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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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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연 
 신학사상 2011년 봄호(152집) 차례


이번 호에는

구약학에서 김회권 숭실대 교수의 “역대기서의 민족화해 신학” 논문을 게재했는데, 이 논문은 역대기에 묘사된 이스라엘의 탈정치적(비왕조적), 제의공동체적인 성격에 주목함으로써 역대기에서 민족화해 신학을 밝혀보려고 했다. 역대기의 민족화해 신학은 한반도 화해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본다.

신약학에서는 김재현 계명대 초빙교수의 “Q 복음서의 서기관에 관한 역사비평적 연구” 논문을 게재했다. 최근 Q 연구는 Q 사람들 가운데 존재했었던 서기관들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김 교수는 이 서기관들이 공동체 내부에서 걸림돌이 되는 신학적 난제들과 공동체 외부에서 제기되는 비판을 성서적 지식의 활용을 통해서 해결했던 Q 교회의 지도자들이며 신학자들이었다고 본다. Q복음서의 서기관들은 세례자 요한으로 말미암은 신학적 난제, 예수의 정체성의 문제, 예수의 죽음과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의 문제, 그리고 당대의 잘못된 메시아관의 문제를 구약성서에 대한 예언적 해석을 통해서 해결했다. 그들은 구약성서의 해석을 통해 세례자가 예수를 예비하는 자이며, 예수의 기적이 구약성서 예언의 성취이며, 예수는 신명기 말씀을 통해서 잘못된 메시아의 길이 아닌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의 길을 걸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했다.

조직신학 분야에서 전철 한신대 외래교수의 “초기 안병무가 바라본 서구신학의 빛과 그림자”란 논문을 게재했는데, 이 논문은 안병무박사의 민중신학 형성의 사상적 동기와 발생과정을 밝히는데 중점을 두었다.
또한 김영관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의 “칼 바르트의 교회론: 모이는 기독교공동체로서의 교회개념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게재했는데, 이 논문은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교회에 대한 신학을 제시해주었다.
그리고 박병관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영신수련』: 두 영성의 수덕적인 깊은 일치”라는 논문은 토마스 아 켐피스의『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이냐시오의『영신수련』연구를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고 본받음, 수덕의 실천, 다양성 안에서 하느님과 늘 하나 되어 있기, 신비적 은총에로 열린 철저한 수덕생활을 안내한다.

교회사 분야에서 백용기 강남대 교수의 “월터 라우센부쉬와 그의 사회복음신학” 논문은 라우센부쉬의 사회복음 신학 연구를 통해 천민자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신학과 교회가 해야 할 과제를 신학적으로 제시하였다.
오광석 감신대 외래교수의 “존 웨슬리와 초기 감리교 여성설교직의 발전”이란 논문은 교회에서 여성지도력이 발전하려면 여성설교가, 여성목회직이 활발해야하고, 그래야 교회도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존 웨슬리 연구를 통해 제시했다.

선교학 분야에서는 현재 영국 에딘버러대학교 박사과정에 있는 한강희의 “야만에서 존중으로: 에딘버러 백주년 선교대회와 문명론적 인식 틀의 전환”이란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은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사대회의 보고서에 나타난 서구 선교사들의 비서구 문명에 대한 인식을 검토하고, 지난 2010년 에딘버러 백주년 선교대회에 이르러 그러한 문명적 인식이 어떻게 변화하게 되었는가를 고찰하고 있지만, 2013년 부산에서 개최될 세계교회협의회 총회 준비에도 좋은 시사점을 준다.



이번 호 편집을 마치면서

지금 우리사회는 가난한 사람들과 가축들이 고통당하며 죽임당하는 비명이 전국을 메아리 치고 있다. 형편이 없는 집이었지만, 그나마 몸부칠 수 있어서 몇 십년을 고통 속에 참고 살아왔는데, 느닷없이 재개발이다, 뉴타운이다. 혁신도시다 해서 강제로 쫓겨난 사람들의 원통함과 피맺힌 절규가 하늘에 맞닿고 있다. 또한 구제역 파동으로 가축들이 생매장당하는 모습을 뉴스를 통해 보며, 사람들이 악하고 잔인해도 저렇게 할 수 있나하는 소름이 끼쳐졌다. 이게 잘살기 위해 몸부림친 대한민국인가?
기독교가 위기다, 교인 수가 줄어든다, 해서 다시금 더 요란하게 꽹과리를 치는 교회들에게 예수님은 저 죽어가는 사람들과 가축들을 보고, 저 고통과 피맺힘의 소리를 들어 보라고 말씀하신다.
믿는자여, 어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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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연구 논문
김회권 ․ 역대기서의 민족화해 신학
김재현 ․ Q 복음서의 서기관에 관한 역사비평적 연구
전철   ․ 초기 안병무가 바라본 서구신학의 빛과 그림자
김영관 ․ 칼 바르트의 교회론: 모이는 기독교공동체로서의 교회개념을 중심으로
박병관 ․ 『그리스도를 본받아』와『영신수련』: 두 영성의 수덕적인 깊은 일치
백용기 ․ 월터 라우센부쉬와 그의 사회복음신학
오광석 ․ 존 웨슬리와 초기 감리교 여성설교직의 발전
한강희 ․ 야만에서 존중으로: 에딘버러 백주년 선교대회와 문명론적 인식 틀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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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1

초기 안병무가 바라본 서구신학의 빛과 그림자


                                                                                          전 철 (한신대 외래교수/ 조직신학)


초록

이 연구는 심원 안병무(心園 安炳茂, 1922.6.23-1996.10.19)의 민중신학 형성의 사상적 동기와 발생과정의 해명을 구체적인 목표로 한다. 특히 이 연구는 안병무의 전 시기에서 1951년부터 1965년까지의 시기를 그의 사상의 초기 시기로 규정하고, 이 시기에 있어서 그의 사상적 변화를 추적한다.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반신학의 성격을 지닌다. 그 성격의 뿌리에는 서구신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통한 한계와 비판이 매복되어 있다. 이 연구는 안병무의 초기 사상의 시기에 그 자신이 서구신학과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였고 비판하였는지를 분석한다. 안병무가 지적한 서구신학과 서구교회의 그림자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1) 국가 권력과 결탁된 기독교 교회 2) 그레꼬-로만 사유로 변질된 기독교 신학이다. 이 연구는 이를 바탕으로 그가 바라보았던 서구신학에 대한 4가지 문제점을 분석한다. 이를 통하여 안병무가 1956년 독일로 떠났을 때 가졌던 분명한 목적, 즉 예수를 학문적으로 밝히는 과제와 구라파 교회의 실력을 가늠하는 과제가 어떻게 수행되었는지를 발생사적으로 해명하고자 한다. 이 연구를 통하여 우리는 안병무의 민중신학의 사유 형성과 발전에 초기 안병무(1951-1965)의 서구신학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기여되는지를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 안병무, 민중신학, 서구신학, 반신학, 독일신학




나는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아시아인으로서
나의 학문적 관점을 새롭게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나는 서구 신학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했고,
그와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길 원했다.
의도적인 회의를 가지고, 예수 사건에 대한 나의 결정에 대해서 묻길 원했다.

1. 들어가는 말

심원 안병무(心園 安炳茂, 1922.6.23-1996.10.19)는 민중신학이 시작될 수 밖에 없었던 진원적 시기를 1970년 11월 13일로 떠올린다. 그날은 전태일(全泰壱, 1948.8.26-1970.11.13)이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당겨 죽었던 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질문을 던진다. 1970년 그 충격적인 사건 이전의 안병무의 내면세계는 어떠한 것을 보고, 느끼고, 체험하였던 것일까. 사실 전태일의 죽음을 계기로 촉발된 민중신학의 탄생 이전 안병무의 내면세계는 우리에게는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즉 초기 안병무의 사유는 아직 우리에게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은 미답의 세계이기도 하다.
물론 그 감추어진 시기의 사유가 암시적으로 드러나는 몇몇 흔적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안병무 자신은 이 전태일 사건 이전의 초기 시기를 서구신학, 그리고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8.20-1976.7.30)의 영향을 깊이 받은 시기로 이해하고 그러한 이유로 “오랫동안 그의 영향력에 붙들려서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지낸 기간”이라고 과거의 지나간 시절을 회고하기도 한다.
이 연구는 초기 안병무가 서구신학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해명하는 것을 주요한 목적으로 한다. 이를 통하여 서구신학에 대한 애착과 비판이라는 사유의 이중주 안에서 거닐었던 초기 안병무의 여정을 작게나마 헤아려보고자 한다. 그리고 서구신학의 빛과 그림자를 가르는 그의 신학적 작업이 후기 사유의 도화선으로 어떻게 번져 나아가는지를 해명하고자 한다.

