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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연 
 신학사상 2008년 겨울호(143집) 차례


이번 호에는 특집논문으로 한완상 박사의 “민중신학의 현대사적 의미와 과제-21세기 줄씨알의 신학을 바라며”를 게재하였다. 이 논문은 심원 안병무 박사 12주기 추모 강연에서 발표한 것이다. 한완상 박사는 이 논문에서 오늘의 디지털시대 민중을 줄씨알이라고 이름하고 디지털시대 새로운 민중신학을 제안하고 있다.    

다음에 연구논문으로 장석정 관동대 구약학 교수는 “공존(共存) 이해: 사사기 2장의 땅의 개념”의 논문에서 사사기 2장에 나타난 땅의 개념을 이스라엘과 여호와 하나님, 그리고 사사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이영미 한신대 구약학 교수는 “제의 중앙화와 세속화를 통한 개혁: 신명기 12장의 수사비평적 읽기”라는 논문에서 신명기 12장의 수사비평적 해석을 통해 신 12장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선택된 제의 공동체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율법에 기초를 둔 참된 예배확립을 주창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이병학 한신대 교수는 "네 천사들은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된 자들이더라”(묵9:15): 대량학살의 기억과 반제국주의 운동"이란 논문에서 묵시록의 일곱 나팔들의 표징들을 로마제국에 의해서 조직된 세계와 짐승의 추종자들을 심판하고 식민지의 무죄한 인민들에게 대량학살을 자행한 로마제국의 사악한 제국주의 권력의 가면을 벗기는 하느님의 해방적 행동들로 해석하며 이것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는 반제국주의 운동의 성서적 근거로서도 중요하다는 해석을 하고 있다.  
김종길 감신대 외래교수는 “칭의론과 그리스도의 믿음: 갈라디아서 2:15-21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사회-선교적(Socio-Literay) ‘새로운 관점’(New Perspective)으로, 갈라디아서 2장 15-21절을 중심으로 바울이 주장한 ‘칭의론’의 의미와 기능을 밝히고 칭의론은 ‘그리스도의 믿음’의 핵심임을 강조한다.
최종호 경성대 교수는 “안식일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통해 거룩함과 노동으로부터 쉼이 무엇을 뜻하는지 신학적 조명을 하였다.
이정배 감신대 교수는 “天符經을 통해서 본 東學과 多夕의 기독교이해 -기독교의 토착화/세계화를 위한 水雲과 多夕의 한 접점 모색”이란 논문에서 수운의 동학사상과 다석의 기독교 이해 간의 상관성을 새롭게 모색하고 있다.
최광현 한세대 교수는 “국제결혼 가족을 위한 다문화적 목회상담”이란 논문을 통해 최근 우리나라에서 국제결혼이 약 20%에 달하고 다른 문화로부터의 이주민이 100만을 넘는 상황에서 “차이에 대한 인식”을 수용하는 다문화 목회상담의 길을 안내하고 있다.
강순원 한신대 교수는 “영국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평화적 영성과 교육 : Darvell과 Beechgrove에서의 경험을 중심으로”의 논문을 통해 교육과 공동노동, 영적 생활, 기도, 찬양, 놀이, 약자를 보호하는 이타적 행동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홀리스틱 교육을 기독교공동체 대안교육으로 제시하며 교사-학부모-공동체가 함께 하는 작은 생태교육 공동체를 모색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현웅 한일장신대 교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서의 설교를 위한 방법론적 모색”의 논문에서 설교를 통해서 선포되는 복음의 본질은 변화될 수 없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은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포스트모던 세계를 설교학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설교 현장으로서의 오늘의 교회 상황을 분석하고,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어떻게 설교를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을 찾아 제시하고 있다.

미국 발 금융위기가 전세계 금융위기로 파급되어 세계경제가 위기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 금융위기의 핵심은 ‘서브 프라임 모기지’로부터 비롯되었지만 그것의 본질은 소위 신자유주의 총아처럼 사랑했던 ‘파생금융상품’이란 ‘사기적 투자상품’에 있다. 쉽게 이해하자면 ‘파생금융상품’이란 자본의 30배까지 채권으로 부풀려 팔수 있게 되어있는 것인데 이것은 말이 신용상품이지 근본부터 사기상품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신자유주의로 포장하여 미국은 자기들도 얼마가 되는지 모르는 천문학적인 파생상품을 팔았는데, 이것이 전 세계금융시장을 무너뜨리고 부메랑이 되어 미국도 경제 파국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런 부도덕한 신자유주의 경제 붕괴를 해결하려면 새로운 칼 마르크스가 나타나야할 것 같다.
다른 한편 미국에서 아프리카계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년 노예 역사, 흑인이라는 인간 이하의 차별, 아니 인간이 아닌 non being으로 취급받았던 아프리카 후손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은 미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에 새로운 희망을 주고 있다.
특히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는 부시 대통령 때와는 달리 북한을 적대시하지 않고 북핵 문제를 적극적인 대화로 풀겠다고 선언했으니 한반도에도 평화의 새로운 기운이 깃들 것 같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어떻게 하나? 이제는 부시대통령이 정권 말기에 대북 정책을 무조건 180도 전환한 것처럼 ‘6.15남북공동선언’과 “10.4 합의‘를 인정하고 ‘비핵 개방 3000’을 순서를 바꾸어 ‘3000 개방 비핵’으로 추진해야 한미공조도 되고 경제난국도 해결할 길이 있는 것 아닌가? 고집보다 국민을 먼저 생각해야 할 때이다.

모두가 힘들었던 2008년도 어느덧 저물어가고 있다. 성탄과 새해에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기원하며, 특히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한 겨울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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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43집)  
            
특집 논문
한완상 ․ 민중신학의 현대사적 의미와 과제-21세기 줄씨알의 신학을 바라며

연구 논문
장석정 ․ 공존(共存) 이해: 사사기 2장의 땅의 개념
이영미 ․ 제의 중앙화와 세속화를 통한 개혁: 신명기 12장의 수사비평적 읽기
이병학 ․ "네 천사들은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된 자들이더라"(묵9:15)
            : 대량학살의 기억과 반제국주의 운동
최종호 ․ 안식일에 대한 신학적 성찰
이정배 ․ 天符經을 통해서 본 東學과 多夕의 기독교이해
            -기독교의 토착화 ․ 세계화를 위한 水雲과 多夕의 한 접점 모색
최광현 ․ 국제결혼 가족을 위한 다문화적 목회상담
강순원 ․ 영국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평화적 영성과 교육
            : Darvell과 Beechgrove에서의 경험을 중심으로
이현웅 ․ 포스트모던 시대에서의 설교를 위한 방법론적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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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논문 소개)

