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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연 
 (New)신학사상 2010년 가을호(150집) 차례


이번 호에는

구약학 논문으로 장석정 관동대 교수의 “다섯째 재앙(출 9:1-7) 재고”를 게재했다. 이 논문은 출애굽 사건에서 여호와가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들 중 다섯 번째 재앙에 대한 연구이다. 장 교수는 다섯 번째 재앙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출애굽기 전체에서 나타나는 "땅"의 문제에 대한 중요성을 재이해하고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신약학 분야에서 김경희 목원대 교수의 “예수의 하느님나라 선포를 통해 본 평등의 비전”은  예수의 하느님나라 말씀들을 연구하고자 할 때 그동안에 연구되어진 하느님나라의 시간적인 차원―미래적이냐 현재적이냐 하는 차원 그리고 영적인, 종교적인 지평 보다는 하느님나라 선포가 예수의 평등의 비전- 사회, 정치, 경제적 평등 비전에 의해 관통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김명수 경성대 교수는 “초기기독교 예수운동에 나타난 공(公)경제윤리”라는 논문에서 초기기독교 공동체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의 공(公) 경제윤리 고찰을 통해 오늘의 부익부 빈익빈문제를 해결할 기독교 경제윤리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조직신학 분야에서 김진희 박사는 “제 3세대의 토착화 신학에 있어서의 종교간 대화의 과제와 전망-변선환의 종교간 대화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통해 오늘의 다원문화 세계에서 새롭게 인식되고 발전시켜야 할 토착화 신학과 종교간 대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기독교윤리 분야에서 이혁배 숭실대 교수는 “진보적 기독교의 사회참여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란 논문을 통해 진보적 기독교의 정체성과 방향성 상실에 대한 성찰과 함께 보다 적극적인 대안 모색으로 경제적 민주화의 추구, 대안적 사회경제모델의 구상, 북한경제위기의 시스템적 해결책 모색, 기독교 시민운동의 급진화, 대안교회의 설립 등을 제시하고 있다.
강원돈 한신대 교수는 “기본소득 구상의 기독교윤리적 평가” 논문에서 최근 전세계적으로 핫 이슈로 떠오른 기본소득 구상에 대한 주요한 논쟁점들을 비교 분석 평가하였다. 케인즈주의적인 복지 모델과 신자유주의적인 노동연계복지 모델, 시민권 이론과 정의론의 관점 등을 비교 평가하고 하느님의 정의에 근거한 기본소득 구상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김현수 박사는 “다문화, 다인종 사회에서의 정체성 문제: 디트리히 본회퍼의 “폴리포니”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다문화, 다인종 시대에 신학과 기독교윤리가 다루어야 할 대표적인 과제가 “어떻게 타자와 함께 살아갈 것인가?”인데, 어떻게 정체성을 가지면서도 타자성을 포용하고 공존할 수 있는지를 본회퍼의 폴리포니를 중심으로 다차원적 정체성의 윤리를 모색하고 있다.

기독교철학 분야에서 정기철 교수는 “리쾨르의 종교-문화 현상학”이란 논문을 기고했는데, 종교문화시대에 특히 악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문화현상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종교현상학은 신과 인간의 문제만을 관심하는데 반해 문화현상학은 세상의 질서나 자연의 질서 그리고 우리의 종교 문화 속에 있는 악에 대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번에 게재된 모든 논문들은 우리사회와 세계의 중심 문제들인 다원문화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이슈에 대한 신학적 해석과 대안 모색을 하는데 집중하였다. 신학이 과거의 관념적 지식 학문에서 사회와 세계의 문제에 대한 신학화를 모색하는 시도는 매우 바람직한 신학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신학계가 서구 신학의 지식 전수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신학적 사고를 하는 것은 세계 신학 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 신학적 노력들이 한국 교회의 변화와 발전에도 기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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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50집)              

연구 논문

장석정 ․ 다섯째 재앙(출 9:1-7) 재고
김경희 ․ 예수의 하느님나라 선포를 통해 본 평등의 비전
김명수 ․ 초기기독교 예수운동에 나타난 공(公)경제윤리
김진희 ․ 제 3세대의 토착화 신학에 있어서의 종교간 대화의 과제와 전망
             -변선환의 종교간 대화를 중심으로
이혁배 ․ 진보적 기독교의 사회참여에 대한 비판적 성찰
강원돈 ․ 기본소득 구상의 기독교윤리적 평가
김현수 ․ 다문화, 다인종 사회에서의 정체성 문제:
             디트리히 본회퍼의 “폴리포니”를 중심으로
정기철 ․ 리쾨르의 종교-문화 현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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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소개) 1
- 각주는 편집상 생략함


진보적 기독교의 사회참여에 대한 비판적 성찰


                                                                                        이혁배 (숭실대 교수/기독교윤리)
초록

  현재 우리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에는 이명박 정부와 한국 기독교, 그리고 정치적 보수주의가 동일시되고 있다. 그러면서 기독교의 대사회적 이미지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에 진보적 기독교는 자신의 사회참여를 보다 적극적이고 설득력 있게 수행하면서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반전시킬 필요가 있다.
  진보적 기독교가 사회참여를 제대로 해나가려면 우선적으로 지금까지 이뤄진 기독교의 사회참여과정을 검토해야 한다. 196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전개돼온 한국기독교의 사회참여는 크게 네 가지 부문운동들, 곧 노동자・빈민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시민운동으로 나뉠 수 있다. 과거에는 한국기독교가 이런 운동들을 통해 우리 사회와 경제의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형성에 적지 않게 기여해왔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이런 기독교운동들은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본 논문은, 한국기독교가 이런 한계를 돌파하면서 설득력 있는 사회참여를 전개할 수 있기 위해 수행해야 할 사회경제적 과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경제적 민주화의 추구, 대안적 사회경제모델의 구상, 북한경제위기의 시스템적 해결책 모색, 기독교 시민운동의 급진화, 대안교회의 설립이 그것이다.


주제어: 한국기독교의 사회참여, 경제적 민주화, 기독교 시민운동, 대안교회



1. 들어가는 말

  종교-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기독교는 동질적이지 않다. 한국기독교는 크게 보수적 부문과 진보적 부문으로 나뉜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보수적 기독교는 현실정치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고 있고, 보수 정치세력도 보수적 기독교를 활용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 진영과 보수적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연대했고, 그 결과 이명박 정부가 탄생했다. 이를 계기로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면서 진보세력의 상징으로 간주되던 한국기독교는 근자에 들어와 보수세력의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다.
  현재 우리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에는 ‘이명박 정부 = 한국기독교 = 정치적 보수주의’ 라는 등식이 각인돼있다. 그런데 이 등식은 한국기독교의 앞날을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다. 가뜩이나 ‘개독교’로 불릴 만큼 기독교의 대사회적 이미지가 악화되고 기독교인구가 감소하면서 기독교의 위기가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상황에서 이런 부정적 등식화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기독교에 큰 타격을 가하고 있다. 이 등식화로 인해 이명박 정부와 정치적 보수주의에 염증을 느끼는 의식 있는 시민들, 특히 젊은 세대와 기독교의 거리는 더 멀어지고 있다.
  한국기독교 전체가 정치적 보수주의를 표방한다고 싸잡아 비판받는 것은 진보적 기독교 진영에게는 억울한 일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는 다른 형태의 기독교를 추구한다고 강변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판단해보면 대중의 이런 인식에는 객관적이고 타당한 부분이 적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실천하지 않는 진보는 정치세계에서는 진보일 수 없고, 오히려 소극적 의미의 보수로 간주된다. 정치에는 중립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 전체가 정치적으로 보수주의를 표방한다는 대중의 인식에는 기독교의 보수적 부문이 주류라는 사실과 아울러 기독교의 진보적 부문이 수행하고 있는 사회참여가 침체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한국기독교가 정치적 보수주의를 옹호한다는 세간의 주장에 대해 진보진영의 기독교도 일정정도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다면 진보적 기독교는 이명박 정부와 한국기독교, 그리고 정치적 보수주의가 동일시되는 대중의 인식 틀을 수정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진보적 기독교 진영은 자신의 사회참여를 보다 적극적이고 설득력 있게 수행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대중에게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기독교도 건재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고는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전개된 한국기독교, 특히 진보적 기독교 진영의 사회참여과정을 몇 가지 흐름들로 나눠 정리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흐름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앞으로 한국의 진보적 기독교가 사회참여를 전개하면서 추구해야 할 방향성, 그리고 수행해야 할 과제들을 사회경제적 측면에 초점을 맞춰 설정할 것이다.

