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소개
 
 
연구소 약사
 
 
연구소 소식
 
 
민중신학 자료
 
 
독자마당
 
 
월간살림
 
 
신학사상
 
 
신간안내
 
 
도서신청
 
 
관련 사이트 링크
 
 
안병무 선생님
 
신학사상 총목차 연구논문 투고규정 안내 신학사상 원문서비스


  한신연 
 신학사상 2008년 가을호(142집) 차례


이번 호에는 8편의 연구논문을 게재하였다.

홍경원 박사의 “해석의 윤리-창세기 34장의 디나 이야기 읽기”는 독자의 입장에서 성서를 해석할 때 성서가 바르게 이해된다는 새로운 성서해석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는 창세기 34장에 대한 해석에서, 독자가 피해자 디나의 시각에서 본문을 읽을 때 그는 ‘윤리적으로 바른’ 해석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종록 교수의 “에스겔서 1장이 보여주는 신적 환상 묘사의 낯설음과 모호함-신묘막측, 평지풍파, 그리고 전광석화” 논문은 에스겔서의 낯설음과 모호함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형체를 갖지 않고, 포착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입증시켜준다고 한다. 따라서 에스겔서는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넘어 보다 깊은 체험의 만남에로 초청한다고 해석한다.  

Q에 대한 집중적 연구를 하고 있는 김명수 교수는 “Q와 동양적 지혜의 예수- 초기 그리스도교 Q공동체의 예수 휴머니즘”의 논문을 통해, Q 교회 공동체에서 전해진 예수는 기복이나 구원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그를 사랑하고 믿는 자들이 따라야 할 동양의 현자(賢者)나 구도자의 모습을 떠 올리게 하기에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나 숭배의 대상으로 섬겨온 전통을 넘어서야 한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에 대한 동양적 지혜의 성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김영관 교수는 “칼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례전론: 세례와 성만찬 교리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통해 형식화된 성만찬을 넘어 칼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적 성만찬 곧 매 순간 행해지는 성만찬예식을 통해 참된 기독교인들은 성령님의 초월적이시며 일깨우시는 능력을 통해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시어 성육신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 지상에서의 겸손하신 삶과 가르침 그리고 죽음과 부활-재림을 인식하며 진정한 신앙고백과 함께 매일 매일 실천적인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한다.  

조현철 교수는 “희년 정신에서 본 예수 공생활의 생태적 의의: 누가복음 4:16-21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통해 희년의 사회적 차원과 함께 생태적 차원을 제시하고 강조한다.

양현혜 교수는 “함석헌의 역사의식과 사유체계”라는 논문을 통해 오늘의 역사를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재조명하고, 그런 역사의식의 삶을 공유할 것을 제안한다.

정태식 교수는 “현대사회에서의 종교의 사회적 위치와 공공성”이란 논문을 통해 종교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종교비판과 대표적 세속화이론인 사유화이론이 주장하는 종교의 사유화 현상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공적영역으로 새로운 사회정치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이런 역할이 중요함을 밝히고 있다.  

이혁배 교수는 “기독교 윤리적 관점에서 본 소득양극화”라는 논문을 통해 우리사회의 소득 양극화가 점점 심해지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 해결이 기독교윤리의 시급한 과제라고 강조한다.

유엔미래포럼은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달과 생태계 파괴로 지구와 인류의 미래가 아주 빠르게 절망 상태로 돌진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지금 이 같은 상태를 돌이키지 않으면 희망이 없는데, 이 일은 누구보다 종교인이 앞장서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의 종교, 아니 다른 종교보다 기독교가 정말 희망의 길을 열어 갈 수 있을까? 교회와 신학과 신앙의 폐쇄된 굴레를 깨고 세상의 변화를 직시하며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 모색이 있어야 할 것이다.  

차례 (142집)              

연구 논문
홍경원 ․ 해석의 윤리-창세기 34장의 디나 이야기 읽기
이종록 ․ 에스겔서 1장이 보여주는 신적 환상 묘사의 낯설음과 모호함
            -신묘막측, 평지풍파, 그리고 전광석화
김명수 ․ Q와 동양적 지혜의 예수- 초기 그리스도교 Q공동체의 예수 휴머니즘
김영관 ․ 칼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성례전론: 세례와 성만찬 교리를 중심으로
조현철 ․ 희년 정신에서 본 예수 공생활의 생태적 의의: 누가복음 4:16-21을 중심으로
양현혜 ․ 함석헌의 역사의식과 사유체계
정태식 ․ 현대사회에서의 종교의 사회적 위치와 공공성
이혁배 ․ 기독교 윤리적 관점에서 본 소득양극화


========================================================================
(논문소개1)

희년 정신에서 본 예수 공생활의 생태적 의의: 누가복음 4:16-21을 중심으로
                                                                
                                                                             조현철(서강대신대원 교수/조직신학)

초록

        하느님이 창조한 이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현대의 생태위기는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학이 대면해야 할 중요한 문제다. 과거에 주로 인간 중심으로 연구되던 그리스도론 또한 예외가 아니다. 생태문제를 염두에 두고, 자연에 무관심했던 기존의 인간 중심의 그리스도론에 대한 반성이 있었으며, 성서의 지혜 전통 등에 기초하여 그리스도론의 영역과 의의를 창조 전체로 확대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이 글은 그리스도론에서 역사적 예수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고려하여, 예수 공생활의 생태적 의의를 발굴하고 조명하려는 시도다.
        이 글의 논의는 누가복음 4:16-21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 글에서는 예수의 사명을 요약, 선포하는 이 구절이 희년의 전통에 서 있음에 주목하여, 희년의 사회적 차원과 함께 생태적 차원을 제시하고 강조함으로써, 예수 공생활의 생태적 의의를 주장하는 것이 정당함을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치유와 식탁친교와 같은 예수의 주요 활동이 심원한 생태적 함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끝으로, 이 글은 예수의 삶의 생태적 의의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이른바 ‘생태적 제자직’으로 초대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Abstract

        The ecological crisis today, which exerts an enormous impact on the world created by God, is a critical issue that Christian theology must face. However anthropologically oriented it was in the past, Christology is not an exception in this regard. With the ecological problem in mind, the anthropological Christology in which nature was by and large disregarded has been criticized, and attempts were made to expand the realm and significance of Christology to the entire creation, based on the Wisdom tradition in the Bible. This essay is an endeavor to shed light on the ecological significance of Jesus' public life, considering the importance of the historical Jesus in Christology.
        Luke 14:16-21 will be the center around which this essay unfolds. Noticing that this passage, which summarizes and proclaims the mission of Jesus, stands in the context of the Jubilee tradition, and presenting and stressing an ecological dimension in the Jubilee, I demonstrate that we are correct in claiming an ecological significance for Jesus' public life. In this context, I attempt to show that Jesus' main activities, such as the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 healing, and table fellowship, have profound ecological implications. Finally, I emphasize that the ecological significance of Jesus life invites Christians today to the so-called 'ecological discipleship.'


주제어: 생태 위기, 예수의 공생활의 생태적 의의, 희년의 생태적 차원, 생태적 제자직

Key Words: ecological crisis, the ecological significance of Jesus' public life, the ecological dimension of the Jubilee, ecological discipleship


