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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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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연 
 신학사상 2009년 ,겨울호(147집) 차례


이번 호에는
구약학에서 한신대 박경철 교수의 “12예언서 연구의 최근동향”이란 논문을 게재하였는데, 이 논문은 12예언서에 대한 통시적비평과 공시적비평방법의 서로 다른 방법론상의 차이가 최근 어떻게 진행되고 있으며, 현 12예언서를 한 권으로 보려는 시도에는 어떤 새로운 신학적 전망들을 보여 주는 지를 제기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조직신학에서는 감신대 이정배 교수의 “개신교 신학자가 본 김수환 추기경의 에큐메니칼 신학” 논문을 게재했는데, 김수환 추기경의 전집 18권에 나타난 그의 신학사상 및 교회관을 삼위 일체적 신관의 틀에서 조명한 것이다. 이 논문은 개신교 신학자가 가톨릭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사상을 연구한 최초의 것으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또한 김영관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의 “칼 바르트 신학의 한국에서의 수용과정에 관한 역사적 고찰”을 게재 했는데, 이 논문은 한국에서 바르트의 신학은 자유주의와 정통보수주의 사이에서 애매모호한 논쟁들을 야기하는 회색주의적인 사상이며 교회부흥과 신학교육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비신앙적인 사상으로 오해되고 왜곡되었는데, 칼 바르트가 한국에서 어떻게 배척되고 수용되었는지를 객관적이며 역사적인 관점에서 고찰-서술하였다.
그리고 감신대 강사인 이한영 박사의 “토착화 신학의 흐름과 재고- 윤성범, 변선환, 이정배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게재했는데, 이 논문은 감리교신학대학교 토착화신학자들의 사상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정리하고 평가하며 이를 토대로 소위 제 3세대토착화신학이 나아갈 방향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교회사 분야에서 정용석 이화여대 교수의 “피사의 크리스틴과 ‘여성에 대한 논쟁’”이란 논문은 피사의 크리스틴이 ‘장미의 사랑의 논쟁’을 통해 “장미의 사랑”에서 여성을 단지 유혹자로 묘사하고 저속한 용어를 통해 남성과 여성의 고유하고 자연스러운 기능을 훼손시키며, 그런 언어는 여성들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선구적으로 여성옹호와 여성정체성의 길을 연 것에 대한 사상적 평가를 다루고 있다.

종교철학에서 신은희 경희대 학부대학 교수의 “에크하르트와 이슬람 수피 루미의 신비주의 연구”는 에크하르트와 이슬람 수피 루미의 신비주의 연구를 통해 기독교와 이슬람 수피즘의 종교적 대화를 모색하는 글이다.

기독교상담학에서 최광현 한세대 교수는 “트라우마와 현상학적 목회상담”이란 논문에서 “밀양”영화를 통해 한 인간의 고통에 대해 기존의 치료적 가설과 의미체계가 갖는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현상학적 접근을 제시한다. 현상학적 접근에서의 트라우마 치료는 갈등과 문제에 놓여있는 내담자에게 갈등과 문제를 성찰하게 하며 트라우마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끈다.

목회상담학에서 손운산 이화여대 교수는 “수치심의 치료와 용서”라는 논문에서 지금까지의 용서에 대한 논의들은 피해입은 사람의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고려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용서를 의무나 덕목으로 강조하는 종교는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더 배려했으며, 용서를 인지적 재구성으로 보는 심리치료자들은 피해 입은 사람이 인지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피해자 상처는 피해자의 자아 전체를 흔들어 놓음으로 그를 수치스런 존재가 되게 한다. 수치스런 존재는 자신을 부족하고 무가치하고 불충분하다고 보기 때문에,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피해자의  수치심이 먼저 치료되지 않으면 심리적으로 건강하고 도덕적으로 정당한 용서가 힘들다.   수치심의 치료는 피해자를 그의 내적 및 긍정적 자원과 연결시켜 줌으로 그에게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 준다.

어느 덧 2009년도 다 지나가고 있다. 올 한해 우리나라는 세 분의 큰 지도자를 잃었다. 김수환 추기경, 노무현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은 우리사회에 비극적 충격을 남겼지만 세분 모두 민주적이고 양심적이고 평화적이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도록 하는 큰 깨우침의 지도력을 발휘했다.
연말이 되고 겨울이 되면 더욱 서민들의 생활이 힘들어지는데 정부는 서민정치를 표방하면서도 서민과는 동떨어진 세종시, 4대강 등 엉뚱한 토목공사형 정쟁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신학사상이 신학의 학문적 발전을 위한 전문 학술지이지만 전통적인 학문의 굴레를 벗어나서, 이것이 새로운 학문 연구방법이기도 한데, 우리 현실을 신학적으로 조망하고 적용하는 논문들이 새해에는 좀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독자들과 귀한 논문을 게재한 연구자들에게 성탄과 새해의 축복을 기원하며 더욱 신학사상을 사랑해주시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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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47집)              

   연구 논문
   박경철 ․ 12예언서 연구의 최근동향
   이정배 ․ 개신교 신학자가 본 김수환 추기경의 에큐메니칼 신학
   김영관 ․ 칼 바르트 신학의 한국에서의 수용과정에 관한 역사적 고찰
   이한영 ․ 토착화 신학의 흐름과 재고- 윤성범, 변선환, 이정배를 중심으로
   정용석 ․ 피사의 크리스틴과 ‘여성에 대한 논쟁’
   신은희 ․ 에크하르트와 이슬람 수피 루미의 신비주의 연구
   최광현 ․ 트라우마와 현상학적 목회상담
   손운산 ․ 수치심의 치료와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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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2010년 1월 출판예정

<교회와 신학의 역사 원전Ⅱ> 중세교회


Kirchen-und Theologiegeschichte in Quellen: Vol. II: Mittelalter
원문발췌, 원문번역 및 주석/ 아돌프 마르틴 리터, 베른하르트 로제(†), 폴커 렙핀
공성철 옮김

이 책은 총 5권의 시리즈로 이루어진 “교회와 신학의 역사 원전모음집(Kirchen-und Theologiegeschichte in Quellen)”중에서 2006년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출판된 제 1권 “고대교회”에 이어 제 2권인 “중세교회(Mittelalter)”편이다.
중세는 암흑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일원적인 시대(Universalis Ordo)여서 다루어야할 자료가 가장 많은 시대이다. 왜냐하면 “고대와 초기 중세는 기독교와 이슬람 뿐 아니라 고전 유대교의 형성시기”라고 본서의 편역자들이 말할 정도로 중세는 연구의 대상이 넓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연구대상으로는 호감을 갖지 못한 이 시대연구를 위해서 이 책에서는 약 250개의 다양한 자료들(공의회 문서, 조약, 비문, 편지, 전기, 교리적 논문 등)의 원문을 짧은 서론과 함께 제시하며 각주와 참고문헌 등도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신학자들의 연구와 저술 활동에 없어서는 안 될 한국에서는 “유일하다” 평할 수 있을만한 귀한 자료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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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1

                개신교 신학자가 본 김수환 추기경의 에큐메니칼 신학*

                                                                           이정배 (감신대 교수/조직신학)
요약
  

  본 논문은 김수환 추기경의 전집 18권에 나타난 그의 신학사상 및 교회관을 삼위 일체적 신관의 틀에서 조명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개신교 신학자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을 터,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간의 대화가 수면 하에서 진행되었다. 본 논문은 김수환 추기경의 신학적 관점이 2차 바티칸 정신에 근거해 있음을 밝히고 기독론의 관점에서는 청빈과 양심을, 성령론적 관점에서는 일치와 공동선 개념을 그리고 신론의 시각에서 그의 선교관과 토착화론을 살폈다. 이 모든 것이 서품시 그가 간직했던 추기경의 말 ‘너희와 모두를 위하여’ 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었다. 추기경의 신학은 현실적 개신교회가 감히 추종하지 못할 만한 급진성을 띠고 있으나 이 모든 것이 하느님과 교회 사랑으로부터 비롯한 것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개신교 신학자가 가톨릭의 수장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사상을 최초의 논문 형태로 연구한 것에 본 논문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주제어
2차 바티칸 공의회, 청빈, 양심, 일치, 공동선, 선교, 토착화, 삼위일체

