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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연 
 신학사상 2010년 봄호(148집) 차례



이번 호에는

구약학 분야에서 김래용 협성대 교수의 “에스라서 1-6장의 아람어 서신들의 특징과 역할”의 논문을 게재했는데, 이 논문은 에스라서 1-6장에 나타나는 네 개의 아람어 서신들(스 4:8-16; 4:17-22; 5:7-17; 6:6-12)의 내용과 구조를 연구하여 그것들의 특징을 찾음과 동시에 스 1-6장 안에서 그것들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 밝히려고 했다.

조직신학 분야에서 세편의 논문을 게재했는데, 한신대 류장현 교수의 “다문화사회의 떠돌이 민중에 대한 신학적 이해”라는 논문은 다문화사회가 된 한국사회에서 이주노동자, 국제결혼을 한 여성과 성매매 여성들을 게르와 관련해서 떠돌이 민중으로 정의하고 그들의 고통당하는 삶의 현실과 지금까지 논의된 다문화사회의 떠돌이 민중에 대한 이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역사와 구원과 선교의 주체라는 사실을 논증하였다.
한남대 이문균 교수의 “계시론적 삼위일체론과 존재론적 삼위일체론-바르트와 지지울라스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계시론적으로 접근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과 존재론적으로 접근한 지지울라스의 삼위일체론을 비교하고 분석하였다.
최영 박사(한신대 강사)의 “칭의와 치유”라는 논문은 칼 바르트의 칭의론의 핵심을 살펴보고, 이어서 칭의의 사회적 측면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새로운 칭의 이해를 통하여 이 칭의론이 어떻게 세계를 향한 선교적 선포의 주된 내용으로 새롭게 해석되고 목회현장에 치유의 복음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기독교윤리 분야에서 조용훈 한남대 교수는 “한국 기독교 생태공동체운동의 현황과 미래적 과제”라는 논문에서 우리나라 기독교 생태공동체운동의 발전을 위한 신학적 토대로 생태신학, 공동체신학 그리고 생태학적 영성과 노동신학에서 분석하고 5가지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기독교상담학 분야에서 정연득 서울여대 교수는 “역설과 역동: 혼돈시대의 가족상담을 위한 목회신학”이라는 논문에서 ‘역설과 역동’이라는 주제를 통해 혼돈에 빠진 가족과 그들을 돕는 상담자들을 위한 목회신학적 전망을 제시한다. 오늘날 가족이 처한 혼돈의 상황 이면에는 다양한 국면의 ‘역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이 역설은 더욱 깊은 혼돈으로 우리를 밀어 넣을 수도 있고, 반대로 역동적인 삶의 기초가 되기도 하기에 정연득 교수는 개인과 가족의 삶의 역설과 역동을 실천신학자들의 주장하는 비판적 가족주의와 알리스테어 맥페디언의 신학적 인간학에서 새로운 가족상담의 길을 제시한다.

교회사 분야에서 권진호 박사(목원대강사)는 “루터의 고난주간과 부활주간 설교의 핵심주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라는 논문에서 루터가 1530년까지 행해진 고난주간 및 부활주간 설교 가운데 84편이 전해졌는데, 설교 횟수와 분량, 설교에 대한 신학에서 볼 때 설교자로서의 루터는 종교개혁자, 교수, 작가로서의 루터보다 더 중요성을 지닌다고 인식하고 고난주간과 부활주간에 행한 설교를 연구하여 설교가 루터의 행적과 설교된 신학을 제시하고자 했다.

기독교교육 분야에서 김성은 서울신대 교수는 “분단된 한반도를 위한  기독교 민족역사교육의 문제”라는 논문에서 올해 한일강제합병 100주년, 6.25 60주년이란 역사적 의미와 요구에 따라 한국기독교교육의 현재와 미래를 성찰해 민족적 슬픔이요 불행인 분단극복을 위해 기독교교육이 어떻게 공헌 할 것인가를 고찰한다. 기독교교육이 한반도 내의 남한과 북한, 보수와 진보 간의 반목과 불신, 증오를 넘어서는 화해와 용서, 상호이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새로운 역사를 위해 어떻게 노력해야만 할 것인가 고찰하고 분단된 한반도의 기독교 내부의 배타성과 혼란한 역사인식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여 새로운 평화교육 패러다임을 제안한다.

2010, 올해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 합방한 100년이 되고, 6.25전쟁 60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신학인으로 이 역사적 사건과 그 사건의 과정에서 당한 희생, 고통, 그리고 원한과 증오, 역사적 죄과에 대한 책임 등 다시 조명하며 성찰하고 풀어야하고 화해하고 용서해야 하는 많은 과제를 안게 되었다.
우리가 이 사건들을 어떻게 신학화 하느냐에 따라 한국교회와 신학이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이다.
또한 한국과 일본 간에, 남한과 북한 간에 과거를 넘어 미래를 열어 가는 화해와 평화의 관계를 구축하는 역사적 과제도 우리의 몫으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한 해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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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48집)              

연구 논문
김래용 ․ 에스라서 1-6장의 아람어 서신들의 특징과 역할
류장현 ․ 다문화사회의 떠돌이 민중에 대한 신학적 이해
이문균 ․ 계시론적 삼위일체론과 존재론적 삼위일체론
            -바르트와 지지울라스를 중심으로
최  영 ․ 칭의와 치유
조용훈 ․ 한국 기독교 생태공동체운동의 현황과 미래적 과제
정연득 ․ 역설과 역동- 혼돈시대의 가족상담을 위한 목회신학
권진호 ․ 루터의 고난주간과 부활주간 설교의 핵심주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
김성은 ․ 분단된 한반도를 위한 기독교 민족역사교육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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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1
-편집상 각주 생략함

루터의 고난주간과 부활주간 설교의 핵심주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


                                                                                        권진호(목원대/교회사)

요약

이 논문은 루터가 고난주간과 부활주간에 행한 설교를 연구하여 설교가 루터의 행적과 설교된 신학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1530년까지 행해진 고난주간 및 부활주간 설교 가운데 84편이 전해졌는데, 설교 횟수와 분량, 설교에 대한 신학에서 볼 때 설교자로서의 루터는 종교개혁자, 교수, 작가로서의 루터보다 더 중요성을 지닌다. 설교는 본질상 설교된 상황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루터의 설교를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설교의 배경과 계기들이 연구되어야 한다. 여기서 루터의 설교는 무엇보다도 교회회중에게 맞춰진 설교요 복음에 거스르는 당시 많은 잘못된 가르침을 비판하며 싸우는 설교였음을 알 수 있다.
루터가 고난주간과 부활주간에 행한 설교의 핵심 주제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이다. 이것은 두 의미를 지니는데, 먼저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어야 할 ‘성례로서의 그리스도’로서, 믿음으로 우리는 칭의 되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다음으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뒤쫓아 가고 본 받아야 할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이다. 이 두 가지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분리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이라는 한 구절로 루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복음과 바른 설교를 요약한다.

주제어: 루터, 설교, 고난설교, 부활설교,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


1. 들어가는 말: 루터의 설교에 관한 연구

   종교개혁가 루터는 1502년에 세워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1512년부터 성서를 강해하는 교수(lectura in biblia)로서 활동하였다. 이 일에는 성서를 주석하는 강의와 토론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러한 교수로서의 루터보다 더 중요하고 큰 역할을 한 것은 설교자로서의 루터이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설교(하나님의 말씀)는 종교 개혁적인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고 종교개혁의 기초를 닦는데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루터는 또한 이 설교가 구원을 중개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는데, 이는 말씀이 바로 설교에서 현재화되며 구체화되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을 믿음으로 독려하고 인도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터는 설교의 의미를 성경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중시했다. 이는 설교를 구원의 수단으로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가장 권위 있는 바이마르 루터전집(Weimarer Ausgabe: WA) 120권 중, 37권에 루터의 설교가 실려 있고, 그 중 다시 18권이 모두 설교만을 싣고 있음은 루터에게 설교의 비중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다음 그림은 루터가 평생 설교했던 비텐베르크 시립교회의 강단에 있는 것으로서, 1547년 크라나흐(Lucas Cranach d. Ä. 1472-1553)가 설치한 소위 크라나흐 제단이다. 여기에 있는 네 개의 그림은 종교개혁 사상에 근거한 기독교 교회의 본질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세례가 이루어지는 곳에, 공동체가 성만찬을 위해 모이는 곳에, 회개와 죄 사함이 약속되는 곳에 교회가 존재함을 의미한다(루터가 인정한 성례!).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사랑을 설교하기 위한 것이다. 그림 중 가운데 밑에 있는 그림은 강단에 서서 모인 회중에게 ‘십자가의 말씀’을 선포하는 루터를 묘사하고 있다. 그의 한 손은 성경위에, 다른 한 손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루터는 설교란 예수를 선포하는 것, 특히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일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 십자가는 맨 중앙에 놓여 있다. 이것은 교회란 무엇이고, 교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 가에 대한 내용과 근거가 된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마지막이 아니다. 예수님 허리에 두르신 천이 펄럭이고 있는 것은, 그 분이 살아나시고 지금도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제단 그림을 통해서 예배와 교회의 중심은 설교이며, 종교개혁자 루터의 삶 가운데 역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설교임을 알 수 있다.

