을 제하고 유다와 예루살렘사람에게 명하기를 예루살렘 이 단 앞에서만 숭배하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나니” (왕하 18: 22)

랍사게 연설의 목적은 예루살렘 사람들을 흔들어서 사기가 저하되어 순순히 항복을 하게 하려는 데 있기 때문에 그 연설은 아시리아 선전의 효과가 있었다. 반면, 유다인에게는 수용하기엔 설득력이 있지 않았다. 랍사게가 유다를 조롱하는 장면은 신명기 역사가가 보도하기에는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역사적인 상황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용하였기 때문에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성서를 역사적 자료(사료)로 볼 때, 그 보도는 사실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하다.
다른 한편, 핸디는 산헤립의 침공 이후의 재정상황과 히스기야의 후임 므낫세 왕과의 관계에서 히스기야가 제의 개혁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 추정한다. 산헤립의 침공이후 무거운 보상금과 매년 아시리아에 조공을 받침으로 히스기야는 침공 전후로 닫았던 성소들을 회복할 기금이 없었다. 히스기야는 유다의 도시들을 재건할 만큼의 기금은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성소를 지을 만큼의 돈은 없었다. 확실히 므낫세가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할 때까지 유다의 재정 상황은 미약해서 대대적인 전국적으로 야웨 제의를 재건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므낫세가 예루살렘 도시 보다 더 큰 나라를 얻기까지, 또한 조공을 지불한 후 다시 충분한 기금을 마련할 때까지는 야웨 제의를 재건할 수 없었다.
핸디는 조공을 다 바친 상황에서 제의 재건을 할 수 있는 기금이 없었고, 므낫세는 대대적으로 이방 신상을 위한 제의 시설을 재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히스기야 시대에 침공을 당하여 초토화된 유다의 상황과 연관하여 생각해 볼 때, 므낫세 왕 시대의 제의적 상황을 통해서 히스기야 개혁은 있을 수 없는 제의 개혁이라고 보고, 히스기야 개혁은 역사성이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주장은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비치지만 시대적으로 히스기야 시대와 므낫세 시대 사이에는 시간의 충분한 간격이 있고, 므낫세 왕은 재건을 위하여 재정을 변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므낫세가 얼마든지 재정을 확보할 수 있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피상적인 주장이다. 핸디는 므낫세가 반 야웨 제의를 재건한 것은 열왕기의 저자에게 분노를 일으켰던 것이고, 므낫세는 히스기야가 생명을 걸고 종교 개혁을 하였던 유다의 제의를 원위치에 갖다 놓았던 인물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유로 므낫세는 여전히 히스기야 개혁을 반전시킨 악한 왕으로 신명기 역사가가 그리고 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이방제의를 개혁하고 아시리아에 조공을 바치지 않음으로 아시리아 산헤립 왕으로부터 침공을 받았다. 히스기야가 야웨 제의를 행한 후에 후대 왕인 므낫세가 그 정책을 그대로 따를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핸디는 므낫세 왕의 반 야웨 제의 재건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그는 역으로 므낫세의 이방 제의 재건이 크게 이루어 진 것을 보아 히스기야 개혁은 히스기야 치하에서는 결코 일어 날 수 없었던 개혁이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핸디의 이해는 앞서도 평가한 대로 시간의 간격과 므낫세의 역량을 고려하지 않은 단순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가 기여한 부분은 므낫세와의 관계에서 히스기야 제의 개혁을 살필 수 있도록 이해의 폭을 갖게 해준 것이다.

“열왕기하 18장 4절의 히스기야 개혁의 요약기사는......(생략)




신학사상 2009년 ,겨울호(147집) 차례
신학사상 2009년 여름호(145집)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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