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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선생님
 


  광야의 소리(2000-09-24 00:00:00, Hit : 9760, Vote : 1479
 신실한 목사는 어디에: 역사가 주는 교훈 한가지


 한국 교회의 목사들을 비난하는 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한국 기독교사 속에 전무하리만큼 목사들이 목사답게 살지를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목사들의 사회만 그토록 부패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익숙할 수 없을만큼, 아니 익숙해서는 아니 될만큼 썩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갑작스러운 오늘의 현상이 아니다. 단지 이 세대가 보아 오고, 들어 오고, 존경해온 목사상이 지금에 와서 벗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큰 나무들만을 쳐다보고 있던 교회와 사회, 그리고 역사가들은 목사라는 성직의 숲은 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처음부터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역설 같지만, 시대가 불의하니 그 부패를 잘 감출 줄 아는 재주있는 목사들은 존경을 받아 왔다. 진실보다는 허상을 찾는 사회이고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즐기는 세대이다.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대에도 적절한 교훈이 된다 (누가 11장 44절). 예수께서 나무라시던 회칠한 무덤 (마태 23장 27절)은 유대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화술에 매력은 느끼는 세월을 살아왔다. 썩어 가는 악취에 중독 되어 향기인냥 도취 되어 살아간다.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그기에 감추어진 불의도 비례한다고 서글퍼하던 사학자 옥톤 경이 생각난다. 이것은 윤리라는 것을 생각하는 지성인이 간혹 생기는 영국의 이야기이고 한국에는 언제쯤이면 이 사실을 발견하려는지. . . .  

 

 이제 기상종이 울리고 있다.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 모두들 불의한 잠에서 깨어나 세수할 시간이다. 잠에 취하여 쓰러져 있는 다수의 무리들이 깨어날 수 있을지. . . . 역사가 어떤 힌트를 준다면 극소수의 무리만이 일어날 것 같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개신교 개혁이 일어나겠지만. . . .



 오늘은 이름도 남기지 못할 뻔한 자그마한 제사장 이야기이다. 그는 이름을 남길 만한 위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누가복음 저자가 여기 저기 자료를 모집하지 않았던들 이름조차 못 들었을 사람이다.  누가 덕택에 이 신실한 제사장의 이름이 사가랴라는 것은 알게 된다. 특별한 사건이, 사회와 사가들이 관심을 모아야 할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기에 그의 이름이 밝혀진다. 누가는 그러한 뜻을 지니고 서두를 시작한다 (누가 1장 5절).



 사가랴의 부인 엘리사벳은 현모양처 스타일의 여인이지만 불행하게도 임신을 못하는 자였다. 물론 언뜻 보면, 이 부부가 아들을 달라고 간구하는 듯한 기록(누가 1장 13절)이 있다. 사가랴 자신도 원하지만 사랑하는 부인의 처지가 많이 측은하다. 부인은 시댁에도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할 말이 없던 자이다. 그저 외롭게 지내면서 묵묵히 남편이나 잘 돌보는 것으로 낙을 삼아 살았는데 이제는 벌써 중년이 지나 중늙은이로 넘어가는 나이를 접하고 있다. 이러한 집안 사정으로 보아 사가랴는 열심히 아들 하나를 간구하고 있었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일반 사람들이 교회에서 복 받으려고 기도하는 습관에서부터 오는 주관적인 오류이다. 아들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면 아브라함처럼 이제는 지쳐서 주시면 좋고 아니 주셔도 괜찮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최소한 누가는 그렇게 이해한다.

   

 사가랴가 일하는 장소는 후세 사가들에게 좋은 평을 받는 곳이 못된다. 그는 부패의 전당을 이룩한 예루살렘 성전에 소속된 수 많은 제사장들 중에 한 사람이다. 자신들의 불의를 모르는 대중들 (마태 7장 3절)은 사가랴를 향하여 숨겨 놓은 죄가 있는 제사장이라고 뒤에서 수군거린다. 그의 신실함 때문에 잠재의식 속에서 괴로움을 받던 부패한 제사장들은 뒤에서 손가락질까지 했을 것 같다. 그의 아들이 바른말 잘하기로 유명했으나, 기록이 없었던들 아들의 평판은 아버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역효과가 났을지도 모른다. 부패한 제사장이라고, 아들과는 반대인 아버지였을 거라고 사가들이 추측하면서 한마디 남겼을 것 갔다. 사가랴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진실하게 돌보는, 유능하지도 알려지지도 않은, 누구도 기억할 필요 없는 평범한 제사장이다. 사가랴는 저자인 누가가 이것을 염두에 두고 신경을 쓰지 않았더라면 많이 오해받고 도매금으로 부패한 제사장이라는 낙인이 찍힐 뻔한 사람이다.

