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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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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연 
 신학사상 2011년 여름호(153집) 차례


이번 호에는

신약학 분야에서 강선남 박사의 “베드로 오순절 설교의 요엘 인용문 연구- 성서의 전승사적 고찰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게재했는데, 이 논문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행 2:14-41)에 나오는 요엘 인용문(3:1-5a MT/2,28-31a LXX)을 기존 연구와는 달리 단순히 인용문의 자료 출처를 찾는데 그치지 않고, 추정 자료인 칠십인역 분석을 통하여 구약성서 히브리어 본문에서 사도행전에 이르기까지의 중간 과정을 살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이어주는 성서의 전승사를 보다 명확하게 밝히려 했다.
배재욱 영남신대 교수는 “섬김을 이루기 위한 머슴신학 이해- 은파에게 나타난 머슴 이해와 관련하여”라는 논문에서 현재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의 본질이 섬김을 잃어버린데 있다고 진단하고 섬김의 신학을 우리 전통의 머슴이해로 발전시켰다.

조직신학 분야에서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는 “강물아 흘러 바다로 가거라”: ‘전능하신(?) 인간’과 ‘끙끙 앓는 하나님’“이란 논문에서 21세기 기독교 신학이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는 ‘전능하신’ 인간의 문제, 즉 자연을 창조한 것도 아니고 또 자연을 완벽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손에 넣은 현대 인간의 지배권 문제라고 제안한다. 특히 4대강 문제를 강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강에 ‘지속가능한 경계선’을 정하자는 생태학자들의 제안을 성서의 선악과 이야기에 비유하면서,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성서의 생명의 강 환상을 소개한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이러한 생명의 강의 발원지가 될 수 있기를 촉구한다.
오승성 한신대 외래교수는 “하이데거의 ‘전회’가 갖는 철학적인 의미의 신학적인 수용: 슐라이어마허와 틸리히의 주체중심적인 중재신학을 넘어서”라는 논문에서 인간중심적인 신학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이데거의 전회를 신학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먼저 말을 걸어온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께 먼저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우리는 먼저 우리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을 들음으로써만 자기 자신의 실존을 보다 더 정확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신학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신앙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이런 신앙은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하기에 결국 초월과 내재는 성령 하나님에 의해 중재되어야 한다.    

종교철학 분야에서 김장생 연세대 교수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두 서신을 반박하며』 I, xi, 24에서 나타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도의 죄성 이해”라는 논문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의식적이고 주체적인 동의와 비의식적이고 비주체적인 동의를 구분하였지만 양자에 모두 의식이 작용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주체적 동의’와 ‘비주제적 동의’ 양자에서 모두 의식이 작용을 하고 있다고 보았기에 본 구절에서 사도들이 욕정에 ‘동의’ (consensio)를 하지 않았다고 말하였지만 그것은 주체적인 의미의 동의만을 의미하였던 것이고 반대로 비주체적 의미의 동의는 제외된 것이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사도는 욕정에 주체적 의미의 동의는 하지 않지만 비주체적 동의는 여전히 하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신은희 경희대 교수는 “미국 원주민의 영성신학 연구”라는 논문에서 미국 원주민의 태양춤은 백인중심의 기독교 사관에 의거하여 가장 비문명화된 종교전통으로 오인되어 소멸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던 억압된 전통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원주민의 태양춤 전통은 생태적 관심과 녹색신학 운동에 힘입어 자연만물과의 조화와 공존을 추구하는 실천적 대안 신학으로 주목 받고 있다고 한다. 이 논문은 원주민 영성신학의 논의에 필요한 ‘대신령의 영성체험’을 중심으로 태양춤의 상징과 저항의 역사, 그리고 기독교와의 만남을 통한 문화적 변용 사례들을 논의하면서 태양춤에 나타난 원주민 영성 신학의 특징으로 종교문화의 이원체계 현상, 아픔과 수난의 영성, 몸 미학적 영성, 생태 신학적 영성을 토착화 신학 관점에서 해석 한다.

기독교윤리학 분야에서 구미정 숭실대 겸임교수는 “데기-되기: <선천댁>에 나타난 안병무의 ‘민중 구원론’ 다시 읽기”라는 논문에서 안병무가 식자(識者)인 남편의 모진 학대와 냉대 속에서 부엌데기로, 소박데기로, 바리데기로 살았던 어머니 선천댁이 차별과 희생에 대해 분노와 증오가 아닌 연민과 자비로 살아온 모습에서 ‘남을 위한 삶’으로 체화된 무엇, 곧 자기초월적 차원변화를 이뤄낸 ‘씨’ 또는 ‘산알’이어야 참 민중을 발견했다고 본다. 그래서 이 논문은 이러한 민중의 특성을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하느님-아기를 낳음’에 견주어 설명한다. 나아가 민중신학이 신비주의와 탈식민주의, 그리고 여성주의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면서, 21세기 지구화 시대에 유의미한 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지점을 모색한다.  
권오왕 숭실대 외래교수는 “죤 듀이의 사회 정의론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고찰”에서 죤 듀이의 정의와 민주주의의 개념을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의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소위 중도 실용의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실용주의에 입각한 사회 정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일어난 대지진과 엄청난 해일 그리고 이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 폭발은 단지 일본 만의 재앙이 아니라 인류 재앙의 단초로 인식된다. 지진과 해일의 피해가 막심하지만 그것은 일본의 경제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원전 유츨  사고는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를 않는다. 현실적으로 핵무기보다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더 큰 피해와 위험 요소가 되고 있다. 그래서 독일은 2022년 까지 모든 원전을 다 폐쇄시키겠다고 했다.
이런 현실인데도 현 정부는 원전 증설 계획을 추진하고, 심지어 100억 달러 이상 빚을 보장해준 원전(?) 수출을 최대 업적으로 자랑하고 있다. 정권의 탐욕에서 국민과 한 민족이 겪을 고통의 미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당면한 경제적 고통의 긴박성 때문에 원전 문제는 먼 미래 문제처럼 인식될지 모르지만 이 문제 해결 또한 긴박한 문제이다. 신학계와 기독교계가 원전 문제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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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연구 논문
강선남 ․ 베드로 오순절 설교의 요엘 인용문 연구- 성서의 전승사적 고찰을 중심으로
배재욱 ․ 섬김을 이루기 위한 머슴신학 이해-은파에게 나타난 머슴 이해와 관련하여
장윤재 ․ “강물아 흘러 바다로 가거라” : ‘전능하신(?) 인간’과 ‘끙끙 앓는 하나님’
오승성 ․ 하이데거의 ‘전회’가 갖는 철학적인 의미의 신학적인 수용:
            슐라이어마허와 틸리히의 주체중심적인 중재신학을 넘어서
김장생 ․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두 서신을 반박하며』I, xi, 24에서 나타난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도의 죄성 이해
신은희 ․ 미국 원주민의 영성신학 연구
구미정 ․ 데기-되기:『선천댁』에 나타난 안병무의 ‘민중 구원론’다시 읽기
권오왕 ․ 죤 듀이의 사회 정의론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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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1
                                                          
                                                           데기-되기
                           : 『선천댁』에 나타난 안병무의 ‘민중 구원론’ 다시 읽기*


                                                                                   구미정 (숭실대 겸임교수/ 기독교윤리학)


초록

이 글은 안병무의 유작인 『선천댁』을 통해 민중신학과 여성신학의 대화를 모색한 것이다. 안병무는 민중신학자의 과제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자기를 표현할 언어를 잃어버린 민중을 대신하여 ‘증언’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그런 한편으로, 그는 ‘민중’ 개념이 박제화될 것을 우려하여 끝내 민중에 대한 개념화를 거부했는데,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서 마침내 ‘이것이 민중이다’를 증언하기 위해 제시한 것이 바로 선천댁이다.
안병무의 어머니 선천댁은 비문자 계층의 여성으로, 당대 거의 모든 여성들이 그러했듯이 가부장적 가족제도 안에서 차별과 희생을 겪었다. 식자(識者)인 남편의 모진 학대와 냉대 속에서 부엌데기로, 소박데기로, 바리데기로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를 버린 남편과 그 남편을 빼앗아간 첩에 대해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품기는커녕, 연민과 자비로 보듬었다. 그녀의 품은 ‘가난의 슬픔’을 아는 여성들, ‘불행한 결혼’의 고민을 안은 여성들, 그래서 누군가의 ‘품’이 늘 그리운 여성들이 몰려들어 쉼을 얻는 ‘생명 연대’의 공간이었다.
안병무는 그러한 선천댁의 ‘연민의 윤리’에서 민중의 자기초월의 단초를 발견한 듯하다. 그렇다면, ‘민중’은 어떤 사람이 단지 현존체제의 밑바닥에 처해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안에 포섭될 수 있는 만능 개념이 아니고, 오히려 ‘남을 위한 삶’으로 체화된 무엇, 곧 자기초월적 차원변화를 이뤄낸 ‘씨’ 또는 ‘산알’이어야 참 민중일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이러한 민중의 특성을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하느님-아기를 낳음’에 견주어 설명한다. 나아가 민중신학이 신비주의와 탈식민주의, 그리고 여성주의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면서, 21세기 지구화 시대에  유의미한 자리를 확보할 수 있는 지점을 모색한다.  

