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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선생님
 


  brightjohn(2000-11-25 00:00:00, Hit : 8216, Vote : 1582
 바른신앙을 찾는 분들에게


바른 신앙을 찾는 분들께



가정에  한 분 아버지가 계시듯이 나라에도 지도자가 한 분 계십니다. 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우주를 지으시고 인간과 자연을 만드신 한 분 아버지 하나님께서  존재하여 계십니다. 우리 눈으로 뵐 수는 없어도 신앙과 믿음으로 분명히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이나 과학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우주에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지구라는 매우 작은 별 외에도 수 많은 별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들의 수 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제한된 시야 때문에 보이지 않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별들의 수가 엄청나게 더 많이 존재하고 있음을 이미 여러분은 분명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한계성 때문에 볼 수 없다고 해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또한 부인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무지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부정한다 해서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우주에서 존재는 하는데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별들을 부정하는 것처럼 부정이 되겠습니까? 만약에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지함을 드러내게 되는 부끄러운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존재하여 계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 알려고만 한다면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현존하심에 대하여 자연의 이치 속에서도 분명하게 깨달아 알 수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별들은 망원경을 통하거나 첨단장비를 이용하면 볼 수 있고 그 존재의 확실성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성경 말씀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영존 하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사람의 뇌 구조 하나만 가지고도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창조를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 어느 정도까지 과학도들이 규명하고 있습니다마는 컴퓨터로 비유한다면 CPU에 해당되는 회백색의 연한 이물질은 그 초정밀성과 인간의 우수성을 초월한 초첨단 과학의 결정체임을 우리는 분명하게 압니다. 그것은 온 인류가 도달의 목표가 될 과학 발전의 마지막 단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인류의 의학이나 과학의 힘으로도 결코 따를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우월성을 드러낸 하나의 예(例)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람이 어떤 조건에 의하여 진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음을 인간의 뇌 하나만으로도 알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 초 정밀성과 우수성은 인간의 지혜와 시야를 넘어서는 드높은 곳에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증거하고도 남는 것입니다. 자연도 우리 인간도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인류가 이 지구에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로 어느 누가 ""내가 온 우주를 창조하였다. 내가 남자와 여자를 지었다. 내가 영존 하는 하나님이다."" 라고 말씀하신 분이 계셨습니까? 석가모니입니까? 아니면 소크라테스입니까? 동양의 현자 공자입니까?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분들은 모두가 어머니의 훌륭한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스승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 분들은 하나님이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하나님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또한 그 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만이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의 독생하시는 아드님 예수께서 유한한 이세상에 오시고 나서 비로서 온 인류의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참 아버지 되심을 역사속에서 아무도 말 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석가나 소크라테스나 공자도 하나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만약 알았다면 그 분들이 먼저 이 진리를 여러분에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들을 존경할 수는 있어도 신앙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분들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는 사상을 남겼습니다. 그 분들에게는 인간의 도리와 종교가 있습니다. 