2. 초기 안병무가 바라본 서구신학과 교회

이 연구는 초기 안병무(1951-1965)가 바라본 서구신학의 빛과 그림자를 헤아리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삼았다. 이 연구는 초기 안병무의 시기를 1951년부터 1965년으로 잡았다. 1951년은 30살의 심원 안병무가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사회학과를 졸업(1950)한 후 6.25 전후 한반도 혼돈의 현실을 정면으로 대면한 시기이다. 특히 안병무는 1951년 11월 12일 “황야와 같이 황폐해진 이 땅 위에서 민에게 호소하고 싶은 정열” 하나만으로 전후 피난처에서 잡지 야성(野声) 제 1호 3000부를 발행한다. 그리고 그는 1956년 가을 독일 하이델베르크로 유학을 간다. 그는 독일에 갈 때부터 독일 유학의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적극적인 것은 예수를 확실히 학문적으로 철저히 밝히는 일이었고 그와 병행하여 구라파 교회가 교인들에게 어떤 형태의 교리를 전수하고 있으며 교회의 실제적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해 보는” 것이 그의 독일 유학의 분명한 목적이었다. 그리고 1965년 안병무는 불트만의 제자인 권터 보른캄(Günther Bornkamm, 1905.10.8-1990.2.18)의 지도하에 “공자와 예수의 사랑 이해”라는 신약신학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하고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신학 수학 10년의 여정(1956-1965)을 마감한 해이며, 다시 고국의 현실로 돌아온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이 연구에서는 초기 안병무의 시기를 1951년에서 1965년으로 잡았다. 바로 이 시기­특히 젊은 유학생 시절­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무엇이었으며, 또한 그의 초기 시절 서구신학의 현장에서 유학을 하며 서구신학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안병무 민중신학의 사상적 배경을 비교적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안병무는 1956년부터 1965년까지 약 10여 년간 개혁신학의 유산이 짙게 깔린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서구신학의 훈련과 세례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역설적으로 서구신학의 훈련과는 무관하게 서구신학과는 정 반대의 방법론을 구축하고 이후 민중신학을 탄생시킨다. 여기에서는 안병무가 서구신학과의 대면과 비판 속에서 어떻게 민중신학의 방법론을 형성하였는지를 추적하고자 한다. 우선 소위 반신학으로서의 민중신학이 어떻게 등장하였는지를 분석할 때 우리는 두 가지 발생적 근거를 추론할 수 있다: (i) 안병무의 사상적 환경에는 이미 한국적이며 토착적인 정신이 연결되어 있다. (ii) 서구의 현장 안에서 서구신학의 가치와 한계를 직시하고 탈 서구신학의 상상력을 독자적으로 구축하였다.
예를 들어 (i)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그가 이미 민족주의와 민족해방의 산실인 북간도에서 그의 정신적 근력을 형성해 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 해방촌 간도에 대한 안병무의 그리움과 향수는 평생 마르지 않았고 마음에 맺혀 있었다. 또한 안병무의 삶의 여정에서 장공 김재준(長空 金在後, 1901.9.26-1987.1.27)과 함석헌(咸錫憲, 1901.3.13-1989.2.4)등 민족의 문제를 깊이 고민한 선생과 사상가들과의 교분이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안병무는 소학교 시절 용정의 은진학교에서 은사 장공 김재준을 만나고, 그의 나이 30인 1952년에 함석헌을 만난다. 이 만남에서 안병무는 지적이며 영적인 충격을 경험한다. 적어도 그가 서구의 학(Wissenschaft)과 동양의 학(学) 사이의 명료한 차이를 인식하게 된 계기는 함석헌의 철학함과 학문에 대한 강한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 “그와의 만남에서 나는 동양의 학(学)이란 Wissenschaft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서양의 학은 머리로 하지만 동양의 학은 몸으로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특히 (ii)에 관련하여 안병무가 서구신학을 어떻게 대면하였고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의 “민중신학적 방법론”을 독자적으로 구축했는지를 중점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안병무 자신은 서구신학에 대하여는 매우 비판적인 대립의 각을 그의 사상 후기에까지 날카롭게 세웠다는 점이다. 그가 얼마나 서구신학에 대한 저항의 감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우리는 다음의 에피소드를 통하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정양모 신부는 언젠가 보았던 안병무의 서구신학에 대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어느 날 편집회의 때 서양의 새로운 신학사조를 듣다말고 무시해 버리기에, 그 까닭을 여쭈었더니 대답이 걸작이다. “서양신학의 물결이 얼마나 도도한지 몰라요. 이런 식으로 저항하지 않으면 백인 신학자들의 물결에 빠져 죽어요.””
문제는 안병무의 서구신학에 대한 비판적 대립각이 매우 확고했었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안병무가 언제, 어디에서부터, 어떠한 이유로 서구신학에 대하여 명확하게 자신의 비판적 견해를 세웠는지를 추적하는 것이 핵심 과제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가 서구신학의 현장에서 어떠한 생각을 하였는지를 헤아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 시기, 즉 안병무가 서구신학의 현장을 온 몸으로 대면한 시기(1956-1965)에 집필하고 기고했던 글은 약 10여 편 정도가 된다. 글의 대부분은 그의 실존적인 내면세계가 담긴 에세이, 그리고 독일의 학문과 생활의 현장에 대한 경험을 담은 소위 현지 리포트로 이루어진다. 특별히 엄밀한 의미의 학문적인 글이나 논문이 이 시기에 생산된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사실 그에 있어서 10여년의 유학생활은 오로지 예수에 대한 역사적 관심, 그리고 그 시간은 “예수를 신앙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보낸 시간이었다. 또한 그의 몸은 독일에 있었지만 마음은 언제나 조국에 가 있었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독일에 있을 때 우리 민족의 문제가 내 머리에서 떠난 적이 없었어요. 언제나 민족문제, 한국의 상황에 대해 고심했고 『사상계』에다 가끔씩 글을 써 보내곤 했죠. 그러면서 ‘왜 내가 서구 사람의 질문을 하고 서구 사람의 대답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어요.”
이러한 점에서 그가 서구의 현장에서 고민했던 것은 정작 서구의 신학이 아니라 서구의 신학과는 다른 운명의 궤적을 지닌 한국의 신학과 민족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러한 고민을 마음에 품고 지내왔던 시기에 남긴 글 가운데에서 서구신학에 대한 안병무의 견해가 구체적으로 잘 드러난 글은 다음의 세 편, 즉 “구라파에서 본 조국”(1959.1), “서양사람, 한국사람”(1959.7), “독일교회의 문제점”(1964.1)이라고 할 수 있다.

1) 구라파에서 본 조국 (1959.1)

안병무는 1959년 1월 사상계를 통하여 “구라파에서 본 조국”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이 글에서 그는 구라파인들의 아시아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특히 구라파인들에게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지만 “승만리”(이승만- 필자주) 외에 어떠한 것으로도 형상화되지 않은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 한국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그는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꼬집는다. “코리아에도 야당이 있어요?(정치)”, “한국에도 자기 글이 있나요?(문화)”, 그리고 독일의 한 신문은 서울에 대하여 “세상에 가장 더러운 도시(Die Schmutzigste Stadt der Welt)”와 같은 제목의 기사를 쓴다. 독일의 한국에 대한 이러한 멸시적 시선은 안병무를 매우 분노하게 한다. 그러나 서구와 독일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폄하적인 인식들에 압도당하거나 굴하지 않고, 그는 매우 당당하게 서구인들을 대면하고 정면으로 비판하였다는 점들이 이 글에 매우 잘 나타난다.
그렇다고 하여 한국과 아시아를 향한 경멸에 대한 안병무의 반감은 소위 저 멀리 제3세계에서 온 동양인의 열등의식의 발로가 아니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가 한국에 돌아와 1970년 2월 현존에 쓴 “성숙한 인간”에는 구라파의 서구인에 대한 인식이 매우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즉 구라파의 문화와 대중들이 비록 교양은 있어보여도 인간성의 개발의 차원에서는 그들의 동물성과 한민족의 무식한 대중의 그것과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말을 한다.
37살의 안병무는 “구라파에서 본 조국”에서 서구의 정신세계와 문화에 결코 동화되지 않고 주체적이며 독자적인 한국의 정신과 사상을 세우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매우 안정적인 환경 안에서 도시민과 다를 바 없이 풍요롭게 살아가고 있는 독일의 농민들을 보면서 안병무는 처참한 여건 속에서 살아가는 조국의 농촌과 농민을 떠올린다. 또한 같은 땅 위에 사는 삶들의 깊은 격차를 온 몸으로 경험하면서 삶의 부조리한 면을 민감하게 감지한다. 그가 이 글에서 매우 핵심적으로 강조하는 점은 자기(自己)와 우리와 대한민국을 찾자는 것이다. 우리를 찾고 멸시나 모방에 머무르지 않으며 창조적으로 우리를 찾고 발견하고 만들어 나아가자는 점을 그는 강조한다.

나는 우리가 우리로써 살기 위해 그러므로 세계 반렬에 참여해서 一役을 담당할 수 있는 길은 역시 우리를 찾아가자는 일로 안다. 後進國家, 후진국가 해서 덮어놓고 남을 모방한다는 것은 스스로 죽는 것이며 세계에도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모방은 어디까지나 모방이며 그런 限 언제까지나 後進國家일 수 밖에 없다.