주제어
선천댁, 민중, 하위주체, 연민의 윤리, 생명의 연대  




1. 머리말

안병무를 ‘다시’ 읽는 일은 간단치 않다. 김진호의 지적대로, 안병무의 사상적 궤적을 꿰뚫어 파악할 수 있는 자료 정리 작업도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진데다가, 이제까지의 연구들은 안병무에 관한 “제각기 말하기”여서 “그것으로 수렴되는 논의의 중심점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안병무 읽기’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에서 ‘다시 읽기’가 가당키나 하냐는 지적은 상당히 타당하게 들린다.
그러나 안병무 읽기가 단순히 그의 텍스트를 읽고 이해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러한 텍스트에 담긴 신학자로서의 고뇌, 그가 붙잡고 씨름했던 사회문화적 콘텍스트, 끊임없이 자신의 콘텍스트와 대화하기 위해 지성을 벼리는 신학적 방법, 그런 것들을 깨닫는 차원이라면, 안병무 읽기는 후학들에게 얼마든지 그리고 항상 ‘다시 읽기’의 창조적인 가능성을 열어놓는다고 본다.
그렇다면 왜 나는 지금 여기서 그를 다시 읽으려고 하는가. 그가 창안한 민중신학은 1970-80년대 한국의 사회문화적 콘텍스트와 대화한 산물이었다. 그리하여 얼추 88올림픽 이후, 한국사회가 급속히 지구화 경제질서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고, 또 정치적으로도 빠르게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민중신학은 죽었다는, 더 이상 민중은 없다는 소리까지 심심찮게 들려오는 실정이다. 이러한 때, 나는 왜 다시 그를 호명하는가.
이 대답을 하려면 우선 ‘나’의 자리부터 살펴보라는 것이 안병무의 가르침의 하나, 아니 어쩌면 으뜸가는 가르침일 것이다. 나는 어느 자리에 서 있는가. 여성이며 기독교인이며 박사학위를 가지고 ‘취업학교’로 전락한 제도권 대학의 변두리에서 ‘밥벌이의 지겨움’에 시달리는 나는 누구인가. 이 ‘나’에게 고통의 원인이 되는 사회문화적 구조는 또 무엇인가. 더 나아가 이른바 여성신학을 공부한다는 나의 학문적 정체성은 나 자신의 실존과 내가 처한 현장에서 어떠한 꼴과 결을 주조해내고 있는가.  
안병무는 자기 시대의 아픔, 동시대 ‘민중’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체감한 ‘산 신학자’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피부 캡슐로 둘러싸인 자아”(skin-encapsuled self)에 갇혀 자기 일이 아니면 아예 관심의 촉수를 닫아버리거나 또는 입으로만 그럴듯한 수사를 구사할 뿐 막상 실천에 있어서는 전신마비환자처럼 무력한 ‘죽은 지식인’들에게 영원한 모범답안이다. 그는 지식인, 특히 신학자의 과제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자기를 표현할 언어를 잃어버린 민중을 대신하여 ‘증언’하는 데 있다고 보았고, 또 그러한 증언적 삶을 살았다. 그가 말하는 민중신학의 ‘신학하기’란 “저 높은 신의 타자성의 발견 과정이 아니라, 저 낮은 곳에 스스로를 동일시한 신의 타자성을 발견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이 땅의 신학적 계보학에서 비교적 후발주자로, 그러니까 1980년대 어간에 태동하기 시작한 한국여성신학은 오늘에 이르러 그 뜨거웠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구조적인 요인들이 있을 것이나, 이 지면이 그 부분을 상세히 다루기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한 가지, 지난 30여 년 동안 여성신학은 그 외연을 넓히고자 애쓴 선배들의 노력으로 소기의 성과가 달성된 데 비해, 실제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부르주아화 된 것이 아닌가 싶은, 거친 소감만 조심스레 밝혀둔다. 정직히 고백하건대, 오늘의 여성신학 담론은 어제의 그것처럼 이 땅의 여성들에게 신명나는 살림의 복음이 되지 못한 채, 상아탑 안의 관념론으로 부유하는 느낌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누구의 여성신학이고, 무엇 하자는 여성신학인가.
이 물음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서는 여성신학이 민중신학을 필요로 한다는 게 나의 소견이다. 아울러 역으로, 민중신학이 특정한 시대의 이데올로기나 슬로건으로 끝나지 않고 그 생명력을 왕성히 이어가기 위해서는 여성신학의 통찰과 방법으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전제 아래서 안병무의 유작인 『선천댁』을 통해 여성신학과 민중신학의 대화를 모색하려는 이 글의 시도는 양쪽 모두에게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2. 도대체 민중은 무엇이며 누구인가

몰트만은 “신약성서에 대한 주석학적 발견이 새로운 교회 공동체 운동과 새로운 신학으로 발전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고 운을 뗀 뒤, 곧이어 마르틴 루터와 안병무를 나란히 언급한다. 왜냐하면, 루터가 로마서 3장 28절에서 ‘하느님의 의’를 발견하고, 이로 말미암아 교회와 사회에 일대 개혁운동이 일어난 뒤로, 이와 같은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는데, 안병무의 주석학적 발견이야말로 루터의 그것에 버금가는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안병무의 주석학적 발견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오클로스’(ochlos)의 발견이다. 사실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오클로스의 용례를 분석하여, 오직 마가복음의 오클로스만이 특정한 계층적 집단으로 성격화할 개연성이 높다고 밝힌 이는 다가와 겐조(田川建三)였다. 그러나 안병무는 이러한 다가와의 발견에다가 자신의 독특한 해석을 접목시켜 마침내 ‘안병무표 오클로스’를 제시했는데, 여기에는 이른바 ‘전태일 사건’이 커다란 전환점으로 작용한다. 이전까지 그의 신학이 다분히 시대와 불화하는 실존주의적 자의식에 경도되어 있었다면, 전태일 사건을 만나면서 ‘광장’과 ‘거리’가 그의 신학의 주요 공간이 되었던 것이다.
세리와 창녀, 병자, 가난한 자 등으로 표상되는 이 오클로스는 한마디로 익명의 천민대중을 가리킨다. 마가복음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라오스’(laos)를 의도적으로 피하는 대신에 오클로스를 강조함으로써, 이른바 제자(라는 것들)와 이들을 대비시킨다. 안병무의 탁월한 상상력은 이 오클로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암하아레츠’(amhaaretz)로 거슬러 올라간 데서 빛을 발한다. 히브리어 암하아레츠는 ‘땅의 사람’을 뜻한다. 다시 말해, 본래는 지주계층이었다. 그런데 이른바 바빌론 포로시대 이후, 개념상의 변이가 일어났다. 주로 왕족이나 귀족, 지주를 포함한 지배층과 상류계층들이 모두 포로로 끌려갔으니, 이들이 소유했던 땅은 남아 있던 농민이나 하류층, 또는 바빌론이 정책적으로 이식시킨 이방인들의 손에 넘어가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리하여 잡혀갔다 돌아온 상류층이 이들을 ‘암하아레츠’라 부를 적에는 멸시와 분노의 뜻이 담겨지게 되었다. 요컨대, 변질된 암하아레츠의 뜻은, 순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쌍놈’과 같다. 땅꾼(농사꾼), 무식한 자, 율법도 모르며 안 지키는 자, 그러니 함께 밥상머리에 앉아서는 안 되는 이방인처럼 취급된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안병무는 이러한 암하아레츠가 후기 유대교에 이르러 또 한 번 개념 변이를 일으켰다고 지적한다. 랍비 유대교는 철저히 율법으로 에워싸인 체제인 바, 이로써 이스라엘 민족이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체제 안의 사람과 체제 밖의 사람이다. 체제 안의 사람은 율법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으로 ‘의인’이라 인정된 반면에, 체제 밖의 사람은 율법을 지키지 못해 ‘죄인’이 되어야 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하루살이’ 인생들, 그래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규정을 지킬 수조차 없는 사람들, 불결한 일을 직업으로 삼은 탓에 정결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 가차 없이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들이 바로 암하아레츠이며, 또한 오클로스라고 안병무는 말한다. 그러므로 “저들을 구(원)하는 길은 죄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죄의 콤플렉스에서의 해방”이다.
그러니까 안병무는 자신이 서구신학과 결별하고 민중신학에 투신한 뒤로 끊임없이 제기된 ‘민중이 무엇이냐 또는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 뚜렷한 개념 정의를 의도적으로 피했지만, 어쨌거나 마가복음의 ‘오클로스’를 우리말 ‘민중’으로 옮기면서, 이 민중의 핵심 요건으로 ‘영토성’ 혹은 ‘귀속 공간’의 박탈을 강조한 셈이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끝끝내 민중의 개념화를 거부했다. 개념화는 살아 있는 민중을 박제로 만들 위험이 있기에 그랬다. 하지만, 민중은 민족이 아니다, 인민이라 불리는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도 아니다, 그런 식으로 자꾸 ‘~아니다’라는 말만 해서는 민중의 알속을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있으니, ‘~이다’는 어법도 구사하기는 해야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선천댁』이다.
안병무는 ‘이야기’의 힘을 믿은 사람이다. 아니, 예수 사건을 이야기 속에 담아 전달한 민중의 지혜를 믿은 사람이다. 마가복음의 오클로스는 ‘예수는 ~이다’를 보여줄 방편으로 이야기를 택했다. 현학적이고 논리정연한 논설이나 훈화와 같은 죽은 말이 아니라, 듣는 이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일으켜 예수 사건에 동참케 하는 살아있는 말이 바로 이야기다. 하여, 안병무는 죽음이 임박한 중에도 혼신의 힘을 쏟아 마지막으로 ‘민중은 ~이다’를 보여주기 위해 선천댁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기 이야기를 옮기려니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이른바 까막눈”인지라 그조차 불가하여, 식자(識者)인 아들의 입을 빌릴 수밖에 없는 어머니, ‘실어증’에 걸린 민중을, 그 민중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보기가 어디에 있을까.

