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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연 
 신학사상 2008년 봄호(140집) 차례


이번 호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1988년 2월 29일 총회에서 결의하여 선포한 “민족의 평화통일에 대한 신학적 선언” 20주년을 맞아 특집으로 이 ‘88선언’의 역사-신학적 성격을 다시 살펴보고 변화된 오늘의 상황에서 교회가 어떻게 평화통일의 비전을 새롭게 제시하며 실천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지상심포지엄을 담았다.

연구논문은 먼저 3편의 구약학 논문, 그리스도신대 구약학 박신배 교수의 한국문화에서 성서해석을 시도한 “한국 문화적 성서 해석 방법론”, 숭실대 구약학 김회권 교수가 구약학 교수로서는 획기적이고 의미 있는 시도를 한 “입시 경쟁에 대한 성서적-신학적 이해: 무한경쟁주의 시대에 우리 아이들의 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논문, 역시 구약학 교수인 안양대 김창대 교수는 텍스트 언어학적 방법을 사용한 “예레미야 30-31장 문맥에서 렘 31:22의 ‘새 일’의 의미에 관한 고찰”을 게재하였다.

다음으로 신약학에서 두 편의 논문, 한신대 김재성 교수의 서구 성서해석의 주객구도를 넘어 주객 상호작용적 성서해석을 한 논문 “기적 이야기에 나타난 예수와 민중의 상호작용”, 서울신대 문병구 교수의 “종교사적 관점에서 본 고린도전서의 신학”을 실었다.

그리고 조직신학에서 두 편의 논문, 한남대 이문균 교수의 “칼 바르트의 신학과 설교”, 한신대 강사인 김희헌 박사의 “과정신학의 범재신론 지평에서 본 안병무의 민중 메시아론”을 게재하였다.

예배학에서 우리의 전통문화를 예배에 접목하려는 이숭무 목사의 “봉산탈춤: 기독교 예배로의 도입”, 기독교교육학에서 1907 평양대부흥회를 100주년의 계기로 종교개혁기 교육사상을 현대적 의미로 재조명한 김성은 서울신대 교수의 “종교개혁기 교육사상의 현대적 의미-1907년 평양대부흥회 100주년에”를 실었다.

이제 2월 25일이 되면 새로운 이명박 정권이 출범하게 된다. 10년 만에 여야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10년 전 김대중 정부가 정부수립 50년 만에 처음으로 민주적 정권교체를 하고 이제 다시 정권교체를 하게 되니 이 만큼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성숙한 것이다.
또한 1989년 구소련의 해체와 동구권의 붕괴로 냉전이 종식되었고, 결코 녹지 않을 것 같은 한반도에도 두 번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아직 휴전선이 남아 있지만 평화교류와 평화공존의 물결이 넘실대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과거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갈등을 넘어 새로운 한반도의 비전을 함께 모색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우파정권이기에 한미동맹을 강화하여 실용주의 노선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하지만 이미 녹기 시작한 냉전의 얼음을 다시 얼게 할 수는 없을 것이고 열렸던 문과 길을 닫거나 끊어 놓지는 못할 것이다. 도리어 이데올로기 접근보다 실용주의적 접근으로 남북 협력의 길을 모색한다면 남북관계와 남북의 경제 환경은 더욱 좋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교회와 신학자들도 평화통일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 실천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차례(140집)

심포지엄
분단역사 패러다임에서 평화공존 생활양식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 NCCK ‘88선언’ 20주년의 역사적 의미와 미래 비전
   박종화, 서광선, 오재식, 최영실, 김성재

연구 논문
박신배 ․ 한국 문화적 성서 해석 방법론
김회권 ․ 입시 경쟁에 대한 성서적-신학적 이해:
             무한경쟁주의 시대에 우리 아이들의 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
김창대 ․ 예레미야 30-31장 문맥에서 렘 31:22의 ‘새 일’의 의미에 관한 고찰
김재성 ․ 기적 이야기에 나타난 예수와 민중의 상호작용
문병구 ․ 종교사적 관점에서 본 고린도전서의 신학
이문균 ․ 칼 바르트의 신학과 설교          
김희헌 ․ 과정신학의 범재신론 지평에서 본 안병무의 민중 메시아론
이숭무 ․ 봉산탈춤: 기독교 예배로의 도입
김성은 ․ 종교개혁기 교육사상의 현대적 의미-1907년 평양대부흥회 100주년에



심포지엄

  
주제: 분단역사 패러다임에서 평화공존 생활양식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 NCCK ‘88선언’ 20주년의 역사적 의미와 미래 비전  
                


참석자: 박종화(경동교회 목사)
           서광선(이화여대 명예교수)
           오재식(아시아교육원 원장)
           최영실(성공회대 교수)
           김성재(사회/ 한국신학연구소 이사장)


김성재(이하 김): 먼저 올 겨울 중 가장 추운 날씨에 신학사상 지상 심포지엄에 참석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올해 2월 한국교회는 1988년 2월 29일 37차 NCCK 총회에서 결의하여 선포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 20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 선언을 계기로 군사정권의 탄압을 무릅쓰고 한반도 평화통일에 대한 큰 물꼬를 텄기 때문에 오늘 그 선언의 의의를 다시 살펴보고 또 그 후에 평화통일운동이 어떻게 발전되었으며, 지금은 그 당시와는 많이 발전되고 변화된 상황이지만 앞으로 한국교회의 평화통일에 대한 비전과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이 대회를 제일 중심적으로 주관하신 서광선 박사님께서 그 때의 선언문 성격과 준비 과정에 대한 말씀을 해 주시면서 시작하지요.

서광선(이하 서): 그 때 선언문을 기초한 사람들이 아홉 사람이었어요.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소위원회를 만들고 그 세 부분을 종합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문맥을 통일시켜서 쓴 사람이 접니다. 그러니까 대표 집필자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 준비과정, 그리고 ‘88 선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당사 NCCK의 훈련원 원장이셨던 오재식 선생님께서 맡으셔서 저희 기초위원들은 오재식 선생님의 ‘지령’에 따라서 (웃음) 움직였을 뿐입니다. 준비과정에 대해서는 아마도 오 선생님이 말씀하시기에 적당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그러면 오 선생님께서 국제적인 네트워크-WCC-와의 관계까지 엮으셔서 얘기를 해 주시죠.

