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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연 
 신학사상 2009년 여름호(145집) 차례


이번 호에는

구약학의 김창주 교수(한신대)의 “호세아의 ‘하나님 지식’과 히브리 사유”의 논문에서 히브리어 ‘야다’와 ‘다아트’를 통해 호세아의 예언 성격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과의 계약관계’ 에서 재조명하고 있다.

조직신학 분야에서 4편의 논문을 게재하였는데, 김희헌 박사는 “조화로운 투쟁 그리고 조화를 향한 투쟁: 과정사상의 미학적 진리론에 담긴 사회윤리학적 함축성” 논문을 통해 공동체를 위한 공동선(Common Good)의 추구에 대한 답으로 과정사상의 사회윤리사상을 제시한다.
이오갑 교수(그리스도대)는 “칼빈 500년- 역사 속의 칼빈과 그의 현재성”이란 논문을 통해 칼빈 탄생 500주년을 맞는 것을 계기로 칼빈의 사상과 사역들 속에서 발견하는, 독특하게 ‘칼빈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형성과 전승 과정을 재고찰하고 있다
안택윤 교수(서울장신대)는 “증여에 의한 부정신학의 부정성(Negativity)이해- 증여와 코라(Khora)의 불가능성과 포화된 현상으로서의 내어짐(givenness)의 가능성개혁교회의 실제적 교의” 논문을 통해 데리다를 넘어 마리옹의 입장에서 하나님 담론의 가능성은 존재가 아닌 우리에게 내어지는 것(givenness)으로서 인간의 주관성과 존재론의 담론을 포화시키는 현상학적인 제일원리로 파악하고 부정신학에 대한 가능성과 아울러 포스트모더니티 하나님 담론의 지평을 열어간다.
김정숙 박사는 “사랑과 자유의 관계 존재론: 캐서린 모리 라쿠나의 실천적 삼위일체 신학의 방법론”의 논문에서 그동안 신학자들에게서 주변으로 밀려났던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을 라쿠나의 신학방법론에 의해 오이코노미아와 테올로기아를 재 연합함으로 실천적 삼위일체론을 구성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종교철학 분야에서 김장생 박사는 논문 “아우구스티누스의 생명의 씨앗 이론을 통한 생명의 변화 이해”를 통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생명의 씨앗 이론에는 한편으로는 신의 초월성을 전제로 하면서도 자연 속에서의 생명의 역동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본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생명 이해를 내재적 개체 역동주의라는 관점에서 연구하고 이를 오늘의 생명문제에 새롭게 적용시키려고 하였다.

교회사 분야에서 2편의 논문을 게재했는데, 이정구 교수(성공회대)는 “한국 현대기독교 미술의 키치(Kitsch)성- 중부지역의 개신 교회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한국개신교회들이 최근 주로 사용하고 있는 시각 이미지가 기존의 종교화에서 현수막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깊이 우려하며. 교회에 한층 미적이며 종교적 감흥을 줄 수 있는 이미지를 설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권진호 박사는 “‘매일의 설교자’ 마틴 루터”라는 논문에서 신학자로서의 루터 연구 못지않게 설교자로서의 마틴 루터 연구의 중요성을 새롭게 제기하였다.  
기독교윤리 분야에서 구미정 교수(숭실대 겸임)는 “무덤에서 모태로- 한국교회의 환골탈태를 위한 대안적 상상력”이란 논문을 통해 한국교회의 환골탈태를 위한 대안적 상상력으로 모태교회를 제시한다. 모태는 생명의 불가분리성이 원초적으로 경험되는 공간이다. 모태교회에서 차별과 배제의 정치 대신에 보살핌과 배려의 윤리가 구현된다.

선교학 분야에서 김홍관 교수(목원대 강의전담)는 “분당샘물교회 아프간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한국 교회의 선교적 과제”라는 논문에서 그동안 한국 교회는 개교회 중심주의에 빠져 개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경쟁적, 공격적, 그리고 외형적인 선교 전략을 구사한 문제점을 분당샘물교회 아프간 사건에서 성찰하고 이제는 개교회 중심적 선교로부터 하나님의 나라 지향적 선교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한국 교회에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기독교육학의 박종석 교수(서울신대)는 “삶과 사람을 위한 기독교교육: 조각가 홍순모를 실마리로”라는 논문에서 학문 간의 대화가 서로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조각가 홍순모의 예술 행위의 특성들이 기독교교육에 주는 통찰들을 다루고 있다. 박 교수는 조각가 홍순모를  ‘예술을 자신의 삶과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의 구도 행위로 조각을 한다.’고 통찰하고 ‘기독교교육의 목적도 삶과 신앙을 통합시키는 성격을 지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1989년 구소련의 해체와 동구사회주의국가들의 붕괴로부터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서구자본부의, 특히 미국중심의 세계화가 20년 만에 스스로의 덫에 걸려 전 세계에 경제적 고통을 주고 있다. 자본주의의 승리를 외치고 국경 없는 성장을 추구하던 신자유주의 경제가 내부로부터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제적 혼란과 고통에서 희생당하는 사람들은 3/4세계 가난한 나라만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선진개발국가의 가난한 사람들도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계 경제가 회복되면 이들의 가난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경제적 고통 속에서도 중산층 이상 상위에 속하는 계층의 사람들은 나라와 지역을 막론하고 더 많은 기회와 부를 축적하고 있다. 따라서 이 세계경제 위기 상황에서 경제 회생만이 주요 목적이 아니라 세계적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인식과 의식을 일깨울 책임은 일차적으로 교회, 특히 신학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붕괴 근본 원인은 경제적인데 있지 않고 도덕의 상실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적 자본에 대한 새로운 각성도 이제는 경제가 경제 논리만이 아니라 도덕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제는 신학이 과거 신학의 지적 탐구에 머물지 말고 오늘의 문제 해결에 앞장 서는 '문제해결의 신학(Problem Solving, Doing Theology)'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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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45집)              

연구 논문
김창주 ․ 호세아의 ‘하나님 지식’과 히브리 사유
김희헌 ․ 조화로운 투쟁 그리고 조화를 향한 투쟁: 과정사상의 미학적 진리론에 담긴 사회윤리학적 함축성
이오갑 ․ 칼빈 500년- 역사 속의 칼빈과 그의 현재성
안택윤 ․ 증여에 의한 부정신학의 부정성 이해
       - 증여와 코라(Khora)의 불가능성과 포화된 현상으로서의 내어짐의 가능성개혁교회의 실제적 교의
김정숙 ․ 사랑과 자유의 관계 존재론: 캐서린 모리 라쿠나의 실천적 삼위일체 신학의 방법론
김장생 ․ 아우구스티누스의 생명의 씨앗 이론을 통한 생명의 변화 이해
이정구 ․ 한국 현대기독교 미술의 키치(Kitsch)성- 중부지역의 개신 교회를 중심으로
권진호 ․ ‘매일의 설교자’ 마틴 루터        
구미정 ․ 무덤에서 모태로- 한국교회의 환골탈태를 위한 대안적 상상력
김홍관 ․ 분당샘물교회 아프간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한국 교회의 선교적 과제
박종석 ․ 삶과 사람을 위한 기독교교육: 조각가 홍순모를 실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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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소개)1



칼빈 500년 - 역사 속의 칼빈과 그의 현재성
Calvin today, in commemoration of 500th year anniversary of his birth

                                                                                                이오갑 Lee, Okab
                                                                                                그리스도대 교수/조직신학

국문초록
        금년은 칼빈 출생 500주년이다. 이를 기념하면서, 이 글은 종교개혁자 칼빈이 어떻게 형성되고 무엇을 하였으며, 현재까지 어떻게 이어져왔는지를 보고자 한다.  물론 이것은 칼빈 이후의 개혁교회의 역사나 칼비니즘의 역사, 또한 칼빈에 관한 해석이나 연구사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칼빈의 사상과 사역들 속에서 발견하는, 독특하게 ‘칼빈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형성과 전승 과정을 보려는 것이다. 그리고 21세기를 맞는 현재, 그것이 오늘 지구적이고, 또한 한국적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재조명되고, 해석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 지에 관심한다. 이 글은 가장 ‘칼빈적’인 것들을 세 가지로 보고, 각각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추구한다. 첫째, 신중심주의이다. 그것은 물신주의와 세속주의에 사로잡힌 현대인들과 교회에게 진정한 초월적 영성을 회복시켜준다. 둘째, 개혁적 영성과 실천이다. 그것은 분리되고 단편적인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서 지식과 실천, 신앙과 삶, 영성과 도덕성, 피안과 차안, 안과 밖이 분리되지 않는 존재의 통전적 일치를 회복시켜준다. 셋째, 사회적 관심과 참여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파산으로 인해 더욱 피폐해진 가난한 나라들과 계층들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촉구하고, 은행, 금융회사, 탐욕적 투자자들, 그들과 결탁한 정부에 대한 감시와 발언, 규제 등을 통해서, 세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노력을 가능하게 해준다.  