2. 기독교의 사회참여에 대한 검토

  앞으로 진보적 기독교가 사회참여를 제대로 해나가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이전부터 지금까지 이뤄진 기독교의 사회참여과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자취를 철저히 파악할 때에야 비로소 미래의 방향을 올바로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한국기독교의 사회참여는 크게 네 가지 방향에서 진행돼왔다. 노동자ㆍ빈민운동,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시민운동이 그것이다.

1) 노동자ㆍ빈민운동
  노동자에 대한 선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산업전도를 시행한 1957년부터 시작됐다. 이어서 몇몇의 교단들이 산업전도에 합류했다. 산업전도는 공장 노동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산업전도는 노동자의 권익과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산업선교로 진일보했다. 이에 따라 그 명칭도 ‘도시산업선교’로 바뀌었다.
  도시산업선교는 노동운동의 전면에 나서 노동조합의 결성, 교육, 단체행동 등을 적극 지원했다. 도시산업선교는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 이후 노동운동에 대한 도시산업선교의 영향력은 급격히 감소했다. 그 이유는 첫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일반 노동운동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성장하면서 도시산업선교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도시산업선교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던 해외교회들이 원조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도시산업선교와 함께 일어났던 선교활동은 빈민선교였다. 빈민선교는, 1960년대 초 성공회가 부산에서 전쟁피난민 정착사업을 실시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다가 1968년 연세대학교에 ‘도시문제연구소’가 설립되면서 빈민선교는 본격화됐다. 그 후 경기도 광주대단지 사건이 발생하면서 더욱 강화됐다. 마침내 1971년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가 조직되고 답십리에 빈민센터가 설립됐다.
  1970년대 중반에 들어 빈민선교는 남미 해방신학의 기초공동체론과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의 민중교육론을 이론적 토대로 수용하면서 큰 발전을 이뤘다. 이때부터 빈민선교는 수도권을 넘어 지방 도시들로까지 확산돼갔다. 이로 인해 수도권도시선교회는 ‘한국특수지역선교회’로 개편됐다. 하지만 한국특수지역선교회는 얼마 지속하지 못하고 1979년 해체되면서 공식적인 빈민선교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빈민선교의 열기가 급속하게 식은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제시될 수 있다. 먼저, 빈민선교가 생활공동체의 형성에 주력하면서 주민조직은 활성화했으나 확장된 조직역량을 투쟁역량으로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 좁은 범위의 권익투쟁에만 치중하면서 전체 사회운동과 관련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한편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일반 사회운동은 체제변혁운동으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기독교 사회운동도 체제변혁을 추구하게 됐다. 이 시기 기독교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축은 민중교회운동이었다. 민중교회운동은 도시산업선교와 빈민선교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1983년부터 전개되기 시작했다. 민중교회는 예배, 신앙훈련, 야학, 공부방, 탁아소, 노동자교육, 건강교육, 의료진료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민중교회는 노동운동의 보호막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1983년 이후 노동운동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다소 누그러들기는 했지만 세속적 공간에서 노동자에 대한 교육이나 노동조합의 결성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민중교회는 노동운동의 요람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민중교회들은 1988년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을 창립하면서 운동의 구심점을 갖게 됐다.
  1980년대 말 동구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체제변혁을 지향하던 일반 민중운동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침체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민중교회운동도 여기서 예외일 수 없었다. 이런 정황에서 민중교회운동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1995년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은 총회에서 민중을 노동자, 도시빈민, 농민, 장애인, 여성, 양심수, 외국인 노동자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정의하면서 계급운동의 형태에서 벗어나 운동의 외연을 확장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2) 민주화운동
  1969년 박정희 정권은 영구집권을 위해 대통령의 3선을 가능케 하는 방향으로 헌법을 개정했다. 이에 진보적 기독교지도자들이 재야지도자들과 연대하여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개헌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면서 이 기독교지도자들은 따로 ‘염광회’라는 기독교모임도 조직해서 이중적으로 개헌반대투쟁을 벌여나갔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은 독재적인 유신헌법을 공포했다.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유신헌법에 저항했다. 기독교인 구속자가 늘어나고 정부의 인권탄압이 심해지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K)는 1974년 ‘인권위원회’를 창설했다. 인권위원회는 그 당시 고난당하는 이들의 인권을 적극적으로 수호하면서 인권운동의 구심점역할을 수행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력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 세력은 민주화운동진영을 탄압했다. 이에 기독교청년 김의기가 투신하고, 기독교노동자 김종태가 분신했다. NCCK 인권위원회는 이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1984년에는 진보적 목회자들이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를 결성하여 기독교민주화운동에 힘을 더했다.
  1987년 전두환 정권은 4・13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NCCK와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는 정권퇴진만이 민주화의 유일한 길이라며 강력히 저항했다. NCCK 인권위원회와 23개 지역 인권위원회는 직선제 개헌을 위한 서명을 전개했다.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는 정권퇴진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기도회에 돌입했다. 이런 개헌서명과 단식기도회는 전국에 있는 목회자들의 성명서발표와 금식기도회를 촉발시키면서 6월 민주화운동의 서막을 열었다.  

3) 통일운동    
  한국기독교는 1960년대만 하더라도 반공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진보적 기독교진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1972년 남북한 간의 7・4공동성명이 발표된 이후 NCCK는 통일운동의 중요성을 깊이 자각하게 됐다. 그리고 이런 자각 아래서 ‘통일 및 사회정의 기독교협의회’를 구성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 남한사회의 민주적 변혁이 민족통일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는 사회과학적 인식이 사회전반에 확산됐다. 기독교 진보진영도 이런 인식을 수용하면서 사회의 변혁이 통일의 성취와 별개가 아님을 강조했다. 나아가 민중이 통일운동의 주체임도 내세웠다.
  이 시기에 기독교계가 통일문제에 대해 보인 관심들은 1988년 NCCK가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으로 결실을 맺게 됐다. 이 선언은 통일문제와 관련해서 한국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 선언을 계기로 금기시되던 통일논의가 자유로워지고 민간 측 통일운동이 급격히 확산됐다. 또한 정부의 ‘7・7선언’이 이어지면서 남북한 간의 총리급 회담이 열리게 됐다. 마침내 1991년에는 ‘남북의 화해와 불가침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조인됐다.
  북한경제는 1990년부터 1998년까지 마이너스 성장을 계속했다. 이에 보수적 기독교진영이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1990년과 1991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사랑의 쌀 나누기운동’과 ‘사랑의 의약품 보내기운동’을 전개했다. 이외에도 남북나눔운동, 한민족복지재단, 굿네이버스, 월드비전 등이 북한에 물자를 원조했다.
  근자에 들어 진보적 기독교진영도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평화공동체운동본부는 2008년부터 북한주민과 ‘국수 한 그릇 나누기’ 캠페인을 벌이면서 밀가루를 북한으로 보내고 있다. 또한 NCCK도 2009년 북한 어린이들을 위한 ‘분유보내기운동’을 출범시켜 북한에 분유와 밀가루를 지원하고 있다.