‘88선언’의 역사적 배경과 진행 과정

오재식(이하 오): 제가 관련된 것만 말씀을 드릴게요. 1981년에 한독교회협의회가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열렸는데, 그 협의회에서 한국의 통일 문제도 다뤄야겠는데, 독일 교회가 경험을 살려서 좀 같은 입장에 있으니까 나누자. 증언을 해 달라. 그래서 만장일치로 합의를 하고, NCCK에다 통일문제 연구원을 만들기로 결의를 했는데, 거기 위원장이 김형태 목사님이셨어요. 그 다음 해인 82년에 제가 귀국을 합니다. 본래 제가 귀국할 때는 NCCK의 선교훈련원장으로 귀국을 하기로 했는데, 김소영 목사님이 총무님이셨는데 김형태 목사님하고 두 분이 오셔서 ‘한 가지 일이 더 있습니다. 국제 경험이나 민주화 운동에 많이 관련되고 그랬으니 통일문제 연구원도 맡아 주시오.’ 그래서 제가 양쪽을 맡게 됐습니다. 제가 82년 5월에 왔는데 그 해 말에 ‘통일문제 연구회 협의회를 한번 하자’ 하고서 NCCK 회원 교단의 젊은 사람들을 모아서 협의회를 구성했는데 정부에서 간섭하기 시작한 거예요. 통일문제 이야기 못한다, 평화 이야기 못한다. 그래서 장소 계약을 해 놓은 게 전부 다 취소가 되는 거예요. 파이프가 터졌다, 뭐 어쨌다 해가지고 정부는 나타나지 않고 장소를 빌린 사람이 ‘곤란합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 전에. 그래서 두 번 실패를 했어요. 이렇게 되자 통일 위원회에서 WCC에다 연락을 해서 한반도 통일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겠는데, 국내에서 회의하기가 힘드니까 너희들이 좀 나서 줘야 되겠다고 제안했어요. WCC에 CCIA라고 있는데 그게 WCC 안에 있는 국제관계위원회입니다. 거기에 디렉터가 나이난 코쉬라고 인도 사람이었고, 캐나다 에릭 와인가트너, 대만의 빅터 슈 이 세 사람이 이주 삼인방 이예요. 그랬더니 나이난 코쉬가 성큼 답장이 왔는데 ‘해 보겠다.’ 그렇게 됐어요. 그래서 나도 참여해서 준비를 하고 일본 동경 시외 도산소에 있는 YMCA의 연수원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부에서 평화통일협의회 하라 이거예요. 그래서 두 번 실패 하고 제 3차 회의를 지금 정동의 성공회 뒤에 있는 한옥집(거기 강당이 있었는데)에서 했습니다. 3차 회의를 하고 84년 10월에 도잔소에서 국제회의를 개최했는데, 84년이 NCCK 60주년이었습니다. 60주년 기념행사 때 WCC의 필립 포터 총무하고 나이난 코쉬 국제위원장 두 사람이 9월에 한국 NCCK 60주년 기념행사에 왔습니다. 그리고 10월에 있는 도잔소 회의로 간 거죠. 도산소 회의는 동북아시아에 있어서의 평화정착의 문제, 그 틀 안에서 한반도를 다루기로 해서 북한도 불렀습니다.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 대표는 못 오고 일본의 조총련을 통해서 메시지를 보내 왔어요.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한국 대표들(교단 대표 열사람)이 도잔소 회의를 가야 하는데 난감해요. 여권 허락이 나야 말이죠. 그래서 지금 앞에 앉아계신 서광선 박사님께 부탁을 했더니, ‘기다려 봐라’ 하시더니 사람을 하나 소개 했는데, 당시 중정의 대북 담당하는 현홍주 차장이었습니다. 이 분이 플라자호텔에서 나, 에릭 와인가드너, 빅터 슈 이렇게 불러서 점심을 같이했습니다. 그래서 도잔소 회의가 어차피 진행이 된다. 한국 사람이 하나도 안 가면 어떡하느냐, 갈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분이, ‘언제나 평화협정이라는 것은 전쟁 중에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더니 ‘노력 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단 대표 전부가 다 여권 허락을 받고 참가를 했습니다. 그 회의의 결의사항 가운데 하나가 85년에 방북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으로 WCC가 북한을 공식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이난 코쉬와 와인가드너가 갔는데, 그 방문에서 조선그리스도교연맹대표가 WCC를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해 조선그리스도교도연맹 대표단이 제네바에 오게 되고 WCC는 이것을 계기로 제 1차 글리온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글리온은 스위스 제네바 시외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것이 86년 11월입니다. 한국 박경서 박사는 그 전부터 WCC의 아시아 담당이었고 WCC의 대북관계에서 많은 역할을 했지요. 글리온 회의가 그 후 제 3차 까지 진행되었는데 박 박사의 숨은 역할이 기억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통일부 장관이 이홍구였는데, 이 장관이 우리 대표들이 북한 대표들과 회의를 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한국에서는 NCCK의 김소영 총무외 각 교단대표가 갔습니다. 글리온 이후 다른 나라 교회들과도 회의를 많이 했습니다. 한일교회협의회, 한미교회협의회, 한비(필리핀)교회협의회, 한독교회협의회 등 여러 차례 했었는데, 그 가운데 ‘88선언’에 가장 중심이 되는 핵을 짚어준 것이 한미교회협의회입니다.
한미교회협의회는 하와이에서 86년에 열렸는데 그 때 한국교회 대표들도 많이 참석했고 서광선 교수님이 주제발제 중 하나를 하셨고 저는 대회합의문 기초의원으로 일했습니다.  한미교회협의회 발표문을 보면 ‘88선언’이 다룬 문제들의 많은 부분을 미국교회 입장에서 언급했습니다. 86년 글리온 회의에서 남북교회대표들이 만나고 나서부터 국내에서는 힘이 생기고 정부도 노골적인 간섭을 조심했습니다.
‘88선언문’을 위해 NCCK 통일위원회 안에 아홉 명의 기초위원회를 만들고 그 좌장을 서광선 박사님이 맡았습니다. 이 기초위원들은 수십 번은 모였을 것입니다. 기초위원들의 작업이 대회에서 공개토론에 붙여졌기 때문에 비밀이 없었습니다. 정부당국의 주목은 물론이고 교계 각층에서도 비판적인 눈으로 지켜봤습니다. ‘88선언’이 발표되기 나흘전인 2월 25일에 문화공보부 종무실장은 나를 만나서 선언문 초안을 내놓고 나를 협박했습니다. 제 기억에 12개 항목인가를 고치지 않으면 자신이 더 이상 NCCK와 기초위원들을 보호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2월 29일 연지동 연동교회에서 모인 NCCK 총회에서 그 교회의 담임목사요 NCCK통일위원장이었던 김형태 목사님이 동 선언문을 낭독했습니다. 전 대의원이 기립을 했었고 김 목사님은 눈물을 흘리시면서 낭독했지요.
NCCK는 나름대로 또 다른 대책을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88년 4월에 송도비치호텔에다 국제회의를 소집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선언문 발표 후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이 곧 국제적 이슈가 되게 배수진을 친 것입니다.
‘88선언’이 발표된 후에 교계에는 난리가 났습니다. 예장 안에서의 반발은 대단했습니다. 예장 목사님이셨던 김형태 목사님과 김소영 총무님은 큰 곤욕을 치루었습니다. 그 와중에 인천국제대회가 열렸지요. WCC에서는 전직 총무 필립 포터와 현직 총무 에밀리오 카스트로를 위시해서 여러 직원이 왔고 해외 각국에서 많은 참가자들이 왔습니다. 그래서 당국자들은 이 국제대회가 끝나면 ‘88선언’을 문제 삼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회 기간 중에 국회의원 총선이 있었고 야당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당국의 기세가 꺾이고 WCC는 위기를 넘긴 것이지요. 인천대회에서 ‘88선언’을 지지한 것은 물론이고 그해 9월에 글리온 제2차 회의가 열렸는데 거기서도 남북의 대표들과 각국의 참가자들이 ‘88선언’을 지지해주었습니다. 저도 이 회의의 기초위원이었습니다만 북한대표들이 ‘88선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특히 희년의 꿈을 살리자는데 감동받았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때 NCCK 총무이셨던 김소영 목사님이 크게 수고하셨습니다. 교단내의 압력과 비판, 정부의 협박과 압력을 다 막아내고 '88선언'의 전 과정과 관계된 사람들을 보호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교단들은 등을 돌렸으니까 친구들을 통해서 모금을 해서 이 과정을 진행시킨 것이죠. 우선 이것으로 ‘88선언’ 과정과 배경 설명을 마치지요. 너무 길었습니다.

   ‘88선언문’의 신학적 역사적 성격

서: 그 때 한국의 상황을 얘기 하자면, 70년대 유신 정권 때 한국의 기독교 특히 NCCK는 민주화 그리고 인권운동에 나섰습니다. 그래서 군사독재정권, 개발 독재, 고도 경제성장에 따르는 민중의 고통에 대해서 한국 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이 주였기 때문에 유신 정권은 긴급조치 1호에서 9호를 발포하고, 민청학련 사건이니 해서 기독학생 운동과 NCCK의 민주화 인권운동을 탄압하던, 그런 시절이었죠. 그런데 일반 사회 운동권에서 선민주 후 통일이냐, 선통일 후 민주냐 하는 논쟁과 함께 정치학자들, 사학자들은 분단사회 논의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역사, 사회학자들은 한국을 분단사회로 이름하고, 이 분단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이 지식사회의 논의였습니다. 특히 군사독재 정권은 분단 상황에 기생하는 반공 반민주라고 규정하고, 분단 상황을 극복해야만 반공 반북 군사독재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는 논리가 그 시대의 저항적 시대정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79년에 암살당하고 서울의 봄이 오는 걸로 생각했는데 광주 항쟁이 80년 5월에 있었습니다. 광주 항쟁을 해석하면서 역시 광주 탄압이 가능했던 것은 분단 상황이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신군부’가 광주 항쟁을 탄압한 명분이 북한의 남침을 막기 위해서는 광주항쟁을 진압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차별 학살하는 비극이 자행되었습니다. 이 처참한 현실에서 민주항쟁이라는 것이 분단 상황하고 직결돼 있다는 것이 그 시대의 지배적인 인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기독교가 어떻게 이것을 대처할 것인가. 우리의 진정한 민주화는 분단 상황을 극복하는 일과 맥을 같이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오 선생님이 말씀하셨지만 81년부터 논의는, 역시 분단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민주화로 가는 길이고, 분단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평화적인 통일을 향한 것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지요.  
사실 박정희 정권이, 72년 7.4. 공동성명을 발표해서 기대를 했는데, 같은 해 10월에 유신을 공포하고 반민주적 긴급조치 정치를 전개했습니다. 이것은 이율배반이고 자가당착이었습니다. 언론의 자유 없이, 민주주의 없이 어떻게 통일을 논의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저희들은 7.4 공동성명을 민주화 운동의 연결선상에서 분단의 극복, 평화통일을 논의하는  기본적인 원칙으로 우리가 수용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7.4. 공동성명에 대해서 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지만 오늘의 통일 운동에 있어서도 역시 7.4. 공동성명에서부터 출발해야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생각해서 ‘88선언’의 핵심 그리고 NCCK가 채택한 통일의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7.4. 공동성명의 세 가지 원칙-평화, 자주, 민족대단결-을 핵심 원칙으로 삼은 것은 그 시대의 정신을 그런 식으로 파악을 했고 그런 흐름 안에서 NCCK가 한국사회의 요청에 응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것이 한국 개신교회 100년의 역사, 기독교 전체 200년 역사의 평화 애호적인 맥락으로써 ‘88선언’을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선언문의 첫째 신학적인 부분에 있어서 저희들이 강조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평화의 종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한국 기독교는 처음부터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기독교 공동체로 자기 인식을 가지고서 출발했습니다. 즉 평화 통일 운동이 우리의 선교적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틀 속에서 우리는 일제 강점기에 자주독립을 외쳤습니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주도한 3.1운동 역시 동북아시아의 평화라고 하는 원대한 틀 안에서 전개되었습니다. 한국 교회 신사참배 반대 운동 역시 일본의 호전적인 아시아 침략 행위에 대한 항거로서의 평화 운동의 일환이었습니다. 오늘의 한국 민주화 운동과 연결되는 평화 통일 운동 역시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전개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평화 통일 운동은 한국 교회 선교적 사명의 가장 으뜸 되는 우선순위로 채택한 것이 저희들이 파악한 상황에서의 기독교적인, 신학적인 해석이었습니다.