1. 예수 공생활의 생태적 의의 탐구의 필요성과 접근 방식
        
        우리는 오늘날 생태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세상 전체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는 생태문제와 무관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대의 생태위기는 또한 하느님이 창조한 이 세상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생태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을 지적으로 성찰하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생태문제와 직접 관련이 되는 신학의 영역은 아마도 창조론일 것이다. 인간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은 곧 하느님의 창조물에 대한 영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학의 모든 주제는 그리스도론에 비추어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교 신학을 고유하게 그리스도교 신학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창조론 또한 마찬가지다. 창조를 예수 그리스도에 비추어 살펴볼 때에 비로소 우리는 창조에 대한 온전한 그리스도교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생태문제를 염두에 두고, 창조 전체를 그리스도론의 관점에서 보려고 할 때, 그리스도론이 대체로 지금까지 지나치게 인간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지나친 인간위주의 그리스도론은 하느님의 피조물인 자연을 인간이 남용하고 파괴하는 것을 신학적으로 방치하는 데에 한 몫을 했다. 한편, 그리스도론 자체도 인간중심의 그리스도론만으로는 부족하며, 우주 전체에 대한 의의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 그 안의 모든 것을 만들어낸 창조주 하느님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두 측면에서 그리스도론의 영역과 관심을 인간에서 창조 전체로 확대할 필요성을 제기할 수 있다. 지나친 인간위주의 그리스도론에 대한 반성의 결과, 창조 전체와 깊이 연관되는 구약성서의 지혜 전통과 이에 바탕을 둔 신약성서의 문헌을 중심으로 그리스도론을 전개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지혜 그리스도론(Wisdom Christology)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이른바 우주 그리스도론이 그리스도론의 영역과 관심을 창조 전체로 넓혀 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리스도론에서 역사적 예수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고려하면, 예수의 공생활을 다루지 않는 한, 그리스도론의 관점에서 창조를 충분히 조명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필자는 바로 여기서 예수 공생활의 생태적 의의를 제시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여기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문제점은 예수의 공생활에서 생태적 의미나 연관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하지만, 부활의 체험에 기초하여 신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 전체와 밀접한 연관 속에서 파악하고 있으며(고전 8:6; 골 1:16; 히 1:2, 요 1:3), 복음서의 부활 발현 사화가 암시하듯이 부활한 예수와 역사적 예수 사이에 일종의 연속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적어도 원론적으로 예수의 삶은 인간만이 아니라 창조 전체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곧, 예수 공생활의 생태적 의의의 개연성을 주장할 수 있다. 남은 과제는 이러한 개연성을 구체적으로 신학적인 뒷받침을 하는 것이며, 이 연구는 이 과제의 일환이다.
        필자는 누가복음 4:16-21을 예수 공생활의 생태적 의의를 논의하기 위한 출발점과 기초로 삼는다. 필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누가복음 4:16-21은 희년의 맥락 속에서 예수의 사명을 요약하여 선포하고 있다. 둘째, 희년 정신에는 사회적 차원은 물론 생태적 차원이 중요한 요소로 포함된다. 셋째, 따라서 예수의 공생활은 인간만이 아니라 창조 전체의 깊은 관련이 있다. 곧, 예수의 공생활에는 근본적으로 생태적 의의가 있으며, 그 생태적 의의는 희년의 맥락 속에서 구체적으로 파악된다.
        이 연구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필자는 다음과 같이 접근할 것이다. 첫째, 누가복음4:16-21, 특히 18절과 19절을 중심으로, 예수가 자신의 사명을 희년의 실현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기존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제시한다. 둘째, 주로 레위기를 중심으로 안식일, 안식년, 희년의 관계와 그 근본정신에 기초하여 희년의 사회적 차원과 함께 생태적 차원을 부각시킴으로써 예수 공생활의 생태적 의의 주장이 정당함을 제시한다. 셋째, 예수의 대표적인 활동인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치유행위와 식탁친교를 희년의 맥락 속에서 봄으로써 예수의 공생활의 인간중심적 이해를 넘어 생태적 해석을 시도한다. 마지막으로, 예수 공생활의 생태적 의의가 그리스도인들을 오늘날 어떠한 삶으로 초대하는지, 이른바 그리스도인의 ‘생태적 제자직’을 제시하며 이 글을 맺을 것이다.

2. 누가복음 4:16-21에 나타난 예수의 사명: 희년의 선포와 실현

        누가는 세례 요한의 투옥(3:19-20), 예수의 세례와 광야의 유혹(3:21-22, 4:1-13) 후에, 예수께서 갈릴래아로 돌아가 공생활을 시작했음을 집약적으로 요약한 다음(4:14-15), 예수의 나사렛 회당 방문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방문기를 예수의 갈릴래아 활동 중간에 배치하고 있는 마가, 마태와는 달리, 누가는 예수의 구체적인 공생활을 예수의 고향 방문기로 시작함으로써 이 방문기를 예수의 공생활의 사명을 요약하여 선포하는데 사용한다. 고향 방문기가 예수의 삶의 다양한 측면들을 근본적이며 일관된 관점에서 엮어주는 일종의 해석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16절),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데를 찾으시니 곧(17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18절)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19절). [...]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절).

유대인들의 안식일 회당 예배는 먼저, 개인적인 기도를 드린 후에, ‘쉐마’(“이스라엘은 들어라”) 기도로 시작한다(신 6:4-9; 11:13-21). 다음으로, 예배의 중심인 성경 봉독은 율법서(토라)와 예언서로 이루어지며, 대개 회당장이 성경을 봉독하고 해설할 사람을 선택하여 맡기는 것이 관례다. 율법서는 주기적 봉독(lectio continua)으로 행해진데 비해, 예언서는 독서자의 재량에 따라 율법서의 내용에 상응하는 예언서의 한 부분을 읽게 된다. 예배는 봉독된 성경 내용에 알맞은 설교로 끝나는데, 회당장은 예배 참석자 누구에게나 설교를 요청할 수 있다(행 13:15). 당시의 유대교 회당의 관례적인 이 독서 방식을 고려하면 예수가 봉독한 이사야의 대목은 예수가 직접 선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추정은 “찾으시니(eu-ren)”라는 동사로 더욱 뒷받침된다. 또한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라는 대목에서 예수가 유대교의 종교 예식에 충실했으며, 따라서 예수가 이 구절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왜 이사야의 이 구절을 선택했을까? 아마도 성령의 임재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사렛으로 돌아왔을 때, 예수는 이미 성령이 충만한 상태였다. 이는 예수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아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성령으로 충만한 예수는 자신을 주님의 영이 내린 선지자 이사야와 동일시했으며, 자신의 사명 또한 이사야가 선포한 사명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눅 4:18-19). 누가는 예수에게서 이사야의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본 것이다(눅 4:21). 이렇듯 예수가 성령과 밀접한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은 예수가 창조 전체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뜻한다. 성서 속에서 성령은 언제나 창조 전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창 1:2; 시 104:29-30). 성령은 하느님의 창조의 능력만이 아니라 창조된 만물을 보존하고 쇄신하며 완성으로 이끌어주는 능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수를 성령이 충만한 메시아로 본다면, 이미 여기에서 예수의 사명과 삶을 인간만이 아니라 창조 전체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는, 곧 예수 공생활의 생태적 의의를 주장할 수 있는 가능성과 정당성을 찾아 볼 수 있다.
        예수가 선택한 이사야의 구절은 예수의 사명을 집약하여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의 공생활 전체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누가복음 4:18-19는 이사야 61:1-2와 58:6을 편집한 결과다. 대체로, 이 구절은 이사야 61:1의 일부를 삭제한 후, 58:6의 일부 대목을 삽입하고, 61:2의 일부 대목을 더한 것이다. 이러한 누가의 편집 의도는 58:6절의 일부를 삽입함으로써 예수의 사명의 사회적 차원을 분명히 하고, 61:1-2의 특정 부분을 제외함으로써 예수의 사명의 보편성을 제시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두 본문은 모두 유배 시기 이후의 예언자인 제3이사야(이사야 55-66)에 속한다. 제3이사야는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후 유배시기의 예언자인 제2이사야(이사야 40-54)가 선포한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의에 빠진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하였다. 시기적으로 먼저 형성된 이사야 61:1-3이 선포한 약속은 원래의 “구체적이고 현실적 의미”에서 “비유적 의미 또는 구세사적 의미”로 발전했고, 다시 “종말론적 의미”를 띠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제3이사야가 선포한 이 약속의 성격과 수신인이 명확하지 않게 되었다.
        한편, 더 늦은 시기에 형성된(기원전 515-450년) 것으로 보이는 이사야 58:1-12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외형적인 규정 준수로만 단식일을 지키며, 반사회적인 행동들을 자행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그런 행동들 때문에 약속된 구원이 오지 않는 것이라고 일깨워준다. 특히, 6-7절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유배에서 돌아온 후의 초기 공동체에 사회적인 분열이 심각한 상태였음을 암시해준다. 이 상황에서 제3이사야는 참된 단식은 인간들 사이의 억압적 관계를 폐지하고 굶주리고, 떠돌며, 헐벗은 이들을 맞아들이는 것, 곧 정의의 실천이며, 이때서야 비로소 주님의 구원이 온다고 선포한다. 곧, 이 구절은 해방 사상을 표방하며 사회비판적 의미를 강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누가가 이사야 58:6을 인용한 것은 이 구절의 명백한 사회비판적 메시지 때문이 아닐까? 사회비판적 함의가 분명한 이 구절을 이사야 61:1-2에 삽입함으로써 애매하게 해석될 수 있는 이 대목의 해석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쁜 소식이 선포되는 가난한 이들(눅 4:18a)은 실제로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해석은 누가가 다른 복음사가들에 비해서 사회적, 경제적 관심을 더 많이 보인다는 사실과도 잘 들어맞는다. 그렇지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회 경제적 차원의 해방 약속이 이사야 61:1-2의 선포가 내포하는 종말론적 구원 약속을 배제하는 것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종말론적 구원은 현실의 사회, 경제적 차원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현실의 사회, 경제적 관심이 배제된 종말론적 구원의 약속이란 공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가가 이사야 61:1-2에서 특정 부분을 제외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삭제된 “마음이 상한 자”, “모든 슬픈 자”는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 따라서 누가가 이 표현들을 삭제한 것은 예수의 사명 선포의 수신인이 단지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곧, 예수의 사명에 특정 민족을 넘어서는 보편적 성격을 부여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19절의 “주의 은혜의 해(evniauto.n kuri,ou dekto,n)”는 희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형용사 dekto,j는 언제나 “하느님을 통해서 인간이 받아들여짐과 인간에 대한 흡족함”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그렇다면 주의 은혜의 해의 구체적인 내용, 주께 받아들여지고 흡족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가 이사야서를 통해서 선포하는 일들, 곧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들과 눌린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이들이 눈 뜨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지닌 주의 은혜의 해라는 표현에는 앞으로 살펴볼 레위기 25장의 안식년과 희년의 전통이 깔려 있다.
        요컨대, 18절과 19절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18절에서 선포하는 것은 19절의 주의 은혜의 해의 구체적인 내용, 곧 희년에 이루어져야 할 것들이며, 거꾸로 19절의 주의 은혜의 해는 18절에서 선포하는 약속의 요약과 결론이다.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예수의 사명은 바로 희년의 선포에 해당한다. 예수가 선포하는 희년의 약속은 이미 언급했듯이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적어도 누가가 묘사하는 예수는 희년의 한계로 종종 지적되는 이스라엘 민족주의를 넘어서 희년의 보편성을 지향하고 있으며, 희년의 사회적 차원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끝으로, 예수는 이사야서를 낭독한 후,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는 매우 함축적인 설교를 한다(21절). 희년의 약속이 예수 자신의 선포를 통해서 사람들이 듣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의 사명은 희년의 선포만이 아니라 희년의 실현까지 포함한다(눅 7:18-23). 이사야 61:1-2의 인용은 예수의 사명이 하느님이 약속한 종말론적 구원 사건임을 암시한다. 예수의 선포를 통하여 이제 과거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sh,meron)”은 예수 생애로 한정되는 과거가 아니라 지속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너희 귀에(evn toi/j wvsi.n u`mw/n)”라는 말이 암시하듯, 예수의 선포는 이를 듣는 우리의 회심과 응답을 요구한다. “오늘날”이란 예수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선포에 대한 우리의 결단의 때이기도 하다.