그의 몸은 서구의 현장에 있었지만 그의 정신세계는 언제나 자기, 우리,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매우 선명하게 예각화하며 그의 물리적 환경을 대면하였던 것 같다. 자기를 찾는 것은 환경의 모방이 아니다. 환경으로 해체될 수 없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며, 그럴 때야 비로소 환경을 창조적으로 변혁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민중신학이라는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구상의 배경들을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다. 어쩌면 그는 기독교인으로서 서구신학의 현장을 대면하기보다는 한국인으로서 그곳을 대면하였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내면적 정체성을 ‘그리스도인’에 뿌리를 내렸다기 보다는 ‘한국인’으로서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안병무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인은 그리스도인보다 더욱 근본적인 출발점이다. “한국적”이 배제된 “그리스도인”은 그에게 변칙적인 대상이며 형용모순이다. 그는 자신의 초기 시기에서부터 키워왔던 “한국적 그리스도인”의 문제를 1986년 다음과 같이 더욱 구체적이며 명료하게 진술한다: “우선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국인이 된 것이 아니고 한국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반대는 있을 수 없다.”  

2) 서양사람, 한국사람 (1959.7)

안병무가 1957년 7월호 사상계에 투고한 글 “서양사람, 한국사람”은 그가 서구의 현장에서 무엇을 고민하였는지를 매우 실존적으로 잘 드러낸다. 그는 이 글에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는 서양의 문화를 모순의 문화로 정의한다. 그는 철학과 종교, 합리성과 비합리성, 선과 악, 이성과 어리석음이 모두 공존하는 모순의 현실이 바로 서구의 현실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모순을 지적하는 칼날은 서구의 교회에 대한 난도질로 확대된다: “교회에 거리에 [...] 십자가 형을 해 세우고 그 생활은 술로 포옹으로 키쓰로 왈 생의 향락이란 표어 밑에 서슴치 않고 그 첨단을 걷는데 차라리 이럴 바에는 그 십자가를 거두어 버리는 것이 옳지 내 눈에는 그걸 세워놓고 유대인들이 퍼붓던 조롱을, 침을 뱉는 것 같다.” 그리고 국민의 95%가 교회에 등록을 하였지만 90%가 교회 출석을 하지 않는 독일기독교인과 독일교회의 현실을 고발하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모순의 현실 앞에서 끊임없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정면으로 투쟁하고 결단하고 대결하는 정신적 투지를 서양정신의 핵심으로 규정한다.
안병무가 이 글에서 제기하는 두 번째 문제는 한국은 “그런 모순을 가졌는가”라는 질문이다. 한국의 역사는 모순으로 점철된 역사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문제가 없었다고 그는 본다. 즉 한국인은 모순을 모순대로 받지 않고 팔자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안병무는 한국의 지도자 엘리트와 일반 한국사람을 구분한다. 즉 소위 지도자들은 전승과 유산에 대한 도전, 그리고 반항이 없으며 자꾸 달아나려고만 할 뿐이며 그들이 진정한 한국사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즉 그는 이미 한국사람을 높은 자리에 있는 지배자와 낮은 자리에 있는 민중으로 구별해서 읽는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안병무가 소위 민중에 대한 자각을 이 시기에서부터 어느 정도 분명하게 착상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참 한국사람의 혼은 민중에 있으며 그 민중은 아직까지 자기를 발휘 못해본 체 미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들 틈에서 살아볼수록 우리에게 이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을 거듭 느낀다.”
그의 민중에 대한 인식은 초기에서부터 분명하게 존재하였다. 그리고 그 민중은 한국의 혼을 담지하고 있으며 역사의 흐름을 이어가는 작인이다. 그러나 아직은 역사를 당당하게 추동하는 온전한 주체로서 서술되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서 한국사람의 역사적이며 문화적 정체성에 관련하여 민중을 떠올리지만 그 자신이 민중을 신학적 주제의 대상으로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외국 와서 내나라 재발견한 젊은 한국의 한 혼의 고백”이 이 글에 잘 담겨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더 나아가서 한국인의 혼은 결코 모순을 모순으로 인식하지 않고 순응적 태도를 보이는 지배질서의 가담자에 있기 보다는 “민중”에 있다고 그는 본다. 그리고 한국 안에서도 서울과 도시에서 살아가는 얼굴에 있기 보다는, 농촌에 있으면서 “아무것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농부들에 진정한 한국인의 혼이 있다며 그는 민중의 편을 든다.

3) 독일교회의 문제점 (1964.1)

1964년 안병무는 독일교회와 신학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 “독일교회의 문제점”을 기독교사상 1월호에 발표한다. 이 시기는 안병무의 독일유학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시기이며, 그 다음 해인 1965년 7월 5일 안병무는 10여년의 유학생활을 마감하고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를 졸업한다. “독일교회의 문제점”은 4페이지 밖에 되지 않은 매우 짧은 글이다. 그러나 그가 유럽 신학의 한복판의 현장에서 서구의 교회와 신학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이 글은 매우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안병무는 이 글에서 핵심적으로 독일의 문제점 두 가지를 지적한다. 하나는 독일의 교회와 국가 사이의 밀착관계에 대한 지적이다. 다른 하나는 독일의 신학 - 특히 성서신학 - 은 ‘교회의 학문’이 아니라 ‘역사로서의 학’을 달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60년대 전후 독일의 사회는 가족의 존재양식을 해체시킨다. 전후폐허의 분진 가운데 라인강의 기적이 강하게 발동되었던 분위기는 전통적인 방식과는 다른 사회적 양식을 요구한다. 이러한 사회적 양식의 전환 속에서 그에 따른 당대 교회의 공동체성과 기능 또한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60년대의 독일 사회의 급격한 변화, 구체적으로 개인주의의 발달이 극도로 몰아치고 있는 와중에 교회는 그 기능과 생동성을 점차 잃게 된다. 바로 이 자리에서 안병무는 이미 서구 생활공동체의 양식의 변화의 과정에서 교회의 기능이 축소되고 침체되어 가고 있음을 목도한다. 이러한 인식을 기초로 하여 그는 사회 환경의 변화에 발맞추어 나아가지 못하는 교회가 자신을 새롭게 디자인하고 대개혁을 하지 않으면 교회적 침체성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안병무는 더 나아가서 그 시대의 교회 문제를 넘어서서 서구 기독교 자체에 대한 비평으로까지 점진적으로 전선을 확대한다. 안병무는 이 시기에 국가체제의 유지(status quo)를 위한 교회에 대하여 비판적인 칼날을 노골적으로 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교회의 종교세 부과에 관한 국가의 협력을 언급하며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하나의 중요한 문제로 포착한다. 그의 초기 사유에서는 교회와 국가에 대한 비평이 구체적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목사는 모든 면에서 담당 교회에 예속된 것이 아니고 감독 상부에 속하며 그 지시를 받고 봉급을 받는다”는 지적 속에서 안병무는 서구의 기독교와 국가 사이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을 가한다.
안병무의 이러한 지적이 이후 독일교회와 구라파교회 비판의 핵심 근거로서 작동된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안병무는 1992년에서 1995년까지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에서 “왜 공동체인가?” 라는 주제의 강연을 한다. 이 강연은 안병무의 해방이후 젊은 시절부터 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의 삶과 사유의 여정을 압축적으로 담았다. 이 강연에서도 독일교회의 문제점(1964)이라는 글에서 포착했던 독일교회에 대한 인식은 특별한 변화 없이 그대로 반영이 된다.
즉 안병무는 여기에서 목사의 설교가 교회 현장과의 살아있는 관계 속에서 선포되기 보다는 “교회본부에서 정해진 본문과 제목, 해설 내용도 이미 요약해서 배분한 것을 중심으로 살을 붙이는 정도”라고 꼬집으며 독일교회를 관습적인 교회로 정의한다. 또한 교회의 예배에서 진행되는 기도문 또한 “독자적으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은 없고 모두 이미 교회의 중앙에서 작성한 조문들을 읽어 내려갈 따름”이라며 형식화되고 규범화된 교회에 대한 실망을 한다. 이러한 교회와 국가 사이의 애착에 대한 초기 비판적 관점은 그의 후기 민중신학적 작업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확대된다. 예를 들어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는 교회와 국가권력의 메스꺼운 결탁에 대한 문제점과 비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서술한다.

西洋의 기독교화는 그 자체의 힘이 컸던 것도 사실이나, 정치 세력과 야합함으로서 내적인 면보다 외적인 형태가 비대해졌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에서 온 피해를 오늘날 당하고 있다. 우리는 이 길을 선택할 수도 없거니와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안병무는 국가체제의 유지를 위한 교회, 그리고 더 나아가서 2000년 전 출현하였던 ‘예수사건’에 대한 생생한 복원과 재현의 가능성이 그저 역사의 지평으로 제한적으로 퇴각되어 버린 서구의 신학을 지적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후기 민중신학 형성의 중요한 근거인 반교회와 반신학의 테제는 그의 유학시절의 독일교회와 독일신학의 체제유지적 성격에 대한 구체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고 우리는 조심스럽게 진단할 수 있다. 특히 서구신학에 관한 후기 안병무의 비판은 매우 단호하고 매섭다. 예를 들어 안병무는 서구신학이 상아탑 안에 숨어버리거나, 서구신학이 국가적 과제의 수행자로 존재하거나, 교회가 기능적으로만 존재하는 점을 매우 자주 비판하곤 하였다. 서구의 신학자와 목사가 진정한 현실을 대면할 수 없게 만드는 신학과 교회의 굳어진 체제의 문제를 지적하며 안병무는 ‘사건의 신학’과 ‘예수가 머무는 교회’를 강조하고 역설한다. 예를 들어 독일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한지 20여년이 훨씬 지난 시점에서 드러난 심원의 서구 신학과 교회 이해는 시간이 흘렀어도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서술된다.    