4) 시민운동
  권위주의적 정치체계가 지배하던 시절 사회운동은 민중운동과 동일시됐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가 도입되면서 사회운동은 체제변혁을 지향하는 민중운동과 체제 내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시민운동으로 분화됐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80년대 말 민중운동이 이념적으로 기대고 있던 동구사회주의가 붕괴됐다. 게다가 새로 들어선 노태우 정권이 민중과 중산층으로서의 시민을 분리시키면서 민중의 저항을 탄압했다. 이로 인해 시민운동은 민중운동을 압도하게 됐다.
  사회운동의 이런 지형변화는 기독교 사회운동진영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민주화운동 이전의 기독교 사회운동은 민중운동적 성격을 강하게 지녔다. 그 당시 기독교 사회운동은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면서 기존의 사회경제적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려는 급진적 종교운동이었다. 하지만 일반 사회운동이 분화되면서 기독교 사회운동도 기독교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으로 나뉘게 됐다. 나아가 일반 사회운동의 구도가 그대로 반영되면서 후자가 전자를 제치고 기독교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잡게 됐다.
  기독교 시민운동은 환경운동, 여성운동, 이주노동자운동 등 다양한 부문에 걸쳐 전개됐다. 진보적 기독교진영이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시민사회적 이슈는 환경문제였다. 1981년 ‘한국공해문제연구소’가 설립됐는데 몇 차례의 조직 확대를 거쳐 1996년 ‘기독교환경운동연대’로 개편됐다.
  한편 1980년대에 들어와 기독교의 보수적 부문에서도 사회참여의 흐름이 생겨났다. 이로 인해 한국기독교의 전통적 등식, 곧 신학적 보수주의 = 정치적 보수주의, 그리고 신학적 진보주의 = 정치적 진보주의가 부분적으로 유효하지 않게 됐다. 보수적 부문의 사회참여, 그리고 바로 앞에서 지적된 기독교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분화를 고려해보면 이 시기부터 한국기독교 안에는 크게 네 부류의 집단이 존재하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곧 신학적으로 보수적이고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집단, 신학적으로 보수적이고 정치적으로 개혁적인 집단, 신학적으로 진보적이고 정치적으로 개혁적인 집단, 신학적으로 진보적이고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집단이 그것이다.
  신학적으로 보수적이지만 정치적으로는 개혁적인 지식인들이 198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을 결성해서 기독교시민운동을 전개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검소절제운동, 교회갱신운동, 음란문화추방운동 등을 펼쳤다. 1989년에는 개혁적인 복음주의 청년들이 한국사회의 대표적 시민운동단체 가운데 하나인 경제정의실천연합을 설립했다. 경제정의실천연합은 주택문제와 재벌문제를 비롯한 경제정의문제에 관심을 집중했다.  
  개혁적인 복음주의자들이 시민운동을 펼치게 된 배경으로는 보수적 기독교진영이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에 침묵으로 일관해왔던 역사적 과오에 대한 철저한 반성, 그리고 기독교 진보진영이 사회참여와 관련해서 지녀왔던 도덕적 우위성에 대한 적극적 대응을 들 수 있다. 이런 배경 아래 시민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던 개혁적인 복음주의자들은 1990년대에 들어서 기독교 시민운동의 주도세력으로까지 성장하게 됐다.
      
3. 경제적 민주화의 추구

  1960년대부터 1987년까지 기독교 사회운동은 주로 정치적 민주화 실현에 진력했다. 하지만 그 이후 기독교 사회운동은 일반 사회운동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문제에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계층 간 불평등구조가 급격하게 심화됐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시장의 불평등효과를 완화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 그런데 민주화운동을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가 구현된 이후 한국사회에는 시장의 불평등구조를 제어할 사회경제적 제도가 구축되지 못했다.
  이런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기독교 사회운동은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 경제적 민주화로까지 관심의 지평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근자에 와서 이명박 정부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오늘의 기독교 사회운동이 퇴보하고 있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것은 근시안적이라고 판단된다.
  현재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중심 메커니즘은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는 경쟁과 효율만을 강조하면서 강자의 이해관계가 관철되는 방향으로 사회경제구조를 재구성하고 있다. 이런 신자유주의가 주는 폐해는 실로 막대하다. 신자유주의의 수용으로 서민경제가 파산상태에 이르고 있다. 청년실업자가 넘쳐나고 비정규직노동자의 비율이 증가하고 영세자영업자가 새로운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런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국기독교는 거시적인 전망을 가지면서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경제적 민주화의 구현을 정부에게 강력하게 촉구할 필요가 있다. 본래 민주화란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자신과 관련된 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맥락에서 경제적 민주화란 모든 경제주체들이 자신의 경제활동과 관계된 결정과정에 관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기독교가 이런 경제적 민주화를 실현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정부를 향해 경제정책 거버넌스(governance)의 구축을 요구해야 한다.
  전통적인 경제정책론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가 직접적으로 경제적 민주화를 실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경제적 민주화는 경제정책을 통해 구현될 수 있는데 경제정책의 수립・시행주체는 기독교와 같은 종교조직이 아니라 정부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시민사회와 더불어 정부가 구사하는 경제정책이 올바른 궤도에 들어서도록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와 시민사회는 경제정책의 압력주체라고 규정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통상적 구분법이 기계적으로 적용될 경우 경제적 민주화에 대한 기독교나 시민사회의 기여도는 상당정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경제정책 거버넌스이다. 경제정책 거버넌스란 경제부문에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통치하는 대신 시민사회와 협력하여 국정을 운영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특별히 경제정책의 수립과정에서 정부와 시민사회가 협력하는 방식을 뜻한다.
  경제영역에서 시장도 실패하지만 정부도 실패한다. 지금과 같이 경제위기가 닥친 경우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개입이 제안되지만 이때에도 정부가 실패할 가능성은 낮지 않다. 이런 이유에서 시장의 실패를 역설하며 정부의 개입만을 내세우는 입장은 적절하지 않다. 정부의 개입으로 생겨나는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는 경제정책의 수립과정에 시민사회가 관여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기독교는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이명박 정부에게 경제정책 거버넌스의 구축을 지속적으로 요청해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를 비롯한 시민사회의 많은 주체들이 경제정책에 관한 정부의 각종 정보를 제한 없이 제공받으면서 경제정책수립과정에 참여하는 상시적 통로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4. 대안적 사회경제모델의 구상