*각주는 편집상 빠졌음*

들어가는 글

  살아생전 뿐 아니라 하느님 품에 안기시는 순간까지 백성 모두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으신 김수환 추기경의 사상과 고귀한 뜻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을 크나큰 영광이라 생각한다. 개신교 신학자인 필자에겐 쉽게 주어질 수 없는 사건으로서 은총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다. 평소 먼발치에서만 보았던 그 분의 족적을 책으로 대면하며 남긴 글들을 읽고 심정적으로 공감하며 감격했던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자화상을 ‘바보’로 그릴 수밖에 없었던 그분의 내면세계, 기독교 신앙을 접하면서 그가 붙잡았던 예수가 너무도 분명히 각인된다. 주지하듯 그분은 추기경 재임시절 한 나라 대통령이상으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지녔던 존재였다. 그런 그의 자화상이 ‘바보’였다는 것은 예수 강생 신비를 말해야만 이해가능하다. 하느님 되기를 포기했고 종의 모습으로 이 땅을 살았으며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바쳤던 예수야말로 그가 닮고 싶어 했던 바보였던 것이다. 그가 평생 우러러 보았던 마더 데레사 그리고 그를 낳아 사제의 길을 가게 한 어머니의 삶도 바보 예수를 닮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평소 사제들에게 시대가 달라진다 해도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본체로 자각하라는 한결같은 요구를 할 수 있었다. 그에게 추기경이란 직 역시 한국 사회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외적 방편이었을 뿐 결코 본질이 아니었다. 청빈을 종교인의 최고 가치로 여기며 섬기는 자로서 우리 역사와 교회 한 가운데 계셨던 분이란 표현이 더욱 적합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는 것은 단지 인품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추기경이란 권위를 갖고 제 2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실현시킨 추진력, 그로 인한 가톨릭교회의 변화,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한 공과를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가톨릭’(Catholic) 이란 말이 그러하듯 그는 ‘보편성’의 추구를 최상의 과제로 인식했다. 때론 그것이 일치란 말로, 혹은 공동선이란 개념으로 표현되었으나 언제든 그는 좌우를 아우르며 민족을 생각했고 종교들과 함께 아시아의 진정한 구원(복음화)을 염원했던 것이다. 가톨릭의 ‘자연법’ 정신에 근간을 둔 탓이겠으나 그의 선교론은 개신교의 경우와 탁월한 변별력을 들어냈다. 아시아의 종교를 기독교의 대척점으로 삼은 개신교와 달리 추기경은 그들을 복음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그들을 ‘향해 걷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걸으면서’ 하느님 신비가 그들에게도 나타나기를 기도했던 것이다. 토착화를 통해 아시아의 영성이 복음에 더 잘 언표 되기를 소망한 바 있다. 교회의 정치참여를 신학적으로 긍정하면서 복음화와 민주화를 이질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은 것도 가톨릭의 위상을 격상시킨 그분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민주화가 퇴행되는 역사적 시점마다 예외 없이 그분의 메시지는 선포되었다. 교회는 결코 ‘초월적인’ 것만 말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기 때문이다. 민주화를 위해 그는 강원용을 비롯한 개신교 목사들과도 협력했고 불교 스님들과의 깊은 우정도 쌓을 수 있었다. 우리 시대를 풍요롭게 했던 추기경의 소신은 그만이 지닐 수 있었던 ‘에큐메니칼 리더십’(Ecumenical leadership)의 덕이었다. 제 2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적 유산을 한국적으로 계승 발전시킨 그의 수고로 인해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한국사람 모두가 행복했다. 교리적 이유로 가톨릭교회에 부정적이었던 극 보수 개신교 학자들도 추기경의 삶과 죽음에 깊이 애도했고 경의를 표할 정도였다. 사목현장에 초점을 맞춘 보수 성향의 개신교 신학 잡지에서도 추기경의 삶과 죽음을 기리는 추모 특집이 마련되었고 개신교에 주는 의미를 다룬 적이 있었다. 그분의 선종이후 사회 곳곳에서 일어난 반응을 보며 청빈하며 균형 잡힌 지도자를 만나지 못한 개신교의 현실을 통탄하는 분위기도 없지 않았다.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는 강조하였으나 그와 구별되지 못한 개신교의 실상을 한국 사회 전반에 복음을 토착화시킨 추기경의 업적에 견줘 반성하는 노력도 있었다. 이는 모두 개인적으로 청빈, 겸손하였고 사회적으로 일치, 공동선을 지향한 보편(에큐메니칼)적 리더십의 산물이라 생각한다. 사제 서품이래로 그가 평생 간직했던 신앙적 좌우명이 ‘너희와 모두를 위하여’였음이 바로 이런 리더십의 자양분이었던 것이다.

  본고에서 필자는 추기경께서 남기신 18권의 전집과 그에 대한 몇 권의 자서전을 중심으로 김수환 추기경의 에큐메니칼 신학 사상을 정리해 볼 생각이다. 쓰여 진 글만으로 그 분의 사상을 이해한다는 것, 더욱 다른 풍토에 몸담고 있었던 개신교 신학자로서 추기경의 신학을 평가한다는 것이 무모한 일일 것이라는 두려움이 앞선다. 하지만 그동안 깊이 관계를 맺고 은혜를 입었던 가톨릭 내 여러 기관들-양성장 교육원, 시튼 연구원, 그리스도 사상연구소 그리고 서강대 종교신학 연구소 등-을 생각하며 감히 용기를 내었다. 본 논문은 다음의 네 단계를 통해 진행될 것이다. 첫째는 추기경의 에큐메니칼 신학의 전거인 제 2 바티칸 공의회의 유산을 살피고 이후 아시아 지역에서의 가톨릭과 개신교간의 상호 관계사를 정리할 생각이다. 둘째는 김수환 추기경의 에큐메니칼 신학의 개인적 차원으로서 ‘청빈’과 ‘양심’을 다루되 이들 개념을 그리스도론의 시각에서 조명할 것이다. 세째는 에큐메니칼 신학의 민족적 과제를 들어내는 두 개념, ‘일치’와 ‘공동선’을 신학적으로 성령론의 시각에서 살펴볼 작정이다. 넷째로는 에큐메니칼 신학의 아시아적 전개를 들어내는 표제어로 ‘토착화’와 ‘선교’를 생각해 보았고 이들 개념을 보편적 신론의 차원에서 설명할 것이다. 이를 위해 추기경의 소 논문 ’아시아 지역문화권에서 강조해야 할 복음의 원칙’이 도움이 되었다. 결론은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으로 대신 할 것이다.

