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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연 
 신학사상 2008년 여름호(141집) 차례


이번 호에는 3편의 조직신학 논문과 4편의 기독교윤리, 정치신학에 관한 논문 그리고 1편의 역사신학 논문을 게재하였다.  

먼저 조직신학 분야에서 이오갑 그리스도대 교수는 “자유의 맥락에서 본 장공 김재준의 삶과 사상”이란 논문을 통해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신학과 사상 및 사회적 실천을 관통하는 것은 ‘자유’라고 해석하고 있다.    
연세대 김영복 교수는 “포어에르바흐와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 의식에 관한 비교적 고찰”을 통해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일깨워 주고 있다.
이찬석 남서울대 교수는 “탈식민지론과 아시아 신학- 피에리스와 호미바바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통해 우리 신학계가 깊이 성찰해야 할 탈식민지 담론을 깊이 있게 제시하고 있다.

다음으로 역사신학 분야에서 백용기 강남대 교수는 “독일 나찌 시기의 독일적 기독교인 운동”이란 논문을 통해 기독교인의 종교적, 민족적 이기주의와 국가권력의 유착이 가져온 죄악과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한 고백적 신앙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독일 교회 역사적 경함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윤리 분야에서 조용훈 한남대 교수는 “연구윤리의 방법론에 대한 기독교윤리적 고찰”이란 논문을 통해 최근 우리나라에서 계속해서 제기되는 연구윤리의 문제를 기독교윤리의 관점에서 다루었다.  
김상기 박사는 “폭력에 대한 전통적 신학의 입장표명 윤리 비판과 기독교 담론윤리 구상”이란 논문을 통해 폭력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였다.

이신행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와 박사 과정에 있는 제자 김 현은 공동연구를 통해 최근 학생운동이 정치적 행위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문제를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와 앞으로의 학생운동: 민주화 운동에 나타난 의식화 행위를 통해 본 학생운동의 전망”이란 논문을 통해 깊이 있게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강휘원 평택대 교수는 “16세기 영국의 종교 갈등과 로마서 13장 1-7: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카톨릭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통해 군사정권 시절 우리나라에서도 제기되었던 세속권력에 대한 복종과 관련된 로마서 13장 해석의 문제를 엘리자베스 1세 여왕시대를 중심으로 종교적 대립에 의하여 다르게 해석되어 온 16세기 영국의 종교와 정치의 대립 과정을 분석, 논의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 쇠고기 수입 문제로 출범한지 3개월도 안되어 노무현 대통령보다 더 독선적이고 국민을 무시한다는 거리의 촛불과 함성이 “탄핵”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촛불 시위의 배후 세력이 있다고 하지만, 친정부적 언론을 포함해서 모든 언론들은 촛불 시위는 여중생들이 주도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10대 청소년들이, 그것도 여중생들이 왜 거리에 나왔을까? 이들의 천진난만한 그러면서도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말을 들어보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곧 알게 된다. ‘이제 겨우 15살인데 우리는 죽기 싫어요’,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 한 이명박 대통령의 캠프데이비드 1박’, ‘노무현은 조중동과 싸우고 이명박은 초중고와 싸운다’, ‘우리는 총을 든 것이 아니라 촛불을 들었는데 왜 잡아가나요?’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좌파도, 반정부도 아니다. 도리어 잘못된 미국 쇠고기 수입 협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그런데도 이명박 대통령이나 정부는 왜 모를까? 배후세력 운운하며 이들의,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아니 국민의 소리를 들으려하지 않는다.
인수위 시절부터 섬기는 정부가 되겠다고, 국민의 머슴이 되겠다고 큰소리치더니 섬김이 독선이 되어 국민을 분노케 했고, 국민적 저항에 당황한 이명박 대통령이 사과하면서까지 국민과 소통을 하는 섬기는 정부가 되겠다고 했는데, 이 역시 말뿐! 국민을 머슴 취급하고 있다. 결국 ‘강부자’ 정권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일까?  
이런 현실에서 의외로 기독교가 침묵하고 있다. 왜 일까? 이명박 정부는 ‘고소영’정권이란 말이 시대의 유행어가 된 것처럼 순수한 신앙보다 권력의 단맛에 빠져 편 가르기로 하나님과 세상을 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광우병 소를 숭배하는 기독교가 국민과 사회를 미치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이명박 대통령이 더 이상 국민을 무시하면, 교회가 더 이상 침묵하면 결국 무서운 심판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역사를 보라!


차례              

연구 논문
이오갑 ․ 자유의 맥락에서 본 장공 김재준의 삶과 사상
김영복 ․ 포어에르바흐와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 의식에 관한 비교적 고찰
이찬석 ․ 탈식민지론과 아시아 신학- 피에리스와 호미바바를 중심으로
백용기 ․ 독일 나찌 시기의 독일적 기독교인 운동
조용훈 ․ 연구윤리의 방법론에 대한 기독교윤리적 고찰
김상기 ․ 폭력에 대한 전통적 신학의 입장표명 윤리 비판과 기독교 담론윤리 구상
이신행/김 현 ․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와 앞으로의 학생운동: 민주화 운동에 나타난 의식화 행위를 통해 본 학생운동의 전망            
강휘원 ․ 16세기 영국의 종교 갈등과 로마서 13장 1-7: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카톨릭을 중심으로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와 앞으로의 학생운동
: 민주화 운동에 나타난 의식화 행위를 통해 본 학생운동의 전망

                                                      
* 이신행(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shinheanglee@yonsei.ac.kr,), 김현(연세대 정치학과 박사 과정, chewhadang@gmail.com)

초록

이 글은 민주화 운동에 나타난 학생운동의 의미를 해석하면서 이를 통하여 오늘날 새로운 학생운동이 지향할 준거가 무엇인지를 찾는데 그 목적이 있다.
민주화 운동이 87년의 정치변동을 성취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학생운동의 역할, 바로 사회적 권위를 의식화하는 타자로서의 역할이 있었다. 이 타자의 현존을 가능하게 한 의식화 행위는 70년대 기독학생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80년대 일반 학생운동은 이를 계승하였다. 하지만 87년 이래 일반 학생운동은 정치이념에 기반한 목적의식에 따른 대중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면서 이데올로기적으로 경직한 모습을 띠게 되고 결과적으로 의식화 행위능력은 사라지게 되었다. 학생운동이 정치적 행위자로서 인정을 얻어 내려는 투쟁에 몰두하게 되면서 의식화 행위는 대중성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이 글이 검토한 신촌민회의 사례는 ‘주민인 학생’의 실천을 통해 지역공동체가 사회적 권위를 의식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7,80년대 민주화 운동이 종교와 학생을 잇는 관계망을 형성한 학생기독운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 신촌민회의 예는 지역과 학생을 잇는 관계를 통해 새로운 사회적 권위 형성이 가능할 수 있다는 단초를 보여주며 이는 87년 이후 민주화에 있어 학생운동이 조망할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주제어: 사회적 권위, 사회적 타자, 의식화 행위, 학생운동, 민주화                                                          
                                                                             


1. 서론

이 글은 민주화 운동에서 학생운동의 의미를 재해석해내는 작업을 통해 학생운동 쇠퇴의 과정을 새롭게 밝혀내고 나아가 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찾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근래 국가의 역할을 다시 모색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IMF 이후 신자유주의의 흐름은 한국사회를 이끌어왔다고 믿어왔던 발전주의적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무너뜨렸지만, IMF 외환위기를 벗어난 이후 신자유주의에 대항하고자 하는 사회정신은 오히려 스스로를 재긍정하는 힘으로서 발전주의적 국가의 등장을 다시 요청하는 면도 있다. 이는 17대 대통령 선거를 전후하여 60년대 이래의 권위주의에 대한 향수가 짙게 드리워져 감을 통하여 느낄 수 있다. 반면, 학생운동은 그 자취조차 사라진 듯 이전의 영향력을 잃어버렸다. 급변하는 국제질서는 사회로 하여금 국가의 새로운 역할에 대한 인식을 촉발시켰지만 이 과정에서 학생운동의 의미에 대한 논의는 보이지 않는다.
학생운동의 쇠퇴가 두드러지면서 그 의미를 새롭게 모색하려는 시도가 전무한 것은 아니었다. 90년대 이후 우선 학생운동 내부로부터 자성과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 비판은 민주화 이후의 현실에 적절히 적응하지 못한 운동의 관료화와 폐쇄성 등을 지적하면서 그 대안으로 “학생운동의 대중화”를 기치로 내걸었다. 하지만 대중화는 단지 정치세력화된 학생운동이 동원능력을 유지ㆍ재생산하기 위한 수단 이상이 되지는 못했다.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중요 정치세력의 하나로서 학생 운동세력이 달라진 정황에서 자기 보존을 모색하는 것에 불과했다.
반면, 민주화 운동기간 학생운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이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탐색이 단편적으로 제기되었다. 이 논의는 일반적으로 다원화된 사회로 가는 과정에서 학생운동은 민주화 운동에서와 같이 앞장서서 주도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는 없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사회가 다원화되고 시민사회가 성숙되면서 각 부문이 조직화, 정치화되었으며 따라서 기존 학생부문이 맡은 역할은 사회의 여러 기능으로 이전되었다. 학생운동은 운동세력들을 지원하며 일상적 생활세계를 구성하는 역할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한 것이다. 이 인식논리는 87년 이후 시민사회의 사회적 필요를 반영하고 있다는 적실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해는 학생운동이란 민주화 운동의 자산을 외면하고 있으며 이는 정치적 권위가 권위주의 시절의 모습으로 회귀하는 움직임에 저항하여 시민사회가 정당성을 쇄신할 수 있는 소중한 전통을 놓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을 타고 정치적 권위가 옛 자리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극복하기 위해선 정치적 권위의 권위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사회적 인식의 확산이 필요하다. 이 의식의 새로운 발현이 없다면 시민사회의 역량은 더욱 축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며 더 나아가 시민사회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학생의 새로운 역할이 민주화 운동에 나타난 학생운동으로부터 새롭게 해석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또한 민주화를 이끈 학생이 누구였는지를 재해석함으로서 변화된 환경에서 시민사회의 정당성 형성에 기여할 수 있는 학생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2. 학생운동에 대한 예비적 검토: 의식화, 사회적 권위와 타자