주제어
칼빈 출생 500주년, 칼빈주의의 발전, 칼빈의 현재성


                        
        1. 들어가는 말
        올해는 종교개혁자 칼빈 출생 500주년이다. 칼빈의 전통을 이어받은 세계의 여러 교회들과 기관들이 제네바 등지에서 기념대회와 학회를 계획하고 있고, 국내에서도 개혁신학 전통의 장로교회들을 중심으로 한  ‘기념사업회’가 6월 21일부터 이틀간 “요한 칼빈 탄생 500주년 기념대회”를 여는 등 여러 대학이나 기관에서 행사들을 개최한다.  
        칼빈의 출생을 기념하고 의미를 되돌아보는 일은 중요하다. 칼빈은 루터와 함께, 또는 루터와 다르게 개신교의 토대를 놓았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개신교 신앙과 신학의 큰 줄기를 이뤄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칼빈의 전통은 루터의 그것과 함께 오늘날까지도 개신교 사상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리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 20세기 대 신학자 칼 바르트, 에밀 부룬너, 위르겐 몰트만 같은 신학자들이 모두 칼빈의 교회적, 정신적 유산을 받았다. 교회적으로도 칼빈의 후예들은 오늘날 세계개혁교회연맹(WARC)에 속한 교회들만 보더라도 세계 108개국 214교단에 550만명의 신도를 가진 거대한 교회를 이루었다. 한국에서도 다수를 이루는 장로교회들과 신학자들은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모두 칼빈의 노선을 표방하고 있고, 그것을 따르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런 것을 볼 때 칼빈은 개혁교, 장로교회의 태두로서 형식적인 권위를 가질 뿐만 니라, 현재까지도 교회들이 배우고 따르고자 하는, 존 리스가 지적했듯이 단순히 역사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오늘의 실제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살아있는 스승으로서 실질적인 권위까지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역사적 인물이고, 그의 사상은 이미 고전이 되었으며, 그래서 오늘의 교회가 그 속에서 비춰보며, 문제들을 깨닫고, 또 방안을 구하는 하나의 원천과 같이 된 것이다.
        이 글은 그런 칼빈이 어떻게 형성되고, 무엇을 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물론 칼빈 이후 형성된 개혁-장로교회사를 보려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일반적으로 칼빈주의(calvinism)이라고 불리는 사상의 역사를 다루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사상과 교회에 있어서 독특하게 “칼빈적(calvinian)”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수용되고,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보려는 것이다. 사실 칼빈의 사상과 교회는 그의 생전이나 사후에 유럽과 세계의 여러 나라들로 퍼져나갔고, 각각의 역사와 상황 속에서 배척되기도 하고 변용되기도 하면서 다양하게, 그것도 500년 가까운 오랜 세월동안 전개되어 왔기 때문에, 그것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또 방대한 일에 속한다. 그것을 일일이,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은 한 편의 글로써는 불가능하고, 큰 저술이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칼빈이, 그리고 칼빈적인 것이 어떤 흐름을 거쳐, 어떤 부침과 굴곡을 거치면서 오늘까지 이어져 왔는지를 정리해보고, 거기에 비춰서, 현대적인 상황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는지, 또 어떤 방향에서 발전시켜나가야 할지를 전망해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2. 프랑스에서의 칼빈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의 느와용에서 태어났다. 느와용은 파리에서 5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중세풍의 작은 도시로서, 오늘날 파리에서 가는 TGV 역이 있고, 시외버스로도 갈 수 있는 편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칼빈 연구의 대가인 에밀 두메르그는 19세기 말 느와용에 들렀다가 탄식했던 적이 있다. 느와용 역 앞에 서 있는 동상은 그 도시가 낳은 세계적 인물인 칼빈이 아니라, 동상에 기록된 설명을 봐야 알게 되는 자끄 사라젱(Jacques Sarrazin)이라는 미술가였던 것이다. “칼빈의 도시인 느와용. 역으로부터 시작되는 아름답고 큰 가로가 펼쳐지는 느와용의 주도로에 들어서면, 맨 먼저 만나는 한 동상이 있다. 아! 이 도시를 찾아오는 모든 이방인들이 경의를 표할 그 도시가 낳은 위인을 거기에 세우는 일은 잘한 일이다. 이제 동상 앞에 가서 서면, 이런, 사라젱의 동상이다! 그것은 자끄 사라젱이라는 화가 겸 조각가의 동상이다! 주춧돌에 새겨진 글을 읽어보면, 그는 1592년 느와용에서 태어나서 1660년 루브르에서 죽었다. 느와용 시민들은 장 칼빈과 자끄 사라젱 사이에서 선택을 했다. 자신들의 고장을 빛낸 위인의 동상을 세우기를 원하면서 그들은 자끄 사라젱을 선택했다!”  
        사실 프랑스에서 칼빈에 대한 반감은 널리 퍼져있고, 그에 대한 온갖 오해와 비방이 오래 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었다. 그런 풍토에서 칼빈이란 인물이 자랑스럽게 생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느와용의 조상들은 당시 교회와 분쟁했던 칼빈의 부친 제라르 꼬뱅과 형 샤를르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의 가족들을 사실상 추방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 느와용 시민들이 칼빈을 긍정하는 것은 그들의 조상들을 부정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프랑스 가톨릭, 혹은  프랑스 대중들이 칼빈을 비방하고, 외면했던 반면,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칼빈을 존경하고, 그 정신을 잇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은 특히 칼빈 생전에서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1536년 칼빈은 기독교강요 초판을 출판한 뒤, 그리고 제네바의 종교개혁자로서 활동하면서 지속적으로 프랑스 교회를 지원하고 격려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포함하여 많은 저서들을 불어로 써서 읽게 했고, 그리고 훈련받은 목사들을 파송했는데, 역사가 레오나르에 의하면 그 숫자가 100명 이상이나 된다. 그래서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가혹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과 용기를 잃지 않고 교회를 세워나갈 수 있었다. 그 결과 1559년 프랑스개혁교회 1차 전국총회가 열렸는데, 그 교회는 철저한 칼빈주의 교회였다.  이 총회는 칼빈 자신이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앙고백(Confession de foi)과 훈련(Discipline)을 채택했다. 그 신앙고백은 칼빈 사후인 1571년 제 7차 전국대회에서 채택한 라로셀신앙고백으로 이어졌다. 이 고백서는 벨기에신앙고백(la belgica), 도르드레흐트신조(canons de Dordrecht) 그리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과 함께 칼빈주의를 형성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17세기로 들어오면 프랑스교회는 알미니우스주의에 휩쓸리게 되는데, 당시 교회의 지도자 뒤 물렝(Du Moulin)은 칼빈주의의 틀을 확고히 하고자 1620년 알레스(Alais)총회에서 화란의 도르드레흐트신조를 채택하기도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에서 돌아온 프랑스인이나 화란인 평신도들이 전파했던 알미니우스사상은, 1630년대에는 소뮈르아카데미(Academie de Saumur)를 중심으로 확장되었다. 그곳에서 아미로(M. Amirauld)나 파종(Pajon) 같은 학자들은 선택이나 심판을 부정하고 보편구원론을 주장하는 등 칼빈의 사상을 비판했다. 그런 사상은 17세기부터 점증되던 인간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 기류를 타고 확산되어, 개신교뿐만 아니라 가톨릭 안에도 뿌리를 내렸다. 그런 풍토는 17세기를 거쳐 18세기,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19세기 초 프랑스교회에도 대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불어권에서는 스위스에서 최초로 일어났는데, 칼빈주의 옷을 입었으나 도덕주의적 이신론이 지배하던 교회와,  성서를 단지 문학적 텍스트로 간주하는 신학에 반발한 제네바대학교의 몇몇 신학생들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이 시대의 대표자들인  J.-P. 콕(Cook)이나 알렉상드르 비네(A. Vinet) 같은 사람들은 대체로 감리교의 웨슬리안이거나 개인주의적이었으므로, 칼빈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성향을 보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17세기 이후 프랑스 교회는 알미니우스적 성향이 강했으며, 거기다가 데카르트나 칸트의 영향을 받은 합리주의적이고 도덕주의적인 풍조, 계몽주의 이후 자유사상가들까지 가세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프랑스에서는 칼빈과 그의 신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를 재평가하고 회복하려는 주목할 만한 움직임들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다음의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스트라스부르학자들에 의한 전 59권의 『칼빈총서』 발행이다. 이것은 루터와 쯔빙글리를 포함한 종교개혁자들의 총서들 중 ‘칼빈편’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으로서, 19세기 초반부터 독일에서 일어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를 통합하려는 노력에 맞닿아 있다. 즉 교회간의 통합시도는 그들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종교개혁자들의 다양한 신학과 차이점들을 찾아보는 데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칼빈총서』는 1863년 처음 발간되기 시작하여 1900년에 완간되었는데 칼빈연구를 프랑스나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과 북미까지 확대시키고 활성화했다.  