 
민중신학의 현대사적 의미와 과제
-21세기 줄씨알의 신학을 바라며-

                                                                                          한완상(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1. 들어가며

심원(心園) 안병무 박사가 소천한지 벌써 열두 해가 되었습니다. 암울했던 1970년대 후반 갈릴리교회에서 느보산 위의 모세를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서럽게 울던 그 모습이 바로 어제 같은데 말입니다. 1975년 삼일절 기념강연을 한국기독자 교수 협의회가 김찬국과 김동길 두 교수의 석방 환영을 위해 준비 했는데, 그때는 유신체제가 발악할 때었으니, 무척 긴장하면서 안박사 댁에서 준비모의를 했지요. 초긴장 속에서 새문안교회서 그 행사가 열렸습니다. 그때 심원은 기념강연을 맡기로 했지요. 원래 제목은 <민족과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교수협의회 회장이었던 이문영 박사와 총무였던 제가 동아일보 백지 광고란에 이 모임을 알리기 위해 신문사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이박사와 의논하여 일방적으로 민중을 민족과 교회 사이에 끼워 넣었지요. 안 박사는 이것을 몰랐기에 강연하면서 모두에서 “‘민족・민중・교회’라는 오늘의 제목은 신문 발령으로 받았는데 광범하면서 중요한 문제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결연하게 그 기념비적 강연을 하던 모습이 역시 어제 같은데 벌써 열두 해가 되었습니다. 마침 저도 그 당시 역사의 실물 예수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1974년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서민예수와 그 상황」이라는 글을 썼지요. 따지고 보면 민중사회학의 출발도 역사의 예수였습니다. 특히 예수 없는 한국교회에서 실물 예수가 가슴 시리도록 그리웠기 때문이지요. 심원의 1975년 강연은 한국 민중신학 탄생을 알리는 정말 기념비적 강연이었습니다. 그는 원래의 강연 제목에 민중이 추가된 것을 보고서야, 그간 민중에 대해서 그가 평소 갖고 있던 성서 신학적 견해와 관점을 고난 받고 있는 한국 민중사건 속에서 새롭게 인식하면서 그것을 민중신학적 관점으로 전환하기로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버스 안에서 일방적으로 삽입했던 민중이라는 언어가 한국 민중신학을 추동시킨 ‘사건’이 될 줄이야 그때는 몰랐지요. 조그마한 언어의 추가가 민중신학의 탄생이라는 엄청난 사건과 변화를 도왔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오묘함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때가 1996년 여름인 것 같습니다. 연변 대학 주최로 남북한의 원격교육 관계자들과 연변대 관계자들이 조촐한 국제 학술회의를 열었는데 그때 심원 선생을 뜻밖에 그곳에서 만났지요. 죽기 전, 어린 시절 꿈이 육화 되어있던 고향 용정을 찾았습니다. 그때 호텔에서 그는 지팡이를 짚고 마치 어린애처럼 환하게 웃었습니다. 달구지를 타고 고향을 둘러보는 것이 힘들었으나 엄청 즐거웠다고 했습니다. 몸은 늙어 불편하게 보였으나 그 웃음은 어린 아기의 해맑은 미소였습니다. 그 마지막 모습을 본 것이 벌써 열두 해가 되었습니다.
그가 떠난 열두 해 동안 역사와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습니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변했습니다. 숫자의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의미 있는 질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심원과 함께 여러 동지들이 일으켰던 민중신학의 사건도 그간 많이 퇴색된 것 같습니다. 신학 운동으로서 그 동력도 크게 약화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난 십 이년 동안의 변화, 그 역사적 변화의 의미를 새삼 되새겨 보면서, 민중신학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오늘의 한국의 컨텍스트 속에서 되씹어 보고 싶습니다. 그 까닭은 새롭게 펼쳐지는 최근의 염려스러운 정국 속에서 민중신학의 동력을 새롭게 되찾을 때가 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2. 새로운 역사와 구조의 주역: 줄씨알의 등장

저는 신학자가 아닙니다. 사회학도로서 심원이 민중신학을 구상할 때 저 나름대로 민중 사회학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비록 학문적 분야는 달랐지만, 민중이 역사와 구조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은 같은 것이었기에, 그러나 민중은 아직도 종으로, 객체로, 나그네로 경멸받고 억눌리고 착취당했던 당시 현실에 대해 함께 분노 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역사의 예수 속에서 새로운 질서 곧 민중이 주인이 되는 새 질서를 갈망 했기에, 저는 이 문제를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세계와 시대의 변화와 그 의미를 잠시 살펴봅시다. 20세기가 갖는 세계사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20세기 전반부는 극우 전체주의가, 후반부에는 극좌 전체주의가 각기 무섭게 등장했다가 비극적인 종막을 고했습니다. 나치체제와 공산체제는 인류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역사상 최악의 반(反) 인류적 범죄를 저질렀지요. 두 체제가 비록 극좌와 극우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했으나, 인간의 기본권을 유린한데는 둘이 아니라 하나였습니다. 전체주의 체제가 20세기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사회적 대중사회(mass society)가 뿌리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그러했습니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체제가 들어서면서, 대중소통(mass communication)이 널리 보급되면서, 권력주체인 지배층과 피지배층 대중은 양극화되었습니다. 대중사회의 인간은 무력한 대중(mass)입니다. 원자화된 인간, 피 암시성이 높아진 존재이지요. 그들은 명목상으로는 주인이지만 실제로는 객체였습니다. 대중매체를 휘어잡은 권력층은 언제든지 대중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수단들을 독점하게 되었지요. 여기서 무력한 대중과 강력한 지배층 사이에는 자율 공간, 자율적 중립지대가 생기기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양극화된 두 집단은 서로 상처받기 쉽게 됩니다. 대중은 쉽게 조종되기에 상처받게 되고, 지배층은 분노하는 대중에 의해 축출될 수 있기에 상처 받게 됩니다.