3. 희년의 생태적 의미

        예수의 사명을 선포하는 누가복음 4:18-19가 희년을 가리킨다면, 예수의 공생활은 희년의 맥락에서 살펴볼 때에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희년 정신에는 히브리인들의 고난의 체험이 바탕이 된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는 열망이 배여 있으며, 이 열망이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함으로써 희년 규정이 촉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주로 레위기 25:8-17, 23-55에서 찾아볼 수 있는 희년의 근본정신은 해방이며, 희년의 지향점은 되찾음과 돌아감이다. 이러한 희년의 정신과 지향에는 만물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희년은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사십구 년째 해의 일곱째 달 초열흘날, 곧 속죄일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림으로써 시작된다(8-9절). 희년에는 이스라엘 땅에 사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해방이 선포되어, 누구나 원래의 자기 소유지, 곧 땅과 집을 되찾고, 자기 씨족에게 돌아가야 한다(10절). 또한 이 해에는 땅을 묵히는데, 땅에 씨를 뿌려서도, 저절로 자라난 곡식이나 포도를 수확해서도 안 되며(11절), 땅이 낸 소출로 먹고 지내야 된다(12절).
        가난하여 빚을 지게 되면, 대개는 땅을 먼저 팔고, 다음에 몸담고 사는 집을 팔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 자체를 팔아 종의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희년의 해방을 통한 원상회복(restitutio in integrum)도 이 순서를 따르고 있으며, 빚의 탕감은 희년 정신을 구현하는 핵심 요소이다. 인간의 온전한 원상회복은 신체의 자유는 물론 자신이 몸담고 사는 집과 생계를 보장해주는 땅을 회복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땅의 온전한 회복은 땅을 돌려받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땅 자체의 회복을 포함해야 한다. 우리는 땅과 함께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존재, 자연 속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땅 자체의 회복을 위해서 땅의 휴식, 곧 휴경이 필요하다.
        땅과 관련한 희년의 정신과 규정은 기본적으로 안식년의 경우와 동일하다. 안식년 규정은 희년 규정보다 먼저 생겼으며 희년의 기초가 되었다. 안식년의 휴경에 관해 내용은 출애굽기 23:10-11과 레위기 25:2-7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칠 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에는 땅을 묵히고 경작을 금하는데, 그 의도는 휴경하는 밭에서 나오는 소출을 가난한 이들과 가축과 들짐승이 먹도록 하려는 것이다. 레위기에 따르면 출애굽기와 달리 주인도 휴경하는 밭의 소출을 먹을 수 있으나, 휴경의 초점은 역시 가난한 이들과 짐승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안식년과 희년의 휴경은 일차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짐승들에 대한 관심과 보호에 있다. 안식년과 희년에 땅에서 나오는 소출은 가난한 이들, 곧 남종과 여종과 품팔이꾼들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휴경 또한 사회적 함의와 의도를 지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식년과 희년의 휴경 규정에서 사회적 의미만이 아니라 생태적 의미 또한 찾아볼 수 있다. 휴경 때 저절로 생겨나는 소출로 보호하려는 대상에는 가축은 물론 들짐승도 들어있다. 휴경 규정은 이미 인간 위주의 관심을 넘어서고 있다. 실제로 밭을 경작하지 않으면 땅의 입장에서는 쉬도록 배려 받는 것이다. 가난한 이를 위한 배려가 배여 있는 안식년과 희년의 휴경 규정을 통해서 땅은 쉬면서 자신의 힘, 곧 지력을 회복하게 된다. 안식년 규정으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땅도 자연스럽게 보호를 받는 것이다. 더구나 레위기의 안식년 규정은, 출애굽기의 규정과는 달리,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라고 함으로써 안식년이 땅을 위한 안식의 해임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25:4). 출애굽기의 안식년 규정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면, 레위기의 규정은 자연에 대한 생태적 관심도 함께 표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안식년과 희년의 휴경 규정으로 땅을 쉬게 하고 짐승을 배려하는 것은 오늘날의 표현으로 생태적 관심을 제도화하려는 시도이며, 이 시도가 사회적 관심의 제도화와 함께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휴경 규정에서 사회적 의미와 함께 생태적 의미를 길어내는 것은 사회적 질서와 자연적 질서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 질서의 훼손은 자연 질서의 훼손을 초래한다고 보는 성서의 관점과도 잘 부합한다(호 4:2-3; 렘 9:1-10; 시 107:33-34).
        안식년 규정은 안식일 규정에 기초하고 있다.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안식일 규정은 엿새 동안은 일하되 이렛날은 쉬라고 말한다(출 20:10-11; 23:12; 신 5:14-15). 안식일 규정이 분명히 하고 있듯이, 주인이 쉼으로써 생기는 안식일의 실질적인 혜택은 그 집에 의탁하고 있는 종과 이방인과 가축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안식일 규정의 근본적인 동기와 근거는 명백히 신학적이다. 이 점은 안식일이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선언하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출 20:10; 신 5:14). 안식일의 기원과 의미, 따라서 안식년과 희년의 근거는 근본적으로 하느님께 있는 것이다. 희년의 근거를 궁극적으로 하느님께 놓을 때, 희년이 지향하는 범위는 인간만이 아닌 창조 전체로 확장되어, 희년의 생태적 의미가 더 명확하게 부각될 것이다.  
        창세기의 첫 번째 창조 설화에 따르면, 안식일은 엿새 동안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쉬신 것에서 유래한다(출 20:11; 창 2:2-3). 하느님께서는 창조를 마치시고 쉬신 이 날을 축복하고 거룩하게 하였다. 이날을 축복하고 거룩하게 하셨다면, 이 축복의 수혜자는 누구인가? 안식일이라는 시간을 축복하였다는 것은 결국 시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을 축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물은 이 축복으로 거룩하게 되었다. 따라서 안식일은 창조의 축복과 성화이다. 더 나아가, 안식일은 창조의 구원을 가리키고 있다. 안식일 규정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불완전하지만 지금 여기서 실현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식일은 미리 지내는 창조의 구원의 축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일상에서 벗어나 안식일의 의미, 곧 창조의 축복과 성화와 구원을 제대로 음미할 때에, 우리는 세상을 온전히 하느님의 창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임을 깊이 인식하고, 창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음미하며, 창조 질서의 보존을 위해 애쓰게 될 것이다. 이렇듯 안식일에는 창조주 하느님께 근거한 생태적 차원이 있다.
        안식일의 준수는 또한 야훼 하느님이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셨음을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다(신 5:14-15). 이로써 이스라엘인들은 자신도 한때는 남의 밑에서 종살이했음을 기억하고, 지금 자신들에게 몸 붙여 사는 종과 이방인들과 가축들을 쉬도록 배려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특정한 피조물이 아닌 안식일이라는 시간을 축복하고 거룩하게 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한다. 안식일의 축복은 모든 피조물을 위한 것이며, 특히 자신의 쉴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피조물들에게 안식의 근거를 제공한다. 자신의 쉴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자기 땅과 집도 없는 가난한 이들, 심지어 자신의 몸마저 팔아버린 종, 말 못하는 짐승, 말없이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인간에게 먹을 것을 내어주는 땅이 바로 그런 처지의 피조물들이다. 안식일 규정에는 자연까지 포함되는 약한 존재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정신이 깊이 스며있는 것이다. 또한 약자에 대한 존중을 요구하는 안식일 정신은 다른 피조물들을 일방적으로 희생하면서 나만의 안식을 향유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이렇듯 안식일에는 구세주 하느님께 기초한 생태적 차원이 있다.
        안식년 규정도 안식일 규정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께 근거하고 있다. 사회적 측면의 고려는 물론, 땅 자체의 안식을 강조하는 레위기의 안식년 규정은 땅의 안식의 해가 곧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고 선언한다(레 25:4). 땅을 쉬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쉼에 기인한다. 여기서도 사회적 약자의 보호라는 사회적 관심과 땅의 휴경이라는 생태적 관심은 근본적으로 신학적 동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희년 규정 또한 안식년과 안식일 규정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께 근거하고 있다. 땅과 사람의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희년 정신에는 근본적으로 하느님 경외의 정신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정신은 다시 하느님이 만물의 창조주이며 출애굽의 하느님이라는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특히, 땅의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근거는 “토지는 다 내 것”이라고 선언하는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레 25:23). 땅은 하느님께 속하는 것이며, 사람은 땅을 사용할 권한이 있을 뿐이다. 이것을 망각하고 땅을 자기 것으로 영원히 소유하려는 행위는 하느님이 세우신 창조 질서를 위배하는 것이다. 땅의 질서를 훼손하면 인간의 질서가 훼손되며, 이로써 다시 자연의 질서가 훼손된다. 따라서 땅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간은 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도록 하느님에게서 위탁받은 존재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창 2:15-17). 요컨대, 희년과 안식년과 안식일의 근거는 창조주이며 구세주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근거하고 있으며, 바로 여기서 희년의 사회적 의미는 물론 생태적 의미가 흘러나온다. 주님은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이끌어낸 가난한 이들의 주님이며, 동시에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창조주이며 구세주이신 하느님은 인간은 물론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 대해 사랑어린 관심을 갖고 계신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의 규정에는 창조의 올바른 질서와 해방을 향한 일관된 움직임이 있으며, 이 움직임은 안식일에서 안식년으로 희년으로 나아갈수록 확대, 강화된다. 한편, 이 규정들이 일곱 날, 일곱 해, 마흔아홉 해라는 주기로 적용된다는 것은 창조의 질서 회복과 해방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음을 암시한다.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의 구현에 대한 갈망은 이 갈망을 이루어줄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염원을 낳는다.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이루어질 희년, 곧 메시아의 희년에 대한 염원을 낳는 것이다. 이렇듯 안식일은 자신을 넘어 안식년을, 안식년은 자신을 넘어 희년을, 희년은 자신을 넘어서 메시아의 희년을 가리킨다. 이제 주님의 영이 내린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주의 은혜의 해는 안식일, 안식년, 희년으로 옮아가며 더욱 강화되는 쉼과 해방의 절정, 곧 메시아의 희년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메시아의 희년에는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고 포로된 이들이 자유롭게 되며 억눌린 이들이 해방될 것이다(눅 4:18). 또한, 희년의 생태적 지평에서 보면, 이 메시아의 희년은 인간만이 아닌 창조 전체에 복음과 자유와 해방을 선포한다. 예수의 공생활은 근본적으로 인간은 물론 자연을 포함한 창조 전체를 지향하고 있다.