신학이 서양에서 발전했고, 교회가 강력한 권력을 얻게 됨에 따라서 신학자와 목사는 사건을 문제시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특히 서구에서 대학의 신학교수는 모두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는 관리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사건 따위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어떻게 하면 학문을 논리적으로 확립할까, 다른 학문과 경쟁하는 가운데서 어떠한 주장을 내세울 수 있을까가 가장 중요하게 되어 차츰 계몽가로서의 사명감은 퇴색해가는 것입니다. 목사도 또한 교회를 어떻게 다스려갈 것인가 하는 문제만을 중요시합니다.

또한 안병무는 1986년 5월 서구교회와 신학에 대한 비판의 속내를 더욱 날카롭고 선명하게 드러낸다. 여기에서는 독일신학과 서구신학에 대한 정면비판의 입장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1964년의 독일교회와 신학의 문제점에 대한 착상은 이렇게 20년이 지난 후 그의 민중신학적 성찰 속에서 더욱 가열차게 확대 재해석된다.

나는 언젠가 독일 가면 서구 신학자들에게 “당신들이 신학을 왜 하오?” 이것부터 물으려고 해요. “지금 있는 기존의 것(status quo)을 보존하자는 것이지, 그밖에 뭐 있소?” 하고요. 기존교회가 있고 재산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그리스도교가 유지되지, 그것 없으면 유지될 이유가 없어요. 교회의 체제가 굳어져가지고, 거기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민중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교회는 기득권을 지키려 하고, 그래서 ‘성문 밖’으로부터 ‘성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해요.  

그렇다면 왜 안병무는 1960년대의 독일교회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할까. 단지 1950년대의 독일 문화가 소중하게 지탱하였던 “철저한 검소와 절약”의 문화가 1970년대 들어가면서 “탐욕스럽게 물을 팔아 돈을 버는 유물주의, 실체는 무시되고 명목상의 허영적인 돈이 모든 가치를 좌우하는” 자본주의 사회로 추락하기에, 그 안에서 의미와 과제의 좌표를 상실하며 추락해가는 독일교회를 옹색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일까. 기실 안병무의 비판은 훨씬 멀고 깊은 폐부에 심각하게 연루되어 있다. 안병무의 서구신학과 독일교회의 비판의 거점은 1960년대 전후 독일이라는 현실에 제한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서 성서신학자 안병무의 상상력이 기지를 발휘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서구신학과 교회에서 로마제국을 정복한 그리스도교가 잉태시킨 변질이자 괴물을 본다. 그것은 전무후무한 예수사건에서부터 시작된 기독교가 강자의 자리에 오르면서, 강자의 이데올로기로 변신한 그레꼬-로마의 유령들이다. 그에게 독일신학은 기독교의 타락된 언어의 유희이며, 독일교회는 예수를 문 밖으로 내보낸 후 빗장을 천 년 이상 닫아버린 신앙의 사해일 뿐이었다. 가진 것이 많은 독일신학과 독일교회는-예수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예수를 버리고, 대신 그리스도론으로 예수의 자리를 대체하였다. 실로 안병무에게 있어서 “서양은 모순 덩어리다.”
우리는 분명 독일신학과 교회에 대한 경험에서 그레꼬-로마의 유령들을 바라보는 안병무의 상상력이 지니고 있는 타당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는 서구 안에서 서구신학과 교회를 날카롭게 진단할 수 있는 모종의 근거를 갖고 있었다. 즉 그는 철저하게 예수사건의 전승인 성서라는 전거 속에서 ‘성서로만’(sola scriptura)이라는 모토로 서구신학의 현실을 대면하려 노력하였으며(성서학자), 또한 서구의 시선에 동화되지 않은 채 거리감을 가지고 서구와 기독교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자 노력하였기 때문이다(한국인). 이렇게 그레꼬 로마 문명에 오염되어버린 기독교로부터 탈향하고자 했던 안병무의 실존적인 몸부림은 “독일교회의 문제점”(1964)의 착상이 구체화된 논문 “韓国神学의 可能性: 성서신학에서의 可能한 길”(1967)에서 더욱 강하게 표출된다. 그는 여기에서 비로소 서구문명을 서구인이 아닌 한국인의 시선으로, 그리고 서구의 기독교를 성서의 시선으로 비판적으로 읽으며 ‘우리의 신학’을 본격적으로 착수하기 시작한다.

‘學’으로서 신학을 추구하는데 ‘한국적’이란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서구적 신학의 영향에서의 독립 내지 탈피를 전제하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가 지금까지 거의 전적으로 서구신학에 의존해 왔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런데 서구신학에서의 탈피라고 할 때는 서구신학은 저들이 저들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저들의 문제를 성서에서 묻고 얻은 대답이기에 곧 우리의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에서 우리는 우리의 상황에서 성서에 마주 서서 우리의 물음을 하여 대답을 얻자는 것이다. 이렇게 규정하면 ‘한국신학’이란 곧 ‘우리’ 또는 ‘나의’ 신학이라는 뜻이 된다. 위의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우선 개혁자들의 주장인 ‘성서로만’(sola scriptura)이라는 모토로써 브레이크를 걸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와 성서 사이에 있는 西歐 解釋史에서 일단 독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만으로’라는 우리의 주장은 그 결과에 있어서 개혁자들의 그것과 다르다. 개혁자들의 이 주장은 카톨릭 교회에서 독립하는 거점이 된 데 대해서 우리에게는 서구의 신학에서 독립하는 거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성서로만’이라는 종교개혁의 테제를 단지 가톨릭과의 경계설정을 위한 서구 개신교 신학의 전략으로 설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서구의 신학으로부터의 독립을 꾀하는 한국적 신학의 방아쇠로 채택한다. 안병무는 여기에서 독일교회의 문제점(1959)을 그레꼬-로만의 문제점으로 연결시키면서, 더 나아가서 서구신학으로부터의 과감한 독립을 향하여 신학적 도화선을 점진적으로 확대시킨다. 그에게 서구신학 비판은 그레꼬-로만 유령에 대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한국적 신학을 향한 갈증과 열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 아포리아는 남는다. 여기서 우리는 회의하고 그에게 질문한다. 즉 서구의 기독교에 대한 그의 거부는 한국적 신학의 애착으로 인한 과잉은 아니었을까. 서구신학의 그늘에 대한 저항은 당대 한국신학의 부재를 덮어버리기 위한 냉소는 아니었을까. 이럴 경우 안병무의 서구신학을 향한 냉소에 분명한 근거가 있다면, 그가 비판한 서구신학의 그림자 또한 우리는 매우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3. 서구신학의 그림자