3. 민중의 원형질, 선천댁

1) 출가 또는 부엌데기-되기
선천댁이란 보나마나 ‘선천이라는 동리에서 시집을 온 여자’라는 뜻이다. 출가한 여자는 시집 기준으로 ‘새아기’가 되고, 그 시집의 이웃사람들에게는 ‘새댁’이 되는데, 이 일반명사인 새댁을 고유명사로 특징짓는 게 바로 그가 본래 살던 장소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우리말 어법에서 처녀가 시집가는 것을 왜 ‘출가’라 하는가. 물론 이때의 출가(出嫁)는 불교에서 말하는 출가(出家)와 다른 의미이지만, 시집살이 자체가 곧 득도(得道)의 과정인 것을 생각하면, 그 발음상의 동일성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보태자. 출가한 여자는 왜 ‘새아기’로 불리나. 다 큰 어른에게 ‘아기’가 웬 말인가. 새아기라는 말에는 시집에서 새로 태어나라는 요구가 반영되어 있다. 이전까지 친정에서 살던 삶은 모두 부정된다. 그가 어떤 가문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자라난 ‘딸’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친정의 가풍이라든가 문화 따위는 ‘레테의 강’에 흘려보내고, 이제는 철저히 시집이라는 낯선 세계에서 거듭나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거듭남’이 그러하듯이, 이 경우에도 오직 ‘순종’만이 미덕이다. 방금 태어난 새아기에게 자기 생각이라든가 의견이라든가 주장이 있을 턱이 없다.
열여섯의 나이에, 대대로 한의사를 가업으로 이어오는 안씨 집안의 막내며느리가 된 선천댁은 시집온 첫 날부터 ‘부엌데기’로 전락한다. 부엌데기는 그 집안에서 서열상 가장 밑바닥에 있는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진 새로운 존재론이다. 그녀의 고생은 한 살 아래 남편이 제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몰래 한의사 공부를 할 ‘욕심’을 품으면서 배가된다. 가업은 맏아들만 잇도록 되어 있고, 막내인 선천댁의 남편을 포함하여 나머지 세 아들은 모두 농사를 지으라는 것이 아버지의 지엄한 명령인데, 남편이 그만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만 것이다. 이를 눈치 챈 형제들 중 하나가 농사 이외의 활동을 모조리 감시했기 때문에, 선천댁은 밤마다 남편이 공부하는 사이에 호롱불빛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온갖 지혜를 짜내야 했다. 그런 한편으로 아침이면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손에 호미를 들고서 밭으로 달려 나가 뙤약볕 아래 땀을 흘리는 농부의 삶을 살았으니, 젊은 아낙의 고난이 어떠했으랴.
1922년 음력 윤 5월 23일에 아들 안병무가 태어난다. 밭일을 하던 중 산기를 느낀 선천댁이 집으로 엉금엉금 기어들어가 홀로 낳은 생명이다. 그 위로 이미 두 딸을 낳았으나, 모두 저승으로 떠나보낸 경험이 있다. ‘딸이어서’ 환영받지 못한 그 생명들은 아쉬울 것 없이 홀연 이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핏덩이를 부여안고 오열한 것은 어미밖에 없었다. 셋째도 딸이라 짐작했던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해산의 현장에서 선천댁은 홀로 진통을 겪고, 아기를 낳고, 탯줄을 자르고, 아기를 씻겼다. 부엌데기 선천댁은 그렇게 시집과 남편에게 철저한 ‘무’(無)였다.

2) 선택 또는 소박데기-되기
안병무는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말이 “여자를 구속하기 위해 남자들이 만들어 낸 잔인한 원칙”이라고 말한다. 실은 그 이상이다. 차라리 황용연이 예로 든 양정명의 경우가 그 말의 절절한 실상을 드러낼 터이다. 양정명은 어릴 때 가족 모두가 일본 국적으로 귀화한 재일조선인이다. 그런데 머리가 트이면서 자신의 ‘귀화’를 하나의 ‘배신’으로 자각하게 된다. “재일조선인으로서 정당한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채, 그런 기회를 박탈한 가해자인 일본인에 편입되어버린” 귀화의 경험은, 비록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었다고 하나, 명백히 배신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배신을 자각했다고 해서 곧장 ‘청산’할 수 있느냐 하면, 그럴 수 없다는 데 그의 고뇌가 자리한다. 왜냐하면, 재일조선인에게 ‘재일’(在日)이란 이미 생활과 존재의 기반이기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가는 식으로는 해결될 성질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의 분신(焚身)은 “찢김을 자기 내부에 떠맡게 되어버린 자”의 처절한 자기파괴적 한풀이가 아닌가.
그렇다. 그것은 찢김이다. 두 곳에 모두 연루되어 있으나,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않고, 또 환영받지도 못하는 존재는 슬프다, 외롭다, 가슴이 미어진다. 오클로스가 자신의 영토성 내지 귀속 공간을 박탈당한 사람들을 뜻한다면, 바로 이렇게 찢긴 존재, 경계인, 이중 국적자, 불순분자가 오클로스다. ‘출가외인’이라는 선천댁의 입지가 정확히 그에 상응한다. 친정집은 아무리 그리워도 돌아갈 삶터가 아니다. 그렇다고 시집이 내 영토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성씨가 다르니, 이 집 ‘귀신’은 될 수 있을지언정 이 집 ‘사람’은 될 수 없다. 그야말로 존재론적 분열이며 불안이다.
선천댁이 시집 와서 처음으로 친정 나들이를 허락받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물난리 통에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때문이었다. 친정집에 덩그마니 남은 남정네들(아버지와 오라비 둘)이 ‘밥해 줄’ 손이 필요하다며 선천댁을 보내 달라 청한 것이다. 어차피 선천댁의 남편은 식구들 몰래 공부를 하여 한의사 면허를 따자 가출하고 집에 없었다. 그러므로 선천댁의 친정행은 어쩌면 형식은 ‘허락’이었으나, 내용은 ‘소박’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친정에서도 부엌데기처럼 살림을 도맡아 하던 선천댁은 어느 날 우연히 남편의 만주행 소식을 듣게 된다. 모월 모일 어디서 남편이 기차를 타고 만주로 떠난다는 것이다. 그 날, 선천댁은 아이를 들쳐 업고 일찌감치 역으로 나간다. 단순히 남편을 배웅만 하고, 다시 친정으로 돌아갈 요량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역전에서 만난 남편은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다.

선천댁은 기로에 섰다. 새 여자와 더불어 아주 떠나기로 마음먹고 기차표를 손에 든 남편, 어머니를 순식간에 잃고 아내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있는 친정, 그 어느 편에 설 것인가? …… 그때 그에게 ‘나는 내 인생을 살겠다’는 단순하나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 못한 의지가 솟구쳤다. …… 그는 자신으로 태어난 것이다.

“다른 여자에게 정을 판 남편”의 눈에는 다짜고짜 기차에 올라탄 선천댁이 “기생충이나 진드기같이” 보였을지 모른다. 그런가 하면, 선천댁 편에서도 그렇게 미덥지 못한 남편을 따라 “자기편이 되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생소한 남의 땅”으로 떠난다는 게 마냥 흔쾌한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선택을 한 까닭은 아이를 위해서였다. 안병무는 선천댁의 이 선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해한다.

선택은 선과 악을 갈라놓고 그 중에 하나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선과 악이 혼재한 둘 중에 하나를 가려 가짐으로 다른 하나에게 포함되어 있는 선을 포기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그 선택이 언제나 살아 있는 것이 되어 내 삶에 추진력이 되려면 내가 버린 것 안에 담겨 있는 선한 것의 상실에 대한 아픔이 계속되는 한 가능하다.

선천댁의 선택은 평생토록 친정식구를 버렸다는 죄책감을 동반한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딸’로서의 의무와 과제를 ‘배반’했다는 죄책감이다. 이 상처가 얼마나 깊었던지, 선천댁은 가끔씩 실성한 사람처럼 맥을 놓고서는 “내가 딸을 낳으면 그대로 엎어 버리겠다”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그건 단순한 한탄이나 푸념이 아니다. ‘딸’에게, 딸로 태어난 사람에게 부당한 ‘배반’의 감정을 강요하는 가부장제에 대한 분노이며 조롱을 포함한다. 문제는 이런 ‘한’ 맺힌 감정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점이다.    