4. 예수 공생활의 생태적 의의

        예수의 공생활은 창조 전체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예수의 사명은 희년의 선포와 실현을 뜻하고, 하느님께 바탕을 둔 희년 정신은 인간만이 아니라 창조 전체를 아우르는 생태적 의미를 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공생활이 생태적 의의를 지닌다는 이 글의 전반적 논지가 정당화됨을 알 수 있다. 이제부터는 예수의 구체적인 활동을 희년의 맥락에서 살펴봄으로써 예수 공생활의 생태적 해석을 시도할 것이다. 공관 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 치유와 구마행위, 식탁 친교를 들 수 있다. 공관복음에서 하느님 나라는 그 자체로 예수의 삶의 핵심이며, 예수의 다른 활동들을 일관되게 이어주는 중심 주제다. 예수의 치유행위와 식탁친교는 하느님 나라의 부분적 실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의 삶을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현을 위해 바쳤으며, 또한 자신의 사명을 희년의 선포와 실현으로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하느님 나라와 희년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을지라도, 근본적인 차원에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느님 나라의 실현은 곧 희년의 실현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희년의 생태적 의미를 인식하는 그만큼,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생태적 의미도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 공생활의 핵심 내용인 하느님 나라와 치유와 식탁친교를 생태적 의미를 지닌 희년의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1) 하느님 나라(h` basilei,a tou/ qeou): 창조 전체를 위한 희년
        예수의 삶의 중심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의미를 올바로 파악하려면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말씀들을 포괄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구약성서와 이스라엘 역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표상인 하느님 나라는 일차적으로 정적인 영토적 의미보다는 역동적인 하느님의 다스림을 뜻했다. 당시에, 하느님의 다스림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제나 염원해왔지만, 이 세상에서는 결코 실현된 적이 없는 정의를 하느님이 실현시킨다는 것을 뜻했다. 하느님 나라는 세상에 대한 결정적인 하느님의 다스림, 곧 종말적인 실체를 가리켰다. 예수 또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당시의 이해를 공유했을 것이다.  
        동시에, 예수는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미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예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낸 자신의 행위를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이미 도래한 결과로 이해했다(눅 11:20). 하느님 나라는 먼 미래가 아니라, 임박해 있는 하느님의 다스림이다. 이처럼 임박한 하느님의 다스림이 치유와 같은 예수의 행위를 일으킴으로써, 이 임박성은 한층 강화된다. 임박한 미래의 하느님 나라는 현재를 이미 변화시키고 있다. 보물과 진주의 비유 또한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근본적 변화, 회심을 요구함으로써 우리를 변화시키고 있음을 알려준다(마 13:44-46). 요컨대,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예수를 통해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다스림이다.
        예수를 통해 지금 여기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떠한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은 하느님의 다스림의 성격에 달렸으며, 이 성격은 다시 예수가 제시하는 하느님의 표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과 관련된 여러 비유들, 특히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양과 동전과 아들의 비유는 예수가 선포하는 하느님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연민과 자비, 화해와 용서의 하느님임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다스림의 성격은 사랑의 다스림에 다름이 아니다. 한없는 사랑의 하느님의 다스림을 체험한 사람들 또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요청받는다(눅 6:36). 하느님 나라를 생태적 차원을 포함하는 희년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 하느님의 사랑의 다스림은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을 포함한 창조 전체를 위한 것임이 부각된다. 하느님 나라의 사랑의 요구 또한 우리의 사랑은 인간을 넘어 자연을 포함한 창조 전체를 향해야 함을 알려준다. 이 세상에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는 인간만이 아닌 창조 전체의 해방을 지향하고 있다. 희년은 빚의 탕감으로 사회적 해방을 이루고, 땅의 휴경으로 사회적 해방을 생태적 해방으로 확장하고 심화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희년의 규정은 사람들 사이에 빚과 노예를 없애고 땅의 착취를 종식시키기 위해 고안된 이상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미래에 이루어질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하느님의 사랑의 다스림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짐을 뜻한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완성될 때, 사람들은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 속에서 기쁨에 넘칠 것이다(사 61:1-2). 하느님 나라를 희년의 생태적 맥락에서 보면,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는 인간만이 아닌 모든 피조물, 특히 땅으로 대변되는 자연을 위한 것임을 일깨워준다. 희년의 정신에서 볼 때, 완성된 하느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 속에서 기쁨과 조화를 누리는 것은 인간만이 아닌 모든 피조물이다(사 11:1-9; 65:17-25).