서구신학의 전통은 처음부터 안병무에게 부정적인 인식만을 편향적으로 제공해 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그는 서구사상과 신학 전통과의 대면을 통하여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5.5-1855.11.11), 특히 그의 유학시절 직접 대면하였던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9.26-1976.5.26), 그리고 불트만의 실존주의 해석학과 신학에 매력을 깊이 느끼기도 하였다. 심지어 그의 주요한 신학적 방법론으로 채택하였던 흔적도 적지 않게 보인다-특히 우리가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민감하게 접근하고 헤아려볼 필요가 있는 지점은 안병무 민중신학의 핵심 테제인 “사건론”과 하이데거의 “사건”(Das Ereignis) 개념의 내적 연관성이다.
예를 들어 그는 1960년 10월 하순 불트만학회에서 마르틴 하이데거를 처음 만난 사건을 12년이 지난 후 “하이데거와 만난 날”이라는 수필 속에서 회고한다. 실로 안병무에게 하이데거는 “수 10년 전 예과시절부터 들어왔던 이미 고전화된 그”였으며 “사계(斯界)의 거물”이었다. 또한 하이데거는 안병무에게 “진지성(真摯性)(Ernst)”을 남겨준 사람이었다. 심지어 안병무는 이미 노골적으로 서구적인 의미에서 불트만이나 하이데거의 언어를 제일 좋아한다고 회상한다. 그가 1969년 7월에 창간한 월간지 “현존”(現存)(1969.7-1980.8)에서 하이데거 사유의 중요한 개념인 “현존”(Dasein)이 떠오르는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그러나 불트만과 하이데거에 대한 호의가 서구신학에 대한 열정과 동정을 직접적으로 뜻하지는 않는다. 분명 안병무에게 서구신학은 이미 미래가 없는 신학이다. 하지만 서구신학이 미래가 없는 신학임을 그는 서구의 현장에서 발견하지 않았다. 안병무는 서구신학의 한계를 서구신학 안에서 암시적으로 통찰하였고, 이후 서구신학 밖에서 그 한계를 명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안병무 자신은 한국에서 생생하게 일어나는 사건(event)을 경험하지 못했던들 서구의 신학 특히 독일신학이라는 감옥에 어쩌면 일생 동안 갇혀 있었을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한국의 현장과 컨텍스트가 안병무를 해방시킨 셈이 된다. 그러나 신학의 해방에 대한 인식도 서구신학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얻은 것이라는 견해를 보여준다. 신학의 해방은 서구신학의 경험을 통하여 가능했다라는 주장을 한다. 그는 말한다. “서구신학을 통한 형성과정이 없이는 우리는 어쩌면 이러한 인식에 도달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초기 안병무는 분명하게 서구신학의 그림자를 주목하고 응시하였으며 거기에서 20세기의 서구 문화와 기독교를 거슬러 올라가 기독교의 진정한 본질을 깊이 고민하였다. 예를 들어 위에서 보았던 안병무의 초기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의 눈에서 서구신학과 교회는 기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곳으로 비추어졌다는 점은 매우 분명하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안병무의 서구교회와 신학에 대한 비판의 전거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되짚어 질문할 수 있다. 안병무가 단지 민족적 신학과 한국적 신학의 구상만을 목적으로 서구신학과 독일의 신학을 반대급부로 비판한다고 보기에는 몇 가지 일관된 근거가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발견되며, 그 외연이 구체적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안병무가 바라본 서구신학과 서구교회의 문제점을 종합적으로 정리해보면 1) 국가 권력과 결탁된 기독교 교회 2) 그레꼬-로만 사유로 변질된 기독교 신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와 국가권력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 관점은 초기 안병무의 시기에서부터 아주 선명하게 부각이 되었으며 후기에 진행되면서도 여전히 그 관점은 매우 일관되고 집요하게 존속된다: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主権의 수호자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회는 한 정부의 자체 목적을 위한 이용물일 수 없으며 어떤 형태로나 権力에 이용당하거나 또 이용해서도 안 된다.”
초기 안병무가 바라보았던 두 번째 문제 즉 “그레꼬-로만 사유로 변질된 기독교신학”이라는 초기 통찰은 이후 서구신학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라는 전환점을 통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전개가 된다. 특히 민중신학이 1970년대 중반을 넘어 반신학으로서의 형태를 구체화할 때, 그 테제들의 대부분은 서구신학적 방법론에 대한 안티테제의 외양을 띄게 된다. 그렇다면 그는 구체적으로 서구신학의 무엇을 비판하고 극복하고자 하는가. 우리는 안병무가 바라본 서구신학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주제로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서구신학의 방법론적 문제점에 대한 안티테제는 동시에 중후기 안병무(1966-1996)가 구상시키고 발전시킨 민중신학의 핵심 방법론이기도 하다: 1) 주객도식의 사고, 2)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사고, 3) 개체주의적 사고, 4) 사변으로서의 학문.
1) 주객도식의 사고 (Subject-Object Thinking) : 그는 주객도식의 사고를 서구적 사유의 병폐로 인식한다. 특히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모두가 신을 객관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양자 모두는 주객도식에 매여 있다고 본다. 신은 주객도식에 입각하여 대상화 되는 관조의 대상이 아니다. 이 주객도식의 사고에 대한 철저한 거부는 주객의 구분을 붕괴시키고 동시에 주객이 그물처럼 엮여 있으면서 발생되어지는 민중신학의 사건론으로 전이된다. 성서의 신은 사건(event)이라기보다는 사건을 일으키는 힘(force)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사건의 그물 안에 산다. 사건의 그물 안에 있는 인간은 자기와 얽혀 있는 사건을 객관화 할 수 없다. 민중 개념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이다. 즉 주객도식을 폐기하면 민중에 대한 개념정의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개념의 등장은 철저하게 대상을 대상화 시킬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민중이 누구냐? 혹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거듭 받아 왔으나 지금까지 그것을 개념화하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의 자세다.”
2) 위에서부터 아래로의 사고 (Top-Down Thinking) : 민중신학의 사고는 철저하게 바닥의 관점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사고이다. 신학적으로도 민중신학의 기독론은 철저하게 아래에서부터 위로의 기독론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신이 인간에게’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신이’라는 도식으로 바라본다. 더 나아가서 민중신학은 문자주의적 신학으로부터 해방을 천명하는 신학이다. 민중신학 이전에 민중운동이 앞섰고, 민중사건이 먼저 있고 그 사건에서 언어가 생기고 텍스트가 생겼다고 안병무는 이해한다. 즉 책을 읽고 학문으로 민중사건을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대신 민중운동에 참여함으로 거기서 흡수한 것을 언어화한 것이 곧 학(学)을 하는 길”이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과거의 모든 것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보던 것을 아래로부터 보기로 한 것이다.”
3) 개체주의적 사고 (Individualistic Thinking) : 안병무는 철저하게 개인화되고 개별화된 사유를 비판한다. 그는 서양에서 쉽게 발견될 수 없는 “우리” 개념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 존재하는 것은 처음부터 우리이다. 개체주의적 사고는 서구의 개인주의적 양식의 그늘이며 성서적 전승은 바로 이러한 사고를 근원에서부터 거부한다고 안병무는 본다. 그리하여 죄는 公의 私有化이다. 그가 개인주의적이며 개별주의적 사고를 거부하는 태도는-결국은 실패로 돌아갔던-사적 소유의 유혹을 넘어 공동체생활을 꾸려나간 모습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서구의 이러한 개체주의적 사고는 예수에 대한 이해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안병무는 이러한 개체주의적 사고를 버리고 예수를 만난다. 즉 그는 예수를 개체적 영웅주의로 바라보지 않고 “그를 둘러싼 이름없는 민중의 시각에서” 바라본다. 예수는 이제 더 이상 개별적 인격(Personalität)이 아니라 민중과의 함수 속에서 등장하는 관계적 사건(Ereignis)이다.
4) 사변으로서의 학문 (Speculative Theory) : 안병무는 사변과 실천의 차이를 매우 분명하게 인식하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안병무는 서구와 동양이 보여주는 학문전통의 차이를 매우 거침없이 강조한다. 안병무는 독일에서 학위를 마친 후 3년 후인 1968년 독일교역자대회에서 서구신학과 동양신학의 대비를 ‘말함의 신학’과 ‘침묵의 신학’으로 명료하게 규정한 바 있다. 안병무에 있어 성서는 말로 담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모두가 양면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서구신학은 지나치게 가시적으로 언어화할 수 있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였다고 안병무는 지적한다. 앎과 행함, 언어와 침묵, 사변과 행위라는 길항적 관계가 안병무에게는 서양과 동양의 학문태도의 관계로 연결된다. 더 나아가서 안병무는 전략적으로 민중신학을 사변화-개념화-추상화하려는 모든 학문적 접근의 퇴로를 자체내적으로 차단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사변으로서의 학문에 대한 저항에는 그가 독일에서 대면했던 그레꼬-로만 사유의 기독교적 수용에 대한 근본적 반감이 연동되어 있다.

4. 나가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1950-60년대 초기 안병무가 서구의 신학과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검토하였다. 그가 1956년 독일로 떠났을 때 가졌던 분명한 목적, 예수를 학문적으로 밝히는 과제와 구라파 교회의 실력을 가늠하는 과제는 10년의 씨름을 통하여 얼마나 이루었던 것일까. 그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하여 그는 “역사적 예수를 모르겠다”는 결론과 “구라파에서 교회는 죽었다” 라는 결론을 마음에 담고 1965년 8월 귀국한다. 안병무는 전후 실망스러운 한국 교회, 그리고 비대하지만 신앙의 생기가 사라진 독일 교회 어느 곳에서도 “예수는 오늘도 머리 둘 곳이 없어 광야에서 헤매는 환상에 젖곤” 하였다. 역사적으로 예수를 만날 수 없었던 절망, 오히려 성문 밖으로 예수를 밀어내버린 교회에 대한 깊은 절망은 서구의 경험이 그에게 준 혼돈스러운 선물이었다. 그는 이제 서구의 교회에서도, 그리고 한국의 교회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예수의 흔적을 향해 한국의 현장에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안병무는 1970년대 이래로 그의 신학의 주제가 바뀜으로서 서구의 사고와 방법으로 글을 쓰는 것을 멀리하였다고 술회한다. 동시에 자신을 강단의 신학자가 아니라 “성문 밖의 신학자”로 규정한다. 특히 1980년대의 후기 안병무는 민중의 언어를 배우고, 그들에게 일어났던 사건을 증언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또 그것을 신학하는 목적으로 분명하게 이해한다. 그의 이러한 민중에 대한 관심과 사건의 신학을 향한 사명이 초기에서부터 명료하게 착상되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민중신학은 민중 사건의 현장에서 탄생된 언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는 점은 그의 초기 시절, 특히 서구문화와 환경을 대면하는 그의 태도가 매우 주체적이었다는 점이다. 그가 당대의 서구신학을 그레꼬-로만의 변종으로 정의하였던 태도나, 서구문명과 서구교회에 예수사건의 활력이 이미 고갈되어버린 “피안” 저편으로 이해하였던 태도, 그리고 몸은 서구에 있었지만 마음의 시선은 언제나 그의 조국의 현실을 응시하였던 태도는, 이후 서구신학을 기초에서부터 흔들고 새롭게 구상하였던 민중신학 형성의 주요한 동력이었음을 우리는 추론할 수 있다.
우리는 초기 안병무의 사상에서 서구신학에 대한 애착과 비판의 두 선율을 날카롭게 구분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실존주의적 사유는 초기 안병무의 주요한 사상적 토양이었음을 우리는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독일에서 불트만과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만났으며 20세기 유럽 전후의 황량한 사상적 폐허를 지탱하게 한 실존주의의 온기에 깊이 매료되었다. 실로 실존주의와의 사상적인 만남은 이후 후기 안병무의 민중신학이 보여주는 신학적 실존성, 주관성, 그리고 급진성의 맹아이자 굳건한 자양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병무는 거기에서 머물지 않았다. 실존주의는 “나와 너”(Ich und Du)까지는 묻지만 “우리”(Wir)라는 것을 더 이상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실존주의는 한국의 민중사건을 응시하게 한 하나의 촉발점이었지만, 동시에 안병무가 응시한 한국의 민중사건의 자리는 서구적 실존주의를 가차 없이 묻어버린 무덤이기도 하였다. 초기 안병무(1951-1965)는 그 자리가 한국이건 아니면 서구이건 그가 만나고자 하였던 예수와 교회와 신학의 진정한 얼굴을 성문 안에서 만날 수 없었다. 이제 이후의 안병무(1965-1996)는 성문을 넘어 예수와 교회와 신학을 찾고 만나기 위하여 성문 저 밖의 거리와 현장을 향해 조금씩 발걸음을 옮긴다.