나치하의 독일인들은 소비에트 하의 러시아인과 마찬가지로 약화된 대중이었습니다. 대체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포디즘적 생산양식이 강화될수록 인간은 대중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일차원적 존재로 살게 되지요. 그들은 반응하는 객체적 존재였습니다. 결코 자유롭게 행동하고 창조하는 주체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허울로 작동할 뿐이었습니다. 허위의식의 작동일 뿐이었지요. 그래서 20세기에는 진정한 민주주의, 곧 민중이 주인이 되는 체제가 체계적으로 들어서기가 어려웠습니다. 두 번씩이나 민주체제는 기사회생한 셈입니다. 나치전체주의는 열전으로, 공산주의체제는 냉전으로 각각 몰락했던 세기가 바로 20세기였습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적 민주체제가 객체로서의 대중을 주체로서의 민중으로 존중했습니까?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공산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인간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하는 무력한 객체였다면, 자본주의 시장체제하에서는 소비자 역시 행태론적 심리학이 강조하는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수동적 존재라 하겠습니다. 막강한 자본이 소비성향을 좌지우지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대중은 주인처럼 느끼고 인식하도록 자극을 받아 왔을 뿐, 실제론 반응체(reactor)였습니다. 권력과 자본이 매스미디어를 좌지우지하는 한 그러했습니다. 그러기에 쿠데타가 일어나면, 쿠데타 세력은 어김없이 방송국과 신문사부터 먼저 점령・접수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난 십여 년간 세계는 크게 변화되기 시작 했습니다. 물론 가슴 아프게도 변화되지 않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먼저 변화된 것부터 얘기해 봅시다. 심원은 이 변화의 짜릿함을 느끼지 못하고 소천한 것이 안타깝기도 합니다. 대중 사회적 흐름이 정보화 흐름에 밀리게 되면서 대중은 주체적 존재로 우뚝 일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쌍방향 통신매체가 일상화 되면서 밑바닥의 대중들은 대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대꾸할 뿐만 아니라 쌍방향 매체를 통해 서로의 의견을 사이버 공간에서 활발히 교환하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의견교환과 토론이 공간에 의해 제약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의 제약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흩어져 있어도, 그리고 몸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이버 공간에서 만나 활발하게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공감의 영역을 넓혀 갈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이제 대중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뉴욕타임스 사설은 이들은 넷루트(netroots)라고 불렀습니다. grassroot(풀뿌리)가 20세기 대중이라면 netroots는 21세기 주역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netroots를 줄씨알이라는 새로운 민중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들은 사이버 공간이라는 줄 안에서(on-line) 서로 자유롭게 만나 소통합니다. 그 줄 안에서 소통을 거쳐 뜨거운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면, 그들은 더 자유롭게 줄밖(off-line)에서 만나 새로운 정열을 서로 북돋우면서 때론 역사 변혁적 사건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객체에서 주체로 변화되면서 조직(국가든, 기업이든, 학교든, 교회든)의 운영도 질적 변화를 요청받고 있습니다. 적어도 두 가지 의미 있는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하나는 모든 운영이 ‘위에서’ 부터 ‘밑으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즉 top-down식 운영에서 bottom-up운영으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직의 투명성은 반드시 보장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변화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그 조직은 퇴출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투명성 있는 조직 운영은 진정한 bottom-up에서만 가능합니다. 최근 월가의 금융질서가 망가지게 된 것도 투명성과 bottom-up이 실제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미국식 금융자본의 불투명한 탐욕과 독선이 이번 사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암울했던 1970년대 함석헌 선생은 언제 우리도 민주화를 맛보게 될 것이냐는 끈질긴 질문을 받을 때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하나님께서 “뒤로 돌아갓!” 이라는 역사의 명령을 내리게 되면 지금 세계에서 제일 꼴찌로 민주화 행진하고 있는 우리도 그때 뒤로 확 돌아서면 대번에 일등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지요. 그때는 꿈같은 얘기였고, 종말론적 농담같이 들렸는데, 이 같은 명령이 지난 10여 년간 심원이 세상을 떠난 뒤 이 땅 위에 확실히 떨어진 것 같습니다. 20세기에는 산업화에도 늦었고, 민주화에도 늦어 후진국으로 조롱 받던 우리나라가 이제는 정보화의 새 흐름이 생겨나자 어느 나라 보다 먼저 정보화 인프라를 구축하게 되었고, 소프트웨어나 콘텐츠도 앞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에서 인터넷을 가장 많이, 가장 잘 활용하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가며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 심원 선생, 서남동 선생 모두 이러한 우리의 변화된 새 모습을 보지 못 한 채 소천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줄씨알은 결코 20세기 아날로그의 무력한 대중이 아닙니다. 줄씨알은 줄 안 밖에서 자유롭게 소통하고, 자유롭게 토론하고, 자유롭게 결정하여 역사의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2002년 ‘미선 효순 촛불 집회’, 월드컵 응원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붉은악마의 위력, 그해 대통령선거에 영향을 준 줄씨알의 활약, 그리고 올해 6월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 등 여러 사건의 주역은 20세기 대중처럼 위에 의해 동원된 객체들이 결단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창발적 주체로서 스스로 그 위력을 밑으로부터 줄(network)을 통해 발휘했습니다. 21세기 새로운 대자적 민중의 힘이 자발적으로 폭발되는, 축제의 축포처럼 터져 나오는 이 장관은 정말 새로운 시대가 이미 왔음을 증거 해줍니다. 심원이 보았더라면 또 한 번 어린애처럼 웃었을 것이고 또 감격에 겨워 울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경멸받던 후진국이 아닙니다. 영국의 ‘가디언’(The Guardian)을 비롯한 세계 여러 언론들도 한국이 정보화시대를 맞아 참여 민주주의를 앞서 실천해 나가는 정치 선진국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군사권위주의 시절 제도 폭력으로 고통을 받고 돌아가신 민중신학자들에게는 이 같은 직접민주주의가 한국에서 그렇게 빨리 꽃필 수 있다는 것을 짐작 못했을 것 같습니다. 세계적으로 정보화를 국가정책으로 추진했던 장본인인 전 미국 부통령 고어(Gore)씨도 한국의 정치적 선진성이 정보화를 통해 이렇게 빨리, 그리고 착실하게 이뤄지고 있음을 여러 번 찬탄했습니다.