   루터 연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루터의 설교에 대해서 이미 많은 것들이 말해지고 저술되었음을 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설교 연구는 우리에게 전해진 설교의 양과 중요성에서 본다면, 아직도 미개척 분야에 속한다. 뮌스터대학 교수이며 루터학자인 보이텔(A. Beutel)이 말한 것처럼, 루터 설교에 대해 지금까지 이루어진 대부분의 연구들은 ‘이상할 정도로 비생산적이고 추상적’이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단지 “일반적인 관찰들을 용의주도하게 늘어놓고, 종교개혁가의 무진장한 설교 보고로부터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구절들을 곁들임으로써”, 몇몇 중요한 설교를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소홀히 다루어지고, 구체적인 것은 매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설교 역사에서처럼 물론 루터 설교의 연구에도 어려움이 있다. 설교란 공적인 종교적 담화라고 할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설교는 루터가 비텐베르크 시립교회에서 행한 설교에 대한 ‘간접적인 자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좋은 자료는 기껏해야 루터 자신의 설교원고인데, 그것은 아쉽게도 하나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루터 스스로 몇몇 설교를 인쇄하여 출판했지만, 오늘날 전해진 루터 설교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자료는, 루터가 설교할 때 강단 아래에서 청중이 받아 적은 필사본이다. 그 중 가장 신뢰할만하고 중요한 필사본은 뢰러(Rörer)의 것이다. 뢰러는 필사본을 통해 루터의 설교를 전달해 줌으로써 종교개혁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의 설교 필사본은 라틴어와 근세초기 독일어가 혼합되어 있다. 특히 라틴어로 된 부분이 많은데, 이것은 루터가 라틴어로 설교하였기 때문이 아니라(루터는 독일어로 설교했다!), 필사자 때문이다. 당시 라틴어가 독일어보다 속기체제를 더 잘 갖추고 있어서 뢰러는 자신의 필사본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약어를 만들어 사용함으로써, 루터의 설교를 가능한 한 그대로 정확하게 받아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뢰러 덕분에 우리는 루터가 실제 행한 설교들의 상당 부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뢰러의 필사본에는 이해하기 힘든 문장들이 포함되어 있고, 생략도 많이 이루어졌다. 때문에 다른 필사본과, 뢰러의 필사본을 편집해서 인쇄한 설교들을 참고하여야 루터설교를 더 정확하게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루터 설교의 연구는 루터가 강단에서 행한 ‘설교’에 대한 연구라기보다는, 현재 우리 앞에 놓여있는 ‘문서로 된’ 루터 설교의 연구라고 볼 수 있다. 설교의 신학적 자기이해에 근거해 루터 설교를 연구하려고 한다면, 설교가 직, 간접적으로 교회와 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한 다양한 증언들을 토대로 자료를 더 보충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루터 설교의 연구는 크게 세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설교학적 관점(실천신학 분야)에서 루터의 ‘설교 방법’에 대한 연구이며, 두 번째는 교리적, 조직적 관점(조직신학 분야)에서 루터의 ‘설교 내용’에 대한 연구이다. 세 번째는 설교의 전승과 역사적 배경에 관한 연구(교회사 분야)이다. 그 외에도 설교자 루터와 루터 설교의 의의에 대한 연구가 있고, 설교에 대한 해석학적, 수사학적 연구도 이루어졌다.  
   80년대, 루터 설교의 연구에서 가장 논란을 일으킨 연구는 아젠도르프(U. Asendorf)의 『루터 설교의 신학』이다. 그는 루터의 바이마르 전집(120여권)가운데 삼분의 일이나 차지하는 루터의 설교에 대해 지금까지 요약해 놓은 연구가 없음에 놀라, 루터 연구의 공백을 메우고자 시도 했다. 방대한 루터의 설교와 참고 문헌을 섭렵한 그의 노력은 그야말로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연구 방법, 즉 루터 설교의 여러 전승 자료에 대한 신뢰성을 검증 없이 자료들을 인용한 것과, 루터가 설교한 교회의 구체적인 상황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점, 그리고 루터 설교들을 단순히 나열식으로 서술했다는 점들이 비판 대상이 되었다.  
   루터의 설교가 루터 연구에 있어서 미개척 분야라고 하는 것은, 루터가 행한 설교 3000여 편 중 전승된 2000여 편이나 되는 설교의 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된 양이 적기 때문이고, 또한 개별적인 설교에 대한 연구도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연구 대상이 된 설교는 창세기 설교, 고린도전서 15장 설교, 1522-1523년에 행해진 설교, 1522년에 행해진 7편의 수난에 대한 설교, 부활절 설교, 교리문답 설교 등에 불과하다.
   루터의 많은 설교가운데 필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하는 절기설교, 즉 고난주간과 부활주간 설교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뢰뵈니히(Loewenich)는 “루터의 모든 신학의 원칙은 십자가 신학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주장했지만, 사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칭의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의 맥락에 있기 때문이다. 루터가 설교에서 자주 인용한 로마서 4장 25절 자체에서도 십자가와 부활의 일치를 말하고 있다. 인간의 구원 관점에서도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완성으로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절기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절기 가운데 하나이며 교회력의 절정이다.
   루터는 설교의 직무를 떠맡은 이후, 매년 고난주간과 부활주간에 설교를 하였다. 이 절기에 한 설교는 다른 절기 설교보다 훨씬 많은데,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모두 185회 이상, 그 가운데 154편의 고난주간과 부활주간 설교가 전승되었다. 필자는 설교 시작 초기부터 1530년까지의 설교들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 이유는 루터의 신학적 발전, 그리고 대적자들과의 논쟁은 1530년경 거의 마무리되었고, 루터가 고난주간과 부활주간에 행한 설교의 전형적인 내용과 신학도 이미 1530년 이전에 결정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루터설교 연구 상황에서 필자는 설교도 충분히 신학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하며 루터 설교를 텍스트로 삼아 연구하고자 한다. 먼저 루터의 설교를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설교자 루터의 모습을 그리고자 한다(2). 루터의 설교는 복음이 핵심이지만, 설교되는 상황이 간과될 수 없음을 고려하고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주목하고자 한다(3). 또한 루터의 설교는 설교의 의미와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4). 그리고 설교의 주제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라는 주제를 근거로 하여 설교의 내용을 분석한다(5).  