참고문헌

1차문헌

저서
Ahn Byung Mu, Das Verständnis der Liebe bei k'ung-Tse und bei Jesus, Heidelberg Universität, 1965.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안병무, 『민중신학을 말한다』, 서울: 한길사, 1993.
안병무, 『공관복음서의 주제』, 병천: 한국신학연구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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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Licht und Schatten der westlichen Theologie beim frühen Ahn Byung-Mu

Chun Chul

Ahn Byung-Mus (23.6.1922-19.10.1996) Minjung-Theologie kann als Anti-Theologie bezeichnet werden. Er studierte von 1956 bis 1965 Theologie in Heidelberg und promovierte zum Thema Das Verständnis der Liebe bei Kung-tse und bei Jesus. Obwohl er in Europa Theologie studierte, ist Ahn sehr skeptisch gegenüber westliche Theologie, weshalb Ahn Byung Mus Minjung-Theologie als Kritik an der westlichen Theologie gesehen werden kann.
Nach Ahn Byung Mus Ansicht liegt die große Differenz zwischen westlicher Theologie und Minjung-Theologie in ihrem unterschiedlichen Verständnis von der Aufgabe der Theologie. Seine Kritik an westlicher Theologie zielt daher auf die wahre Suche nach Bedeutung und Ursprung der Theologie.
Für Ahn Byung-Mu liegt eine Aufgabe der Theologie in der kritischen Rekonstruktion der Wirklichkeit im Hinblick auf die biblisch-christliche Überlieferung. Er sieht eine Schwäche der westlichen Theologie darin, dass sie durch griechisch-römisches Denken verschlechtert wurde. Aus diesem Verständnis heraus erwächst als ein zentrales Anliegen in Ahn Byung-Mus früher Minjung-Theologie der Wunsch, eine Anti-Theologie zu entwickeln.
Der vorliegende Aufsatz hat zum Ziel, Licht und Schatten der westlichen Theologie in der Wahrnehmug des frühen Ahn Byung-Mu im Hinblick auf seine Erfahrungen mit der Theologie in Europa zu untersuchen. Dadurch soll diese Untersuchung Klarheit darüber schaffen, wie Ahn Byung Mus gedankliche Entwicklung der Minjung-Theologie bereits in seiner frühen Zeit (1951-1965) grundgelegt war.


Key Word: Ahn Byung Mu, Minjung Theology, Western Theology, Anti-Theology, German 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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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2


존 웨슬리와 초기 감리교 여성설교직의 발전



                                                                                         오광석(감신대 외래교수/ 교회사)


초록

   18세기 감리교 운동에서 여성들은 속회와 반회의 지도자로 또한 평신도설교자로 왕성히 활동하였다. 그들은 비공식적으로 대중 앞에서 말하기 시작하여 점차 권면을 한다든가 성경을 주석해 준다든가 하면서 공식적인 평신도설교자로 발전하였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영적인 능력을 부여받았으며 설교를 위한 특별한 은사를 지니고 있음을 보았다. 웨슬리가 여성설교를 공식적으로 승인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이전부터 여성설교가들의 활동은 영국전역에서 활발하였고 웨슬리의 생애 말기에 이르러서는 절정에 달하였다. 웨슬리의 사후 감리교는 영국교회로부터 분리하게 됨으로 이제 하나의 독립교회로서 보다 체제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함께 감리교 내에서는 정규목회직을 강조하게 되었고, 정규목회자로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설교가들의 입지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 연구는 존 웨슬리와 함께 시작된 감리교운동 안에서 여성 지도력이 어떻게 발전되어 갔고, 이와 관련하여 웨슬리가 어떻게 여성설교직을 승인하게 되었으며, 또한 웨슬리와 관련된 초기 감리교 여성설교가들의 활동과 그들이 만났던 문제들은 무엇이었는지를 역사적으로 고찰하였다.
  
주제어
존 웨슬리, 여성설교, 초기 감리교, 여성지도력


1. 들어가는 말

   그 동안 교회사를 연구할 때 그 연구대상은 주로 남성 중심적이었다. 최근 교회사 안에서 여성들을 재발견하려는 작업들이 비교적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여성들의 활동은 많이 숨겨져 있다. 이는 그 동안에 교회사가 가부장적으로 연구되어 왔음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에게 가용한 역사문헌들 가운데 여성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감리교회사를 연구할 때도 겪게 되는 문제이다. 초기 감리교 운동에서 여성들의 지도력과 목회가 주목할 만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들 여성들에 대한 문헌이 충분치 않음으로 그들의 활동과 공헌에 대한 평가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초기 감리교 여성지도자들의 문헌을 모아 처음으로 책으로 출판한 이는 제카리아 태프트(Zechariah Taft)였다. 그는 1820년대에 초기 여성 감리교도들의 일지와 그들의 전기를 다룬 글들을 모아 출판하였다. 초기 감리교 여성지도자들을 보다 학술적으로 연구한 선구자적인 연구서는 아마도 얼 브라운(Earl Kent Brown)의 『웨슬리 선생의 감리교의 여성들(Women of Mr. Wesley’s Methodism)』일 것이다. 브라운은 110여명에 달하는 초기 감리교 여성지도자들을 다루며 주로 이들에 대한 전기적(biographical)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 가운데 브라운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여성지도자들은 특별히 초기 여성설교가들로 활동한 이들이 많다. 그러나 이 연구는 다소 간략한 전기들을 기술하는데 치중된 인상이 깊어 전체적으로 어떻게 여성설교직이 발전해 나갔는지에 대한 평가가 부족하다. 최근에 초기 감리교 여성지도자들과 여성설교가들을 연구한 이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이는 폴 칠코트(Paul Wesley Chilcote)이다. 그는 초기 감리교 여성설교가들과 관련해 두 권의 저서를 출판하였다. 그 중 『존 웨슬리와 초기 감리교 여성설교가들(John Wesley and the Women Preachers of Early Methodism)』은 칠코트가 자신의 박사논문을 수정하여 출판한 것으로, 브라운의 선구자적 연구를 좀 더 발전시켜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주변의 여성설교가들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책 『그녀 자신의 이야기: 초기 감리교 여성들의 자서전적 초상들(Her Own Story: Autobiographical Portraits of Early Methodist Women)』은 초기 감리교 여성지도자들의 글들을 모아 편집한 것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좋은 일차자료를 제공해 준다.
   국내에서 초기 감리교 여성설교가들에 대한 학술적 연구를 찾기는 더욱 어렵다. 이 분야에 대한 국내연구로는 몇 개의 석사학위논문들과 이정미 박사의 『존 웨슬리와 감리교 전통의 여성들』 정도가 있다. 이들 연구들은 모두 감리교 전통속의 여성들에 관한 페미니즘적인 연구라는 점에서 분명히 그 장점이 있고 학술적으로 공헌하는 바가 있다. 하지만 이 연구들이 주로 초기 감리교 여성지도자들에 대한 전기적 정보를 제공해 주는 데 치중하고 있고, 감리교 형성과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웨슬리가 초기 감리교 여성설교직의 발전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한 분석과 평가가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있다.
   이 연구는 존 웨슬리와 함께 시작된 감리교운동 안에서 여성 지도력이 어떻게 발전되어 갔고, 이와 관련하여 웨슬리가 어떻게 여성설교직을 승인하게 되었으며, 또한 웨슬리와 관련된 초기 감리교 여성설교가들의 활동과 그들이 만났던 문제들은 무엇이었는지를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웨슬리의 기록과 초기 감리교 여성설교자들의 기록을 연구해 볼 것이다.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남아 있는 기록들만으로 당시 여성설교가들의 모습을 일반화시키는 데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당시 감리교 여성지도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읽고 쓰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일지와 편지 등의 기록을 남긴 여성들은 그래도 중산층 내지 상류층의 교육받은 여성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전체 감리교 여성설교가들로 일반화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문헌을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당시 여성설교가들의 모습과 활동들에 대한 조각들을 모아보면 전체적인 그림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웨슬리가 여성설교가들에 대해 남긴 문헌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 조각들을 모을 수 있다. 특별히 웨슬리는 많은 서신을 여성지도자들에게 보냈는데, 이는 그가 1778년부터 출판하기 시작한 『아르미니안 잡지(Arminian Magazine)』의 초기 권들에 수록되어 있다. 이 연구는 이들 문헌들을 중심으로 웨슬리와 초기 여성설교가들에 대한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2. 웨슬리와 초기 감리교 내 여성 지도력의 발전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당시의 어떤 사람보다 여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감리교운동을 위한 목회 초기부터 그는 여성들의 목회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웨슬리는 일찍이 그가 조지아에서 목회할 때부터 병자들을 심방하기 위해 여성들을 임명하였다. 영국으로 돌아와 감리교운동을 전개해 나가며, 그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지역 안에 있는 병자들을 일주일에 세 번 심방하고 육과 영의 상태를 살피도록 하는 제도를 다시 만들어 활용하였다. 이는 1741년 런던에서 처음 실행되어 곧 확산되었고, 여성들은 감리교 내에서 이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여성들의 병자심방의 중요성에 대해 웨슬리는 로마서 16:1을 주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여러분에게 뵈뵈를 추천합니다-[웨슬리의 주석] 뵈뵈는 이 서신을 가져온 사람이다. 종(servant)-이것의 그리스어 단어는 deaconess이다. 겐그리아에 있는 교회에 대해-사도시대에 몇몇 진중하고 경건한 여성들은 초대교회 안에서 여집사들(deaconesses)로 임명되었다. 그들의 직임은 공개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환자들, 특히 여성들을 심방하고 그들의 육체적 영적 필요를 위해 목회하는 것이었다.