  이제까지 한국기독교의 사회참여는 정부와 보수기득권층을 비판하는 네거티브 전략에 의존해왔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달라졌다. 지금은 비판만 할 때가 아니라 대안도 제시해야 할 시기다. 그럼에도 기독교 진보진영은 여전히 외부사회와 기독교내부에 포진해 있는 보수세력의 행태와 제도화에 비판만을 가할 뿐 긍정적인 방향에서 어떤 사회경제적 모델로 나가야 하는지에 관해 거의 언급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기독교 진보진영의 대중적 설득력과 현실적응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는 기독교 진보진영이 대안적 사회경제모델을 제시하지 못하는 이유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결정적인 것으로는 시장경제체제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를 꼽을 수 있다. 실제로 진보적 기독교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시장경제 자체를 악마적인 경제체제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적절하지 않다. 그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다.
  첫째, 시장은 높은 구체화가능성을 보유하기 때문이다. 사회를 조직하는 원리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교환, 경쟁, 선물, 연대가 그것이다. 교환은 대가를 제공하면서 주고받는 것이지만 선물, 곧 호혜성(reciprocity)은 대가 없이 주고받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환은 선물과 대립한다. 경쟁과 반대되는 것은 물론 연대다. 이 가운데 교환과 경쟁은 시장의 원리인 반면, 선물과 연대는 공동체의 원리다.
  공동체의 원리가 시장의 원리보다 더 윤리적임에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의 원리가 익명적이고 거대하고 복잡한 현대사회의 중심적 원리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지 부차적 혹은 보완적 원리로만 기능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상적 성향을 지니고 있어 현대사회에서 구체화될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반면 시장의 원리는 윤리성에서 떨어지지만 구체화가능성은 높은 편이다. 따라서 시장의 원리는 현대사회의 중심적 원리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지난 4-5세기 동안 사람들이 시장을 그토록 부정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이 건재하고 있는 결정적 이유일 것이다.        
  둘째, 현실적으로 시장경제체제는 현 인류에게 남은 유일한 경제체제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실질적으로 기능해온 경제체제에는 두 가지 형태만이 존재할 뿐이다. 곧 상품의 배분을 정부가 담당하는 중앙관리경제체제와 그것을 시장에 맡기는 시장경제체제가 그것이다. 이런 정황에서 시장경제체제를 부정한다는 것은 곧 바로 중앙관리경제체제의 수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중앙관리경제체제의 비효율성이 역사적으로 입증됐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중앙관리경제체제의 도입을 주장할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시장경제체제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곧 시장경제에는 한국의 파워엘리트들이 모범으로 삼고 있는 미국식 시장경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시장경제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존재한다. 이런 형태들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미국식 자유주의적 시장경제,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 스웨덴식 민주주의적 시장경제, 중국식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들 수 있다.
  자유주의적 시장경제는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만을 강조하는 모델인데 반해, 사회적 시장경제는 자유경쟁을 강조하되 경쟁에서 떨어져나간 사회경제적 약자를 사회적 안전망으로 감싸 안는 모델이다. 사회적 시장경제의 특수한 형태인 민주주의적 시장경제의 경우 사회적 시장경제에서보다 국가가 분배문제에 더 강력하게 개입한다.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는 상품배분은 시장에 맡기되 생산수단, 특히 대규모 생산수단은 공동으로 소유하는 모델이다.
  자유주의적 시장경제는 경쟁에서 밀려난 사회경제적 약자의 처지를 이해하면서 그들을 전체사회 안으로 통합시킬 수 없다는 약점을 지닌다. 더욱이 이번 국제금융위기를 통해 시장의 자율성이 시장의 자기조정으로 연결되지 않고 오히려 파괴적일 수 있음이 입증됐다. 한편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는 생산수단의 공동적 소유를 주장하기에 현재 한국의 사회경제적 상황에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이상주의적 경제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남은 것은 사회적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적 시장경제다. 물론 우리사회는 독일이나 스웨덴과 좌파정부경험, 노조조직률, 인구규모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두 경제모델들을 우리사회에 기계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한국사회가 미국식 시장경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을 구축하는데 적지 않은 참고가 될 수 있다. 이에 한국기독교는 독일식 시장경제와 스웨덴식 시장경제의 구조나 내용을 심도 있게 검토하면서 대안적 사회경제모델을 구상하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

5. 북한경제위기의 시스템적 해결책 모색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최근 들어 보수적 기독교진영뿐만 아니라 진보적 기독교진영도 북한주민에 대한 식량이나 의료품 지원에 주력하고 있다. 이런 물자원조는 기아상태에 빠져있는 북한주민들에게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일 수 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그들의 경제적 삶을 안정화시킬 수 있는 시스템의 구축이란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임시방편적 조치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평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북한당국이 사회구성원들의 빈곤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장기적으로 지금의 경제체제를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실제로 북한정부는 이런 인식 아래서 2002년부터 대대적으로 시장경제적 요소를 도입해왔다. 그 내용의 골자는 식량배급제의 단계적 폐지, 기업자율권의 확대, 달러대 원화환율의 현실화, 가족영농제의 도입, 생산된 곡물의 개인처분권 확대 등이다. 이런 시도들로 인해 현재 북한경제에서 시장경제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은 3분의 1을 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09년 북한당국은 경제주체들에 대한 내부단속을 강화하기 위해 11・30 화폐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그 핵심은 시장경제부문을 축소하고 중앙관리경제부문을 확대하려는 데 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실패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화폐개혁 이후 물자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물가와 환율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다.
  북한정부는 겉으로는 중앙관리경제를 강화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시장경제를 채택하지 않으면 돌파구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북한당국은 내부적으로 공산당독재를 보장하면서 경제특구 개발을 중심으로 시장경제의 점진적 확대를 시도한 중국식 경제패러다임을 긍정적으로 검토한 바 있다.
  북한에 유일하게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국도 북한이 자신의 사회경제적 모델을 본받아 개방의 길을 걷게 하려고 노력해오고 있다. 게다가 금년 5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방문을 계기로 북한이 점진적인 방식으로나마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도입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사실들로 미뤄볼 때 단기적으로는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겠지만 장기적으로 북한경제는 중국식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리라고 전망된다.
  북한이 어떤 경제모델을 추구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일차적으로 북한당국과 주민들에게 맡겨놓는 것이 올바른 태도다. 그럼에도 남한의 역할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남한은 앞으로 형성될 민족공동체의 분명한 일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북한경제에 대한 남한기독교의 책임과 임무가 주어진다.
  앞으로 한국기독교는 경제학자 및 경제전문가와 협력하여 이론과 실제의 측면에서 시장시스템에 미숙한 북한당국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또한 새로운 경제체제로의 전환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북한을 재정적으로 보다 충실하게 원조할 필요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기독교는 최근 발표된 ‘평화와 통일을 위한 한국교회 3·1선언’이 제시한 방안, 곧 지역교회들이 자체 예산의 1%를 떼어 평화기금을 조성하는 방안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
  
6. 기독교 시민운동의 급진화

  일반 사회운동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사회운동에서도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연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기독교 민중운동이 소멸했기 때문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기독교 민중운동은 미약하게나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아니면 사회구성원들의 소득수준이 향상되면서 민중의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일까? 이것 또한 그렇지 않다. 우리사회의 상대빈곤율이 2000년 10.5%에서 2008년 14.3%로 증가하였다는 사실에서 확인될 수 있듯이 민중의 수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사회운동 내에서 민중적 이슈가 사장되고 있는 것은 운동의 헤게모니를 잡은 기독교 시민운동이 퇴행적이고 반(反)복음적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우리사회의 음지에는 아직도 철거민이 존재하고 영세공장 노동자가 존재한다. 기독교의 복음이 내세우는 핵심적 메시지가 하나님 나라인 한 우리사회에 가장 밑바닥에 있는 민중의 권익은 계속 옹호돼야 한다. 그리고 이것만이 한국기독교가 이제까지 전개해온 사회참여의 전통을 되살리는 길이다.
  원론적인 의미에서 현대 시민운동은 계층운동이 아니다. 오늘의 시민운동에서 얘기하는 시민은 근대유럽에서 말하는 유산시민(bourgeois)과 동일시될 수 없다. 현대 시민운동에서 가리키는 시민은 국가시민(citoyen), 곧 인권과 기본권을 보장받고 정치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사회구성원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의 시민운동에서 이런 시민의 보편성이 항상 관철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런데 시민운동이 시민의 보편성에 철저하지 않으면 그것은 계층운동으로 전락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민중의 권익과는 무관한 중간층운동으로 귀착하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시민운동은 민중운동과 갈등하면서 양자 간의 연대가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안타깝게도 이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 민중운동진영의 진단에 따르면 현재 기독교 사회운동은 민중의 문제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민중신학을 공부하는 신학생들이 졸업 후 민중교회로 진출하지 않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선교기관이나 교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은 세입자들의 처지를 직접적으로 대변해주는 현장교회가 거의 없다. 이런 사실들은 기독교 사회운동의 주류인 시민운동이 중간층운동으로 굳어져가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앞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기독교 시민운동이 형성되는 초기부터 정부가 바닥계층으로서의 민중과 중간계층으로서의 시민을 분리시키면서 민중운동을 탄압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민중운동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때부터 생겨난 기독교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분리가 지금까지 관성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리구조에 균열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기독교 시민운동이 보다 급진화돼야 한다.
  필자가 기독교 시민운동이 민중운동과 연대해야 한다고 제안한다고 해서 과거처럼 기독교 사회운동이 민중운동에 의해 주도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현재의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바닥계층으로서의 민중은 수적인 측면에서나 영향력 측면에서 사회운동을 주도하기 어렵다. 그래서 민중운동만으로는 사회전체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이런 한계로 인해 민중운동은 시민운동과 결합될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이 민중을 포괄적인 개념으로 정의하면서 민중운동의 외연을 확장하려고 했던 노력은 긍정적으로 평가돼야 한다. 이제 기독교 민중운동진영은  변화된 정치적, 사회경제적 조건을 애써 외면하면서 기독교 시민운동을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독교 시민운동진영과 보조를 맞추면서 그들로 하여금 민중적 이슈를 수용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7. 대안교회의 설립