2. 1530년도까지의 루터의 고난주간과 부활주간 설교에 대한 개관

   우선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설교자로서 루터의 모습과 행적을 분명하게 그려보자.  
   (1512년부터) 1515년까지의 설교들은 아쉽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루터가 행한 세 번의 설교에 대한 암시가 첫 번째 시편강의(Dictata super Psalterium. 1513-1515)에서 발견될 뿐이다. 전승된 설교 중 가장 오래된 부활절 설교는 1516년의 것이다(WA 1, 53-58). 이 설교는 네 복음서를 서로 조화시켜 예수 부활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많이 인용된 성경은 누가복음이다. 루터는 이 설교에서 부활한 예수님이 제일 먼저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다는 마리아숭배를 비판하면서 마리아에 대한 종교개혁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 근거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이다. 즉 루터는 마리아에 대한 ‘전승’이 아니라, ‘성서’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루터는 발라(Valla)의 본문 내지는 그리스어 원문을 두 번이나 인용하는데, 이것에서 우리는 루터가 이미 불가타성경의 신뢰성을 의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530년까지 전승된 설교들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도표 생략)
                                    
   1530년까지 전해진 고난주간과 부활주간 설교는 84편이며, 여러 가지 증거에 의해 루터가 설교한 것이 분명하나 전승되지 않은 설교 31편이 더 있다. 그러므로 이 기간에 루터가 설교한 것은 115회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루터는 고난주간과 부활주간에 비텐베르크(Wittenberg) 시립교회 혹은 다른 교회들, 즉 비텐베르크 성(城)교회, 비텐베르크 근처에 있는 교회, 켐베르크(Kemberg)교회, 코부르크(Coburg)교회와 다른 여러 도시의 교회에서 지칠 정도로 설교를 행했다. 루터의 설교행적을 알기 위해서는 전승된 설교들, 그리고 -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전승되지 않은 설교들을 위해서는 - 설교 색인집, 루터의 강의와 편지들이 도움이 된다. 루터는 설교 자체에서 이미 행한 설교나 앞으로 행할 설교에 대한 언급들을 자주 하였는데, 서론 부분에서는 이미 행했던 설교에 대해서, 결론 부분에서는 앞으로 설교할 주제에 대해 말하였다. 루터의 이런 설교형식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루터가 설교할 때 동일한 설교청중이 거의 빠짐없이 일관되게 예배에 참석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1520년까지의 루터 설교들은 많이 전해지지 않았지만, 그의 설교행적에 비추어 본다면 그는 매년 고난주간과 부활주간에 적어도 10회 이상 설교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종려주일(때로는 한번), 세족 목요일, 성 금요일, 부활주일, 부활절 월요일에는 두 번씩 설교를 한 적이 많았고, 고난주간 수요일과 토요일, 부활주간 화요일에도 경우에 따라서 설교를 하였다.


3. 설교와 상황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설교가 선포되는 교회의 상황과 청중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설교는 신학적, 교회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설교에는 풍부한 신학적 내용뿐만 아니라, 교회의 상황과 시대적 사건들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관심을 끄는 연구로는 베르더만(Werdermann)의 책 『Luthers Wittenberger Gemeinde』이 있다. 필자가 아는 바로는 루터의 설교를 근거로 비텐베르크 교회와 당시 시대의 상황을 재현하고자 시도한 연구는 이것뿐이다. 그는 1528년 10월부터 1532년 4월까지의 설교들을 근거로 하여 비텐베르크 교회의 상황과 ‘시대상을 그려보고자’ 시도하였다.
   1530년까지의 고난주간과 부활주간 설교를 살펴보면, 지금까지 루터연구에서 강조된 주장, 즉 루터는 구체적인 교회 상황과 설교 청중을 고려하여 설교했다고 하지만, 루터의 설교에 근거하여 교회 상황을 추론하여 이해하는 것은 실제로 힘들거나 실현 불가능하다. 루터 설교를 통해 비텐베르크 교회 상황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매우 적거나 간접적일 뿐이다. 설교로부터 비텐베르크 교회의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루터의 설교를 받아 적은 사람은 비텐베르크 공동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말들은 받아 적지 않았다. 왜냐하면 필사자의 관심은 주로 루터의 복음적, 종교 개혁적인 사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것이나 비텐베르크 교회와 관련된 말들은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둘째, 루터는 설교의 청중과 연관된 설교를 중요시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 불타오른 것은 오직 복음을 설교하겠다는 의지였다. 그의 고난주간과 부활주간설교에서 루터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집중하였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1521년 4월 2일, 부활절 후 화요일에 행한 설교에서 분명하게 엿볼 수 있는데, 이 설교는 루터가 보름스 국회에 서기위해, 보름스로 떠가기 바로 전에 행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급한 상황에 상응한 지시나 언급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당연하나, 우리가 갖고 있는 자료에는 그런 말들이 전혀 없다. 루터는 단지 복음만을 설교했거나, 필사자가 단지 중심 되는 줄거리만을 받아 적고 상황과 관련된 루터의 말들은 생략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도출할 수 있다. 따라서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다양한 교회공동체에서 행해진 설교들은 내용적으로나 설교학적으로 서로 별 차이가 없다. 물론 공동체 상황에 관련된 것이 간접적으로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 초신자들이 존재하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루터의 설교들을 통해 우리는 또한 루터가 개별적인 공동체의 상황보다 기독교 교회 전체의 신학적, 영적 상태를 더 고려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루터는 공동체의 개별적인 청중의 문제와 씨름한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세워진 공동체에 영향을 주는 잘못된 가르침과 신앙 행위들과 싸웠다. 다시 말해 종교개혁에 의해 형성된 교회 전체가 겪고 있던 문제들이 루터가 가진 관심의 주요 대상이었다(성만찬[단종성배, 상징설], 고해[행위로서의 고해, 강요된 고해], 교황제도, 수도원제도, 행위의 의, 신앙보다는 이성을 중시하는 것, [신앙의 확신이 아니라] 신앙적 안심 등).
   루터는 설교에서 복음에 위배되는 중세 가톨릭교회, 교황, 열광주의자들의 가르침에 강하게 맞서 논쟁하였다. 루터는 자주 성경을 자신의 시대에 적용하여 적대자들을 비판하였다. 루터의 논쟁은 1521년 이후로 분명해지는데, 교황제도와 수도원제도가 논쟁의 주요 대상이었고, 1523년 이후부터는 열광주의자들, 그리고 성만찬을 상징으로 해석하는 자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루터의 고난주간과 부활주간 설교에서 우리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사상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의 신학에 저항하는, 종교개혁으로 형성된 공동체에서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잘못된 가르침과 신학을 엿볼 수 있다. 적대자들의 가르침과 신학에 대한 루터의 첨예화된 비판과 논쟁은 철저하게 논쟁적인 말들로 표현되었다. 루터는 중세 가톨릭교회가 성만찬을 행할 때 떡만 분배하는 단종 성배를 사탄의 가르침이라고 했고, 츠빙글리(Zwingli)같이 성만찬을 상징으로 해석하는 자들을 열광주의자들이라 부르며, 이들을 통해 사탄은 성만찬 전체를 빼앗아갔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교황이 가르치는 고해성사는 강요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교황 앞에 행하는 것으로 비판했다. 특히 교황은 그르게 설교하고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한다고 꼬집으면서, 심지어 교황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가 아니라, 적그리스도(Antichristus, non Synchristus)’라고 거세게 비난하였다. 또한 수도원 제도에 대해 루터는 수도원 제도의 본질이 행위의 의를 추구하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유다를 수도원 제도의 아버지로 간주하면서, 모든 수도원들은 안식일에 행위를 통해 의로워지려고 한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옆에 매달렸던 행악자가 오히려 성 베네딕트와 버나드보다 더 나은 수도원장이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13장 27절 등에 근거하여 루터는 수도원제도의 (탁발)청빈, 특히 프란시스코의 가난을 비판했다. 루터의 눈에 수도원제도는 그리스도보다 더 거룩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터의 논쟁의 대상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사탄이었다. 루터는 사단이 ‘그리스도의 적대자’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적대자’임을 강조하였다.
   루터의 논쟁은 무엇보다도 (편집되어) 인쇄된 설교를 통해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84편의 설교 중 23편이 인쇄되었고, 그 중 9편은 특히 더 자주 인쇄 되었다. 거기서 다룬 주제는 성만찬과 고해성사이다. 주목을 끄는 설교로는 1526년에 행해진 세 편의 설교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만찬에 관한 설교. 열광주의자들에 반대하여(Sermon von dem Sacrament des leibes vnd bluts Christi, widder die Schwarm geister)』라는 제목으로 인쇄되었다. 이 설교에서 열광주의자들과 츠빙글리는 사탄으로 언급된다. 츠빙글리도 이 설교를 읽었고, 이 설교에 대한 메모를 기초로 하여 루터에 대항하는 글을 쓰게 된다. 결국 인쇄된 루터의 설교는 루터의 논쟁을 대외로 공개하였고, 루터의 종교 개혁 신학과 함께 그의 논쟁을 도처에 전파시킨 도구가 되었다.
   논쟁적으로 설교한 주제들은 루터가 늘 주장한 종교개혁 신학과 일치한다. 이런 논쟁적인 설교를 통해 루터는 설교 청중들로 하여금 잘못된 신앙과 가르침에 주의하게 했다. (구술로 된) 논쟁적인 설교는 소통수단과 대중매체로서 종교개혁을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논쟁적인 설교는 그의 설교의 주요한 특징임과 동시에 하나의 ‘전투행위’ 그 자체였다.
   루터의 논쟁은 적대자에 대한 비판 외에 ‘설교학적인 역할’을 한다. 루터는 설교에서 자주 예화, 비유, 모티브들을 사용하여, 생생하고 분명한 설교를 하였다. 즉, 루터의 설교 가운데 나타나는 논쟁의 대상은 설교 청중들에게 종교개혁 신학과 복음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부정적인 예화’로 인용되었다. 예를 들어, 행위의 의를 거부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강조하기 위하여, 루터는 수도원 제도와 성인들을 예로 들어 설교했다.