        둘째, 『칼빈총서』가 방대한 칼빈 저작물들을 집대성한 것이었다면, 칼빈의 생애와 사상을 총체적으로 연구한 공로는 에밀 두메르그에 돌려야 할 것이다. 두메르그는 1844년 프랑스 남부 님(Nî̂mes)에서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1880년, 현 몽뻴리에신학대학의 전신인 몽토방신학대학의 교회사 교수로 취임한다. 그의 취임 강연이 “16세기와 프랑스 종교개혁의 기원들에 관한 연구의 유용성”이었는데, 그의 연구는 이후 본격적으로 칼빈에 관한 것으로 이어져 그가 몽토방에서 작고하게 되는 1937년까지 거의 50년간이나 계속된다. 그의 연구들은 전 7권으로 된 『장 칼빈, 그의 시대의 인물들과 사건들(Jean Calvin, les hommes et les choses de son temps)』이란 제목의 방대한 저술로 완성되었다. 이 연구는 흔히 성인전적 문체로 인해 그 가치가 손상되는 면이 없지 않으나, 역사적으로나 학문적인 철저함과 엄밀성, 그리고 그 통전성으로써 칼빈연구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이에 관해 가브리엘 뮈첸베르크의 평가를 인용해보자. “어떤 사람들은 성인전적이라고 하지만, 사실들에 관해서 확실한 과학이다... 두메르그의 증언은 거의 일세기나 지난 지금 우리들에게도 완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책의 4권과 5권이 프랑스에서 최고의 학문적 권위를 자랑하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역사분야 저술상(Prix Guizot)을 수상했다는 사실도 그 점을 증명해준다. 두메르그 이후, 프랑스에서는 몽토방의 학장직을 계승한 앙리 보아나 오귀스트 르세르프, 삐에르 모리, 장 까디에, 장 다니엘 브느와, 프랑수아 벤델, 알렉상드르 갸녹지, 리샤르 스토페르, 올리비에 미에 등 탁월한 칼빈연구자들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셋째, 프랑스개신교역사학회의 활동 또한 주목할 만했다. 이 학회는 19세기 중반 창설된 뒤부터 줄곧 프랑스의 종교개혁과 개신교, 그리고 칼빈에 대한 연구들을 진작했고, 학회지 Bulletin de la Société de l'Histoire du Protestantisme Français를 통해 발표하게 했다. 1차대전 동안에 무너진 느와용의 칼빈 생가를 주목하고, 박물관과 도서관으로 쓰기 위해 복원운동을 벌였던 것도 이 학회였다.  그 운동에 힘입어 느와용의 밀 광장(place au blé)에 위치한 칼빈의 생가는 수많은 나라 교회들로부터 헌금을 받아 1927년 착공해서 1930년에 완공되었다. 당시 프랑스, 독일, 미국, 영국, 스위스, 화란, 스웨덴, 이탈리아, 체코,  튀니지, 베트남의 교회들로부터 헌금이 답지했으며,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교 신학대학에서도 222프랑을 보내왔다.  
        그런 학자들과 학회의 활동 덕분에 프랑스에서 칼빈은 지난 20세기 내내 지속적으로 연구되고 발표되었으며, 연구의 질 역시 신학적으로나 역사학적으로 아주 높은 수준까지 발전되었다. 아마도 20세기는 프랑스에서 칼빈 연구의 전성기라고 평가될 것이다.
        이제 다시 칼빈이 태어났던 느와용으로 돌아가 보자. 그의 출생 500년을 맞는 느와용의 표정은 어떤가? 느와용시 인터넷 홈페이지에 실린 소개를 본다. “장 칼빈과 성 엘르와의 도시 느와용은 예술과 역사의 고장이라는 문화성(省)에서 부여한 명칭을 가진 와즈 지방에서는 유일한 곳이다.” 도시소개 첫 마디가 “장 칼빈의... 도시”이다. 더군다나 홈페이지에서는 느와용의 칼빈 박물관(칼빈의 생가)에서 열리는 칼빈 50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와 정보들을 자세하게 안내해주고 있다. 특히 이번 행사에서는 프랑스 16세기 문학 연구의 권위자로서 방대한 칼빈의 연구서를 낸 파리 XII대학의 올리비에 미에(Olivier Millet)교수를 초청했고, 각종 전시회와 음악회, 강좌, 연구회 그리고 축제가 계획되고 있다. 자기 고향에서 칼빈은 지난 세기까지는 상상할 수 없는 환대를 받고 있다. 세속화가 된 만큼 종교적 편견도 희박해진 까닭일까? 아니면 관광객을 겨냥한 도시의 상업적 이유 때문일까? 아니면 자기들의 도시가 세계적 인물을 배출했다는 것을 진짜로 자각한 것일까? 아무튼 느와용이 이제는 그를 환영하고 있고, 자랑하고 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칼빈이 고향을 떠난 지 474년 만에 출생 500년을 계기로 그곳에서 복권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3. 제네바에서의 칼빈                 
        칼빈은 제네바에 두 번 체류했다. 첫 번째는 1536년 7월부터였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출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스트라스부르로 가던 길에 제네바를 들렀다가 기욤 파렐에게 붙잡혔다. 파렐은 얼마 전에 제네바를 종교개혁으로 전향시켰으나,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실력 있는 일군이 필요했다. 칼빈은 파렐을 도와 신앙 지침과 고백(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 1537)을 작성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1538년 시당국은 종교개혁자들을 추방한다. 출교권(Excommunication)의 문제로 시당국과 부딪혔기 때문이었다. 출교란 회개할 때까지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서, 시민들이 그 벌을 받으면 일반 생활에서 여러 가지 불이익이나 불편이 수반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출교권이 교회의 영적인 고유한 권한으로 봐서 이를 행사하려고 했으나, 시당국은 자신들에게 속한 것으로 보았다. 시는 자신들의 입장을 따르지 않는 종교개혁자들을 추방으로 응징했다. 추방당한 파렐은 뉘샤텔로 가서 평생 그곳의 개혁자로 살았고, 칼빈은 스트라스부르로 갔다.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빈은 마틴 부서를 돕는 한편 프랑스 망명자교회를 목회했고, 기독교강요 재판과 로마서주석 등도 출간하고, 교회연합을 위한 국제회의에도 참여하고, 이들레뜨 드 뷔레라는 여인과 결혼도 하는 등 매우 바쁘고 또 행복한 시기를 보냈다.
        1541년 제네바에 상황이 바뀌어서 시당국은 칼빈을 다시 초청하기를 원했다. 칼빈은 그 번잡하고 난폭한 도시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역시 파렐의 권유와 재촉을 이기지 못하고 제네바로 돌아갔다. 그것이 두 번째 체류인데, 칼빈은 1564년 죽을 때 까지 그 도시의 종교개혁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놓는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했던 일은 무엇인가? 테오도르 드 베즈가 칼빈 사후에 쓴 전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그는 격주로 매일 설교하곤 했다. 그는 매주 세 차례 신학을 강의했다. 그는 정해진 날에 종무원(consistoire)에 참석해서 조언했다. 매주 금요일은 우리가 집회(congregation)라고 부르는 성서강의를 했다.” 여기서 보면 칼빈이 했던 것은 네 가지이다.
        첫째,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였던 것 같다. 칼빈은 드 베즈의 증언대로 격주로 매일 설교했을 뿐만 아니라, 쉬는 주에도 두 세 차례 더 설교했고, 보통 주중에는 구약을, 주일에는 신약을 설교하는 방식으로 평생에 걸쳐 성서들의 대부분을 설교했다. 그는 설교를 통해 제네바 시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참된 복음적 신앙을 가르쳤으며, 또한 예배와 생활 속에서 ‘교황주의’의 미신과 우상숭배를 뿌리 뽑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자 했다.  
        둘째는, 성서강의이다. 칼빈은 생 피에르 교회에 딸린 기도실(Oratoire)에서 주 3회 신학생들이나 망명자 젊은이 등을 대상으로 성서를 강의했다. 칼빈은 성서를 매우 중시했다. 그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자들의 삶과 구원에 유일한 권위를 가진다고 보았다. 그에게서 종교개혁은 곧 성서를 알고,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신앙과 교회와 삶을 ‘다시 형성하는(réformer)’ 일이었다. 그래서 칼빈은 일반신자들에게 하는 설교를 통해서는 강해설교를 했고, 미래의 지도자들인 신학생들을 위해서는 성서를 강의했고, 그리고 이어서 보게 될 목사단에서도 성서강의를 했던 것이다.    