김: ‘88선언’이 나오게 된 과정과 배경 그리고 그 선언의 성격에 대해 두 분이 말씀 하셨는데요, 서광선 박사님 말씀하신 70년대 선민주 후통일, 선통일 후민주 논쟁은 사실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먼저 한 것이 국내로 들어와서 상당히 혼란을 주었습니다. 특히 독일하고 미국. 그러니까 해외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지원하던 분들은 해외에 있을 때는 먼저 민족을 인식하게 되니까 선통일 후민주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어느 것이 먼저여야 하느냐 보다 당시 70년대 국내 상황에서 선통일을 주장하게 되면 국내 민주화 운동이 전부 반공법에 의해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민족 문제나 분단 문제를 간과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운동하려면 민주화운동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었고, 이것을 정리시킨 것이 1976년 ‘명동 3.1 민주구국선언’입니다. 1975년에 장준하 선생께서 의문사 당하시니까 문익환 목사님께서 충격을 받으시고 성서 번역을 하시다가 계시를 받으셔서 ‘내가 뭐라도 해야 겠다’고 해서 발동을 거셔서 선언문의 초안을 안병무, 이문영, 문동환 선생님들이 함께 만들어, 저도 같이 참여했습니다만, 김대중, 윤보선, 정일형, 이태영  이런 분들과 같이 하고 가톨릭신부들과도 연대해서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한반도 통일 문제에 있어서, 1981년에 한독교회협의회 준비과정에서 안병무 선생님이 한국교회 선교 2세기 과제는 민족통일이라는 것을 강조하셨어요. 그래서 한독교회 협의회에 그것을 강하게 추동하셨죠. 이런 과정에서 박종화 목사님이 독일에서 일하고 계셨는데 독일에서의 상황과 한독교회협의회, 도산소회의, 글리온회의, ‘88선언’과 관계된 내용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88선언’과 WCC, 에큐메니칼 국제 연대