3) 그늘 또는 바리데기-되기
마음의 깊은 상처는 ‘그늘’을 만든다. 그런데 이때의 그늘은, 김지하 식으로 말하면, 단순한 그림자나 어둠과 다르다. 그것은 어둠이면서 동시에 빛이고, 웃음이면서 동시에 눈물이며, 한숨이면서 동시에 환희인 “이상한 그늘”이다. 이런 그늘은 인생의 쓴맛, 단맛의 신산고초를 피해버리거나 적당히 얼버무리는 사람에게는 깃들지 않는다. 오히려 생명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인위적으로, 곧 문화와 관습, 법과 제도 등에 의해 가로막혔을 때 발생하는 한(恨)의 감정을 묵묵히 견디되, 분노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삭힘’으로써 인욕정진(忍辱精進)하는 삶의 자세라야 깃드는 그늘이다. 이를테면, 영화 <서편제>에서 소리꾼 아버지의 욕심 때문에 눈이 멀게 된 송화가 인생 말년에 내는 소리에는 단순한 한풀이나 한의 폭력적인 자기발현이 아니라 “미적 깊이”와 “윤리적 깊이”에 도달한 무엇이 들어있다. 김지하는 이런 그늘을 일컬어 “흰 그늘”이라고 불렀다.
만주 땅에 도착한 선천댁을 보라. 남편은 고향에서 먼저 온 선배네 집에 식구들을 떨어뜨려 놓고, 살 곳을 찾으면 데리러 오겠다는, 기약 없는 말을 남긴 채 떠나 버렸다. 선천댁은 영락없이 바리데기가 되었다. 임신 중인 몸으로 하녀처럼 일해야 했다. 영양실조와 과로로 지친 몸은 새 생명을 제대로 품어 키우기에 역부족이었다. 차디찬 냉대 속에서 태어난 아기(다행히(?) 아들이었다)는 결국 제 아비 얼굴도 보지 못하고 객지에서, 그것도 남의 집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세 번째로 앞서 떠나보낸 자식이다.
그 벅찬 겨울이 지나고 봄에 돌아온 남편은 임시로 거처할 방 한 칸을 얻어 또다시 식구들을 그곳에 방치한다. 어느 밤, 주인집 남자한테 겁탈을 당할 뻔한 선천댁은 급기야 분노가 폭발하여 땅을 치며 통곡한다. 그리 오열하다보니 문득 이 분노의 결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처음 자기를 욕보이려고 한 그 남자에 대한 분노였다가, “내가 얼마나 천하게 보였으면 외간남자가 그런 짓을 해볼 생각을 했겠는가” 싶은 자기학대로 변하더니, 이윽고 자기를 이렇게 멸시받아도 좋은 존재로 깎아내린 남편에 대한 분노로 옮겨간 것이다. 선천댁은 결혼 후 처음으로 남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하지만 말이 좋아 고향이지, 반겨줄 사람도 하나 없는 처지다. 선천댁은 결국 ‘동리 의사’가 되어 안정되게 살 집을 마련해놓았다며 발목을 잡는 남편의 꼬임에 빠져 그냥 눌러 앉고 만다. 그렇게 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녀의 간도 생활은, 뭐랄까, ‘여성’으로서의 선천댁을 십자가에 매달아 그 몸에서 땀과 피와 눈물이 다 빠질 때까지 고문하다가 마침내 땅 속에 묻어버린 ‘죽임’의 세월에 비유할 수 있겠다.
풍류를 좋아하는 낭만파 한학자요 한의사인 남편은 환자를 본다는 명분으로 출장을 갔다가 여러 날 후에 여자 하나를 ‘달고’ 돌아왔다. 첫눈에 화류계 출신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그런데 선천댁은 병색이 완연한 그 여자를 보고도 “인간으로서 측은한 생각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생각만 그리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선천댁은 병든 그녀를 아무 말 없이 돌보아 주었다. 밤마다 부부 침실까지 ‘양도’해가면서 말이다. 훗날 장성한 아들이 그 일을 회상하며 어찌 그럴 수 있냐고 대들자, 선천댁은 이렇게 대꾸한다. “인생이 하두 불쌍해서……. 이 오지로 온 것은 오직 너희들 아버지 하나만 믿고 온 게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혼자 자라고 할 수 있어야지!”
영락없는 바보다, 천치다, 머저리다. ‘남의’ 여편네가 ‘나의’ 남편을 홀리기라도 할까봐 두 눈 시뻘겋게 뜨고서 호시탐탐 감시하는 것도 모자라, 어떻게든 ‘나의’ 남편을 ‘남의’ 여편네한테 빼앗기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방어전에 몰두하는 ‘똑똑한’ 여자들 눈에, 그야말로 남편을 ‘보시’(布施)하는 선천댁의 행위는 ‘어리석음’의 극치가 아닌가. 이리 ‘나’와 ‘남’의 구분을 못해서야 숙맥(菽麥)이 따로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도대체 누가 진짜 똑똑하고 누가 정말 어리석은지 헷갈린다. 항시 공자ㆍ맹자를 입에 달고 살면서 대단한 인텔리인 양 위세 부리는 남편이 그동안 불학무식하다며 대놓고 천대해온 선천댁에게 도리어 목숨을 빚지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기이한 사연의 내막인즉 이렇다. 하루는 동리의 한 젊은 아낙이 작심하고 밤마실을 와서는 어영부영 선천댁의 남편과 정을 통하고 새벽 미명에 돌아가다가, 그만 도끼눈을 뜨고 기다리던 제 남편한테 딱 걸리고 말았다. 어디 갔다 이제 오냐는 불호령에, 선천댁네 갔었노라고 이실직고를 했더니만, 그 남편이 당장에 낫을 꺼내 들고 선천댁네 집으로 쳐들어왔더란다. 이에 선천댁은 시치미를 뚝 떼고서, 간밤에 남편이 급한 환자가 있어 왕진을 갔기에 새댁더러 자고 가라 부탁했노라고 둘러대어 여러 사람의 목숨을 살린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안병무는 선천댁의 남편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도대체 이 여자가 누군가. 남자만이 득도할 수 있고 여자는 할 수 없으리라는 그의 주장은 무너졌다. 계속 책을 읽으며 덕을 쌓아야만 높은 경지에 도달한다는 그의 주장도 무너졌다. 도대체 무식한 것이라는 개념 속에 포함시킨 온갖 판정이 다 깨졌다. 이 여자는 분명히 나를 능가하고 있다.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기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마치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와 연이어 4장에 나오는 익명의 사마리아 여인을 보는 듯하다. 당대의 지식인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는, 대화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훈시에 가까운데, 창녀라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주거니 받거니 소통에 전혀 장애가 없다. 오죽 답답했으면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요한복음 3:10)고 핀잔을 주었을까.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깨닫는’ 지혜인 것이다. 노자에 의하면 이는 “물들이지 않은 명주(素)의 순박함을 드러내고, 다듬지 않은 통나무(樸)의 질박함을 품는 것, ‘나’ 중심의 생각을 적게 하고, 욕심을 줄이는 것”(도덕경 제19장)에서 터득된다고 한다. 선천댁에게서 볼 수 있는 지혜가 바로 그렇게 순박하고 질박한 ‘도통’(道通)의 경지에 가 닿지 않았을까.  
김지하는 ‘흰 그늘’의 ‘흰’이 곧 ‘신’(神)이라 했다. 그늘로부터 태어나는, 그늘 배후에 있는 어떤 소망스러운 내적 삶의 생성, 이른바 자기초월적인 차원변화, 그 신령하고 무궁한 내면에 숨겨진 환한 빛, 그게 신이다. 천생 부엌데기요 소박데기이며 바리데기인 선천댁은 자기 인생에 닥친 한(恨)의 그림자에 집어 삼켜지지 않았다. 일제 식민지 경험과 이로 인해 고향 떠나 간도에서 보낸 디아스포라 경험도, 6ㆍ25 전쟁과 분단과 군사독재와, 이 모든 역사적 현실에 부수(附隨)한 가부장제도 그녀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대부분의 시어머니가 그러하듯이 며느리들에게 가부장적 가족질서에 순응하도록 강요하는 짓은 더더구나 하지 않았다. 이로써 그녀는 ‘딸을 낳으면 엎어버리겠다’는 말에 은폐된 종말론적 희망, 곧 후천개벽의 꿈을 나름대로 성취한 것이다. 안병무의 ‘바깥사람’ 박영숙을 며느리로 맞아들였으니 말이다.

4. 선천댁과 민중 구원론, 그리고 연민의 윤리

안병무의 민중관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민중의 ‘자기초월’이다. 솔직히 일상에서 경험하는 민중의 리얼리티는 종종 구원자이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아등바등 거리고, 제 욕심과 욕구에만 충실하여 남의 힘듦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비루함 내지 치졸함이 대부분이다. 안병무도 그 부분을 충분히 의식했던 것 같다. 그는 복음서 역시 갈릴래아의 민중을 미화한 일이 없다고 밝힌다. 돈으로 오염된 민중의 행태를 구태여 변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염이 되었어도 예루살렘파에 의한 것”이라며 여전히 민중을 변호한다. 더 나아가 “예루살렘의 민중이 예수를 처형하라는 시위를 했다는 이유로 반민중론을 펼 필요는 없다”고 못을 박는다.
이처럼 철저한 민중관이기에 안병무는 아버지의 첩에 대해서도 “무조건 증오하거나 비판의 대상으로만 삼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녀에게도 나름의 고통이 있었다. 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그 남자는 그녀를 ‘성욕의 대상’으로만 여길 뿐, 본처의 권력과 권위는 제 것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첩이란 “얼굴 없는 여자인 셈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키고 과시하려면 억지로라도 남자를 ‘독점’하는 길밖에 다른 선택지가 별로 없는 것이다. 이러니 “사람이 나쁘기 전에 자리가 나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해주려고 해도, 열세 살 어린 안병무에게 그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아울러 그를 힘들게 한 사람(들) 때문에 그의 삶이 굴절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람이 받는 직접적인 상처의 발원지는 결국 사람이지, 제도가 아닌 까닭이다. 그리하여 안병무의 ‘자전적 글’인 『선천댁』에는 민중에 대한 애증(愛憎)이 주요 얼개를 구성한다. 이른바 ‘하위주체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사람다운 삶을 살아내지 못한 채 그냥 스러지고만 하릴없는 민중에 대한 안타까움, 미움, 배반감, 그런 감정의 찌끼가 여기저기 배어 있다.
이래서 민중에 대한 이해가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아무나 무턱대고 민중이 될 수는 없다. 민중이라는 용어는 어떤 사람이 단지 현존체제의 밑바닥에 처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안에 포섭될 수 있는 만능 보자기가 아니다. 이 지점에서 신영복의 고백적 정의가 도움이 된다고 본다.

저는 십수 년의 징역살이, 그 1인칭의 상황을 살아오면서 민중이란 결코 어디엔가 기성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이 ‘창조’되는 것이라 생각해오고 있습니다. 응달의 불우한 사람들이 곧 민중의 표상이 아님은 물론 민중을 만날 수 있는 최소한의 가교(假橋)도 되어주지 않습니다. 민중을 불우한 존재로 선험(先驗)하려는 데에 바로 감상주의의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민중은 당대의 기본적인 모순을 계기로 하여 창조되는 ‘응집되고 증폭된 사회적 역량’입니다. 이러한 역량은 단일한 계기에 의하여 단번에 나타나는 가벼운 걸음걸이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장구한 역사 속에 점철된 수많은 성공과 실패, 그 환희와 비탄의 기억들이 민족사의 기저(基底)에 거대한 잠재력으로 묻혀 있다가 역사의 격변기에 그 당당한 모습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중을 이렇게 신성시하는 것도 실은 다른 형태의 감상주의입니다. 어떠한 시냇물을 따라서도 우리가 바다로 나갈 수 있듯이 아무리 작고 외로운 골목의 삶이라 하더라도 그곳에는 민중의 뿌리가 뻗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민중 특유의 민중성입니다.