민주화 운동 전반에 걸쳐 학생운동의 역할이 무엇이었는가? 민주화 운동에 나타난 학생운동의 역할을 해석하는 데 있어 결정적 개념은 민중의 의식화이다. 이는 민중의 의식화가 학생운동을 정초한 이념적 지향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80년대 학생운동의 조직화와 운동전략 그리고 이념의 형성은 운동주체가 ‘민중의 의식화’란 과제를 실천적으로 풀어내고자 스스로 제시했던 자기해석의 소산물이었다. 이 민중의 의식화는 ‘민중은 누구이며, 그 민중을 의식화하는 학생은 누구인가?’라는 실존적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바로 이 질문이 학생운동의 내재적 인식을 규정지었다고 한다면, 하지만 학생운동의 역할에서 적절히 제기되지 않은 물음은 ‘학생은 사회에게 누구로서 받아들여졌는가?’에 있다. 사회는 ‘민중을 의식화하고자 한 학생’을 누구로 받아들였는가의 문제이다. 이 물음에 대해 이 글은 학생은 사회적 권위를 의식화하는 타자로서 등장했다는 주장으로 답하고자 한다. 87년에 이르기까지 민중의 의식화를 지향한 학생운동은 타자로서 현상하였고 이는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를 불러일으켰으며, 이 사회적 권위의 의식이 민주화 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사회적 인식을 조형하였음을 밝히고자 한다. 달리 말하자면, 학생운동의 이념적 지향은 민중의 의식화를 추구하였지만, 이를 통해 운동의 방향은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로 이어졌음을 보여주고 하는 것이다.
민중의 의식화를 지향한 행위가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로 전환된 데에는 의식화에 결부된 행위자의 구조가 이중적으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의식화(conscientization)란 개념은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에 의해 이론적인 개념으로 제시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의식화는 민중들이 비판적 의식을 획득해가도록 가르치고 배우는 상호소통의 행동, 즉 “자유를 위한 문화적 행동”이다. 이 행위는 상호소통성이란 특성으로 인해 두 종류의 행위자로 구성되는데 프레이리는 이를 “배우면서 가르치는 이와 가르치며 배우는 이”로 구분한다. 프레이리에게 있어 전자는 의식화의 대상으로서 민중이며, 후자 “가르치며 배우는 이”는 의식화 교육을 담당하는 지식인과 교회의 역할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교육의 대상인 민중 스스로가 주체이기 때문에 가르치는 이로서 교육자는 자신의 특권적 지위가 보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배우는 이의 삶에 전적으로 자신을 종속시킴으로서만 민중의 의식화를 성취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의식화의 대상인 민중이 해방의 주체이기 때문에 가르칠 이는 의식화를 일깨우는 선각자이지만 동시에 민중으로 환원되어야만 하는 존재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러한 동일시는 민중을 마주대함으로서 민중의 현존재에 대해 무한한 책임의식을 가지게 되는 존재, 즉 ‘가르칠 이’ 역시 의식화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은폐한다. 이러한 가능성이 간과된 것은 의식화의 두 지향에서 후자가 전자, 즉 민중으로 전적으로 동화되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이’는 단지 민중의 보조적 역할로 한정되고 결과적으로 민중 속으로 흡수되어갈 존재로서 이해되기 때문에, 이 존재의 의식화는 사회변화에 있어 그 자체로 독립적인 역할로서 인식되지 못한다. 그러나 민중의 자유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게 되는 주체의 형성이 민중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민중과 자기는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책임의식을 가질 수 있는데, 이러한 의식의 가능성은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 즉 타인으로서의 타자와의 마주대함으로 인해 자기에게 지워지는 대격(對格)의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소외와 구속상태’에 있는 이들에 대한 윤리적 마주침과 맞닿아 있는 의식화는 민중의 자각과는 다른 타자의 얼굴에 대한 대격의식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며, 이는 민중과 다르지만 타인의 삶을 향한 대속(代贖)적 책임의식을 지려는 새로운 권위의 등장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의식화 대상의 한 축에는 민중이 존재하지만, 다른 한 축에는 권위가 놓여있는 것이다.
민주화운동에서 학생운동은 한편으로 민중의 의식화를 지향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타인으로서의 타자로서 출현했으며 그로 인해 권위를 의식화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권위의 의식은, 즉 무한한 책임의식은 일차적으로 도덕적인 수준에서 형성되며, 그런 점에서 그 의식은 정치권력의 권위가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일반화된 타자와 동일시를 통해 그 책임을 모면하기 마련이다. 이 글에서 이 수준의 권위의식을 도덕적 권위라고 명명하였는데, 이 권위 의식이 정치적 권위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면서 민주주의를 가치로서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의식이 타자를 앞질러 가는 결단을 통해 정치적 권위를 비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민주주의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 된 것이다. 그 타자를 앞질러가는 결단을 내리는 권위의식이 사회적 권위인데, 타인의 현상, 즉 사건으로서 현상하는 타인을 앞질러가며 배려하는 행위가 사회적 권위인 것이다. 그리고 학생운동은 이 사회적 권위를 의식화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민주화 운동에서 새로운 학생운동의 등장은 민주화 운동의 정당성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민중의 의식화를 지향한 기독학생운동으로부터 시발하였다. 이 지향성이 80년을 전후하여 일반 학생운동의 이념적 지향으로 변형, 발전되었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에서 학생운동의 역할은 민중의 의식화를 통해서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로 나타났다. 학생운동은 80년을 넘어가면서 내재적으로 정치적 이념을 달성하기 위한 목적의식적 조직체로서 변화되어 갔지만, 87년에 이르기까지 학생운동은 사회적 권위를 의식화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다만, 민주화 이후 학생운동은 이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라는 역할로부터 이반되면서 정치세력으로서 남겨졌고 시간의 경과와 함께 그 영향력은 쇠퇴해왔다. 반면, 신자유주의의 물결과 함께 정치적 권위의 권위주의적 속성이 다시 출몰하는 가운데 이 글에서 검토하는 신촌민회의 경험은 정치적 권위를 비판할 수 있는 새로운 인식의 준거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 가능성을 내보이고 있다.
  