 

 누가는 자식이 없는 사가랴 부부에게 어떤 숨겨 놓은 죄보다는 하나님의 다른 뜻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누가는 이 내외가 하나님 앞에 경건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부인도, 남편도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깨끗한 삶을 살아온 가정이다. 누가는 이러한 제사장 집안에 사무엘 같은 아들--떡 두꺼비 같은 아들이었는지는 알 수 없음--을 하나 주셨음을 기록한다. 그리고 사갸랴 같은 참 신앙의 가정에 요한을 보내 주심은 하나님께서 상이라도 내리는 것처럼 당연지사로 표현하다.

 

 누가가 기록한 사건들과 익숙해지면 사가랴는 아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부패한 유대교를 청결케 하기 위해 기도하는 자임을 알게 된다. 제사장 사가랴는 평상시에 동료 제사장들의 부패를 보면서도 어떤 일을 일으켜 개혁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니다. 함부로 말도 못하고 단지 하나님께 기도하던 사람이다. 그러던 중 제사장으로서 평생 한 번 할 수 있는 예식 집전 중에 천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유대 민족의 회복과 성전 개혁을 위한 기도를 요한이라는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누가 1:13절 - 20절). 모든 기도의 응답이 그러하듯이, 인간의 필요함 (아들)은 덤으로 주시고 기도의 본론인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인가의 필요] 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사가랴에게도 적용 됨을 볼 수 있다 (마태 6장 33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가랴는 이제 하나님께서 그 의를 이루시고 계심을 예견적으로 보게 된다(마태 5장 6장; 누가 1장 67절 - 79절).



 사가랴 세대에 성전과 제사장들의 부패상은 성경에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시므온이라는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할아버지가 성전에 출석하고 안나라는 과부 할머니가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고 있으니 정상적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누가 2장 25절 - 38절). 그러나 실제 상황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형 당하실 때와 별 다름없이 불의로 꽉 차있다.



 잠시 그 당시 부패상을 살펴보면, 한국 역사에 나오는 안동 김씨 세도정치 때와 비슷한 점이 많다. 사가랴가 제사장으로 안수 받은 때를 전후해서, 헤롯왕은 오해와 질투로 인하여 왕후 메리암을 사형시킨다. 날이 가면 갈수록 왕후를 그리는 간절한 마음은 달랠 길 없고 아픈 가슴을 해결하기 위하여 헤롯은 왕후와 같은 이름의 여인과 결혼한다. 새 왕후의 아버지는 사가랴의 동료로 별 특색 없는 제사장이지만 딸의 이름 하나를 잘 지어서 톡톡히 출세하게 된다. 헤롯은 왕후의 친가인 평범한 제사장 집안이 왕후의 체통에 맞지 않으므로 장인 어른을 대제사장에 임명한다.

 

  부원군 대제사장 시몬은 이십년 가까운 장기 집권 동안에 많은 업적을 남긴다. 그의 재임 기간에 시작한 예루살렘 성전 재건축은 팔십 이년만에 완공되지만 칠 년만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파괴되고 만다. ""헤롯의 성전을 보지 않고는 아름다운 건물을 보았다고 하지 말아라""라고 할만큼 당대의 최대 건물이다. 대제사장 시몬은 돈을 모아 집안도 일으킨다. 그의 형제 세 명과 아들이 대제사장에 임명된다. 그 후 그 집안의 전성기는 헤롯 왕가의 몰락과 안나스가의 대두로 기울기 시작한다. 그러나 성전의 성장과 대제사장들의 부패는 열을 다투어 점점 더 왕성해지기만 한다. 경제, 종교, 그리고 정치의 밀착은 상승하고 드디어 대제사장직은 독점권을 소유한 몇 가문의 비공개 경매로 결정된다. 돈으로 사기도 하고 더 높은 가격으로 유지할 수 있는 자리로 변한다. 종교와 부의 밀착시대가 이렇게 열리고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 집권자들 사이에 상부상조가 이루어진다. (참고: ""청결한 한국 교회를 위하여: 역사가 주는 교훈 한가지"").