이러한 민중은 함석헌의 ‘씨’이나 김지하의 ‘산알’과 통하는 개념이다. 씨은 본래 함석헌이 유영모에게서 배운 말로, 함석헌은 하느님이 땅에 내려와 발에 흙이 묻은 것이 씨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하느님은 씨로서 민중 안에 현존하신다. 그런가 하면, 김지하의 산알은 본래 1960년대 북한에서 처형된 생물학자 김봉한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살아있는 생명의 알갱이, 곧 ‘생명령’(生命靈)이다.
그렇다면 다시 선천댁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녀를 ‘씨민중’ 혹은 ‘산알민중’의 원형질로 본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그녀로 하여금 그런 민중이 되도록 추동한 당대의 모순은 무엇이었나. 선천댁은 지배자인 남편에게 예속된 식민지로서, 이를테면 제국주의와 가부장제의 공통된 속성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체험했다. 알량한 힘으로 약자를 내리누르는 사악함 말이다. 그것을 수동적으로 견디기만 했다면, 선천댁은 민중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밭을 일구고 소를 키우고 돼지를 치면서 나름의 경제력을 확보하여 독립의 힘을 키웠다. 아들의 학업을 위해 대처에 마련한 집은 어디까지나 선천댁 본인의 ‘소유’였다. 지금에야 사소해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 풍습으로서는 굉장한 도전이요, 저항이었다.
물론 선천댁이 서른여덟의 나이에 ‘사람답게’ 살겠다는 결단을 하고, 남편과 첩에게 일정 재산을 나누어주어 분가시킨 뒤로, 자기는 온데간데없이 오로지 ‘남을 위한 삶’을 산 부분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그녀가 이를테면 ‘이혼’과 같은 방식으로 남편과의 관계를 ‘단’(斷)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심리상담적인 혹은 정신분석적인 설명이 동원되어야 할 테지만, 넘겨짚건대 당시 많은 비문자 계층의 여성들이 그러했듯이 이혼은 단순히 그녀의 머리에 입력된 선택지가 아니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그녀가 남편의 여자들을 선대(善待)한 것은 남성 중심적인 가족제도 안에서 어떻게든 자기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을 확률도 배제하기 어렵다. 아니면 시어머니 역시 동일한 처세를 보였으므로, 그러한 태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병무의 관찰에 의하면, 선천댁의 주위로는 항상 ‘가난의 슬픔’을 아는 여자들, ‘불행한 결혼’의 고민을 안은 여자들, 그래서 누군가의 ‘품’이 그리운 여자들이 몰려들어 안식을 취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들이 보기에 선천댁은 비록 ‘자기’의 삶이란 것은 없고 그저 자식을 위한 삶밖에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고는 하나, 적어도 ‘가족이기주의’에 매몰되지 않은 게 분명해 보인다. 모성이 빠지기 쉬운 유혹, 곧 제 새끼 이외의 일은 일체 상관하지 않는 무관심과 몰인정의 관성에 젖지 않았다. 없는 살림에 독립군을 돕는다든지, 동리의 부락제를 챙긴다든지 하는 모습들은 그녀의 존재 방식이 기본적으로 ‘생명 연대’에 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훗날 연탄가스 중독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늙은 남편이 첩에게 귀찮은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선천댁에게 쫓겨 왔을 적에도 두말없이 그를 거둔 것은 그런 맥락일 것이다. 이러한 선천댁의 속없는 모습에 항의하는 아들들을 향해, 그녀는 그저 “인간이 불쌍해서”라는 한 마디 대답만 했다고 한다.
안병무는 거기에서, 그렇게 바보처럼 당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살림의 지혜’로 매순간 연약한 생명과 연대하고 보살피는 그 ‘연민의 윤리’에서 민중 구원론의 단초를 찾은 듯하다. 하기야 톨스토이도 그렇고, 루쉰(魯迅)도 그렇고, 이 천하의 내로라하는 이야기꾼들도 자기네 나라를 대표하는 허다한 똑똑이들은 제쳐두고 ‘바보 이반’과 ‘바보 아큐’(阿Q)에 매혹되지 않았던가. 장자에 나오는 추남(醜男) ‘애태타’(哀駘它)는 또 어떤가. 이름부터가 ‘슬플 정도로 등이 낙타처럼 구부러진 무식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와 한번이라도 옷깃이 스친 사람마다 이상하게 헤어지기를 싫어한다. 그 까닭을 경허(鏡虛) 선사의 가르침에서 짐작할 수 있겠다.

공부하는 사람이 마음 움직이지 않기를 산과 같이 하고, 마음을 넓게 쓰기를 허공과 같이 하고, 불법(佛法) 생각하기를 날과 달같이 하여, 남이 나를 옳다고 하든지 그르다고 하든지 마음에 두지 말고, 다른 사람의 잘하고 잘못하는 것을 내 마음으로 분별하여 참견하지 말고, 좋은 일을 당하든지 좋지 못한 일을 당하든지 마음을 평안히 하며 무심히 가져서, 남 봄에 숙맥같이 지내고 병신같이 지내고 벙어리같이 소경같이 귀머거리같이 어린아이같이 지내면 마음에 절로 망상이 없어지느니라.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3:18) 그 자신, 랍비 유대교에서 권력과 명예와 부를 한손에 거머쥘 수 있는 ‘스펙’(spec)을 지녔으면서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갖게 된 뒤부터 이 모든 혜택과 기득권을 “배설물”(빌립보서 3:8)로 여기게 되었다는 바울 사도의 권면이 경허선사의 말에 공명한다. 그가 알기로, 예수 역시 바보, 아니 바보의 원형질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빌립보서 2:6-8) 예수의 본질이 ‘자기 비움’, ‘스스로를 낮춤’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천댁이 바로 그러한 예수를 몸소 살아내고 있는 셈 아닌가.
『선천댁』에서 만개(滿開)한 안병무의 민중신학은 노자의 ‘곡신’(谷神) 사상과 통하는 바가 많다. 노자에 따르면, 도는 높이 솟은 봉우리보다는, 봉우리가 높을수록 상대적으로 더 낮고 깊어 보이는 골짜기에 가깝다. 골짜기는 봉우리에 비하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없어보임’으로 봉우리를 더욱 있어보이게 하니, 이러한 존재양태를 일컬어 ‘케노시스’(kenosis), 곧 ‘비움’(空)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비움의 기독론을 잘 보여주는 게 ‘나는 물이다’(요한복음 4:14, 7:37-38 참고)하신 예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을 또한 잘 풀이한 게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다.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것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하여 흐를 뿐입니다.
그러기에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 『도덕경』, 제8장.

물은 제 모양을 고집하지 않는다. 어떤 모양새의 그릇에 담기든지 유순히 따를 뿐, 분별심을 내거나 아상(我相)에 집착해서 겨루지 않는다. 선천댁의 존재론은 그러한 물을 닮았다. 자기는 한없이 낮은 데로 임하지만, 그럼으로써 주변의 뭇 생명을 보듬어 키우고 치유하며 회복시키는 생명력이 그 안에 있다. 무가(巫歌)에 나오는 바리데기가 버림받음의 고통과 생명수를 찾기 위한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마침내 세상을 구원할 생명수를 찾아왔듯이, 그리하여 죽은 영혼들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오구신으로 등극했듯이, 이 땅의 선천댁(들) 또한 매일 밥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상의 ‘살림’을 통해, 그리고 ‘인생이 불쌍해서’ 흘리는 측은지심의 ‘눈물’을 통해 날마다 생명수를 흘려보낸다. 제 배에서 그러한 생명수를 흘려보내는 씨민중이라야, 위대한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엑카르트(Meister Eckhart)의 표현대로 하면, “하느님-아기를 낳는 자”가 되는 것이다.      