1. 김수환 추기경의 에큐메니칼 신학의 전거-2차 바티칸 공의회의 수용과 아시아적 상황

  김수환 추기경께서 2차 바티칸 공의회 소식을 접한 것은 독일 뮌스터 대학교에서 유학하던 끝 무렵이었다. 당시 사회학 영역에서 ‘한국의 가족제도’에 관한 논문을 구상 중이었으나 지도교수인 요셉 회프너(J. Hoefner)의 주교직 임명으로 인해 그 길을 단념하던 시점이기도 했다. 1958년 교황 직에 오른 요한 23세는 본래 과도기적 지도자란 평가를 받았던 분이다. 고령 때문이기도 했으나 전임 교황에 비해 너무도 평범한 존재-소농의 아들-이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는 기존 관행을 깨고 세상과의 소통을 원했고 타종교와의 관계를 개혁하는 교회 상을 모색하였다. 그가 개최한 공의회는 일차적으로 가톨릭교회의 신앙적 변신을 목적했고 그를 토대로 나눠진 세계(공동체)를 일치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데 뜻이 있었다. 앞선 교황 피우스 12세가 세계대전 당시 종교지도자로서 한계를 느끼며 주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침묵했던 것에 비해 달라진 戰後 상황에서 그는 공산주의자들과도 접촉했고 이웃종교와 교회의 관계도 재정립했으며 평신도 사도직을 강조할 수 있었다. 초역사적 진리가 구체적 현실(상황) 속에 담길 때 일치에로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평화와 형제애로 하느님 백성 모두를 일치시키려 했던 그의 생각이 김수환 추기경의 삶 속에 각인된 공의회의 근본 정조(ethos)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요한 23세의 갑작스런 서거로 교황이 된 바오로 6세는 모두의 근심을 불식시키고 공의회의 추진력이 되어주었다. 그가 없었다면 교회개혁 자체가 성사되지 못할 정도로 바오로 6세는 요한 23세와 연속선상에 있었다. 사실 김수환 추기경이 공의회 정신을 앞장서 실천에 옮길 수 있었던 것도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한 바오로 6세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바오로 6세 역시 교황청의 개혁을 으뜸과제로 선정했으며 평화적 일치를 위해 마르크시즘과의 이념적 고리를 부정하지 않았다. 근대 노동세계에 깊은 관심을 갖고 가난한 자의 인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천명한 것도 그의 공헌이다. 아울러 제 3세계, 특별히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여 미사 집행 時 토착(지역)언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성찬식과 함께 ‘말씀’(성서)을 균형 있게 강조했다. 이는 유럽(로마)중심주의를 교회 스스로 해체시켰고 교회를 스스로 정화되어야 할 대상으로 고백한 대단한 사건이었다. 이런 선상에서 1974년의 교황 교서 ‘Evangelii nuntiandi’(복음 선포를 위하여)는 복음화와 발전, 교회적 구원과 정치적 해방이 결코 다른 사안이 아님을 천명했다. 이것은 교회가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세상을 위해 존재해야한다는 뜻이었고 세계의 고유성을 교회가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김수환 추기경의 영혼을 사로잡았던 것도 바로 이런 공의회 정신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오로 6세의 탈로마적, 탈교회적 의식은 그가 9번 이상 아시아 국가들을 방문했고 심지어 태평양의 섬나라까지 몸으로 경험한 결과였다. 연령과 건강상태로 보아 무리한 여정이었으나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수장으로서 유럽 밖의 세계를 철저히 보아야만 했다. 인종, 피부색, 정치사회적 제도, 경제적 수준 등 뭇 차이가 있지만 그들 모두의 평화를 위해선 정의가 급선무인 것을 확인했고 강론했다. 특별히 추기경이 속한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에 관심을 기울였고 아시아인의 언어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가톨릭 안에서 토착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 진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김수환 추기경은 긴 지면을 할애하여 바오로 6세의 아시아 방문의 의미를 다음처럼 정리했다. 아마도 그것은 아시아 지역의 추기경으로서 자신의 할 일을 재확인하는 절차였을 것이다. 우선 정치 수준의 저하로 인한 부정, 부패, 경제발전의 낙후로 생긴 가난, 빈부격차, 군부 독재로 인한 불안이 만연한 아시아적 현실을 직시하며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그리스도 평화를 위한 것이라 믿었다. 아시아 지역 내에서 소위 경제적, 군사적 강대국이라 자처하는 일본, 중국을 보며 세계의 구원과 몰락을 함께 가져올 수 있는 양가적 성격으로 이해하였다. 정의와 평화를 위협하는 정부와 독재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호소하는 것이 교황의 일이자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했다. 물론 독재정권과 투쟁하는 지역 교회들의 존재를 전적으로 옳다하지 않았으나 정권에 붙어 대중을 떠나있는 교회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특별히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의 경우가 그러했다. 독재와 교회가 짝을 이뤘고 민중이 교회에 등을 돌린 현실을 목도한 것이다. 하지만 교황은 반정부 시위에 나선 민중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비판은 하되 봉사의 마음을 함께 지니라 권면했고 교회를 향해선 하느님 사랑의 대변자, 인간 양심의 증인으로서 가난한 자들의 권익을 대변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것은 김수환 추기경의 뇌리에서 떠날 수 없는 평생 주제가 되었다. 한국 역시 정치와 종교의 관계, 곧 교회의 사회 참여를 심각하게 물어야 할 상황이 거듭 재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시아는 풍요한 정신적 유산을 지녔기에 미래적 가치가 넘치는 대륙이기도 했다. 오히려 물질문명의 폐해를 겪고 있는 기독교 서구를 위한 빛이 될 수 있는 정신적 보고임을 인정한 것이다. 풍요 속의 빈곤을 느끼는 서구를 본받지 말고 고유한 문화 전통에 자부심을 느끼라는 충언도 있었다. 비기독교인들, 유교는 물론이고 아시아의 회교도, 힌두교, 그리고 불교 등의 가치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그럴수록 부유한 서구국가는 아시아의 가난과 비민주화에 대한 공동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 교황과 추기경을 비롯한 아시아 주교들의 생각이었다.이는 오로지 모두 모든 이를 형제요 자매로 부르신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사랑의 실천 없이 세례만으로 구원되지 못한다는 새로운 가르침이 생겨난 것도 이런 연유에서 이다. 아시아의 빈곤과 풍요를 함께 경험한 교황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 이 한마디 말로써 종교, 신분의 차이를 넘어 아시아인 모두의 환영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종파적 우월감을 버리되 무차별적 동일화의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원하였다. 일치의 길의 험난함을 모르지 않는 현실주의적 접근이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강조점은 여전히 평화로의 일치를 위해 가톨릭을 비롯한 그리스도교가 감당해야할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데 있었다. 하여 교황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선포했고 추기경 역시도 이런 시각을 한국 사회에 적용할 수 있었다. “... 다른 종교도 자체의도가 어찌되든 그리스도의 길로 인도될 수 있다.” 이는 가시적 제도적 교회보다 더 본질적인 영적 공동체의 현존을 인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교황의 아시아 방문과 그로부터 생겨난 아시아 주교회의의 공식입장은 이 지역에서 앞서 활동하던 개신교 단체들과 공히 협력하는 관계를 만들어 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과 세계 기독교 교회 협의회(WCC)간의 에큐메니즘이 아시아 지역에서 성사된 것이다. 추기경은 친교, 봉사, 선교의 공동체로 교회를 규정한 WCC의 시각과 공의회의 교회관이 전혀 다른 것이 아님을 천명했다. 이들 모두에게는 보이는 교회보다 하느님 백성의 의미가 깊고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 세례보다 중요했고 전인적 인간 해방이 선교의 비젼으로 제시될 수 있었다. 1948년 시작된 WCC와 연계선상에서 개신교 내부에선 이미 아시아 기독교 협의회(CCA)란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 단체의 신학적 입장은 ‘예수가 교회의 주인만이 아니라 세상의 주인이기도 하다’는 말 속에 잘 들어난다. 아시아적 정황에서 선교를 그리스도의 사회적 책임과 연계시켜 이해했던 것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물로서 1972년 공식 출범된 아시아 주교회의 연맹(FABC) 역시 이런 신학적 기조를 의당 공유 했다. 가톨릭교회가 ‘그리스도의 일치’를 최우선 과제로 삼은 이상 세상의 평화를 위해 그리스도적 에큐메니즘을 필연적이라 여긴 것이다. “...세속적 에큐메니즘에 대한 우리의 공헌은 우리 스스로가 ‘기독교적 에큐메니즘’을 가지고 있는 가에 달려있다.” 하지만 협력하는 과정에서 상호 우선순위가 달라지기도 했다. 즉 가톨릭교회의 경우 교회일치를 위한 에큐메니칼 대화 보다는 종교간 대화에 무게 중심을 실었던 것이다. 아시아 주교회의 연맹은 교황청의 그리스도 일치협의회로부터 교회 간 에큐메닉스에 매진하라는 권고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아시아 종교문화와 가난 그리고 신구교간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가 CCA와 FABC 사이의 공동 의제가 된 것만은 틀림없다. 이들은 1987년 ‘아시아에서 다른 종교를 가진 형제자매와 함께 살며, 일하자’란 주제로 공동 협의회를 개최하였다. 소위 아시아 에큐메니칼 위원회(AEC)가 발족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함께 고백한 것은 ‘일치를 향한 행동이 신앙의 완전한 일치로 인도 한다‘는 말이었다. 이는 어떤 교리, 이론보다도 바른 실천만이 세상의 평화를 위한 지름길임을 역설한 것으로서 양자 간 협력의 중요성내지 긴박성을 역설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아시아 에큐메니칼 위원회는 에큐메니칼 대화를 위해 아시아 그리스도인 일치운동(AMCU:Asian Movement for Christian Unity)으로 발전해 나갔다. 홍콩 등 몇 차례의 모임을 통해 분열을 극복하려는 본 모임의 구체적 실천전략이 다음처럼 제시되었다. 상호 곡해된 역사 바로 세우기, 에큐메니칼 운동을 민중차원으로 저변 확대하기, 본 운동을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기구편성, 일치운동에 있어 교리적 난제 해결하기 등.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 개신교와 가톨릭 양측은 아시아의 사회현실, 곧 빈곤의 문제를 분석하여 신학적으로 성찰했고 아시아 영성과의 만남을 통해 보다 깊고 넓은 에큐메니즘의 본질과 대면할 수 있었다. 스리랑카의 가톨릭 신학자 A. 피어리스가 말대로 아시아의 빈곤(가난)과 넘치는 영성을 아시아 에큐메니칼 운동의 본질로 본 것이다. 이로써 아시아 에큐메니즘은 기독교 에큐메니즘을 넘어 제 종교들의 에큐메니즘, 곧 ’확대된 에큐메니즘‘으로 불려 질 수 있게 되었다. 서구적 종파적 기독교를 넘어선 아시아 교회의 모태가 된 것이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지 기독교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 보기에 김수환 추기경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 이웃 종교와의 대화 그리고 공동선 창출을 위한 교회 간 협력들 역시 강도에 있어 차이가 있긴 하나 이런 차원에서 생각될 사안들이다. 우리는 ’아시아 복음화를 위한 한국의 사명‘(1988),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아시아‘(1992) 그리고 ’아시아 선교‘(1997) 등의 논문들 속에서 이런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본 논문의 몇 구절을 소개함으로써 첫 장을 마감코자 한다. “우리는 그들(공자, 부처 그리고 노자)을 통해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께로 안내하는 스승으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살 때에 참으로 신자입니다. 형제적 사랑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사랑할 줄 알고 그 사랑으로 가난하고 버림받고 억눌린 이들을 가슴에 품을 줄 알 때입니다.“