3. 민중신학의 역사적 배경: 냉전근본주의와 적대적 공생관계

그런데 이 같은 코페르니쿠스적 정치 사회변화가 지난 10 여 년간 일어났는데 이 변화가 민중신학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이 문제를 다루기 전 먼저 두 가지만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는 이 기축적 변화가 전적으로 20세기 한국 민중(대자적 민중)의 힘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정보화 흐름을 재빨리 흡수한 정부와 국민에 의해 이뤄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보화기술을 재빨리 국가정책으로 채택하고 국민 삶의 변화를 불러일으킨 주역이 지난 십여 년간 이 나라를 이끌어 왔던 민주 정부였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민주 정부가 들어 설 수 있었던 것은 그간 이 땅의 민중들의 축적된 노력과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20세기의 대중이 21세기의 줄씨알로 바꿔진 것은 21세기를 앞두고 세계 전체가 정보화 흐름을 수용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문제는 새로운 역사 주체인 줄씨알의 등장을 두려워하는 세력이 아직도 이 땅에 강고하게 남아 있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바로 이 점이 안 박사가 소천하신 후에도 변화되지 않고 있는 우리의 아픔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더욱 안타깝게 하는 모순이요, 새 시대에도 존재하는 낡은 사회모순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를 얘기 하자면 자연히 지난 세기의 우리 민족사를 간단하게나마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민족사적으로 본 20세기의 의미를 민중과 연관시켜 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0세기 전반부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된 비탄의 기간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일본제국의 신민(臣民)으로 흡수되었습니다. 황색 제국주의하의 힘없는 대중이었습니다. 심원 선생이 1975년 강연에서 적절히 지적했듯이 민족도 민중도 없던 공허했던 시기였습니다. 동학농민 혁명이나 3.1운동에서 나타났던 민중도 이 기간 좌절과 절망에 빠져버렸던 시기였습니다. 20세기 후반부는 타율적으로 민족과 국토가 분단되었던 또 다른 비탄의 시기입니다. 가장 동질적인 민족중 하나가 바로 우리 한민족인데도 태평양전쟁 이후 강대국들의 힘의 재편과정에서 너무나 억울하게 우리민족은 두 동강 나고 말았습니다. 전쟁 후 전범국 일본은 번듯하게 통일국가로 남았는데, 그 전범국에 의해 강제로 부당하게 식민지로 전락된 우리민족은 통일국가를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반도에서 국가와 민족은 그 강인한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분단되고 말았습니다. 단순한 국토 분단과 민족의 분단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분단된 두 국가와 두 민족은 이념의 좌우로 첨예하게 대결하는 비극의 분단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지난 60여 년간 치열한 열전과 냉전을 모두 거치면서 분단은 더욱 강화・고착 되었습니다. 분단체제의 유지비용은 그간 엄청났습니다. 그 비용만큼, 민족과 민중이 겪게 된 고통은 엄청나다 하겠습니다. 민족 간, 국가 간의 열전과 냉전의 대결로 남북 모두에서 대중의 고통은 증폭되었습니다. 특히, 지난 55년간 냉전체제가 유지되는 동안 인권과 정의, 평화와 자유는 체계적으로 구조적으로 유린되고 훼손되어왔습니다. 자칭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남쪽에서도 그 같은 유린과 훼손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다만 지난 10여 년간 민주화 국면에서는 제도화되고 내면화된 냉전 체제와 가치가 새로운 세대 안에서는 얼마간 완화된 듯합니다. 그러나 보수적 기성세대에서는 냉전가치가 결코 이완되지 않고 있습니다. 제1공화국에서 제6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제도화 되었던 냉전체제의 장악력은 노태우 정부 끝머리에 이루어진 남북 기본합의서 같은 탈냉전적 선언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지속되어 왔습니다.
저는 여기서 냉전체제를 본질적으로 정치적 근본주의 가치와 제도로 보고 싶습니다. 이것이 지배 가치관으로 대중들의 의식 깊숙이 내면화 되고, 그들의 가슴 속 깊이 각인되면 여러 위험한 징후들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것이 국가적으로 제도화되게 되면, 그 제도들은 인간의 기본권을 조직적으로 훼손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근본주의 기본 특징과 주요기능은 무엇입니까?