박: 저는 76년부터 독일에 있었으니까. 한독 관계를 이야기 하면서 말씀드려 보죠. 한국의 통일 문제를 독일 교회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두 가지라고 봅니다. 하나는 67년 동백림 사건이죠. 동백림 사건을 계기로 해서 한국의 정치문제 중에 이념 문제, 특히 통일 문제가 독일 사회와 교회에 커다란 관심사로 부각됐다는 겁니다. 그 이후에 한독 관계가 공식 수립된 것은 72년입니다. 72년도부터 파트너십을 맺기 시작했는데 동백림사건 자체가 굉장히 사람들 마음을 움직였어요. 왜냐하면 분단국가의 상황인 동서독 관계를 앞에 놓고 늘 왔다 갔다 하면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죠. 제가 81년 한독교회협의회 할 적에 독일에 있으면서 실제 그 곳에서의 준비를 함께 했습니다. 그 때 테마 중의 하나인 동백림 사건을 포함해서 인권문제가 크게 그 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통일, 분단에도 불구하고 인권은 그런 방식으로, 이념적으로 유린돼서는 안 된다.’ 라는 기본 상식을 확인하자는 것이었지요.
두 번째 상황은 75년도 헬싱키에서 모였던 유럽 안보와 협력에 관한 협의회(CSCE)죠. 그 때 독일 교회가 무얼 했냐면 유럽의 NGO와 협력하여 군사안보라는 한 축, 경제협력이라는 한 축, 그리고 제 3의 축이 있었습니다. 그게 인권이었습니다. 삼각형 이예요. 국제회의에서 말했던 인권 때문에 동유럽이 인권을 안 지킬 수가 없었어요. 안보와 협력을 하기 위해서 그런 방식으로 인권이 제기가 된 겁니다. 인권 하나만 나온 것이 아니고, 안보와 협력 및 인권의 삼각구도입니다. 그게 내적으로 동백림 사건에서 있었던 한국에 관한 경험과 연관된 요소입니다.  
또 하나 얘기하자면 그 때 이미 독일 땅에 간호사들하고 광부들이 가서 일하던 시기여서 외국인 인권에 관한 논의가 굉장히 많이 있었습니다. ‘고마운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한 쪽에 있었고, 동백림 사건에서처럼 ‘나쁜 사람들’ 이라는 이미지 이 두 가지가 독일 교회에 같이 있었어요. 그렇게 했는데 그 모든 게 다 헬싱키협의회에서 인권이 삼각형의 하나로 등장하면서 ‘안보와 경제협력과 인권은 서로 묶여 있는 삼각 틀이다’ 하는 관념이 있었고, 이것이 동서독 관계를 매는 하나의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한국 교회와 관련하여 보면, 광주 항쟁이 있은 이후로 통일 문제 제기 되니까 그러면 ‘이 문제를 파트너십의 중요한 내용으로 삼자’ 라고 이야기가 됐는데, 당시에 개념상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국이 요구하는 통일에 대해서, 독일에서는 통일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이해는 하겠는데 자기 것으로 받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독일은 통일 얘기를 안 하고 평화를 말하고 있었거든요. 독일은 2차대전의 책임 때문에 분단되었고, 독일의 통일은 주변 국가들에게 위협적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독일 지식인들, 특히 진보적인 사람들은 통일을 말하지 않고 평화를 말했지요. 그러나 한국과 독일은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한독교회협의회에서 “통일연구소”(가칭)를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었죠. 그런데 독일 측에서는 거기다 ‘평화’ 자를 붙이자는데 우리는 ‘통일’로 단순화 하는 게 좋겠다고들 했죠. 제가 협의회 기초위원이었으니까 그 때 분위기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후 기장총회에서 제일 먼저 총회 내에 “통일위원회”를 출발한 것입니다. NCCK에서 하기 전에 기장에서 바로 받아서 했지요. 1년 전에 기장이 만들었고, 그 다음 1983년에 NCCK가 “통일문제 연구소”를 만들어서 협약이 시작된 거예요.  
이제 도잔소 모임으로 넘어가 보죠. 저는 독일에서 일하던 입장에서 참석을 했고, WCC 주관이었으니까, 에큐메니칼 기구들이 함께 한 것이었지요. 분위기는 아까 다 말씀하셨으니까 더 이야기할 필요는 없는데, 그 때 만약에 WCC 개입이 없었으면 어려웠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때야말로, 제가 보기에는 70년대 WCC라는 국제적 솔리다리티 네트워크가 가동을 한 것이 우리 민주화 운동에 큰 도움이 되었었고, 통일 문제의 얼음을 깨는 데도 WCC라는 국제 네트워크가 절대적인 힘으로 가동을 했죠. 그 때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열악한 상황 때문에 국제기구의 역량이 최고조로 발휘한 시점이 아니었나,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88선언’이 나온 전후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때 처음으로 저는 밖에 있으면서 에큐메니즘이 뭐다 하는 것을 정말 몸으로 체험했어요. 어려울 때 돈이나 인도적 지원받는 정도가 아니구요, 국운을 가르는 문제에 있어서 에큐메니칼 솔리다리티가 이렇게 귀한 거구나 하면서 그 때 느낀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아까 김성재 교수님이 잠깐 언급을 하셨는데 독일의 경우 상당히 친북, 친남 갈등이 심했습니다. 독일 교회는 공식적으로 친북 할 수가 없었어요. 북한교회 와는 파트너십이 없었고, 그래서 ‘파트너십이 있는 교회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전제를 깔고 통일문제를 다를 경우에도 남한의 파트너 교회의 입장을 충실하게 지켜주었죠. 하지만 독일 내부의 과정은 굉장히 복잡했습니다. 두 번째, 공적인 협력관계에 있어서는 교회 대 교회의 파트너십 이라는 게 너무나도 중요한 하나의 메카니즘입니다. 그 때 보니까 그 형식이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제가 밖에 있다 들어와서 ‘88선언’에 참여할 때 서 박사님 아시지만 아마 “죄책고백 문제”를 제일 먼저 꺼냈을 겁니다. 죄책고백이 없이 신학적으로 이 문제를 취급할 수 없다. 그래서 그걸 들고 나왔지요. 그 때 모델은 <슈투트가르트 죄책고백 선언>이 하나의 동기가 됐었습니다. 그 슈투트가르트 죄책고백(1945)이 얼마나 효력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와 상관없이, 그것 없이는 독일 교회가 발전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도 이 문제를 취급하는 데에 있어서 자기의 죄책고백을 먼저 하고, 분단극복과 통일의 문제를 취급해야 한다는 신학적 반성이었죠.  
그 다음 또 하나는 88년 2월 29일 선언 이후 그 다음날 라디오, 신문에 난리가 났습니다. 교회 내에서는 우리 선언이 너무 좌쪽으로 갔다고 하면서 온갖 난리가 시작 됐는데, 지난날의 시청 앞 ‘친북 규탄 대회’ 정도가 아니었지요. 하여튼 ‘이거는 정말 용공선언이다.’ 이런 정도였습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이렇습니다. 3월 1일 북한에서 ‘88선언’ 지지한다고 방송이 나오고, 그것이 노동신문에도 났고. 이게 막 안기부 통해서 알려지니까 모든 보수적 인사나 교단들이 난리를 친 겁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 자료들을 다 모아가지고 있어요. 그 때 신문에 보도된 거 말이에요. 그 때 서명했던 분들 이름하고 유신정권 때 박정희는 우리한테 보낸 모세라고 찬양하고 또 삼선개헌 때 찬성했던 분들하고 그 이름들이 똑같아요. 우리보고 용공이라고 했던 이름하고도 같았어요. 한국 교회가 그 때 싹 갈라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옛날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그런 상황이 현실적으로 있었죠. 그런데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어요.
몇 가지 첨언하자면, 그해 2월 말에 88선언이 나가고 두 달 후인 4월 총선에서 처음으로 야당이 정치적으로 승리했고, 의석이 더 많은 건 아니었지만, 정치적으로 승리하면서 노태우 정부가 유화정책으로 가기 시작합니다. 그 때 이홍구 씨가 통일부장관을 했고, 외교안보연구원장이 임동원씨였습니다. 임동원씨랑 자주 접촉을 하게 됐어요. 그때 임동원씨가 이런 비사를 들려 줬어요. 같은 해에 정부당국의 이름으로 7월 <7.7 선언>이 나왔습니다.  ‘7.7선언의 윤곽이 우리 ‘88선언’의 윤곽과 거의 대동소이하다. 상당부분이 벤치마킹 되었다고 본다‘,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어려운 시기에 누구도 감히 못 했던 얘기를 신학적 확신을 담아서 말해 줬다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 분들이 볼 적에 그게 “평화” 문제였다고 봅니다. 미군 문제, 핵문제 등과 관련된 이슈들을 관심하면서 <7.7선언>을 다시 읽어보면 우리의 ’88선언‘과 맥이 같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도 이런 얘기 하는데 정부가 안 할 수 없지 않느냐 해서 88년 <7.7 선언>이 나오는데 큰 힘이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이홍구 장관의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의 기조도 그렇습니다. 당시 정치적으로 야당이 크게 국회에 진출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된 상황도 있었겠고. 그 때 임동원씨 말에 의하면 그렇게 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 좋은 방안이라도 있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저는 정부에서 소위 ‘운동권’에 속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북한에 많이 방문토록 보냈으면 좋겠다, 거기 못가면 동유럽에라도 보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제시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유는 88년이면요, 동유럽도 상당히 흔들릴 땝니다. 고르바쵸프 서기장의 페레스트로이카가 나와서 한창 동구 공산권이 뒤숭숭할 때 였구요. 일단 직접 갔다 오면 체제의 현실에 관하여 시시비비를 아주 정당히 벌일 수가 있고, 또 이념의 선전과 실체를 몸으로 파악하는 기회가 생기니까 진짜 좋아진다. 막는 것보다 보냈으면 좋겠다. 이런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었죠. 또 우리는 ‘88선언’이 우리니라의 적대적 냉전의 얼음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동의했었어요. 그 당시 정부 분위기도 그랬답니다. 물론 비둘기파의 관점 또는 그런 노선에 계시는 분들의 평가이었겠죠. 강경파는 따로 숨어 있었을 테고요.
‘88선언’이 냉전의 얼음을 깼고, 정부에 하나의 계기를 주었고 사회 운동권에는 약간 반발이 있었겠지만. “이렇게 가야 되는 것 아니냐.” 라는 하나의 가이드라인을 주었다는 의미가 있다고 봐야 됩니다. ‘88선언’이후의 상황이 그랬었습니다. 아까 오 선생님께서 문광부의 어느 실장이 와서 말했다고 하셨지만, 선언 이후에는 그럼 분위기가 싹없어지고 고스란히 몇 달 후에 정부에서 내용을 가져가 버렸어요. 그 정도로 파급효과가 당시 있었다는 것은 제가 보기에도 기적 같은 일이죠. 그 훨씬 이후의 때이기는 합니다만, 임동원 원장께서도 결국 독일 과정을 보니까 교회가 냉전체제를 해소시키는데 엄청난 노력을 하는 걸 다시 깨닫게 된다고 코멘트 하는 거예요. 그런데 NCCK가 바로 교회다. 그런 정도 평가 이였습니다. 햇볕정책을 포함해서 나오는 큰 흐름 속에 교회라는 NGO가 큰일을 하는 것에 대한 감사. 평가 그것이 그 때부터 묻어낫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88선언’이 남북 정부와 사회운동에 미친 영향  

오: 80년 광주 사건이 나고 모든 운동이 다 죽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81년 한독교회협의회가 열린 것입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그리고 교회활동들이 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때에 NCCK가 평화와 통일문제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지요. 83년 국내협의회, 84년 도산소, 85년 WCC 방문, 86년 하와이회의, 글리온 회의로 이어져서 86년 말 부터는 인천송도비치호텔의 협의회가 계속 진행되었지요. 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가 성취되었으나 노태우씨가 대선에서 당선되는 바람에 교계와 민주화운동의 실망과 좌절이 컸습니다. 그런 87년을 접고 88년 초에 '88선언'이 터진 것입니다. '88선언'이 나오니까 교계 보수진영에서는 난리가 나고 나학진 교수가 선두에 선 그룹은 실력으로 우리를 가해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학생단체들은 반대로 감동받고 흥분하고 해서 새로운 운동의 시발점을 만들었습니다. 여러 단체들이 선언문을 필사해서 돌리고 뿌렸지요.
통일부 남북대화사무실에서 나를 초청해서 직원들에게 '88선언'에 대한 배경과 해설을 해달라고 해서 그렇게 한 적이 있습니다. 수사당국에서는 압박을 하려고 했지만 정부 내의 정책입안자들과 그때의 통일부 이홍구 장관 같은 사람들은 이 선언을 주목하고 면밀히 검토한 것으로 압니다.

박: 저는 이번 선언 20주년 행사할 때 코멘테이터가 누구라도 좋습니다만, 당시 정부에서 주도적으로 통일문제를 주도하셨던 이홍구씨, 또는 임동원씨 등에게 요청하여 같이 평가를 했으면 좋겠어요. 적어도 당국자의 입장에서는 어려운 시기였지만, 그 당시 앞을 내다  보면서 우리의 선언을 어떻게 보았느냐고 물어봐야죠.  그런 얘기를 한지 20년이 지났기 때문에 우리끼리만 잔치 하지 말고.

최 : '88선언' 20주년 기념행사가 NCCK 통일위원회 주최로 2월 28-29일 열릴 예정인데, 제가 알기로는 그 때에 임동원씨를 오도록 준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  : 서 박사님께서 80년 광주민주항쟁 진압 계기가 통일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는데, 말씀하신 ‘광주 민주화 운동이 북한 책동이다’라는 신군부의 선전과 함께 또 하나의 원인은 군대를 동원해서 학살했는데, 우리 군의 작전권은 미군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동의 없이 군대가 이런 학살을 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반미운동과 함께 통일운동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당시 광주 미문화원, 부산 미문화원,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하고 방화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88선언’이 지혜롭게 이런 모든 문제를 잘 정리했습니다.
‘88선언’은 5가지 원칙,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7.4 공동성명의 3대원칙에 기초하여  인도주위 원칙과 민(민중참여)의 우선 참여 원칙, 이렇게 다섯 가지 원칙으로 작성되었고, 이 선언 내용에는 외국 군대문제, 학문제등 군사안보 문제까지 담고 있습니다. 이 ‘88선언’을 최종 정리하신 서 박사님이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 주시지요.