2. 김수환 추기경의 에큐메니칼 신학의 개인적 출발점-청빈과 양심, 그 기독론적 의미

  보았듯이 김수환 추기경은 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아시아 및 한국에서 헌신적으로 수행코자 했다. 한국적 상황에서 그가 없었다면 한국 가톨릭교회의 쇄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교회를 개방했고 독재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민주화를 위해 살았고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일을 자신의 천직으로 알았던 존재였기에. 하지만 공의회 정신에 감격하여 자신을 그 일에 동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개인 및 가족사를 떠나서는 설명되기 어렵다. 1960-70년대를 살았던 사제들이 많았으나 그만큼 공의회 정신에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려 했던 존재를 찾기 어려운 까닭이다. 여기서 필자는 공의회 정신을 체화시킬 수 있었던 추기경의 개인적 역량을 ‘청빈’과 ‘양심’에서 찾았고 이를 그의 기독론적 고백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고 싶다. 한 사람의 종교적 성향은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는 법이다. 청빈과 양심은 가톨릭 수장으로서 으뜸가는 덕목이었다. 그것이 없었다면, 그런 지향성이 삶의 으뜸가치가 되지 못했다면 오늘의 추기경은 분명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추기경의 가족사와 인생의 고비마다 그가 선택한 결정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추기경은 알려진 대로 가톨릭교회가 자랑하는 순교자 집안의 후손이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가난한 아버지와 자신을 성직의 길로 인도한 어머니의 막내였다. 신앙을 이유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조부, 보현공의 이야기는 신앙심 깊은 홀로 남은 어머니를 통해 지속적으로 전수되었을 것이다. 옹기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던 집안의 형편은 늘 빈곤했고 가난은 숙명처럼 그의 어린 시절을 지배했다. 그의 기억 속에서 분명 청빈과 양심은 함께 굴러가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생각되었을 것이다. 신앙 양심을 지킨 순교자의 삶이 세대에 걸친 가난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겐 청빈의 중요성을 몸으로 익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이런 심성과 자질이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와의 만남을 어렵지 않게 했다. 동성학교 시절의 에피소드는 양심의 의미를 크게 부각시킨다. 당시 일제하에서 사감선생은 수신(修身)과목 시험 문제로 황국시민으로서의 소감을 물었었다. 이에 대한 어린 추기경의 답은 ‘황국시민이 아님으로 소감이 없음’ 이었다. 어린 학생의 입으로 쉽게 나올 수 있는 답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내면의 생각, 양심을 숨길 수 없었다. 이는 민족적 현실에 직면한 순교자 정신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이후 추기경의 삶에 있어 민족의 문제는 순교의 가치만큼 소중해 진다. 일본 상지대학 유학시절 성직자와 정치가의 길이 주어질 경우 민족을 위해 정치가도 될 수 있다는 고백이 바로 그것이다. 이후 해방을 맞아 사제의 길을 가면서 추기경은 민족의 문제를 고민하였고 그 해결책이 청빈과 양심에 있다고 믿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소박한 가치들을 영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가톨릭 사제로서 50년간을 봉직하면서 그는 청빈과 양심을 자신을 지탱하는 양축으로 삼았다.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와 엮어진 가치가 되었기에 이 둘은 결코 타협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었다. 청빈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향한 끊임없는 채근이었고 양심은 국가와 민족의 현실에 대한 책무의 표현이었다. 사제라면 누구라도 이 둘을 기초로 해야 한다는 것이 추기경의 확신이자 바램 이었던 것이다. 이후 펼쳐진 추기경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그의 기독론의 핵심부터 살피는 것이 좋을 듯하다. 추기경은 사제를 ‘쓰레기 통’에 비유한 적이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느님과 동등 됨을 포기하고 인간의 몸을 입고 겸비한 존재로 살았듯이 자신을 거듭 비워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추기경에게 그리스도는 영적 힘을 지녔음에도 영적인 권능을 추구해본 적이 없는 분이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결코 자명하지 않다. 존재론적 영광의 신학, 스콜라적 사변으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 개신교 신학자들 중에서 J. 몰트만과 D. 본회퍼의 신학을 좋아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삼위일체 신비를 사랑의 신비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오로지 아버지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겸비, 자기를 비우는 치열한 영적 가난의 산물이었다. 그렇기에 사제라면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라는 예수 말씀을 따라 청빈(가난), 곧 자기 비움을 복음적 영성으로 알고 이를 실천해야만 한다. 하느님으로 가득 채워지는 길, 곧 사랑의 실천은 이 방법밖에는 분명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 없이 無이며 하느님 과 함께 전부인 존재인 것이다.그가 불교의 무집착, 무소유를 귀하게 여긴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만족에 빠진 그리스도교의 실상을 심각하게 걱정했다. 복음적 청빈이 없다면 아시아의 가난을 말할 자격도 없다는 것이다. 그럴수록 자신에 대한 반성도 더한층 치열해 졌다. 추기경이란 직책 탓으로 가난한 사람과 삶을 나누며 살지 못하는 자신을 바리새인이라 명한 적도 수차례 있었다. 무거운 짐을 남에게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는(마 23:4) 존재가 되는 것을 가장 경계한 것이다. 강생의 신비에 근거, 추기경은 결국 사제직을 직업 아닌 삶으로 여기며 평생 다음의 신조를 따라 살았다고 하겠다. “청빈과 사랑은 그리스도 교회의 영광이요 증명이다.”

  추기경에게 있어 양심 또한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에 잇대어 생각해야 할 중요한 덕목이었다. 한 개신교 신학자는 그리스도의 강생신비를 ‘초월의 초월은 이 땅이다’라는 말로 풀어냈다. 이는 땅의 현실 이외에 어떤 다른 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찾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신학자 몰트만 역시 하느님 나라를 ‘가는’(피안) 곳이 아닌 ‘오는’(차안) 것으로 이해 한 바 있다. 그렇기에 세상 현실에 대해 거룩한 분노를 갖고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며 종교적 차원을 지닌다. 추기경에게 그것은 양심이란 말로 자주 언표 되곤 했다. 교회마저 불의한 권력에 침묵하던 시절에 강생 신비에 입각한 그의 사자후는 민족의 등불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양심의 문제는 교회의 정치 참여라는 민감한 사안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개인적인 수양덕목으로 축소되긴 했으나 본래 양심이란 ‘함께 안다,  ’더불어 인식 한다‘는 의미였다. 정치와 양심이 항시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렇기에 정치참여는 그에게 더불어 아는 일로서 열려진 교회의 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든 자기 비움, 곧 청빈을 전제로 할 때 역할 한다. 양심, 곧 자유한 영혼은 청빈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내적 청빈이 밖을 향해서 자유한 양심이 되고 책임적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법이다. 여기서 강생의 신비가 가톨릭적 세계관으로 재구성된 점에 주목해 본다. 본래 사회학을 공부한 학자로서 추기경은 기독론의 사회적 의미를 묻고 그를 기초로 세상을 전망했다. 인권과 에너지(물질)를 심각한 현실 문제로 인식한 그는 인간을 위한 정치, 인간을 위한 경제를 강변했다. 체제란 본래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눈 먼 자를 보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기 원했던 예수 강생의 목적과 다를 수 없다. 하지만 경제개발의 도상에서 억압된 노동자, 여성의 인권을 대변하는 몸짓을 불온시하는 교회현실을 목도했다. 사실 그간 추기경은 농민, 노동자 학생, 반공법 위반자들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왔다. 민주화를 위한 ’제물‘이 되자는 강론도 적지 않게 있었다.교회의 사회 참여를 부정하는 입장에 대한 그의 답변은 분명했다. 인간 존엄성을 복음화의 가치로 보지 못하고 인권 탄압에 침묵하는 비(非) 양심적 태도는 희랍 철학의 영육 이원론에 기초한 인간이해의 산물이란 것이다. 기독론이 달랐기에 인간이해 역시 근본적으로 같을 수 없었다. 비록 침묵이 강요되는 시기였으나 추기경은 사람을 고립시키는 침묵 자체를 양심에 어긋나는 일로 생각했다. 추기경 재임 동안 가장 후회되는 일로서 광주 민주 항쟁에 힘을 보태주지 못한 것을 꼽은 적이 있었다. 독재 정권의 방송장악으로 알권리를 빼앗긴 탓이기도 했으나 자신의 태도가 일종의 침묵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추기경에게 종교란 초월적인 것만이 아니었고 정치 행위 또한 구원사목과 다르지 않았으며 나아가 정치를 하느님 은총의 행위로 여겨졌다. 자연법, 사회 윤리에 어긋나는 정치를 향한 교회의 지적은 하느님의 일이란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법과 상치되는 정부라면 그것이 유신체제든 군부 독재든 간에 그들의 오류를 지적해야만 했다. 민중과 ’함께 인식‘ 하는 민주화(公的)과정을 만들어 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 상황에서 공의회 정신을 따르는 교회의 수장으로서 그가 감당해야 할 양심의 몫이었다. 그가 인혁당 사건의 은폐 조작을 파헤친 정의구현사제단을 지지했고 유신헌법을 앞장서 거부한 원주 교구의 지학순 주교를 존경하고 이해했던 일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교회의 수장으로서 종교가 행동주의의 오류로부터 자유롭기를 갈망한 것도 사실이다. 종교가 특정 정치 이념과 동일시되거나 영혼을 잃어버린 개혁가의 모습으로 타락하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보수화된 추기경의 모습을 읽기도 한다. 아무도 말하지 않을 때 말했던 추기경께서 누구도 말할 때 침묵한 것에 대한 비판도 함께 있다. 그러나 말할 때가 있으면 침묵할 때가 있다는 것이 首長의 고뇌이자 성서의 가르침 인 것을 헤아리는 것도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3.김수환 추기경의 에큐메니칼 신학의 민족적 과제-성령론적 시각에서 본 ‘일치’와 ‘공동선