  앞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한국기독교 사회참여의 실질적 주체는 소수의 기독교적 엘리트들과 기독교연합기구들, 특히 NCCK였다. 하지만 기독교 사회참여의 주체는 이런 지도자적 인물이나 연합단체에만 한정될 수 없다. 보통의 기독교인과 지역교회도 엄연한 주체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기독교는 사회참여의 주체를 다양화해서 평범한 기독교인들과 지역교회들도 사회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한국기독교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신앙인을 일반 사회운동이나 기독교 사회운동에 참여시켜 한국사회의 인간화에 기여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개개의 기독교인들을 각성된 시민으로 교육하는 것은 기독교가 우리사회의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형성에 공헌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불충분하다.
  대부분의 지역교회들에서는 ‘기독교인은 개별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할 수 있지만 그가 속해 있는 교회의 이름으로 사회운동을 전개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암묵적으로 세워져있다. 적지 않은 진보적 교회들에서조차 이런 원칙들이 관철되고 있다. 하지만 전체사회의 측면에서 보면 이런 원칙은 나이브하다.
  사회개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속한 지역교회를 통해 사회운동에 관여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지역교회와 상관없이 개별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만큼이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보다 엄밀하게 판단해보면 사회운동에의 교회적인 참여가 개별적인 참여보다 사회를 개혁하는데 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의 동원이란 측면에서 지역교회와 사회운동진영은 서로 경쟁관계 내지 갈등관계에 놓이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이상 지역교회에 출석하면서 소득의 10%가 넘는 금액을 헌금하는 기독교인이 사회운동단체를 시간적이고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말하는 것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노동의 강도가 증대되고 소비수준이 소득수준에 비해 빠르게 상승해가는 현대인의 생활조건에서 교회활동과 사회운동 모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개별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권유될 수 있어도 그들이 속한 지역교회가 자체적으로 사회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지닐 수 없다. 지역교회 자체가 사회운동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한 전체 기독교계의 사회참여는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사회참여는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적 차원에서도 이뤄져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지금까지 지역교회가 기독교 사회운동의 뒷전으로 물러나 있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역교회가 위치한 지역에는 자영업자, 주부, 비경제활동 노인 등이 살고 있는데 이들의 수가 임금노동자의 수에 맞먹는 1천 5백만 명에 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더욱 그러하다. 이들을 사회의식 있는 시민으로 만드는 것은 한국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해당지역을 진보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지역교회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에 있다. 두루 아는 바와 같이 수적인 면에서나 영향력 면에서 보수적 교회들은 진보적 교회들을 압도하고 있다. 심지어 진보적인 목회자들이 섬기는 교회들도 보수화돼있는 것이 우리의 교회적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기존의 보수적인 교회들을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방향으로 개혁할 수 있을까? 보수적인 교회의 상층부가 이제까지 지속되어온 교회의 구조나 방향을 바꾸는 일에 동의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관성이 주는 무게를 생각해보면 이런 개혁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구도보다는 진보성을 담보하면서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 대안교회들이 새로 설립되는 방안이 더 현실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첫째는 대안교회를 지향하는 목회자의 경제적 생활을 어떻게 안정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정치적이고 신앙적으로 보수적인 교회들이 주류를 이루는 상황에서 진보적인 신앙을 내세우는 대안교회가 해당지역에 자리를 잡고 일정 궤도에 들어서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주류교회에 대해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춘 대안교회가 뿌리내리는 데는 적지 않은 세월이 소요될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대안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이 이런 과도기를 큰 위기감 없이 통과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들 목회자와 교인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교단을 향해 목회자최저생활보장제의 도입을 지속적으로 촉구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대안교회 설립을 위한 기금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어떤 지역에 대안교회를 설립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치밀한 전략 없이 아무 곳에나 대안교회를 설립하는 것은 기독교 사회운동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앞으로 세워질 대안교회들은 자신이 위치한 지역을 진보적으로 재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신중하게 타진해야 한다. 현재 이런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빈곤계층이나 중하위계층이 거주하는 영구임대아파트단지나 국민임대아파트단지다. 대안교회들을 꿈꾸는 진보적 목회자들은 이곳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사회운동을 비롯한 모든 사회운동이 쇠퇴하게 된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지역적 분산이다. 함께 거주하지 않으면 운동성은 현저하게 떨어지는 법이다. 영구임대아파트나 국민임대아파트의 건립은 가정경제적 차원에서 서민들의 주거생활을 안정화시킬 수 있는 정책방안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사회운동의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는 고무적인 조치이기도 하다. 기존의 사회경제적 질서와 제도에 비판적일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사회경제구조의 구축을 간절히 희구하는 서민들이 함께 거주하며 사회운동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새로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은 대안교회가 결코 간과하거나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대목이다.

8. 나오는 말

  이제까지 우리는 진보적 기독교 진영을 중심으로 전개돼온 한국기독교의 사회참여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그 토대 위에서 경제적 민주화의 추구, 대안적 사회경제모델의 구상, 북한경제위기의 시스템적 해결책 모색, 기독교 시민운동의 급진화, 대안교회의 설립을 기독교 사회참여의 과제로 설정해보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절차적 민주주의마저 흔들리고 있다. 그럼에도 정부의 국정지지도가 상승세를 타고 있다. 이는 상당부분 정부가 내세우는 사회경제적 차원의 친 서민정책 덕분이다. 정부는 서민들의 보육비, 사교육비, 통신비를 줄이는 방안을 실시하고, 서민들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 보금자리주택 건설을 시행하고, 최근에는 미소금융방안까지 실행에 옮겼다.
  비민주적인 통치방식을 구조화하고 있음에도 정치적 기반이 공고해지고 있는 이명박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진보진영도 서민들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정책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진보적 기독교 진영을 향한 필자의 과제 설정이 사회경제적 측면에 집중된 것이다. 물론 여기서 제시된 방안은 시론적인 것이어서 앞으로 보다 구체화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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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소개) 2

다문화, 다인종 사회에서의 정체성 문제: 디트리히 본회퍼의 “폴리포니”를 중심으로


                                                                                              김현수(장신대 강사/기독교윤리)
초록

오늘날 우리는 다문화, 다인종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한 장소에서 다양한 문화와 언어, 피부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다문화, 다인종 시대에 신학과 기독교윤리가 다루어야 할 대표적인 과제가 “어떻게 타자와 함께 살아갈 것인가?”이다. 이 문제를 다룰 때에, 핵심적인 문제가 바로 “정체성”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타자가 함께 살아가는 다문화, 다인종 사회에서 과거와 같은 단일한 정체성이 아니라, 복잡한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인의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해오는 데 기여한 “우리의식”은 다문화, 다인종 시대에는 심각한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한국인의 “우리의식”은 학연, 혈연, 지연 등의 같음에 기대는 “동일성으로의 정체성”을 강조함으로써, 타자에 대한 배타의 논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필자는 다문화, 다인종 시대에는 포스트콜로니얼 학자들이 제시하는 잡종 정체성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필자는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하는 폴리포니의 삶이 이러한 정체성 인식에 도움을 준다고 보면서, 그가 말하는 폴리포니의 삶을 분석한다. 본회퍼의 폴리포니는 분리될 수 없지만, 분명히 구별되는 삶의 세 가지 동시성을 이야기한다: 하나님과 세계, 한 개인 안에서의 축복과 고통, 그리고 자아와 타자. 이러한 본회퍼의 폴리포니는 타자와 함께 살기 위하여, 다양한 목소리를 지닌 타자의 타자성을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러한 타자성에 열려 있으려면, 포스트콜로니얼 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우리 자신에게 내재하는 상이하고 혼합적이며 다차원적인 삶과 정체성을 의식해야 한다. 필자는 이러한 타자성과 다양성에 대하여 열려있는 통찰이 같음의 정체성을 요구하는 우리의식에 대하여 대안적 삶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주제어: 다문화와 다인종 시대, 정체성, 우리의식, 디트리히 본회퍼, 폴리포니