“그리스도가 죄를 없애 버렸다면, 무엇 때문에 나는 수도원으로 달려가고, 카르투지오 수도사가 되겠는가?”

   논쟁의 대상인 부정적인 예들을 통해, 그리고 긍정적인 예들, 특히 성경에 나오는 예들(십자가 위의 강도나 마리아)을 통해, 루터는 설교청중으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경험을 하도록 설교했다. 설교에 나타난 루터의 논쟁과 그에 따른 부정적인 예들은 오히려 잘못된 가르침 속에서 바른 가르침을 분명하게 깨닫도록 하는 중요한 도구였다.


4. 루터와 설교

   지금까지 루터연구에서 이루어진 것 이상으로 더 루터설교에 (그리고 그의 강의와 작품처럼)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루터 설교의 본질적 특징과 설교에 대한 반복된 강조와 관련이 있다.
   첫째, 루터의 삶에 더 큰 비중은, 그가 교수로서 가르치는 일보다 설교자로서 설교하는 일이었다. 루터는 연구실에서 얻은 신학과 교리를 설교를 통해 삶과 실천으로 변형시켰고, 주석적인 연구로부터 얻은 신학적인 통찰들을, 비텐베르크 교인들이 알기 쉽고 분명하게 공감할 수 있도록 구체화시켰다. 따라서 루터에게서 설교와 강의는 동일한 선상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루터의 권위자 브레히트(M. Brecht)는 “신학적인 내용에서 볼 때 연속강해설교와 강의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라고 말했다.
   고난주간과 부활주간의 설교들을 살펴보면, 루터는 설교에서 자신의 신학 사상을 분명하게 드러냈고, 이 설교에 나타난 신학 사상은 그의 강의나 작품 속에서도 내용상의 차이 없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루터의 설교에서는 그의 신학이 학문적인 수준처럼 자세하게 논증된 것은 아니다. 대신 설교에는 신학사상이 대중을 위해 그림같이 묘사되어 있고, 교육적인 목적을 갖고 신앙과 생활의 실천과 관련되어 구체적으로 다루어졌다. 1526년의 성만찬과 고해에 대한 설교는 논증을 포함하고 있으며, 논쟁 작품처럼 포괄적이고 교육적으로 행해졌다. 루터 설교의 주제들, 예를 들어 구속사역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싸움, 설교의 중요성, 그리스도인의 자유, 믿음과 행위, 그리스도를 본받음 등은 그의 강의나 신학적인 작품에서처럼 자세하게 다루어졌다.
   둘째, 루터의 설교를 읽는 사람은 누구나 루터가 설교를 그렇게 자주 그리고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고난주간과 특히 부활주간 설교의 중심사상은 ‘설교의 중요성(설교의 의미)’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루터는 “설교에 관하여 설교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구원사적 의미, 또는 구원사건의 구조 중심에는 설교가 있다. 1522년 4월 20일에 행한 부활절 설교는, ‘인간의 죄 - 그리스도의 구원사역 - 그것에 관한 설교 - 믿음 - 구원’이라는 도식으로 전개된다. 믿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동시에 설교도 그 못지 않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설교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fides ex auditu)”는 잘 알려진 명제 외에도 다음 같은 것들이 루터에 의해 언급되어졌다. 즉, 오직 설교를 통해서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계시된다. 다시 말하면 설교가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감추어져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 수 없고, 그 결과로서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우리에게 아무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구원역사, 즉 그의 십자가와 부활 자체는 ‘설교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의 구원실제와 현실이 된다. 설교 임무야말로 하나님의 최고 도구요, 입의 도구이다. 루터는 설교에서 계속하여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그것에 대한 결정적인 예는 자주 설교된 천사에 대한 부활절 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루터는 천사를 ‘입으로 전하는 하나님의 사신(Dei mundpot)’이라고 해석하며, 설교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감추어진 부활을 계시하고 양심을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보았고,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인정 했다.
   루터 설교의 연구에서 루터의 설교는 지금까지 자주 자료로서의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루터의 설교들은 다양한 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졌고, 따라서 그 설교들이 지니는 사료로서의 가치는 천차만별이다. 1530년까지의 고난주간과 부활주간 설교들을 다양한 전승 자료에 근거해 비교해 보면 전승들 간에 여러 차이가 있지만(상세함[즉 첨가와 편집], 형태[문장구조, 순서 등], 명확성 등), 내용의 관점에서 본다면 코펜하겐 필사본을 제외하고는 대동소이하다. 예를 들어 1525년 4월 13일, 고난주간 목요일 설교는 뢰러와 로트(Roth, 츠빅카우 필사본)에 의해 전승되었는데, 두 가지 모두 내용상, 형태상 거의 비슷하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필사본을 바탕으로 하여 쓴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것은 독일어로 된 문장요소들이 같은 자리에서 자주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음은 내용상 일치하나, 형태상 좀 상이한 예이다.

(도표 생략)

   1520(부분적으로 1521년 역시)년까지의 고난주간과 부활주간 설교는 단지 뢰셔나 폴리안더에 의해 전승되었기 때문에, 쉽게 그 자료의 신뢰성을 판단하기 어렵지만, 신학적으로 볼 때 그 설교들은 이미 루터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5. 설교된 루터의 신학: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Christus pro nobis)

   1530년까지 고난주간과 부활주간에 루터가 행한 설교의 핵심 내용과 설교된 신학을 조직적으로 다루어보자.
   이 설교들에서 우선 세 가지 해석학적인 체계가 나타난다. 첫째, 루터의 전형적인 설교방식인 ‘율법과 복음’이다. 이미 1516년 부활절설교에서 루터는 율법과 복음을 명확히 구분했다. 또한 그리스도의 수난을 율법과 복음으로 이해했다. 우선 인간은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고(죄의 인식- ‘우리의 죄 때문에’; 율법의 역할), 그 후 그리스도가 우리 인간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셨음을 깨닫게 된다(죄사함 - ‘우리의 죄를 위하여’; 복음의 역할). 또한 루터는 모세를 율법의 설교자로, 그리스도를 복음의 설교자로 보았다. 율법의 설교자는 요구하고 명령하나, 복음의 설교자인 그리스도는 모세가 요구한 것을 주신다.

그리스도는 모세가 명한 것을 갖다 주는 설교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은 “너를 위해 모든 것을 이기시고 네게 선물을 주시는 그리스도가 여기 계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모세는 “믿으라”고 말하고, 그리스도는 “여기서(이제) 너는 갖고 있다”고 말한다.