  주지하듯 일제하의 추기경은 민족이 부른다면 사제의 길 대신 정치가도 될 수 있다는 생각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사제가 된 이상 당시에 품었던 민족 사랑을 교회적 방식을 통해 표현해야만 했다. 이를 혹자는 민족 사랑의 영적 승화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만난 해방된 조국 모습은 너무도 많은 구조적 모순을 갖고 있었다. 함석헌의 말대로 한밤의 도적처럼 임한 해방을 지키지 못하고 좌우로 갈려 싸우면서 6.25전쟁을 초래했고 남북 분단에 의거한 군사독재, 유신체제를 경험했으며 민주화 세력들의 난맥상은 물론 계층갈등, 지역갈등 나아가 남녀갈등의 총체적 모순의 집합체였던 것이다. 나아가 자기 세력화에 급급한 기독교 종파들 간의 갈등과 자본주의에 물든 종교들 사이의 반목 또한 정도를 넘어서 있었다. 전쟁이후 민족의 비극적 현실 속에서 사제 김수환은 부모 잃은 아이들, 굶주린 백성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에 동분서주했다. 외국 원조 기구로부터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상당한 자금을 받고 기뻐하던 그때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하지만 유학이후, 바티칸 공의회와 접목된 시점부터, 더욱 분명하게는 주교와 추기경직을 받은 시점부터 사회의 문제를 구조적 차원에서 보았고 그 해결을 위해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몰두했다. 공의회 정신에 누구보다 열려있었던 추기경은 먼저 교회의 내적 쇄신을 강조했다. 사회에 열려진 교회,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교회가 될 때 비로소 그리스도교는 온갖 갈등을 치유할 수 있고 공동선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바로 지난 장에서 말한 청빈과 양심이 교회의 내적 쇄신에 관한 것이었다면 일치와 공동선은 그를 바탕으로 일궈야 할 추기경의 민족적 과제인 셈이다. 여기서 필자는 탈(脫)민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진 시점에서 자연법에 기초한 추기경의 ‘민족’ 이해를 새롭게 의미지울 생각이다. 그러나 먼저 우리를 하나로 부르는 진리의 영, 성령의 시각에서 추기경의 일치에로의 노력, 공동선에 대한 열망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다음 말씀은 민족의 모순과 갈등을 치유코자 했던 추기경이 가장 많이 인용했던 본문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소서.”(요 17:11) 예수의 고별 설교로 알려진 이 본문은 보혜사 성령께서 하시는 역할이었다. 물론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은 사건자체가 성령의 일이었고 예수께서 세상의 가난(약한)한 자와 자신을 일치시킨 것 역시 성령이 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추기경은 예수 승천 후 남겨진 인간 존재들 간의 하나 됨 역시 성령의 役事로 인한 것이라 믿었다. 민족 내부에 정치적으로 풀 수 없는 갈등과 분리가 존재할 지라도 오순절 사건이 그랬듯 서로 ‘通’ 하는 현실이 올 것임을 확신한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 사건은 저절로 재현되지 않고 될 수도 없다. 그리스도의 영성체를 모시는 성찬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이유이다. “모든 인류가 성체안의 예수님을 통해 하나가 됨으로서 온 우주가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가 되어야 한다.” 성찬이 인종, 피부색, 사회 계급 등 일체의 차별을 넘어선 일치의 표증이요 구원의 신비라는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신비인 성찬은 항시 신앙인의 구체적 행위, 스스로 밥이 되는 실천을 요구할 뿐이다. 성찬에 참여함으로 평신도들 역시 예수의 힘으로, 예수처럼 살 수 있기 때문이다(요6;57). 추기경께서 세계 성체대회의 한국 개최(1989년)를 의미화한 것도 일치를 향한 실천력을 극대화하려는 목적에서였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앞서 보았듯 온갖 갈등의 집합체였다. 1990년 ‘정의, 평화 그리고 창조질서의 보전'(JPIC) 모임이 한국 서울에서 개최된 것도 실상은 한국을 보는 세계의 이런 평가 때문이었다. 추기경은 민주화의 위기, 빈부격차, 남북 대결, 환경파괴와 더불어 종교간 갈등마저 불거진 민족현실에 대해 교회적 차원의 고뇌를 하기 시작했다. 추기경에게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 모든 사람들 간의 일치의 표증‘ 이었기에 그만큼 단절된 조국 현실은 그에게 고통이었던 것이다. 우선 조국에 대한 일치열망은 남북 모두 7.4 공동선언 원칙에 충실할 것을 바라는 그의 마음에서 표현되었다. 분단 고착기간이 길었기에 통일이 난제이긴 하나 본 선언을 통해 남북관계가 대결에서 대화로 바꿨다고 믿은 것이다. 남북한이 외세에 의존치 않고 자주적 방식으로, 전쟁이 아닌 평화의 방식으로 통일을 이루자는 1972년의 본 선언을 추기경은 교회 입장에서 적극 지지했다. 물론 추기경은 이념으로서의 공산주의와 북한 정권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다. 종교말살이 시종일관된 그들의 정책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근자에 시작된 종파를 막론한 남북 종교인 간 교류도 그에게는 진실로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본주의 역시 기독교와 공존키 어려운 이념임을 천명했고 자본주의와 밀착된 교회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교회의 본질을 사랑으로 보았기에 굶주린 북한 동포에게 강력한 도움의 손길을 바랬다.이런 행위는 햇볕정책과 외형상 동일할 수 있어도 본질에 있어 같지 않다. 동족간의 일치문제는 성찬의 신비와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해로까지 소급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추기경이 바란 것은 한반도 남쪽에 사는 사람들 간의 평화와 일치였다. 다시말해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갈등해소, 인권보장을 더없이 요구한 것이다. 공산주의와의 열린 대화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이 남쪽 사람들 간의 화해와 안정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추기경은 오해를 무릅쓰고 때론 종교적 차원의 화해를 우선시 했다. 그렇기에 시국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도 필요했으나 민족의 일치를 위한 구도적 태도 역시 피하지 않았다. 주지하듯 광주 민중 항쟁에 대한 추기경의 소극적 입장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적지 않던 때가 있었다. 가해자 처벌 보다는 광주시민에게 용서를 구하는 입장을 천명했던 것이 바로 그 경우였다. 하지만 유교가 말한 ’時中‘의 시각에서 때에 맞는 종교인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추기경은 생각했다. 망국병으로 지목된 지역감정의 해소를 위해서 먼저 대통령 되고자 싸움하던 김영삼, 김대중 양자 간의 만남을 적극 요구한 것도 그 차원이다. 남한 사회의 심층적 갈등이 이들의 정치적 야망으로부터 야기되었음을 모르는 이 없다. 하지만 당시 추기경은 이들 중 한 사람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는 세간의 추측에 시달렸으나 한 순간도 그들 앞에 종교지도자의 본분을 어기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천명한 바 있다. 이는 모두 교회가 일치의 표상이며 성령이 일치를 향한 운동인 것을 믿었던 결과였다. 인간이 만든 일체의 장벽이 사라진 곳에 하느님 나라가 현존한다는 믿음이 바로 화해와 일치에 우선성을 둘 수 있게 한 동력이었다. 하지만 이런 화해가 청빈과 양심의 바탕에서만 가능한 것임은 두말 할 여지가 없다. 종교 간의 일치를 위한 노력 역시 추기경의 구체적 행보에서 너무도 잘 나타난다. 이는 공의회의 정신인 <비그리스교에 관한 선언>에 근거한 것이지만 자신에게 이웃 종교는 서구인들의 ’이론적 관심 그 이상이었다. 종교간 일치 역시 그에게는 세계 평화에 앞서 당면 민족의 문제였던 것이다. 개신교와의 관계에서 그는 몰트만과 본회퍼의 서적을 즐겨 읽었으며 WCC 관계자들을 수차례 만났고 강원용 목사와 크리스챤 아카데미 모임에서 친분을 쌓았다. 1990년 전 세계 개신교들의 모임인 JPIC 대회에서 환영사를 한 것도 의미 있는 일로 꼽힌다. 불교의 경우 법정 스님이 주관하는 길상사 개원식에 참석했고 불교방송과 수차례 인터뷰했으며 반면 유교학자로서 항일 독립 운동가인 김창숙 선생을 존경했고 정약용의 삶에 깊이 감동했으며 효 및 조상제사에 대한 깊은 이해로서 유교에 대한 관심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가톨릭 수장으로서 ’자신 속에 불교 및 유교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하기 어려운 말도 서슴지 않았다. 추기경이 즐겨 인용한 비(非)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는 다음처럼 정리 될 수 있다.  ’이웃 종교들은 저마다 인생의 신비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것으로서 어느 것도 홀로 정당하지 않기에 아무 것도 배척할 수 없는 바,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문화, 정신적 가치를 긍정하고 더불어 그것을 발전시킬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진리, 곧 공동선의 창출과정에 있어 이웃 종교가 그리스도교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선언이다. 배타주의라는 개신교의 일반적 정서에 비하면 이는 대단한 방향전환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양심의 명령에 따라 옳게 살고자 하는 사람도 구원될 수 있다는 자연신학의 길도 열어 놓았다. 따라서 이웃 종교인들과의 대화가 일방적 전도보다 하느님 뜻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이 추기경의 생각이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최종적인 교의, 구원을 보장하는 유일한 신조로 보고 이웃 종교를 폄하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한국 종교 문화 속에 감춰진 보화를 캐내는 것을 오히려 교회의 과제로 인식케 했다. 본 주제는 신학과 전례의 토착화의 문제로 전개될 사안이나 후술하겠고 여기서는 종교간 일치의 지향점, 곧 공동선(세계평화)을 ’민족‘의 문제와 함께 생각해 볼 것이다.

  본래 공동선이란 개념은 요한 23세의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에 근거, ‘국가 공권력과 국민의 관계’를 말하는 대목에서 언급되는 말이다. 이는 성령의 역할인 ‘일치’를 자연법적 언어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추기경은 국가 공권력(법)의 목적을 공동선으로 보며 그것이 목적인 한 공권력은 필요할 뿐더러 신적 기원을 지녔다고 확신한다.사회의 질서와 번영 그리고 평화를 위해서 공권력은 결코 부정될 수 없는 바, 그렇기에 공권력은 필요악이 아니라 필요선 곧 도덕적 힘을 지녔고 필히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국가(공권력)이해는 자연신학적 전통을 지닌 합목적적 神觀으로부터 가능한 일이다. 다음 글 속에는 개신교에 낯선 자연신학적 전통이 담겨있다. “공동선은 인간 본성과 밀접하게 부합되어 있으므로 공동선의 요소와 실현은 항시 인간 본성과 관련하여 고려해야한다.” 여기서 인간 본성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 곧 생존권, 인격 주체로서의 자유를 뜻하는 바, 이 또한 국가와 동일한 신적 기원설로 이해된다. 민족 간 특이성, 이질성이 있음에도 인간이란 동질성(평등) 자체가 존중 받아야 할 이유인 것이다. 국적과 인종을 떠나 ‘하나’가 되란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점에서 공동선은 성서적 ‘일치’의 구체적 표현이 된다. 따라서 신적 대행자인 공권력에 의거 정치 경제, 문화 일체는 오로지 인간 본성의 실현(공동선)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마땅하다. 정치 자체가 일종의 구원사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와 공동선이 분리되어 국가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가 역사상 비일비재했다. 국가지상주의가 되어 인간 본성을 손상시킬 때 교회는 공권력에 저항할 수밖에 없다. 추기경은 이점에서 해방신학의 입장을 십분 긍정했다. 물론 정치적 해방만을 신학적 해방으로 여기진 않았으나 마르크스 이념을 빌어 타락한 공권력에 저항하는 일 자체를 부정하지 않은 것이다. 주지하듯 추기경 역시도 이런 정황을 자신의 삶의 몫으로 알고 살았던 분이다. 그럼에도 그는 민족, 국가 개념을 부정할 수 없었다. 현실의 국가가 성서적 ‘일치’를 가시화시켜 공동선을 창출하는 주체라 여긴 것이다. 한 때 추기경은 함석헌의 예방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함석헌은 국가주의 폐해를 직시하고 ‘뜻’을 향한 민족주의의 脫走를 생각한 분이었다. 국가가 자민족의 공동선을 위해 타민족과의 전쟁해온 역사를 처절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타국과의 관계에 있어 국가는 결코 신적 출처를 지녔다고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다. 따라서 참된 세계 평화는 국가주의 철폐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더구나 다민족 사회로 전환되는 현실에서 민족과 국가를 앞세우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도 많다. 하지만 필자는 추기경과 함석헌의 생각이 피차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서로 강조점이 다를 뿐이지 두 분의 경우 민족/탈(脫)민족 간의 경계선상에서 고민한 분들이었다. 국가발전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유보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이들 모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공동선이 결코 국가와 민족에 한정된 개념일 수 없는 것 또한 자명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민족 역시 이들에게 부정될 수 없는 개념임에 틀림없다. 이점에서 추기경은 특수와 보편의 관계를 공존의 차원에서 이해했다. 외형적 일치를 표방하는 ‘세계화’가 민족과 국가를 초토화시키는 현실에서 양자를 공존의 틀로서 매개하는 입장은 참으로 신학적이다. 이들 역시 성서가 말하듯 ‘화해’의 차원에 있는 것이지 ‘초극(지양)’의 관계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4. 김수환 추기경의 에큐메니칼 신학의 아시아적 전개-하느님 이해에 근거한 토착화와 선교