서: 88년 4월 인천 국제회의에 독일에서 하이델베르그대학 교수 후버가 와서 주제 강연을 했어요. 한국 측에서는 제가 했고요. 이분이 강연하면서 내내 통일 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통일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통일은 불필요 하고 평화만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박종화 박사가 독일 상황 얘기를 하니까 그 친구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회의에 참석한 한국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분단 독일 사람이 통일을 반대해서 저는 제는 굉장히 놀랐어요. 그런데 우리는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참 공교롭게도 그 친구가 한국을 다녀간 그 다음해 89년에 독일이 통일 됐잖습니까. 우리 보다 먼저요.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통일 염원도 않고, 통일 안 해도 되니까 평화롭게 살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당시 우리에게는 너무도 ‘반통일적’ 생각이었습니다.
미국얘기인데, 86년 하와이에서 있은 한미교회협의회에서 주제 강연을 하게 됐는데 그 때 많이 강조한 것이 그 이후 ‘88선언문’에 반영된 죄책고백이었습니다. 하와이 회의 이후에 나온 미국 교회에의 한반도 분단 상황에 대한 성명서를 보면, 거기에도 일종의 “죄책고백”이 있었어요. 그 긴 성명서의 내용 중 첫 번째 페이지에 미국이 한반도 분단에 대한 책임을 발하고 있어요. 한미 관계의 역사를 나열하면서 한마디, 꼭 한마디 ‘위 아 쏘리 (We are sorry)’ 한국 국민을 향해서 ‘우리는 미안하다’ 그 한 마디 뿐이었어요. 그래도 역사적인 문서에서 미국 NCC가 공적으로 한 그 한마디가 내게는 그렇게 크게 감동적이었어요. 미국 교회는요 지난 50여 년 동안 한반도의 분단과, 한국전쟁에 대해서 조금도 책임 의식을 갖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졌다는 얘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럴 수가 있냐? 자기 나라 젊은 군인들이 죽은 일을 생각만 해도 그 한마디로 끝낼 수 없는 것인데, 남의 나라를 분단시키고, 일본과 싸웠으면 일본을 분단시키지 왜 한반도냐 말이에요. 그런데 겨우 한마디 “We are sorry"로 되겠어요? 우리 보다 훨씬 더 앞장서서 한반도 분단 극복을 위하여 ”평화“ 선교를 위해서 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88선언’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첫째부분은 신학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한국 평화 통일 운동에 나서는 정치신학적인 입장리랄까. 평화신학적인입장이랄까. 통일 신학적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 세 분이 참여했는데, 김창락 교수, 민영진 박사, 박종화 박사 등이었고, 두 번째 부분에서는 한국교회가 표방하는 통일 원칙을 내세우고, 남북 당국에 대한 제언을 했습니다. 이 부분을 위해서 주로 이삼열 박사가 기초했고, 또 노종선 박사와 홍근수 박사 그리고 강문규 총무들이 함께했습니다. 세 번째 부분에서 1995년을 “희년”으로 선포해서, 평화통일을 향한 교회 갱신과 평화교육 등 평화 통일을 향한 실천적 과제를 제시했습니다. 이 부분을 김용복 박사가 주도했고 오재식, 민영진 박사 등이 참여했습니다. 이 모든 분들이 여러 번 모여서 독회를 거듭하고 논쟁도 많이 했습니다. 기적적으로 기초위원회가 결렬하지 않고 끝까지 협력해서 이런 문서를 만들어 낸 것은 역사적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특히 첫째 부분에 밝힌 한국 기독교, 즉 남한 교회의 죄책고백은 아주 분명하고 절실했습니다. 북한 형제를 미워 한 죄, 북한 형제를 학살하고, 남한에서 북한을 지지하는 동포를 학살하는데 침묵을 지킨 죄, 분단에 대해서 당연시하고 분단 극복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은 죄를 고백한 것입니다. 기초위원들 가운데 분단의 죄는 우리 민족의 ‘원죄’라고 단언하고 그렇게 쓰자고 한 분도 있었습니다. “한국의 오늘의 정치 사회 경제적 모든 문제의 근원이 분단에 있으므로 분단은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의 근원이다. 그러니까 원죄가 아닌가.”라는 발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건 너무 한 거 아닌가?  죄란 말을 하기도 힘들고 창피한데 원죄까지 가면 지나친 것 아닌가”라는 반론이 지배적이어서 이정도로 한 것입니다. 사실 이 죄책고백 때문에 한국 교회가 통일 논의에 있어서 갈라지기도 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탄압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나학진 교수는 죄책고백이란 말을 이북사람이 해야지 왜 남한 사람이 해야 하나. 남침은 북쪽이 했는데 왜 우리가 회개해야하는가 라는 단순한 논리로 선언문 전체를 비난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도 역시 첫 번째 신학적인 부분은 한국 신학사상(史上) 주목해야할  하나의 문서가 아닌가 그렇게 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부쪽에서는 많이 평가를 안 하고 정보부 사람들도 신학적 이해가 없으니까 넘어 간 부분이지요. 그러나 주로 이것 때문에 당시 예장 통합 측 총회장인 김형태 목사가 2월 29일 날 NCCK 총회에서 기립박수로 통과를 시켰는데 그 이후에 각 교단마다 인준을 해야 하는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20년이 지난 오늘날도 예수교 장로교 통합 측에서는 아직도 인준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20주년을 맞이하면서 예수교 장로회 목사들이 해야 할 일이 뭔가 하면 ‘88선언’을 정식으로 인준하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88선언’에 대한 여성신학적 입장

최: 20년 전 인천 송도에서 열렸던 NCCK의 통일대회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대회장 밖에는 소위 말하는 보수주의자들이 ‘빨갱이는 물러가라!’ 라고 써 붙인 현수막들이 걸려 있었지요. 사실 그 때는 ‘통일’이라는 말만 해도 무언가 색깔이 문제가 되는 사람들로 간주되던 때였으니까요. 어느 보수 교회에 속한 목사님으로 기억합니다만, 대회 중간에 손을 들고 큰 소리로 “도대체 통일이 어떻게 복음적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고 소리치다가, 대회장 밖으로 나가버린 사건도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저는 마음속으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비롯해서 에스겔서를 비롯한 예언서들, 그리고 성서 전체가 사실 이스라엘 민족의 분단을 문제 삼으면서 평화와 하나 됨을 요구하고 있는데, 왜 저렇게 말씀하시나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88년 당시에 그렇게 ‘통일’을 문제 삼던 사람들이 지금은 북한에도 다녀오시고 이런 저런 형태로 통일을 위해 애쓰시는 것을 보니, 한편으로는 당시의 통일운동이 참 대단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88선언을 여성의 시각에서 몇 가지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인천에서 열렸던 88대회는 본대회가 시작하기 전날 여성 대회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여성대회의 열기는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했었습니다. 1970년대 한국에서의 여성운동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논리에 의해 희생당한 여성노동자들의 문제, 기생관광, 매매춘 여성의 문제에 관심하는 데 집중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 광주사건 이후, 한국 여성들의 고난과 억압의 문제가 외세의 지배와 민족분단의 현실에서 비롯된 것임을 깊이 인식하게 되어은 한국여신학자 협의회,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기독여민회, 한국여성신학회 등 여러 여성단체와 학회가 결성되고 평화 통일의 문제를 한국여성운동의 주된 이슈로 삼았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88 인천 대회 때에는 그야말로 NCCK 여성위원회는 물론, 한국의 여성운동가와 여성신학자, 그리고 당시 세계 각국에서 온 여성들이 함께 모여서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인해 가장 고난 받은 사람들이 여성임을 증언하고, 평화 통일의 문제가 어떻게 여성들의 삶과 크게 관계되어 있는지를 참으로 감동적으로 논의했습니다. 그 대회 때, 광주에서 온 한 여성이 “광주사건에서의 무고한 희생은 사실상 민족분단의 문제이고, 평화통일의 문제다!”라고 하시면서 외쳤습니다. 당시 그분의 증언은 많은 여성들을 새롭게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성대회 때의 예배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여성들은 평화통일을 상징하는 색동 머플러를 둘렀고, 평화 통일을 기원하는 기도문을 각자 적어서 하나의 끈으로 연결시켰습니다. 이 대회는 한국여성운동을 ‘하나’로 결속시키고, ‘한국여성신학’을 더욱 활성화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88선언’에서 1995년을 민족의 희년으로 삼자는 논의가 나온 후에, 제일 먼저 희년 신학을 정립한 것은 여성들이었습니다. NCCK 여성위원회가 주동이 되어서 1990년부터 거의 1년 동안 여러 번의 워크숍을 거쳐서 1991년 ‘기쁨의 해를 준비하는 여성들’이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이 책은 여성들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희년의 의미를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의미에서 밝히고, 법, 교육, 윤리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희년의 의미와 실천 과제를 제시했습니다. NCCK 신학연구위원회가 발간한 ‘희년신학연구’는 여성들이 출판한 책보다 6년이 지난 1997에 발행되었어요.  