    ‘율법과 복음’은 루터의 특징적인 설교방법일 뿐만 아니라, 그가 늘 유의한 설교내용에 속한다.
   둘째, 고난주간과 부활주간의 많은 설교들은 ‘역사-용도/유익(historia - usus/fructus/ vis)’ 관점에서 전개되었다. 절기설교 가운데 오전설교는 역사에 대해, 오후설교는 그 역사가 주는 유익, 즉 그리스도의 사역이 주는 유익과 열매에 대해 다룬 적이 많았고, 두 가지를 하나의 설교에서 다룬 적도 있다.
   우선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역사’에 대한 설교는 ‘역사적 신앙(fides historica)’을 목표로 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선 역사를 바로 아는 역사적 신앙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 설교는 특히 초신자나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역사 자체로는 ‘아무 유익도 갖다 주지’ 못한다(WA 15, 509, 24-25). 루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유익’에 더 무게를 둔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그리스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해 행해졌고, 우리에게 유익을 갖다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Christus pro nobis)’는 루터가 고난주간과 부활주간 설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강조한 주제라고 볼 수 있다. ‘유익(quare)’은 ‘역사(quod)’보다 높은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역이 믿는 자들에게 주는) 유익과 열매를 설교하는 것이야말로 복음적 설교의 본질에 해당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위한 것이요,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셀 수 없이 많이 설교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루터가 이해한 기독교 신앙의 특징과 관련이 있다. 즉,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우리를 위한 것이요,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이요, 결국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우리의 것으로 ‘붙잡는 신앙(fides apprehensiva)’은 루터가 이해한 믿음의 중요한 한 측면이다.  
   루터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를 무엇보다도 ‘성례와 모범(sacramentum et exemplum)’으로 본다. 이 개념 안에 설교에 대한 루터의 전체 구상과 설교된 신학의 알맹이가 들어 있다. 이 구조에 따라 설교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는 루터에게서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 루터에게 그리스도 전체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이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사역, 즉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그 사역의 근거가 되는 인격(神人으로서의 본성)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이 경우에 루터는 그림과 표상을 사용하여 설교하고, 이론적이라기보다는 구체적으로, 그리고 구원론에 집중하여 설교한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의 유일성을 고려하여, 그리고 행위의 의에 쏠리는 인간의 경향과 관련하여, 루터는 항상 ‘오직 그리스도’를 주제로 삼았다. 그리스도의 존재, 그의 모든 행위와 말씀들로부터 루터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를 발견했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은 ‘우리를 위한 것’,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루터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강조한다. 루터에게 있어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Christus resurrexit)’와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Christus pro nobis resurrexit)’, ‘구세주 그리스도’와 ‘우리의 구세주 그리스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는 먼저 ‘성례’이다. 성례로서의 그리스도, 이것은 무엇보다도 죄사함을 뜻하는데,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의미가 이미 이 말에 포함되어 있다. 루터는 성례라는 말 대신에 좀 더 구체적인 용어 ‘선물’(주어진, 선물준)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여, 설교 청중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역의 유익, 즉 승리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리는 동시에 우리의 것임을 분명히 깨닫도록 하였다. ‘선물’이라는 개념을 기초로 하여, 루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유익, 열매, 힘이 믿는 자에게 선물로 주어졌음을 분명하게 설교하였다. 특히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형제관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하나 됨, 즐거운 교환, 하늘의 존재인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같은 구체적이고 그림 같은 동기들을 사용하였다. 이런 것들은 루터의 고난주간과 부활주간 설교의 전형적인 주제에 해당한다.
   루터는 먼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 지닌 유익과 힘을 이미 이루어진 시제(완료)로 서술함으로써, 설교청중으로 하여금 그에 대한 믿음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 가져다주는 유익과 능력의 전제 조건으로 믿음을 촉구 했다. 여기서 믿음은 성경에 기초하고, 예를 통해 제시되고,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auff Christum sehen)’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주어진 선물에 대해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단으로서 ‘오직 믿음’을 강조한다.
   ‘성례로서의 그리스도’, 즉 믿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죄사함을 받았고, 이미 그리스도의 싸움과 승리에 동참하였음을 강조하면서도, 루터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변증법적 존재를 항상 염두에 둔다. 루터가 이해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다음의 말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내적으로 마음은 즐겁고 기뻐해야 한다.
하지만 외적으로는 그리스도 자신이 죽으신 것처럼 나도 죽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새로 태어났지만, 옛 사람인 육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은 영과 육의 존재로서, 죽을 때까지 서로 싸운다. 그러므로 루터가 설교할 때 그의 마음에서 결코 잃어버리지 않은 것은, 한편으로는 설교의 청중들에게 그리스도의 선물, 또는 성례를 통해 이루어진 놀라운 그리스도의 존재를 확신시키고,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설교 청중들에게 감추어진 그리스도인의 존재, 육과 싸우는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망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특별히 다음과 같은 것들을 구분(분리가 아님!)하였다. - 칭의와 성화, 의롭다 선언함과 의롭게 만듬, 죄의 용서와 죄의 제거, 몸 전체를 씻는 것과 발을 씻는 것. 그것을 통해 루터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그리스도인 존재는 오직 믿음에 근거해야 하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이미 이루어진 ‘존재’이 아니라 계속 이루어나가는 ‘되어감’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의가 아니라 의롭게 됨, 깨끗함이 아니라 깨끗하게 됨이다. 우리는 아직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한 것이 아니요, 우리 모두는 가는 도중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계속하여 성장하는 성화, 그리고 믿음의 진보가 필요한 것이다.
   또한 루터는 행위의 의에 대항하여, 그리고 행위를 경시하는 경향에 대항하여,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하여, 특히 믿음과 행위가 일치하고 구분되는 관계에 대해 자주 설교하였다. 루터에게 믿음은 행위보다 우월하고 앞서는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행위는 믿음 뒤에 위치하면서도, 동시에 동등한 위치를 점유하는데, 이것은 행위가 행위의 의에 도달하지 않는 한에서이다. 행위와 믿음의 관계에 대한 루터의 설명을 보면, 행위는 바른 믿음을 보여주는 것,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행위, 확신을 주는 행위, 그리스도인의 표시라고 했다. 주목할 만한 또 한 가지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를 주장한 루터가 “행위로 구원받는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참된 믿음에는 행위가 반드시 따라오기 때문에, “행위가 죄를 사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루터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심판의 비유를 당시 가톨릭이 해석하듯이 행위로 심판을 받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여기 성경이 말하는 행위는 바로 믿음에 뒤따르는 행위이기 때문에, 양과 염소의 심판 기준은 곧 믿음을 뒤따르는, 또는 믿음의 열매로서의 행위를 말한 것으로 해석했다.
   영과 육으로 된 그리스도인의 실존에서 ‘모범(exemplum)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범은 그리스도인의 ‘육’에 관련을 갖는다.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 자신들이 신앙인으로서 행해야 할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가령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리스도의 모범, 섬기시는 그리스도(빌 2장 1절 이하), 강한 발만이 아니라, 연약한 살도 갖고 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즉 연약한 그리스도인과 굳건한 그리스도인이 함께 한다는 의미) 등은 그리스도인이 뒤쫓아 행해야 할 모범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예들을 보여주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믿음을 통해 얻은 그 많은 축복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과 성직자들이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옛 아담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뒤따르는데 필요한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이다. 또한 루터는 십자가 신학, 즉 수난을 통해 영광을 얻으신 그리스도, 강함은 약함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통해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과 본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뒤따르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선한 행위와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설교청중에게 그리스도를 뒤따름의 본질을 기억케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즉 그리스도를 뒤따름만으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리스도인의 수난 사이에는 그 목표에 있어 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즉, 전자는 죄의 용서, 후자는 육체의 징계와 이웃사랑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뒤따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루터는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모범으로 제시하면서,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종이 되어야 한다고 설교하였다.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곧 ‘그리스도의 고난을 뒤따르는 것’이다. 물론 그 목적은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밖이 아니라, 십자가 안에 서고 머물러야 한다. 셋째로 선행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인데, 이 선행, 즉 사랑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루터는 그리스도가 행하신 성경의 예(빌립보서 2장 6절; 제자들의 발을 씻으심)를 근거로 이웃사랑을 강조하면서, 이웃의 약함을 짊어져야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로서 이웃을 섬겨야 한다고 설교했다.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모범으로서 마지막으로 성인 크리스토퍼(St. Christophorus)를 예로 든다. 그는 루터의 작품가운데 자주 인용되는데, 그리스도를 업고 가는 성인으로 잘 알려졌다. 그래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이란 ‘크리스토퍼, 즉 그리스도를 업고 가는 사람(Christtreger)’이라고 말하였다.