5. 꼬리말

엑카르트는 하느님의 본질이 “낳음”이라고 말한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이루셨고, 끊임없이 이루고 계신 ‘영원한 탄생’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도록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일어나야 하는 낳음이 ‘자기 자신의 출산’이라고 한다. 익숙한 용어로 ‘새로 남’ 또는 ‘거듭남’에 해당할 이 낳음의 사건을 엑카르트는 “돌파”(Durchbruch)라 불렀다. 돌파는 “나와 하느님이 하나임을” 알아채는 자각의 경험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온 첫 번째 탄생과 다른 차원의 탄생, 곧 이 세상을 벗어나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는 탄생이 이루어진다. 이것은 엑카르트 영성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처녀 됨’, 곧 이 세상의 헛된 욕망을 다 여의고, 마치 자기는 없는 듯이 모든 집착에서 자유로워져서 오로지 하느님의 가장 값진 바람만 줄기차게 이루어 드리는 사람이 된다.  
안병무의 민중신학의 백미는 예수를 ‘단독자’가 아니라 항상 민중과 ‘더불어’의 존재로 파악한 점이다. 예수 이야기와 민중 이야기가 ‘따로 국밥’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은 함께 뒤엉켜 ‘우리’의 이야기를 이룬다. 그러므로 복음서는 예수의 개인 전기가 아니라, 말하자면 “사회 전기”요 “예수의 민중운동사”라는 게 안병무의 주장이다. 이러한 예수와 민중 사이의 주객도식의 거부가 안병무 신학을 “서구신학에 대한 반명제”로 특징짓게 한 핵심 요소인 바, 안병무는 이를 다음의 명제 속에 함축적으로 담아 표현하였다. “태초에 케리그마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물론 예수 사건이다.”
이러한 민중신학의 대의는 너무나 편리하게도 ‘예수=민중, 민중=예수’ 식의 단순도식으로 환원되어, 신학적 사유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기독 대중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빌미가 된 것도 사실이다. 최근 어느 글에서 김기석은 민중신학의 담론이 신학계의 주류 담론이 되지 못한 까닭, 다시 말해 오늘날 “민중신학의 불꽃이 사위게 된 것은 정치적 억압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부풀려진 욕망을 내파할 힘을 축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바르게 분석하고 있다.
그러면 어찌 해야 하는가. 엑카르트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그는 “사람은 사랑에 의해 자기가 사랑하는 그 대상이 된다”고 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교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이 된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요? 이것은 이단사설처럼 들립니다. ……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엑카르트는 한 방울의 물을 바다에 떨어뜨리면, 금방 바닷물로 변하고 말지만, 바다가 물방울로 변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우리의 영혼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시면, 영혼은 신이 되지만, 하느님이 영혼이 되시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그는 성육신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여러분을 독생자로 낳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민중신학이 그것이 배태된 역사적 현실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취한 전략과 노선이 그 보폭을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면 지나친 폄훼일까. 나는 민중신학이 전 지구적으로 민중의 삶을 손상시키고 불구화하고 파괴하는 맘몬 우상의 술책에 맞서 대응하려면, 신비주의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안병무가 1990년대 이후 여성, 생명, 자연 등의 용어 및 가치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민중신학의 지평을 넓히고자 한 까닭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삶에서 신비가 빠지면, 삶은 이내 남루한 현실 그 자체가 되고 만다. 신비는 역사를 돌파하는 힘이며, 일상에 초월을 덧입히는 통로이다.
그런 점에서 선천댁으로 체현된 민중 역시 신비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다. 아들의 ‘증언’ 에 담긴 선천댁은 우주만큼 크고 넓은 실상의 일부일 것이다. 어쩌면 아들은 선천댁의 ‘바다’에 비하면, 한 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글의 배후에, 이면에, 바탕에 숨어서 제 목소리를 끝내 발화하지 않는 선천댁-민중이 그리운 까닭이다.
그런데 노파심에서 이것 한 가지를 꼭 짚고 넘어갔으면 좋겠다. 안병무는 선천댁에게 전성기가 있었다면, 선천댁 스스로 경제력을 지니고 자주적으로 삶을 꾸렸던 때라고 회고한다. 이러한 자기성취의 기억은, 하위주체의 주체화에 상당히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기득권자의 회개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이다. 하위주체 홀로 일어서라고 하는 건 현실적으로 폭력이 되기 십상이다. 눈 멀고 귀 멀고 입 없는 ‘타자’가 자신의 닫힌/갇힌 상태를 깨치고 일어나 당당한 주체로 설 수 있도록 손 잡아줄 상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무릇 사건이란 홀로 일으키는 게 아니라 항시 ‘더불어’ 일어나는 법이라면, 민중이 눈을 뜨고 귀가 열려서 스스로 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책임이 기득권자에게 부여된 윤리적 명령이라는 말이다. 타자에 대하여 자아의 자리에, 객체에 대하여 주체의 자리에 있는 이들의 나눔과 섬김이 없이는 민중의 깨어남/해방이란 요원한 숙제가 될 것이다.
끝으로, 민중 구원론과 관련지어, 민중이 처한 독특한 공간에 대한 이야기 하나를 보태본다. 앞서 민중은 아무나 그가 처한 ‘상황’ 때문에 저절로 민중이 되는 게 아니고, 그것을 무어라 이름 붙이든, 나름대로 ‘자기초월’을 이루어야 민중이라고 했다. 엑카르트 식으로 말하면, ‘돌파’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민중의 자리는 ‘문지방’(threshold/ liminality)이라 할 것이다. 안도 아니며 밖도 아닌, 안이면서 동시에 밖인 이상한 자리, 이름하여 ‘낀 자리’, 곧 ‘사이-공간’(in-betweeness)이 바로 문지방이다.
성서적 지평에서 보면, 사이-공간은 세상 제국과 하느님의 제국이 서로 접촉하는 경계면에서 발생한다. 예컨대, 세상 제국의 불의를 깨닫고 그것을 넘어서려고 하는 자에게 침투해들어오는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민중은 하느님의 제국을 기다리는 그 설렘으로 세상 제국을 초극할 온갖 꿈들을 설계한다. 설령 그것이 ‘잠꼬대’처럼 들릴지라도, 하느님의 제국에 관한, 후천개벽의 세상에 대한 ‘유언비어’를 확대재생산해 나간다. 폭력과 지배, 소유와 정복을 씨줄과 날줄로 하여 세워진 세상 제국 너머에 ‘자비와 연대의 영성’, “그가 없이는 나도 없다는 생각에서 만물을 사랑의 띠로 둥글게 껴안은 원의 영성”을 구현해간다.
필경 선천댁에게도 그런 사이-공간이 있었을 것이다. 본인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그 안에서 신명나게 ‘예수 사건’을 일으켜가는 그런 공간 말이다. 여성신학의 과제가 바로 그러한 선천댁을, 선천댁이 창조한 사이-공간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일이 아닐까. 서구 여성신학을 수입, 소개하는 것으로는 절대로 우리의 목마름이 해갈될 리 없다. 우리 역사의 맥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이어져온(綿綿若存) 익명의 살림꾼, 해산의 고통인 양 제 배에서 생명수를  낳은 민중여성의 이야기를 빼놓으면, 한국 여성신학은 울리는 꽹과리처럼 될 것이다.
이리하여 안병무의 선천댁은 민중신학과 여성신학, 양편의 경계면을 부드럽게 녹여 하나의 사이-공간으로 초대하는 말 걸기를 시도한 셈이다. 앞으로 민중신학의 여성화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인가. 여성신학의 민중화는 또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자기변혁과 자기초월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의 영성으로 사이-공간을 활보하는 ‘혼종적 존재’(hybrid)들이 자꾸 태어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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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소개)2


                                                         “강물아 흘러 바다로 가거라”
                                                - ‘전능하신(?) 인간’과 ‘끙끙 앓는 하나님’


                                                                                             장윤재 (이화여대 교수 / 조직신학)


초록

이 글은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하에 지금 이 나라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4대강 토건공사’를 신학적으로 성찰한 글이다. 필자는 먼저 ‘물’의 종교적 의미와 ‘강’의 수문학적 역할을 살펴보고, 생명의 강이란 항상 일정한 ‘유량(流量)’이 확보된 강이 아니라 강물의 자연스런 높낮이, 즉 ‘유황(流況)’이 복원된 강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의 거대한 생명 체계인 하천 내부에서 강물의 섬세한 높낮이를 통해 복잡한 생명의 과정을 손수 지휘하는 하나님을 ‘부지런하고 알뜰한 생명의 하나님’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서 자연의 지배로 군림하면서 지구 생태계에 암적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에 의해 이 생명의 하나님이 고통 받고 있음을 증언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21세기 기독교 신학이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는 ‘전능하신’ 인간의 문제, 즉 자연을 창조한 것도 아니고 또 자연을 완벽히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손에 넣은 현대 인간의 지배권 문제라고 제안한다. 필자는 강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강에 ‘지속가능한 경계선’을 정하자는 생태학자들의 제안을 성서의 선악과 이야기에 비유하면서,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성서의 생명의 강 환상을 소개한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이러한 생명의 강의 발원지가 될 수 있기를 촉구한다.

주제어
물, 강, 4대강 사업, 생명의 하나님, 인간


1. 들어가는 말

  오늘의 한국을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강(江)의 문제를 빗겨갈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이 땅 이곳저곳에서 ‘4대강 살리기 사업’라는 이름으로 무섭게 밀어붙여지고 있는 ‘4대강 토건공사’는 지금의 우리 자신은 물론 앞으로 오고 있는 후속세대와 또 이 땅 금수강산에 너무도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2009년 11월에 시작되어 2011년 4월까지 총 17개월 동안 무려 5억 세제곱미터 가량의 준설이 이루어졌으며, 이 공사의 핵심인 보(洑) 공사는 약 80%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통제 불능의 속도로 진행된 이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로 지금까지 공사장에서 그리고 이 사업과 연관되어 모두 30명의 국민이 목숨을 잃었고, 16개의 보 건설과 준설로 4대강 본류의 수질은 악화되었으며, 침수지역은 지천까지 넓어졌고, 생물종은 절반으로 줄었으며, 4대강 사업이 올려놓은 땅값 이익은 대부분 지역주민이 아닌 외지인에게 돌아갔다. 이렇게 본래 사업의 목적과 실제 결과가 너무나 다르고,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도 큰 상황에서, 광기 어린 공사는 계속 진행된다. 이 나라의 한 국민으로 부끄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필자가 정작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 땅을 사는 신학자들이 이 4대강의 문제에 대해 아직까지도 이렇다 할 신학적 성찰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신학자는 자신이 속한 당대의 가장 고통스런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암흑기를 살았던 바르트가 그랬고, 히틀러의 파시즘에 맞서 온 몸을 던진 본회퍼 역시 그러했다. 신학이 활자에 갇힌 도그마가 아니라면, 또한 신학이 동어 반복적인 자기 순환의 논리에 빠져 있거나 예쁜 미학적 완결성을 추구하는 독백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 시대 어떤 문제를 응시하며 그 고통에 정면으로 맞서왔던가.
  지금까지의 기독교 신학이 철학을 비롯한 다른 많은 학문과의 대화 속에서 발전해왔듯이, 앞으로는 ‘수문학(水文學, hydrology),’ 즉 ‘물의 생성, 분포, 순환, 생물계와의 상호작용 등지구상 물과 관련된 학문’과의 대화도 필수적인 시대가 된 것 같다. 필자는 이 글에서 먼저 ‘물’의 종교적 의미와 ‘강’의 수문학적 역할에 대해 살펴보고, 이와 관련하여 만물의 폭군으로 등장한 인간과 그 인간에 의해 고통 받고 있는 하나님을 성찰할 것이며, 끝으로 성서가 말하는 아름다운  ‘생명의 강’의 환상을 나누어볼 것이다. 이를 통해 이 땅의 교회가 창조세계의 청지기로서의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무려 30조원 이상이라는 천문학적 돈이 투여돼 속전속결로 진행된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로 인해, 허리가 잘리고 살점이 뜯기고 얼굴이 상한 아름다운 우리의 강, 동료 피조물 앞에 한 곡 진혼곡이라도 올리고 싶다.