3.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 그 시작: 70년대 민주화 운동과 의식화

87년 6월에 이르는 “민주화”라는 정치변동이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에 힘입어 성취되었다고 할 때 그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87년 변동 국면에서 재인식된 “민주화”라는 상징이 최초로 정치부문에 등장하게 되는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87년의 “민주화”는 그 이전에 형성되었던 사건들을 끊임없이 상징화하는 작용을 통해 형성, 발전되었다는 점에서 상징작용이 원초적 상황으로부터 발전해오는 과정에 대한 분석은 권위가 의식(화)되는 일련의 과정을 드러내준다.
  87년 정치변동에 나타난 “민주화”란 상징의 기원은 60년 4.19로 거슬러 올라간다. 4.19로 명명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60년 3.15선거를 전후해서 이승만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민주화 요구가 정권의 탄압에 대항하여 집합적 인격으로 나타나면서 형성된 정치변동의 사건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형성된 집합행동은 하나의 공인격으로서 자신을 언표하지 못했고, 이는 4.19 이후 정치적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4.19라는 사건이 3.15부정선거에 대한 규탄시위로부터 촉발되었다는 점에서 민주당은 이 일련의 사건들을 재현하는 주체로서의 역할이 부여되었지만, 민주당 내 파벌들 간 정쟁이 격화되면서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켰고 이는 4.19에 드러난 집합적 의식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4.19는 민주주의가 문제시되어 촉발된 사건이었지만, 그 집합의식을 대변할 주체의 부재는 5.16군사쿠테타를 유발하는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5.16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가 자신을 “혁명세력”으로 규정할 수 있었던 것은 4.19라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부세력은 4.19에서 언표되지않은 집합의식을 혁명이란 이름으로 전유했던 것이다. 바로 4.19가 실현하지 못한 혁명의 가능성에서 자신을 비추는 빛을 보았고, 쿠데타를 통해 미완의 혁명을 완수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었다.
하지만 군부세력은 이러한 주장을 기초로 하여 정권을 획득하기에 이르고 더 나아가 3선 개헌과 유신헌법 제정을 통해 4.19로부터 이어진 변혁을 전적으로 대변하는 유일한 주체로 자신을 이해하면서 이데올로기화 된다. 다만, 이데올로기성은 4.19 이래 등장한 집합의식을 정치적 권위로 치환하는 작업을 통해 은폐되었다. 집합의식을 재현할 주체의 부재로 인해 겪었던 사적 이해의 갈등과 혼란은 정치적 권위의 필요성을 높였고 이는 4.19에 표출된 집합의식을 정치적 권위에 대한 의식으로 전환하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아이러니하게 민주주의의 가치가 인식된 4.19는 오히려 박정희에 의한 “군주제”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박정희 정권이 4.19로부터 형성된 집합의식을 오히려 정치적 권위의 의식으로 전환해나가는 방식으로 정치체를 독점해나가는 상황에서 이러한 정치적 권위의 이데올로기성을 비판할 수 있는 사회적 준거는 어디로부터 나왔는가? 즉, 박정희 정권이 자신을 정치공동체의 총체로서 인식되게끔 국민들을 의식을 주조해나가면서 대항정치세력의 정당성을 무력화시켜나가는 것에 대항하여 민주화가 상징화된 가치로서 재인식될 수 있었던 사회적 기반은 무엇인가?
계급론적인 입장은 자본주의적 산업화로 인한 사회분화 현상에서 형성된 계급화를 정당성 형성의 근간으로 인식하였다. 계급론의 입장을 한국사회에 적용한 시도는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적 산업화와 그에 조응한 계급적 주체로서 민중의 형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정권에 의해 기획되는 자본주의적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공적 공간에 등장할 수 있는 여지는 봉쇄되어 있었다. 노동자들이 사회변동의 주체가 되는 계급으로 형성되기 위해선 공적공간을 필요로 했지만 이를 위해선 정치적 권위가 먼저 비판될 필요가 있었다. 정권은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을 위해 노동부문이 기업의 사주와 위계적 관계를 맺는 것을 조장하고 승인하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권위를 비판할 수 있는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어야 했지만 86년에 이르기까지 노동부문에서 이러한 정치세력화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다만, 노동자는 그 존재가 경제성장이란 가치 아래 단일한 개발주체 속으로 통합되고 이는 다시 정치적 권위의 의식으로 통합되는 방식으로 그 실체가 배제되며 억압당하는 대상이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정치적 권위를 비판할 수 없는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전태일의 분신이었다. 노동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찾아줄 권위가 국가에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한 청년이 맞이한 좌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대변해줄 정치세력을 조직할 수 없는 무기력한 현실을 뛰어넘기 위해 그는 자신을 불사르는 희생을 감수하였다. 권리에 대한 주장이 사익을 위한 것으로 간주되는 현실에서 자신의 문제가 공적인 것임을 밝히기 위해 그는 자기 희생을 통해 사적인 것을 공적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즉, 자기를 타자화시킴으로써 자기에 대해 권위를 행사하는 방법만이 자기 사건이 공적으로 바뀌고 또 보여질 수 있을 것임을 안 것이었다. 그러나 이 행동은 노동세계에서 민주화의 가치를 재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의식이 형성되는 단초가 되었다. 바로 사회적 권위가 형성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사회적 권위가 정치적 권위의 이데올로기성, 즉 권위주의적 성격을 인식할 수 있게 만들면서 민주화가 상징화된 가치로서 새롭게 인식될 수 있는 기반이 놓여졌다.  
정치적 권위의 이데올로기성을 인식할 수 있게 해준 사회적 권위의 형성은 자본주의 체제의 성장에 파생한 사회세력의 사적부문이 독자적인 권위를 의식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정치적 권위가 공적인 공간을 전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시기 종교부문으로부터 새로운 의식이 형성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면서 발생하였다. 한국사회에서 개신교, 카톨릭 종교부문은 정부 수립 이후 암묵적으로 정권의 권위를 유지하는 기제로서 작동하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문이 가지는 고유한 특성, 즉 성과 속을 구분하는 능력은 정치권력의 권위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었으며, 이 상대적 자율성을 통하여 정치적 권위가 배제하며 억압하는 부문을 타인으로서의 타자로서 인식하면서 도덕적 권위를 형성하였다. 정치적 권위 아래 주조된 사회구조 내에서 그 권위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된 의미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종교부문은 이 부문들이 가졌던 상대적 자율성에 기반하여 정치적 권위가 배제하며 억압하는 사회 구성원을 타인으로서의 타자로서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 권위가 정치와 사회 전 부문의 공적인 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가운데 새롭게 등장한 도덕적 권위는 정치적 권위를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즉, 민주화 운동이 제기한 비판적 인식이 공적인 공간에 등장하는 것이 그간 정치적 권위에 의해 막혀 있었다면, 도덕적 권위는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권위가 4.19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집합의식을 전유하는 것을 비판할 수 있는 시공간이 된 것이다. 이러한 권위가 현상하는 단초는 도시산업선교 및 크리스챤 아카데미 등이 벌인 노동조합 및 빈민 조직화와 지도자 훈련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운동은 각 개별 교단 및 교회협의회 등을 통해 그들이 속한 부문 일반과 관계망을 형성하면서 종교부문일반이 도덕적 권위를 의식화하는 토대가 되었다. 도시산업선교 활동이 교단의 위원회 보고, 각 교회의 순회 보고회 등의 자리를 통해 자신을 드러냈을 때 그것은 종교부문 일반으로 하여금 도덕적 권위를 의식하게 만들면서 새로운 공적인 가치를 인식하는 장(場)을 열어놓았다. 하지만 이 종교부문에 기반한 운동체들로부터 시작된 도덕적 권위가 정치적 권위를 대립물로 인식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새로운 정당성을 부여하는 사회적 권위로 전환되는 데에는 학생운동의 역할을 필요로 하였다. 도덕적 권위가 정치적 권위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기에 이르기 위해선 학생운동을 통해 이루어진 의식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학생운동의 의식화 행위는 종교부문과 학생부문을 공유한 기독학생운동의 활동에서 비롯되었다. 이 의식화 행위는 당시 도덕적 권위를 담지한 종교부문과 학생부문을 공유하고있는 기독학생조직이 운동성을 띠면서 형성된 운동영역을 통해 계획되고 실천되었다. 이 의식화 행위가 가장 분명히 드러난 행동은 학생YMCA와 한국기독학생회(KSCM) 통합 기구의 프로그램으로 1969년 채택된 학생사회개발단이 조직되고 활성화된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애초에 학생사회개발단은 민주화의 꿈을 내포하는 “민중의 의식화”를 위한 행동으로서 일제하 한국YMCA의 농촌계몽 등을 통한 새로운 사회만들기의 전통 위에 학생운동을 1970년대의 상황에 다시 연결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하지만 민중을 지향한 의식화 행위는 사회의 모순이 점철된 현장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재확립하게 되는데 이는 이른바 “민청학련”의 사건에 의해 주체적 상황이 부여되면서 이루어졌다. 학생부문의 운동세력화를 용납할 수 없었던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를 발령하면서 전체주의적인 억압과 탄압을 강화하게 되었고 이는 학생운동의 새로운 주체가 공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계기, 즉 일반학생운동의 주도성이 공식화되는 분수령이 되었다. 그러나 이 주체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학생운동을 ‘타인으로서의 타자’로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즉, 민주화운동에 연결된 교회 세력을 주체로서 의식화하게 만드는 타자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기존 도시산업선교의 활동 속에서 도덕적 권위를 형성한 종교부문은 이 학생운동을 사회적 타자로서 인식하면서 억압과 배제를 시도하는 정치적 권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바로 이 권위를 의식하게 만드는 타자로서 기독학생운동의 현존이 정치적 권위를 대립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60년 후반 도시산업선교로 대변되는 운동체가 정치적 권위로부터 배제된 부문을 포착하고, 학생기독운동이 변동세력으로서의 운동영역을 형성하면서 배제된 부문을 문제화시키고, 이 문제상황으로부터 재확립된 학생운동의 정체성이 정치적 권위의 권위주의이면서도 때로는 전체주의적인 억압을 통해 밝혀지면서 종교와 대학부문 일반이 문제제기세력으로서 학생운동영역에 대해 인권의 가치를 지향하는 권위를 의식하면서 나타났다. 이러한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형성되어, 1974년 11월 “범국민단체로서 비(非)정치단체이며 그 활동은 정치활동이 아닌 국민운동"으로 그 성격을 규정한 ‘민주회복국민회의’가 결성되는 국면으로 이어졌다. 사회적 권위가 하나의 조직체로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75년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를 통해 정치적 권위의 정통성을 형식적으로 “재확인” 받으면서 다른 한편 잠재적 또는 현재적으로 가능성을 보이는 사회적 권위를 진압하는데 주력하였다.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한 교수들에 대한 문교부의 징계처분으로부터 시작하여 국민회의 핵심인물의 구속, 75년 4월과 5월 긴급조치 제7호와 제9호를 통해 사회적 권위에 응수하였다. 특히, 긴급조치 제9호는 유신 헌법체제에 대한 부정, 반대, 개정, 폐지 등에 관련된 일체의 언동을 금지하는 전체주의적인 양상을 띠면서 사회적 권위를 형성하거나 학생운동이 의식화를 도모하는 행위는 일체 억압되었고, 이러한 정황 하에서 사회적 권위를 의식화하는 행위는 70년대 후반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다. 유신정권의 사회 통제능력이 한계에 직면하는 것과 맞물려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 역시 한계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69년 학생사회개발단을 통해 기독학생운동이 의식화 행위를 시작한 이래 74년 민청학련과 민주회복국민회의로 이어진 일련의 사회적 권위의 행사는 긴급조치에 의해 폭력적으로 억압되고 말았다. 이후 76년 3.1민주구국선언, 78년 민주주의와 민주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결성은 사회적 권위가 힘을 발휘하는 다른 양상들이었지만 유신체제는 공권력에 의한 탄압으로 맞서고 있었다. 이 탄압 앞에서 사회적 권위는 도덕적 권위로 전락하고 더 나아가 기회주의적인 모습으로 퇴락할 위기에 항상 놓여있었다. 그리고 이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바로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이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70년대 기독학생운동인 KSCF의 사회적 기반으로서 75년 긴급조치의 발령으로 학생사회의 자율적 공간이 억압된 상황에서 의식화 행위가 지속될 수 있는 터전이었다. 하지만 크리스챤 아카데미가 중간집단육성 프로그램을 통해 벌여나간 의식화 행위는 본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정치적 결정을 내려야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활동이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추진된 반공법위반 사건으로 지목되면서 활동의 정치적 성격을 밝혀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 사건의 결과는 의식화 행위에 정치적 목적의식을 불어넣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과 같은 재판부의 판결결과는 이러한 변화를 암시하고 있다.