첫째, 나는 항상 옳고, 상대방은 본질적으로 잘못되고 악하다고 확신합니다. 독선주의입니다.
둘째, 상대방이 본질적으로 악함으로, 그것은 반드시 초전박살을 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무력적 압승주의입니다.
셋째, 옳음과 틀림 간, 선과 악 사이에 끼는 모든 것은 불순하기에 악의 편이라고 확신합니다. 중간지대에 대한 관용이 전혀 없습니다. 철저한 비관용입니다.

이 같은 특징을 갖는 냉전가치와 제도는 지난 60여 년간 분단된 양쪽에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그것이 효과 있게 작동할수록, 인권과 정의 그리고 평화와 자유는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냉전대결이 남북 간에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각 체제 안에 고착되면서 생긴 괴물 같은 새로운 힘의 관계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다름 아닌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것입니다.
적대적 공생관계는 근본주의 세력 간에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불행한 정치사회적 역학관계(力學關係)입니다. 서로를 공식적으로나 공개적으로 주적(主敵)으로 간주합니다. 상대방을 초전박살 낼 주적으로 규정 합니다. 그런데 이 두 세력 간에는 요상하게도 결과적으로 뜻밖의 관계가 형성됩니다. 공식적으로 주적관계라고 외칠수록, 공개적으로 적대행위를 보일수록, 그들의 원래 의도와는 관계없이 서로 도와주는 결과가 발생합니다. 이를테면 북쪽의 강경군부가 남쪽에 대해 무력도발을 행한다면, 남쪽의 수구 냉전세력은 그 공세를 기다렸다는 듯 적절히 활용하여 그들의 체제내의 장악력을 강화해 나갑니다. 나아가 그들의 정치, 사회, 경제적 기득 이권을 더 효과적으로 보호해 낼 수 있게 됩니다. 이 원리는 보편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부시 대통령은 알카에다가 일으킨 9․11 사태를 적극 활용하여 그의 국내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미국의 네오콘과 알카에다는 공개적으로는 서로를 주적으로 정죄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서로를 돕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극은 서로 통한다고 합니다. 극좌는 극우를 극우는 극좌를 그들의 의도와는 반대로 서로 도와주는 결과에 이르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적대적 공생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악순환을 일으키고 지속시키는 근본요인입니다. 아시다시피 남북 간에는 적대적 공생관계가 지난 60년간 강고하게 구축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첫째가 남북관계의 악화입니다. 둘째가 남북 각 체제 안에 반민주적, 반민중적 권력이 강화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셋째로 대중 일반의 삶은 더욱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권은 더욱 유린되고, 정의는 더욱 훼손되고, 평화는 더욱 멀어지게 됩니다. 이 같은 현실과 현상을 우리는 지난 60여 년간 우리의 역사 현실에서 직접 목도하고 겪어왔습니다. 일제잔재를 청산 못해 민족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했던 제1공화국의 현실, 민주 정통성을 처음부터 배제하면서 출범했던 제3공화국의 현실이 바로 우리가 겪었던 비극과 고통의 현실이었습니다. 특히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세력이 권력 정통성 부재에서 오는 체제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했던 경제성장정책(정통성을 효율성으로 극복하려했던 정책)은 개발 독재체제를 탄생시켰습니다. 이 기간 냉전체제는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 기간 남북 관계는 악순환을 거듭하였고, 민주주의는 심각하게 훼손되었습니다. 인간의 자유권적 기본권은 더욱 위축되었고, 개발 독재 하에 인간의 생존권적 기본권은 처참하게 유린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상하게도 이 기간 ‘하면 된다’는 무모한 적극주의, 또는 적극적 사고와 가치가 하나의 지배 문화가치로 자리 잡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기간 두 가지 뚜렷한 흐름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한국 민중신학과 연관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산업 노동자들(기층노동계급)이 생존권 투쟁에 나서게 됩니다. 전태일 사건이 이때 터진 것이지요. YH사건도 이때 터져 나왔습니다. 평화시장 같은 열악한 노동환경이 바로 가장 평화스럽지 못한 민중 고통의 온상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흐름은, 개발 독재의 ‘하면 된다’의 적극주의가 개신교 교회의 양적 성장을 부추겼다는 사실입니다. 이 기간 민중은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고, 지식인은 자유권적 기본권을 위해 분발할 때, 바로 그 기간에 한국 교회는 양적 폭발이라는 성장 경험을 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저는 한국 교회의 눈부신 양적 성장을 가능하게 한 한 가지 요인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냉전 근본주의라는 세속적 정치 가치가 마침내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 신앙과 결합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세속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 근본주의는 서로 동종(同種)임을 대번에 알아보기에 권력 밀착현상이 쉽게 이루어집니다. 이때 크게 성장하는 한국 교회들, 특히 나중에 초대형 교회로 성장한 교회들은 대체로 냉전가치를 깊게 내면화한 교회들이며 정부의 냉전제도를 적극 지지해주는 교회들입니다. 개신교 근본주의와 군사 권력의 냉전 근본주의 간의 결탁은, 민주주의, 평화,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심각한 장애로 작동해 왔습니다.
바로 이 같은 비극적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일각에서는 해방 후 최초로 군사권위주의 체제를 향해 예언자적 발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생존권적 기본권과 자유권적 기본권의 보장을 강력하게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1962년 NCC의 성명에서 드러났습니다. 늦게나마 1960년대 초에 와서야 일부 한국 교회는 이 땅의 민중의 아픔, 그것도 억울한 아픔에 동참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민중신학은 민중의 아픔에 동고(同苦)하려는 개신교 지식인들에 의해 잉태되기 시작했습니다. NCC를 중심으로 하여 산업 선교가 펼쳐지고,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그 신학적 자원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국가의 노동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의 저항은 더욱 힘들었기에 그만큼 더 처절했습니다. 다른 한편 학생들의 저항 또한 끈질겼고 더욱 끈질기게 확산되었습니다. 이때 민중신학을 선도한 지식인들은 대체로 교수직을 박탈당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자연스럽게 민중의 사건 속에 증거자로 관여하였지요. 그 고난의 현장 한 가운데서 예수를 새롭게 만나고, 새롭게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민중운동과 민중사건 속에서 갈릴리의 예수를 온 몸으로(머리와 가슴으로) 만나고 재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해직은 일종의 은총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새로운 서구 신학이론을 직수입하는데 바쁘게 앞장섰던 서남동 교수는 민중의 고난과 민중사건 속에서 예수를 만나 그 전의 조직 신학적 지식을 헌신짝처럼 던져 버리는 듯 했습니다. 한때 실존적 신학, 불트만에 심취되었던 안병무 선생은 마가복음의 오클로스라는 예수 사건의 주역에 새삼 주목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케리그마 전승과는 아주 다른 역사적 예수, 갈릴리 예수의 민중 사건을 독립된 전승으로 높이 평가하기에 이른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민중이 곧 예수였고, 예수가 곧 민중이었습니다. 역사적 예수는 부활의 그리스도의 눈으로 실존적으로 추체험(追体驗)할 수도 있겠으나 갈릴리 예수의 프로젝트, 곧 하나님나라 운동 계획은 독자적으로 주목할 가치가 있는 전승으로 보았습니다.
하기야 이때는 아직 미국을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가 한국에 알려지기 전이었습니다. 남미의 해방신학, 미국의 흑인신학, 그리고 서구의 여성신학 등은 한국 민중신학보다 먼저 나온 것이긴 하나, 그것들이 한국 민중신학의 텍스트도 콘텍스트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 민중신학의 텍스트는 한국 민중의 고난과 민중사건에 나타나는 증언과 소문(유언비어)이었고, 콘텍스트도 그들의 고통과 고통 극복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한국 민중신학자들은 그 몸부림을 객관적 관찰자로 여유 있게 거리를 두고 관찰, 분석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과 연대하고 그들과 동고(同苦)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 저러한 성명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구금되고 재판을 거쳐 옥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고난의 현장에서 그들의 민중신학 이론은 잉태되고 다듬어졌습니다. 이 같은 프락시스 속에서 잉태되고 태어난 민중신학은 마침내 WCC같은 기구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고, 제3세계 신학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습니다.
1977년이던가, 제가 WCC의 개발문제를 다루는 CCPD(발전에 대한 교회 참여부) 위원으로 있을 때 아프리카 카메룬에 간 적이 있습니다. 이때의 얘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CCPD 회의 마지막 폐회예배 때 저보고 짧은 말씀 증거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한국 민중의 투쟁과 민중신학을 생각하면서 선한 사마리아 비유의 말씀 중에 한 구절에 주목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5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이 여관 주인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 돌봐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1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대체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사마리아인은 장사꾼이었을 테니 장사해서 돈이 마련되면 장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때 저는 이 사마리아인이 장사꾼이었지만 너무나 부당하게 고통당하는 피해자 민중의 참상을 자세히 보고 치료해주는 과정에서, 이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잔인한 지배세력과 싸울 동기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마리아 장사꾼이 생존권을 위한 투사로 변신한다는 것을 부각시켰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저는 1970년대 한국민중의 고통 속에서 역지사지, 역지감지(易地感之) 해본 것이지요. 그것은 한국의 1970년대 중반의 현실에서 제가 몸으로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이 투쟁하며 싸우는 사마리아인으로 변신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제가 얼마 뒤(1978) 󰡔저 낮은 곳을 향하여󰡕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그 책머리에서 ‘싸우는 사마리아인을 위하여’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착하면서도 용기 있게 싸우는 한국 사마리아인들이 이 책을 읽고 많이 나오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당시 심원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카메룬 회의를 마치고 귀국길에 제네바에 들렀습니다. 제네바의 레만 호숫가에서 나는 점잖은 중년의 서양신사 한분을 만났는데 그가 내가 한국 사람이고 WCC 일로 아프리카를 다녀온다고 했더니 대뜸 안병무 박사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도 WCC에서 일하는 신학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얼마 전 독일에서 안박사의 민중신학 강의를 들었는데, 크게 감명 받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고 물었더니 안박사가 갈릴리 민중 세력과 예루살렘 성전 세력 간의 대립을 설명하면서 예수께서 갈릴리의 오클로스의 편에 서서 또 자신이 민중이 되어 예루살렘 기득권 세력과 맞서다, 처형당했음을 설파했다고 했지요. 자기는 오클로스라는 말은 처음 들었는데 심원의 강연을 듣고 한국 민중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고 했습니다. 안박사가 대단한 제 3세계 신학자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가 1977년이었으니, 한국 민중신학이 세계로 이미 30년 전에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한국 민중의 고뇌와 고통을 세계가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흐뭇했습니다.