김: 1995년 희년대회를 주로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여성들이 예배를 주관했는데, 그 내용도 예기해 주시지요.

최: 제 기억으로 1995년 선언문에는 여성과 청년이 선언문 초안을 만드는 데 적극 참여한 것으로 압니다. 여성분과에는 최만자 선생님과 저도 참석했었습니다. 당시 선언문에는 희년과 평화통일을 위해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인 실천과제를 제시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성이 주관한 예배는 88대회 때에도 그랬지만, 95년 희년 대회 때에도 우리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는 예배로 준비되었습니다. 평화통일을 위해 여성들이 만든 다양한 예배문안과 기도문이 있었고, 그 이 자료들은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면서 많은 이들의 감동을 일으켰습니다.

    ‘88선언’의 카이로스적 성격

김: 이제 앞으로의 과제 이야기를 좀 해보지요. 놀랍게도 ‘88선언’이 나오고 나서 89년에 소련이 해체되고, 동구라파 붕괴되고 독일이 통일 되었잖습니까? 또한 앞에서 말씀들을 했지만 노태우 정부 ‘7.7선언’과 ‘한민족공동체 선언’을 했고, 이에 근거하여 91년 남북 간에 ’남북기본합의서‘ 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북방정책으로 공산국가인 중국과 러시아와 수교를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남북기본합의서‘를 잘 살펴보면 기본 원칙과 틀이 ’88선언‘과거의 같아요.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6.15공동선언, 이후 노무현정부의 평화번영정책과 2007년 10. 4합의 선언 등으로 이어지는 모든 평화 통일 흐름들이 ‘88선언“의 기본정신과 같지 않습니까? 또한 과거에는 빨갱이라고 비판했던 보수교회들이 앞장서서 북한을 돕는 운동을 하는 것을 보면 하느님의 섭리가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을 다시하게 됩니다.
그런데 평화 통일 운동을 독점하려거나 주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88선언’ 이후 평화 통일 문제는 이렇게 교회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이제는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큰 물결로 흐르는데, 이 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이라면 세력이랄까, 책임적인 입장에서 보면 최근에는 너무 힘이 빠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당시에는 그 누구도 감히 나서려고 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일을 했고, 이것을 계기로 평화 통일 운동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할 일을 할 만큼 했다고 말 할 수 있겠지만 이 시점에서 미래를 위한 새로운 비전과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박 : 제가 보기엔 ‘88선언’이 1년만 늦었으면 커다란 임팩트가 없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1년 뒤에 독일 장벽이 무너졌고, 소련, 동구권이 1년 뒤 공식적으로 무너지는 냉전의 마지막 해가 되었었거든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하나님이 도우셨다고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88선언’ 자체도 놀라운 사건이지만, 계속 미래를 향해서 전진하기 위하여 질그릇 속에 담긴 보물라고 보아요. 이것은 정말 카이로스적인 사건이에요.

서 : 그렇지요. 그 역사적 때를 놓쳤으면 남 다 하는 거 따라서 한 것처럼 됐고, ‘오리지날리티’도 없고 안전지대에서 편하게 한 것이어서 특별한 의미가 없었을 거예요.