6. 나가면서

   루터의 설교행적을 볼 때, 그의 고난주간과 부활주간 설교들은 그의 전체 설교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빈번히 행한 설교에 속한다. 그러므로 고난주간과 부활주간에 설교한 것은 루터의 주요 업무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간에 루터는 ‘매일의 설교자’였다(2장).
   루터의 설교들은 종교개혁 사상을 선포하고, 그 시대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잘못된 가르침과의 논쟁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루터의 설교에 신학적, 교회사적 자료로서의 중요성과 함께 루터의 신학과 종교 개혁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필수불가결한 자료로서의 의미를 부여한다(3장).
   루터는 ‘설교에 대해서 설교했다’. 즉, 루터는 설교의 의미와 본질, 설교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강조하여 설교하였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구원 사건이 되게 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루터는 강조했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를 하는 목회자나 신학을 연구하는 신학자 모두 루터의 설교에 관심을 쏟는 것은 유익한 일이 된다(4장).
   마지막으로 5장을 통해 루터의 설교에 담긴 신학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임이 분명해진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라는 말에는 루터가 전한 설교의 내용뿐만 아니라, 모든 설교자가 설교해야 할 설교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루터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인 존재의 근거로,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지침으로 여긴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의미는 두 기둥, 즉 성례와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 위에 기초하여 설교되었다. 성례로서의 그리스도와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라는 도식은 루터의 고난주간과 부활주간 설교의 내용적인 핵심이요 주요한 구성 요소이며, 루터 설교의 내용, 구조, 방법인 것이다.
   성례와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는 그 목표, 대상,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설교에서는 동등한 위치요, 서로 긴밀하게 결합되어 설교되어진다. 성례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 안에 ‘머물고’ ‘거하고’ ‘사시고’(WA 9, 666, 16-17; 31-32), 그리스도인은 선물(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주는 유익, 열매, 힘)을 받는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신적인 존재이다. 즉 내적 인간은 그리스도와 닮게 되고, 그리스도의 형제이고, 그리스도와 한 몸이요, 하늘의 존재가 된 것이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존재, 의로운 존재, 신적인 존재는 진실하고 참된 것이다. 이것에 대해 핀란드의 루터연구가들은 ‘존재에 있어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신격화 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로는 이런 주장은 루터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우리는 그(그리스도)와 같은 재화를 소유하나, 본질에서는 동일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하나님, 거룩하게 하는 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이시지만, 하나님은 예수에게 참된 아버지시요 예수는 그의 진짜 아들인 반면,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 존재적 신격화는 그리스도인의 존재로 그렇게 매끄럽고 쉽게는 묘사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 즉 은혜 받은 죄인이고, 육인 옛 아담과 싸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처한 상태인 싸움은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지속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존재는 실제이지만, ‘우선은 아직 감추어져 있는’, 즉 종말론적으로 숨겨져 있는 것이다.
   성례로서의 그리스도에 관한 설교로부터 설교의 의미와 역할은 분명해진다. 루터가 ‘이미 신격화된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강조하여 설교한 것처럼, 성례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는 감추어져 있는,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구원을 내용으로 한다. 구원론적으로 짜인 이러한 설교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유도하고, 구원의 확신을 주고, 동시에 미래의 구원의 완성됨을 소망하게 한다.
   믿음과 직접 관계를 갖고, 내적 인간과 관련된 성례로서의 그리스도는 루터에게 있어 종교와 기독교의 가르침을 포함하지만, 루터는 동시에 윤리적인 관심사, 즉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는 행위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갖고, 외적인 인간과 관련된다. 내적인 인간은 믿음에 상응하는 행위―외적 인간은 사실 이 행위를 즐기지 않는다―를 하도록 격려되어, 그리스도인은 결국 그리스도의 예를 뒤따르는 행위를 행하고, 또 행해야 한다. 그 행위는 우선 자신의 육체,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뒤따라 이웃을 섬기고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인간보다 더 나은 존재’(신격화)이면서도, 동시에 ‘인간보다 못한 존재’(종)로 표현할 수 있다.
   성례로서의 그리스도와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라는 도식은 설교의 내용에서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자모두’가 적용된다. 신학적으로 성례로서의 그리스도가 우선적인 위치를 점하지만(‘오직 그리스도’ ‘오직 믿음’), 인간론의 관점에서 볼 때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 또한 긴급하게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것이 의무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은 죄와 관련해서가 아니라 모범을 위해서이다”(WA 27, 107, 9-10).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이 뒤따라야 할 예, 모범으로서 설교된다. 사실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직설법이다. 그러나 설교에서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것은 권고의 형태로 표현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행위와 그리스도를 뒤따름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전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가 되면 반드시 ‘따라오는 결과’임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설교에서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명령법으로 설교되고, 그 명령은 ‘믿음에 기초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는 성례와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를 통해 루터 설교의 내용과 과제를 결정한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는 내용에 있어서 믿음과 행위를, 형태에 있어서 가르침과 권고(교리와 실천)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는 루터의 설교된 신학일 뿐만 아니라, 루터의 설교의 방법을 특징짓는다. 루터의 설교된 신학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인바, 이것은 성례와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에서 표현되며, 믿음과 행위, 가르침과 삶, 위로와 권고, 그리스도의 선물과 모범을 포괄한다. 루터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로써 복음과 참된 설교를 요약한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에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핵심이 들어있고, 설교에서 전해야 할 내용이 비춰진다. 루터에 의해 설교된 신학의 본질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를 선포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를 설교했다는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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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2)
-편집상 각주 생략함


다문화사회의 떠돌이 민중에 대한 신학적 이해


                                                                                  류 장 현(한신대 교수/조직신학)

요약

   한국사회는 이미 다문화사회가 되었다. 이러한 급속한 다문화사회로의 이행은 이주민들의 인권, 이주민 자녀들의 교육, 자국민과의 갈등과 충돌 등 많은 사회적 문제들을 수반하고 있다. 물론 많은 교회들이 이주민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다문화 사회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아직 타 분야에 비해 매우 빈약한 형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논문에서 먼저 이주노동자, 국제결혼을 한 여성과 성매매 여성들을 게르와 관련해서 떠돌이 민중으로 정의하고 그들의 고통당하는 삶의 현실을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논의된 다문화사회의 떠돌이 민중에 대한 이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서술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떠돌이 민중은 단순히 보호와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와 구원과 선교의 주체라는 사실을 논증할 것이다.
   참으로 떠돌이 민중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자기초월성과 종말성을 가지고 억압과 착취와 차별이 없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역사의 주체이다. 그 새로운 사회는 그들의 꿈이다. 따라서 교회는 떠돌이 민중을 이주민과 나그네와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의 가족공동체의 한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떠돌이 민중과 공생할 수 있는 다문화교회와 다문화사회의 구체적 형태를 신학적으로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그것이 21세기 다문화사회에서 한국교회가 당면한 신학적 과제이다.

주제어 : 다문화사회, 떠돌이 민중, 하나님의 가족공동체, 이주민


1. 들어가면서

   전 세계적으로 약 2억명이 타국살이를 하며 매년 약 2천만명이 자기 나라를 떠나 타국으로 이주하고 있다. 코피아난 전 UN 사무총장의 말처럼 “우리는 이주가 세계적인 현상이 된 이주의 시대 한 가운데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행정안전부에 의하면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2009년 5월 1일 기준 110만6884명으로 조사를 시작한 2006년 이후 처음으로 100만 명을 돌파했다. 그것은 2009년 5월 1일 현재 주민등록인구(4959만3665명)의 2.2%에 해당하는 수치로 지난해(89만1341명)보다 24.2% 증가한 것이다. 따라서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숫자가 전체 인구의 2%를 넘어 사회학적으로 한국사회는 이미 다문화사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년 그 숫자가 증가하고 있어 2050년에는 인구 10명당 1명이 외국인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급속한 다문화사회로의 이행은 이주민들의 인권, 자국민과의 갈등과 이주민 자녀들의 교육 등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을 수반하고 있다. 물론 많은 교회들이 이주민들의 인권과 이주민 2세들의 교육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다문화사회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다른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주 적은 형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먼저 이주민들의 현실을 살펴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신학적 제안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이주민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할 것이다.