        셋째로, 매주 금요일은 목사들의 집회였다. 제네바 목사들의 수장으로서 칼빈은 목사들에게 성서를 강의했고, 목회에 관한 건들을 논의하기도 했다. 제네바 교회는 성 피에르 교회 외에도 네 개의 교회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므로 설교나 직무를 위해 목사들을 배치하고 감독하고, 기타 목회의 여러 사안들을 협의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넷째로, 칼빈은 종무원을 세우고 거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칼빈은 말씀을 설교하는 것만으로 참된 교회가 성립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목사들의 직무인 말씀의 선포나  성례전, 목회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에 대한 교육, 교인들이기도 한 시민들의 생활, 그리고 약자들을 위한 보호체계가 모두 다 잘 이뤄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제네바에 귀한한 직후인 1541년 교회법령(Ordonnances Ecclésiastiques)을 작성하여 시의회로 하여금 채택하게 했던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거기서 칼빈은 ‘종무원’이라는 제도 하에, 목사들과 박사들, 장로들, 집사들의 직무와 책임들을 명시했다. 시민들의 생활을 위해서는 시의회에서 파송된 장로들이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지도하도록 했다. 집사들은 과부와 고아들,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을 구호하는 일을 담당했다. 이 제도는 칼빈이 스트라스부르 체류 동안 부서에게서 배운 것이지만 제네바에서 확고하게 성립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칼빈 전통의 교회들의 가장 주요한 제도적 특징이 되었다. 물론 나라나 조건에 따라서 수용과정에서 차이는 있지만 그 제도는 프랑스나 화란, 스코틀랜드 등으로 이어져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개교회 안의 당회와 그리고 제직회가 그 기능의 일부를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드 베즈가 열거하지 않은, 그러나 그 중요도에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 일이 두 가지 더 있다. 그것은 저술활동과 교회(일치)를 위한 국제적인 활동이었다.
        칼빈은 격무 속에서도 저술을 계속했다. 그는 1536년 출간된 기독교강요를 지속적으로 증보하여 판을 냈으며, 그 일은 1560년 프랑스어 최종판이 나오기까지 거듭되었다. 기독교강요로써 그는 자신의 신학을 완성한 것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개혁교회의 기틀을 놓는 데 기여했다. 그의 저술은 교리문답이나 신앙고백서 같은 교육적인 것들과 함께, 까롤리나 볼섹, 세르베투스 등과 같은 사람들과 논쟁을 위한 논박서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종교개혁의 지도자로서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야 했다. 편지들 역시『칼빈총서(Opera Clavini)』10권부터 20권에 걸쳐 편집돼있을 정도로 방대하다.
        또한 칼빈은 종교개혁의 교회들이 확고해지고, 널리 전파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는 종교개혁자로서, 저술가로서, 제네바교회의 수장으로서 국제적인 명망을 얻었으며, 그의 명성을 듣고 온 많은 외국인들, 망명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서 칼빈 전통의 교회들을 세워놓았는데, 메리 튜더의 박해를 피해왔던 영국인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가 대표적이었다. 칼빈은 또한 스트라스부르 시절부터 네덜란드 교회에 관심이 많았고, 그들에게 설교자를 파송하고, 저술을 헌정하고, 직접적인 논문들을 씀으로써 가르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노력은 스트라스부르와 제네바에서 돌아간 프랑스어를 쓰는 네덜란드인들의 활동과 함께 그 나라 교회가 칼빈주의가 되는 데 기여했다. 1549년에는 쮜리히의 하인리히 불링거와 일치신조(Consensus Tigurinus)를 작성하면서, 스위스 개혁교회의 통합을 이루었다. 1559년에 칼빈은 제네바대학교를 설립하여, 종교개혁의 사상과 문화가 수준 높은 학문을 바탕으로 뿌리내리고,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기틀을 만들기도 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활동하고, 저술하고, 가르쳤던 그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결국 그의 사상과 교회는 어떤 특성을 가지는가? 그의 정체성과 독특성을 말해주는 ‘칼빈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물론 ‘칼빈적’이라고 할지라도, 전적으로 그에게만 속하는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는 신학자로서 무엇보다도 성서의 가르침에 의존했고, 여러 교부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와 동시대적으로는 루터와 쯔빙글리와 부서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칼빈은 그런 모든 흐름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으며, 이후 그의 신학이나 교회를 다른 것들과 구분하게 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칼빈적’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그의 고유성이 형성된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의 네 가지로 제시될 수 있다.      
        첫째, 칼빈의 설교들과 성서강해, 기독교강요 등과 그의 개혁활동을 볼 때, 그의 사상의 중심은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은 거룩하고, 절대적인 존재로서 모든 피조물의 주며, 영광을 받아야 할 존재이다. 반면에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비천한 죄인이다. 신과 인간 사이의 심연, 신과 피조세계의 넘어설 수 없는 질적 차이, 칼빈의 신학은 거기로부터 시작되고, 또 거기로 귀착된다. 그것은 한마디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A Dieu seul la gloire)”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바, 세상이나 지상적인 것의 신성화, 물신숭배나 자기추구, 모든 형태의 정치적, 종교적 권력의 절대화를 거부하고, 오직 초월적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그만이 영광을 받도록, 인간은 자신을 비우고 그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다.
        둘째, 칼빈은 거룩하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계시와, 동시에 그 계시 앞에서 선 죄인의 무지와 오류를 매우 강조했다. 하나님은 알려지지만, 죄인은 그것을 언제나 제한적으로만 받아들이거나 곡해한다. 그래서 성령의 내적 증거가, 그것도 평생에 걸친 지속적인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칼빈의 교회는 계시된 진리 앞에 확신을 갖고 투철하지만, 동시에 감추어져 있는 진리에 대해 겸손하며 개방적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독선이나 아집이나 편견에 갇혀 있지 않고, 새롭게 알려지고 깨달아지는 계시를 수용한다. 그런 개방성, 혹은 개혁성은 칼빈과 개혁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서,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칼빈 후예들의 신학적, 교회적 다양성도 바로 거기로부터 비롯된다.
        셋째, 칼빈은 루터와 함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를 강조하면서도, 더 나가서 신자들의 삶, 성화 혹은 경건을 강조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 그렇게 살아야 했다. 신자들의 믿음과 예배와 삶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종무원을 통한 훈련(discipline)과 치리를 중시했고, 이를 위해 장로들이 임명된다. 장로들은 신자들의 삶을 돌보고, 권면하며, 그래도 안 될 경우 교회는 출교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 치리가 현대에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해도, 신앙이 삶으로 이어지는 경건에 대한 강조는 칼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칼빈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신자들의 영적인 구원과 성장을 담당하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일에 참여해서, 가난한 자들이나 병자들, 어린이들, 노인들이 소외되지 않고 함께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 나갔다. 칼빈은 종무원의 집사들을 통해 빈자나 병자나 걸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구호하는 일을 담당하게 했다. 집사들은 1535년 세워진 시민병원(hô̂pital commun)이 “잘 유지되고, 병자들이나 일할 수 없는 노인들, 과부들, 고아들과 다른 여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운영되는 지를 부지런히 감찰하는 직무를” 가졌다. 그 시민병원에 시의 재정으로 의사와 외과의사 각 1인을 채용하여 가난한 병자들을 순회까지 하면서 진료하게 했다. 앙드레 비엘레가 “공적 사회의학(médecine sociale officielle)”이라고 부른 체계를 세운 것이다. 또한 칼빈은 남, 여 어린이교육에 힘썼고, 대학을 설립했으며, 망명자들의 정착과 시의 경제를 위해서 시의회를 독려해서 직물산업의 육성하게 했으며, 부유하고 끈질긴 대금업자들의 이자율을 제한함으로써 중소상인들이나 수공업자들을 보호함과 동시에 물가가 오르는 것을 막아 가난한 사람들의 생계를 도왔다. 또한 제네바 내부뿐만 아니라, 학살이나 탄압에서 살아남은 프랑스 등 외국의 개신교도들을 위한 기금을 창설해서 돕는 일을 제도화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프랑스기금(Bourse Française)이다. 칼빈의 교회는 신의 정의와 사랑이 구현되는 사회와 국가를 세우기 위해 적극 참여하고 노력했다는 성격을 갖는다.  