     아카데미는 궁극적으로 인간화의 실현을 이념으로(…) 노조, 여성, 농민, 학생, 종교, 언론 등 소위 중간집단을 육성 강화하고(…) 그들을 의식화시키는 과정에서 착취로부터 해방되고 권익이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식을 고취시키고 이들을 조직화시켜 사회주의 실현을 목적으로 했다.

박정희 정권은 크리스챤 아카데미 내 중간집단육성 프로그램을 담당한 간사들에게 사회주의 실현이라는 정치적 목적의식을 부과하고 다른 한편 법인격체로서 아카데미가 드러내는 사회, 정치적 함의를 부정하게 만들면서 민중의 의식화 행위가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로 이어지는 관계를 와해시키는 발판을 놓았다. 의식화 행위는 이제 정권과 대항할 수 있는 명징한 목적의식적 행동과 결부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나타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의 등장은 정권의 정당성 위기와 폭력적 억압의 강화로 인해 더욱 강화되었다.  


4. 민중을 통한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 그 계승과 와해: 의식화 행위에 나타난 정치적 목적의식의 문제  

70년대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는 학생기독운동이 시도한 민중의 의식화가 낳은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 정치화되지 않은 기독학생사회가 민중을 향한 의식화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운동체로 재조직화해 나가는 상호작용이 결과적으로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가 보여준 한계 그리고 5.18민중항쟁의 가능성은 민중의 의식화 행위에 정치적 목적의식을 불어넣어 주었다. 의식화 행위의 진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바로 군부권위주의의 화신인 현 정권이며 진정한 의식화는 바로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힘인 정치권력을 획득해야한다는 목적의식, 즉 혁명의 필요성이 의식의 수준에서 제기된 것이다. 의식화 행위는 필연적으로 혁명프로젝트와의 연계를 요구하게 되었고, 따라서 혁명적 기획안에서 민중의 의식화 행위는 계획되고 실천되었다. 이 혁명적 기획이 의식화 행위에 정치조직의 필요성을 심어주게 되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권력이 형성되는 모습을 띠게 된다. 그러나 87년 6월 항쟁과 정치변동에 이르기까지 학생운동의 의식화 행위는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라는 역할 속에서 규정되고 이해된다. 학생운동이 시도한 민중의 의식화 행위는 70년대와 같이 여전히 사회적으로는 민중의 의식화로서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 행위로서 받아들여졌고 또한 그것을 받아들였다. 다만, 87년의 정치변동은 학생운동이 권위의 의식화라는 틀 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안팎의 구조를 붕괴시키고 만다. 혁명적 기획 안에서 의식화 행위를 통해 자신을 재조직한 학생운동세력은 그 조직화 과정에서 대중동원 능력을 입증하였고 이는 학생운동세력으로 하여금 자신을 체제변혁의 정치 세력으로 나서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학생운동은 정치적 이념으로 무장된 권력으로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80년대 학생운동에서 민중의 의식화가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라는 관계망 형성으로 이어지는 전개과정과 이 관계로부터 이탈해나가는 경과를 살펴보기 위해선 학생운동에 나타난 의식화 행위의 전개양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선 우선 행위가 실현하고자 한 과제의 성격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정치적 이념을 지향하는 목적의식을 담지한 80년대 학생운동의 ‘민중의 의식화 행위’는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하나는 변혁의 주체로서 민중을 조직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민중 변혁에 있어서 학생의 위상을 정립하는 일, 즉 학생운동을 (재)조직하는 일이었다. 물론 이러한 두 가지 과제는 70년대 의식화 행위에서도 동일하게 제기된 것이었다. 기독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한 의식화 행위는 민중을 조직하는 일을 통해서 학생의 자기 정체성을 반성하게 되고, 이는 기독학생운동이 반정부운동세력으로서 연대조직을 이루어가는 자기성찰적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80년대 학생운동 일반은 의식화와 정치적 변혁을 연결시켰기 때문에 조직상(像)에 변화가 생겨났다. 의식화의 두 가지 과제는 여전히 유효했으나 그 조직상에 있어 혁명을 위한 전위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70년대 의식화 행위에서 민중을 조직하는 활동은 학생들 스스로에게 정치적 의식을 부여하고, 이 의식은 학생운동의 새로운 조직 형성으로 이어져 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정권이 주체적 상황을 부여하면서 사회적 권위가 의식화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반면, 80년대 학생운동의 전개과정에서는 민중을 조직하는 활동과 학생운동의 재조직화에 그 시작에서부터 다른 목적이 부여되었다. 70년대의 의식화 행위는 의도하지 않았으나 사회적 권위가 의식화되면서 정치변동의 상황으로 이어졌으나, 70년대 운동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80년대 학생운동은 광주 이후 처음에서부터 두 가지 과제에 명징한 목적을 부여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혁명을 이끌어낼 수 있는 전위조직의 형성에 있었다. 즉, 정치변동을 이끌어나갈 정치적 조직의 필요성이란 목적 하에서 민중을 조직하는 일과 학생운동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문제가 기획되고 실천되었다. 따라서 80년대 학생운동 일반의 의식화 행위는 정치적 목적을 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목적의 의식적 추구가 낳은 결과는 의도한 바와는 달리 87년 6월의 정치변동으로 이어지는 권위의 의식화에 있었다.
우선 민중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으로서 노동현장에서의 목적의식적 행위는 87년 6월에 이르기까지 민주화운동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반면, 의식화 행위로부터 도출되는 또 다른 과제인 학생운동의 재조직화는 85년 2.12총선을 넘어 개헌국면 그리고 6.10항쟁으로 이어지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학생운동의 세력화 양상은 이념의 목적의식적 추구에 근거한 조직의 결성과 집단행동으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행동은 전략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이 사회적 동의를 얻을 수 있었던 근원은 운동세력의 내부적인 인식과 전략을 넘어 학생의 집단행동을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로서 받아들였다는데 있었다. 즉, 87년 6월 항쟁에 등장한 학생이 74년 민청학련 이후 긴급조치에 의해 잠복되어왔던 타인으로서의 타자로서 학생의 존재를 재현했던 것이다.  
80년대 학생운동이 정치적 목적의식을 가진 조직체로 변모되는 과정은 학생운동이 단일한 이념과 투쟁노선에 의해 지도되는 조직체로 결성되는 것과 맞물려있다. 80년대 초반 학생운동은 5.18항쟁에서 드러났듯이 민중의 역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운동의 전위 형성에 있어 학생의 위치는 무엇인가를 자기 정체성의 화두로 삼았다. 이 문제의식은 언더써클 중심의 다양한 학생세력들에 의해 실천되었던 민중의 의식화 행위를 하나의 단일한 조직체제에 의해 지도되는 형태로 변형시켜나갔다. 이 변화는 이 문제에 대해 다른 입장을 지닌 두 운동세력, 즉 이른바 “주도론과 선도론”으로 구분되던 두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이들은 83년 유화조치 이후 대학에 상대적으로 자율성이 부여되는 가운데 개별적으로 조직화를 시도해나갔다. 그 결과 주도론의 세력은 공개조직으로서 총학생회를 장악하면서 이를 통한 연대조직을 결성하였고, 선도론은 정치적 이념에 의해 지도되는 상설적 투쟁조직을 조직하는 가운데 양자가 서로 공존해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공존은 85년 전학련과 삼민투쟁위원회(약칭 삼민투)로 나타났는데 이는 단일한 이념에 의해 지도되는 목적의식적 조직체라기보다 대중성을 강조한 전학련과 전위로서의 선도적 투쟁을 주장한 삼민투가 전략적으로 공존한 상황이었다.