   본 논문 첫 장에서 보았듯 추기경의 사상과 그에 따른 행동은 2차 공의회 이후 생겨난 아시아 주교협의회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추기경에게는 국가와 민족의 지평만 있지 않았고 아시아란 의미가 각인되어 있었다. 일제치하를 경험한 그로서 협소하게는 민족이 중요했으나 넓게는 아시아가 유럽중심의 기독교 서구와 대척되는 지점이었던 것이다. 그는 한국 및 아시아 교회가 자신의 문화와 동화된 가톨릭교회 이미지를 창출하지 못한 채 로마보다 더 로마적 가톨릭교회로 되는 것을 우려할 만큼 아시아성에 대한 자각을 너무도 분명히 갖고 있었다. 물론 가톨릭 수장으로서 그는 교황이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란 생각을 떨 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한국 교회가 로마에 종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예컨대 한국 교회가 지나칠 정도로 사도 중심적 교회가 되는 것을 거부했고 오히려 평신도의 역할과 여성의 종교성을 더 높이 평가하는 교회로 발전되기를 소망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생적 그리스도교 인을 배출한 한국, 위대한 순교자를 잉태한 우리 민족의 종교적 우수성을 유럽에 널리 소개할 것을 교회에게 주문할 수 있었다. 사도 역시도 세상이 ‘하나’되는 아름다움을 만들기 위한 존재인 바, 그들 역시 보편성과 함께 특수성의 존재임을 역설했다. 추기경에게 있어 ‘아시아성’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하나’가 되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조건이었던 것이다. 본 사안은 마지막 장의 주제로서 토착화와 선교의 중요성과 의미를 생각토록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보편성을 근거 짖는 神論의 빛에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주지하듯 가톨릭(Catholic)이란 말 속에는 ‘하나’와 ‘보편’(우주)라는 말이 핵심이다. 온갖 차이와 차별을 초월하여 온 우주를 품는 보편주의, 포괄주의가 가톨릭이란 말의 본뜻인 것이다.이런 보편주의는 자연신학(Analogia entis)전통을 이어온 가톨릭적 하느님 이해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신앙유비’(Analogia fidei)에 근거한 주류 개신교 신학에게는 대단히 낯선 개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경험 속에 종교적 차원이 있으며 종교 안에 하느님 지식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주도한 K. 라너의 말처럼 인간은 예외 없이 하느님 신비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결정적 자기계시가 개념화되기 이전에 이미 헤아릴 수 없는 신비가 인간이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환경으로서 현존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신비 경험에 따른 인간의 삶 자체를 신앙의 행위로서 명명한 바 있었다. 그렇기에 추기경은 그리스도 교리를 최종적으로 보고 이웃 종교를 폄하하는 일을 삼가라고 했다. 추기경의 다음의 말은 라너의 생각과 잘 이어져 있다. “어느 한 종교만이 우주와 인간, 그리고 절대자의 신비에 대한 대답과 하느님 창조질서를 깨트리는 사회악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 온다는 전제를 기초한 이전의 접근 방식은 건설적이지 않고 파괴적이었습니다.” 이런 하느님 이해가 있었기에 추기경은 타민족, 이웃 종교에 대해 부정적일 수 없었고 오히려 그들의 자리에서 하느님 신비를 이해할 것을 종용했다. 이는 또한 ‘신학 함’에 있어 서구 식민지화의 경향성을 탈피하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아시아에 있어 선교를 아시아 종교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걷는 일로 규정했던 것이다. 전례 및 신학 그리고 영성의 토착화란 바로 아시아 종교들과 ‘함께’ 걷는 과정의 산물이었다. 즉 토착화란 특수성을 통해 보편성에 이르고, 개체를 통해 전체성에 접할 수 있다는 가톨릭 신학의 신적 포괄주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신적 포괄주의에 입각하여 추기경은 민족을 넘어 아시아를 생각했고 아시아의 가난과 영성을 직시하며 토착화를 염원했으며 그 속에서 선교의미를 새롭게 물을 수 있었다. 아시아의 역사, 문화 그리고 종교를 더 많이 배우고 익히는 일을 예수를 그리스도로 아는 자신들의 과제라 여긴 것이다. 이는 예수를 통해 하느님 신비에 다가갈 수 없는 아시아인들의 인간적 경험에 먼저 마음을 열라는 뜻이었다. 달리 말하면 삶 속에 던져진 고난당하는 예수, 익명의 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것이다. 첫 장에서 말했듯 추기경이 아시아 천주교와의 연대를 모색한 것도 이런 문제의식의 발로라 생각된다. 하느님 안에서 아시아의 문화와 종교 그리고 가난의 현실을 올바로 포용(토착화)할 때 진정한 복음화, 곧 선교가 가능하다는 것이 일관된 추기경의 확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추기경은 공의회 정신에 따라 그리스도의 우주적 구원이 교회 안에 국한되지 않음을 천명했다. 아시아 종교들인 유불선 안에 이미 부정할 수 없는 영적 가치들이 내재함을 인정한 것이다. ‘下學而上達’을 중시하는 상향적 효(孝)의 종교인 유교와 하향적 방향을 지닌 계시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상호 보완적으로 보았고 양자 모두 인류 영성의 발전에 유익한 것으로 이해했다. 인간의 현세적 無常性을 가르치며 극기 및 마음의 해탈을 강조하는 불교에서 하느님의 활동하심을 느꼈으며 석굴암 불상을 보며 그 불멸의 가치에 자신의 넋을 빼앗겨 본 적도 있었다. 추기경에게 茶山은 유교와 기독교, 수행과 믿음을 조화시킨 전형적 예였고법정의 무소유는 자신의 청빈과 짝할 수 있는 숭고한 가치였던 것이다. 토착화를 말함에 있어 추기경이 염려한 것은 종교혼합주의였다. 그에게 토착화는 그리스도교 정체성의 상실이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풍성하게 하는 일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본래 토착화는 삶의 총체적 구조가 다른 낯선 두 지평간의 융합의 과정에서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혼합주의란 말 자체는 결코 부정적 일 수 없다. 단지 그것이 ‘종합적’(synthetischen) 혼합주의인가 아니면 '공생적'(symbiotischen) 혼합주의인가가 문제 일 뿐이다. 전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대표적 예이고 후자는 본래성을 유지하며 자신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경우라 하겠다. 추기경이 그리스도교 시각에서 후자의 입장을 택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 과정에선 추기경께서 말했듯 개종의 의미도 달라진다. 개종은 이전과의 완전한 단절, 결별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소망(구원)을 성숙케 하는 단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改宗을 ‘加宗’, 곧 경험의 축적이란 의미로 이해하는 학자도 있다. 개종의 의미를 이처럼 탈(脫)서구화 하며 토착화를 강조한 것은 가톨릭교회의 아픈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는 의지도 담겨져 있다. 토착 문화에 대한 무지로 인해 불필요한 순교자를 만들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교회가 자신의 성안에 은폐, 감금되는 어리석음을 벗기 위함이다. 추기경은 토착화 논의에 부정적인 집단을 사제들이라 꾸짖으며 분발을 촉구한 적도 있었다.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서 교회가 아직 주변에 머물고 있어 이들 역사의 진로를 바꾼 경험이 일천. 미흡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이다. 향후 아시아 지역 교회는 세상을 좀 더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을 사명으로 알 것을 촉구했다. 유물론적 공산주의는 물론 자본주의의 물신적 풍토에 의한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바꾸는데 전력투구 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아시아적으로 사고하고 아시아식으로 전례와 교리를 채택하려는 토착화 노력이다. 추기경은 아시아를 아시아적으로 사유하고 이해하는 것을 배우라고 권면했다. 아시아를 결코 서구인이 바라고 그리스도인이 바라는 방식으로 이해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최근 담론인 ‘오리엔탈리즘’을 脫하고자 하는 의지를 충분히 엿 볼 수 있다. 한국 문화를 연구하고 아시아의 정신적 유산을 배워 전례와 교리를 토착화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긴 시간이 걸릴지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 추기경의 생각이었다.