2. 물[水]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잔잔한 시냇물 그 소리 가운데 주 음성 들리니 주 하나님의 큰 뜻을 내 알 듯 하도다.

  우리 귀에 익숙한 (구)찬송가 78장의 3절 가사다. 잔잔한 시냇물 소리 가운데서 주의 음성을 들었던 작사자(M.D. Babcock)는 과연 어떤 영혼의 소유자였을까? 과연 우리도 그처럼 세미한 자연의 소리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
  이른바 인류의 4대 고대 문명이 모두 큰 강을 끼고 일어났듯이, 물은 문화를 형성하는 모체이며 생명의 기본이다. 물은 인류에게 언제나 영적으로 중요한 존재였고, 강은 늘 청렴과 부활, 그리고 영원과 치유의 상징으로서 인간의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해주었다.
  물은 우리 영혼의 거울이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과 대낮에 대지에서 바람에 춤추는 들풀과 꽃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증언하듯이, 물도 “눈에 보이는 말씀”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종교개혁자 칼뱅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완전함 앞에서 자연을 하나님을 비춰 주는 “거울”로까지 표현했었다. “호수를 들여다보는 이는 그 안에서 자기 본성의 깊이를 가늠한다”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 Thoreau)가 말했듯이, 물은 그 투명성으로 인해 푸른 하늘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주고, 인간의 얼굴과 영혼을  비추어준다. 히브리어로 기도는 ‘히트파레르’인데, 그 뜻은 본래 ‘맑은 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보다’이다. 그러니까 기도란, 절대자라는 맑은 거울 앞에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보는 행위인 것이다. 본래 기도는 이렇게 듣는 것이고, 침묵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도록 기다리는 것이다. 아마도 고대 히브리인들은 물을 통해 기도가 무엇인지 배웠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로우의 말처럼, “순수(純粹)의 물길이 열릴 때 인간은 즉시 하나님에게로 이른다.” 물은 우리 영혼의 거울이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런데 물은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물은 ‘너’가 아니라 ‘나’다. 인간 신생아의 4분의 3이 물이다. 비록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인간의 몸은 점점 고체화되지만 (성인 남자의 몸은 55%가 물, 성인 여자의 몸은 50%가 물이다), 지금도 우리 몸의 신장은 81%, 심장은 79%, 뇌는 76%, 그리고 피부는 70%가 물로 이루어져있다. 물은 이렇게 우리 몸의 가장 중요한 구성 성분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우리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생화학적 소통의 매개체이며 그 장이다. 이렇게 우리는 물이고, 물이 우리다. 물이 없으면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기제는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보통 물은 모든 것을 품기만 하는 수동적 존재처럼 그려져 왔다. 예를 들어 노자는, “아름다움의 으뜸은 물과 같으니 물은 모든 것을 돕되 다투지 아니하며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고 했다. 하지만 물은 사실 창조적 파괴를 단행하는 적극적인 행위자이기도 하다. 에릭 오르세나(Erik Orsenna)가『물의 미래』라는 책에서 설명하듯이, 물은 ‘파괴 본능’에 시달리기도 하고, ‘창조적 야심’에 불타기도 하며, 우리를 중력에서 해방시켜 밀어올리기도 하는, 매우 적극적인 행위자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지구는 다름 아닌 ‘물의 행성’이다. 사실 지구의 표면은 육지보다 바다가 더 넓으니 우리는 이 행성을 ‘지구(地球)’가 아니라 ‘수구(水球)’라고 해야 더 맞을지도 모른다. 세계적인 역사학자 맥닐(J.R. McNeill)에 의하면, 지구상 ‘수권(水圈, hydrosphere)’의 97% 이상은 바다에 속하는 짠 물이며, 태양은 바다로부터 매년 50만 세제곱킬로리터의 막대한 물을 증발시켰다가 비와 눈의 형태로 지표에 되돌려준다. 바로 이런 강수(降水)가 전 세계 모든 민물[淡水, fresh water]의 근원인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 현상은 바로 이러한 물의 순환 때문에 일어난다. 전도서 기자도 이를 알고 있었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도,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 강물은 나온 곳으로 되돌아가, 거기에서 다시 흘러내린다. (전도서 1:7, 표준새번역)

  물은 흐른다. 그 흐름이 생명을 불러일으킨다. 물은 순환한다. 그 순환이 낱 생명을 불러일으키고 온 생명을 엮는다. 그러므로 순환이 막히면 생명이라는 하나의 실은 끊어진다.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물을 매개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물은 순환 과정을 통해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과 땅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다. 참으로 “흐르는 물이 생명을 낳고, 그 잉태가 우리의 근원을 이룬다.”

3. 강(江)

  그런데 바다와 대기 그리고 육지 사이의 수문순환(水文循環)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이가 바로 강이다. 강은 지하 대수층과 더불어 강수를 모으고 그것을 바다로 옮겨준다. 다시 바다는 대기를 통해서 수증기를 육지로 되돌려 준다. 강을 중심으로 하는 이런 수문순환이 바로 지구상 모든 생물의 생명활동을 부양하는 가장 기본적인 활동인 것이다.
  하지만 강은 단순히 물이 지나가는 통로가 아니다. 강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비한 생명 활동을 수행하는 복잡한 생태시스템이다. 우리가 강이라고 할 때 그것은 단지 물이 흘러가는 수로(水路)만이 아니라 강바닥, 강둑, 그리고 범람원에 형성된 물웅덩이와 습지, 또한 강물이 운반하는 퇴적물, 하구 가까이에 형성되는 삼각주, 나아가 강물이 흘러들어가는 연안해나 내해에서 이루어지는 먹이사슬과 영양소의 순환까지 모두를 포괄하는 것이다. 강을 단지 수로, 즉 물길로 보는 것은 강에 대한 낮은 인식수준을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것이다. 강은 산에서 흘러온 물이 강바닥과 강 주변의 지형을 흐르면서 수많은 생명을 길러내는 거대한 생명시스템이다. 하지만 강을 그저 수로로만 보는 사람은 구불구불 흐르는 강을 직선으로 만들고 제방을 쌓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하지만, 김정욱 교수가 말하듯이, 강의 가장 중요한 본성은 “구불구불 흐르는 것”이다. 강은 뱀처럼 구불구불 흘러야 한다. 그래야 물살이 빠른 데와 느린 데가 나타나고, 침식되는 곳과 퇴적되는 곳이 생겨나며, 그에 따라 수심이 깊은 웅덩이와 얕은 여울이 만들어진다.
  최병성 목사는 바로 이렇게 만들어지는 여울이 강의 생명이며 나아가 강의 성소(聖所)라고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강의 생명은 수량에 있지 않고 여울과 소가 반복되면서 굽이굽이 흐르는 환경의 다양성에 있다. 강의 생명은 여울이다. 여울은 강에 산소를 공급하는 천연 정수기와 같다. 여울에는 산소가 많고 물이 맑기 때문에 희귀 물고기들은 모두 여울에 서식한다. 여울은 물고기들이 알을 낳는 곳이다. 천연기념물인 어름치는 여울이 시작되는 지점에 알을 낳고 돌로 산란탑을 쌓는다. 꺽지와 쉬리 그리고 돌고기 등도 여울 주변 잔잔한 자갈에 알을 낳는다. 팔뚝만한 누치와 쏘가리도 여울 근처 자갈과 모래밭에 알을 낳는다. 수심이 깊은 곳에 사는 잉어도 산란철이 되면 물이 얕은 곳으로 나와 수초에 알을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강을 직선화 ․ 획일화 ․ 균질화하면 여울과 낮은 수심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우리나라의 토종 어류들은 더 이상 강에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물을 맑게 회복시켜줄 뿐만 아니라 생명을 끊임없이 태어나게 하는 여울을 최병성 목사가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지속되게 하는 성소요, 오늘도 생명을 창조하고 보존하시는 하나님 창조 사역의 동역자”로 본 것은 참 아름다운 신학적 성찰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운하 전도사’를 자처한 어느 정치인은 직접 자전거를 타고 낙동강 하류에서부터 한강 여의도까지 물길 따라 장장 536km를 탐방하고 나서 강이 ‘죽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강 ‘죽은’ 이유가 “강마다 하상(河床)이 높아 비만 오면 홍수가 범람하고, 사계절마다 강물이 차이가 있어서” 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강바닥을 파내 강의 하상을 낮추고 계절이 변해도 수위의 차이가 없는 강을 만드는 것이 바로 강을 ‘살리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쓰레기더미가 가득한 강변을 정비해 그곳을 “역사, 문화, 생태가 어우러지는 인간의 강변”으로 만드는 것이 강을 ‘살리는’ 길이라고 단언했다. 참으로 무지(無知)가 화근이다. 그런데 무지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필자는 세계적인 물 정책 전문가 샌드라 포스텔(Sandra Postel)과 브라이언 릭터(Brian Richter)의 책『생명의 강(Rivers for Life)』을 읽고 필자 자신도 얼마나 강에 대해 무지했던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강에서 ‘유황(流況, flow regime)’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배울 수 있었다. 유황이란 ‘일 년 혹은 여러 해에 걸친 강물의 고수위와 저수위의 변동 패턴’을 가리킨다. 이 책의 저자들은 강을 살리기 위해서는 단순한 하천 ‘유량’의 복원이 아니라 하천의 자연적 ‘유황’의 복원이 가장 핵심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우리는 보통 강에는 늘 일정한 수심 이상의 물이 고정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좋은 강, 건강한 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포스텔과 릭터는 계절과 기후에 따라 높낮이가 바뀌는 강이 진정으로 좋은 강이고, 그것이 건강한 강이며 바로 생명의 강이라고 말한다.  그들에 의하면, 강에는 홍수기도 필요하고 극단적인 갈수기도 필요하다. 건강한 강이란, 홍수기에는 많은 물이 흐르고, 갈수기에는 모래톱과 얕은 물의 생물서식지가 드러나는 강이다. 강의 저수위 기간에는 유속이 느리고 조용하다. 때문에 각종 수생동물들은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다. 간혹 극단적인 저수위 기간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는 낙우송과 같은 특정한 수종의 번식에 필수적이다. 이런 수종들은 일생의 대부분을 뿌리와 밑동이 물에 잠긴 채 살아가는데, 극심한 가뭄이 들어 범람원 토양이 충분히 건조해질 때에만 비로소 씨앗을 퍼뜨린다. 그리고 강에는 고수위도 필요하다. 봄철 고수위는 하천의 생물들에게 생애주기의 새로운 단계를 시작하라고 알려주는 환경의 신호, 즉 자명종 소리와 같다. 강에는 심지어 홍수도 필요하다. 홍수기가 있어야 하천의 여러 생물들은 저수위 때 가지 못하던 다양한 서식지로 접근해 생명활동을 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홍수기는 강에서 가장 풍성한 생명의 잔치가 벌어지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강에는 저수위도 복원되어야 하고 고수위도 복원되어야 하며 심지어 홍수도 복원되어야 한다고 포스텔과 릭터는 강조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지금 세계 각지에서는 우리 인간이 만든 약 80만 개의 크고 작은 규모의 댐들이 하천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차단하고 있다. 인간 사회는 특히 지난 50년 간 하루 두 개 꼴로 대형 댐을 지구 위에 건설했고, 그 결과 이전까지 수많은 생물종들에게 풍성한 생명활동의 장을 제공하던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강들은 균일하고 획일적인 물의 배수로로 바뀌고 말았다. 이로 인해 유수(流水)에 의해 운반되던 세계적인 퇴적물 총량의 4분의 1 가량이 저수지에 갇혀 범람원과 삼각주 및 강어귀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고, 이로 인해 바다가 영양실조에 걸리고, 강에 쌓인 유기물은 강을 썩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량의 확보와 수질개선 노력만으로는 결코 전체 하천 시스템의 생태학적 온전성을 유지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하천 ‘유량’의 복원이 아니라 자연적인 하천 ‘유황’의 복원인 것이다. 그래야 강이 돈으로도 계산할 수 없는 엄청난 생태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강 수로와 호수 바닥, 그리고 습지와 범람원의 퇴적물 등에 서식하는 조류(藻類), 균류, 그리고 벌레들과 같은 각종 민물생물들은 엄청나게 중요한 생물학적 · 화학적 · 물리적 과정을 수행한다. 이들은 수질을 유지하고, 유기물을 분해하며, 오염물질을 흡수 혹은 이동시키고, 또한 먹이사슬의 상위에 존재하는 동물들의 먹을거리를 생산한다. 특히 담수 퇴적물 하단 깊숙이에 묻혀 사는 생물들은 대부분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을 만큼 아주 작고 또한 인상적인 풍채를 지니고 있지도 않지만 -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지만”(이사야 53:2) - 그들은 생명활동에 필수적인 생태계서비스를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하천 바닥에 사는 수많은 수서곤충과 미생물 역시 하천에 있는 유기물을 분해하여 늘 맑은 물이 흐르게 하는, 그래서 우리에게 맑은 물을 제공하는 ‘살아 있는 수질 정화기’와 같은 존재들이다. 이러한 생태계 서비스는 없어서는 안 되는, 그리고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필수적인 생명유지 시스템이다. 만약 우리가 댐을 비롯한 각종 수리시설로 강을 토막토막 끊어놓으면 이러한 생명시스템은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를 우리는 가까운 곳, 중국의 황허(黃河)에서 충분히 보고 있다.