        4. 칼빈 사후의 제네바
        1564년 칼빈이 작고한 뒤, 드 베즈가 제네바교회의 수장을 이어받는다.  1519년 베즐레(Vézeley)에서 귀족의 자제로 태어난 그는 젊었을 때는 법률가며 문필가, 인문주의자 그리고 중용(中庸)의 신봉자였으나 1548년 종교개혁으로 전향한 뒤 스위스로 와서 로잔아카데미의 교수를 지낸다. 그는 1558년 칼빈의 부름을 받아 제네바의 목사단에 합류했으며, 이듬해 칼빈이 창설한 제네바 아카데미의 학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프랑스 위그노들의 자문가로서, 신구교간의 화해를 목적으로 한 쁘와시(Poissy)회담에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하기도 했다.
         드 베즈는 신앙고백의 작성이나 교육에 있어서 칼빈의 사상에 매우 가까웠고, 특히 칼빈이 논쟁에 휘말렸을 때 변함없이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드 베즈가 칼빈을 이어받았으면서도 두 가지 점에서 그의 사상을 발전, 변화 혹은 심화시켰다. 그것은 평가하는 입장에 따라 부정적일 수도 있으나 어쨌든 칼빈 이후 칼빈주의의 발전이란 점에서는 간과할 수 없다.
        첫째는, 개신교 스콜라주의라고 불리는 교리주의화이다. 주지하듯이 17세기는 엄격하고 교리적인 정통주의가 지배했던 시기인데, 칼빈 진영에서 그것은 드 베즈로부터 출발한다. 드 베즈는 1555년 그의 『그리스도교대전(Summa totius christiansmi, 1555년)』 이후 칼빈의 예정론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을 칭의 신앙의 앞에 둠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역시 그 선택에 근거하게 되었다. 즉 하나님은 선택한 자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허락한다. 이로써 하나님에 관한 다른 모든 신앙의 표현들 가운데서 예정이 우선시되었다. 교의학 전반과 관련해서, 드 베즈는 네오-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에 몰두함으로써 칼빈의 전통을 더욱 체계화했으며, 교의학을 보다 더 학문적이 되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둘째는, 칼빈의 정치사상이란 면에서의 변화이다. 드 베즈는 프랑스에서 성 바르텔레미 위그노 학살 뒤에 『관헌의 권리(Du Droit des magistrats)』를 쓴다. 그는 거기서 칼빈이 이미 시사했던 점을 발전시킨다. 최고 권력자와 일반 백성 사이에서 중간 관헌들은 조정을 해야 하고, 왕권에 대해서 불복종할 수 있다. 그런 사상은 칼빈 자신의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우상타파(iconoclasme), 정의와 양심의 자유의 추구 전통 등과 결합하여, 위그노들의 저항, 네덜란드 반란자들(guit/ gueux)의 스페인으로부터의 분리 독립투쟁, 뉴잉글랜드에서의 독립전쟁, 바르트와 독일 개혁파 고백교회들의 히틀러에 대한 저항, 남아프리카 공화국 알렌 보삭 등 개혁교회의 반인종차별 투쟁,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반독재 민주화 투쟁, 그리고 개혁교회들이 깊숙이 참여했던 WCC의 제3세계 교회들의 정의와 자유를 위한 지원 등으로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드 베즈 이후 제네바에서 칼빈의 교회와 신학은 어떤 과정을 거쳐 현대에 이르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제네바대학교의 올리비에 파티오가 잘 정리해주었으므로, 그의 설명에 의존한다.  
        17세기 중반은 신학적으로는 여전히 정통주의의 틀 안에 있었으며, 일반적으로도 종교개혁과 칼빈은 “어두움 후에 빛(Post tenebras lux)”이 오듯 제네바시를 해방하고, 그것에 개혁도시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18세기가 되면서, 교리적 정통주의는 사라지고, 1706년에 제네바시는 미래의 목사들에게 그 엄격한 정통주의 헌장인 1675년의 스위스일치신조(Consensus helveticus)에 서명하게 했던 것도 철폐한다. 1725년에는 도르드레흐트신조에 대한 서명도 포기된다. 아카데미의 신학교수들이었던 장-알퐁스 튀레티니와 쟈콥 베르네는 종교개혁과 계몽주의를 조화시키는 변증적인 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개혁교회 교리의 전체적인 면, 예정론이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오직 믿음으로 얻는 의 같은 것들은 계시와 이성 사이의 절충을 위해서 희생되었다. 그들에게 종교개혁은 도덕적 삶의 근거로 사용되는 종교적 법칙들을 성서에서 찾아내는 이성의 능력들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됨으로써, 그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새 신학’은 이후 종교개혁자들의 교리와는 별 관계가 없어진다.
        19세기에 들어오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네바에 대각성운동이 일어나면서, “각성파들”이 기성교회와 달리 교회들을 설립하면서 교회가 몇 개로 분열된다. 그들은 “국가파”가 종교개혁자들의 교리적 유산을 포기했다고 비난하면서, 종교개혁의 교리들, 이웃의 고통들을 나누기 위해 회심한 영혼들의 구체적 행동들,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영혼의 문제들에 관심했다. 반대로, 자유주의의 맥락에 서 있던 제네바목사단은 1817년 5월 3일 제정된 규정에서 그리스도의 양성의 연합, 원죄, 예정론, 은혜가 작용하는 방식을 설교에서 다루는 것을 금지했다. 전 시대에 이어서, 그들은 종교개혁자들을 존경하고 기념하기는 했지만, 계몽주의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도덕적인 차원에서 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가서 종교개혁은, 19세기 초반부터 가톨릭에 우호적인 자유파 정부가 들어선 뒤 혼합도시가 된 제네바에서 시민들의 통합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목표, 즉 국가의 정체성과 연관되기 시작했다. 1835년 다비드 무니에는 종교개혁 300주년을 기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국가들의 명단에서 지워졌을 것이다. 우리들은 문명의 뒷전에서 슬피 울었으리라.” 그런 국가적 정체성의 강조와 함께 문명화라는 관점의 도입은 나중에, 개신교도라는 것, 그것이 진정한 현대인이라는 의식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20세기 초반, 교회는 국가로부터 분리되었으나, 여전히 다수였던 국가교회는 국가적이고, 그리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졌다. 그러나 20세기 전반부터 젊은 목사들이 교회적이고 교리적인 진정한 갱신을 추구했다. 1929년 11월 “칼빈의 학교에서”라는 강연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많은 반향을 일으켰던 장 드 소쉬르, 그리고 바르트에 가까운 쟈끄 꾸르브와지에, 막스 도미니세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그런 목사들과 함께 평신도로서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진 정신과의사 폴 투르니에와 언론인 마크 슈느비에르 같은 이들도 교회에 새로운 기류를 가져왔고, 종교경험이나 양심의 신학들을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 더 가까운 말씀의 신학으로 대체해나갔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종교개혁 400주년 기념강연들을 보면, 19세기와 비교해서 심오한 변화가 일어났는데, 종교개혁이 도시나 국가의 개혁이라는 좁은 범위의 시각이 약화되고, 이제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고통스러운 세계의 희망의 보고로 이해되었다는 점이다. 정치가 알베르 피코는 1935년 개신교의 날 강연에서, 종교개혁이 제네바의 운명을 개척했다는 생각을 전개했다. 칼빈, 위그노들의 망명, 적십자, 국제기구들은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 공통분모는 종교개혁이다. 그래서 피코는 이 역사에 의해 고무된 도덕적 이상은 - 국가의 구원은 분명히 그 도덕적 이상에 좌우되기 때문에 -  미래에도 계속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전체적으로 당시의 강연자들은 종교개혁과 칼빈 신학의 내용과 의미에 주목하고자 했고, 칼빈과 더불어 복음의 근원으로 돌아가서 불안한 현 시대에 필요한 힘과 지혜를 얻으려고 했다. 그들은 종교개혁자들이 분명하게 전하고자 했던 교리적인 내용에 주목했고, 교회의 영적인 자질은 그 근거에 충실할 때 가능하다는 의식에 도달했다.
        제네바는 유럽의 다른 유수한 도시들에 비해 위치로나 규모로나 열세이고, 역사도 길지 않지만, 경제가 발달했고, 국제적 위상이나 인지도가 매우 높다. 그것은 도시가 가진 지적이고 도덕적인 역량들, 인류사회에 대한 높은 책임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칼빈의 사상과 교회와 관련이 깊다. 20세기 중반이후 제네바의 학자들은 그런 점들을 주목하고, 규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이 분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앙드레 비엘레이다. 앞에서 제시했지만, 그가 1950년 제네바대학교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칼빈의 사회경제사상』은 그 분야에서 가장 탁월하고 완전한 저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제네바대학교 에릭 퓌쉬의 『칼빈의 도덕』 역시 칼빈의 윤리사상을 그 텍스트에서, 그리고 현대적 맥락에서 잘 분석하고 설명한 역작이다.