이 도리와 종교는 인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들을 추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하여도 하나님의 차원을 넘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것과는 절대로 다른 보이지 않는 우주적 차원보다도 드높은 그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상이나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인간의 사상이나 종교를 두고 비교하는 것 또한 어불성설, 있어서도 안되고 용납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전하기 위하여 먼저 여러분들이 가장 존경해 마지 않는 공자의 교훈중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사람의 모든 행실 중에서 으뜸은 효이다.(百行之本 孝之爲上)."" 라고 제자의 질문에 답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인류의 바른 도리를 인도하던 스승으로서의 훌륭한 면모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인간 차원의 효를 말한 것입니다. 육안으로 곁에서 모시고 보는 효의 대상인 부모에게 마땅히 할 바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더구나 장인(匠人)의 손으로 만든 석상(石像)이나 목상(木像), 그려붙인  화상(畵像)의 저 차원적 섬김의 대상은 결코 아닙니다. 우주를 만드시고 인간을 지으신, 참으로 인간의 차원을 초월하시는 영원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자신을 낳아 길러주신 부모님을 모른체 하거나 박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자가 있다면 패륜아로 매도하시겠지요?  공자의 사상에는 부모를 배반하거나 배척해서는 안 되는 인륜이 있습니다. 신앙 인에게는 이 인륜의 차원을 넘어서는 천륜이 있습니다. 이 천륜을 다하여 섬겨야할 참 아버지 하나님을 유감스럽게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분께 바칠 참 효는 더더구나 말 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거의 패륜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인류의 죄이고 불행인가 합니다. 왜 거의가 패륜아들이 되었습니까? 왜 모두가 불효자 죄인들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문명과 교양이 절정에 달한 현대인들에게 무지가 왠 말이냐 하시겠지요? 그것은 하나님도 모르고 자기의 아버님으로 받들어 섬기지 않아서입니다. 지혜, 지식, 진리(眞理)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두 하나님을 아는데서 시작합니다. 이것은 근본(根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나의 참 아버지 되심을 알았을 때 진정한 섬김과 천륜의 효가 무엇인지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부모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효를 다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아름다운 의리와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보다 차원을 높혀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섬김의 자세와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인류의 마땅한 본분인 것입니다. 이 본분을 깨닫고저 한다면 여러분은 심사숙고하여 성경을 정독하십시오. 참 진리는 하나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이 진리가 성경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기록이며 또한 부활이 있습니다. 영원히 사는 길의 안내가 담겨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우리 앞에 먼저 본을 보이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드님 예수십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전하시는 진리이기 때문에 읽어야하고 이 진리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이 성경 말씀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고 나면 인간됨을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참 효를 실천한다면 이 보다 보람있고 뜻있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천륜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면 여러분의 스승이셨던 공자가 가르쳐준 인륜의 짐은 한결 가벼워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성공(成功)하기를 원합니다만 성경 말씀속에 진실된 성공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읽기를 꾸준하게 일생동안 계속하시다 보면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는 하늘 사닥다리인 것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도 깨닫게 되고 참 기쁨을 얻습니다. 오염된 기독교인들과 함께 하지 마시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 가는데 힘써야 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목자라는 사람들은 품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 즉 노예들에 불과하여 배울 것이 없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난 후에 회개와 거듭남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아들이 되면 노예들과 같이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더구나 애석하게도 초대(初代)교회인 서머나와 필라델피아와 같은 교회가 이 시대에는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지금과 같이 규격화되지도 않고 신앙의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다고 합니다. 