선도론과 주도론의 동거를 통해 결성된 전학련과 삼민투가 사회에 자신을 드러낸 결정적 행동은 광주사태에 대한 투쟁을 통해서였다. 삼민투는 85년 5월에 들어 ‘광주사태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단’을 요구하는 대정부시위를 시작하였다. 이 시위는 5월 23일 광주항쟁에 관한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며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한 단식 농성, 6월 7일 전학련이 서울대에서 약 8천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광주사태 등에 대한 ‘국민대토론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일련의 행동은 전민련-삼민투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미문화원 농성을 주도했던 삼민투에 대한 수사가 착수되어 이 단체를 용공이적단체로 규정하고, 당시 전학련 간부들과 각 대학의 위원장들이 구속되면서 조직이 해체되었다.
하지만 전민련-삼민투의 행동은 학생운동을 광주의 사건을 대변하는 타자로서 재현시켰으며 이는 다양한 민주화운동세력들로 하여금 사회적 권위의 의식을 불러일으키면서 제 세력들 간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힘으로서 작용하였다. 이는 정권이 학생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추진한 ‘학원안정법’에 대항하는 ‘학원안정법반대투쟁전국위원회’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새로운 조직화와 집단행동을 통해 등장한 학생운동은 정치적 이념을 지향하는 목적의식적 행위로 변모해갔지만 민주화 운동의 수준에서는 여전히 사회적 권위를 의식화하는 행위로서 인식되었다. 물론 이는 72년 유신헌법 제정 이후로 이어진 개헌국면이라는 구조적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야당정치세력과 새롭게 조직된 민족민주운동세력들이 학생운동을 사회적 타자로 인식한 것은 정치변동을 이끌어내기 위한 전략적 행위의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사회적 권위를 전략적 행위의 차원으로 전락시킨 결과는 87년 정치변동의 결과에서 부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85년 전민련-삼민투가 와해된 이후 86년으로 넘어가면서 학생운동의 조직화는 새롭게 모색된다. 이 조직화는 크게 두 세력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기존 선도론을 계승하여 전위성을 강조한 반제·반파쇼 민족민주투쟁위원회파(약칭 민민투)이며, 다른 하나는 선도론에서 논의된 이념의 문제를 받아들이되 대중성을 강조한 반미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투쟁위원회(약칭 자민투)로 대별된다. 이 조직화에서 특이한 점은 학생운동의 대중성을 주장한 새로운 세력, 이른바 자민투의 기반이 된 NL학생운동이 기존 주도론을 주창한 세력에 결여되어 있었던 이념에 따른 목적의식적 조직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데 있다.
대중성을 강조한 주도론의 입장이 혁명을 위한 이념 형성에 부진했던데 반하여 자민투는 선도론에서 시작된 이념 논쟁을 발전시켜나가기 시작한다. 기존 운동의 이념을 비판하면서 “사상”을 제시한 자민투는 이념과 대중성을 조화시키는 조직을 결성하려는 노력을 시도하였다. 이는 기존 주도론의 입장이 운동의 대중성을 강조하는 대신 전위로서의 목적의식적 조직화 즉 이념과 단일한 지도노선에 의해 움직이는 조직체계에 대한 명확한 상을 제시하지 못했던데 반해, NL학생운동은 역시 대중성을 표방하면서도 이념과 실천강령 등을 구체화한 조직을 제시했다는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NL학생운동의 대중성 지향은 혁명을 위한 전위로서의 역할과 상충하였고 86년 말에 이르기까지 NL학생운동의 중심은 여전히 정치변동을 위한 선도적 투쟁에 넘어가 있었다. 이는 신민당의 개헌운동이 사회적으로 지지를 얻는 가운데 학생운동이 이를 정치적 투쟁의 기회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투쟁활동은 85년 5월 3일 인천집회에서 절정에 이르게 되는데, 신민당의 개헌현판식에 맞추어 학생운동뿐만 아니라 민족민주운동진영에 이르기까지 제 세력이 정치적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정치투쟁의 각축장을 벌였다. 그러나 이 개헌을 계기로 한 정치적 행동은 학생운동을 제 세력들과 구분될 수 없는 정치적 행위자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학생운동은 타자로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자로 명확히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정치적 행위자에서 다시 사회적 타자로의 인식 전환은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하여 발생하게 된다.
NL학생운동은 86년 10월 이른바 ‘건대사태’를 계기로 섣부른 정치투쟁을 비판하게 되고 87년 초에 접어들면서 대중노선의 구현이라는 기치아래 총학생회를 장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각 대학 대표자 협의회를 구성함으로써 NL노선의 대중조직 체계인 서대협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NL학생운동이 정치투쟁을 지양하는 가운데 박종철 치사고문사건의 발생은 학생의 존재를 되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5월 18일 각 대학에서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광주항쟁추모집회 및 시위가 벌어졌고, 이 와중에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미사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고문치사사건에 대한 정권의 은폐ㆍ조작 사실을 폭로했다. 이는 국민적 공분을 일으켰는데, 이 공분을 유발한 학생의 죽음은 민주화운동세력들 전반이 연대하게 되는 권위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학생운동의 집단행동은 다시금 정치적 목적을 가진 행위가 아닌 타자의 얼굴을 재현하는 행동으로서 나타났다. 특히, ‘박종철군 고문살인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 즉 6.10대회에 등장한 학생운동세력은 그 학생을 재현하는 타자로서 다시 나타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순간이 정치적 목적의식을 지향한 학생운동이 사회적 타자로 재현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
87년 6월 항쟁을 지나면서 NL계열 중심의 학생운동은 군부정권 통제의 이완으로 인한 기회구조 속에서 학생사회 내에서 대중성을 확보하는 작업을 진척해나간다. 학생운동의 조직화는 87년 6월 항쟁을 거치면서 학생회에 맞춰지게 되는데, 87년 이후 학생운동의 주류가 된 NL계열 학생운동세력은 학생사회를 대표하는 조직인 학생회를 자신의 운동조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는 86년에 이르기까지 주류 학생운동에서 이해된 학생회의 조직적 위상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학생회는 학생운동 전위조직에 의해 지도되어야할 운동의 저변, 즉 대중조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이제 학생회 자체가 정치적 이념에 의해 목적의식적으로 조직되어야 하는 조직체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학생사회로부터 대중적 동원구조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의 필요성을 인정한 학생운동의 인식과 학생사회가 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담당한 역할을 정치적 영향력으로 인식한 결과였다. 이는 87년 이후 대중적 동원능력을 가진 정치조직으로서 학생회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지만 더 이상 80년대의 학생운동조직은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로 돌아갈 수없는 강을 건넌 것이었다. 물론, 학생운동만이 사회적 권위로부터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 권위의 의식을 전략적으로 선택한 민족민주운동조직들 역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민족민주운동세력들 역시 자신의 영향력을 사회적 권위의 관점이 아니라 정치적인 영향력으로 인식하였고, 따라서 사회적 권위를 전략적으로 선택한 행위는 직선제개헌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효과를 보았지만, 87년 6.29선언 이후 선거 국면에서 4.19이후 처음으로 정치가 아니라 사회에게 찾아온 선취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5.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 그 재발견: 주민학생의 의식화 행위로서의 신촌민회