4. 민중신학의 동력상실: 냉전근본주의와 개신교 근본주의간 결탁

그렇다면 1970년대 민중고난의 현장과 민중사건 속에서 탄생된 민중신학이 왜 오늘에 이르러 그 동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앞으로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이런 과제는 나 같은 사회학도가 해낼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 같은 도전에 대해 새 세대 민중신학도들이 적극 응전해야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70년대 민중신학자들과 동지로서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했던 민중 사회학도로서 몇 가지 소회를 저의 경험에 비추어 조심스럽게 펼쳐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왜 민중신학이 지난 십여 년 간 쇠퇴 했는지 생각해 본다면 제일 먼저 그간의 한국정치 변화에 주목해야 합니다. 1993년 문민정부출범이후 오늘까지 절차적 민주화는 상당 수준 진척되었습니다. 이제는 긴급조치 같은 제도폭력으로 자유권적 기본권을 유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비록 문민정부가 산업화세력과 결탁하여 국가를 경영했으나, 군부의 부당했던 영향력을 크게 약화시켰던 것도 사실입니다.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공개 등을 통해 정치의 부패가능성을 어느 정도 약화시킨 것도 인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 기간 냉전통제는 결코 약화되지 않았습니다. 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은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북관계도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북한 핵문제로 남북관계는 오히려 더 악화되기도 했습니다. 이 기간 한반도에서 냉전근본주의는 전과 다를 바 없이 강고했고, 적대적 공생관계 또한 강인한 냉전벨트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적대적 공생관계는 남북각기 그들의 이념적 이웃나라들과 동맹관계를 강화시킬 때 더욱 굳어집니다. 북한이 소련과 중국과의 3각 동맹관계를 굳건히 유지하고, 남한이 미국과 일본과 3각 동맹관계를 강화하게 되면, 남북한 간에는 강고한 냉전벨트가 형성됩니다. 그렇게 되면 냉전근본주의는 기승을 부리게 되고 민중의 고통 역시 그만큼 커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남과 북의 삼각 동맹관계는 교차승인이 이뤄지면 해체 될 수 있습니다. 북은 미국과 일본과 수교하게 되고, 남은 중국과 러시아와 국교 관계를 맺게 되면, 냉전 벨트는 느슨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김영삼 정부시절 남쪽은 북방삼각동맹을 해체하다시피 했으나, 남방의 삼각 동맹은 여전했습니다. 그 결과 북한만 고립된 셈이지요. 그런데도 남쪽에서는 역설적으로 냉전근본주의가 강화되는 듯 했습니다. 이때 저는 통일부총리로서 파격적인 남북관계개선을 시도했습니다. 이인모씨를 북한에 보냈습니다. 만일 북한이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씨 북송으로 평화의 돌파구를 마련하여 한반도 탈냉전정책을 추진하려 했던 저의 뜻이 어느 정도 이뤄졌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북핵문제가 불거지면서 남쪽의 냉전근본주의 세력과 개신교근본주의 세력은 더욱 그 결속을 강화하면서 햇볕정책적 노력을 좌절시키려 했습니다. 그때 저는 부총리 집무실에 있으면서도 1980년 서대문교도소에 갇혀있을 때보다 더 불안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국무위원으로 있었지만, 서대문의 양심수로 있을 때보다 더 외롭고 더 괴로웠습니다. 그때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이 민주화된 문민정부이냐” 라고. 이때는 NGO의 힘도 상대적으로 약했고, NCC를 위시한 진보적 개신교세력도 그전만 못했던 것 같습니다. 대신 큰 교회를 중심으로 한 냉전근본주의 세력은 그 힘을 무섭게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신학을 위시한 진보적 기독교세력은 냉전근본주의와 개신교근본주의 간의 강고한 결탁을 해체시킬 수 있는 신학적 통찰력과 신학적 실천동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절차적 민주화 과정에서 창조적 긴장이 해이해진 것입니다. 1993년 8.15 때 한국개신교가 NCC를 중심으로 북한과 함께 인간 띠 잇기 운동을 펼쳤을 때 김영삼 대통령은 퍽 불쾌하게 반응했습니다. 제가 여러 번 그 운동의 당위성을 설명했는데도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곤혹스러웠습니다. 김 대통령의 민주화 투쟁은 빛났지만, 그 분의 냉전의식은 그 빛을 스스로 가리고 있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도 냉전세력은 수구언론을 장악함으로써 더욱 강고하게 버티고 있었습니다. DJ자신이 집권했지만,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기에 탄력성 있게 단단한 개혁 중심세력을 무엇보다 먼저 구축해야 한다는 판단을 못했습니다. 오히려 탕평책적 포용을 시도하여, 개혁주체 형성을 어렵게 했습니다. 개혁의 몸통이 튼튼해야만 긴 날개를 좌우에 붙일 수 있지요. 독수리 날개를 참새에게 단다면 그 새는 아예 날지를 못합니다. 첫 조각 때부터 DJ는 강건한 민주개혁 몸통 없이 냉전세력을 각료의 중요한 자리에 앉혔습니다. 이 기간 한국의 냉전근본주의 세력은 안으로 더욱 결속 했습니다. 여기에는 조중동의 단합이 큰 역할을 해냈습니다. 두 김씨 모두 대통령이 되었으나 결국 수구냉정언론과 그 세력을 견제해내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색깔론적 사회통제는 지난날 군사권위주의 시대보다 더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하기야 군사권위주의 시대처럼 벌거벗은 권력으로 통제를 하기가 어려워졌기에 역설적으로 색깔론적 통제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정죄는 더욱 심했습니다. 그 같은 통제는 주로 수구언론이 담당했습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교회 안에서 민중신학적 표현도 이제는 보수화된 대교회의 영향력에 의해 더욱 쉽게 견제 받게 되었습니다. 민중신학적 움직임 뿐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으로 신학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비교적 열려있다고 생각되는 감리교 교단에서도 열린 신학적 활동이나 진보신학적인 활동이 제약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제2세대, 제3세대 민중신학이 나오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민중신학하며 신학교수가 되기란 여간 어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신학교는 총회와 노회를 장악한 냉전적 교권주의 세력 앞에 겁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눈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절차적 민주화가 진척되었다는 양 김씨 시대에도 민중신학은 제1세대의 그 정열과 헌신과 비전을 재생산해 낼 수 없었습니다.
민중신학이 지난 십여 년간 주도적인 신학적 화두가 되지 못한 데는 보다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2세대 민중신학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여기에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보화 흐름을 재빠르게 수용하고 그 흐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한국 정부와 국민들은 앞에서 지적한대로 이제 무력한 reactor 대중에서 강력한 주체적 actor로 변했습니다. 최근 하트(M.Hardt)와 네그리(A.Negri)가 강조하는 다중(multitude)으로 변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한국의 줄씨알(netroots)입니다. 네그리와 하트가 말하는 다중은 개 주체에 내제하는 힘, 스스로를 대변하는 힘, 그 어떤 개인을 초월하는 권력이 대변할 수 없는 내재적 힘을 지닌 개 주체(singularity)의 통전적 실체입니다. 세계화로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존재하는 제국(Empire)에 대한 대안적이고 대항적인 힘으로 작동하는 21세기의 대자적 민중이라 하겠습니다, 20세기의 무력하고 원자화된 대중(mass)과는 질적으로 달리 스스로 그 힘을 형성해 내는 창발적 줄씨알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문화축제로 20세기적 정치적 시위를 승화시키면서도 줄 안 밖에서(on-line 과 off-line에서) 엄청난 충격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촛불축제의 시위가 바로 이들 줄씨알의 힘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결코 플로레타리안이 아닙니다. 계급 연합적 성격을 띠면서, 세대와 지역을 초월하며 그 힘을 줄밖 현실에서 과시해보입니다. 이들은 지난날 산업노동자들과 같은 동질적 계급도 아닙니다. 이질적인데도 개별적 주체자들로서 줄 안 밖의 소통을 통해 창발적으로 힘을 모아 그들의 뜻을 표출하고 실행하려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냉전적 통제가 잘 먹히지도 않습니다. 이들의 힘은 20세기의 대중과는 달리 흩어져 있어도 그 힘을 발휘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아날로그시대에는 뭉쳐야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만 21세기 디지털시대에는 흩어져있어도 소통을 통해 힘을 내고 줄밖에서 뭉치면 엄청난 힘을 폭발시킵니다. 줄 안의 소통은 마음의 소통이며 줄밖의 소통은 몸의 소통인데, 몸과 마음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그 힘을 발휘합니다. 그들은 공간의 제약도 시간의 제약도 20세기 인간처럼 받지 않습니다. 정보혁명이 불러일으키는 이같은 줄씨알들의 저력을 주목하지 않고서 21세기 민중신학 그리고 민중사회학을 거론하기 어렵습니다.
이제 민중은 줄씨알로 확실히 역사의 주인이요 사회의 주역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1978년 저는 󰡔민중과 지식인󰡕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민중이 역사와 구조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은 당위의 명제일 뿐, 결코 존재의 명제는 아닌 것 같다....... 비록 민중이 주인이라 라고 하는 주장이 아직도 세계 여러 곳에서는 당위의 차원에 묶여있다 하더라도 자기의 저력을 깨닫기 시작하는 민중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도 역시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기에 역사는 민중을 더욱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했으나, 저는 이 책을 출간한지 20년도 안되어 한국에서 자기들의 저력을 깨달은 새로운 민중 곧 줄씨알이 쌍방향통신매체를 활용하여 그들의 정당한 욕구를 문화축제 식으로 이토록 강렬하게 표출시킬 것이라고는 짐작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대자적 민중은 바로 이들 줄씨알입니다. 이들에 대한 신학적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오늘 작고 큰 교회를 막론하고, 교회는 각기 자기 나름의 홈페이지를 갖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한 장소에서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인다는 것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집회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치 20세기의 포디즘적 자본주의와 대량생산체제가 기술혁명과 새로운 줄씨알 소비자의 등장으로 점차 약화되듯, 대형교회, 초대형교회의 영향력도 시대 흐름에 따라 변화 할 것입니다. 이제 줄씨알들은 거대한 외부권력이 내용을 채워주기를 다소곳이 기다리기만 하는 빈병도 아니요 백지(白紙) 도 결코 아닙니다. 외부의 자극에 따라 춤추는 얼빠진 객체도 아니요 파블로프의 침 흘리는 개도 아닙니다. 다양하지만 지극히 주체적이고 이질적이되 지극히 잘 소통할 수 있는 창발적 개아(個我)들입니다. 주체들입니다. 바로 이들이 교회 안에서도 힘을 발휘 할 것이며, 교회 밖에서도 역사의 새 주인으로, 구조의 새 주역으로 스스로 힘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피동적으로 동원되는 대중이 아닙니다. 스스로 필요한 정보를 얻어 지식을 제조 할 수 있는 대자적 씨알입니다. 민중신학은 이들의 자원을 소중하게 여기고 이들과 소통하여 예수의 갈릴리프로젝트를 실현하는 일에 신학적 자원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한국개신교 속에 뿌리깊이 내리고 있는 냉전근본주의부터 해체시켜야합니다.