   심방일과 함께 여성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왔던 것은 반회(band)와 속회(class)였다. 어떤 여성들은 이러한 모임들에서 기도를 인도함으로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이야기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여성들은 기도의 기술에 있어 높은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나중에 초기 감리교 여성지도자들로 부상한 사라 크로스비(Sarah Crosby, 1729-1804)는 단순하면서도 신령한 기도로, 이사벨라 윌슨(Isabella Wilson, 1765-1807)은 목소리를 크게 하지 않으면서도 열정적인 기도로 대중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앤 커틀러(Ann Cutler, 1759-1794)는 “기도하는 유모(Praying Nanny)”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일부 여성들은 반회와 속회 모임들 안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장소들에서도 기도하였다. 그들은 환자들을 심방하며 기도해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성들의 활동은 점차 목회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그 초기부터 웨슬리의 신학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의 신학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평범한 진리(plain truth for plain people)”를 목표로 하였다. 웨슬리에게 있어 “이상적인 감리교도는 평범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 . . 낙농장에서 일하는 여자도 옥스퍼드 대학 강사만큼이나 그 말을 들었을 때 편안하게 느낄 수 있어야한다. . . . 그럴 때 그 농장여인도 속회에 와서 자신의 시골스런 언어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황함도 없이 자신이 체험한 바를 이야기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웨슬리시대이전에 조직된 다른 종교협회들과는 달리 웨슬리의 신도회는 처음부터 여성들을 받아들였다. 사실 신도회 안에는 여성들의 수가 남성들의 수보다 많았다. 웨슬리가 모라비안들과 결별하고 페터래인 신도회(Fetter Lane Society)에서 나와 런던의 파운더리 신도회(Foundery Society)를 만들었을 때 47명 내지 48명의 여성들이 페터래인을 떠나 웨슬리를 따라갔는데, 이는 이때 따라 나온 남성들 수보다 거의 배가 많은 수였다. 웨슬리가 신도회를 보다 친밀한 속회들로 나눔에 따라 여성들은 자연히 그 속회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일찍이 1742년에 벌써 파운더리에서는 여성 속회지도자들이 임명되었다.
   웨슬리가 감리교 여성지도력에 대해 가졌던 생각은 그가 자신의 어머니 수잔나 웨슬리(Susanna Wesley, 1669-1742)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억이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의의 설교자(preacher of righteousness)”로서 기억하였는데, 웨슬리는 이것을 모델로 여성들을 속회지도자로 임명하였다. 브리스톨에서는 1739년에 벌써 여성 속회지도자가 임명되었었다. 웨슬리가 사회계급이나 성을 지도자를 뽑는 기준으로 고려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분명하다.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웨슬리의 판단에 중요한 기준이 되었던 것은 그가 “원시 기독교(primitive Christianity)”에 대해 가지고 있던 견해였다. 그는 여성들의 목회를 인정하기 위해 신약성서의 권위에 호소하였다. 자신의 설교 가운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러분 모두는 여러분이 지닌 능력 안에서 자연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권리를 주장하여야 합니다. 더 이상 그 지독한 속박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러분[여성]들도 합리적인 존재로 창조함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도 남성들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여러분들도 동등하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도 시간이 주어졌을 때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 . . 원시교회(primitive Church)에서 이 일[환자방문]을 위해 여성들이 특별히 임명되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정말로 하늘아래 모든 기독교 회중 가운데는 그런 일을 하는 이들이 하나 이상은 있었습니다. 당시 그들은 여집사들(Deaconesses), 즉 종들(servants)이라 불리웠습니다. 교회와 그것의 위대한 주님의 종들로 말입니다.

여성들의 활동에 대한 웨슬리의 긍정적인 생각과 격려는 여성들이 초기 감리교 안에서 지도자로 입지를 세워 나가도록 도왔다.
   그와 함께 여성 자신들도 그들의 모범적이고 헌신적인 신앙과 삶을 통해 감리교 내에서 지도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 시작부터 감리교 내에서는 남성들뿐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공공모임에서 자신들의 영적 생활에 대해 말하고 동료 감리교도들을 권면하여 신앙과 회개에 이르도록 하는 일이 권장되었다. 많은 여성들이 그들의 간증과 권면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몇몇 인기 있는 여성전도자들, 예를 들어 사라 크로스비, 앤 커틀러, 헤스터 로(Hester Ann Roe-Rogers, 1756-1794)같은 여성들은 성결에 있어 큰 명성을 얻어서 그들의 삶이 경건문학작품들의 주제가 되기도 하였다. 감리교 운동이 번창해 나감에 따라 여성들은 감리교신도회들을 개척하는데 최전선에 서서 일하였으며, 때론 이들 여성들이 감리교의 성장을 주도해 나가기도 하였다. 그 결과 이들 여성들은 자연스럽게 감리교운동 안에서 지도적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다.