1. 서론: 문제 제기
오늘날 우리는 다문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다문화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한 장소에서 다른 문화와 다른 피부색깔,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다문화시대는 타자와 함께 살아가기를 고민해야 하는 시대이다. 박흥순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와 같은 다문화시대에 타자와 함께 사는 과제를 해결하는 데 정체성(identity)의 문제가 핵심으로 등장한다. 다양한 인종이 함께 어우러져 살 수밖에 없는 다문화시대에는 ‘나(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청되기 때문이다.
다문화시대에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과거와 같이 단순하고 분명한 ‘나’ 혹은 ‘우리’의 정체성이 불가능하다는 반성을 전제한다. 예를 들어 ‘단일민족’이나 ‘백의민족’ 같은 정신이 우리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형성해 왔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한민족’이라는 하나의 태생적 동일성 때문에,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다문화 시대에 이러한 ‘같음으로서의 정체성’은 심각한 도전을 받는다. 왜냐하면 다문화 시대는 다양하고 복잡한 상황이 동일성에 기초한 ‘나’ 혹은 ‘우리’의 정체성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를 잘 보여주는 것이 우리가 전통적으로 ‘혼혈아’라고 부르는 국제결혼한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정체성이다. 소위 “코시안”이라고 불리는 한국인과 아시아의 다른 나라출신의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의 정체성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 그(녀)는 한국인인가? 아니면 아시아인인가? 아니면 한국인으로 우리에 속하기도 하고, 아시아인으로 우리이기도 한 제 3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전통적으로 우리는 이러한 혼혈아를 ‘튀기’라 부르며 멸시해왔다. 이러한 멸시의 배경에는 혼혈아가 단일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더럽혔다는 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다문화 시대에서 우리가 다양한 문화와 인종, 언어를 가진 사람들과 공존하기 위해서, 필자는 이러한 의식을 극복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으로 이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이 글을 전개함에 있어서, 필자가 암묵적으로 따르는 방법론은 막스 스택하우스(Max L. Stackhouse)가 제시하는 “에토스론(ethology)”이다. 스택하우스에 따르면, 에토스란 “한 사회적 실재 혹은 일단의 사회적 실천들과 관련하여 한 문화 내에서 기능하며 영향을 미치는 여러 규범들을 구성하고 있는 가치, 기준, 의무, 덕, 확신, 관습, 목적, 기대 그리고 합법화 등의 복합적인 망상조직”이다. 이상훈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러한 에토스론은 기본적으로 한 사회 내에서 종교에 의해 형성된 도덕 혹은 윤리적 체계가 그 사회의 사회, 문화, 경제적 체계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는 베버(Weberian) 테제를 공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에토스론에 따라서, 필자는 우리의 혼혈아에 대한 전통적 멸시가 우리의 정체성 형성에 의식을 미친 문화사회적 에토스에 기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필자가 말하는 우리의 전통의 문화사회적 에토스는 공동체를 중시하는 유가적 전통에 영향 받았다고 보이는 ‘우리’ 의식이다. 우리민족은 ‘나’라고 불려야 하는 많은 상황에서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심지어는 ‘내 남편’ 혹은 ‘내 부인’이라고 해야 할 때에도 ‘우리 남편’ 혹은 ‘우리 부인’이라고 표현한다. 이러한 우리의식은 동일성(sameness)에 기초한 동질의 정체성(homogeneous notion of identity)을 가진 ‘나’ 혹은 ‘우리’를 요구한다. 이러한 정체성은 피와 지역, 혹은 학교가 같은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수용성을 보이는 반면에, 그러한 배경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강한 배타성을 보인다. 특히 이러한 우리의식이 순혈주의(blood-purism)를 수반할 때에, 피를 더럽힌 혼혈아에 대한 멸시라는 무의식적 행동을 자아낸다. 따라서 다문화시대에 ‘타자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같음으로의 전략인 우리의식을 비판적으로 지양할 수 있는 새로운 에토스가 요청된다.
필자는 그 한 계기를 포스트콜로니얼 학자들이 내세우는 주요한 개념 중의 하나인 혼합성(잡종성, hybridity)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 혼합성에 따르면, 다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어떤 누구도 순수하고 단일한 정체성을 주장할 수 없다. 한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은 이미 혼합적이고 복합적이며 항상 변화한다. 조금 과장한다면, 다문화 시대에는 누구나 혼혈아로서의 자신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결혼을 전제하는 섞임은 아닐지라도 오늘날 누구나 문화와 언어의 섞임 시대, 즉 퓨전(fusion)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계 미국인 신학자인 조원희(Wonhee Anne Joh)는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자신이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잡종 정체성(hybrid identity)을 옹호하는데, 바로 이러한 의식이 다문화 시대에 타자와 살아가는 데 많은 통찰을 제시한다고 보인다. 이 글에서 필자는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하는 “폴리포니(polyphony)”의 삶이 각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의 정체성이나 삶이 바로 이와 같은 혼합성의 삶을 제시한다고 분석할 것이다. 그리하여 본회퍼의 폴리포니가 같음과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호모포니(homophony)의 우리의식을 비판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신학적 에토스를 제공할 수 있음을 보이려고 한다.
이를 위하여 필자는 먼저, 한국인의 전통적인 문화적 에토스인 우리의식이 혼혈아와 같은 다문화 시대에서 태어나는 사람을 타자로 전락시켜 배제하는 논리를 간단하게 분석할 것이다. 그러한 연후에 본회퍼가 말하는 폴리포니의 삶을 제시하고, 결론적으로 그에 대한 몇 가지 평가를 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2. 한국인의 ‘우리’ 정체성
한국 문화심리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최상진 교수는 서양인과는 달리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매우 어색한 것임을 보여준다. 오히려 한국인에게는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공동의 정체성에 관한 물음이 더 자연스럽다. 한국인의 자아(the self)에 대한 발견은 이 ‘우리’의 물음을 떠나서는 생각될 수 없다. 그래서 한국인은 항상 우리라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과 관련하여 자신을 정의하는 일에 익숙해 있다. ‘나’는 항상 우리에 속한 어떤 사람의 남편, 부인, 아들과 딸, 혹은 친구로 이해되지, ‘나’라는 독립적 정체성을 가진 개별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 공동체 속에서 각 개인은 자기-함몰적, 혹은 “개인의 마음을 사회의 질서나 목표에 합일화시켜야 한다는 사회지향적 자기관”을 가지게 된다. 우리의 한 부분자로서, 그 우리공동체에 의해서 주어진 자기역할을 함으로써 각 개인은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문화 시대에 필요한 대안의 정체성을 논의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라고 하는 고유한 문화적 에토스에 의해 형성되어 한국인들에게 내재된 집단적 ‘우리’ 정체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식은 한국인의 인간관계를 결정하는 사회적 관계의 그물망이다. 그래서 최상진 교수는 한국인의 인간관계의 궁극적 목표가 “우리성” 의식의 형성을 통한 “우리편 만들기”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우리’란 무엇인가?  최교수는 ‘우리’를 한국인이 가진 독특한 사회심리학적 개념으로 제시하면서, “‘우리’는 ‘나’와 ‘너’가 분리된 단위가 아니라 통일된 존재로서의 독특한 집단정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무는 하나 됨의 관계성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한국인의 ‘우리’ 의식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식에 기초한 한국인의 우리정체성 혹은 우리공동체의 구성은 ‘같음으로의 전략’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됨’의 경험은 사회적 관계에서 유사성이나 동일성 지각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최상진 교수가 지적하듯이 “고교 동창이다,” “같은 회사에 다닌다,” 혹은 “같은 고향 사람이다”와 같은 동일성 의식으로부터 나와 너를 하나로 묶어주는 우리의식이 잘 발생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피를 나눈 가족의 경우가 ‘우리의식’과 정체성을 가장 친근하게 느끼게 한다. 결국 ‘우리’라는 정체성 의식은 동질성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최교수는 “‘우리’는 자기와 타인(들)이 공통성이나 관계 유사성의 인식을 통해 상호동질감을 경험함으로써 형성되는 사회인지적 집단정체”라고 결론 내린다.
같음으로의 전략인 우리정체성의 형성에 가장 중요한 것이 ‘정(情)’이라고 하는 감정적 기제이다. 정은 ‘나’와 ‘너’를 ‘우리’로 묶어주는 정감으로 일종의 접착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한국인에게 정이란 “상대를 가족처럼 아껴주는” 사랑의 마음으로, 오랜 동안의 만남과 관심으로부터 생겨난다. 이러한 정이 없이는 우리라는 공동의 의식은 생겨날 수도 없고, 유지될 수도 없다. 그래서 최상진 교수는 “우리성과 정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우리성은 정이라는 심정성 감정을 전제로 해서 이루어지는 일체감의 인지이며, 정은 우리성의 관계에서 경험되는 감정적 질이다. 정이 없이는 우리성이 형성될 수 없으며, 우리성이 없이는 정도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 공동체가 하나의 그릇이라면, 정은 그 그릇에 채워진 내용물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정으로 맺어진 우리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은 “개인적인 주고 받음의 관계나 이익과 손해의 관점을 초월하는 비-교환적 관계들(non‐exchange relationships)”을 형성하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정이라는 감정적 기제 역시 ‘우리의식’과 같이 서로 동일한 연고와 특성을 공유할 때 잘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 ‘정’ 모두 동일화의 논리가 내재적 작용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문제가 드러난다. ‘우리’와 ‘정’에 내포된 ‘같음으로의 논리’는 ‘우리’에 포함되지 않은 타자에게는 강한 배타성을 행사한다. 최상진 교수가 지적하듯이, 우리라는 정체성을 자각하기 위해서는 우리에 포함된 대상과 포함되지 않은 대상을 뚜렷하게 구별하는 것이 필수적이므로, 우리에 포함되지 않은 타자에 대한 배타성이 강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한국인에게 타인의 의미는 ‘나’나 ‘우리’가 아닌 제 3자(third person)를 뜻한다기보다는 우리 속에 포함되지 않는, 마음으로 연결되지 않은 ‘거리가 먼’ 사람, 비호의적 관계에 있는 사람, 이질적인 사람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이질적인 사람”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 속하지 않은 타자가 ‘우리’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이질적인 사람’으로 인식될 경우, ‘우리의식’이 작용하는 배타성과 차별은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심리적 배타성을 외국인 이주 노동자나 혼혈아를 차별하는 심리적 근원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타자 만들기: 한국사회와 이주 노동자의 재현”이라는 글에서, 한근수는 어떻게 한국인들이 외국인 노동자들을 타자화함으로써 배척하고 차별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이렇게 타자화시키는 하나의 심리적 근거가 외국인 노동자를 “오염의 근원들(roots of contamination)”로 여긴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외국인 노동자들은 에이즈와 같은 병을 옮겨오거나 국제결혼을 통하여 한국인의 순수한 피를 오염시키는 매체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종의 두려움이 외국인을 차별하는 심리학적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라는 순수한 정체성을 깨뜨리는 미래적 두려움이라면, 그들이 한국인과 결혼을 통하여 낳은 혼혈아는 이미 ‘우리’라는 순수성을 더럽힌 결과이다. 따라서 혼혈아에 대한 차별이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 강신주가 자신의 책 “나는 튀기가 좋다: 영문학박사 페미의 좌우충돌 국제결혼기”에서 도전적으로 표현하고 있듯이, “튀기란 단어는 그 자체가 나쁜 의미를 포함하는 게 아니라, 한국인의 ‘순종선호주의’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섞인 것은 안 좋다’라는 이 순종선호주의는 ‘우리 정체성’에 깊이 내재될 수밖에 없는 심리적 결과로, ‘혼혈아’를 ‘우리’의 순수성을 더럽힌 사람으로 차별하는 논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인즈 워드의 방문이 깨우쳐 주었듯이, 이러한 ‘우리의식’에 내재되어있는 ‘같음으로의 전략’과 ‘타자배제’의 논리는 다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이상 효과적인 생존의 논리일 수 없다. 오히려 다인종적이고 다문화적인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 에토스와 그에 따르는 대안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요구된다. 이 대안의 에토스와 정체성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혼합성(hybridity)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본회퍼가 제안하는 타자와의 “폴리포니” 삶이 하나의 대안의 신학적 아이디어가 될 수 있음을 보이려고 한다.