박 : 모든 것에는 앞서는 전주가 있었습니다. 우리 일에도 카이로스가 있는 것인데 세계전체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섭리하고 호흡을 맞추는 것이에요.
예를 들면 ‘바르멘신앙고백선언’이 WCC 태동과 연결된 것이에요. ‘바르멘 선언’이 WCC 태동과 관련이 없이 그 이후에 나왔다면 그것이 세계적 돌풍을 얼마나 몰고 왔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바르멘 선언’이 히틀러에 대한 반격도 되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세계교회가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동기를 부여 했듯이, 우리 ‘88선언’도 올림픽 개최의 국내 상황 변화, 국제화의 시작, 냉전의 종식, 등등의 이런 상황변화와 맞물려  임팩트를 주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바르멘 선언’의 신학적인 내용은 별거 아니에요. 자기네가 얘기한 것을 6가지 적은 것 뿐인데, 언제 발표 됐느냐, 어떤 동기로 발표되었느냐, 이런 컨텍스추얼 한 역사성이 중요한 것이에요. 우리의 ‘88선언’이 국내외의 역사적 변화의 틀과 안 맞았을 때는 하나의 신학적 작품으로 남겠지만, 그리 큰 역사적 임팩트는 없었을 것이라 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언을 일종의 “카이로스 다큐멘트” 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동안 신학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89년 전까지만 해도 싫었던 것이 89년의 세계 대변혁이 생겨나면서 그동안 반대만 했던 보수나 우익강경파도 통일논의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토론의 전선에 나온 것이죠. 저는 남북 기본합의서(1991/2)도 이런 역사발전의 연장선상에서 나왔고. 북방정책의 결실로 이아질 수 있었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 남북교회간의 교류에도 훈풍이 불어 왔고, 이것이 결국 카이로틱한 협력의 결실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도 문제가 있더라도 어떤 컨텐츠를 담느냐도 중요하지만, 때의 징조를 어떻게 읽어가면서 그 때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펼칠 것이냐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회기성은 중요하지 안구요 미래  지향형인 때의 징조를 보면서 미래를 밝히기도 하고 미래를 차고 들어가기도 하고 붙잡기도 하고 여러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최: 정말 ‘88선언’은 한반도와 교회의 역사를 새롭게 방향 지어준 카이로스적인 문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88선언’ 이후 20년이 지난 오늘의 현실에서 한국교회의 평화통일의 문제를 논의해 보고 싶습니다. ‘88선언’이 나오던 당시 통일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불온하게 보았던 보수교단의 대표들이 최근에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통일운동을 하면서 북한을 돕는 일에 앞장선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 모두를 통일을 위한 긍정적인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타고 북에 경제적 지원을 하지만, 북측의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공격적으로 북에 가서 교회를 세우려는 분도 있지 않습니까? 또 근본주의적 신앙을 내세우며 태극기와 성조기 들고 이라크 파병 찬성, 김정일 타도를 외치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실 87년 6월 항쟁을 통한 한국 사회의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후 한국 보수 교회의 반통일적 모습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지지 않나 우려됩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숫자를 자랑하는 한국교회의 대다수의 교인들이 통일 문제에 대해 신학적으로나 성서적으로 정말 ‘88선언’이 담고 있는 인식을 갖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만일 NCCK가 중심이 되어 오늘의 상황에서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한 성명서를 낸다고 했을 때. 과연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까 하는 것입니다. 요즘 언론에 비판 보도 되듯이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대형 교회들 목회자들이 세금 납부 문제, 세습 그리고 호화로운 생활로 언론과 사회로부터 말할 수 없는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이름으로 오늘의 현실을 문제 삼고, 선언문을 내고, 통일의 방향성을 제시한다고 해도 얼마만큼의 지지를 받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지 우려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일수록 다시 한번 한국교회가 ‘88선언’을 외칠 때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빛에서 오늘의 역사와 민족 현실을 분석하고,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길을 올바로 선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 : ‘88선언’이 제시한 5대 원칙 가운데 민의 참여 부분은 ‘88선언’ 이후 노태우 정권부터 시작해서 우리 NCCK선언문의 민의 소리가 많이 수렴된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90% 수렴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88선언’에서 인도주의 원칙으로 이산가족의 문제, 그리고 희년 선포의 경제적인 면에서 북한을 돕는 것, 심지어 북에 두고 온 부동산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문제 까지도 담았습니다. 희년이라는 것이 빚을 탕감하고 빼앗은 땅을 돌려주고 하는 정신에서 그런 경제적인 데까지 언급을 했습니다. 특히 저희들이 정부에 제안한 것들이 이후 7.7 선언, 남북합의서, 또 6.15 정상회담, 2007년 정상회담에 나오는 기본 원칙과 실행 프로그램들과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제안한 것 가운데 아직도 추진해야 될 게 북핵문제하고 미군철수 문제,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문제인제. 그 세 가지 중 6.15 선언과 작년 정상회담에서 미군철수 문제는 나오지 않았어요. 우리는 그 만큼 앞서 간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핵문제는 남북합의서부터 계속 나오는 것이고 평화협정 이야기는 이번 2007년 10월 4일 선언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남은 과제가 뭐냐 할 때에 정치적으로 그 세 가지는 우리가 계속 강조하고 그것을 위하여 노력을 해야 하고, 미래의 목소리를 높여야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또 한 번의 카이로스가 오는 것이 아닌가. 반통일, 반북, 친미 정권이 들어서는 마당에 우리의 ‘88선언’ 20주년을 되새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 정부가 그러한 정치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25일 취임식을 하는데 우리가 29일 20주년 모임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또 하나의 계기가 아닌가. 반통일, 반북, 친미 경향의 개발 독재적 복고적인 정권에 대해서 우리가 20년 전의 역사성과 오늘의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다시 한 번 한반도의 평화통일 운동을 전개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 구축을 위해서 교회가 다시 한 번 힘을 내야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박: 비슷한 생각이 하나 있는데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20년 전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그러면 지금 달라진 상황에서 우리가 기본 가이드라인을 지키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뭐냐 그 얘긴데, 예컨대 교회가 6,70년대 노사갈등 속에서 노사 평화를 위해서 노동자들 편을 들어서 싸웠습니다. 그때 노조가 생겨났어요. 인권을 위해서 싸웠더니 국가 인권위원회가 생겼습니다. 우리가 주장한 것이 정치적 결실을 맺기 시작한 거예요. 맺은 이 이 결실들이 우리들이 주장한 기본만큼 제대로 일 하고 있느냐에 대해서 우리는 ‘워치 독’(감시자) 역할을 계속 해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질적으로 성숙화 시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부분이 우리의 책임이지 않느냐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슈가 죽은 것이 아니라 변화된 상황 속에서 또 다른 질적 내용을 지닌 이슈를 찾아야 하죠.
당시 얼음이 꽁꽁 얼어있던 상황에서 기독교의 협력과 연대라는 틀이 오늘날 동북아 안보와 협력이라고 하는 틀, 곧 지금의 6자회담의 대신 적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민간 차원에서 말이죠. 그런데 지금은 6자회담이라고 하는 국제기구가 생겨버렸어요. 그렇다면 발전인데, 이게 제대로 갈 거냐에 대해서 우리가 ‘워치 독’ 역할을 해야 되겠지요. 지금 제가 서 박사님 말씀하신 이슈들, 미군문제, 핵문제 등은 계속 현안 이슈들인데 이게 단순히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아 보여요, 계속 질곡을 거치면서 해결될 건데, 이슈를 놓을 게 아니라 변화된 상황 속에서 계속해서 자꾸 새로운 추진력으로 발전시켜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이죠.
  동시에 옛날의 관점은 계속 살아 움직인다는 선언을 이번 2월 29일 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계속 미래로 움직일 것이다.’ 이렇게 했으면 좋겠고요. 어떻게 보면, 외형적인 역사로 볼 때 많이 이룬 겁니다. 우리가 이룬 것보다도 하나님이 주신 역사 속에서 뭔가 꿈틀꿈틀 하는 힘이 준건데, 더 중요한 것이 뭔가 하니까 우리가 기독교 선언을 했는데 사실 움직인 건 비기독교가 같이 움직여 주었고, 타종교가 움직여 줬습니다. 이것만큼 큰 통일선교, 평화선교의 장이 또 있겠는가. 이걸 생각해 보면요, 장이 엄청나게 늘어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훨씬 더 치밀한 연구와 검토, 모니터링을 하고 미래 대안제시가 더 필요하죠. 이것이 20년 이후의 오늘 우리의 상황입니다. 지금 상황은 딱 20년 되었으니까 점검할 시점이었는데 마침 미국의 선거도 그렇고 우리 정부 바뀜도 그렇고 세계 움직임도 다시 한 번 몸을 추스르고 뛰어야 할 계기가 온 게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서: ‘88선언’에 대해서 여성 팀, 청년 팀들이 95년까지 계속 물고 늘어진 게 ‘88선언’, 뭐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말라, 당연한 소리 한 거다. ‘88선언’의 내용에 보이지 않는 게 뭔가 하면 통일된 한반도의 청사진. 그게 뭐냐. 그걸 밝히지 않았다. 통일을 향해 가는 과정은 얘기 했을지 몰라도 통일의 꿈, 그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그게 무슨 소린가 하면 고려연방제냐 국가연합제냐 하는 “딱지”를 붙이지 않았다 이겁니다. 체제 논의를 안했다. 당시 우리는 통일체제 가기 전의 과정만 얘기해도 충분했다 하는 것 하고 그런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면 이거는 김일성이 편이다 노태우 편이다 거기에 우리가 말려들면 안 되기 때문에 일부러 피한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통일된 한반도의 청사진을 보여줄 때가 되지 않았나. 그러한 비전을 우리가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오: 제가 88년 5월에 제네바 WCC에 부임했는데 제네바 가서 그 다음해에 북한 에이전트가 제 사무실로 왔어요. 여자 한 사람하고 같이 왔는데, 이 사람이 자기소개 하면서 ‘88선언’ 원문을 꺼냈어요. ‘이러면 절 믿으시겠습니까? 이것을 작업하신 분이라고 저희가 알고 오 선생을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에이전트는 나를 유인해서 자기네 네트워크 안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공작 이었던 것 같아요. 그것을 내가 잘 외교적으로 거절했습니다만 그 설명가운데 수령님께서 이걸 잘 읽으시고 특별히 희년 대목에 아주 감동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뭘 좀 해야 되겠다’ 까지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니 오 선생하고 좀 더 긴밀한 협력관계를 만듭시다 이런 제안이었어요.
왜 이 에피소드를 떠올렸냐 하면 ‘88선언’ 20주년이 되는 이 때 다시 앞으로의 20년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 입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체들이 새로운 에너지를 받아서 여러 종교단체들과 손을 잡아도 좋으니까 새로운 진로, 비전을 찾아나서야 하지 않을까. 20년 전에는 냉전체제였습니다만 냉전체제가 끝난 후의 한반도 문제, 민족화해와 협력을 위한 남북합의서를 만들고도 16년이 지났는데 평화체제를 정착시킬 사회적이고 민족적인 프로그램이 없습니다. 지금 젊은 세대들은 이런 구상을 하고 행동계획을 짜서 경험을 축적해가는 연습을 해야 하지 않을까.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은 이런 계기를 만들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 오 선생님께서 여러 가지로 걱정을 하시면서 이 나라의 미래를 지고 갈 젊은이들에게 여러 가지를 당부하셨는데요. 사실 정부가 통일논의를 못하게 할 때에는 기독 청년이나 여성 쪽에서 통일논의가 훨씬 더 활발했던 것 같습니다. 여성들은 통일 이후의 남북한 체제나 헌법, 제도에 대해서 이미 오래 전에 세미나와 토론회를 통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돌아가신 안병무 선생님도 오래 전에 이미 ‘통일헌법’에 관해서 글을 쓰셨지요. 최근 청년들 쪽에서의 평화통일 운동은 참 폭이 넓은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 날아오는 황사를 막기 위해 한중일 청년들이 함께 중국의 사막에서 나무심기를 하고, 최근에는 역사교과서를 편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어떻게 새로운 역사 속에서 평화통일의 문제를 담당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벌써 몇 년 전부터 교회가 너무 사회적으로 문제를 많이 일으키니까 의식 있는 젊은이들이 NGO 쪽으로 가면서 교회 현장을 떠났습니다. 사실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할 청년, 여성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미래를 짊어지고 가야 할 사람들이 바로 청년들과 여성들이라면 왜 이렇게 됐는지도 심각하게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교계의 선배들이 추진했던 평화통일운동을 전수해서 후배들을 키우고 통일의 기수로 내세우면서 이것이 계승돼야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잘 안됐다고 생각됩니다.

박: 그거 죄책고백 하나 내야 되겠네. (웃음) ‘88선언’ 세대는 아까 말씀하신 대로 이 사회를 분단사회로 규정해요. 통일선언은 분단을 극복하는 우리 의지의 표현이었죠. 지금 문제는 뭐냐니까, 분단이 극복이 안 되고 있잖아요. 분단극복이 물리적으로 안 됨에도 불구하고 통일이라는 비전을 함께 누려야 한다는 것하고 혼재된 상황 이예요. 그래서 시대적 구분이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의 문제는 분단 극복이라는 옛 주제에 고착해서 분단을 어떻게 극복할까만 하지 말고, 통일을 이미 앞당겨서 분단 속에서 맛보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혼재된 상황에서 우리는 혼란을 느끼는데 젊은 세대는 거기에 대해서 특별히 큰 혼란이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분단과 통일은 같이 있는 거다. 그 다음에 분단이 점차 없어지면서 통일이란 것이 완성 되는 거다 하는 대안을 빨리 마련해야 돼요. 그게 평화 공존일 수도 있고, 국가연합제, 단계적 연방제 등 아까 말씀하신 건데 우리 옛 세대는 분단과 통일을 시한적 구분으로 표시하는 관점이 큽니다. 지금에는 이것이 섞여있는 거예요. 비전 만들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분단이 원죄라 선언하는 것은 우리의 한계입니다. 이제는 그것을 넘어서야 지요, 분단에도 불구하고 통일을. 이렇게 가야해요. 원죄라는 말을 당시의 열정으로 재해석한다는 거지요. 그러나 그게 원죄일 수만은 없다. 그것이 우리의 통일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하고 다시 나가주지 않으면 내가 보기엔 비전이 안 만들어진다. 그 얘길 드립니다.