        5. 유럽과 미국에서 칼빈의 수용과 변화: 청교도적 도덕주의의 등장
        칼빈 생전부터 그의 사상과 교회는 유럽의 여러 곳으로 전파되었다. 네덜란드에서는 1562년(아직 칼빈 생전이다) 벨기에고백(Confession belgique)이 작성되고, 1566년의 30인의 칼빈주의 목사들의 호소를 통해서 개신교는 칼빈의 교리에 가담하게 되었다. 네덜란드교회는 유명한 1574년과 1618년의 도르드레흐트 총회들을 거치면서 국교가 되며, 가톨릭은 소수파로 남는다. 스코틀랜드 역시 존 녹스가 강력한 1560년의 스코틀랜드 고백을 통과시킴으로써, 그의 교회는 칼빈주의 교리위에 세워졌다.
        영국에서의 상황은 훨씬 복잡하게 전개된다. 메리 튜더의 박해를 피해 대륙으로 건너간 사람들 중 약 200여명은 제네바로 갔다. 그들은 엘리자베스 1세가 등극하자 영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는데, 함께 가지고 간 것은 제네바역 성서와 제네바 종교개혁의 경험, 그리고 칼빈의 휘하에서 익혔던 매우 강력한 성서신학이었다. 그들은 곧 엘리자베스의 온건한 교회정책에 실망하여 철저한 개혁을 주장하며 반기를 들었다. 그들이 바로 청교도들(Puritans)이다. 그 청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또한 종교의 자유를 찾아 북아메리카로 건너가서 미국의 칼빈주의 교회들을 이루게 된다.
        폴란드나 보헤미아, 모라비아, 헝가리 등지에도 많은 칼빈주의가 있다. 첸가(Czengar)총회의 결과 헝가리신앙고백은 예정론과 성찬에 관해 칼빈의 교리를 채택했고, 1563년의 타르찰(Tarczal)총회는 드 베즈의 신앙고백에 기울었다. 트란실바니아에서도 슬라브 대중들은 칼빈주의를 받아들였다.
        독일에서는 개혁교회는 루터교회가 확립되어 있는 상태에서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가톨릭과 그리고 루터교의 강력한 제제와 견제를 받게 되지만, 1562년 팔라틴의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칼빈주의를 받아들이게 된 후, 하이델베르크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곳에서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와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Kaspar Olevianus)가 1563년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을 작성하여 발표하게 되는데 이것은 독일 칼빈주의의 지주가 되지만, 이후 그곳의 개혁교는 루터파의 침입으로 인해 말살되다시피 한다. 독일에서 프러시아의 브란덴부르크는 개혁교회의 최대 성공지라고 할 수 있다. 그곳은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기류가 강한 곳으로서, 유럽 여러 나라의 개혁파 난민들, 특히 위그노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세력을 확장했고, 특히 요한 지기스문트(Gigismund)선제후 자신이 개혁교회에 등록했다. 프러시아와 베를린의 개혁교회는 19세기까지 번성하다가, 다수파인 루터파와 함께 프러시아연합교회를 결성한 이후 약화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과정에서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칼빈 사상이 청교도적 후기 칼비니즘으로 변형되어갔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미 드 베즈에게서 그 단초가 보이고, 독일에서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저자 우르시누스가 영향을 미쳤지만, 가장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나타난 것은 영국에서였다. 영국인들은 칼빈을 높이 평가했으나 주로 드 베즈의 체계적이고 교리적인 정통주의의 빛에서 이해했다. 16세기 말, 성 앤드류스 대성당의 설교자 윌리엄 퍼킨스는 칼빈과 드 베즈를 대신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는데, 그는 드 베즈를 더욱 강화한 타락전 예정론의 입장에서, 개인이 신의 선택을 받아 구원을 얻었는지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의 주제를 파고들었다. 주지하듯이, 칼빈은 이 문제에 관해, 하나님의 자비로써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했으나, 퍼킨스는 드 베즈를 따라서 자신의 성화를 보라고 했으며, 또한  베드로후서 1;10에 따라 자신의 ‘행함’을 보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가 유효한 소명의 대상임을 스스로 입증하기 위한 공식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행함, 행실, 삶으로써 구원을 확신하고, 또한 증거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바로 그 공식을 표현하기 위해, 퍼킨스는 우르시누스에게서 ‘실천적 삼단논법(practical syllogism)’이라는 용어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사람의 실천이나 행위를 보고서 그의 내면의 신앙이나 구원의 상태를 판단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사상은 영국 청교도들에게서 광범위하고도 특징적으로 발전되며, 북아메리카에 건너간 청교도들, 그리고 그 후예들인 미국 칼빈주의자들의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 미국의 상황은 시드니 알스트롬이 잘 묘사해주었다. “미래의 미국은 강력한 도덕적 엄격주의, 복음적 체험주의에의 깊은 전념, 국가가 이러한 윤리적 종교적 사상의 지탱을 책임지도록 하겠다는 결심이 결합된 대단히 특별한 형태의 급진적인 개신교를 도입했던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고 상당한 정도까지 형성되었다. 따라서 미국은 특히 부흥운동과 도덕적 율법주의 및 소위 청교도적 윤리에 의해 지지되는 행위의 ‘복음’의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식으로 청교도적이 된 칼빈은 나중에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과 프로테스탄티즘 윤리』를 쓰는 모티브가 되었고, 그로 인해 칼빈학자들이나 사회경제학자들 사이에 뜨거운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6. 21세기 교회를 위한 칼빈
        20세기는 유럽과 미국에서 칼빈을 재발견하고, 그의 사상과 교회를 가장 많이 발전시킨 세기일 것이다. 그에 대한 연구도 깊이 있고, 다양하게 전개된 결과 주목할 만한 연구물들이 많이 나와서, 그의 연구사를 쓰는 것마저도 만만한 일이 아닐 정도이다. 교회적으로 볼 때 칼빈전통은 유럽과 미국에서 양적인 면에서는 퇴조를 보이지만, 영적이고 교회와 세계에 대한 책임성이라는 면에서는 성숙한 면모를 보여주었던 세기였다. 특히 세계대전들을 거치면서 일어난 세계교회협의회의 결성과 에큐메니칼운동에서 보여준 유럽과 미국의 개혁교회들의 참여는, 주로 후반기부터 적극성을 띤 제3세계의 개혁교회들과 함께, 교회뿐만 아니라 세계의 일치와 평화, 정의, 창조세계까지 아우르는 통전적 구원을 향한 인류사회의 교두보를 놓았다고 평가한다.  
        이제 칼빈 출생 500년을 맞은 21세기의 교회는 그로부터 무엇을 듣고, 배워야 할까? 칼빈이 오늘날 어떤 점에서 중요하고 의미가 있으며, 오늘의 시점에서 무엇을 받아들이고, 내세워야 할까? 나는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역사를 거쳐 형성되고 또 되어왔던 가장 칼빈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다음의 세 가지라고 보고, 그것을 현대적으로 그리고 창조적으로 재해석해서 살려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라고 생각한다.
        첫째,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그의 모토가 함축하고 있는 신중심주의이다. 현대인들은 세속에 묻혀서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 그들은 세속적인 것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며,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는 주변의 것들까지도 끌어들여 희생시키고 있다. 목표한 것을 얻으면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지만, 그것이 모든 것은 아니기에 어떤 공허함이나 무의미는 정작 목표를 이룬 뒤에 찾아온다. 현대인들이 영성이나 신비 같은 것을 추구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데 있다. 많이 배우고, 가지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어이없게도 사이비 종교나 영성 집단에 빠져 들어가는 것도 그렇다. 그들은 돈이나 학식이나 권력을 얻기 위한 나머지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넘어서는 정작 건강한 정신과 삶의 형성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는 닫고 살았기 십상이다. 대중들의 인종주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나 미디어에 대한 맹신 그런 것들은 또 어떠한가? 교회 역시 마찬가지이다. 설교하고, 가르치고, 목표로 하는 것이 대부분 세상적인 ‘복’이다. 이른바 기복주의이다. 교회의 세속주의나 상업주의, 물신주의 같은 것들도 같은 종류이다. 가장 경건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곳에서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볼 수 있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이고 정치적인 동기들... 현대 세계에서, 특히 급격하게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룬 한국의 사회와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초월성의 회복이다. 초월적인 신학자라면 칼빈 아닌가? 인간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영원하고 존엄하신 하나님을 위해 산다. 그를 알고,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영원하고 지고한 전적 타자에의 개방성은 세상에 함몰되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출구를 열어주는 일이고, 새로운 생명을 유입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의 사랑과 정의의 계명에 자신을 버리고 순종하는 것은 근시안적 탐욕으로부터 그를 구함과 동시에 넓은 세상에 생명과 평화를 가져오는 일이다. 우리는 그런 초월적 신학과 영성이 더 없이 요구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둘째, 칼빈의 개혁적 영성과 실천이다. 신은 초월적이지만 동시에 계시되고 우리 속에 들어온다. 신자는 초월적인 신 앞에서 겸비함과 동시에 알려진 신에 대해 확신한다. 그는 알고 확신한 바를 살고 실천한다. 동시에 여전히 감춰진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새로운 도래 앞에 자신을 열고 기다린다. 그의 지식은 독선적이 아니라 개방적이며, 그의 체계는 열린 체계이고 개혁적이다. 삶이란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식이나 신앙은 예배로, 경건으로, 실천으로, 삶으로 이어지며, 그 삶은 정체되지 않고 갱신(성화)된다. 칼빈이 “성령의 신학자”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과 관계될 때 정당하다. 칼빈에게서 성령은 신자들의 지식과 삶의 역동적 개혁성의 중심에서 작용한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현대인들의 삶은 분리되어 있다. 믿음과 생활이, 지식과 실천이, 영성과 육성이 단절되어 있고, 그것을 합리화하는 수많은 이유들과 장치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신학이나 교회에서도 서로 분리된 채 각자의 것에만 열성인 경우가 많다. 디아볼로스, 분리시키는 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칼빈에게서 보는, 분리된 것을 다시 이어주고, 통전적으로 하나되게 하는 영성이다. 세계개혁교회연맹의 칼빈 500주년 책자에서 칼빈의 현재성을 “교회의 일치”에서 찾은 것은 정당하지만, 실은 분열된 개인의 일치가 더 근본적이라고 생각한다. 칼빈은 거기에 대해서까지 답을 줄 수 있는 신학과 영성을 가지고 있다.
        셋째, 칼빈의 사회참여의 신학이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신의 정의와 평화가 이뤄지는 제도와 질서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사회선교는 개인에 대한 구호의 범위를 넘어서, 가능한 항구적인 약자보호체계를 세우는 데까지 확장된 것이었다. 그는 망명자들의 정착을 위해서 기업을 설립하는 데 까지 영향을 미쳤고, 대금업자들의 이자율을 제한해서 중상공업자들을 보호함과 동시에 물가를 안정시켰고, 빈자들을 위한 공공 의료체계를 세웠다. 그런 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오늘날에도 더 없이 필요한 것이다. 현재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실패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많은 실직자, 파산자들을 양산하고 있고, 국가 간, 계층 간의 격차를 심각한 상태로까지 벌려 놓았다. 칼빈의 관점에서는, 은행이나 금융회사들, 각종 투기 세력들의 활동은 감시되고 제한되어야한다. 그 통제력이 상실된 결과 현재의 금융위기가 닥친 것 아닌가? 교회들은 지구상의 가난한 나라들과 선진국 내에서도 빈민들,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약자들의 관점에서 경제와 정치, 교육, 의료, 복지, 환경까지 재검토하고 재조직해야 한다. 세계개혁교회연맹의 2004년 24회 총회가 채택한 아크라신앙고백이 바로 그런 경제와 창조의 영역까지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정의를 다루고 있고, 동 연맹의 칼빈 500주년 책자도 교회의 중요과제로서 이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세계 속의 신의 정의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과 참여는 실상 현대의 모든 교회의 것이 되어야 한다. 500년 전 칼빈에게는 가능했던 것이 왜 현재는 불가능한 것일까? 교회들이 칼빈적 교회, 특히 그의 사회선교를 재발견하고, 수용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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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소개)2