2. 떠돌이 민중의 현실과 고난  

   국내에 거주하는 이주민은 다른 나라에서 이주한 외국인, 우리와 같은 민족으로서 다른 나라에 살다 이주한 새터민, 난민, 조선족, 고려인 등이 있다. 그들은 세계화로 인한 경제통합, 노동력의 이동과 정치적 불안정,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과 저개발국가의 일자리 부족, 산업구조의 변화로 3D직종 기피현상, 경제적 착취와 다국적 기업의 전쟁도발과 환경파괴, 또한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에 의해서 파생된 국제적이며 국내적인 빈부의 격차와 이상향에 대한 동경 등으로 자신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 고향을 떠나 타국에 살면서 생계가 어려워 타인의 배려와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게르(רוג)와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정착여부와 사회경제적 성격을 고려할 때 “이민자”(immigrant) 또는 “이방인”(alien)이기보다는 ‘떠돌이 민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천대받고 고통당하는 떠돌이 민중은 외국인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을 한 이주여성과 성매매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1) 외국인 이주노동자
  
   국제노동기구는 외국인 노동자를 이주노동자(migrant worker)라고 정의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활근거지를 벗어나 언어와 사회적 관습이 다른 생활근거지나 다른 지역에 이주하여 취업한 노동자를 통칭한다. 이주노동자는 국내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취업하는 국내 이주노동자와 국경을 넘어서 다른 나라로 이주하여 취업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로 구분된다. 2009년 6월 30일 현재 법무부 출입국·외국인 정책본부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국내에 거주하는 합법·불합법 체류 외국인은 1,155,654명이며, 그 중에서 이주노동자는 총 559, 965명이다. 그리고 이주노동자 중에 합법체류자가 509,674명, 불법체류자가 50,291명, 전문인력(교수, 회화지도, 연구와 기술지도 등에 종사)이 39,440명, 단순기능인력이 520,525명이다.
   이처럼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는 대부분 단순노동에 종사하고 있으며, 또한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출신국가와 직종에 따라서 구분되며 그들의 국내생활 역시 동일한 기준에 의해서 차별화된다. 그들은 국제 이주가 보편화된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한국사회에서도 데니즌(denizen)과 마지즌(margizen)으로 차별화된 삶을 산다. 데니즌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일시적 이주를 통해 다른 나라에 거주하더라도 출신국의 시민권을 포기하지 않으며 체류 국가에 영주할 의사가 없는 이주노동자들이다. 그들은 기업이 제공하는 다양한 복지혜택과 권리를 누리고 산다. 그러나 마지즌은 체류 국가에서 법적, 정치적, 사회문화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사회의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이다. 그들은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문화적 해택이 없이 거주국에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장시간노동, 임금체불, 산업재해, 폭행, 인신 구금, 단속과 추방 등 심각한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다.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란 사람 칸은 2001년 3월 7일부터 6월 16일까지 경기도 소재 가구공장에서 월 75만원을 받기로 하고 일을 했다. 그러나 칸은 이 3개월 동안 45만원을 수령하였고 나머지 월급을 받지 못했다. 사업주는 평소에도 가끔씩 말이 통하지 않는 칸에게 주먹질을 하였다. 6월 16일 칸이 밀린 월급을 달라고 하자 사업주는 또 다시 주먹질을 하면서 칸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지난 2004년 11월 태국 여성으로서 8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노말핵산 중독증과 다발성 신경장애(앉은뱅이 병)로 2년 가까이 치료를 받아야 하는 무서운 산재가 발생했다...병원에 가고 싶다고 하면, 꾀병 부린다며 야단을 치고 다리에 힘이 없고 아프다고 해도 점심시간 1시간, 저녁시간 30분 말고는 하루 종일 서서 매일 14시간 이상을 근무해야 했다. 한 달 월급은 45만 5천원에 불과했고 연장근로 수당과 휴일 수당은 삭감해서 지급했다. 이주노동자는 말하는 기계일 뿐이었다.  

2) 국제결혼을 한 이주여성  

   2009년 6월 30일 현재 법무부 출입국·외국인 정책본부 통계자료에 의하면 결혼이민자는 총 126,155명(남: 15,323. 여:110,832명)으로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10.9%를 차지한다. 그것은 2년 전인 2007년에 비해(2007년 8월에 결혼이민자는 104,749명이었다) 12% 증가한 것이다. 이러한 국제결혼은 2020년경에 전체 결혼 대비 32%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할 때 신생아 중 1/3이 다문화가정의 자녀가 될 것이다. 따라서 다문화가정에 대한 관심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물론 정부와 교회와 사회단체들이 다문화가정에 대한 지원과 다양한 정착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지만 아직도 국제결혼을 한 이주여성과 그 자녀들은 인권의 사각지대에 살고 있다. 그들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종차별과 종교적·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갈등으로 이중적인 고통을 안고 있다.
   필리핀 갈룽안 센터(Kanlungan Centre Foundation Inc)에서 활동하는 매디귀드(Maria T. Madiguid)의 상담보고서에 의하면, 한국남성과 결혼한 필리핀 여성들은 대부분 경제적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로 국제결혼을 한다. 그들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성장한 남편과 시댁식구들, 특히 시어머니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으며, 남편의 긴장해소와 성적 만족을 위한 성적 대상으로 취급되며, 집안 일과 농장 일에 억매여 밖에서 일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경제적으로 남편에게 용돈을 받아쓰는 의존된 삶을 살며,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이혼한 경우에 자식과 못 만나게 하거나 불법체류자가 되어 추방당할 뿐만 아니라 “돈 때문에 결혼한 사람”이나 “남편으로부터 도망갈 여자”라는 인식 때문에 심리적 학대를 받고 있다. 호남대 다문화센터의 조사보고에 의하면 전남지역 이주여성 2134명 중에서 46.6%가 이러한 학대와 폭력을 견디다 못해 이혼을 원하고 있다. 이주여성긴급지원센터의 베트남 상담원 느웬 티 차우의 “나의 이야기”는 국제결혼을 한 이주여성들의 열악한 삶의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주여성들이 직면하는 어려움은 언어, 전통, 문화, 나이차 등에서 비롯되었다. 대부분의 여성결혼이민자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고 가족을 도울 수 있다는 희망으로 국제결혼을 선택한다...남편과 가족들은 돈을 들여서 결혼했으므로 그 만큼의 대가를 요구한다. 신부의 신분증과 여권 등 서류를 보관하고 외출을 허용하지 않고 가족 이외의 다른 사람과는 연락을 못하게 하며 충분히 먹이지도 않으면서 집안 일, 농사일, 공장일 등을 강요한다...일부는 자식을 낳기 위해서 아내를 필요로 한다. 아내가 출산한 후에는 한국어를 알 수 없는 점을 이용하여 남편에게만 양육권이 있게 만든 이혼서류에 서명하도록 속이기도 한다. 집안 일, 노인부양과 환자 간호, 의붓자식을 키우기 위해서 아내를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다. 성적인 만족을 위해서 아내가 필요한데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학대하는 한국 남성들도 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다문화가정의 자녀들도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하고 있다. 행정안전부가 2009년에 처음으로 가족관계등록정보시스템을 이용해 연령대별로 외국인 자녀들의 현황을 파악한 결과 10만7689명의 외국인 자녀들이 한국에 사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 중에서 초중고생들은 이중적 문화생활에서 오는 갈등, 아동학대, 인종적 편견과 교육문제 등으로 매우 심각한 상황에서 생활하고 있다. 실제로 다문화가정 자녀들의 미취학 비율이 높고 아동 학대도 일반 가정에 비해 심각하다. 일반 가정 자녀의 초중고등학교 미취학률이 13.1%인데 비하여 다문화가정 자녀 2만4867명 가운데 6089명(24.5%)이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한 다문화가정 자녀의 아동 학대도 일반 가정의 2배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별로는 여아가 114명(62%)으로 남아 70명(38%)보다 많았다. 가해자는 친부(64.7%)와 친모(26.1%)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혈통주의가 강한 한국에서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은 한국인이며 외국인이라는 이중적인 정체성과 혈통주의라는 문화적 요인으로 인종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국제결혼을 한 필리핀 어머니의 고백은 이러한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 동안 난 무척 힘들게 살아왔다...난 아이가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내심 우리의 국제결혼이 아이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가면서부터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게 놀림을 당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놀림을 당하니 학교에 들어가면 어떨까? 얼마만큼 어떤 놀림을 당할지...지금 나한테 아니 우리 필리핀국제가정모임의 회원 누구에게나 걸려있는 것은 바로 우리 아이들의 문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존권과 건강권과 교육권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들은 부모의 출신 문화와 한국의 문화 사이에서 제3의 자기정체성과 문화적 공간을 만들어 가기 때문에 지금은 비록 갈등과 혼동 속에 있지만 앞으로 다문화사회의 주인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성매매 이주여성
        