  이렇듯 토착화는 선교를 목적했다. 토착화 그 자체가 선교이긴 하지만 선교의 전략적 측면인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즉 토착화와 선교는 나뉠 수 있는 개념이 아닌 것이나 전자가 교회의 내적과제라면 후자는 교회의 외적사명이란 말이다. 추기경에게 선교, 무엇보다 아시아 지역 내 선교는 인간 해방이라 말로 요약된다. 교회로부터 예수를 해방시켜 그를 진정한 해방자로 만드는 것이 그의 선교관이었다. 정치적 해방도 초월의 의미를 담지하고 있음을 확신한 것이다. 물론 그에게는 전인적 해방이 중요했다. 하지만 정치적 후진성으로 억압되고 경제적 낙후로 고통을 받는 민중들의 정치경제적 해방 없이 전인적 구원은 실현 불가능하다. 인간은 영육으로 나눠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화와 가난의 문제가 그렇기에 선교의 핵심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로부터 추기경은 민주화의 제물이 될 것을 아시아 교회와 사제들에게 요구한 바 있다. 진정한 세계평화는 이들 아시아 민족들이 정신적 가치에 상응하는 정치적 현실을 이룰 때 출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엄성을 지키는 길만이 아시아에 만연된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다는 말도 추기경의 거듭된 생각이었다. 그가 수차 강조한 일치와 화합 그리고 공동선에 대한 주장도 이런 바탕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추기경은 아시아 선교는 예수의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는 말로 시작될 수 있다고 믿었다. 예수처럼 스스로 밥이 되는 행동만이 선교의 시작과 끝이라는 것이다. 간디가 지적했듯 아시아인들에게 그리스도가 복음이 되려면 그리스도와 닮은- 데레사 수녀와도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나는 길 밖에 없다. 이점에서 추기경은 한국 가톨릭교회에게 거는 기대가 대단했다. 유불선 종교를 공유했고 독재로부터 민주화를 지켜냈으며 경제 발전을 이뤘고 결코 적다 할 수없는 총인구 대비 그리스도인의 비율을 지닌 한국은 아시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스승, 맏형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시아 주교협의회에 관여한 이래로 추기경은 아시아가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을 한번 도 멈춘 적이 없었다. 아시아인들의 정신세계를 높이 평가했으나 그들의 현실적 고통에 연민하며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총체적 해방의 길을 선사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점에서 1988년 서울에서 열렸던 세계성체 대회는 한국 교회의 아시아적, 세계적 사명을 옳게 감당하기 위한 힘찬 몸짓이 되었다. 주지하듯 가톨릭교회에 있어 성체성사는 선교활동의 원천이요 정점이었다.‘전례헌장’에는 이 제사를 ‘자비의 성사, 일치의 표징, 사랑의 맺음’으로 명명한 바 있다. 일체의 은총이 흘러나오는 신앙과 구원의 신비라고도 했다. 성체를 모심으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는 성서의 증언(고전 10:16)이 이런 고백의 근거이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不二적 관계가 여기서 성립된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주제로 열린 서울 성체대회는 아시아 및 세계평화를 위해 그리스도처럼 되고, 살기위한 것이었다. 남북분단의 현실을 치유하고 아시아의 총체적 해방을 위한 한국 그리스도인의 책무를 다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해 추기경은 세계성체 대회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깊게 했다. 인습적 가치에 매몰되어 신앙을 내면화 시키지 못한 교회 구성원들에게 그리스도 신비를 각인시킬 기회로 삼은 것이다. 예수가 한 조각 빵이 되어 나눠졌듯 우리 몸 역시 세상을 위해 나눠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사를 통해 우리 몸이 예수의 몸이 되었음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론이 아닌 삶으로 고백하라는 것이다. 이런 각성을 성체성사의 일상화, 혹은 생활화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추기경은 성체성사적 일상사를 일컬어 '대조사회'(Kontrast Gesellshaft)라 하였다. 고통과 억압, 저항의 와중에서 그리스도와 한 몸 이룬 사람들이 펼치는 은총적 삶은 분명 세상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이다. 성체성사를 은총의 축제로 알고 ‘대조사회’를 만들어 갈 때 세상의 평화, 아시아의 해방 그리고 남북통일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대조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을 추기경은 본질적 의미에서 선교라 하였다. 이런 선교 이해는 사도바울을 환기시킨다. 다메섹 체험이후 유대인의 특권의식과 헬라인의 지혜(동일성 원리)를 비판했으나 바울은 다시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으로,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의 모습으로 살고자 했다. 비(非)기독교인들의 구원을 위해 자기의 정체성을 해체시킨 것이다. 필자는 이를 君子不器라는 논어의 말과 연결시켜 보았다. 자신을 특정 형태로 고착화 시키지 않을 때 모든 것을 담아 낼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세계 성체대회 역시 자신을 無化시킨 그리스도처럼 되는 존재양식, 곧 사랑을 선교의 본질로 삼고 있다. 성찬의 신비만이 복음화를 가능케 한다는 추기경의 성찰은 아시아 및 세계 평화를 위한 위대한 선교전략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바보가 되었기에 그는 진정으로 가톨릭교회의 수장만이 아니라 민족의 사제였고 憂患意識을 지닌 현명한 君子로 불려 졌던 것이다. 그의 서약대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us)’ 살았기 때문이다.

나가는 글

  이상에서 필자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신비에 입각하여 추기경의 에큐메니칼 신학을 부족한대로 정리해 보았다. 예수 강생 신비에 근거 청빈과 양심을 존중했으며 일치와 공동선의 창출을 성령의 役事로 이해했고 신적 보편성의 빛에서 토착화와 선교를 언급한 것이다. 추기경께서 이런 도식 하에 자신의 신학을 펼쳤는지는 확신이 없으나 조직신학자인 필자의 눈에는 상술한 구조로 추기경의 삶과 사상이 보여 졌다. 다소 무리한 점이 느껴졌으나 이렇듯 구조화 시키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 생각하며 글을 진척시켰다. 조국애를 영적으로 승화시켜 민족의 사제로서 살았던 그에게 교회는 정말 소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교회가 목적 자체 일 수 없다고 했다. 가시적 교회의 불완전함을 숨기지도 않았다. 못난 사람들, 죄인들의 집단이라고까지 말한 바 있었다. 교회밖에도 구원이 없지 않음을 소신을 갖고 전했다. 비가시적인 영적 교회가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가시적 교회의 자기완성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다. 세상을 위해 봉사하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교회를 완성시키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약자를 관심하고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의 노력도 그래서 생겼다. 이를 위해 신앙인 모두가 그리스도가 되고 교회가 되어야만 했다. 그가 주도했던 성체대회는 우리 몸을 빵이 되신 예수처럼 그렇게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 자리였다. 그래서 교회에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라는 말도 할 수 있었다. 토착화 역시도 봉사, 사회 참여만큼이나 그에게는 교회를 완성시키는 일 중 하나였다. 보편적 하나의 거룩한 교회가 되기 위해 하느님 신비에 참여하는 그들 방식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했다. 그는 이웃 종교에 대해 강제하는 가톨릭교회 수장이 아니었다. 그들을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항시 동반자라 생각했다. 자신과 같은 길을 가는 성직자들에게도 그리 하였다. 평신도 사제직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빵이 되신 예수의 삶을 사는 성찬의 삶에 있어 성직자/평신도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청빈의 삶을 살 때 사제는 오직 은총의 도구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닫힌 교회 문을 활짝 연 충실한 공의회 정신의 계승자, 실천자였다. 그로 인해 가톨릭교회는 개혁되었고 그 변화의 힘은 사회 곳곳에 파급되었다. 그래서  이런 에큐메니칼 지도자를 가졌던 지난 세월 동안 가톨릭교회는 물론 우리 민족 역시 행복했었다. 이제 누가 있어 그 역할을 지속할 것인지의 문제가 남아있다. 개신교 지도자들도 추기경을 큰 얼굴 삼아 자신의 자리에서 그가 남긴 족적을 이어가는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참고도서

『김수환 추기경 전집』, 전 18권,  김수환 추기경 전집 편찬위원회 2001.
구중서, 『김수환 추기경 평전』, 책 만드는 집 2009.
평화신문 엮음, 『김수환 추기경 이야기』, 평화방송 2005.
한국교회사연구소 엮음, 『김수환』, 천주교 서울 대교구 2001.
R. 코체 外, 『에큐메니칼 교회사』, 3권, 정용섭 역 한국신학연구소 2000.
나이난 코쉬, 『아시아 에큐메니칼 운동사』, 김동선/정명준 공역, 2004.
J. 몰트만, 『오시는 하나님』, 김균진 역 대한 기독교서회 2006
D.L. 미글리오리,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이정배 역 나단 출판사 1994
이정배, 『선한 벗들과 함께 신학하기』, 한들 출판사 2000.
김경재, 『해석학과 종교신학』, 한국신학연구소 1996.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전집 1권, 한길사 1986.
「기독교 사상」, 1981년 12월호 “김수환 추기경과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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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2

                       트라우마와 현상학적 목회상담
                                      
                                                      최광현 (한세대 교수/기독교상담학 )

요약

본 논문은 <밀양>영화에서 제시하고자 했던 여러 주제 중에 트라우마에 대한 해결적 접근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본 논문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한 인간의 고통에 대해 기존의 치료적 가설과 의미체계가 갖는 한계성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현상학적 접근을 제시한다. 현상학적 접근에서의 트라우마 치료는 갈등과 문제에 놓여있는 내담자에게 갈등과 문제를 성찰하게 하며 트라우마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끄는데 있다. 의미의 추구는 목회상담의 중요한 방식이었으며 이것은 현상학적 접근과 만나게 한다. 이것은 상담학과 목회상담의 거대한 방향을 이끌고 있는 환원주의적이고 결정론적인 치료모델에 대해 그들이 갖고 있는 결점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트라우마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은 목회상담 안에서 영혼 돌봄의 중요한 차원으로 사용되어 왔던 인간의 실존과 그 의미에 대해 치료적인 가치를 일깨워줄 수 있다. 상담사를 하나의 실존적인 상대자로 이해하는 현상학적 접근은 각자의 영혼이 각자의 실존적 개체성을 소유한다고 인식한다. 모든 인간의 실존은 서로 서로 실존적 의사소통을 하면서 상호주관적으로 엮어져 있다. 따라서 상담사-내담자의 실존적 소통을 통해 트라우마의 문제를 함께 풀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키워드: 목회상담, 현상학, 트라우마, 고통, 실존주의