  한가지 더 잠시 생각할 것은, 부원군 대제사장 시몬의 외손자인 왕자 헤롯 필립은 왕위를 택하기보다는 로마에서 경제인으로 살아간다. 그의 부인 헤로디아는 경제력보다는 왕권에 더 매력을 느끼더니 분봉왕 헤롯과 야간 도주하여 동거한다. 이 연합을 계속 반대하는 세례 (침례) 요한은 옥에 갇힌다. 왕궁의 생활을 버리기 싫은 헤로디아는 딸 살로메를 시켜서 결국 세례 요한을 제거하고 만다 (마태 14:3-12; 마가 6:17-29). 살로메는 후일 어머니의 동서가 되었다가 숙모가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기억하여야 할 것은 유대교의 지도자인 대제사장들은 물론, 학자들이나 불의한 사회를 떠나 공동체를 구성했다는 쿰란 같은 단체들은 이 문제를 거론 조차하지 않고 다만 방관하고 있었지만, 신실한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 세례 (침례) 요한만이 외치다가 순교하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사가랴는 대제사장들이 극도로 부패하던 시절 불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전에 근무하던 제사장이다. 썩어빠진 제사장들이 우글거리는 성전에도 그와 같은 신실한 제사장이 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으나 참신한 무명의 제사장들이 많았다고 추측된다. 부패한 성전에서도 그들의 인도 하에 신앙은 자라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시므온 할아버지와 안나 할머니의 신앙처럼. 그리고 엘리사벳, 요셉, 마리아처럼. 성경은 남은 소수의 신앙인들의 역사다 (참고: 히브리서 11장).



 소수는 부패한 다수에게서 남은 의인들이다.  진리는 남은 소수의 무리와 함께 머무른다. 다수의 무리가 성경을 소유한 적이 없다. 사실 현대성서 연구에 가장 중요한 전제가 바로 이점이다. 구약 편찬사를 살펴보면, 다수는 항상 성경을 거부했고 소수의 의인들이 어떻게 어떻게 말씀의 부스러기를 보존하고 있다가 역경과 고난을 거쳐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아, 그때 아무개 선지자의 말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었구나 하고 깨달은 후 모아 놓은 것이 구약이다 (참고: 마태 23:29-36; 마가 11:45-51). 남은 소수의 의인들이 없었더라면 성경은 분실 당했을 것이고 기독교는 연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진리는 항상 소수에게 남아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다면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 같이 전멸할 뻔했다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1장 9절). 사도 바울은 이사야를 인용하면서 ""남은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로마서 9장 27). 예수는 부르심을 받은 자와 택하심을 받은 자를 구별하면서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여러 경우를 통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진리가 항상 이 조금 남은 의인에 의하여 지속되어 왔다고 해서 놀랄 일은 못된다.

 

 오늘과 같은 불의의 세대에도 참다운 목사들은 많다--엘리야 때도 혼자인줄 알았는데 칠천 명이나 더 있었다.  단지 교회와 사회가 신실한 목사를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보려고 하지 않았으니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들의 이름도, 생김새도, 주소도 그리고 가르침도 다수의 무리는 알 턱이 없다. 그들은 찾아 나서는 자가 없는 세월을 살아간다.



 불의는 볼 줄 알고 의는 보지 못하는 세월을 살아간다. 사회와 교회는 의와 불의를 함께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누군가 말하기를, 역사는 너무 편파적이라고 했던가. 그러니 다수는 진리를 소유할 수없다는 키에르케골의 말은 오늘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불의한 세대를 살아가는 한국은 지금까지 다수의 지도자들을 존경했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였고, 그들을 교회의 모습으로 생각해왔다. 지금 시끄러운 소리는 다만 그 허상이 부서지는 소리일 뿐이다. 우뚝 솟은 나무는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세월이다. 그 작은 청결한 나무들을. . . .



 남은 소수의 의인들은, 이름도 없이 무시를 당하면서, 교회의 참모습으로 살아간다. 교회와 사회가 이들을 볼 수 있기 바란다. 그 때가 오면 비로소 목사들을 비난하는 소리도 줄어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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