        2) 예수의 치유와 식탁친교: 창조 전체를 위한 희년의 실현
        하느님 나라가 예수의 삶의 초점이므로, 예수의 치유와 식탁친교는 하느님 나라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미래의 차원에서, 예수의 이 활동들은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가시적 표징으로 볼 수 있다. 치유와 식탁친교는 하느님 나라를 미리 보여주는 표징이다. 동시에, 현재의 차원에서, 예수의 이 활동들은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매개하여 구현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예수의 활동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 이 세상에 현존한다(눅  7:22). 세상에 현존하는 하느님 나라로 인해 세상이 변화된다. 예수가 선언했듯이, 만물을 새롭게 하는 성령으로 충만한 예수를 통해서 희년은 이미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눅 4:21; 시 104:30).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는 예수의 구체적 활동을 희년의 생태적 맥락에서 살펴보자. 치유와 식탁친교는 직접적으로는 인간과 관련된 활동이다. 하지만, 예수가 자신의 사명을 희년의 선포와 실현으로 파악한 이상, 예수의 공생활의 모든 측면을 희년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은 정당하고도 필요한 일이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예수의 행위의 표면적 의미를 넘어, 그 근원적 의미에 도달할 수 있다. 희년의 관점에서 치유와 식탁친교를 바라보면,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하지만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는 생태적 의미를 여기서 길어낼 수 있다. 병든 이들, 나쁜 영에 사로잡힌 이들, 소외된 이들은 창조 때에 하느님이 부여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이들이며, 희년의 정신은 이들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희년의 맥락에서 치유와 소외된 이들과의 친교라는 예수의 행위를 읽는다면, 이 행위들은 잃어버린 이들의 상태를 “원상회복”하는 것이다. 이 행위를 희년의 정신에서 보면, 해방되어 원래의 상태를 “되찾고” 자신의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영역에 땅, 곧 자연도 포함된다. 따라서 희년의 생태적 차원에서 읽는다면, 예수의 치유와 식탁친교의 활동은 오늘날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인간의 탐욕을 지탱하는 물질 자원의 창고로 전락하여 훼손되고 있는 자연과도 깊은 관련이 있음이 드러난다. 요컨대, 예수의 치유와 식탁친교의 활동은 암묵적이지만 근본적인 차원에서 인간과 자연을 모두 포함한 창조 전체의 해방, 주님의 희년을 지향하고 있다.
        예수는 병들거나 악령 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었다. 질병 때문에 개인적으로 고통을 당할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소외되었던 이들이 치유를 받음으로써 자신들의 건강을 회복하고 자신들이 원래 있던 공동체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눅 5:12-16). 치유로써 질병만이 아니라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소외가 끝나고, 다른 이들과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이들은 병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마땅히 되어야 할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인간의 폭력적 착취로 말미암아 자연이 자신의 본 모습을 잃어버리고, 유비적인 의미에서, 병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희년의 관점에서 예수의 치유행위의 생태적 의의를 읽는다면, 오늘날 자연 또한 예수의 치유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해방이 필요함을 인식할 수 있다. 예수가 병자를 치유하고 악령을 내쫓는 것은 피조물을 억압하여 짓누르고 있는 창조의 파괴 세력을 내쫓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죄인들을 비롯한 소외된 이들과 함께 지내며 먹기를 즐겼다(눅 19:1-10). 이들은 소외로 인한 내적 상처와 고통으로 병든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예수가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한 식탁친교는 일종의 치유행위로도 볼 수 있다. 함께 먹는 행위는 이들을 비인간화시켰던 소외를 무너뜨리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감각을 회복시켜 주었다. 이들은 이 친교를 통해서 치유된다. 소외에서 해방되어, 이들은 자신들의 인간적 존엄성의 감각을 회복하고, 인간으로서 마땅히 되어야 할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늘날 자연은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적절히 존중되지 못한 채, 주로 물질 자원의 공급 창고로 취급받고 있다. 자연은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부정당하고, 인간과 본연의 관계를 잃고 소외된 것이다. 희년의 관점에서 예수의 식탁친교의 생태적 의의를 읽는다면, 오늘날 자연 또한 예수의 식탁친교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해방이 필요함을 인식할 수 있다. 예수가 소외된 이들을 받아들여 함께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창조 전체에 분열과 억압의 기운을 내쫓고 하느님의 친교와 해방의 기운을 불어넣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치유와 식탁친교의 활동을 희년의 맥락에서 볼 때, 소외된 이들에 대한 예수의 관심과 선택은 인간을 넘어 창조 전체로 확대된다. 예수가 선포하고 자신의 활동을 통해서 실현했던 메시아의 희년은 인간을 빈곤하게 만들고 자연을 착취하는 이 세상의 뿌리 깊은 악순환에 대한 돌파구가 될 수 있다. 희년에서 조망한 예수의 공생활은 사회정의는 물론 생태정의의 그리스도론적 근거가 될 수 있다. 예수가 추구했던 희년이 온전히 실현될 때면, 창조 전체, 사람만이 아니라(사 2:4; 미 4:3-4) 사람과 땅 사이에도 하느님의 평화가 가득할 것이다(사 11:1-9; 65:17-24).

5. 생태적 제자직: 창조 전체를 위한 희년의 지속적 실현

        예수의 제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삶을 따르도록 초대받는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직의 기초와 방향은 예수의 삶에서 찾아야 한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을 희년의 선포와 실현으로 여겼으며, 여기에 자신의 삶을 바쳤다.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직 또한 희년의 맥락에서 이해한 예수의 삶에 그 기초와 방향을 두어야 할 것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는 말씀 또한 예수의 희년 선포가 그저 지나간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지속적으로 우리의 응답, 결단을 촉구하고 있음을 뜻한다. 예수의 제자직은 “오늘날”에도 희년의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희년의 생태적 의미를 고려하면, 예수의 제자직은 창조 전체를 위한 희년의 지속적 실현, 곧 생태적 제자직으로 볼 수 있다.
        예수를 따라 희년의 정신을 지속적으로 실현하려면, 먼저 회심, 곧 철저한 내적 변화와 외적 실천이 필요하다. 더구나 이 내적 변화와 외적 실천은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까지 이르러야 한다. 사회적 해방과 생태적 해방을 지향하는 희년의 정신을 구현하려면, 인간에게는 정의를, 자연에게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을 보장하지 않는 현재의 사회경제 체제에 대한 심각한 반성과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다수의 인간과 자연에 고통을 강요하는 현재의 상황을 뒷받침해 온 지배적인 사고방식과 삶의 방식을 그리스도인들부터 솔선해서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도 현재의 불의한 체제의 수혜자이기 때문에, 우리부터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철저한 변화가 필요하다. 모든 피조물의 해방과 회복을 원하는 하느님께로 돌아설 때에만,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임을 깊이 인식하고 인정할 때에만, 우리는 다른 피조물들의 희생으로 얻는 착취적 이득을 포기하고, 나만이 누리는 배타적 행복이 아닌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누리는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우리는 현대 세계의 지배적인 경제 체제가 많은 사람들을 제도적으로 착취하고 자연을 파괴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유지되고 있으며, 그 혜택마저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불의한 상황을 비판하고 거부할 용기를 지닌 사람들은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현재의 체제에 대항하여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이 상황을 어쩔 수 없는 주어진 조건으로 여기며 체념하거나 여기에 자신을 적응시키고 만다. 그러나 희년의 정신에서 바라본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여 하느님의 모든 자녀들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는데 자신의 삶을 바쳤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삶은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불의한 사회세력과 제도에 대한 굴하지 않는 대항을 포함한다. 예수는 이 세상의 반대 세력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나라, 메시아의 희년의 선포와 실현에 충실했으며 여기에 헌신했다. 예수는 당시의 상황이 창조주와 구세주 하느님에 바탕을 둔 희년의 정신에 어긋남을 깊이 인식하였으며, 그 상황을 뒷받침하는 세상의 방식에 따르기를 거부하였다. 오히려, 예수는 희년의 정신이 요구하는 철저히 다른 삶의 방식을 택했으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여기에 충실하였다. 예수는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소외된 이들의 편에서, 이들의 해방과 원상회복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예수를 따라 창조 전체에 대한 정의와 평화를 보장해줄 새로운 삶의 양식을 선택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우리는 생태적 제자직으로 초대받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사명인 희년 선포와 실현은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선택과 결단, 삶의 태도의 표명을 요구하며, 당시의 사람들은 결국 예수와 예수의 요구를 배척하고 말았다(눅 4:22-30).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라면, 예수를 십자가로 이끌었던 길은 또한 우리의 길이어야만 한다. 우리는 철저한 거부를 통해서 인간과 자연 모두에 대해 불의하고 폭력적인 현재의 사회 경제 체제의 성격과 실체를 드러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희년의 정신에 맞는 대안적 가치와 목표와 삶의 양식을 탐구하고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이 대안을 실천하여 이 세상이 그만큼 변화하도록 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예수의 제자직은 두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첫째, 예수의 제자직은 이 세상과 철저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예수의 제자직은 이 세상에서 희년의 정신을 지속적으로 선포함으로써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로 나아갈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둘째, 예수의 제자직은 철저히 세상 속에서 행해야 한다. 예수의 제자직은 이 세상에서 희년의 정신을 지속적으로 실현함으로써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데 기여해야한다. 예수의 충실한 제자가 되려는 그리스도인들은 희년의 지속적 선포와 실현을 위해 헌신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그닐카, J.『나자렛 예수: 말씀과 역사』. 정한교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2002.