*각주는 편집상 빠졌음*
      
                                            

1. 서론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산업 기계 시대로부터 후기 산업 정보화 시대로의 급속한 사회적 변화를 경험해왔다. 이러한 사회 환경의 변화 속에서 과거 이전 세대들이 겪었던 트라우마의 경험인 식민지배와 동족간의 참혹한 전쟁, 그 결과로 겪어야 했던 수많은 비극, 극심한 빈곤, 사회적 불안정성 등은 더 이상 오늘날 세대의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사회, 문화적, 정치적 환경의 변화와 진보 속에서도 인간에게 깊은 고통을 유발시키는 트라우마는 여전히 우리 시대 안에서 개인과, 가정, 집단과 공동체 안에  존재하며 이로써 우리로 하여금 극심한 스트레스와 고통을 겪게 한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트라우마로 인해 어떻게 한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체계와 의미체계가 송두리째 무너지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는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통한 심정 속에서 기독교 신앙인으로 믿음을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하려고 열심히 부흥회와 신앙 활동에 참여한다. 그녀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트라우마 치료방식인 용서를 통해 과거의 상처를 털어내려고 범인을 찾아간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범인은 죄책감 속에서 움츠리고 있기 보다는 얼굴이 밝았고 이미 하나님이 모든 죄를 용서했기 때문에 두 다리 뻗고 잘 자고 있다고 하면서 오히려 신애를 위로한다. 신애는 범인에게 용서할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충격을 받는다. 신앙에 의지해서 트라우마의 고통을 회복하려던 신애는 혼란에 빠진다. 여기서 트라우마를 유발한 가해자를 용서함으로써 회복될 수 있다는 치유모델의 중대한 모순에 직면하였다. 가해자를 용서해주는 것은 피해자의 몫이어야 하는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미 하나님이 다 용서를 해버렸다는 현실에 직면한다. 여기서 트라우마의 피해자인 신애는 어디에서도 자신의 처지와 고통을 위로 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마저도 마찬가지이라는 절망에 빠진다. 신애는 실망과 절망감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분노를 드러내며 이탈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쯤에서 과연 하나님은 인간의 트라우마를 회복시키시고 트라우마의 고통에서 구원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는 사회, 문화, 신학적으로 다양한 복합적인 논쟁의 주제를 제공한다. 그러한 주제 중에 하나가 인간의 고통에 대한 기독교의 그리고 목회상담의 전통적 의미체계가 과연,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고통의 문제에 대해, 트라우마의 고통에 대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 할 수 있다. 이러한 질문은 실존적, 신학적, 영혼 돌봄의 주제 속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
본 논문은 트라우마의 주제를 다루면서 목회상담 속에서의 트라우마의 의미와 치료적 접근의 방법은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트라우마와 관련된 질문을 풀어가고자 한다. 본 논문에서 트라우마의 피해자를 바라보는 전제는 인간 실존은 마치 죽음이 자신의 고유 영역인 것처럼,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의 삶이라는 인식이다. 따라서 트라우마에 대한 치료에 대해 고정된 가설을 가지고 트라우마를 설명하려는 실증적, 환원주의적 접근이 아닌, 현상학적 접근을 통해 내담자 스스로 자신의 삶의 고통에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치료적 가능성을 제시하려고 한다. 또한 트라우마의 경험을 현상학적 관점 속에서 살펴보면서 현상학적 목회상담이 무엇이며 현상학적 치료적 가능성을 사례를 통해 서술할 것이다.

2. 트라우마란 무엇인가

1) 트라우마의 진단적 특징

트라우마(trauma)는 그리스어로 상처라는 뜻을 가졌는데, 외상, 쇼크 또는 큰 상처를 남기는 사건 후의 정신적 상처 등을 설명하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트라우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의 측면에서 다루어져 왔다. 이 때 외상은 일종의 정신적인 충격으로 정의되며, 이 외상에 따라 나타나는 여러 가지 정신적, 신체적인 증상들을 총체적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부른다. DSM-IV에 의하면 PTSD는 불안장애의 하나로 분류하고 있는데, PTSD의 특징은 “극심한 외상성 스트레스 사건에 노출된 후 뒤따라서 특징적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DSM-IV에 의하면 PTSD을 유발하는 주요한 사건들은 죽음이나 심각한 상해, 개인의 신체적 안녕을 위협하는 사건, 신체건강을 위협하는 사건의 목격, 가족이나 친지의 예기치 못한 죽음이나 상해 등이 있다. 이러한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극심한 공포, 두려움, 무력감이 일어나야 한다. 극심한 외상에 노출된 후 그 사건을 지속적으로 재 경험하고, 그 사건과 관련된 자극을 지속적으로 회피하고 일반적으로 반응이 마비되고, 각성 상태가 증가되는 지속적인 증상이 있다. 이러한 양상이 1개월 이상 나타나고, 사회적, 직업적, 기타 중요한 기능 영역에서 임상적으로 심각한 고통이나 장애를 초래하게 된다.

2) 트라우마의 심리사회적 이해

성격이론들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온 트라우마에 대한 연구이론들은 19세기 말 프랑스의 신경학자인 Jean-Martin Charcot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극심한 불안, 두려움, 기억상실, 정서적 흥분 같은 증상을 특징으로 하는 히스테리(hysteria)를 연구하면서 히스테리의 원인이 신경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심리학적인 것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시대 속에서 Pierre Janet 역시 히스테리를 연구하면서 원인이 심리적 충격, 즉 정신적 트라우마의 결과에 의해서 생긴다고 보았다. 그의 견해는 당시에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오늘날 현대 트라우마 연구에 널리 수용되어 기초 토대를 이루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Freud는 빈(Wien)의 여성을 대상으로 히스테리가 거의 대부분 성적 학대와 같은 트라우마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히스테리(hysteria)의 라틴어는 자궁을 뜻하는 말로서 결국 이 증상은 여성에게만 나타나는 심리적 장애로 여겨졌다. Freud는 1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서 그의 주장을 철회하였다. 그가 분석한 여성들이 일관되게 성적 학대를 언급했는데, 그는 빈의 상류층 남성들이 자기 딸을 근친상간할 수는 없을 거라고 확신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Freud는 여성들이 자기 아버지와의 성적 관계를 실제가 아닌 상상을 통해 꾸며낸 거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그의 이론의 핵심인 외디푸스 콤플렉스(Ödipus Komplex)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Herman은 Freud가 히스테리증상을 보이는 여성들은 실제적 트라우마로 인한 결과가 아닌 그들 자신들의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지적한다. Freud는“안타깝게 가해자 대신 피해자를 비난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Herman은 Freud가 여성의 트라우마를 거부한 히스테리이론에서 정신분석을 창설하였다고 말한다.  트라우마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계기는 1차, 2차 세계대전이다. 전쟁 중에 수많은 군인들이 신체적으로 아무런 증상이 없는데도 히스테리와 유사한 증상을 가졌다. 탄환충격(shell shock)이라고 불린 이 증상은 정신적으로 약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극심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은 누구나 일으킬 수 있는 증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오늘날의 연구자들은 Pierre Janet의 주장을 기초로 모든 형태의 정신적 트라우마, 즉 전쟁, 자연재해, 폭력, 성적 학대든 상관없이 사람에게 정서적, 신체적 증상을 유발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스트레스 증상이 지속되면 PTSD에 이를 수 있다. Green은 트라우마와 PTSD에 관한 연구를 통해 극단적인 스트레스 사건에 노출된 사람들의 약 25%가 PTSD를 보인다고 말하였다. 최근에 트라우마 연구는 복합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complex PTSD)로 발전되고 있다. complex PTSD의 개념은 아직 학계에서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최근 트라우마 연구가들 사이에서 통용되고 있으며 앞으로 발전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Herman이 처음 언급한 이 장애는 극심한 스트레스 장애(Disorders of Extreme Stress: DESNOS)라고도 부르는데, 하나의 트라우마를 경험한 일반적인 PTSD가 아닌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트라우마의 피해자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으로 복잡하고 광범위한 증상을 보인다. 최근의 트라우마 연구는 이러한 반복적인 트라우마의 경험에서 비롯된 다양한 증상과 그로 인해 형성된 인격의 왜곡을 PTSD이라고 진단하기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DSM-IV에서 조차 아직 명명되지 않은 장애이지만 트라우마로 인해 보다 극심한 고통을 갖는 피해자를 complex PTSD로 분류한다. Herman에 의하면, complex PTSD는 어린 시절부터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학대를 경험한 피해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반복적인 학대의 경험은 피해 아동의 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아동은 성장 과정에서 매우 다양한 증상들을 보이게 되며,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그러한 증상들이 아주 견고해져서 마치 인격적 특징처럼 보이게 된다.

3) 트라우마에 대한 선행연구

트라우마에 대한 국내 연구는 매우 방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청소년의 학교폭력에 의한 트라우마 연구, 새터민의 외상경험, 성폭력과 성매매와 관련된 외상경험,등에 대한 트라우마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목회상담의 영역 속에서의 트라우마에 대한 연구는 먼저, 황헌영의 “전쟁관련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정신분석”이 있다. 여기서 연구자는 대상관계적 접근을 통해 트라우마에 대한 치료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생략........)




신학사상 2010년 봄호(148집) 차례
신학사상 2009년 가을호(146집)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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