‘매일의 설교자’ 마틴 루터
'Daily preacher' Martin Luther


                                                                                              권 진호 (Kwon, Jin Ho)
                                                                                              목원대 강사/ 교회사


초록
   마르틴 루터는 우리에게 이미 종교개혁자, 교수, 신학자, 또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면서도 의미 있는 부분은 설교자로서의 루터이다. 그것은 그가 설교와 성서강의에서 강조했던 설교의 신학적 의미는 접어두고서라도, 우리에게 전해진 루터의 설교의 양과 설교자로서의 활동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설교자로서의 루터와 그의 설교의 신학적, 교회사적인 의미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첫 단계로, 설교자 루터의 생애와 활동을 알아보고 루터의 설교들을 서론적으로 개관하는 것이다. 루터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매일의 설교자’로 불렀다. 그는 강의를 위한 주석적인 성경연구로부터 얻은 신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비텐베르크 시립교회에서 복음적, 종교개혁적인 신앙과 경건을 선포했다. 바로 그 설교를 통해 16세기 종교개혁이 가능했던 것이다. 즉 ‘종교개혁은 설교 부흥운동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앞으로 더욱 루터의 설교와 그 신학적 의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주제어: 루터, 설교, 설교자, 종교개혁



1. 들어가는 말
   마틴 루터는 우리에게 종교 개혁가, 교수, 신학자 또는 저술가로 알려져 있다. 성서와는 다른 교리를 가르쳤던 당시의 로마 가톨릭교회, 특히 면죄부에 대해 루터는 비텐베르크(Wittenberg)의 성(城)교회 문에 ‘95개조 토론문’을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의 싹을 틔웠다. 루터는 갓 세워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교수로서 1512년부터 평생 33년간 성경에 대한 강의를 하였다. 그는 이 강의를 위한 주석적인 성경연구로부터 얻은 신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하여 종교 개혁적이고 복음적인 신학을 발견했는데,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성찰과 그에 따른 칭의론과 구원론, 십자가 신학,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이해, 의인인 동시에 죄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 존재의 이해 등은 오늘도 여전히 타당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루터는 또한 많은 글들을 남겼는데, 그의 글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의 발명 덕택으로 쉽게 비텐베르크를 넘어서 많은 지역으로 종교개혁사상을 전파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루터의 글은 1500년 초반기에 출판된 것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외에 루터는 성서를 원어에서 직접 독일어로 번역하였고, 찬송가를 만들었고, 종교개혁사상에 맞추어 예배 의식서와 교회법 규정들을 만들었다. 또한 루터는 많은 편지를 썼는데, 이것을 통해 종교개혁사상을 많은 곳으로 전파시켰고 종교개혁을 관철시켰다. 이러한 루터의 삶과 업적 외에도 루터의 생애에서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행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설교자로서의 루터’이다.
   루터는 생애에서 두 개의 주요 직무, 즉 교수직과 설교직을 맡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직무는 루터의 삶과 행적에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두 가지 직무로부터 루터는 종교개혁을 결정적으로 구성하는 추진력과 자극을 얻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1512년 10월 신학박사가 된 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슈타우피츠(Staupitz)의 후임자로 성서학교수(lectura in biblia)가 되었다. 루터의 대표적인 성서강의로는 시편(1513-1515년, 1518/19-1521년, 1532-1535년), 로마서(1515/16년), 갈라디아서(1516/17년, 1531년), 이사야(1528-1530년), 창세기(1535-1545년)등이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33년간의 교수 생활 중, 그는 대략 4년 반 동안만 신약, 특히 서신서에 대해서 강의를 했을 뿐, 대부분은 구약에 대해 강의를 했다는 사실이다. 교수의 임무에는 강의 외에 ‘토론’이 포함된다. 당시 교수는 토론에서 논제를 통해 강의에서보다 더 자세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주장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교수직보다 루터의 삶에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임무는 바로 설교직이었다. 루터는 1509/10년 또는 1512년부터 설교 강단에 서기 시작하여 죽기 바로 전까지 설교를 하였다. 이 일이 루터에게 가장 본질적이고 중심적인 일이고, 루터의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과제였다. 설교자로서 루터는 자신의 학문적인 성경 연구로부터 얻은 신학적인 통찰들을 비텐베르크의 일반 시민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다시 말하면 루터는 연구실로부터 깨달은 복음의 가르침을 강단을 통해 시민들의 삶에 적용시켰다. 이렇게 성경연구로부터 얻은 종교개혁적인 사상의 전파는 설교를 통해 가능한 동시에, 설교를 위해서는 성경연구로부터의 신학적 통찰이 필요한 일이었다.
   루터의 설교가 갖는 신학적인 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언급은 접어두고라도, 설교는 양적으로도 그의 행적에 있어 최대의 부분을 차지한다. 바이마르판 전집(WA)중에 37권이 루터의 설교를 포함하고 있고, 그 중 18권은 설교만을 담고 있다(*). WA 1, 2, 4, 6, 7, 8, 9, 10III*, 11, 12, 14, 15, 16*, 17I*, 20, 23, 24*, 25, 27*, 28*, 29*, 30I, 32*, 33*, 34I*, 34II*, 36*, 37*, 41*, 45*, 46*, 47*, 48, 49*, 51, 59, 60. 루터가 평생 행한 설교는 3,000편 이상으로 추정되고, 그 중 2,000여 편이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루터의 설교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이 행해졌지만 설교자로서의 루터는 앞으로 더욱 필요한 루터 연구의 한 영역이다. 다음에서는 이 연구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기본적인 주제인 설교자 루터의 행적을 조명하고자 한다.