5. 21세기 민중신학의 과제

이제 민중신학이 21세기 분단 상황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되짚어보아야 할 몇 가지 과제들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역사의 예수를 한국 교회 안으로 정중히 모셔야 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사역입니다. 교회 안으로 모시기 전 신학교에서 더욱 정중하게 먼저 모셔야 합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참으로 다양한 현대적 논의를 소개하고 토론하면서 ‘예수의 원초적 비전과 정열’(original impulse of historical Jesus)을 확인해내고 다양하게 논의하고 배워야 합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여러 차례의 탐구들에서 배울 뿐만 아니라 최근 논의되는 여러 의견과 이견들을 자유롭게 토론하면서도 오늘 우리의 분단된 상황에서 인간의 온전한 모습을 훼손시키는 오늘의 제국적󰡐군대마귀󰡑를 분명히 밝혀내고 해체하는데 신학적 지혜와 통찰력을 또한 활용해야 합니다. 특히 최근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역사의 시계 바늘이 거꾸로 가고 있는 듯합니다. 선진화의 이름으로 산업화시대의 강권 정치로 후퇴하고 있는 것 같으며, 실용주의 이름 밑에서 교조적 냉전이데올로기로 회귀 하는 듯합니다. 교벌(敎閥)처럼 거대화 된 대형교회가 정치권력과 유착하는 가운데, 냉전근본주의와 개신교근본주의는 더욱 결속 하는 듯 하기에, 역사의 예수께서 이룩하시려 했던 민중운동, 하나님나라 운동은 우리의 상황에서 더욱 절박해지는 듯합니다. 이것을 새롭게 해석하고 창발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신학교와 큰 교회에서 어렵다면, 역사의 예수를 모시는 조그마하지만 알찬 대안 교회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둘째로 역사의 예수가 기독교 교회의 역사에서 어떻게 실종되었으며, 그 실종의 결과 교회가 어떻게 타락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민중신학적 교회사 연구가 필요합니다. 오랫동안 핍박받았던 초대 교회가 국교의 자리로 옮겨 앉은 이후 ‘하나의 제국, 하나의 교회, 하나의 그리스도’라는 지배이데올로기로 변질되면서 빚어진 온갖 반(反) 인륜적 범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예수를 실종시킨 제도 교회가 예수를 계속 괴롭히고 있는 역사적 현실과 오늘의 현실을 폭로해야 합니다. 이같은 교회사 연구는 진솔한 메타노이아를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이 같은 메타노이아 없이 예수와 민중이 주인이 되는 교회는 어렵습니다.
셋째로 역사적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 사이의 간격을 민중신학은 보다 설득력 있게 좁혀야 합니다. 케리그마가 초대교회 신자들로 하여금 로마의 탄압 속에서도 견디게 했다면 그것도 엄청난 힘이라 하겠습니다. 사도바울도 혁명가의 얼굴, 자유주의자의 얼굴, 수구의 얼굴을 모두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이중에 혁명적 바울을 갈릴리의 예수와 접속시킬 수 없는지를 탐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크로싼(J.D. Crossan)은 그의 God and Empire에서 이점에 대한 시사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부활 사건을 연관 지어 논의 합니다. 예수 부활의 두 가지 충분조건들 곧 빈 무덤과 현현사건 이외 예수의 갈릴리 민중 운동을 필요조건에 포함시키는 듯합니다. 나아가 부활의 그리스도를 실존적으로 만난 제자들이 엄청난 로마의 폭정 밑에서도 그 로마제국의 권력과 문명의 제도화된 폭력에 맞서고 그것을 끝장내는 운동(종말론적 운동)을 지속시킨다고 보고, 그 끝장내기 운동을 신인합동(神人合同)운동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초대 교회 민중이 합력하여 추진했던 끝장내기 운동, 곧 collaborative eschaton이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성서신학자 N.T. Wright와의 부활논쟁에서 이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한국 민중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신과 인간의 협동적 종말 운동을 잇는 창조적 연결점을 찾아 낼 필요가 있습니다.
넷째 이것과 연관하여 바울의 속죄론의 민중 운동적 잠재력을 캐어 보는 일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속죄론이, 종교적 사사화(私事化) 메커니즘으로, 탈역사화 탈정치화의 기제로 작용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 점은 신랄하게 비판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속죄론적 신앙이 빌립보 감옥에 갇혀있던 바울로 하여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신앙적 결단을 내리게 했고, 로마 제국의 폭정 앞에 무릎 꿇지 않게 한 힘으로 작동 했다면, 이것은 폭력제도의 신인협동 끝내기 운동에도 도움 될 것입니다. 이 가능성을 밝혀낼 필요가 있습니다. 엄혹한 상황에서 고투하는 민중에게는 이 같은 신앙이 아편이 아니라 변혁의 활력소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가능성을 끈질기게 고민하면서 계속 탐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구적 복음주의자들을 깨우치기 위해서도 필요할 것입니다.
다섯째 1970년대 제1세대 민중신학자들은 대체로 민중을 예찬했습니다. 민중에게 주저 없이 존재론적 특권, 인식론적 특권 그리고 실천론적 특권을 부여했습니다. 민중을 낭만적으로 더 높였습니다. 민중을 생명체로 높이 보았기에, 그들의 특징을 정의(define)하는 것도 꺼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민중으로 보는 수준을 넘어 민중이 곧 예수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저는 약간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저는 민중이 당시에도 즉자적 수준과 상태에 놓여있을 수 있는데, 이 같은 즉자적 민중마저 높이 받들면, 오히려 폭력적 권력을 끝장내기가 힘들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대자적 민중의 경우 그들의 인식론적, 실천론적 특권을 인정하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민중이라고 하여 무조건 존재론적 특권을 인정하고 그것을 미화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심원, 현영학 선생, 그리고 서남동 선생은 “한 박사는 지식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면서 임박한 죽음을 예고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그럴 수 없다고 예수를 말렸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베드로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고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민중 가운데 그때의 베드로 같은 수준에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그때나 지금이나 더 많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민중을 생명체로 보는 것과 그 생명체를 정의하면 그 생명력이 곧 제약된다는 생각은 분리해야 합니다. 민중이란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경제적으로 수탈당하고 문화사회적으로 차별받는 피지배자들이라고 해서 그 민중의 생명력이 약화될까요? 오히려 그 생명력은 그들을 계속 즉자적 수준에 묶어두려는 권력의 이데올로기적 통제 곧 그 허위 의식적 통제에 의해 훼손되고 고갈됩니다.
이 문제와 연관하여 21세기 대자적 민중인 줄씨알들이야말로 정말 생명체 흐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의 지식인들이 줄씨알들의 창발적 저력을 인정하는데 인색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그들의 스승입니다. 인터넷 정보와 지식 바다에 자유롭게 항해하면서 그들이 필요한 지식과 정보는 스스로 얻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의식화라는 외부적 가르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지식을 만들어내는 창조자들입니다. Wikipedia 백과사전을 보시면 그들의 창발력, 밑으로부터의 창발력을 대번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Wikipedia는 21세기 민중 곧 줄씨앗들의 지식창고요 지식창조마당 입니다. 민중신학자도 줄씨알이 되어 이 같은 상호소통 상호창조에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의 민중신학자들은 열린 넓은 사이트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들 나름의 민중신학적 Wikipedia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여섯째 민중신학자는 이제 정보화시대를 맞아, 역사적 예수를 모시는 작고 알찬 교회를 운영해나가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줄 안에서 만나는 교회도 좋고 줄 안에서 만나다가 때때로 줄 밖에서도 만나는 그러한 새로운 전자유목민적 교회를 모범적으로 운영하는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이제는 일정 공간에 많이 모여야만 교회공동체가 되는 시대가 아닙니다. 공간적 대형 교회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20세기 포디즘 자본주의가 쇠퇴하듯 21세기에 와서 쇠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습, 불투명한 운영, top-down식 비민주적 경영 등의 고질적 문제가 터져 나오게 되면 오늘날 같은 디지털 시대에 견디기 어렵습니다. 