김득중.『성서주석: 누가복음(I)』.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3.

김이곤. “희년법의 현대적 의미”, 『기독교사상』 337. 1987, 1월.

노쓰, M.『레위기』. 박재순 외 옮김.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4.

로핑크, G.『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그리스도 신앙의 사회적 차원』. 정한교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1986.

마샬 I. H.『루가복음(I)』. 강요섭 옮김.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3.

몰트만, J.『예수 그리스도의 길: 메시야적 차원의 그리스도론』. 김균진, 김명용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김균진 옮김.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민영진. “희년의 의미”,『기독교사상』 277. 1982, 1월.

신교선.『예수의 궁극적 희년 선포: 루가 4:16-30에 대한 성서신학적 연구』. 수원: 수원가톨릭대학출판부, 1992.

조현철. “생태신학의 이해: 생태신학의 교의 신학적 체계 구성을 위하여”, 『신학과 철학』 8. 2006.

안병무. “성서의 희년사상, 그 가능성과 한계”,『희년신학과 통일희년운동』. 채수일 엮음.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5.

예레미아스, J.『예수의 선포』. 김경희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1999.

이경숙. “‘기쁨’과 ‘은총’의 해, 희년의 성서적 의의”,『희년신학과 통일희년운동』. 채수일 엮음.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5.

임태수. “희년의 의미와 그 현대적 적용”,『신학논문총서: 구약신학. 9』.서울: 학술정보자료사, 2004.

카스퍼, W.『예수 그리스도』. 박상래 옮김. 왜관: 분도출판사, 1977.

채수일. “희년신학과 통일희년운동”,『희년신학과 통일희년운동』. 채수일 엮음.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5.

최영실. “신약성서적 관점에서 본 희년의 성취”,『신학사상』72. 1991, 봄.

Edwards, Denis. Jesus the Wisdom of God: An Ecological Theology. Maryknoll, N.Y.: Orbis Books, 1995.

Fullenbach, John. The Kingdom of God: The Message of Jesus Today. Maryknoll, N.Y.: Orbis Books. 1995.

Gaybba, Brian. The Spirit of Love: Theology of the Holy Spirit. London: Geoffrey Chapman, 1987.

Harrington, Daniel J. “Kingdom of God”, in The New Dictionary of Catholic Social Thought. Ed. Judith A. Dwyer. Collegeville, M.N.: Liturgical Press, 1994.

Hayes, Zachary. Visions of a Future: A Study of Christian Eschatology. Wilmington, Delaware: Michael Glazier, 1989.

Hayes, Zachary. What Are They Saying about the End of the World? New York: Paulist Press, 1983.

Meier, John P. A Marginal Jew: Rethinking the Historical Jesus. New York: Doubleday, 1994.

Rahner, Karl. "Incarnation", in Saramentum Mundi: An Encyclopedia of Theology. Ed. Karl Rahner, Ernst Cornelius, and Smyth Kevin. New York: Herder and Herder, 1968.

Westermann, Claus. Isaiah 40-66: A Commentary. Trans. David M. G. Stalker. London: SCM Press, 1969.


=============================================================================================
(논문소개2)

에스겔서 1장이 보여주는 신적 환상 묘사의 낯설음과 모호함
-신묘막측, 평지풍파, 그리고 전광석화-

                                                 이종록 (한일장신대학교 교수/구약학)

초록

에스겔서 1장은 구약성서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섬세한 신적 환상 묘사를 한다. 에스겔은 자신의 신적 체험을 매우 상세하고 정교하게 묘사한다. 더 이상 자세한 언급이 불필요할 만큼 그렇게 세부적으로 꼼꼼하게 묘사한다.
그런데 에스겔의 신적 환상 묘사는 에스겔이 경험한 것을 그대로 묘사하지 못하고, 전혀 관계없는 것들을 통해서 에스겔이 목격한 것을 유추하도록 하기 때문에, 에스겔이 하는 체험 묘사가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아이러니를 발생케 한다.
그리고 에스겔의 신적 환상 묘사는 독자들이 잘 아는 어휘들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종합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은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괴이한 것이어서 익숙한 언어를 사용하면 할수록 에스겔이 그려내는 것이 낯설어지는 아이러니를 발생케 한다.
이러한 낯설음과 모호함은 왜 발생하는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형체를 갖지 않고, 포착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스겔의 신적 환상 묘사는 정교할수록 모호해지고, 친숙한 언어를 사용할수록 낯설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키워드 : 에스겔, 신적 환상, 이미지, 신적 환상 묘사, 신적 경험의 낯설음과 모호함.



들어가는 글

"신적 환상 묘사하기"를 보여주는 에스겔서 1장을 읽는 것은 언제나 놀라운 경험이다. 본문을 이미 여러 번 읽었지만, 그 놀라움은 여전하다. 에스겔서 1장은 다른 예언서 본문들에 비해 매우 독특하고, 그만큼 낯설고 모호하다. 그런 낯설음은 사물과 상황에 대한 저자의 섬세한 묘사를 통해서 독자로 하여금 이미지로 재현해내게 하는 것들이 너무도 충격적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렇듯 에스겔서 1장이 보여주는 신적 환상 묘사는 익숙한 어휘들을 사용하지만, 그것이 묘사하는 것은 너무도 낯설고 섬뜩하다. 그래서 그 그림을 언어로 그려내는 에스겔 자신도 끔찍했겠지만, 본문을 읽는 독자는 더욱 기괴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낯설음과 괴이함은 에스겔서 1장이 묘사하는 것을 모호하게 만듦으로써, 에스겔이 목격한 것이 정말 무엇인지 알 수 없게 하고, 결국 독자도 자신이 읽은 것이 무엇인지를 의문하게 한다.
이 글에서는 낯설음과 모호함을 자아내는 이런 기괴함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를 에스겔이 사용하는 어휘들을 살피는 작업을 통해서 밝히려고 한다.

1. 이미지-신묘막측

에스겔서 1장을 읽으면서 강하게 느끼는 것은 묘사의 섬세함이다. 에스겔은 자신이 본 것을 세밀화를 그리듯 자세하게 묘사한다. 에스겔이 본 것은 본문에 나오는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이상”(<마르오트 엘로힘>)이다. 이 말은 에스겔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환상장면들, 즉 1장(1절), 8-11장(8장 3절), 40-48장(40장 2절)에 나온다. 그렇기에 이 말은 에스겔서를 특징짓는 매우 중요한 말이다. 에스겔서는 <마르오트 엘로힘>을 중심으로 엮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에스겔서 1장은 에스겔이 본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그래서 그 묘사들은 당연히 시각적 이미지들이어서, 에스겔 1장은 이미지와 관련된 단어들을 많이 반복한다. 에스겔서 1장에 많이 나오는 단어들은  모양<마르에>, 또는 형상<데무트>, 그리고 불<에쉬>, 두르다<사바브>)이다. 에스겔서 1장은 이 네 단어들이 주축을 이루면서, 문장을 엮는다. 이 네 단어를 엮으면, “불모양같은 것들이 사방에 둘러 있다”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본문은 매우 시각적이다. ‘소리’<콜>는 24절과 28절에 나온다. 이 두 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시각적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에스겔은 여러 가지를 본다. 그리고 그것들을 세밀히 관찰하고 자신의 독특한 언어로 묘사한다. 소명 체험하는 순간을 이토록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본 것을 어쩌면 이렇게도 차분하게 관찰하고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에스겔이 본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에스겔은 그것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에스겔은 자신이 본 것들을 묘사하면서, <마르에>와 <데무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먼저 나오는 단어는 <마르에>이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에스겔이 본 것은 <마르오트 엘로힘>이었다.
<마르오트>는 <마르에>의 복수형인데, 개역성경은 <마르에>와 <마르오트>, 그리고 <데무트>를 이상, 형상으로 번역한다. 그러니 에스겔은 <마르오트 엘로힘>, 즉 하나님 형상, 하나님 모습을 본 것이다. 그런데 <마르에>와 <데무트>는 그 사물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래서 이 단어들은 어떤 사물을 정확하게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것이 무엇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에스겔이 이 단어들을 사용하는 까닭은 그가 보는 것들이 처음 보는 것들이어서 그것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무엇이라고 명명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진짜 ‘불’이었다면 그냥 ‘불’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불모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모양과 형상으로 번역하는 <마르에>와 <데무트>는 비유적인 단어들이다. 어떤 것과 비슷한 것, 어떤 모습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 에스겔은 처음 보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 없고, 그것을 자신이 아는 무엇인가에 빗대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본 것과 그것을 묘사한 것은 일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성령강림을 비둘기나 바람, 불로 표현하는데, 그렇다고 성령이 비둘기나 바람이나 불은 결코 아니다.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사도행전 2장)