2. 루터는 언제부터 설교를 했는가?
   루터가 언제부터 설교를 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루터의 설교 행적은 그의 사제안수(1507년)와 관련되어 시작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루터는 언제부터 설교하기 시작했는가? 츠빅카우(Zwickau)의 도서관에는 루터의 가장 이른 시기에 행해진 두 개의 설교가 보관되어 있는데, 이것은 에어푸르트(Erfurt)의 설교자 포악(Andreas Poach)이 베껴 쓴 것으로서 다음의 문장이 맨 앞에 적혀 있다. “에어푸르트의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발견된 루터의 친필원고로부터”(WA 4,590-604). 그런데 문제는 이 루터 설교가 언제 행해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루터의 두 번째 에어푸르트 체류기간(1509/10)에 행해진 설교인지, 아니면 박사학위 이후에 행해진 설교인지는 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루터가 에어푸르트에 두 번째 머물 때부터 설교를 시작했을 가능성은 있다. 신학사(Sententiarius)가 된 후, 그는 비텐베르크에서 에어푸르트로 자리를 옮겼고 1509년 가을부터 신학사로서 롬바르두스의 명제집에 대한 강의를 하였다. 또한 에어푸르트의 신학대학 규정에 따라 명제집에 대한 강의 이후, 신학사는 설교를 통해 훈련하도록 요구되었기 때문에, 신학사 루터는 그때부터 설교를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가 1510년에 설교를 시작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으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루터의 설교의 시작이라기보다는 준비단계, 즉 학업과정의 일환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3. 루터의 설교행적
   루터는 최종적으로 비텐베르크로 자리를 옮긴 후 공식적으로 설교에 대한 위탁을 받게 된다. 루터는 설교직을 떠맡게 된 것에 대해 후에 자주 회상을 하곤 했다. 특히 루터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통해 루터 자신이 강단에 서기를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또한 그 때문에 슈타우피츠가 그를 신학박사와 수도사들의 설교자가 되도록 어떻게 독려하고 강요했는지 말하곤 했다.

나는 여러분보다도 더 강단에 서기를 무서워했습니다 ...... 나는 설교 하도록 요구받았습니다 ...... 설교강단 앞에서 얼마나 무서웠던지! ...... 여러분의 변명들은 내 판단으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박사 슈타우피츠에게 나의 소명을 거부하는 15가지 변명을 제시했습니다.

   수도원 마당에 있는 배나무 밑에서 교단장과 루터와의 결정적인 대화가 있었다.1 그 후 루터는 그의 첫 설교를 수도원의 식당에서 행했다. 1512(슈타우피츠의 설교에 대한 요구에 따라 빠르면 1511년, 그러나 늦어도 1512년 박사학위이후)부터 루터는 수도원의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고, 이곳이 루터의 최초 설교 장소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시립교회에서 설교자로 활동했다. 언제 그리고 어떻게 루터가 시립교회에서 설교직을 위탁받게 되었는가는 확실치 않다. 루터가 후에 바르트부르크(Wartburg)성에서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후 행한 사순절 첫 주간 설교에서 언급한 것에 따르면, 루터 스스로 이 직무를 떠맡은 것이 아니라 루터의 의사와는 반대로 시의회로부터 설교자로 부름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정식으로 설교자로 부름을 받게 된 것은 후에 루터의 행적에 커다란 기여를 하는 조건이 되었다. 루터는 이 설교직무를 1513년(적어도 1514년)부터 맡았고, 설교자로서의 의무를 시립교회에서 행했다. 이때부터 루터는 평생 시립교회에서 설교했다. 그러므로 루터의 본래 회중은 비텐베르크 교회였고, 루터 역시 이를 “나의 교회”라고 불렀다. 우리는 또한 1516년 10월 26일 랑(Lang)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터가 수도원과 시립교회에서 설교했음을 알 수 있다. 루터는 1521년에도 여전히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에게 설교했는데, 예를 들어 3월 24일 종려주일에 설교를 했다.
   이외에도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城)교회에서 영주를 위한 설교가로서도 활동을 했다. 만약 영주가 성에 거하거나 선제후의 각료가 비텐베르크에 거할 때면 루터는 성교회에서의 설교를 부탁 받았다. 사실 루터는 1517년 95개 논제를 성교회 문에 붙이기 전부터 이미 여기서 설교를 했으나, 영주설교가로서는 1525년부터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밖에도 루터는 잦은 여행가운데 설교를 했는데, 특히 토르가우(Torgau)에서 자주 했으며 여행 도중에도 거하는 곳마다 설교를 했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루터는 보름스(Worms)국회에서 심문받기 위해 오가는 도중(1521년 4월 2일-16일/4월 26일-5월 5일) 바이마르(Weimar), 에어푸르트(Erfurt), 고타(Gotha) 등의 도시들에서 설교를 하였다. 루터는 4월 6일 토요일 에어푸르트에 도착했고 주일 낮에 요한복음 20장 19-23절을 본문으로 하여 설교를 하였다. 그날 그곳 예배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가 전해진다. 기록에 따르면 루터가 설교하는 동안 회중들로 가득 찬 교회는 공포에 빠질 뻔 했는데, 강단에서 설교하던 루터가 2층에 있는 무서움에 사로잡힌 회중들을 진정시킴으로써 그 공포는 가까스로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이 일과 관련하여 후에 드레스덴(Dresden)의 감리사가 된 목격자 그라이저(Daniel Greiser)는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나는 에어푸르트에서 수도사 복을 입은 루터가 설교하는 것을 들었다. 그날 교회는 매우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 갑자기 교회의 2층석에서 우지직 소리가 났다. 모두들 2층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에 루터가 그들에게 위로하지 않았다면 몇몇 사람들은 창문을 부수고 교회 뜰로 뛰어 내렸을 것이다. “잠잠히 머무르시오, 사단이 유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잠히 있으면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그날 아무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루터는 집에서 설교했다. 그가 병으로 인해 오랫동안 공적인 강단에서 설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1532년 5월부터 1533년 12월까지 대부분, 또한 1534년에는 자주 집에서 설교를 하였다.


4. ‘매일의 설교자’ 루터
   루터와 1523년 시립교회의 교구목사로 부름 받은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은 오전 설교와 오후 설교를 서로 돌려가며 행했다. 특히 루터의 많은 오후 설교들은 “오늘 우리는 들었습니다(Hodie audivimus)” 또는 “오늘 여러분은 들었습니다(Hodie audistis)”라는 말로 시작됨을 볼 수 있다. 루터는 이 말들로써 일반적으로 부겐하겐이 행한 오전 설교를 기억케 하곤 했다. 이것은 오후설교를 행하는 루터가 오전 예배에도 참석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우리는 몇 개의 필사본을 통해 그 당시의 설교관습을 알 수 있는데, 가령 설교가 행해진 시간에 대해서이다. 예를 들어 주일 오전 7시 또는 8시, 오후에는 2시 또는 3시, 주중에는 오후 5시 또는 3시, 축제일에는 오후 1시 또는 2시에 설교(예배)가 행해졌다. 그리고 부겐하겐이 교회를 비운 기간에는 루터가 대부분의 설교를 맡았다. 1528/1529년 루터는 수요일마다 마태복음 11장-15장을, 토요일마다 요한복음 16장-20장을 본문으로 설교를 하였다. 1528년에 행한 루터의 설교는 모두 195개인데, 대략 145일에 걸쳐 행한 것이고, 49일간은 매일 두 번의 설교를 했다. 1529년에는 121개의 설교를 행했는데, 81일간 행했고 40번의 주일예배에는 두 번씩 설교를 하였다.
   루터의 삶은 중단 없는 설교자의 삶이었다. 루터는 평균적으로 매주 2번 또는 세 번, 경우에 따라서는 4번까지 설교를 했다. 루터 스스로 자신이 쉬지 않고 설교했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1000년의 역사상 나보다 지독한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설교를 30년 동안 해왔고, 그중 하루에 3번 설교를 한 날도 많고 사순절에는 매일 설교를 했고 심지어 하루에 4번 설교를 한 날도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성 암브로시우스나 어거스틴보다 내가 더 많이 설교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루터는 자신을 ‘매일의 설교자’라고 불렀다. (....생략)




신학사상 2009년 가을호(146집) 차례
신학사상 2009년 봄호(144집)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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