87년 이후 학생운동은 정치 이념을 가진 조직화된 세력인 동시에 대학사회 전반으로부터 대표성을 획득한 존재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정치적 이념에 의해 지도되는 조직체가 전 대학사회로부터 대표성을 획득한 것은 학생운동에게 유례없이 정치적 집단행동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였다. 4.19와 부마항쟁 등 기존 학생운동에서의 상황과 달리 대학사회 전체가 정치조직에 의해 목적의식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대학사회의 목적의식적 정치화는 정치투쟁 속에서 명멸을 거듭할 수밖에 없게 된다. 즉, 정치 이념세력이 획득한 대표성의 기반은 이내 그 기반으로부터 침식이 일어났고, 이반된 대학사회의 동의는 단지 대중성의 강화라는 구호만으로는 되돌릴 수 없었다. 그리고 의식화 행위는 이러한 정치적 인정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 속에서 동의와 동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즉, 정치 이념을 이뤄내기 위한 대중조직의 결성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회적인 활동으로서의 의식화 행위는 도구화된다.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자유와 권위라는 두 축을 지향해왔던 의식화 행위는 대학사회 내에서 운동세력의 위치를 유지해가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갔고 이는 사회로부터 요청된 새로운 의식화 과정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의식화 행위가 도구로서 전락했지만 학생운동은 정치적 이념과 대표성을 통해 얻은 대중성의 틀 속으로부터 벗어나오지 못한 채 새로운 행위능력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신촌이라는 대학촌에서 시작된 신촌민회라는 활동은 의식화 행위 능력이 새롭게 응용될 수 있는 한 모습을 보여준다. 신촌민회의 활동은 대학사회가 지역사회와의 의사소통작용을 통해 의식화 행위능력을 복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나타내며, 이러한 모습은 신촌민회가 새로운 사회만들기라는 한국사회 학생운동의 정체성, 즉 일제하 이래 이어져 내려온 전통적인 지식인 운동으로서의 자화상 역시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촌민회의 활동은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의 한 연구실을 통해서 진행되었다. 연구실이 담당한 수업의 목적이 신촌민회를 조직하는 활동에 있었고 그 수업의 토대 속에서 민회 활동이 이어졌다. 하나의 연구실이 기획한 실험으로 시작되었다. 따라서 연구실이 기획한 수업의 목적과 그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이 신촌민회를 조직해나가는 과정에서 운동성을 획득하게 되는 과정과 그 운동성이 지역사회에 차츰 인지되어 가는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촌민회 활동의 근거가 된 연구실의 목적은 학생들이 조직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는 것과 이와 함께 주민들이, 이렇게 조직적으로 접근하는 학생들을 이해하고 수용하면서 공동체를 구성하는 상황을 어떻게 창출하느냐에 두고 있었다. 그러한 접근은 곧 학생들로 하여금 지역사회의 권위를 의식화하는 쪽으로 갔다. 연구실은 이를 위해 의식화 행위가 지향하는 권위를 상징화된 가치로서 제시하였다. 그것은 곧 한국학생 사회의 역사적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었는데, 이 상징화된 가치가 바로 연구실에서 조직일감으로 부여한 민회였다. 이런 점에서 민회의 본질은 연구실이 학생들에게 열어준 상징화된 가치였으며, 1992년 이후 민회의 형성은 학생들이 형성해나간 권위를 의식화하는 행위의 과정인 동시에 결과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민회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의식화 행위가 변화된 상황에서 어떻게 실천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회적 함의를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의식화 행위의 시작은 1992년 학과 과목인 ‘정치사회학’ 수업에서 비롯된 신촌민회의 조직이었다. 학생들의 한 학기동안의 조직활동을 통하여 1992년 5월에 ‘무악-신촌민회’가 결성되었다. 하지만 수업의 학생들은 민회를 지향한 의식화의 행위자로서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창립된 민회 역시 존속하지 못했다. 그리고 약 10년이 흐른 2001년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이란 수업에서 신촌민회 조직을 통한 의식화 행위는 재시도되었다. 2001년 다시 조직이 시도될 때에는 수업은 민회를 조직하는 학생의 정체성에 변화를 부여하였다. 우선 1992년의 경우 지역 내 주민들의 친교, 여가 그룹과 연고자 그룹들을 중심주체로 간주하고 학생들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학생들은 결성을 위한 촉매역할을 했지만 조직화를 이어갈 수 있는 행위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의식화의 행위자로서 학생의 자기상을 주민과 동역으로 보는 학생주민이란 정체성이 수업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또한 민회란 상징을 통해 학생의 의식화 행위가 대면하는 주체의 위상에도 변화가 있었다. 1992년의 수업에서 민회는 지역사회 주민조직들의 연대를 통한 자치조직적 성격이 강했지만 2001년 수업에서 목적으로 제시된 민회는 투표를 통해 정당성을 인정받은 의회체를 지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민회상(像)의 변화는 조직활동에 있어서 지역의 주체성을 학생과 주민 등 생활인으로 채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아가 주어진 지역공동체의 공동체적 대표성을 일정 정도 대변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교육․학생 기관과 학교와 종교기관에 비중을 상당정도 부여한 창립방식을 선택하게 하였다. 이러한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1992년의 수업을 통해 동기부여된 의식화 행위가 민중의 의식화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한다면, 2001년에 기획된 의식화 행위는 사회적 권위를 지향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전자가 지역공동체로부터 소외된 생활주민들의 권능화(empowerment)에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후자는 그 시작에서부터 지역사회의 교육, 문화와 역사성을 가진 기관을 선택하면서 지역공동체의 책임의식의 자각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결과 2001년 5월 신촌민회가 다시 창립되게 되었다.
새롭게 창립된 신촌민회는 조직가인 학생들이 수업에서 주어진 정체성, 즉 주민인 학생으로서 자기를 주체적으로 형성해나가는 과정과 맞물려 권위를 의식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 이 수업의 틀을 넘어 자발적으로 주민으로서의 학생임을 의식하며, 그 의식을 실천해냄을 통해 자기를 타인으로서의 타자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 수업으로부터 시작된 의식화 행위가 지역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였다. 신촌민회가 창립된 직후 민회의 가맹단체들은 학생을 우선 이상주의적이고 이질적인 세력으로 인식하였으며, 이 자기에게로 전적으로 통합될 수 없는 타자를 “이웃”으로 수용하는 데에는 학생의 실천이 필요하였다.
학생이 기존 권위에 포섭될 수 없는 타자란 사실은 신촌민회 회의가 진행되면서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신촌민회에 제안되는 의제의 발굴 및 조사는 수업의 학생들로 조직된 창립준비위원으로부터 승계한 민회의 학생전문위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또한 신촌민회 가맹단체에 연세대와 이화여대 총학생회 대표가 참여하였고, 특별히 이화여대의 경우 당시 이대 상권의 현안이었던 신촌민자역사(民資驛舍) 밀리오레 입주 반대 문제를 민회에서 공론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제를 만들고 회의를 주도해야 했던 학생들은 신촌민회의 구조 내에서 보조적인 역할로 인식되는 반면 생활주민은 주역으로 간주되었지만 실제 생활주민은 여타 대도시 지역의 주민이 그러하듯 이 지역의 삶과 공동체성을 의식하는 주체로서 한계를 드러낸 채 신촌민회의 의제를 만들 능력도 없는 수동적인 등록된 거주자로 남아있었다. 생활주민이 주역으로 여전히 간주되는 상황에서 이화여대 총학생회의 밀리오레 입주관련 안건은 1차 민회회의에서 채택되지 않았고 이는 이대 총학이 이후 불참하는 사유가 되었다. 하지만 이대 총학의 안건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이후 회의에서 학생들이 중심이 된 사무국과 전문위원이 주도하여 상정한 노천까페와 봉원동 광장만들기 의제에 대해서도 가맹단체의 대표들은 대개 수동적이거나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학생이 중심이 된 민회 회의의 자리는 각 가맹단체들로 하여금 스스로 선취권을 행사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도록 몰아갔고 이러한 상황은 학생들을 급진적이고 이질적인 세력으로 인식하게 만들어갔다. 사무국과 전문위원을 거점으로 한 학생 활동은 지역기관들과 학생들 사이에 존재론적인 차이와 그에 따른 간격이 있음을 인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 간격을 뛰어넘어 신촌민회가 타인으로서의 타자인 학생을 마주대하게 되는 사건은 학생들이 그 존재론적인 차이로부터 비롯된 질문, 즉 “저들에게 말하고 있는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해 주민으로서의 학생이라는 대답을 찾아가는 행동을 통해 이루어졌다.    
주민으로서 학생의 현존은 존재론적인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서 자신을 새롭게 구성해나가는 행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로 새로운 학생운동조직을 결성하는 일이었다. 이는 수업을 통해 조직 활동에 참여한 학생들의 일부가 사무국과 별개로 학생조직을 결성하는 일과 체화당이라는 지역사회 까페를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두 가지 사건으로 부터 비롯되었다. 학생조직의 결성은 민회 조직 활동에 가담한 학생들이 민회의 활동과 보조를 맞추는 학생조직이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시민사회운동학회로 현실화되었다. 2001년 11월에 결성된 시민사회운동학회는 이듬해 체화당 마을학교를 기획, 실천해내면서 신촌민회와 별개로, 주민인 학생의 현존을 드러내 보였고 이는 피아가 뒤섞여 답보상태에 빠져있던 민회로 하여금 사회적 책임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사무국을 통해 학생을 인식했던 신촌민회의 가맹단체들이 체화당 마을학교를 통해 드러난 ‘주민인 학생’과 마주하면서 타인으로서의 타자로서 학생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이는 각 기관들에게 새로운 주체의식을 가지게 하는 힘이 되었다. 이러한 의식화는 신촌민회와 시민사회운동학회 활동의 근거지가 된 체화당을 통해서 고양되었다. 신촌민회, 시민사회운동학회와 역사를 같이한 체화당은 학생들에 의해 만남과 행사의 장소로 운영되면서 지역사회까페를 지향하였다. 체화당은 한편으로 토요강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여 신촌민회 책임세력으로서 학생들의 주체성을 강화해갔고 다른 한편 체화당 마을음악회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사회와 신촌민회에게 주민으로서 학생의 현존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다.