예배와 신앙 생활이 그 당시와 너무도 판이하게 달라져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 당시 라암셋을 떠난 250만~300만 이라는 많은 유대 백성들이 노예의 성품을 버리지 못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인이 되지 못하였기에 가나안 도달에 모두가 실패하고 광야에서 다 죽어갔습니다. 극소수인 두 사람이 최종 목적지 도달에 성공한 예(例)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음을 교훈으로 명심해야겠습니다. 이 애굽(이집트)의 라암셋은 진리로 거듭나기 전 온 인류를 지배하는 세속적인 것 속에서 즉 보이지 않은 영의 세계에서 생의 무거운 질고를 짐 지우고 억누르고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배반의 영(靈)의 세력들에게 억메인 고달픈 현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진리로 거듭난 아들딸들은 자유인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태어난 그들의 자녀들이 또한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는 상징성이 크고 중요한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던 고아와 노예같이 살던 생활에서 예수님의 은혜로 잃었던 참 아버지를 찾게 되는 것이라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고달픈 죄에 예속된 노예와 같은 삶의 질고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인이 되는 것은 물론 진실된 의미에서의 성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아들의 자세입니다. 능동적이라 함은 예수님처럼 아버님께 자진하여 기쁨으로 순종하는 아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바른 신앙을 찾는 분들이라면 초대 교회 선배들의 정신을 살펴서 혼자가 되어도 좋고 아니면 바른 신앙을 추구하는 몇 사람이 성경을 연구하는 모임을 갖는 것도 현명할 것입니다. 신앙의 그릇된 아집이나 비 진리 혹은 제도적 형식과 편견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작은 모임을 통하여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 정보 교환으로 성경 지식과 지혜를 공유하여 신앙의 수준을 높이기에 힘써야 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믿음안에서 형제 자매로서 보살핌과 뜨거운 우애(友愛)를 나누어야 겠지요. 순수 신앙을 지키고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폭넓은 교양에도 힘써야 합니다. 성경의 바른 뜻에서 어긋나거나 거짓된 것이라면 수억의 인구가 인정하고 따른다 해도 돌아설 수 있는 각오와 고독한 결단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또 그렇게 혼자가 된다 해도 하나님 아버지를 받들어 섬기니 마음은 든든할 뿐입니다. 더욱이 주의해야 할 것은 사람마다 시험이 없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아무런 시험이 없이 평안하다는 것은 현재 자신의 신앙 생활의 상태를 점검해야 할 때 일 것입니다. 우리들이 시험에 들어 넘어졌을 때 곁에서 바른 길을 깨우쳐 주고 좌절하지 않도록 격려도 하고 따뜻한 훈계로서 빨리 일어설 수 있도록 서로 도와 주는 신앙의 동지가 필요합니다. 인생은 짧다고들 하지만 마음의 행로는 멀지도 모릅니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의 (애굽=죄 아래 매인 노예적인 삶) 라암셋을 탈출하여 광야로 나섰지만 장미 빛 미래가 아니라 수많은 장애와 시련이 기다리는 전쟁터였듯이 우리들 인생 길에도 마찬가지로 참 가나안에 이를 때까지 고난의 천로역정으로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신앙 동지의 모임이 필요합니다. 모임에는 성경을 몇 소절만 읽는 습관들이 유행인데 참 좋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성경의 70권 중에서 한 권을 택하여 전체를 다 읽어야겠습니다. 성경 말씀은 한 권씩 읽어 가는 중에 성령의 감동과 은혜를 받게 되는 특별한 책입니다. 모임에서는 찬송도 중요합니다. 찬송은 한 번만 드리더라도 진정한, 제대로 된 마음에서부터 아버님께 대한 감사와 감동이 우러나서 하는 찬송이어야 합니다. 경건하고 엄숙하여야 하고 절대로 세속적 교인들처럼 의식적(意識的)으로나 습관적으로 불러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찬송을 드리나 마나한 것입니다. 이들은 믿음의 출발은 되었으나 확실하게 방향을 잡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서성이며 전진하지 못하는 이들이며 성장을 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신앙인들 이라 보기에 안타깝고 애석할 따름입니다. 찬송을 드릴  때는 태도 즉 자세부터 성실해야 합니다. 섰을 때에는 차렷 자세에 가까운 부동의 자세이고 앉았다가 찬송을 드릴 경우에는 발을 가지런히 모아 두무릎을 꿇어 상체를 똑바로 세우고 찬송책을 소지했으면 두 손으로 감싸쥐고 곡조있는 노래로 기도를 드린다는 태도가 되어야겠지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나라의 최고 지도자에게 초대되어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를 위한 찬가를 부르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어떤 태도로 부르겠습니까? 그 자리에 초대 된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여기실 여러분들이 그 지도자를 지으신 하나님을 찬송함에 있어 소홀함이 없어야 함은 물론 얼마나 치밀하게 마음의 태도와 준비 자세가 바르게 되어야 하는 가를 미루어 짐작하시기 바라겠습니다. 기도에 대해서도 말씀드릴 것은 아버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과 현재나 미래 과거까지 다 아시고 계십니다. 