그들이 성령강림을 경험하고 그것을 바람과 불로 묘사했지만, 그러나 바람과 불이 성령일 리는 없다. 그들이 경험하는 것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을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것으로 굳이 표현하자면, 바람이나 불같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나 날름거리는 화염을 생각하면서, 성령이 어떻게 임했는지를 짐작할 수는 있어도, 성령이 임하시는 장면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처럼 그발 강가에 나타난 것은 에스겔이 묘사하는 것에 의하면, 독자들로 하여금 사람 비슷한 느낌을 갖게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실제 사람일 리는 없다. 에스겔은 그것들이 마치 팔도 있고 다리도 있고 허리도 있는 것처럼 묘사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팔과 다리, 허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최소한 우리 인간들의 팔이나 다리, 허리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에스겔이 팔 같은 것, 허리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팔이나 허리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모호함은 대상 자체와 그것에 대한 묘사의 불일치에서 온다. 다시 말하면, 에스겔이 무엇을 본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이 에스겔이 묘사한 그대로 일 리 없다는 것이다. 그가 본 것과 본 것에 대한 묘사는 어느 정도 겹치기는 하겠지만,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고, 상당히 불일치한다는 것이다. 이런 불일치에 대해서 시몬느 베이유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자.

하느님이 있다. 하느님이 없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하느님이 있다고 아주 확신하는 것은 내 사랑이 환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다. 내가 하느님이 없다고 확신하는 것은 그 말을 사용할 때 상상할 수 있는 것에 견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에서이다.

대상과 대상에 대한 묘사를 일치하는 것으로 보려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도전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 구절을 조심스럽게 읽어야하는데, 이 구절을 샐리 맥페이그는 이렇게 푼다.

종교인으로서 베이유는 하느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환상이 아니라고 확신하면서, 동시에 신에 대한 자신의 어떠한 개념도 하느님과 같지 않다고 확신하고 있다. 베이유의 이 말은 종교적 세계에 깊이 심취한 사람들의 위대한 전통에 자리잡고 있는데, 특히 체험과 예배에서는 확신을 갖지만 하느님의 실재를 표현하는 적당한 언어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않는 모든 종교적 신비주의자들의 말이다. 히포의 대주교 어거스틴은 하느님을 가장 잘 말하는 사람일지라도 ‘벙어리’에 불과하므로, 우리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떠듬거리며 부적합한 말을 하거나 침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을 제대로,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특히 신적인 대상을 경험하고 그 경험을 묘사할 때는 인간적인 것들을 사용해서 묘사해야 하기 때문에, 그 불일치는 더욱 크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존재를 둘러싼 신비, 즉 인간의 모든 사상과 언어에 내포된 부적합성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인간 언어와 쉽게 동일화하게 된다.

만약 신적 대상을 인간적인 어휘들로 묘사한 것과 일치시킨다면, 그것은 우상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나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였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을 묘사하려고 할 때는 이미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에스겔이 본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이런 불명료함은 <데무트>와 <마르에>를 동시에 사용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마르에헨 데무트 아담(5절).
마르에 데무트 케보드 야훼(28절).

이것들을 번역하면, “그것들의 모습은 사람 같다”, 그리고 “야훼의 영광 같은 모습”인데, 이렇게 <마르에>와 <데무트>를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무엇인지 더욱 흐릿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13절을 보면, “생물들의 <데무트>는 불붙은 숯불들같은, 또는 횃불같은 <마르에>이다”라고 하는데, 여기서도 <데무트>와 <마르에>를 함께 사용한다. 그러니까 그 생물들은 숯불처럼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데무트>는 생물들의 모습을 가리키고, <마르에>는 그것이 무엇처럼 보이는가를 말한다. 생물들의 외모는 숯불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의문은, 왜 숯불들이라고 하지 않고, 숯불들 같다고 했으며, 횃불이 아니고, 횃불 같다고 했느냐는 것이다. <데무트>와 <마르에>를 엄격하게 나누기는 어렵지만, 13절을 읽어보면, <데무트>가 사물의 겉모습을 가리키고, <마르에>가 거기서 느끼는 인상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런 사실은 16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바퀴의 모습(<마르에>)과 구조가 눈같고(전치사 <케>), 넷은 하나의 형태(<데무트>)를 이룬다”.
그리고 <데무트>를 사용하지 않고, <마르에>를 두번 사용한 경우도 있다. 40장 3절은 <마르에후 케마르에 네호쉐트>(“그 모습이 놋 모습과 같다”)라고 해서, <데무트>가 들어갈 자리에 <마르에>를 사용했다.
이처럼 우리가 보는 대로, <마르에>와 <데무트>는 “무엇이 어떤 사물과 비슷하다”, 또는 “그것처럼 보인다”는 의미를 갖는데, 어떤 경우에는 “…같다”라는 의미의 전치사 <케>가 지칭하는 사물에 붙기도 한다.

데무트 하하이요트 마르에헴 케가할레 에쉬(13절).(생물의 모양은 숯불…같은데)

<마르에>와 <데무트>가 “무엇과 같은 모습”이라는 의미를 갖기 때문에, 전치사 <케>를 사물에 붙이는 것이 불필요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전치사를 사용했다. 그리고 사물뿐만 아니라, 13절, 16절, 27절처럼, <마르에>나 <데무트>에도 전치사 <케>를 붙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같은 모습”이 아니고, “…모습같은”이 된다.

케마르에 할랍피딤(13절)(횃불모양같은데)

여기서 보는 것처럼, 에스겔서 1장은 사물을 표현할 때, “어떤 것 같은 모양”이라는 표현과 “어떤 모양 같은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비슷한 의미로 보이지만, 그래도 어감은 다르다. 그리고 에스겔서 1장을 보면, 에스겔이 보는 것을 묘사하면서, <마르에>나 <데무트>를 사용하기도 하고, 사용하지 않은 채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들이 에스겔이 묘사하는 그대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인지를 알 수 없게 만든다. 에스겔서 1장은 이런 점에서 매우 모호하다. 그리고 <마르에>와 <데무트>에 “…와 같은”(like)이라는 의미를 갖는 전치사 <케>를 붙여서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이런 점들은 에스겔이 자기 앞에 나타난 것을 보면서, 매우 혼란스러웠음을 알려준다.
이런 혼란스러움은 "…같은 것"이 실제로 "…"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해진다.  천사가 숯불을 꺼내는 장면(10장 2절, 6-7절)을 보면, 숯불 모양만이 아니고, 실제로 숯불이었음을 알려준다.

2 하나님이 베옷 입은 사람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그룹 밑 바퀴 사이로 들어가서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 들어가더라
6 하나님이 가는 베옷 입은 자에게 명하시기를 바퀴 사이 곧 그룹들 사이에서 불을 취하라 하셨으므로 그가 들어가 바퀴 옆에 서매 7 한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취하여 가는 베옷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가지고 나가는데

여기서 보는 대로, 그 숯불은 숯불 모양만이 아니고, 실제로 숯불이다. 그리고 손모양이 아니고 실제로 손을 내밀어서 숯불을 건네준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혼란스럽다. 실제로 불이 아닌 불같은 모양이라고 하면서, 또 실제로 불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전적으로 숯불 자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렇기에 그것은 숯불 같은 것이면서 동시에 숯불이고, 손 같은 것이면서 동시에 손이다. 이러면 그것을 보는 에스겔도 자신이 정확하게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혼란스러움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 체험이 혼란스럽지 않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 언어로 다 표현해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리쾨르는 ‘하나님의 이름’(Naming God)이란 글에서 “인류가 실제로 이름을 지어 형용할 수 없는 존재이다. 즉 우리 인간의 언어에 좌우되어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고 말했다.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의 신비주의자들은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초월성, 신의 신성한 무한성”을 알아차렸다.…하나님이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을 초월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개념화에 사로잡히거나 인간의 이익을 채우기 위해 동원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파악하기 어려운 임재”이시다.