서: 이미 요단강은 건넜어요. (웃음) 우린 못 건넜지만....

            
          ‘총’과 ‘칼’을 버리고 ‘평화의 삽’을

     최: 저는 20년 전, ‘88선언문’을 냈던 당시와 연결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당시 ‘88선언문’을 내고 평화통일 운동을 벌리던 분들은 고난을 받을 각오를 했었습니다. 실지로 감옥에도 가고, 고문도 당하고, 가택연금도 당하고, 어떤 이들은 성고문도 당하고 억울하게 목숨도 잃었지요. 평화통일 운동에 나섰던 교회도, 그리스도인들도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빨갱이라는 비난은 물론, 몇 차례씩 감옥에 갇히고 신학교에서 내쫓김을 당했지요. 그러면서도 독재정권자들의 불의를 고발하고 폭로했으며, 기도회를 열고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오늘날의 통일운동은 그런 고난의 길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의 상황에서도 참으로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일하려고 한다면,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통일운동이 활성화되었다고는 하나, 사실은 20년 전 ‘88선언문’에서 요구했던 중요한 조항들은 아직도 관철되지 않았습니다.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지 못했으며,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군의 문제, 남북한 핵 폐기의 문제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북을 원수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이 그대로 존속하고 있으며, 우리의 젊은이들은 동맹국이라는 이름으로 전쟁터에 나가 있습니다. 남북한에 의한 자주적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한반도 문제를 자국의 이익을 위한 장으로 만들려는 강대국들의 ‘음모’ 앞에 놓여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평화통일을 위해 일하려는 사람들은 지금이야말로 고난을 각오하면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년 전, 통일운동을 할 때에 목숨을 내어놓고 일한 것처럼 오늘의 현실에서도 감옥에 갈 각오를 하면서 통일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 이 좌담을 개최한 한국신학연구소가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신학적 논의를 활성화시키고, 젊은이들을 불러 모아 평화통일 운동을 다시 불붙이는 역할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신학연구소를 설립한 안병무 선생님께서도 그것을 분명히 원하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왜 NCCK나 이런 기관이 옛날처럼 뜨겁게 모일 수가 없나를 생각해 보았죠. 가만히 보니까 분단 상황의 시절에는 예언적일 수가 있었어요. 고난 속에 설 때는 힘이 축적된단 말이에요. 편안할 때 대안으로서의 비전은 참 약하다. 그걸 현실로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지금의 이명박 정부가 실용주의를 내세우는데, 내가 보기에는 실리로 움직이지 이상으로 움직일 것 같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젊은 세대한테는 좋을지 모르지요. 그러나 이상이 있는 젊은이들도 많아요. 그래서 지금 중요한 것은 총체적 비전을 세우는 건데, 교회의 역할은 거기에 있다고 봐요. 요즘 핵기술에서도 핵융합 방식을 추구하는데 여전히 우리는 핵분열식의 실리주의에 빠져서요.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NGO도 똑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NGO도 자꾸 실리추구로 가고 있으면서 큰 흐름은 잊고 있어요. 어디한테 빼앗기나, 중국 욕하고 미국 욕하는데요, 거대 강국들은 한 쪽에서는 실리를 추구하면서도 철학적 윤리적 거대한 비전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한테서는 그게 관심영역에서 떠나버렸어요. 서 박사님 말씀 조금 받아서 좋은 의미로 얘기하자면 ‘88선언’ 세대의 주역들한테는 다시 큰 틀의 퓨전적 비전을 만드는 일에 여유를 주고, 요즘 프래그마틱한 인터레스트 그룹들은 구체적 안을 가지고 오고, 그런 후에 일감을 가지고 다시 세대 간 대화를 해야 한다는 거죠. 이게 신학적으로 중요하구요, 정책적으로 중요한데, 그렇게 안하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는 변두리로 밀려나요. 한반도는 그렇게 될까보아 그게 걱정입니다.  NCCK와 교회에 앞으로 기대한다면 도덕적 구심점이 돼서 양자를 결합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실용적인 주제들을 가지고 미시적 대안을 내 봤자 구체성에 있어서는 이미 지고 맙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커다란 하늘나라의 비전을 가지고 설득 안하면, 신학적인 언어가 포함 안 되면, 교회가 못 움직이게 돼 있어요.  

오: 박 목사님 말씀의 연속인데, 이제 실용주의 정부가 나서서 여러 가지 정책을 실용적으로 내면 거대담론의 사회적인 필요성이 생길 겁니다. 또 그것이 있어야 양쪽의 균형이 잡히고. 그런 점에서는 에큐메니컬이라든지 NCCK가 도전을 밖에서 받을 거예요. 이런 도전을 잘 인식해서 새로운 계기로 삼는 것이 앞으로 교회의 사명이 아닐까. 그래서 기회는 이제부터 상당히 도전적으로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잘 잡으면 새로운 계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최: 오히려 희망이 있네요.

    김: 이제 정리를 좀 해보겠습니다. 이미 말씀들을 하셨지만 이제는 ‘88선언’ 때의 분단 역사인식에서 아직 휴전선이 있고, 국가보안법이 있지만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이후 지금은 그 누구도 되돌려 놓을 수 없는 화해와 평화공존의 시대에로 패러다임 전환되었다고 봅니다. 과거 분단 독재세력 하에서는 통일이 지상 목표였지만 지금은 무조건 통일이 아니라 평화공존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의 경우를 보아도 물리적 통일만으로 진정한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통일은 남북이 화해협력 평화공존하면서 강물이 흘러 바다에 합치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사회통합을 이루는 통일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88선언’에서 실천하지 못한 세 가지 과제, 곧 주한미군철수, 평화협정,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오늘의 시점이 당시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기 때문에 달리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한반도 비핵화문제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남과 북이 합의했지만 그 이후 북미 관계 개선이 안 되면서 북은 에너지 해결과 체제 안보를 명분으로 핵을 가지게 되었지요. 지금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지 위해 6자회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반도 비핵화는 남북만의 문제가 아니라 북미간의 문제 해결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북핵문제는 미국의 클린턴 정부 때 타결될 수 있었는데 정권교체기가 되어 공화당 부시 정권이 출범하면서 원점으로 돌아가 8년을 맴돌다가 현재는 다시 클린턴 정부의 마지막 때 상황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부시정부는 8년을 헛돌면서 북에 핵을 가지게 했습니다. 물론 이 이면에는 미국의 군산복합체의 이익이 작용했겠지요. 이런 면에서 새로 출범하는 이명박정부는 이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다시 반세기를 헛돌아 냉전시대로 가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평화협정 문제도 우리민족끼리 선언만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2007년 10.4 남북정상회담 합의가 일깨워주었습니다. 10.4합의에서 평화협정을 하자고 했지만 미국과 중국과의 협의 없이는 불가능한 현실 아닙니까? 그리고 세 번째로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과거와 달리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통일이후에도 미군이 주둔해야 한다는 인식이 진보적인 영역에서도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또한 통일이후 체제문제도 이미 북도 6.15공동선언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말한 만큼 우리의 국가연합을 통한 통일방안과 대동소이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평화교류, 평화공존, 평화통일의 3단계 통일방안으로 합의 진행되고 있는 거지요.        
    이런 의미에서 이제 교회는 과거 분단독재시대 역사인식과 평화통일 인식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위적 통일이나 통일지상주의를 넘어 민족의 통일 비전을 갖되 통일의 삶을 앞당겨 사는 평화공존의 패러다임 양식을 만들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세계화의 영향도 있지만 동북아공동체, 주변 4대국과의 평화공존 비전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동안 가졌던 총과 칼을 버리고, 곧 한기‘총’과 에큐메니‘칼’ 그룹이 함께 ‘평화의 삽’을 만들고 평화를 일구는 운동을 해야 할 것입니다.  
    
     심포지엄을 마치면서 다시 한번 장시간동안 추운 날씨를 덥게 만든 진지한 논의들을 해주신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심포지엄이 ‘88선언’ 20주년 맞는 계기에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를 기대하며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신학사상 2008년 여름호(141집) 차례
신학사상 2007년 겨울호(139집)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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