시민사회운동학회와 체화당이 보여준 주민으로서의 학생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행동이 의식화로 이어지는 과정은 2003년 8월 민회 대표 회의에 그간 학생들의 활동이 공적으로 재현되는 사건을 통해 발생한다. 그 시기에 이르기까지 민회 대표와 대표를 파견한 기관들은 여전히 생활주민을 주역으로 간주하면서 자기의 주체적 역할을 방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민회가 권위를 행사하길 요청하는 학생들의 말과 행동은 학생의 이상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존재론적인 판단을 통해 회피되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학생들은 자신이 지역사회를 만들어가는 새로운 주민의 일원임을 행동으로 확증했으며, 이 행동이 공적으로 보이고 들려지는 자리는 학생이 타인으로서의 타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민회가 타자의 권위를 인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민회는 그 타자의 현존에 주체적 결단으로 응답하지 못하였고 이는 각 학생조직들이 스스로의 활동을 의식화 행위로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무산시키고 마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각 학생활동들은 개별적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해나가게 되었고 신촌민회는 침체의 길로 빠지게 되었다.
신촌민회가 다시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 것은 2005년 재창립을 선언하면서이다. 2003년 이후 의장단과 사무국장은 존재하였으나 실제적인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수업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재창립을 시도한 것이다. 이 과정은 이전의 민회 활동이 쌓아온 주민과 학생들 사이에 있던 공감대에 기반하여, 주민들의 의사를 묻고 재창립에 힘을 싣기 위해 주민투표를 통해 이루어졌다. 2005년 4월 29일에서 5월 2일까지 신촌민회의 필요성과 재창립 찬반 의사를 묻는 주민투표가 진행되었다. 주민투표는 기표소와 선거인 명부를 갖추고 비밀투표로 진행되었으며, 무작위로 추출된 200명을 대상으로 하였고 196표의 총 유효투표 중에서 181표의 찬성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주민투표를 통하여 신촌민회 재창립은 탄력을 받으면서 2005년5월 27일 체화당에서 재창립 총회가 열렸다. 재창립된 신촌민회는 2001년과 달리 가맹단체들이 오히려 적극적인 의지를 표현하였고, 이는 2003년의 움직임으로 이어지지 못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사회에 풍성하게 응축된 권위 의식의 반영이 나타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롭게 창립한 신촌민회는 8월에 들어서면서 봉원동에서 발생한 봉원교통 버스노선 변경 관련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었고 이는 이 사태가 해결된 뒤에 반추해보면 신촌민회가 이 지역의 공동체적 삶에 하나의 실천적인 사회적 권위로 조직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봉원교통은 봉원사 등 지역기관과 주민의 제안에 의해 설립된 마을버스회사였지만, 2004년 서울시 교통정책에 편승하여 컨소시엄 구성을 통해 마을버스에서 지선버스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5년에 들어 봉원교통 노선의 수익률이 전년대비 하락하자 버스 준공영제를 실시하고 있던 서울시는 노선들을 통합하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요금인상을 단행하였다. 하지만 통합된 노선은 신촌로터리와 독립문에서 봉원동으로 들어가는 단거리 노선이라는 점에서 봉원동 “마을버스” 기능을 비교적 충실히 담당해왔던 노선이었다. 따라서 연세대학과 이화여대 학생을 포함한 봉원동거주주민 그리고 봉원동과 안산에 드나드는 시민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고 이러한 불만을 대변하여 봉원교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이 위원회가 신촌민회에 접근하면서 민회가 이 활동을 지원하게 되었다. 지원 과정을 통해 서울광역시 단위의 정치적 권위를 행사하는 서울시 당국이 노선을 심의할 수 없는 한계를 지녔다는 사실이 민회에게 밝혀졌으며, 이러한 사실의 인식은 신촌민회가 마을토론회를 통해 심의를 대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전망을 가지게끔 했다. 즉, 신촌민회가 봉원교통 문제를 통해 ‘마을의 권위’로서 사회적 권위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가맹단체의 대표들로 구성된 의회체로서 신촌민회는 지역사회로부터 등장한 문제상황을 심의의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의제로 내어놓을 수 있는 권위를 의식하지는 못하였다. 각 가맹단체의 대표들은 봉원교통대책위원회의 활동을 좋은 일로 여겼지만 그 활동이 옳은 일이라는 판단을 주체적으로 내리지 못한 것이다. 옳다는 판단은 정치적 상황, 즉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 필요한 상황 하에서 권위 행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신촌민회는 봉원교통대책위와 공동으로 서울시에 탄원서를 내는 행동으로 자신을 한정하였다. 좋은 일에 동참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면서 신촌민회는 자신에게 열린 권위 행사의 가능성을 놓치고 말았다.
신촌민회가 스스로의 주체적 결단을 통한 권위 행사로 이어지지 못한 데에는 민회를 구성하는 기관들이 가진 보수성이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 이전에 주체적 결단을 요구하는 타자의 성격이란 요소가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신촌민회와 마주대하게 되는 행위자로서 봉원교통대책위원회는 그 성격상 일반화된 타자의 권위, 즉 서울시 당국에 자신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 행위자를 통해서 재현되는 타자는 일반화된 타자의 권위를 의식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민회에게 사회적 권위를 의식할 수 있는 지평을 열어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봉원교통대책위원회는 봉원교통문제를 시당국에 탄원하여 해결하려고 결성된 조직이라는 점에서 의식화 행위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고 이는 민회가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의식을 가질 수 없었던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봉원교통문제를 둘러싼 신촌민회의 활동은 민회 사무국으로 하여금 민회가 권위를 의식할 수 있는 가능성과 함께 권위의 의식화를 가능하게 하는 타인으로서의 타자의 필요성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이 반성의 결과 신촌민회 사무국이 기획한 일감이 바로 신촌 논단이다. 신촌논단은 의회체로서 민회가 탄력성있게 토론상황을 창출하고 공론화시켜나가지 못하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으로 학생사회의 자유로운 토론능력과 신촌민회를 연결시키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특히, 신촌이라는 지역성의 특성, 즉 청년사회의 한 심장으로서 젊은 세계의 화두를 관리하고 조성하면서 그 화두가 사회적, 국가적, 세계적 맥락을 자아내는 공공성과 연결되는 토론의 자리를 한 중심되는 대학촌에 형성한다는 목표를 행동화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 신촌논단을 통하여 신촌이라는 대학촌에 지역사회와 관련한 토론상황이 연출된 것은 연세대학교 교수포럼인 경청-연세예론이 제안한 문제제기로부터 비롯되었다. 2006년 6월 29일 “신촌문화와 대학”이란 주제로 열린 포럼을 통해 대학이 지닌 지역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한 문제의식이 보다 선명하게 부각되자 이로부터 신촌 문화를 새롭게 하기 위한 지역사회의 공론을 모으자는 의제가 생겨났다. 이러한 지역 의제가 공론화될 수 있는 장소로서 경청은 신촌민회를 선택하였고 이에 따라 신촌민회는 경청의 제안을 민회의 의제로 발의 및 검토하였고 나아가 신촌논단에서 의제를 공론화하려는 계획을 진행해나갔다. 그리고 이 와중에 서울시가 “연세로 차없는 거리”를 지역사회에 제안하게 되면서 신촌민회가 추진해온 ‘신촌문화’ 의제가 탄력을 받게 되었다. 신촌민회는 2007년 6월 22일 서울시의 “연세로 차없는 거리”를 주제로 한 논단을 열었다. 이 논단에서 신촌민회 사무국 학생들이 중심이 된 발제는 신촌이 유흥과 소비의 공간으로 퇴락하는 현실을 비판하고 새로운 신촌문화를 담지한 사회를 만들어나가자는 점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사회만들기의 한 과제로서 연세로를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만들어가자는 주장에 대해 신촌지역 일부 상인들은 상권 쇠퇴를 명분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또한 “차없는 거리”에 대한 논의를 막기 위해 구의원을 동원하여 구의회에서 신촌민회를 “불법 학생단체”로 매도하면서 공론화를 막으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신촌논단 활동을 통해 불거진 이 사건은 타인으로서의 타자를 통해 의식된 도덕적 권위가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로 고양될 수 있는 경로를 보여준다. 이질적인 세력인 학생이 주민인 학생으로 자신을 밝혀낸 행동은 민회에게 도덕적 권위의 의식을 불어넣었다. 이 권위 의식의 실체는 새롭게 창립된 민회가 자립의 바탕을 마련했다는 데에서 발견된다. 재창립 이전 신촌민회의 유지는 교실에서 조직된 창립준비위원회,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연구실이 형성한 학생운동인자들로부터 충원된 민회 사무국장 그리고 시민사회운동학회와 체화당이 실천한 그간의 의식화 행위에 상당부분 의존하였다. 반면, 2005년 재창립 이후 2006년부터 신촌민회 의회체가 사무국장의 재정을 부담하기 시작하면서 재정적으로 자립의 바탕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6년 봉원교통 사건은 여전히 가맹단체의 대표들로 구성된 회의체가 독자적인 의제를 상정하고 지역사회에 제안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학생들의 뜻있는 활동에 성의를 표한다는 점에서 도덕적 권위는 형성되었지만 그것을 넘어 사회적 권위로 넘어가지는 못한 것이다. 이 한계가 타인으로서의 타자의 부재에 있다는 생각은 신촌민회 내에 그 타자를 재현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논단을 기획하게 만들었다. 주민인 학생이 단지 거주지라는 물적 토대에 기초하여 형성된 사회적 관계에 근거하는 협소한 의미의 생활주민과 그 생활주민을 규정하는 권력의 권위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서,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관계를 엮어갈 수 있는 새로운 실천의 장으로서 논단이 기획된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이 중심이 된 신촌논단은 주민으로 하여금 거주지라는 토대를 뛰어넘어 새로운 물적 토대, 즉 연세로와 관계를 맺어주는 가교로서 역할 한 것이다. 학생들의 말과 행동은 지역과 주민을 거주를 위한 공간으로 전락시켜버리는 권력의 권위에 대항하여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에 대한 권위를 의식하게 하는 타자로서 나타난 것이다.
논단 개최를 통해 불거진 사건은 주민의 사회적 관계를 거주지라는 물적 토대로 환원시키는 힘, 바로 사회적 관계를 상품들 간의 관계로 전치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양식 그리고 그 양식들의 관계를 규정해온 정치권력의 권위를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사회적 권위를 신촌민회가 의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사회적 권위가 형성될 수 있는 계기란 사실은 상인의 일부가 신촌논단을 주최한 민회를 “학생들의 불법단체”로 매도하며 이를 지방자치단체가 묵인하고 더 나아가 연세로의 변화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천명한데에서 발견된다. 상인들의 반대는 계급적인 갈등상황이라기 보다 오히려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는 권위를 누가 행사하는가’에 대한 인식문제로부터 비롯되었다. 상인들 역시 신촌이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했으며 이는 그들 역시 논단을 통해 드러난 타자와 그가 열어주는 새로운 사회적 관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새로운 사태에 대한 책임이 정치권력에게 있으며 그 사태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이해의 손실 역시 권력이 책임을 져야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서대문구 행정과 의회가 일부 상인들의 비난에 대해 보인 태도는 자기 권력의 권위가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님을 재확인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타자로부터 연원하는 새로운 사회로서의 신촌에 대해 정치적 권위는 “지역경제활성화”라는 명분 아래 권위주의화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권위주의화된 권력의 현실이 새로운 타자의 등장이란 사건을 상인과 학생들 간의 갈등으로 은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갈등은 바로 사회적 권위가 등장하는 계기로서 나타난다.  