버나드 앤더슨은 사무엘 테리엔이 말하는 불가해한 임재, 즉 파악하기 어려운 임재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을 알려주시고, 이름도 알려주시지만, 그렇다고 그것들로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안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 없다. 우리에게 다 알려져서 더 이상의 신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분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교리적으로 깔끔하게 정리해놓고, 마치 하나님에 대해서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신앙이란 인생이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가운데 하나님께 대한 꾸준한 신뢰를 의미한다.…신앙을 이렇게 역동적이고 상대적인 의미에서 이해할 때, 성서신학자의 과제는 교리들을 구성하고 조직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성서신학자들은 비유하자면 “딱딱한  껍질을 부수는” 어려운 과제에 종사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나중에 딱딱한 껍질을 깨어 그 속에 있는 모든 애매함과 유혹과 투쟁들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생생한 경험으로 가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과제는 신학자들로 하여금 신앙이 종교적 상상력의 언어인 시와 이야기와 상징주의 유형들로 표현되는 다양한 방법을 고려하도록 요구한다.

어떤 경우이든,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구약의 주요등장인물이신 하나님, 즉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러나 주도적으로 다스리시는 그분은 어떠한 선입견적인 카테고리들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인식뿐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기독교 교의신학이 기대하는 바들에 쉽게 들어맞지 않으며, 또한 어떠한 헬라전통의 철학적인 카테고리들에도 쉽게 들어맞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카테고리들은, 하나님이란 주제를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그러기에 우리는 한 번에 한 본문씩, 한 번에 하나씩 자세히 구체적으로, 그렇게 우리의 탐구를 진행시켜 나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내의 연구를 통해 끝에 드러날 그분은, 여전히 가늠키 어려우며 상당할 정도로 놀라움을 주시는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논리적으로 추론해서 말할 수 있는 분도 아니고, 깔끔하게 정리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분도 아니다. 그분은 우리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분이고, 어떤 형태라고 말할 수 없게 울퉁불퉁한 분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언더스탠더불이 아니고, 언언더스탠더블이다. 신묘막측(神妙莫測)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그분은 우리의 이해 속으로 들어오시지만, 금방 우리의 이해를 벗어나는 신비로운 분이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마치 모래를 꽉 움켜쥐면 손에 잡히는 듯하지만, 더욱 세게 쥐면 쥘수록 모래는 다 빠져나가고, 마침내 꽉 움켜쥔 빈손만 남듯,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이해를 빠져나간다. 에스겔이 말하는 그 불명료함, 자신이 본 것을 세밀하게 묘사하면 할수록, 더욱더 불명료해지는 그 모순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2. 바람-평지풍파

이제는 에스겔이 도대체 무엇을 보았는지 그가 묘사한 것들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에스겔이 먼저 본 것은 하늘이 열렸다는 것이다(니프테후 핫샤마임). 하늘이 열렸다는 것은 지금까지는 하늘이 닫혀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개천(開天)의 역사. 무엇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날 듯하다. 그런데 그발 강가에서 에스겔이 목격한 개천의 순간은 결코 감격스럽지 않다. 오히려 섬뜩 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이 열렸다는 것에 마냥 감동해 있을 수가 없다. 어쩌면 하늘이 닫혀 있는 편이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
하늘이 열리면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이상, 즉 하나님 모습을 보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4절부터 상세하게 묘사한다. 첫 번째가 바람이다. 열린 북쪽 하늘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은 보통 바람이 아니다. 엄청나게 강한 북풍이다. 그야말로 ‘북풍한설’(北風寒雪)을 연상케 하는 바람이다. 북쪽에서 세차게 불어오는 그 바람은 히브리어로 <세아라>이다. 그런데 <세아라>는 결코 단순한 바람이 아니다.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남성명사 <사아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자.

․ 보라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사아라트)과 회리바람(사아르)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예레미야서 23장 19절, 30장 23절)
․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재앙이 나서 나라에서 나라에 미칠 것이며 대풍(사아르 가돌)이 땅끝에서 일어날 것이라(예레미야서25장 32절)
․ 내가 랍바성에 불을 놓아 그 궁궐들을 사르되 전쟁의 날에 외침과 회리바람 날에 폭풍(사아르)으로 할 것이며(아모스서 1장 14절)
․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사아르 가돌)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요나서 1장 4절)
․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핫사아르 핫가돌)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요나서1장 12절)
․ 내가 피난처에 가서 폭풍과 광풍(밋사아르)을 피하리라 하였도다(시편 55편 8절)
․ 주의 광풍(사아레카)으로 저희를 쫓으시며 주의 폭풍으로 저희를 두렵게 하소서(시편 83편 15절)

여기서 보는 것처럼, 개역성경은 사아르를 대풍, 폭풍, 광풍으로 번역했는데, 재앙을 일으키고 배를 부숴뜨리는 대단히 파괴적인 바람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한다. 그리고 여성명사 세아라도 강력한 바람을 의미한다.

․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세아라)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열왕기하 2장 1절, cf. 2장 11절)
․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세아라)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욥기 38장 1절, 40장 6절)
․ 그들은 겨우 심기웠고 겨우 뿌리웠고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의 부심을 받고 말라 회라바람(세아라)에 불려가는 초개같도다(이사야서 40장 24절)
․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것을 날리겠고 회리바람(세아라)이 그것을 흩어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인하여 자랑하리라(이사야서 41장 16절)

여기서 보는 것처럼 개역성경은 <세아라>를 주로 ‘회리바람’으로 번역했는데, 회리바람은 ‘오즈의 마법사’를 생각게 하는 강력한 바람이다. 실제로 <세아라>가 엘리야를 하늘로 끌어올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세아라>에 바람을 의미하는 <루아흐>를 결합하면, 더욱 강력한 바람을 의미할 것이다. <루아흐 세아라>는 에스겔 1장 4절, 시편 107편 25절, 148편 8절, 그리고 에스겔 13장 11절, 13절에 나온다.

․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루아흐 세아라)이 일어나서 바닷물결을 일으키는도다(시편 107편 25절)
․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 말씀을 좇는 광풍(루아흐 세아라)이며(시편 148편 8절)
․ 그러므로 너는 회칠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그것이 무너지리라 폭우가 내리며 큰 우박덩이가 떨어지며 폭풍(루아흐 세아로트)이 열파하리니(에스겔서 13장 11절)
․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분노하여 폭풍(루아흐 세아로트)으로 열파하고 내가 진노하여 폭우를 내리고 분노하여 큰 우박덩이로 훼멸하리라(에스겔서 13장 13절)

여기서 보는 대로, <루아흐 세아라>는 광풍이나 폭풍이다. 모든 것을 다 휩쓸고 가버리는 막강한 바람이고, 모든 것을 파괴해버리는 바람이다. 이런 강력한 파멸의 바람이 북쪽에서 불어오는 것이다. 4절 앞부분을 풀어보면 이렇다.

내가 보니, 야, 정말로 세찬 바람이 북쪽에서 불어온다.

지금까지 굳게 닫혀 있던 하늘이 열리더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일어날 줄 알았는데, 무지막지한 회리바람이 불어오는 것이다. 지금 에스겔은 유프라테스 강물을 끌어들이는 운하인 그발 강가에 서 있다. 그러니 에스겔이 서 있는 그곳은 농사를 짓는 평지였을 것이다. 그 장면을 한번 상상해보자. 갑자기 하늘이 온통 새카맣게 변하고 주변에 있는 물건들이 바람에 날아오르고 눈코 뜰 새 없이 먼지가 인다. 그발 강도 풍랑이 거세게 일었을 것이다. 우리야 글을 읽고 속으로 상상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심각함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직접 그것을 목격한 에스겔에게는 대단히 무시무시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에스겔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을 사자성어로 표현하면, 평지풍파(平地風波)인 셈이다. 캄캄해진 세상. 온 세상을 휩쓸고 갈 것처럼 미친 듯이 불어대는 바람. 에스겔은 강가에서 그 바람을 맞으며 눈도 뜰 수 없을 정도로 불어치는 바람을 맞으면서, 예리한 눈으로 자기 앞에서 일어나는 심상찮은 일들을 지켜본다. 우리는 엄두도 못낼 일인데, 에스겔은




신학사상 2008년 겨울호(143집) 차례
신학사상 2008년 여름호(141집) 차례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zero
한국신학연구소 / Korea Theological Study Institute / http://www.ktsi.or.kr
03752 서울시 서대문구 경기대로 55 선교교육원내 / Tel 02-738-3265~7 , Fax 02-738-0167 , E-mail :
Copyright 2000-2019 KTSI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