3. 본회퍼의 다음(多音) 합성적 삶(Polyphonic Life)
“나는 누구인가? 그 사람 아니면 저 사람?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다른 사람인가? 동시에 둘 다인가? 사람들 앞에서는 위선자요, 내 자신 앞에서는 혐오스러울 정도로 비통해 하는 약자인가? 아니면, 아직도 내 안의 모습이 이미 거둔 승리를 포기하였기에 혼돈에 빠져 있는 패잔병 같은가?” 본회퍼가 옥중에서 적은 유명한 시 “나는 누구인가?”의 일부이다. 이 시에서 본회퍼는 “나는 누구인가?”라며, 자신의 정체성에 관하여 묻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혼돈에 빠져 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는 ‘나’가 진정한 ‘나’인지, 아니면 내가 ‘나’에 대하여 생각하는 ‘나’가 진정한 나인지, 그렇지 않다면 양자 모두 ‘나’인지를 결정하지 못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렇게 결정할 수 없음이 곧 정체성에 대한 본회퍼의 독특한 통찰이다. 왜냐하면 본회퍼는 결국 우리의 정체성이 고정적으로 단순하게 발견될 수 있는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오히려 복합적이고 변화에 열려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견해가 『옥중서간』에서 논의되는 “폴리포니(polyphony)”의 삶에 잘 드러난다.

1) 신학적 토대: 인간이 되신 하나님
『나를 따르라(Discipleship)』와 『윤리학(Ethics)』에 나타나는 본회퍼의 교회와 세상에 대한 이해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나를 따르라』에서 그려지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가 갈등(conflict)으로 특정지어질 수 있다면, 『윤리학』에서 양자의 관계는 화해(reconciliation)로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성육신(incarnation),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에 대한 본회퍼의 견해에서 기인한다. 『나를 따르라』에서 본회퍼는 “예수께서 온전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성육신의 결과로서”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와 함께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왕국은 오직 교회에만 관련되기 때문에, 본회퍼는 세상과 비교할 때 교회에 특별한 위치를 부여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배경과 단절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윤리학』에서 그리스도를 교회뿐 아니라 세상의 구주로 이야기하면서,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에서 그려지는 그리스도와 세상 사이의 대립을 극복한다. 『윤리학』 제 일장, “그리스도, 현실, 그리고 선--그리스도, 교회, 그리고 세상”에서 그의 근본적인 주장이 이렇게 진술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현실(reality)이 이 세상의 현실속으로 들어오셨다.” 『나를 따르라』에서와는 달리, 본회퍼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자아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의 가장 중요한 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전 세상과 화해를 이루셨다는 것이다. 본회퍼는 “하나님과 화해하지 않은 현실이나 세상은 없다.”라고 적는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세상과 대면하시고 완전한 화해를 이루신 장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없다.
화해의 현실에 대한 이러한 기독론적 이해에 기초하여, 본회퍼는 소위 말하는 “두 영역 사고(two‐realms thinking)”를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중세의 수도원적 문화와 근대의 문화 개신교가 현실을 대립하는 두 영역, 즉 신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으로 나누었다. 중세의 수도원적 문화는 세속적 영역에 비하여 영적인 영역을 강조한 반면에, 근대의 문화 개신교는 영적인 것으로부터 세속적인 것의 독립성을 주장한다. 전자는 세상없는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후자는 그리스도 없는 세상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하여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하나님을 따름으로 세상을 버리거나, 세상의 삶을 충실하게 사는 반면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과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본회퍼는 이러한 두 영역 사고를 해체한다.