하지만 이 계기가 실질적으로 권위가 형성되는 국면으로 이어질 지에 대해선 예측하기 어렵다. 그 실현 유ㆍ무는 현재로선 민회 사무국의 조직활동이 각 지역사회의 기관과 단체들로 하여금 민회에 참여하여 권위를 행사하도록 설득할 수 있는 가에 일차적으로 달려있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의 역사로부터 이어진 학생운동의 의식화 행위의 관점에서 평가할 때 사회적 권위의 형성은 단지 사무국을 운영하는 조직가의 역량에만 달린 것은 아니라고 본다. 연세대학교 교수포럼에서 그 상(像)이 제시되었고, 서울시의 공간 제공에 대한 의사표현으로 가능성이 더해졌지만 여전히 이 신촌을 새로운 공간으로 만드는 일에 대해 지역사회의 기관과 단체들이 권위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들이 공적책임을 느껴야할 타인으로서의 타자 부재와 연관된다. 지역사회의 각 기관과 단체들은 신촌을 소비와 유흥의 공간으로 버려둘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신촌이란 타자가 일반화된 타자의 권위 아래 있다는 인식을 통해 현실을 애써 외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신촌이란 공간을 행정의 몫으로 넘겨버린 것이다. 그리고 지금 현재 시(市)행정이 공간의 재량권을 일부 넘겨줄 수 있다는 제안에 대해 신촌이란 타자의 권위를 의식하여 그 제안에 대답할 수 있는 권위있는 주체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신촌민회가 그 역할을 수행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타자의 문제가 남아있는 것이다. 이전까지 신촌민회가 조직될 수 있었던 것은 연구실을 기반으로 한 의식화 행위였지만 이는 도덕적 권위를 이끌어내는 데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제 신촌민회가 사회적 권위로 나아갈 수 있는 타인의 현존은 특정한 대학 내 연구실이나 단체 또는 써클을 넘어 학생사회 일반으로부터 의식화 행위가 발생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2006년 5월 29일 신촌민회와 연세대학교 총학생회가 공동주최한 “신촌, 라다크를 만나다 : 세계화의 열병, 풀뿌리적 돌아봄과 내다봄”이라는 논단과 포럼은 신촌이라는 사회를 통하여 한국사회 전반에 연결되는 청년, 대학생 토론구조를 끌어가는 어떤 사회적 설득력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제화, 세계 경쟁, 국제 경영적 훈련이라는 대학사회가 당연시하는 자본주의적 종속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신촌청년성의 세계성이 이제는 민회와 체화당을 통하여 형성될 수 있음을 이 논단과 포럼은 보여주었으며 또한 이 자리는 이러한 설득력이 사회적 권위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를 끌어가는 타자의 모습이 선명해질 수 있다는 기미를 느끼게 하는 사건이 된 셈이기도 했다. 즉, 이러한 일감은 ‘신촌’을 사회적 타자로서 재현할 수 있는 학생사회의 의식화 행위가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타자의 현존은 정치적 권위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권위가 형성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이상 신촌 민회의 경험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기독학생조직의 의식화 행위를 통해 종교부문의 사회적 권위가 의식화되었다면 87년 정치변동 이후 주민인 학생의 의식화 행위가 지역사회로 하여금 사회적 권위를 의식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즉, 주민으로서 학생의 행동이 지역의 종교,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한 제 세력들로 하여금 사회적 권위를 의식하도록 촉발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으며 이는 한국사회에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지식인 운동으로서의 학생운동이 지역에서의 취약한 민간운동을 활성화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학생운동의 전통적 역할로부터 이어질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은 학생운동이 새롭게 조직되어야 하는 필요를 제기한다. 학생운동의 의식화 행위가 여전히 가능하며 또한 그것이 권위를 의식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 사례는 87년 정치변동 이후 사회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도 학생운동을 조직해야할 필요성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 다양한 시민,사회운동들이 조직되었지만 정작 학생사회의 운동조직들은 쇠퇴를 면치 못하고 있으며 그 새로운 조직화의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 시민,사회운동들은 학생사회가 운동의 뿌리가 된다는 점을 인식하면서도 사회적으로 당면한 과제의 압력에 의해 학생사회의 자율적인 운동조직을 결성하는데 힘을 보태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2004년부터 조직된 기구학생운동으로는 가장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YMCA연맹이 전국대회의 결의로 대학Y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학생사회의 운동조직으로서 대학Y를 재조직하고자 하는 활동은 주목할만하다. 하지만 YMCA의 경우에도 신촌의 대학가 등 서울 중심으로 접근할 뿐, 지역으로 확산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각 지역은 여전히 학생운동조직의 가능성에 큰 무게를 두고 있지 않는 듯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신촌민회의 활동은 학생의 의식화 행위가 여전히 가능하고 또한 그것이 권위의 의식화를 불러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학생운동을 조망하는데 하나의 단초를 내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6. 결론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통치체제의 한 형태이며 따라서 가치를 배분하는 권위적 주체를 구성하는 방식의 문제이다. 즉 정치권력의 구조를 결정하는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유럽사회가 근대국가로 전환되는 시기에 민주적 정체의 필요성을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자유주의 이념과 그 이념의 토대가 된 사회세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달리 말하면, 자유주의가 정치권력의 구조 문제를 사회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반면, 식민지로부터 독립하여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이식받았으며 더욱이 6.25전쟁을 겪은 한국사회에서 민주화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정치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사회는 민주화에 관련된 쟁점을 정치권력을 쟁탈하기 위한 세력들 간의 경쟁으로 인식했으며, 이는 경제개발과의 대립 구도 속에서 민주화의 의미가 사회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시켰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87년으로 귀결되는 민주화가 가능했던 것은 정치권력을 사회적 주체를 통해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주화라는 정치권력의 문제를 가치로서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회적 권위의 의식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 의식화에는 사회적 타자로서 등장한 학생운동의 역할이 있었다. 학생부문의 의식화 행위가 정치적 권위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 부문들로 하여금 권위를 받아들이게 만들었고, 그 권위가 정치적 권위를 대립적으로 인식하면서 민주화의 가치를 사회적 의제가 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일단 자리가 잡힌 사회적 권위는 80년대의 구조적 상황 속에서 정치적 권위의 각축장 안에 등재되고 말았으며, 이와 함께 학생운동은 권위를 의식화하는 사회적 관계망을 그 근본에서 잃어버리면서 하나의 물리적인 정치 세력으로 남겨졌다.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 과정이 단절되면서 학생운동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로는 민주화를 끌어나갈 수 있는 동력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이해는 권력의 권위주의화라는 현실에서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한 대안으로서 제도화 문제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준거를 제시한다. 민주주의의 제도화 문제에 있어 핵심은 행정권력과 시민사회를 매개하는 기제에 있으며, 현대 대의 민주주의 하에서 정당이 바로 그 역할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 87년 이후 제도화의 초점은 이러한 민주화의 장치로서 정당과 국회 그리고 이들과 행정권력과의 관계에 집중되었고, 그 결과 권력구조의 개편을 위한 헌법 개정에서부터 정당의 혁신에 이르기까지 대안들이 제시되어왔다. 하지만 87년 이후 실제 제도화되었어야 할 과제는 바로 의식화된 사회적 권위였으며 오히려 이 사회적 권위의 실체들이 정치사회로 흡수된 것이 민주화를 저해하는 요인이 된 것이다. 따라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다시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란 문제로 돌아가게 된다. 하버마스의 생활세계 맥락이 공공권역의 활성화 과정에서 인식될 수 있는 현상학적인 세계인 것처럼, 제도화에 실패한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가 현재에 재현될 수 있는 것 역시 새로운 사회적 권위를 의식화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글이 살펴본 신촌민회의 경험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권위의 의식화에 있어서 학생운동이 가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실험적으로 진행된 의식화 행위가 지역사회와의 대면을 통해 사회적 권위를 형성할 수 있는 단초를 보여주며, 이 단초는 학생부문 일반에서 운동체가 조직되고 의식화 행위가 일어날 때에 권위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민주적 가치가 새롭게 창출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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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사상 2008년 가을호(142집)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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