오늘의 대형 교회에 모이는 거대한 종교적 대중들, 파블로프의 개처럼 일정하게 설교자의 자극에 따라 아멘으로 화답하는 모습이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그 대안으로 민중신학자들은 자기들끼리의 지적 담론에만 심취하지 말고, 실천 신학적 결단을 내려 작지만 알찬 깨어있는 씨알들의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줄 안에서나 줄 밖에서나 또는 이 두 영역 모두에서 말입니다. 이런 교회는 예수가 민중이 되듯, 성직자가 평신도가 되고, 민중이 예수처럼 될 수 있듯이 평신도가 성직자 또는 목회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민중신학은 평화를 삶으로 실천하는 일에 모범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작년 11월 적십자 총재로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적십자 연맹 총회에 참석했습니다. 마지막 날 저는 일본 적십자 총재와 간부 여러분을 만찬에 초대했습니다. 한일 정부 간에는 여러 골치 아픈 현안들이 있지만, 적십자 인도주의 정신으로 양국 적십자 간 우의를 다지자는 뜻에서 그들을 초대했습니다. 이때 우리 간부 한 사람이 일 년에 한 번씩 한일 적십자 직원들 간에 친선 축구시합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 적십자 직원이 한국 적십자 직원이 몇 명이나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약 4,500명 된다고 했더니, 그는 일본직원들은 우리의 10배가 되는 4만 5천명 쯤 된다고 은근히 자랑했습니다. 일본 적십자는 압도적인 수의 우세를 앞세워 승리를 확신하면서 그래도 하겠느냐는 뜻으로 우리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얘기 했습니다.
“시합할 때 조건 하나를 제시하겠습니다. 열심히 시합하되 상은 진 팀에 주도록 합시다.”
일본 직원들은 모두 의아하게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일본 총재도 저를 뜨악하게 쳐다보았습니다. 이때 저는 이렇게 다시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귀측에 우아하게(elegantly) 지기로 작정하고, 귀측에서는 우리에게 멋지게 (graciously) 지겠다는 각오를 한다면,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내 질문을 듣고 잠시 그들은 당황한 듯 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일본 총재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면 둘 다 이기겠네요.”
“바로 그렇습니다. 둘이 모두 우아하고 멋지게 질 준비가 된다면 결국은 둘 다 멋지게 이기는 것입니다. 적십자 인도주의 운동이 다름 아니라 바로 이것 입니다. 멋지게 서로 질 때 서로 이기므로 평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즐겁게 만찬을 마치고 사진을 함께 찍었습니다.
“여러분, 귀국하자마자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오늘 제가 말한 인도주의 원칙, 평화 만들기 원칙을 아내에게 적용해 보세요. 당장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평화스러운 가정의 맛을 볼 것입니다.”
모두 내 말에 웃었습니다.
이 얘기를 한 뒤 한 달이 지난 작년 12월 금강산에서 저는 북한 적십자 총재와 남북 장관회담 때 북측회담 대표 등이 참석했던 만찬 석상에서 다시 이 메시지를 강조했습니다.
“남북 간 서로 멋지게 지는 일에 앞장선다면 남북 간 평화는 착실히 올 것 같습니다. 이는 이, 눈은 눈으로 서로 보복적 대응하는 것 그만두고 서로 우아하게 집시다.”
그 때 북쪽 장관 회담 대표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한 총재께서는 사상가이시군요.”
라고 하면서 점잖게 논의를 회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멋지게 짐으로써 서로 이기는 상승문화(相勝文化)를 세우고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만 평화가 옵니다. 왜냐하면, 골고다의 예수께서 바로 우아하고 멋지게 짐으로써 함께 영원히 이기는 평화의 진리를 몸소 실천하시면서 가르쳐주었기 때문입니다. 왜 내가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우리 민족과 국가, 우리 민중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면서 평화를 체계적으로 제거하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해체하려면, 증오와 대결, 보복과 분열을 강화하여 악순환을 지속시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부정적 상호주의 가치를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냉전 근본주의와 개신교 근본주의가 결탁한 오늘의 상황에서 한국 개신교는 이 같은 악순환을 재생산하는 마당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21세기 한국 민중신학을 비롯한 모든 열린 진보 신학은 멋지게 지는 감동을, 그 기쁨을 신학화 해야 합니다. 그것을 평화 만들기의 에너지로 활용해야 합니다. 보수적 복음주의 교회들일수록, 확장주의적 선교와 함께 승리주의적 가치를 숭상합니다. 소꼬리가 되기보다는 닭의 머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 합니다. 승리주의 가치는 십자군의 군기의 역할은 할망정, 골고다에서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의 능력을 결코 증거 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지는 것이지 앞세워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자기 비움이지 남을 비우게 하는 힘이 아닙니다.
비움(kenosis)의 신앙과 신학을 21세기 민중신학은 추상적으로 강조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자원으로 다듬어 내야 합니다. kenosis는 조직신학적 관념이 아니라 삶이요 실천이며 감동입니다. 생명흐름이기도 합니다. 이 흐름 속에서 우리는 이웃 종교의 진리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나를 비움으로 남을 채워주는 것, 그것이 우아하게 짐으로써 함께 멋지게 이기게 되는 평화의 그 역설적 힘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갈릴리 예수께서 몸소 보여주신 새 질서의 콘텐츠가 아닌가 합니다. 장자도, 묵자도, 맹자도, 붓다도 이 비움에서, 이 남 채움에서, 그리고 이 선순환에서 지적 담론으로만 아니라 실천의 삶 속에서 서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kenosis의 민중신학적 해석과 실천으로 한편으로는 한국 교회의 근본주의 문화도 혁파해내면서, 다른 한편 한국 사회와 국가의 권위주의 냉전문화도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한반도에서 타율적으로 억울하게 분열되었던 민족과 국가가 모두 평화롭게 하나 되는 길도 트일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민중신학이 분단된 21세기 한반도 상황에서 평화신학으로, 소통적 신학(이웃 종교와의 관계에서)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마치면서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새 시대가 오고 있음을 확실히 보지 못하고 소천하신 제1세대 민중신학자들 심원, 서남동 목사, 현영학 선생, 김관석 목사 등이 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앉아 계신다면, 제2세대, 제3세대 민중신학자들, 자기들의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척되는 과정에서 민중신학은 철저한 민주개혁 추진에도 도움주지 못했을 뿐만 아리라, 한국 교회가 값싼 승리주의에 도취되어 냉전근본주의를 강화하여 조국의 평화에 장애를 더욱 조성하는데도 그저 이것을 방관해 왔다고 나무랄 것 같습니다. 21세기에 역사와 구조의 창발적 주역으로 등장하는 줄씨알과도 소통하지 못하고 있음을 또한 안타깝게 개탄할 것 같습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까지의 그 동력을 상실하게 되었기에 안타깝지만 실용주의 선진화 정부가 들어선 뒤 줄씨알을 옛날 군사권위주의시대에 했던 것처럼 다시 옥죄려는 아주 최근의 움직임을 보고 지난날의 민중신학의 동력을 오늘의 줄씨알들과 힘을 모아 되살려 주기를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心園이 이 자리에 있다면 무슨 험한 말, 물론 애정 어린 거친 말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올지 궁금합니다. 정말 호된 욕을 먹더라도 심원의 그 천진난만한 얼굴을 여기서 다시 보고 싶습니다.
다만 끝으로 제가 한마디를 더 붙인다면 제2세대 민중신학은 오늘의 줄씨알과 창발적 소통을 하면서,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정보화 외곽에서 적빈(赤貧)으로 살아가는 비참한 밑바닥 인생이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갈릴리 예수께서 그토록 관심 가졌던 민중, 아직도 우리 가운데 소리 없이 존재하는 적빈의 오클로스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줄씨알과 힘을 합쳐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에 힘을 보태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예수의 축복을 받을 주인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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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사상 2009년 봄호(144집) 차례
신학사상 2008년 가을호(142집)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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