   국제노동기구(ILO)의 보고서에 의하면 매년 약 80만 명의 아시아 여성이 국제 이주노동자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그것은 1990년대 들어 더욱 급증하여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여성 노동자를 해외에 보내는 나라는 스리랑카로서 이주노동자의 84%를 차지하며, 인도네시아가 70%, 필리핀이 60%로 그 뒤를 잇고 있다. 그들의 직업은 주로 가사 노동자, 성매매춘과 제조업 등에 종사하고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 시장질서에 의해 파생된 빈곤의 세계화와 군사주의는 국제결혼의 증가와 함께 성매매 여성들의 이주를 촉진시켰다.
   한국에서 성매매 이주여성은 1990년대 중반부터 기지촌에 유입되기 시작해서 1999년을 기점으로 대폭 늘어났다. 그것은 한국정부의 예술흥행사증 발급과 관련이 있다. 외국인 연예인 공연기획사는 1980년에 7개에서 1999년에 54개로 늘었고 2002년에 157개로 급증했다. 2009년 6월 현재 외국인 연예인 자격으로 국내에 체류하는 사람은 4,738명으로 그 중에서 합법체류자가 3,358명이며 불법체류자가 1,380명이다. 외국인 연예인 자격(E-6 비자)으로 입국한 여성들은 대부분 경제적 이유로 떠돌이 민중이 되어 성산업에 편입되고 있다.

한국에 오기 전 대학과정을 마치고, 필리핀에서 서비스 관련 직종과 보조교사 등의 여러 직장을 2여년 동안 경험했지만 모두가 한 달에 100불 이상의 임금을 받기는 힘들었다. 12명의 대가족이 생활하기에는 너무나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물론 나 혼자만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평균 100불의 임금으로는 도저히 가족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심하다 결국 한국행을 결심했다.

   성매매 이주여성들은 이중계약, 임금체불과 폭력 등으로 고통을 당할 뿐만 아니라 지각, 결석, 휴무와 주스할당을 못 채웠을 때 갖가지 형태의 벌금으로 경제적 착취를 당하고 있다.

계약서상 그녀의 임금은 $710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달부터 그녀에게 돌아온 돈은 400불이 고작이었다. 나머지 $310이 어디로 흘러갔는지에 대한 설명은 해주지 않았고, 매니저는 늘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400마저도 전부 그녀의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지각이나 결석을 하면 어김없이 벌금이 매겨졌다. 심지어는 클럽이 문을 닫는 날에도 그녀에게는 어김없이 $50의 벌금이 매겨졌다...그렇게 이런 저런 이유를 내며 깎인 그녀의 임금은 $120까지 내려간 적도 있다.

   이렇게 그들은 노동착취와 성적 착취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들에 대한 폭력은 일상적인 언어적 위협으로부터 구타, 마약, 굶김과 살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요약하면 외국인 이주노동자, 국제결혼을 한 이주여성 및 그 자녀들과 성매매 이주여성들은 체류국가에서 법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주변부에서 비인간적 삶을 살아가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삶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은 한국사회에서 떠돌이 민중의 생존문제를 배제한 다문화 담론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다문화주의의 논의보다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체류자격 문제나 노동조합 결성, 국제결혼한 이주여성과 성매매 여성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인권운동과 이주여성들의 자녀교육문제를 더 시급한 과제로 인식하고 신학적이며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3. 떠돌이 민중에 대한 신학적 이해

   일반적으로 다문화사회의 떠돌이 민중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구약에 나타난 이주민과 관련된 용어와 용례를 검토하고 구약의 법전을 분석하여 그들의 정체성과 인권을 주장하는 성서적 해석과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속에서 떠돌이 민중의 구원에 관심을 갖는 구속사적 해석과 교회의 선교활동과 관련해서 떠돌이 민중을 이해하는 선교적 해석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결과들은 떠돌이 민중의 본질적 문제를 간과했거나 올바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따라서 필자는 그 한계를 지적하고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떠돌이 민중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 할 것이다.

1) 보호의 대상에서 예수운동의 주역으로    

   떠돌이 민중에 대한 성서적 연구는 구약성서에 나타난 이주민과 관련된 용어와 용례를 연구하거나 구약성서의 법전들을 분석하여 그들의 정체성과 인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는 떠돌이 민중을 관심과 보호의 대상으로 이해할 뿐 역사의 주체로 세우지 못했다. 더군다나 구약법전에 근거한 떠돌이 민중에 대한 보호는 그들을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 체제에 순응 혹은 편입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게르(ger), 토샤브(toshab), 노크리(nokri, nekar), 자르(zar)’로 구분하여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차별대우를 했다. 그들은 주인의 지배와 보호 속에 노동력을 제공하며 주류 사회의 변두리에서 떠돌이 민중의 삶을 살았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결코 이스라엘 사회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떠돌이 민중은 구약성서에서는 특별한 관심과 보호의 대상이지만, 신약성서에서는 예수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추구했던 주역으로 나타난다. 아이히홀츠(G. Eichholz)에 의하면 신약성서에서 사용되는 민중 개념은 이방인(ἔθνος)과 백성(λαὀς)에 관한 언어학에 한정된다. 그들은 예수와의 관계에서 단순히 삽화로 취급되거나 디벨리우스처럼 “환호하는 자”로 국한될 수 없으며 제자들과 대립적 관계에 있으면서 “복음화의 대상을 나타내는 규정할 수 없고 정형화할 수 없는 대중”이다. 마가는 헬라·유대문헌에서 주변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오클로스(주로 천민으로 번역된다)를 그의 복음서에서 핵심적인 인간 집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오클로스는 어떤 개인적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라 갈릴리 밑바닥 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규정되지 않은 집단, 그 때 그 때 구성에 따라 움직이는 집단인 “떠돌이 민중”(wander-ὄχλος)이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사회적 집단으로써의 오클로스에게 깊은 애정을 가졌으며(막6:34, 10:25), 떠돌이 민중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운동에서 자신들이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고 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므로 떠돌이 민중은 단순히 관심과 보호의 대상만이 아니라 예수로부터 위임받은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실현하는 주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2) 구원의 대상에서 구원의 주체로      

   떠돌이 민중에 대한 구속사적 해석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타국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던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아브라함의 후예인 갈릴리 예수에게서 완결되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서 떠돌이 민중의 신학적 의미를 찾는다. 그러나 이러한 구속사적 해석은 하나님이 떠돌이 민중을 선택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간다는 구원의 경륜을 밝혔지만, 여기서 떠돌이 민중은 여전히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선각자에게 의존하고 있는 구원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다시 말해서 떠돌이 민중에 대한 구속사적 해석은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하나님 또는 예수와 민중의 관계를 명확히 규명하지 못했다. 즉 예수와 민중이 언제나 주객의 관계 속에 있다. 그러나 예수와 민중은 주객의 관계가 아니다. 서남동에 의하면 하나님과 민중은 태초부터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 가는 계약의 파트너이다. 민중은 사회경제사적으로 가난하고, 억눌리고, 빼앗기는 계층이지만 실제로 생산을 담당하는 주역으로서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는 역사의 주체이며, 또한 성령론적으로 하나님과의 계약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하는 “작인역”(作因役)으로서 역사의 주체이다.  

하나님의 공의 회복의 작인역은 바로 하나님의 공의를 침해하는 권력에 짓밟힌 소위 죄인, 곧 천민 -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떠돌이, 신체불구자, 도둑 등 밑바닥 인생이라고 파악하는 것은 특유한 성서적 이해이다. 민중이 당하고 있는 고난(suffering)이 하나님의 역사경영을 알아보는 색인(index)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민중을 구원하시되 민중이 자신의 생명활동을 통해서 스스로를 구원하도록 한다. 구원은 인간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일어나지 않는다(sola gratia non sine homine). 하나님의




(New)신학사상 2010년 여름호(149집) 차례
신학사상 2009년 ,겨울호(147집)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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