두 개의 현실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현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현실 가운데 계시된 하나님의 현실만이 존재한다. 그리스도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안에 동시에 서게 된다. 그리스도의 현실이 세상의 현실 자체를 받아들인다. 세상은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독립적인 현실을 가질 수 없다. “세상적이지(worldly)”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바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부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두 영역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이 연합된 그리스도의 현실이라는 오직 하나의 영역이 존재한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세상의 현실 밖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실존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 밖에는 참된 세상성도 없다. 이러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기독교인의 삶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본회퍼에 따르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세상의 현실이 하나가 되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양자의 현실에 동시에 참여하는 다차원적인 삶의 자세가 요청된다. 이러한 삶의 자세가 『옥중서간』에서 다음 합성적(polyphonic) 삶으로 묘사된다.

2) 첫 번째 폴리포니
본회퍼에게 다음 합성적(polyphonic) 삶은 세 가지의 루터적 의미에서의 삶의 동시성(simul of life)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과 세계, 한 개인 안에서의 축복과 고통, 그리고 자아와 타자. 각각의 동시성은 분리될 수 없지만, 분명히 구별된다. 1944년 5월 20일에 베트게(Eberhard Bethge)에게 쓴 편지에서, 본회퍼는 정선율(cantus firmus)과 폴리포니와 같은 음악적 은유를 사용하여 이와 같은 인간의 다차원적인(multi-dimenstional) 삶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삶의 폴리포니라고 부르기 좋아하는 건강하고, 성적인 사랑에는 항상 위험이 있네. 내가 뜻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영원히 사랑하기를 원한다는 것일세.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이생의 사랑을 손상시키거나 약화시키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인생의 서로 다른 멜로디들이 그것에 대위 선율(counterpoint)을 제공하는 일종의 정선율(cantus firmus)을 예비하는 방식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네. (완벽하게 독립적이면서도 정선율에 관련되는) 이러한 대위법적(contrapuntal) 주제들 가운데 하나는 이생의 사랑(earthly affection)일세. 성경에조차도 우리는 아가서를 가지고 있네. 그리고 참으로 누구도 아가서에서 그려지고 있는 사랑보다 더 뜨겁고 열정적이고 감각적인 사랑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일세(예를 들어 아가서 7장 6절을 보게나). 정열을 억제하는 것이 기독교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아가서가 성경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네. (구약 성경 어디에 그러한 억제가 있는가?)

본회퍼가 이와 같이 은유적 방식으로 인간 삶을 묘사하고 있는 의미를 좀 더 추적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본회퍼는 폴리포니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종류의 폴리포니가 삶에 ‘전체성(wholeness)’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홀랜드(Scott Holland)에 따르면 음악에서 폴리포니는 “깔끔한 화성(harmony)도 아니고 전통적인 교향곡(symphony)도 아니라 둘이나 혹은 더 많은 매우 다른 멜로디들이 만족할만한 방식으로 함께 어우러지는 보다 복잡한 음악의 악곡”이다. 유사하게 본회퍼는 다양한 삶의 목소리들과 색채들이 동시에 어우러지는 다음 합성적 삶에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정선율(cantus firmus)은 이러한 다음 합성적 삶이 가지는 함축들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메타포가 된다. 선재하는(preexisting) 하나의 멜로디로서, 정선율은 대위법적(contrapuntal) 멜로디들이 “극단으로 전개될 수 있는 방식으로” 다음 합성적 작곡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본회퍼는 “대위 선율(counterpoint)이 확고하여서 그 자체로 분명한 전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선율로부터 길을 잃거나 이탈할 수 없을 때,” 정선율이 “온전하고 완벽한 음색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켐프(Walter H. Kemp)의 정선율에 대한 해석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정선율의 소리를 제거하는 것은 대위법적 목소리들에 해로울 것이다. 이것은 음악의 오선으로서 정체성의 상실이 아니라 방향과 목적의 상실이다. 그렇게 되면 다음 합성적 작곡은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정선율은 폴리포니를 위한 토대가 된다. 그것 없이, 대위 선율은 전개될 수 없으며, 폴리포니의 멜로디도 완성될 수 없다. 유사하게 다음 합성적 삶에 있어서도 대위 선율의 요소를 받아들이는 정선율이 필수적이다. 말하자면 다음 합성적 삶의 태도를 받아들일 때, 개인과 공동체의 정체성(정선율)은 항상 타인의 다양한 목소리와 색채들(대위 선율)에게 열려 있어야 하며, 환영해야 한다. 이어지는 논의에서 본회퍼는 세 가지의 폴리포니의 삶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 가지의 정선율과 대위 선율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과 세상의 폴리포니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세상과 화해하셨으므로,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에 동시에 참여해야 한다. 이 양자 중에, 『옥중서간』에서 본회퍼의 관심은 기독교인의 세속적인 사건들에의 참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참된 신앙인은 온전한 의미에서 세속적인(worldly)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세속적 삶은 “삶의 의무, 문제, 성공과 실패, 그리고 경험과 당혹감 속에서도 기탄없이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본회퍼가 이러한 주장을 하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삶에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속적 삶에의 강조는 본회퍼의 유명한 비종교적 기독교(religionless Christianity)의 강조점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세속적 삶의 한 가지 예는 다음 합성적 삶을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로 본회퍼가 강조하는 이생의 애정과 갈망이다. 세상의 좋은 것들을 향유하라는 본회퍼의 권유는 『나를 따르라』나 『성도의 공동생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저서들에서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것들과 단절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된다. 하지만 『옥중서간』에서 본회퍼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사랑, 우정, 신체적 쾌락과 같은 세상의 좋은 것들을 온전하게 향유하기를 원하신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그는 사랑의 가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가 상당 기간 동안 강제로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있게 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값싼 대체물을 획득할 수 없다--나는 도덕적 고려 때문에 그렇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본회퍼는 이생의 좋은 것들을 욕망하는 것이 온전히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너무도 오랫동안 개인적인 갈망 없이 살아간 것을 한탄한다. 이러한 삶은 소름끼칠만큼(ghastly) 비참하고 피폐한 삶이다.
하지만 본회퍼의 세속적 삶에의 강조는 그가 성경과 예배, 기도와 같은 기독교인의 다른 중요한 삶의 요소를 경시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이러한 영적인 요소는 세속적 삶을 위한 힘을 제공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본회퍼는 비종교적 기독교 해석의 다른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서 비밀스런 규율(arcane discipline)을 강조한다. 그는 “비종교적 상황에서 무엇이 예배와 기도의 장소인가? 비밀스러운 규율이나 혹은 대신에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 사이의... 차이가 여기서 새로운 중요성을 가져야 하는 것인가?”라고 질문한다. 켈리(Geffrey B. Kelly)가 바르게 해석하듯이, 비밀스러운 규율과 세상성은 『윤리학』에서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의 관계에 상응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세상의 화해라는 현실 때문에, 인간은 궁극 이전의 것에서 세속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이 궁극 이전의 삶은 궁극적인 것의 관점에서 변증법적인 ‘예’와 ‘아니오’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 유사하게, 비종교적 시대에서 기독교인의 세속적 삶에의 관여는 항상 기독교인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인 참된 예배와 기도와 같은 비밀스러운 규율에 의해 조절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본회퍼의 다음 합성적 삶에서, 하나님과 세상, 교회생활과 세속적 삶은 분리되지 않고 함께 가야 한다. 본회퍼는 “오늘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두 가지의 일에 국한될 것이다. 즉 기도와 사람들 사이에서 바른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요약해 준다. 이와 같은 다음 합성적 삶에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비밀 규율)이 정선율이 되고, 이생의 애정과 같은 세속적 삶이 대위 선율이 된다. 본회퍼에게 정선율로서 말씀 묵상과 예배 기도는 세상적이고 책임적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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