굳이 허식을 부려서 자기의 언변 재주를 사람들에게 과시하려는 듯 목소리를 과장하거나 본론과 결론을 정하여 웅변이나 하듯이 다중의 대표가 되어 온갖 미사려구를 넣어 장황한 의례적인 그런 기도를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아무도 넘보지 못하는 마음속으로 기도하시고 깊은 감사와 절대의 존경심과 우러러 섬기고자 하는 효심으로 간곡하게 여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육성으로 기도 드릴 때에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에서 은밀한 가운데 홀로 꾸밈없이 경건하고 겸손한 태도로 두 무릎을 꿇고 옛날 신하가 왕에게 하는 것보다도 더 공손함으로 최대의 경의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됨을 감사함이 우러나는 가운데 ""아버지"" 한마디만 여쭈어도 기도드리는 우리의 심중이 하나님께 상달이 되고도 남습니다. 아무 말씀 드리지 못하고 울기만 한다 해도 아버님께서는 우리들의 심중을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옛날에 왕의 아들과 딸 즉 왕자와 공주들도 아버지 왕에게 최대의 존칭으로 ""아바마마께 아뢰옵니다.""라고 존경과 예법을 다하였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된 여러분들의 신분 차원을 이들에 비할바 이겠습니까? 신분이 바뀌면 그에 맞는 처신을 할 줄 알아야 겠지요. 오래전 이스라엘의 올리브산에서 기도의 본을 보이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십니다. 친아버님이신 하나님께 최선과 성심을 다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라는 곳에서 기도하는 사람마다 하나님께 <당신>이라고 호칭합니다. 참으로 분한 일입니다. 저희 아버님이 아니기에 함부로 호칭해서 하나님의 절대 권위를 인격화하여 격하 하는 오만불손함에 답답하여 말을 잊습니다. 세상을 주목하지 마시고 부디 모든 면에서 우리들에게 앞서 본을 보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따르기를 열심을 내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신앙과 믿음이 희미해져가고 빛이 되고 소금이 될 만한 사람들을 찾아 만나 보기가 참으로 어렵게 변해가고 있다 합니다. 우리들이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하여 열심을 내어야 하겠고 넘어져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치밀하고 항상 조심하는 마음 자세로 삽시다. 어두워져 가는 이 시대에 어려움에 처한 믿음 안의 형제 자매를 외면하지 말고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와야 하겠습니다마는 가난과 궁핍 속에서도 감사와 기도, 찬송을 드리는 긍정적인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말씀과 믿음으로 거듭난 아들과 딸들은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했습니다. 자유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제 아버님 계시는 본향 영원한 새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의 노예가 아니라 영광스럽게도 하나님의 딸이 되고 아들들이 된 것입니다. 이 기쁨을 표현할 방법은 지난날에 대한 참회와 감사와 찬송, 기도뿐일 것입니다. 아들과 딸들은 노예가 아니므로 종살이에 머물러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저와 여러분들은 또 다른 출애굽 당시의 라암셋을 출발하던 상징적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노예적 근성을 분연히 떨쳐 버리고 광야로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떠나야 합니다. 아버님 계시는 영원한 본향으로 귀향해 가야 합니다. 천로역정은 출발도 중요하지만 중단 없는 꾸준함이 더 중요합니다. 지난날은 죄 아래 매어 번민하며 두려워해야 하던 노예의 삶 이였기에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아들은 자유인이므로 감사함뿐입니다. 찬송과 기도뿐입니다. 믿음으로 된 하늘 나라의 왕자와 공주들에게는 아무도 대적이 되지 못합니다. 승리의 전쟁터로 두려움 없이 나서야 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경멸하거나 사람들에게 교만해서야 되겠습니까? 겸손히 낮아져서 너그럽게 대하고 믿음이 부족하거나 진리의 말씀으로 자라지 못한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며 지난날의 자신을 돌이켜 생각하고 도와주려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하루 빨리 노예적 근성을 버리고 독립적인 신앙을 확립해 가도록 도와 주어야하겠습니다. 광야에서 노예적 근성을 버리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직접 여쭐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노예의 근성을 탈피하지 못했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하고 두려워서 모든 것을 모세에게 의존했고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제사나 드리고 모세를 통하여 내리시는 율법을 받아 실행해야만 하는 가련함이 있었듯이 오늘날에도 그와 유사하게 독립적으로 홀로 서기를 하지 못하고 목사나 어긋난 종교 지도자를 의지하는 가련한 노예적 신앙인들이 대부분임을 잘 압니다. 그들은 다만 종교인들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그러한 그들을 따르는 노예적 신앙의 결말이 무엇이겠습니까? 광야에서 다 쓰러져간 이스라엘인들의 실패의 모형으로서 인류사를 통하여 수 없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간 사막에 흔히 있는 신기루 현상을 쫓아가는 것같이 허무하고 어리석은 일이 되겠지요? 이런 허망한 것을 따르지 않는 현명함은 성경을 정독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 바르게 이해하여 예수님의 은혜 속에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보는 참 진리로 거듭나야만 되는 것입니다.