4. 알뜰하신 하나님

  그런데 이렇게 하나의 거대한 생명 체계인 하천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하고도 역동적인 생명의 향연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하나님은 강물의 섬세한 높낮이를 통해 복잡한 생명의 과정을 손수 지휘하시는 부지런하고 알뜰한 생명의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 아무 쓸모없이 보이는 존재들과 그런 장소들을 통해서 아주 풍성한 생명의 향연을 열어주시는 알뜰하고 살뜰한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은 샐리 맥페이그(Sallie McFague)가 그의 저서『풍성한 생명(Life Abundant)』에서 ‘기초적인 필요의 하나님(God of the basics)’이라고 부른 바로 그 하나님이다. 맥페이그에 의하면, 이 하나님은 모든 것들 안에 깃들어 있는 생명의 숨으로서, 높은 하늘이나 세계의 변두리가 아니라 ‘마을의 중심’에, ‘삶의 복판’에, 그리고 ‘생명의 기쁨과 아픔 한가운데’ 있다. 이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 한마디로 존재하도록 불러낸 존재들이 계속 번영하는지 극진히 보살피는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은 존재들을 살리고, 건강을 지키고, 생명이 번성하게 하는 일에 언제나 마음을 쓰시는 하나님이다. ‘오이코스(oikos)’, 즉 지구라는 집안 살림 전체를 염려하면서, 이 땅의 생명 모두가 각자의 정당한 삶의 권리를 누리도록, 또한 지구라는 집이 미래의 거주자들을 위해 최적의 상태로 유지되도록 애쓰시는 하나님이다. 이처럼 모든 피조물의 번성과 또한 공정하고 지속가능한 지구의 살림에 관심을 쏟는 이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creator), 해방자(liberator), 그리고 양육자(sustainer)가 되신다. 이 하나님은 “항상 그리고 ‘귀찮을 정도로’ 세계 안에 현존하면서 기초적이고 일상적이며 육체적인 안녕에 관심을 쏟는... 분주한 가구주(householder)”인 것이다. 필자는 하나님에 대한 맥페이그의 이러한 은유에서 언제나 부지런하고 지혜로운 필자의 장모 모습이 겹쳐졌다. 그렇게 말려도, 그 분이 다녀가면 어지럽던 집안은 깨끗이 빛나고, 또 며칠간 먹을거리가 풍성해진다. 우리의 분주한 가구주 하나님은 필시 나의 장모님과 같이 부지런한 손을 가진 하나님일 것이다. 정호승 시인의 다음의 시에서 ‘어머니’를 ‘하나님’으로 바꾸어 읽으면, 강물의 섬세한 높낮이를 통해 부지런히 생명을 가꾸어 가시는 알뜰살뜰한 하나님의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 생각해보면 어머니의 손은 참으로 부지런한 손이다.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는 손이다. 아흔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손에 호미를 놓지 않으신 것처럼 어머니 또한 손에 일거리를 놓지 않으신다. 여든이 된 내 어머니의 손은 지금도 바느질을 하고 재봉틀을 돌리고 걸레를 빨고 밥을 짓는다...

  맥페이그에 의하면, 우리의 하나님은 항상 성육신하고 이 세계 안에 현존하는 분이다. 하나님은 항상 성육신하고 현존하시기에 우리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자연 안에서 뿐만 아니라 황폐화되고 파괴된 자연 안에서도 하나님을 뵐 수 있다. 전자에서는 창조세계의 번영을 통한 긍정으로, 후자에서는 창조세계를 침식시키는 모든 것에 저항하는 부정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계 안에 철저히 육화되어 있다. 그래서 세계와 우주는 ‘하나님의 몸’이다. 하나님의 몸으로서의 세계는 하나님의 성례전이고 성체이며 또한 성육신이다. 그래서 물리적 실재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과 육신, 무수히 많은 모든 존재와 사물과 과정이 모두 하나님 안에 있고 또 하나님으로 인해 있다. 그리고 마치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과 하나 됨을 느끼듯이, 또한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신의 작품 안에서 표현하듯이, 하나님의 영광은 진드기로부터 고래, 도토리나무에서부터 산에 이르기까지, 각 피조물 안에서 그리고 각 사람 안에서 빛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모든 존재들에게 경외심을 느끼고 그들의 존재를 감사하면서, 또한 그들을 돌봄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고 맥페이그는 강조한다. 즉,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피조물이 충만하게 생동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세계와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그렇다면 창조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은 생명이라는 선물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와 또한 그렇게 창조된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헌신’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분일뿐만 아니라 그 생명에 전적으로 헌신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모든 생명의 어머니이고 아버지가 되시는 그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는 전능한 분이다. 그래서인가? 우리가 강줄기를 가로막고, 강바닥을 파헤치고, 강변을 뜯어 고칠 때 자녀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하나님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 하나도 없는 강의 무수한 생명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5. ‘전능하신’ 인간

  하나님이 운행하시는 우주의 긴 생명의 역사 가운데 인간이 출현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20세기에 들어서서 자연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맥닐이 말하는 대로, 지난 20세기의 역사는, “인류가 자신의 편익을 위해 지구 민물의 자연적인 흐름과 리듬을 강제로 변경한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처칠, 레닌, 루즈벨트, 네루, 덩샤오핑 등과 같은 유명한 정치 지도자들은 하나 같이 인류의 가장 오랜 과학이라 할 수 있는




신학사상 2011년 가을호(154집) 차례
신학사상 2011년 봄호(152집)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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