3. 웨슬리의 여성설교 승인과정

   폴 칠코트는 그의 저서 『존 웨슬리와 초기 감리교 여성설교가들』에서 웨슬리의 여성설교가들에 대한 신학적 입장이 시간이 지나며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밝힌 바 있다. 칠코트는 웨슬리가 초기에는 여성설교에 반대하는 엄격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성설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감리교 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설교 지지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웨슬리가 여성설교에 대해 그의 생의 초기에 가졌던 생각과 후기에 가졌던 생각이 달랐던 것은 사실이다. 여성들의 설교를 포함해 여성목회에 대해 웨슬리는 감리교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동안 여러 가지 사건들을 거치며 또한 여러 영향을 받으며 나름대로 자신의 입장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한 입장의 변화내지 사고의 발전은 그가 여성설교가 필요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됨으로 왔다.
   앞서 보았듯이 웨슬리는 여성목회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리는 그의 목회 중기까지 여전히 여성설교에 대해서는 엄격히 반대하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 예로 감리교의 여성친화적 분위기 때문에 감리교가 퀘이커교도들과 비교되면서 여성설교를 옹호한다고 비난받았을 때, 웨슬리는 재빨리 그러한 주장들을 논박하였다. 그러한 감리교운동에 대한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웨슬리는 1747년에서 1748년까지 『최근 퀘이커교도라 불리우는 이들에 합류한 사람에게 보내는 서신(A Letter to a Person Lately Joined with the People Called Quakers)』을 출판하였다. 여기서 웨슬리는 여성들이 대중 앞에서 말하고 예언을 하기도 했다는 성경본문들에 기초해 여성설교를 인정하려는 퀘이커교도들에 반대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는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어떻게 여기 본문 어디서라도 예언이 설교를 의미한다고 증명할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웨슬리가 볼 때 성경에서 예언하는 것은 설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실제로 이 본문이 여성설교를 옹호하기 위해 사용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그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어떤 주장에도 반대하였다.
   그가 감리교 여성 신도들을 위해 이미 여러 해 동안 여러 가지 갱신조치들을 취하였음에도, 웨슬리는 감리교가 여성설교가들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들에 대해서는 단호히 논박하였다. 이는 그가 쓴 『감리교도들과 교황주의자들의 열심에 대해 비교하며 글을 쓴 이에게 보내는 두 번째 서신(A Second Letter to the Author of The Enthusiasm of Methodists and Papists Compar’d, 1751)』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감리교도들 사이에서 “여성들과 남성들이 실제로 이러한 대중설교 목회를 하고 있다”는 비난에 대응하며 웨슬리는 “어디에서 그런 일이 있는지 말해 달라. 나는 그런 사람들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 대해 이전엔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하였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감리교가 여성설교를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지는 것에 대해 웨슬리가 얼마나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여성설교를 금하는 성경본문으로 디모데전서 2:11-14의 말씀이 자주 인용되어 왔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사도 바울은 이 본문에서 분명히 여성들이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이를 주석하면서 웨슬리는 “대중을 가르치는 것”은 여성들이 해야 할 일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는 남성의 권위를 침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언급했던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이브가 아담을 죄짓도록 설득한 사건에 대해 주석하면서도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앞의 구절은 왜 여성이 ‘남성의 권위를 침범해서는’ 안 되는 지를 보여주었다. 이는 여성이 왜 ‘가르치면’ 안 되는 지를 보여준다. 여성은 더 쉽게 속고 더 쉽게 속인다.”
   하지만 웨슬리가 이런 주장들을 했다고 해서 당시 그의 부흥운동 안에서 여성들이 하였던 역할의 중요성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여성들이 감리교 안에서 설교하도록 허용되기 이전조차도 분명 그들은 “감리교를 위한 개척자요 지지자요 순교자로서 웨슬리 추종자들 사이에서 칭찬과 존경을 받고 있었다.”
   감리교운동의 성장과 함께, 특별히 1760년대 이후, 웨슬리의 입장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감리교 내 신도회, 속회, 반회 등과 같은 모임들 안에서 남성들뿐 아니라 여성들도 함께 경험을 공유하며 이들 모임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 가운데도 특히 서로 친밀한 유대관계 속에 있던 반회와 애찬식에서 여성들은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체험하게 되고 이러한 내적 기쁨을 간증하게 되었다. 웨슬리 자신도 종종 여성들의 간증에 감동받아 칭찬하곤 하였다. 1761년 1월 30일 파운더리 반회 안에서의 일상적 모임 가운데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시는데 여성들도 사용하실 수 있음을 긍정하였다: “한 가난한 여인이 마음의 충만함으로 소박한 몇 마디 말을 하는 동안 그것을 듣던 거의 모든 사람의 마음을 통해 . . . 불이 붙어 불꽃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일하고자 하시면 그 도구가 얼마나 약한지 혹은 얼마나 천한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와 같이 여성들의 영적 체험이 발전되어 감에 따라 그들의 이야기는 감리교도 사이에서 공유되고 그에 따라 그들 가운데 자연히 호소력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간증들은 자연히 더 발전되어 사실상 권면이나 심지어 설교와 비슷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여성설교 문제는 속회 안에서 등장하였다. 속회 안에서 여성 지도자들은 어느 정도 제약이 있었으나 그들은 곧 그 설정된 경계를 넘어서도록 강요받는 상황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사라 크로스비의 경우이다. 크로스비는 1752년부터 감리교 안에서 속장을 맡아온 여인으로 영적으로 깊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크로스비가 하는 말을 듣기 원했고, 그녀는 1761년 더비(Derby)에서 집회를 갖게 되었다. 이때 그녀는 참석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원했지만,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한 사람씩 만나 개별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실행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때문에 그녀는 청중 앞에 서서 설교와 유사한 것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찬양과 기도를 하고, 이어서 모인 사람들에게 “모든 죄에서 벗어날 것을 설득하면서” 주께서 그녀 “자신에게 하신 일의 일부에 대해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 때 그녀는 “사람들에게 말할 때 영혼이 많이 위안을 얻는 것을” 느꼈지만, 여전히 그것이 옳은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크로스비는 자신이 공식적으로 설교하는 것에 대해 웨슬리에게 조언을 구하였다. 웨슬리는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당신이 너무 나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그보다 덜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그 이상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시 모였을 때 단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날 아주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감리교는 여성설교자를 허용치 않습니다. 그리고 나도 그런 성격을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있는 것을 그저 솔직히 말할 것입니다.” . . . 나는 당신이 어떤 법도 어겼다고 보지 않습니다. 계속 침착하고 꾸준히 하던 대로 하십시오. 시간이 있으면 성서의 어떤 장이든 그 주해를 그들에게 읽어주고 몇 마디 해도 됩니다. 혹은 다른 여성들이 오래 전에 했던 것처럼 영을 깨우는 설교 가운데 가장 좋은 한 두 편을 읽어 주어도 됩니다.

위의 답변을 통해 웨슬리는 여성 권면자가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보여주었다. 즉 그는 크로스비 부인의 행동이 잘못된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감리교가 여성설교를 허용치 않음을 분명히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크로스비가 웨슬리로부터 대답을 듣기 전에 이미 행동하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5일 후 다시 200여명의 청중에게 권면의 말을 하였고, 다음 달 성금요일에는 설교를 하나 읽어주고, 부활절 저녁에는 청중을 위해 기도하고 권면의 말을 하였다.
   비슷한 조언을 웨슬리는 8년 후인 1769년 3월 18일자 크로스비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시 하였다. 그는 크로스비에게 주의할 것을 당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이전에 그레이스 월튼(Grace Walton)에게 했던 것처럼 당신에게 조언합니다. 1. 할 수 있는 한 많이 사적으로든 대중 앞에서든 기도하십시오. 2. 대중 앞에서 기도와 함께 짧은 권면의 말을 적당히 섞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될 수 있는 대로 설교라 불리 울 수 있는 것은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따라서 본문을 택하지 마십시오. 결코 중간에 쉬지 않고 4,5분을 넘어 계속해서 대중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청중에게 “또 나중에 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기도회를 다시 가질 것이라” 말하십시오.
  
이 시점에서 웨슬리의 견해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는 성경 본문을 택해서 쉬지 않고 4,5분을 넘어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설교라 할 수 있음을 암시함으로 분명한 선을 그었다. 그래서 만일 더 말해야 할 상황이라면 다음 모임을 계획하고 헤어짐으로 설교하는 일을 피하도록 조언하였다.
   2년 후인 1771년 여성설교가들에 대한 웨슬리의 태도와 생각에 갑작스런 변화가 찾아 왔다. 그 해 6월 13일 메리 보상켓에게 보낸 편지는 이 문제와 관련해 자주 인용되곤 한다. 보상켓은 런던에 있는 속회와 이후 리즈 근교의 크로스 홀(Cross Hall)에서 그녀가 그것을 “연설(speaking)”이라 불렀지만 사실상 설교와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크로스비와 마찬가지로 보상켓은 자신의 활동에 대해 웨슬리에게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썼고, 이에 답장으로 보낸 편지에서 웨슬리는 일부 여성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소명(extraordinary call)”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일상적인 장정법(ordinary rules of discipline)”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그 명분의 힘이 당신이 “특별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는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 평신도 설교자들 모두가 그러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들이 설교하는 것을 전혀 참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감리교라 불리우는 운동을 통한 하나님의 전적 역사하심은 그가 특별히 섭리하신 일이라는 것이 내게는 평범한 사실로 보입니다. 그래서 나는 일상적인 장정법에 맞지 않는 몇몇 일들이 일어난다고 의아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만든 일상적 규칙은 ‘나는 여성이 회중 가운데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특별한 경우에 예외를 두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에서처럼 말입니다.

이 편지는 웨슬리가 보상켓 부인이 특별한 소명을 가지고 있음을 긍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마찬가지로 이 편지는 다른 여성지도자들에게도 특별한 소명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긍정하고 있다. 또한 웨슬리는 바로 이 특별한 소명에 기초해 평신도설교자들을 임명하였다.  
   웨슬리 학자 랜디 매덕스(Randy L. Maddox)는 웨슬리가 자신의 부흥운동을 “특별한(extraordinary)” 사건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여성들이 설교하는 것에 관대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는 옳은 지적이다. 고린도전서 14:34에 대해 주석하며 웨슬리는 “성령의 특별한 감동하심이 있다면” 여성들도 교회 안에서 이야기해도 된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은 주석을 통해 웨슬리는 이미 여성들이 특별한 경우에는 설교해도 된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그의 목회 후기에 접어들며 웨슬리는 신학적으로 보다 카리스마적인 목회관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제도의 권위보다는 내적 영감을 보다 강조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교회의 계급구조보다는 “개인 영혼의 가치,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류의 가능성”을 높이 생각하였다. 이러한 신학 때문에 여성들은 반회, 속회, 애찬식 등에서 대중 앞에서 종교적으로 중요한 역할들을 맡도록 허용되었다. 또한 많은 여성들은, 설교자들이 설교를 마친 후, 개인적인 영적 생각들을 제시하는 비공식적인 “권면자(exhorters)”의 역할을 하였다. 권면과 설교 사이를 구분하는 일은 어렵다. 1760년대에 이르러 수 십 명의 여성들이 전국적으로 감리교 안에서 설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벌써 웨슬리는 여성설교를 묵인하고 있었다.
   마침내 웨슬리가 사망하기 4년 전 1787년에 이르러 여성 설교권이 감리교 안에서 승인되었다. 이는 웨슬리가 사라 몰렛(Sarah Mallet, 1764-1846)에게 설교자로서의 공식적인 자격을 부여함으로 이루어졌다. 1787년 맨체스터 연회에서 웨슬리와 연회의 명령을 받고 조셉 하퍼(Joseph




신학사상 2011년 여름호(153집) 차례
신학사상 2010년 겨울호(151집)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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