걸어서 7일이면 도달이 충분한 거리를, 광야길 40년의 고달픔 속에서 300만이나 되는 실패자들이 죽어가는 속에서 새로 태어난 자녀들 즉 노예 근성이 전혀 없는 아들 딸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에 대하여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방언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사도들이 베드로와 더불어 성령이 충만하여 자기들의 출신지 이스라엘의 북쪽지방 갈릴리 말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를 증언할 때 각 국에 흩어져 살다가 귀국한 수 많은 유대인들이 각자 자기가 살던 나라의 말로 이 증언을 들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참 방언의 모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부터 간혹 방언을 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갑자기 비정상적으로 몸의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넘어지기도 하며 눈동자가 돌아가고 입에서는 거품을 흘리면서 알아들을 수도 없는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 방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건강 상태가 나빠지고 기운이 쇠하여 심신이 지친 상태이거나 무리해서 그렇게 되는 원인일 수도 있는 그러한 현상을 방언이라고 정의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 예를 들자면 어느 할아버지께서 100세의 생신 잔치를 배설하였습니다. 수많은 손님들이 오시고 많은 후손들이 기뻐하는 가운데 노인 어른께 생신 축하 인사를 드릴 때 갑자기 한 손자가 뒤틀린 가련한 모습으로 더구나 괴성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인사를 드린다면 받으시는 어른의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제 나라 말로 공손하게 인사를 드려도 충분하게 의사 전달이 되고도 남습니다. 이와 같이 굳이 알아듣지도 못할 말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헌금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헌금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사도 행전 11장27~30절에 흉년과 기근으로 어려움에 처한 유대에 사는 가난한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사도들이 헌금을 내어 먼저 본을 보였습니다. (물론 구약 때도 성전 보수비로 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헌금함을 성전에 두어 용도가 있을 때마다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다릅니다.) 헌금은 믿음이 충만한 분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의 귀한 뜻을 결코 저버리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단체나 임원은 물론 목사나 장로는 물론 총회장도, 특정 지위의 개인도 이 헌금을 함부로 유용할 수 없습니다. 바친 그 뜻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갸륵하시겠습니까? 그래서 더욱 헌금은 그 뜻에 맞게 반드시 쓰여져야 하겠지요? 오늘날의 교회 재정 집행에 관해서도 사도행전 20장26~35절에서와 같이 사도 바울 선생님의 모범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삯군 목자는 성도들이 낸 헌금에서 넘치는 생활비와 보수, 많은 명목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고비용 저효율의 비능률적 피고용인들의 전형적 모델들을 대도시 큰 교회들은 물론 수많은 교회들에서도 봅니다. 거의 전 세계적 추세인가 합니다. 일한 것 보다 더 받는 파렴치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목회자가 바울 선생님이나 사도들 보다 참 목회와 선교에 더 많이 애쓰고 일한 분들이 있었습니까? 그들 종교 지도자들의 보수와 대우가 사도들을 월등히 능가하면서도 20세기가 저물어 가는 지금까지 종교인 사회가 달라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굳이 달라진 것이 있다면 주님의 뜻과는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이래서도 우리는 종교인이 아니므로 여기에 가담하거나 동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도들이 신도들의 헌금이나 물품을 받아 자신은 물론 가족들을 위하여 한 푼이라도 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또한 그분들이 일한 대가를 받은 것이 있습니까? 왜 사도들이 목숨까지 바쳐 일을 많이 하고도 대가를 받지 않았을 까요?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집 일을 하고 임금을 요구하는 아들을 보셨습니까? 임금 즉 대가를 받고 일하는 자는 노예인 것입니다. 대가를 받은 자들은 추후에 또 다른 것을 바라지도 말아야 하고 다시 또 요구하는 것은 한가지 일한 것에 대한 보수를 두 번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큰 교회나 작은 교회의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일반 교회는 대가를 받는 노예들이 일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아버님의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약 이들이 아들이라고 주장한다면 제 집안 일을 하고 보수는 엉뚱한 곳에서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을 염려하신 바울 선생님이 ""주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시는 말씀을 내게 하셨다"" 하면서 이 일에 내가 먼저 본을 보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선교와 여행 경비 일체를 자신의 직업을 가지고 손수 일하여 얻은 대가로 쓰고 또 구제 헌금까지 먼저 냈습니다. 대가를 받고 일하는 노예와 같은 이들에게 속한 이 시대의 그런 신앙 생활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다만 새 가나안의 노정에서 마저 실패의 쓰라린 반복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 외에도 살펴 볼 것이 많으나 일일이 열거를 생략합니다. 다만 여러분들의 신앙이 성장되어 믿음의 혜안(慧眼)으로 신중하게 잘 살피시고 헤아려 삼가 조심하기를 바라겠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너희는 좁은 길을 통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시고 우리의 영원한 최종 목적지 참 가나안에서 기쁨으로 아버지 하나님을 뵙게 되기를 힘씁시다. 그리고 먼저 이 귀한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신 여러분들이 각자의 가정을 복음화 하시고 온 가족이 하나님께 예배와 찬송을 드리는 가정교회를 완성하시어 참 행복한 가정 이루어 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1998년 11월 3일 저녁에 Choun Young Soo

Telephone (02)889-8098

957-22. Pong Chon-dong. Kwan Ak-ku Seoul. 151-069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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